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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의향기 (@ mecalica)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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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향기 (@mecalica)
    8일전


    모짜르트 레퀴엠 d단조
    Requiem in d minor K.626

    모차르트는 인트로이투스와 키리에, 세쿠엔티아, 오퍼토리움까지 작곡했으나, 그마저도 모두 완성한 것이 아니라, 노래 성부와 베이스, 그리고 관현악의 주요 음형만을 악보로 남겼으며, 유명한 ‘라크리모사’의 여덟 번째 마디에서 작곡은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이 작품은 1793년 1월 2일에 자선공연에서 연주되었으며, 이 곡을 청탁했던 발제크 백작은 그해 12월 14일에 이 곡을 지휘했다. 발제크 백작은 작곡자가 불분명한 이 곡을 자신이 썼다고 주장했다.

    Ⅰ. 인트로이투스(Introitus)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는 인트로이투스는 레퀴엠의 장엄한 분위기를 암시하며, 특징적으로 사용된 단2도 음형이 이후 악상에서도 중요하게 전개된다.

    Ⅱ. 키리에(Kyrie eleison)
    2중 푸가로 시작되는 키리에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가사에 붙여진 장대한 음악이다.

    Ⅲ. 세쿠엔치아(Sequentia)
    (1) 진노의 날(Dies irae)

    “이 날이야말로 진노의 날이여, 다비드와 시빌이 예언한 대로 세상은 재로 화할 것이요. 사람들의 두려움은 어떠할 것인가. 심판의 날이 다가올 때” 두려움 속에 전개되는 진노의 날에는 끊임없는 긴장감이 이어진다.

    (2) 놀라운 나팔소리(Tuba mirum)

    “놀라운 나팔소리가 세상의 모든 무덤 위에 울리며 모든 이를 보좌 앞에 모으리라. 심판 주께 답변하러 모든 피조물이 깨어날 때 죽음이 엄습하고 만물은 진동하리.” 트롬본의 연주로 시작되는 선율에 베이스가 응답하며, 두 파트는 서로 대화하듯 전개된다.

    (3) 전능하신 대왕이시여(Rex tremendae)

    “위엄과 공포의 왕, 대가 없이 우리를 구하시니. 긍휼의 근원이시여, 그때에 우리를 도우소서.” 대왕의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점음표 리듬으로 긴박감을 전한다.

    (4) 헤아려 주소서(Recordare)

    “거룩하신 예수여 기억하소서. 최후의 심판 날에 죄를 용서하소서.” 차분하게 시작된 이 곡은 레퀴엠 주제가 장조로 전개되면서도, 현악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긴 악곡이다.

    (5) 심판으로 저주받은 자는(Confutatis)

    “사악한 자들을 깨워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심판하실 때 나를 부르사, 주의 성자들로 둘러싸소서.” 격정적인 남성 합창과 구원을 비는 여성 합창의 대조가 돋보인다.

    (6) 눈물의 날(Lacrimosa)

    “아! 비탄의 날이여. 죄로부터 일어날 때 인간의 죄는 심판을 받고 거룩한 예수여 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전체 악곡 중에 가장 애절하며 서정적인 이 부분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창작력이 돋보이는 악곡이다. 모차르트는 8마디에서 작곡을 중단했으며, 이후 제자 쥐스마이어가 나머지를 완성했다.

    Ⅳ. 오퍼토리움(Offertorium)
    (1) 주 예수 그리스도여(Domine Jesu)

    모차르트는 눈물의 날(Lacrimosa)에서 작곡을 중단했던 악상을 오퍼토리움에서 이어나갔다. “영광의 왕, 주 예수, 그리스도. 죽은 모든 신자들의 영혼을 지옥의 형벌과 깊은 구렁에서 구원하소서” 전체 합창이 같은 선율을 노래하는 이 부분은 어둠 속에서 구원하여 거룩한 빛의 세계로 이끌어달라는 가사를 묘사하고 있다.

    (2) 제물과 봉헌(Hostias)

    “주여, 찬양과 기도의 제물을 드리니. 오늘 우리가 추도하는 영혼들을 위해 받아주소서” 편안하고 단순한 느낌의 악상이 전개되는 악곡이다.

    Ⅴ. 상투스(Sanctus)
    이 부분부터 전적으로 쥐스마이어가 혼자 작곡하였다. “거룩, 거룩, 거룩, 만군의 주. 하늘과 땅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하도다. 높은 곳에서 호산나!” 진노의 날(Dies irae)에 사용된 주제가 사용되고 있다.

    Ⅵ. 베네딕투스(Benedictus)
    “주의 이름으로부터 오는 이에게 축복 있을 지어다”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가 1784년에 작곡한 선율을 사용하여 이 곡을 완성했다.

    Ⅶ.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나님의 어린 양, 세상 죄의 짐을 지신 신이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소서.”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안식을 기원하는 경건한 노래이다.

    Ⅷ. 코뮤니오(Communio)
    “주여,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자애로운 주여.” 쥐스마이어는 텍스트의 내용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모차르트가 작곡한 인트로이투스와 키리에의 일부를 사용했다. 느린 템포 속에서 엄숙하게 곡이 끝마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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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향기 (@mecalica)
    2021.05.31.


    장-바티스트 륄리(프랑스어: Jean-Baptiste Lully, 1632년 11월 28일 ~ 1687년 3월 22일)

    일대기
    초기
    륄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방앗간 주인의 아들, 혹은 륄리 스스로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만약 후자라면 그의 이름인 Lulli 또는 Lully 앞에 귀족을 명칭하는 di나 de가 앞에 붙어야 한다).

    륄리는 음악이나 다른 과목에서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기타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1646년, 륄리는 기즈 대공의 눈에 띄어 프랑스로 따라가게 되고, 거기서 식기실의 일꾼으로 몽팡시에 부인(루이 13세의 동생, 루이 14세의 사촌누이)을 위해 일하게 된다. 이점에 대해 논란이 있으나, 사실 륄리는 부인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도록 고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몽팡시에 부인의 도움으로 륄리의 음악적 재능이 개화된다. 륄리는 음악 이론을 니콜라스 메투르 밑에서 배운다. 그러나 륄리가 지은 후원자에 관한 천박한 시로 인해 결국 해고된다.

    루이 14세와의 만남
    1652년 말과 1653년 초, 륄리는 무용수로서 루이 14세에게 고용된다. 그는 Ballet de la Nuit를 위한 음악작품을 몇 편 작곡함으로써 왕을 크게 기쁘게 한다. 륄리는 왕을 위한 기악곡 작곡가로 임명되어 프랑스 궁정 실내 악단을 지휘하게 된다.

