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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빗소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자신을 높여 가면 되는 것!
  • 41
  • 태양을품은달°˚(@g168906100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8 14:31


    독립운동가 김홍일 선생(1898.9.23~1980.8.8) 서거

    러시아와 만주를 넘나들며 독립군을 이끌다.



    오산학교 졸업 후 독립운동 위해 상해로 망명한후 독립군에 합류, 병사들을 이끌고 시베리아행을 감행하였다.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필요한 탄약을 제공했고 중국인 상차도와 함께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에 사용된 폭탄을 직접 제조하였다. 훗날 김구 주석의 요청으로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취임했다. 1945년 6월 1일 광복군 참모장에 부임한 뒤, 선생은 김구 주석과 지청천사령관을 도와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진행되던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에 힘을 쏟았다. 이는 미국전략정보국의 지원 아래 광복군 요원을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국내에 투입시켜 적정을 탐지하고 공작 거점을 확보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 계획은 광복군 요원들이 OSS 교육훈련을 마치고 국내 침투를 기다리던 중 일제가 항복함에 따라 실현되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 선생은 다시 중국군에 복귀하게 되었다. 선생은 1945년 11월 동북보안사령부 고급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에 취임하여 재만 한인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면서 귀국 편의를 도모하는데 앞장섰다. 1948년 8월 귀국한 뒤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선생은 육군사관학교와 육군참모학교 교장,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육군 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고 1951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 후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 신민당 당수 등으로 활약하면서 조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에도 기여하다가 1980년 8월 8일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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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7 11:56






    산화하신 고운 님들의 아이들은 어디 있나?
    - 권영심 작가 -

    목숨은 누구에게나 하나뿐이다.
    그 하나 뿐인 목숨을 일 점의 후회없이 대의 , 조국 광복을 위해 던진 독립의 투사,의사,열사들의 은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아야 한다. 목숨의 값을 무엇으로 치룰 수 있을까?

    남은 가족들은 그 목숨의 값을 나라로부터 받았을까?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의 삶은 참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들의 후손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윤봉길 의사의 후손은 누구며 어찌 되었는지 알아 본다.

    윤봉길의사는 15세 때 배용순여사와 혼인해서 종과 담의 형제를 낳았다. 그러나 의거 후 둘째인 담은,겨우 두 살에 영양실조로 죽고 장남 종만 살아서 광복 후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
    농수산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1984 년 간경화로 하늘로 돌아갔다.

    윤의사 의거 50주년이 되던 해, 배용순 여사에게 국민훈장 목련장이 주어졌고 이후 윤봉길 기념 사업회는 '배용순효부상' 을 제정하여 의거일인 4월 29일에 충의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배용순 여사는 1988년 타계했고 그 장례는 사회장으로 성대하고 위엄있게 치루어졌다. 그나마 정부의 기본 도리는 했다고 본다.

    윤의사의 며느리는 단 하나. 김옥남 여사이다. 아들 하나와 딸 여섯을 낳아 병약한 남편과 함께 가정을 이루었다. 공무원의 능력이 오죽했을까? 생활이 너무나 곤궁했다.

    백범 김구선생의 아들인 김신씨가 교통부 장관 재직 시절, 딱한 사정을 전해 듣고 김포공항 한 쪽에 작은 스넥 가게를 내어 가세를 돕도록 주선해 주었다.

    윤의사의 여섯 명의 손녀들은 잘 자라서 모두 결혼, 가정을 이루 었고 유일한 손자 주웅씨는 고려대 기계 공학과를 졸업해서 1997년 결혼했다. 아들 한 명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윤의사와 배여사 사이에 안순이란 따님이 있었으나 아마 어려서 사망한듯 하다.

    다행히도 윤봉길의사의 가족은 이 대한민국의 품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그저 감사함으로 가슴을 쓸어 내린다. 매헌 장학재단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기념사업회도 가족끼리의 어떤 분란도 없이 잘 꾸려지고 있으니 이 또한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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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7 11:41








    차례순으로
    1.흰색물무궁화.
    2.3. 꼬불이호야
    4.베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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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3 11:29


    독립운동가 박태규 선생 서거
    (1897. 4. 8 ~ 1948. 8. 3)


    선생은 경남 통영 사람으로서 1928년 경상남도 평의원인 김기정(金淇正)이 도평의회 석상에서 매국적 발언을 하자 이에 분개하여 시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애국활동을 행하다 옥고를 치루셨다.