    륄리는 루이 14세와 그 자신이 춤을 추던 1650년대와 60년대에 왕을 위한 많은 수의 발레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몰리에르의 희극을 위한 음악 - 《강제 결혼》(1664), 《사랑의 의사》(1665), 《서민귀족》(1670) - 을 작곡하면서 엄청한 성공을 거두었다. 루이 14세는 점차 나이가 들게 들고, 그의 춤실력이 떨어지게 되면서(왕의 마지막 공연은 1670년이었다), 발레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그라들게 되면서, 륄리는 오페라에 종사하게 되었다. 륄리는 장바티스트 콜베르와 왕의 후원으로 피에르 페랭이 오페라에서 누리던 특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새로운 특권은 기본적으로 륄리에게 그가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모든 음악 상연에 관한 통제권을 가져다 주었다.

    사생활
    륄리는 양성애자와 난봉꾼으로 악명 높았다. 1662년 그는 륄리의 친구이자 동료 음악가인 미셀 랭베르의 딸,마델레인 랭베르와 결혼했으며, 아내와의 사이에서 10명의 아이를 낳았다. 륄리는 자신의 지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의 시종인 Brunet과의 관계를 과시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륄리는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그의 소년과 여자들과의 애정 행각은 여러 차례의 추문으로 번졌다. 이는 루이 14세에게 큰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으며, 륄리는‘남색가’라고 불릴 만큼 유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문에도 불구하고, 륄리는 항상 루이 14세의 위엄을 회복하도록 조욜하였다. 왕은 륄리를 자신의 음악적 여흥에 필수적인 사람이고, 그의 몇 안되는 진정한 친구 중 하나로 생각했다. 1681년 륄리는 루이 14세를 위한 궁정 비서로 임명되면서 귀족이 되었다. 그후에 릴리는 자신의 이름인 장바티스트 데 륄리라고 적었고, 그 후로 ‘륄리 경’으로 불리게 되었다.

    죽음
    1687년 1월 8일 륄리는 루이 14세의 최근의 병상에서의 회복을 기념하기 위해서 《테 데움》을 지휘하였다. 륄리는 그 당시의 지휘 방식대로 바닥에 긴 막대기를 내리치면서 박자를 맞추었으나, 발가락을 치게 되어 농양을 야기하였다. 그 다리는 괴저가 생겼고, 륄리는 발가락을 잘라내는 것을 거부함에 따라 병이 퍼지면서, 결국 3월 22일 륄리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륄리는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Achille et Polyxène》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죽음이 가까워진 병상에서 륄리는 “Bisogna morire, peccatore(너는 죽어야 한다, 죄인이여)”라고 적었다.

    음악
    륄리의 음악은 바로크 음악 중기인 1650~1700년에 위치한다. 일반적인 바로크 음악은 힘을 강조하기 위해서 계속저음을 사용한다. 프랑스 중기 바로크는 모든 음악에서 예외적으로 도(C)음 위에 라(A)가 가장 낮은 음높이인 392 Hz(현재로는 통상 440 Hz이다)를 사용한다.

    륄리의 음악은 힘과 빠른 박자안의 생동감, 그리고 슬픔을 나타내는 악장에서는 깊은 감정의 호소로 유명하다. 륄리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춤곡인 파사칼리아와 샤콘느로 《아르미드》와 《플라톤》같이 륄리의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다. Sequier 수상의 장례식을 위해 작곡한 《미제레레(Miserere)》는 뛰어난 작품으로 간주되며, 그의 단조 성가곡 역시 유명하다.

    륄리 음악은 파리 궁정의 춤의 양식에 급진적인 혁명을 가져왔다. 그 당시까지 유행하던 느리고 위풍당당한 박자대신, 륄리는 빠른 리듬의 생동감있는 발레 음악을 소개하였다. 그는 관현악의 작곡에서 중요한 개선에 영향을 주었고, 여러개의 새 음악 악기를 도입하였다. 륄리는 몰리에르와의 협작으로 연극과 코메디, 발레가 결합된 코메디 발레라는 새로운 음악 양식을 만들었다.

    륄리는 프랑스어가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프랑스 서정 비극 (tragédie en musique 혹은 tragédie lyrique)를 창조하였다. Quinault안에서 그와 마음에 맞는 시인과 대본작가를 만나게 되면서, 륄리는 많은 오페라와 기타 작품을 작곡하여, 열광적인 찬사를 얻었다. 륄리는 레치타티브와 아리아를 따로 분리하는 이탈리아 오페라 방법을 버리고, 드라마적인 효과를 위해서 그 두개를 합쳐, 내용에서 동작을 더 빠르게 해서 프랑스 대중의 취향에 더 부합하게 하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륄리는 프랑스 오페라의 설립자라고 평가된다.

    대표 음반 목록
    아마디스, 전주곡과 5막의 서정 비극 Hugo Reyne, La Symphonie du Marais, Accord, 3 CD, 2006
    알테스테, 5막의 서정 비극 Jean-Claude Malgoire, La Grande Écurie et la Chambre du Roi.
    아튀스, 5막의 서정비극, 윌리암 크리스티와 Les Arts Florissants, Harmonia Mundi, 3 CD, 1987.
    아르미드, 5막의 서정 비극 , 필리프 헤레웨허, Harmonia Mundi, 2 CD.
    파에통, 5막의 서정비극 , 마크 민코프스키, Les Musiciens du Louvre, Erato, 2 CD, 1994.
    페르세, 5막의 서정비극 , 크리스토프 루세, Les Talens Lyriques, Naïve, 3 CD, 2001.
    롤랑, 5막의 서정비극 , 크리스토프 루세, Les Talens Lyriques, Naïve, 3 CD.
    이시스, 5막의 서정비극, Hugo Reyne, La Symphonie du Marais, Accord, 3 CD, 2005.
    아시스와 갈라테, 영웅을 읊은 3막의 목가, 마크 민코프스키, Les Musiciens du Louvre, DG, 2 CD, 1996.
    11개의 작은 모테트, 윌리암 크리스티 와 Les Arts Florissants, Harmonia Mundi, 1 CD, 1987.
    테 데움과 Miserere, Jean-François Paillard, Erato, 1 CD, 1976.
    자료 참조
    Scott, R.H.F. Jean-Baptiste Lully. Peter Owen Limited, 1973.
    Rosow, Lois. "Lully, Jean-Baptiste" in The New Grove Dictionary of Opera, ed. Stanley Sadie (London, 1992) ISBN 0-333-73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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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향기 (@mecalica)
    2021.05.31.


    ■장 필립 라모, Jean-Philippe Rameau (1683 - 1764)

    바로크 말기 프랑스의 작곡가.
    국적 : 프랑스
    출생지 : 프랑스 디종
    활동년도 : 1683. 9. 25 (프랑스 디종에서 세례받음) - 1764. 9. 12 (파리)



    오늘날에는 하프시코드 음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생전에는 음악이론가와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라모의 아버지 장은 디종의 여러 교회에서 42년 동안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으며, 아들이 법률가가 되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아들의 참담한 학교 성적으로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17세 때 젊은 미망인과 사랑에 빠졌으나 그녀는 라모의 편지가 문법이 엉망이고 철자법도 실수투성이라고 비웃었다.

    그는 언어 능력을 습득하려고 노력했지만 훗날 그가 쓴 이론에 관한 글들이 여전히 장황하다는 사실로 판단해보건대 그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으려고 결정한 후 18세 때 이탈리아로 갔지만 밀라노 외에는 가보지 못했다.

    이듬해 프랑스 중부 아비뇽·클레르몽·리용·디종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파리에도 잠시 체류했으며, 이미 세련된 하프시코드 모음곡 A단조 〈클라브생 소곡집 Premier livre de pièces de clavecin〉(1706)을 출판한 상태였지만 이 시골뜨기 오르간 연주자를 즉시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이 작품은 라모가 가장 좋아했던 유명한 오르간·하프시코드 연주자 루이 마르샹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715년경 클레르몽으로 되돌아와 즉시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는 계약서에 사인한 후 29년간 그곳에서 일했는데, 그동안

    그는 매우 독창적이고 철저한 방법으로 화성의 기초를 연구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자신과 비교적 가까운 시대 사람이었던 16세기 이탈리아인 조세포 차를리노를 포함한 '옛날 사람들이 화성을 음악의 출발점으로 보지 않고 화성규칙이 선율에 바탕을 두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근거에서 전통적 화성이론을 공격했다.

    자연 배음렬에 바탕을 둔 이론을 연구한 그는 대부분의 20세기 화성학 교과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화성체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의 화성체계는 체계적 실험에 의해서가 아닌 직관적 방식에 의해 얻은 것이었다.

    1722년 〈화성론 Traité de l'harmonie〉을 파리에서 출판한 뒤 명성을 얻었고, 그후 파리로 돌아가기를 꿈꾸었다.

    클레르몽 교회 관계자들은 그가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의 저작에서도 나타나듯이 이러한 방해를 넘어서 그곳을 벗어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완강한 인격과 고집스럽고 외곬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저녁 예배 때 교회 관계자들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오르간의 가장 듣기 싫은 스톱(음전)을 잡아다니고 가장 듣기 싫은 불협화음을 연주하여, "이처럼 듣기 싫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라모뿐일 것"이라는 말이 오갈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동을 거치면서 계약 상태에서 벗어나자 그는 너무나 우아하고 화려하게 힘과 조화를 지닌 연주를 하여 회중의 마음에 자기가 원하는 모든 느낌들을 불러일으켰으며, 따라서 모두가 라모를 잃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다.

    이로써 라모는 파리로 돌아와 새롭고 활동적인 삶을 시작했고 이후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제2하프시코드 곡집 〈손가락 기법을 위한 클라브생 소곡집 Piéces de clavecin avec une méthode pour la mécanique des doigts〉(1724)을 내놓아 1집보다 훨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인기있는 클라브생 선생이 되었다.

    페어 극장의 부수 음악을 쓰는 계약을 맺게 됨으로써 성공적인 극음악 작곡가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1725년 이 극장들 가운데 1곳에서 2명의 루이지애나 인디언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여기서 영감을 받아 라모 최고의 걸작 〈야만인 Les Sauvages〉이 나오게 되었다.

    이 작품은 후에 오페라 발레 〈우아한 인도 Les Indes galantes〉(1735 초연)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듬해 42세의 나이에 19세의 가수와 결혼했다.

    그녀는 이후 라모의 여러 오페라에 출연했으며 4명의 자식을 낳았다.

    당시 라모는 프랑스의 최고 부호이자 최대의 음악후원자였던 르 리셰 드 라 푸플리니에와 알게 되었다.

    그는 라 푸플리니에의 뛰어난 개인 관현악단 감독직을 맡게 되었고, 22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며, 재능있는 라 푸플리니에 부인의 음악교육도 맡았다.

    그런 이유로 라모 일가는 라 푸플리니에의 대저택으로 이사하여 살았고, 여름에는 파시에 있는 성에서 보냈다.

    후원자와 작곡가라는 이상적인 관계는 라 푸플리니에가 아내와 헤어지면서 끝이 났고 마침내 라모 대신 젊고 참신한 작곡가 카를 슈타미츠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라 푸플리니에 가문에서 인정을 받은 덕분으로 여러 저명 문학인들과 알게 되었다.







    1732년 라모는 그 가운데 아베 펠레그랭(라모의 경쟁자 미셸 피놀레 드 몽테클레르의 성공작 〈주피터 Jephté〉의 대본도 썼음)의 대본에 따라 그의 최초의 오페라이자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 Hippolyte et Aricie〉를 작곡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1733년 봄 라 푸플리니에 저택에서 초연되었으며, 이듬해 궁정에서도 공연되었다.

    이 작품에 대해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앙드레 캉프라는 드 콩티 공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표명했다.

    ..."전하, 이 작품에는 오페라 10개라도 만들 수 있는 훌륭한 음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 모두를 능가하는 음악가일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작품에 너무 음악이 꽉 채워져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 바티스트 륄리의 오페라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라모의 복잡한 관현악법, 강렬한 반주 레치타티보, 불협화를 일으키기도 하는 풍부한 화성에 당황했다.

    그러나 라모 자신은 〈우아한 인도〉에서 선배 륄리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바 있었다.

    ...'위대한 륄리의 레치타티보에 나타나는 멋있는 악구처리, 절묘한 낭송'에 대해 칭송했으며, 자신도 '비굴한 모방가'는 아닐지언정 륄리를 모방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

    사실 라모의 오페라에서 거의 모든 것은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륄리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 내용, 풍부한 극적 대조, 화려한 관현악 음색과 특히 전편에 흐르는 감각적이고 구슬픈 선율, 나른한 목가풍의 분위기는 그가 륄리와는 또다른 세계, 다시 말해 루이 15세가 통치하던 로코코 시대의 작곡가임을 알게 해준다.

    초연을 본 사람들 가운데는 위대한 볼테르도 있었다.

    볼테르는 라모를 "불행하게도 륄리보다 더 많은 음악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빈정거렸다.

    그러나 볼테르는 곧 라모 편에 서서 훌륭한 대본 을 썼다.

    그러나 이 작품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공연 금지당했지만 실제로는 볼테르에 대한 음모 때문이었으며, 음악은 소실되었다.

    훗날 이들이 천박한 궁정 오락을 위해 공동 작업한 작품 (1745) · (1745)이 현존하고 있다.

    은 장 자크 루소가 압축하여 (1745)로 개작한 바 있다.

    드니 디드로의 집필에 함께 참여했던 루소, 장 르 롱 달랑베르를 비롯한 사상가들은 처음에는 열렬한 라모 예찬자였으나 1750년대 중엽에는 점차 이탈리아 음악에 이끌려 라모에게서 등을 돌렸다.