    경남 도평의원인 김기정은 1926년 및 1927년의 각도 평의원회 석상에서 한국인 교육의 폐지와 우리말 통역의 철폐를 주장하는 매국적 발언을 한 바 있었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김원석(金元錫)은 1927년 3월 매족상습범(賣族常習犯) 김기정을 징토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의 선전전단 500매를 인쇄하여 경남 통영읍(統營邑)의 주민들에게 배포하였다.
    이어 박봉삼(朴奉杉), 박태근(朴泰根) 등은 매국발언의 진상을 조사한 후 3월 25일 조사보고회를 열어 김기정의 좌상을 성토, 징계하는 시민대회의 개최를 결의하였다.

    이때 박태규 선생은 집행위원 선정을 위한 전형위원(銓衡委員)에 선정되었다. 선생과 동지들은 시민대회의 개최를 준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고 이 일로 인하여 1년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28년 5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고 광복 3년후 서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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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3 11:26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1885.8.4~1943.8.3) 서거

    백산상회부터 발해농장까지
    독립운동 거점의 설립자

    1905년 11월 18일 이 체결되었을때 우리나라의 국망은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였습니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우리의 자주적인 외교권한과 통치권한을 장악하였고 결국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조국이 이같이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선생은 새로운 학문을 익힐 뜻을 집안 어른들에게 밝혔습니다.

    “국가가 망해 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고서(古書)를 읽고 실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경성으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하여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가위 공맹(孔孟)의 도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산림간(山林間)에 숨어서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

    선생은 서울에서 신학문을 습득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그를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선생의 신념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매우 유사합니다. 선생은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고,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청소년 교육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의 업적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두드러지는 것이, 첫쨰. 본인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빈곤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해주었고, 둘째. 방학 기간동안 순회강연을 통해 계몽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의식의 고취에 노력을 다했으며, 셋째. 잡지 발행을 통해 사립학교 설립에 필요한 교육재원의 확보에도 힘썼다는 점입니다. 결국 선생은 구명학교, 의신학교, 창남학교 3개를 연이어 설립하였고 민족교육과 민중 계몽운동을 실시함으로써 국권회복운동의 역량을 육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영향력있는 독립운동 지도자중 한명으로 성장해온 선생은 결국 대동청년당을 결성하게됩니다. 7세부터 30세 미만의 청년들로 조직한 '대동청년당', 대동청년당은 2가지를 기억하면 됩니다. 첫째로 '신민회' 와 함께 항일 민족의식을 모으고 비밀 작전등을 수행, 둘째로 8.15 해방 때까지도 그 실체가 발각되지 않은 비밀결사 조직. 선생은 창립멤버이자 대동청년당의 2대 단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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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1 09:50




    독립운동가 박승환 선생(1869.9.7~1907.8.1) 서거

    대한제국군 강제해산명령에 순국으로 응답한 장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선생의 유서 중에서

    조국을 위한 뜻을 품고 무관학교 입학후
    고종황제의 최정예 근위부대에서 근무, 국가 보위와 황실 보호 임무를 수행했다. 훗날, 대한제국군 강제해산에 반발, 순국자결로 무장투쟁에 불을 지피다 생을 마감했다.

    선생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를 남기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선생이 단행한 이와 같은 살신성인의 길은 죽음으로써 부하 장병들의 반일 무장투쟁을 명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선생의 순국 사실을 전해 들은 휘하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일제히 대대장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고 봉기하여 반일 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웃에 위치한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도 이에 호응, 봉기하여 일본군과 남대문에서 치열한 총격전과 백병전을 전개함으로써 대한제국 군대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선생의 순국으로 폭발된 중앙 시위대의 봉기는 곧 이어 지방 진위대로 파급되어 원주 진위대, 수원 진위대 산하의 강화 분견대 장병들의 봉기와 반일 무장투쟁을 촉발하였다. 따라서 선생의 순국은 해산 군인들이 반일 의병운동에 투신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적 대중운동으로 확산시켜 간 기폭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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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1 09:28






    윤희순 선생(1860~1935) 서거 –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

    윤희순 선생은 1860년 경기 구리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강원 춘천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시아버지는 춘천 지역 의병장 유홍석 선생이었다. 20년 뒤 36세에 첫 아들을 얻었으나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아버지가 집안을 잘 지켜달라며 본인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려는 윤희순 선생을 말렸으나 경기, 강원, 충청 등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자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어린 아들을 친척집에 맡긴 뒤 의병에 뛰어든다. 당시는 1896년 도이다. 정말이자 깨어있던 신 여성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광무제국(조선)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다시한번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때 윤희순 선생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고 1908년까지 강원도 춘성군 가정리 여우천 골짜기에서 30여명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의병대를 조직하고 탄약제조소를 운영하여 의병대원들에게 화약을 공급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무장투쟁활동에 앞장섰다.
    또한 ‘안사람 의병가’ , ‘병적의 노래’ ,‘경고한다 오랑캐들에게’ , ‘병정가’ , ‘왜놈앞잡이들아’, ‘애달픈노래’ , ‘금수들아 받아보거라’, ‘왜놈대장보거라’ ‘의병군가’ ‘방어’ ‘병정노래’ 등 총 12편의 의병가를 직접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드높이는데 재능을 발휘했다.

    안사람 의병가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 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얼 할까 의병들을 도와주세

    내 집 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지 하여 보세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 찾기 운동이요

    왜놈들을 잡는 것이니

    의복 버선 손질하여 만져 주세

    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게 만져 주세

    우리 조선 아낙네들도 나라 없이 어이 살며

    힘을 모아 도와주세 만세 만세 만만세요

    우리 의병 만세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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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7-31 09:09






    독립운동가 송헌주 선생 서거
    (1880.10.22 ~ 1965.7.31)


    '헤이그특사 3인방' 만 기억되서는 안된다. 그들에겐 숨은 조력자 송헌주 선생이있었다.

    우리가 할 일을 아니하고 남의 힘으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

    송헌주 선생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이다. 처음 독립운동가 잊혀진 영웅들을 작업할때 안중근만 기억되서는 안된다. 이토 히로부미 척살에 숨은 조력자 유동하 선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변에 말했었는데 송헌주 선생은 거의 같은 논리로 헤이그특사 3인방의 숨은 조력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선생은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지금까지 미주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안창호 선생과 박용만 선생에게 국한되었었다. 특히 이런분들을 국민들이 기억해주길 바라며 잘 읽어주기를 바란다.

    1907년 고종황제는 송헌주 선생에게 특명을 내린다. 내용은 헤이그 특사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보낼테니 그들을 안내하고 도우라는 말이었다. 선생은 즉시 임무를 수행했고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특사로 참여한뒤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임무를 이루지 못한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통역관으로서 역량을 키우기위해 미국으로 향한뒤 로녹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1919년 3월 선생에게 들려온 조국의 목소리.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3.1운동의 시작이었다.

    뒤이어 이어진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선생은 3.1운동이 미주에 알려지자마자 하와이 한인들을 규합해 '독립금' 자금마련에 매진하였고 1919년 4월부터 6월까지, 2달간 5만달러 약정, 현금 3만5천달러를 모아 전액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지원하였다. 193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미주 한인단체의 통합을 위해 헌신하였다. 당시 선생이 한 말이다. "미주 한인 전체의 역량을 집중하여 임시정부를 후원하며 국민선전에 노력한다" 1941년 선생은 캘리포니아 주 민병대 소속 한인국방경위대 정위가 되었다.

    지식인에서 장교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쩌면 선생은 장교로서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직접적인 투쟁의 기회를 모색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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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7-30 08:38






    독립운동가 엄항섭 선생(1898.10.15~1962.7.30) 서거

    위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킨 강력한 실천력

    일제가 김구 주석에게 내건 현상금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일제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한국인들도 자칫 현상금에 눈이 어두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엄항섭 선생을 비롯한 최측근뿐이었다. 엄항섭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그리고 주석 판공실 비서로도 활약하고 있었지만,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실무적인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나, 임시정부를 위한 일에 선생이 관계되지 않은 일들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임시정부는 위기 때마다 선생의 실천력으로 고비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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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7-29 21:30


    독립운동가 고수복 선생 서거
    (1911 ~ 1933.7.28)

    1931년 즈음, 일제는 조선에 인쇄소, 고무공장, 방직공장 등을 지어 대규모로 조선의 남녀 직공을 모집했습니다. 이것은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정책이였고, 자연스레 일제의 이러한 노동력 착취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전국 각지에서 생겨났어요. 바로 노동조합의 탄생입니다.

    1931년은 고수복 선생이 20살이 되던 해였어요. 선생께서는 같은 해 9월에 종방방직회사 경성제사공장 직공으로 입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1930년대의 시대상황을 조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요.

    당시에는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에 따른 공업화와 노동계급의 양적 성장을 바탕으로한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였어요. 그리고 이러한 노동운동은 오늘날과 같은 노조의 느낌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 나아가 민족운동으로 확대 되었습니다.

    고수복 선생은 1932년 3월 정길성, 김응룡 선생과 함께 좌익노동조합준비위원회를 결성 하였고, 같은 해 9월에 위원회 선전부 책임자로 활동한 것이 문제가 되어 동대문경찰서에 수감 되었습니다.

    1933년 7월 경 선생은 몸 상태가 너무 안좋아져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됩니다. 출옥 후 연건동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1933년 7월 28일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당시 선생의 나이 23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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