    라모도 새로운 이탈리아 음악을 즐겨 서곡(1745)과 최후의 작품 서곡(1764) 같은 작품들을 의도적으로 이탈리아풍으로 작곡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성향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들이었다.

    라모 생애의 정점은 1748~54년까지의 짧은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1748년에 그의 걸작 을 8일 만에 내놓았으며 동시에 6개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고, 1754년에는 루이 16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을 썼다.

    이후 그의 명성은 '고전주의'라는 새로운 음악 양식이 퍼지자 쇠퇴했다.

    청중은 라모의 심각한 정서와 바로크 말기의 풍요한 화성보다는 단순한 화성의 친숙한 선율을 더 선호했다.


    ■ 라모의 연표



    1683년 9월 25일 프랑스 디종 출생.
    1701년 이탈리아로 갔지만 밀라노 외에는 가보지 못함.
    1702년 프랑스 중부 아비뇽, 클레르몽, 리용, 디종등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
    1715년 클레르몽으로 되돌아와 즉시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함.
    1722년 을 파리에서 출판한 뒤 명성을 얻음.
    1725년 19세의 가수와 결혼.
    1732년 최초의 오페라이자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
    1733년 봄 라 푸플리니에 저택에서 초연.
    1734년 궁정에서도 공연.
    1748년 을 8일 만에 내놓았으며 동시에 6개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림.
    1754년 루이 16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을 씀.
    1764년 9월 12일 파리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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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향기 (@mecalica)
    2021.05.13.


    집시, 안달루시아인, 아랍인들과 유대계 스페인인들의 민요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어떤 학자들은 거기에 덧붙여 비잔틴과 인도의 종교적 성가를 근원으로 보기도 한다. 집시들, 아랍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그리스도교도들이 사회 주변부에서 섞이면서 14세기부터 발전했다.

    플라멩코의 본질은 보통 기타 음악과 즉흥춤을 수반하는 칸테(cante : 노래)이다. 음악과 춤은 다음의 세 범주로 나뉜다. 심오하거나 장중한 플라멩코는 짙은 비장감을 동반하며 죽음·번뇌·절망·종교 등을 다룬다. 중간조의 플라멩코는 덜 심오하나 역시 감동적이며 음악에 동양적 색조가 가미되는 경우가 많다. 경쾌한 플라멩코는 사랑·시골·즐거움을 소재로 한다. 칸테의 종류는 독특한 리듬과 화음 구조로 구별된다. 여러 유형의 칸테가 같은 리듬을 가질 수도 있지만 강약, 미묘한 느낌, 정서적 내용 면에서 차이가 난다.

    여러 유형의 노래 계보는 다음과 같이 추적해볼 수 있다. 즉 아주 오래된 심각한 '카냐'(caña)의 후예인 심각한 '솔레아'(solea)에서 경쾌한 장르가 발전했고 거기서 '불레리아'(bulería) 같은 경쾌한 장르가 발전했다. 순수하게 집시에게 기원한 것은 '알보레아'(alboreá)인데 전통적으로 혼례식에서만 불렀고 다른 경우에 부르면 불길한 노래가 된다.

    '판당고 그란데'(fandango grande) 같은 다른 형태들은 스페인 민요와 민속춤에서 차용되었는데, 판당고는 성격상 원래의 것보다 더 심각하게 되었으며, '말라게냐'와 아라비아의 영향을 받은 '카르타게네라'(cartagenera)를 비롯한 일련의 춤들이 파생했다. '룸바 기타나'(rumba gitana)와 '콜롬비아나'(colombiana) 같은 후대의 장르에서는 남아메리카의 영향이 보인다.

    집시 전통과 가장 깊게 연관된 것은 '시기리야 기타나'(siguiriya gitana)와 같은 칸테 그란데, 스페인의 종교 행렬 성가에서 차용된 '사에타'(saeta), 그리고 집시에게서 기원했으며 춤 없이 노래만 부르는 '마르티네테'이다. 플라멩코를 출 때 남성들의 발놀림은 발끝과 뒤꿈치로 탁탁 소리를 내는 것을 포함해 복잡하게 펼쳐진다. 여성들의 춤은 전통적으로 발놀림보다는 손과 전신의 아름다움에 의존한다. 특히 '심오한 춤'의 팔·손·발 동작은 인도 고전 춤의 동작과 매우 비슷하다.

    집시들은 19세기부터 카페에서 직업적으로 춤추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플라멩코라는 말이 그들의 음악과 춤을 일컫게 되었다. 초기의 칸테는 기타 반주 없이 불렀고 아직도 그러한 유형의 변종들이 남아 있지만, 그후 카페에서는 기타가 두드러진 역할을 하게 되었다. 플라멩코 기타 연주자는 노래와 춤을 잘 알고 있는 섬세한 사람이 이상적이다. 카페에서 연주되면서 기악 독주도 흔해졌고 전통적인 형태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전통적인 플라멩코에서 본질적인 것은, 즉 연희자가 음악이나 춤의 자유분방한 정서에 휩싸이는 '두엔데'(duende)이다. 공연에는 가끔 복잡하게 손뼉치기(jaleo), 손가락 튕기기, 추임새가 수반된다. 노래하기에 적합한 리듬은 할레오 독주로도 연주될 수 있다. 무용수들은 매우 복잡한 리듬의 손가락 튕기기를 자주 활용한다. 종종 플라멩코에 동반되는 캐스터네츠는 원래 집시 전통에는 없었다. 대중 공연횟수가 늘어나고 상업 무대의 압력을 받음에 따라 예행 연습을 거친 판에 박힌 춤이 점차 플라멩코 연회의 자연스러움을 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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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향기 (@mecalica)
    2021.04.28.


    세자르 프랑크

    출생 1822. 12. 10, 네덜란드 리에주
    사망 1890. 11. 8,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교향곡 D단조,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변주곡 Variations symphoniques〉 같은 낭만적 대작으로 유명하다.

    발롱 지방 출신인 아버지와 독일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8세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 리에주 음악원에 입학했다. 피아노의 연주 솜씨가 뛰어나 그의 아버지는 1834년 프랑크를 데리고 엑스와 브뤼셀 등 여러 도시로 연주 여행을 떠났으며 1년 뒤 파리로 보내 파리 음악원 교수로 있던 보헤미아의 작곡가 안톤 라이하에게 배우게 했다. 1836년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요제프를 비롯한 가족이 파리로 이사했으며 1837년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다.

    1년이 못 되어서 그는 독보력(악보 읽는 능력)시험에서 명예대상(Grand Prix d'Honneur)을 받았으며, 1840년에는 푸가 부문에서 1위, 1841년에는 오르간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어 로마 유학이 상으로 주어지는 로마 대상의 준비를 해야 했으나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그의 동생과 프랑크에게 대가로서의 경력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하고 연주회를 열었다. 그리하여 음악원을 도중에 그만두어야 했다.

    아버지를 만족시키고 돈을 벌기 위하여 연주회를 열었는데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주로 그당시에 유행했던 오페라 접속곡과 직접 작곡한 대중적 환상곡이었다.

    1840년 이후 관심이 오르간 쪽으로 기울자 작품은 진지해졌으며 그때 작곡한 3개의 트리오(삼중주곡)는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에게 감동을 주었다. 1846년 1월 4일 파리 음악원 무대에서 처음 연주되었던 칸타타 〈루트 Ruth〉는 그의 야심작이었다. 내키지 않는 연주회 공연, 수많은 언론의 악평, 수입을 위해 강행해야 하는 교습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자신의 재능을 착취하는 이기적인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된 다음에 비로소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프랑크는 본명이 펠리시테 사일로트인 여배우 데스무소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가 극장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자 프랑크는 1848년 결혼을 앞두고 잠시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결혼하고 나서 그의 생활 방식은 그뒤 42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오르간 연주자와 교사로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생활은 소박하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 했다.

    여름과 겨울에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2시간 뒤부터 하루 종일 계속되는 교습을 시작했다. 작곡은 주로 이른 아침 시간과 여름휴가 동안에 했다.

    1851년 생장생프랑수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으며, 1858년에 성가대 지휘자로 일하고 있던 생트클로틸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생트클로틸드의 오르간실에서는 다른 오르간과 합창곡의 역작과 더불어 그를 유명하게 한 즉흥연주가 시작되었다. 이 즉흥음악은 연주하는 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공식적인 직분을 맡기 전에 작곡된 음악으로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달콤하고 서정적이다.

    그러나 프랑크와 그의 친구인 샤를 구노가 교회의 직분을 맡게 되면서 그들의 교회음악은 어려워지고 엄격해지게 되었다. 1872년에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 교수로 임명됨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중요한 경력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예상과 관심밖의 일이어서 무척 놀라워했다. 대인관계에서 솔직하고 직선적이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호감과 반감을 동시에 얻었다. 그에 대한 적대감은 그가 오르간 수업시간을 작곡 수업시간으로 만들어버리고, 보수적인 그의 작곡 기법에 반감을 품은 학생들이 늘어나자 더해졌다.

    1860년대 후반에 이미 프랑크에게서 개인교습을 받았던 앙리 뒤파르크와 알렉시스 드 카스티용이 그의 제자들 중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871년 2월 25일 국립음악협회가 설립되어 진지함, 정서적 안정, 기술적 기초가 마련될 준비가 갖추어지고 난 후 비로소 그는 저술과 학생들과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2년 프랑크의 제자가 된 프랑스의 작곡가 뱅상 댕디의 열정적인 선전은 피아노 연주와 작곡의 대가가 되는 데 실패해서 의기소침해 있는 프랑크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1880년대 초반 에른스트 쇼송, 피에르 드 브레빌, 샤를 보르드, 기 로파르츠를 포함한 프랑크파(派)가 형성되었다. 그뒤 뱅상 댕디가 〈세자르 프랑크 전기〉(1906)에서 보인 열렬한 찬사는 한때 프랑크가 '제자들이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880년부터 1990년 그가 죽기까지 작곡한 음악을 보면 위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화려한 연주와 기교적 성향의 작곡의 대가였던 그는 초기에도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그러한 예가 나타나고 있는 작품으로 피아노를 위한 〈Prélude, aria et final〉(1887 완성, 마지막 악장)과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변주곡〉(1885)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프랑크의 음악적 쇠퇴기의 몇 작품은 페렌츠 리스트, 리하르트 바그너, 더욱 멀게는 베토벤의 예를 들면서 피상성과 강렬한 정서의 배양에 대하여 지나칠 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1890년 프랑크는 길가에서 마차채에 옆구리를 찔려 늑막염에 걸려서 죽었다.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프랑스 음악의 새로운 진지함은 프랑크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유래한다. 프랑크의 천사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와 고결함, 세상사에 대한 순박함은 작품의 경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반면 활기 없다는 평도 있어서 자신의 음악적 특성과 상반되는 경향을 가진 작품 창작요구에 직면했을 때 그의 특성이 결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예가 되는 작품은 1870년대에 작곡되어서 사후에 연주되었던 오라토리오 〈Les Béatitudes〉와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Le Chasseur maudit〉(1882)·〈귀신 Les Djinns〉(1884)이 있다. 한편 1886년에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와 〈교향적 변주곡〉은 그가 기호와 정서의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수했던 철저한 장인정신과 따뜻하고 고귀한 음악성의 완벽한 기념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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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향기 (@mecalica)
    2021.04.27.


    뱅상 당디(Vincent d'Indy, 1851년 3월 27일~1931년 12월 2일)


    뱅상 당디(Vincent d'Indy, 1851년 3월 27일~1931년 12월 2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세사르 프랑크의 수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독일음악의 강한 영향 아래 작곡가로 출발, 후에 점차 민족적인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국민음악협회(생상스 항목참조)의 서기를 거쳐 1890년, 프랑크가 죽자 그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스승 프랑크의 정신을 전하고 그 원리에 따라 교육을 하려고 샤를 볼드(1863-1909, 프랑크 문하의 작곡가·교육자. 프랑스의 음악학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및 알렉상드르 기르만(1837-1911, 오르간 주자, 작곡가)과 협의하여 1896년에 스콜라 칸토룸을 개교, 원장이 되었으며 작곡법의 강좌도 담당하였다. 명저 는 동교에서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은 당디는 아르데슈(남부 프랑스의 고원지방)의 오랜 귀족의 가계 출신으로 10대 초에 마르몽텔, 디에메, 라비냑과 같은 명교수에게 피아노, 화성법의 개인교수를 받았다. 보불전쟁(普佛戰爭) 때에는 보병 병장으로 참전하였고, 전후에는 파드르 관현악단에 소속하였으나 뒤파르크의 소개로 프랑크를 알게 되었고 파리 음악원에서 프랑크의 오르간 지도를 받기 위해 1873년에 입학하여 오르간뿐 아니라 작곡법에 관한 지도도 받았다. 그리하여 1875년에는 오르간 1등상을 받았다.

    당디의 음악 활동은 광범위하여 앞서 말한 교회 오르간 주자 및 지휘자로도 활약하였으며 작품도 여러 분야에 걸쳐 많다. 젊었을 때 글루크, 베토벤, 베버에 심취, 그 후 마이어베어, 특히 바그너에게 사로잡히기도 했다. 다만 "바그너의 모든 영웅을 혹사하는 대언장담의 히스테리"(드뷔시)를 경멸하고 오페라 창작에 바그너의 영향이 명백하면서도 크리스트교적인 사랑과 숭고한 단순함을 작품의 바탕에 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확고한 건축적 형태를 계속 추구했다는 점(특히 기악에서)은 후에 좋은 정신적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는 베토벤에게 매혹된 그로서는 당연하다고 하겠다. 또 그레고리오 성가나 몬테베르디, 라모 등의 연구, 부활 상연 출판 등을 함과 동시에 민요에도 관심을 가져 민족적인 소재를 작곡에 사용―은 그 한 예―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제자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루셀이지만 그 밖에도 알베릭 마냐르(1865-1924)이나 민요를 소재로 사용하거나 또는 지방색을 추구했던 부르고 듀크드레(1840-1910), 두다 드 세브라크(1873-1921), 조셉 칸트루브(1879-1955) 등도 알려져 있다.

    주요 작품
    주요 작품은 을 위한 새 서곡(1873-1881), (1886), 교향시 (1896), (1903-1918), (1905), (1921), 극음악 (1883), 오페라 (1897), 오페라 (1901-1903), 오페라 (1915-1920) 등 각 분야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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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향기 (@mecalica)
    2021.04.21.


    chopin - Nocturne : 템포 루바토란....

    녹턴, 잔잔함을 노래하다
    밤의 정취에 영감을 받아 조용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을 녹턴(Nocturne), 야상곡(夜想曲)이라고 부른다. 이는 로마 시대에 ‘밤의 신’이라는 의미로 불렸던 라틴어 ‘NOX’에서 유래되었는데 우리에게는 성격소품의 한 장르인 쇼팽의 녹턴이 익숙하다. 하지만 실제로 ‘녹턴’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작품을 작곡한 첫 인물은 아일랜드 태생의 작곡가 존 필드이다. 필드의 녹턴은 간결한 형식 속에서의 잔잔한 서정성과 섬세함을 나타내려 했지만, 쇼팽에 비하여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유사한 분위기인데다가 감정 표현이 풍부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필드의 뒤를 이어 쇼팽, 리스트, 포레 등의 작곡가들이 발전시켜 19세기 전반의 피아노 음악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피아노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단순한 패턴의 반주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필드의 녹턴’에서 더 나아가 쇼팽은 그 개념을 한 층 더 높였다. 그는 기존에 갖고 있던 녹턴의 특징에 비화성음의 사용, 리듬 변형, 자유로운 전조 등 다양한 요소들을 접목시켜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해 냈으며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녹턴의 형태로 만들어 주었다.

    쇼팽은 일찍이 피아노에 대한 남다른 재주와 열정으로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을 최대한으로 넓히고자 했다. 다른 작곡가들처럼 오페라, 교향곡, 오라토리오 등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남기기보다는 오로지 피아노를 위한 음악에 몰두했으며 따라서 그는 끊임없이 피아노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해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성격 소품집’을 작곡하는데 있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쇼팽의 음악이 갖는 가장 큰 특징적인 점은 바로 풍부한 서정성과 표현력에 있다. 우리는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평화로운 숲 속에 새가 지저귀는 장면이나 사랑에 대한 아픔을 노래하는 경우 심지어 강아지가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들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만큼 개성 넘치는 선율과 다양한 화성을 효과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그는 모든 상황과 감정들을 묘사해낼 수 있었다.

    특히 녹턴은 시적인 감성과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잘 전달해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녹턴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대부분의 작품들이 조용하거나 우울한 분위기만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쇼팽의 녹턴에는 극적인 셈여림의 변화, 페달의 울림을 통한 음향 확대, 여성적이고 우아한 선율의 진행, 즉흥곡풍의 성격 등 각 요소들이 짜임새 있게 결합되어 있으며 후기로 갈수록 더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잃어버린 시간, 템포 루바토
    쇼팽의 음악이 갖는 다른 작품들과의 차별화된 특징은 바로 ‘템포 루바토(Tempo rubato) 기법’이다. 이미 예전부터 있었던 기법이지만, 쇼팽이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그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기법은 왼손이 일정한 리듬을 연주하고 있을 때 오른손 선율은 연주자가 임의로 조정하며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음악이 자칫 틀에 박힌 진행이나 단조롭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선율만큼은 음악적 표현의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쇼팽이 이를 잘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탈리아 성악에서 쓰이는 벨 칸토 창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페라 아리아에서 쓰이는 이 창법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기악 작품에 적용시켜 템포 루바토와 함께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의 이탈리아 단어인 벨 칸토는 오페라가 등장한 이후 발달한 성악 발성 기법 중 하나이다. 쇼팽은 벨 칸토 창법을 기악곡에 적용시켜 섬세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21개의 녹턴 중 3개의 녹턴
    〈녹턴 b♭단조〉 Op.9-1
    작곡: 1830~1831년

    출판: 1832년

    헌정: 마리 플레이엘 부인

    쇼팽의 〈녹턴〉 Op.9에는 총 세 곡이 있는데 그 중 1번은 서정적인 선율과 과하지 않은 반주가 인상적인 곡이다. 오른손 피아노 선율은 단순한 듯 들리지만, 쉬지 않고 진행하는 선율이 점점 고조되었다가 사라지는 진행을 하고 있다. 주선율과 반주는 서로 대화하듯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점차 절정에 이르게 되며, 다시 초반의 차분한 분위기로 돌아와 첫 부분을 반복하며 마무리된다.

    〈녹턴 E♭장조〉 Op.9-2
    작곡: 1830~1831년

    출판: 1832년

    헌정: 마리 플레이엘 부인

    〈녹턴〉 Op.9-2는 쇼팽의 가장 대중적인 녹턴으로 시적인 감정을 장식음이 많은 선율과 부드러운 리듬을 중심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또한 이 곡은 영화 〈킴노박의 애심〉,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혹은 가수 포지션이 불렀던 〈너에게〉에서 간주로 삽입되는 등 여러 영화나 드라마, CF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음악은 왼손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동일하게 유지하는 반주와 2가지 선율로 이루어진다. 벨 칸토 창법에 관심이 많았던 쇼팽은 오페라의 아리아를 기악 작품에서 표현하고 싶어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이 곡에서 템포 루바토, 트릴을 사용하여 피아노가 화려한 기교로 이루어진 아리아를 부르는 듯한 효과를 연출했다. 이는 동시에 선율의 반복이 지루하지 않고 새로운 것처럼 느껴지게 해 주고 있다. 또한 곡의 후반부에는 카덴차를 넣었는데 연주자의 기량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녹턴 c#단조〉 No.20 KKIVa-16 ‘렌토 콘 그란 에스프레시오네’
    작곡: 1830년

    출판: 1875년

    헌정: 루드비카 쇼팽

    쇼팽의 사후에 출판이 이루어진 〈녹턴 20번〉은 누나인 루드비카 쇼팽(1807~1855)에게 헌정한 곡이다.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2번(Piano Concerto No.2 in f minor)〉 Op.21을 연주하기 전에 연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작품의 선율을 일부 인용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 작품은 연주자가 자신의 기량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는 특히 곡에 ‘Lento con gran espressione(느리게, 풍부한 표정으로)’라는 표현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잔잔한 화성으로 시작되는 이 곡은 차츰 물 흐르듯 펼쳐지는 선율로 바뀌며 서서히 움직인다. 이따금씩 등장하는 부점 리듬과 트릴은 곡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큰 셈여림의 변화 없이 부드럽게 진행되던 선율은 변박을 거치며 짧은 리듬 변화를 겪게 된다. 이후 서서히 마무리되어 곡이 끝나는 느낌을 주지만, 이내 다시 처음 선율이 등장하여 한 번 더 반복된다. 하지만 도입부보다는 더 화려한 트릴과 긴 꾸밈음들로 앞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서정적으로 표출하면서 조용히 마무리된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만든 영화 ‘피아니스트’ 에서도 이 곡을 들을 수 있다. 영화 시작에서 처음 등장하는 쇼팽의 노래로 이 곡이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듯 연주되기 때문에 매우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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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향기 (@mecalica)
    2021.04.06.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 카라얀
    작곡

    교향곡 9번의 초고(부분)
    1817년, "런던 필하모닉 협회"(현재의 왕립 필하모닉 협회)에서 교향곡을 의뢰받은[6][7] 베토벤은 1822년에 작곡을 시작해 1824년 연초에 마쳤다. 교향곡 8번(1812년) 이후 약 12년 만의 일이었다. 베토벤은 일찍이 "환희의 송가"에 관심이 많아서 1793년에 이미 곡을 붙였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교향곡에 독창과 합창을 도입하는 것은 베토벤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음악가에게 처음이라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베토벤의 전기를 집필한 제자 안톤 쉰틀러는 후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제4악장을 작곡하기 시작하면서 베토벤은 전보다 훨씬 힘들어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적절히 도입하는 것 때문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베토벤이 방에 들어와서는 '해냈어, 드디어 해냈다고!'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러대고서는 '실러를 대상으로 한 불멸하는 송가를 부르세'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보여줬지요."
    그러나 그 착상은 곧장 실현되지 않았고 오늘날과 같은 제4악장을 완성한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초연
    1824년 5월 7일 빈에서 베토벤과 미햐엘 움라우프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베토벤은 로시니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들이 주류를 이루던 빈보다는 베를린에서 자신의 작품이 연주되기를 원했지만[8] 그 남자의 친지들과 후원자들이 빈의 초연을 설득했다.

    청각을 완벽히 상실한 베토벤은 최종 악장의 연주 동안에는 청중을 등지고 서서 가수들의 입술 모양으로 실황을 가늠했다. 제2 악장 스케르초가 끝나자 청중의 박수가 (모든 악장이 끝나기 이전인데도 이례로) 울렸을 때, 마지막 악장인 합창 악장의 직후 열광했을 때, 알토 독창자 카롤리네 웅어가 청각을 상실한 베토벤의 등을 돌려 청중의 환호에 답례하게끔 도왔다.[9] 이 초연때 청중은 5번의 '기립박수'를 보냈다 하는데 당시 황제부부 입장 때의 기립박수 3회라는 통례로 보면, 귀족도 아닌 (게다가 궁정에서는 낮은 신분으로 취급되던) 작곡가에 불과한 베토벤에게 5회였다는 사실은 별난 일이었다. 초연 16일 후인 1824년 5월 23일의 두 번째 공연에서의 반응은 초연 때보다 미미했다.

    편성
    피콜로, 플루트2, 오보에3, 클라리넷3 (B-flat, C, A), 바순2, 콘트라바순, 호른4, 트럼펫3, 트롬본3, 팀파니, 트라이앵글, 심벌즈, 큰북, 현5부

    성악: 소프라노 독창, 알토 독창, 테너, 베이스, 혼성 4부 합창
    교향곡 중 최대 편성이다. 초연 당시에 베토벤은 관악 파트마다 연주자 두 명을 지정해 편성을 확대했었다. 요즘은 이 곡을 3관과 4관 편성으로 연주한다. 말러 편곡판에는 팀파니를 두 대로 증량, 호른을 4대 첨가해서 8대로 하였고 이런 악기를 사용해 양쪽이 주고받는 식으로 편곡한 곳이 많고 목관과 주선율을 배가하는 기법이 쓰였으며, 기존에 없던 튜바도 추가했다.

    구성
    모두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과 같다.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Molto vivace, Scherzo
    Adagio molto e cantabile
    Presto/recitative - Allegro ma non troppo/recitative - Vivace/recitative - Adagio cantabile/recitative - Allegro assai/recitative - Presto/recitative: "O Freunde" - Allegro assai: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 Alla marcia - Allegro assai vivace: "Froh, wie seine Sonnen" - Andante maestoso: "Seid umschlungen, Millionen!" - Adagio ma non troppo, ma divoto: "Ihr, stürzt nieder" - Allegro energico, sempre ben marcato: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 "Seid umschlungen, Millionen!" - Allegro ma non tanto: "Freude, Tochter aus Elysium!" - Prestissimo: "Seid umschlungen, Millionen!"
    연주 소요시간은 통상 70분이다.

    제4 악장 가사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Alle Menschen werden Brüder*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Wem der große Wurf gelungen
    Eines Freundes Freund zu sein;
    Wer ein holdes Weib errungen
    Mische seinen Jubel ein!
    Ja,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ennt auf dem Erde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le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Freude trinken alle Wesen
    An den Brüsten der Natur;
    Alle Guten, alle Bösen
    Folgen ihrer Rosenspur.
    Küsse gab sie uns und Reben,
    Einen Freund, geprüft im Tod;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und der Cherub steht vor Gott.
    Froh, wie seine Sonnen fliegen
    Durch des Himmels prächt'gen Plan
    Laufet, Brüder, eure Bahn,
    Freudig, wie ein Held zum siegen.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ß der ganzen Welt!
    Brüder, über'm Sternenzelt
    Muß ein lieber Vater wohnen.
    Ihr stürzt nieder, Millionen?
    Ahnest du den Schöpfer, Welt?
    Such' ihn über'm Sternenzelt!
    Über Sternen muß er wohnen.
    환희여, 신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딸들이여,
    우리는 빛이 가득한 곳으로 들어간다,
    성스러운 신전으로!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킨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그대의 고요한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다 함께 모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그렇다. 하나의 마음일지라도
    땅 위에 그를 가진 이는 모두 다!
    그러나 그조차 가지지 못한 자
    눈물 흘리면서 조용히 떠나라!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환희를 마시라
    자연의 품 속에서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환희의 장미 핀 오솔길로 나아간다.
    환희는 입맞춤 그리고 포도주
    그리고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땅을 기는 벌레조차도 환희를 맛보고
    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선다.
    태양이 수많은 별 위를 움직이듯이
    광활한 하늘의 궤도를 즐겁게 날듯이,
    형제여 길을 달려라,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이.
    모든 사람은 서로 포옹하라!
    온 세상 위한 입맞춤을!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으니.
    억만 인들이여, 엎드리지 않겠는가?
    창조주를 믿겠는가, 온 세상이여?
    별들 뒤의 그를 찾으라!
    별들이 지는 곳에 그는 있다.


    유명한 음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바이로이트 축제 관현악단, EMI (1951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도이치 그라모폰 (1977년)
    카를 뵘,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 도이치 그라모폰 (1981년)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 데카


    각주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자 48세(1818년)부터는 노트에만 의존해 대화했다.
    Bonds, Mark Evan, "Symphony: II. The 19th century", 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Second Edition (London: Macmillan, 2001), 29 vols. ISBN 0-333-60800-3, 24:837.
    Beethoven: Symphony No. 9 (Cambridge Music Handbooks), Nicholas Coo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4 June 1993), product description (blurb). ISBN 9780521399241. "Beethoven's Ninth Symphony is acknowledged as one of the supreme masterpieces of the Western tradition. More than any other musical work it has become an international symbol of unity and affirmation."
    “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9, d minor, op. 125”.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2014년 5월 8일에 확인함.
    "Beethoven's Ninth Symphony joins UN world heritage list", Daily Times, Lahore, 21 December 2002. Retrieved 6 April 2013
    헌정: 베토벤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헌정했다.
    Solomon, Maynard. Beethoven. New York: Schirmer Books, 1997, p. 251.
    Sachs, Harvey (2010), The Ninth: Beethoven and the World in 1824, Faber
    안톤 쉰틀러 그리고 피아니스트 탈베르크 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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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비의향기 (@mecalica)
    2021.03.27.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v, 1873~1943) 피아노 협주곡 2번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슬럼프를 극복하고
    이 작품이 작곡될 무렵 라흐마니노프는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그 원인은 3년 전 처음으로 작곡한 초연의 실패였다. 20대의 패기와 열정을 담아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했을 때 까지만 해도 그는 기대와 자신감에 넘쳐 있었을 것이다. 또한 글라주노프의 지휘는 그가 성공을 확신한 또 다른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를 저버린 채 초연은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실패의 여파는 상당했다. ‘화려한 경력을 쌓으려던 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라는 고백과 함께, 라흐마니노프는 극심한 충격과 좌절에 빠졌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실패 이후로 한동안 곡을 쓸 수 없는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물론 연주자나 지휘자로서는 훌륭히 활동하였지만, 쇠퇴해가는 창작력과 그로 인한 강박에 급기야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될 정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시기에는 개인적 악재도 찾아왔다. 사촌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나탈리아 사티아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 부모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는 작곡으로 이 슬럼프를 이겨내기로 하였고, 힘들지만 계속해서 작곡에 몰입하려고 애썼다. 한편으로는 정신과 치료를 계속 받았는데, 이 때 라흐마니노프의 치료를 담당했던 니콜라이 달 박사는 일설에 의하면 그에게 ‘새로운 작품을 작곡하고 그 협주곡이 성공한다’라는 자기암시 최면을 통한 치료를 시도했다고 한다. 이 치료가 효과가 있었는지 라흐마니노프는 새 협주곡을 쓰게 되었고, 이 곡을 후에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헌정하였다.

    커다란 성공을 가져다 준 자전적 협주곡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으로 긴 터널과 같았던 자신의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1900년부터 작곡되기 시작하여 이듬해 초에 완성되었고, 앞서 완성된 제2, 3악장을 1900년 12월 2일, 작곡가 자신의 독주로 시연하였다. 대중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첫 선을 보인 것은 1901년 11월 9일 모스크바에서였다. 〈교향곡 제1번〉 초연 실패의 아픔을 가진 그로서는 매우 긴장되는 일이었을 테지만,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직접 무대에 오를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도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힘과 테크닉을 모두 요하는 이 난곡의 연주자로서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지휘는 사촌인 알렉산더 실로티(Alexander Siloti, 1863~1945)가 맡았다.

    우려했던 바와 달리, 초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작곡가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는 기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으로 글린카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이렇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슬럼프를 극복하고 재기의 발판을 만들어 준 중요한 작품으로,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작곡가로서 겪었던 좌절과 그에 따른 고뇌, 투쟁과 극복에의 의지 등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 협주곡을 통해 그 역경을 이겨내고 다시금 작곡가로서의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라흐마니노프의 가장 대중적인 작품
    오늘날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네 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가장 널리 연주되고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곡이다. 특히 2악장과 3악장은 국내외의 많은 영화나 드라마, 텔레비전 광고에 삽입되었다.


    1악장 2/2박자 c단조 모데라토
    악장을 시작하는 피아노 독주는 화음과 베이스가 마치 낮고 무거운 종소리를 연상시키며 교대로 울려 퍼진다. 섬세하고 신중하게 시작되는 타건(打鍵, keying)은 결연한 느낌과 함께 점점 강해지는데, 이렇게 피아노 소리로 만들어낸 종소리는 곡의 시작과 동시에 라흐마니노프의 재기를 알리는 신호탄처럼 들린다. 이후 현악파트에서 제시되는 제1주제는 러시아의 정서를 듬뿍 머금고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특별히 러시아 음악을 쓰려고 억지로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러시아 작곡가이며 러시아는 나의 기질에 영향을 주었고,
    따라서 나의 음악은 나의 기질에 따라 러시아 음악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선대 작곡가인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차이코프스키를
    일부러 모방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내 마음에 차 있는 것을 음악으로 명료하게 나타내려고 하였다.”
    - 라흐마니노프
    이어지는 제2주제는 피아노를 통해 처음 나온다. 재현부 이후 행진곡으로 등장하는 제1주제와 나른하게 등장하는 제2주제 뒤로 카덴차는 생략되고, 종결구는 다시금 힘차게 진행되어 악장을 마무리 짓는다.

    2악장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4/4박자 c단조
    앞선 2악장의 조성 c단조로 시작하여 관현악군의 짧은 경과구를 거친 후 곧 악장의 본 조성인 E장조로 넘어간다. 악장 중간에 경쾌한 스케르초풍의 섹션이 들어있으나 전반적으로 느리고 서정적이며 선율이 아름답다. 이 악장은 세 악장 중에서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악장이다. 특히 주요 선율은 에릭 카먼의 팝송 ‘All by my self’에 사용된 것으로 유명한데, 이 팝송의 가사는 마치 창작의 고통 가운데 고독함에 몸부림치던 라흐마니노프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3악장 E장조 2/2박자 알레그로 스케르찬도
    이 역시 앞선 악장의 조성을 이어온 것으로, 관현악군이 춤곡풍 리듬으로 연주하는 경과구를 거쳐서 본 조성인 c단조로 이행한다. 피아노의 경과부와 제1주제를 거쳐, 제1악장의 제2주제와 긴밀한 관련을 가지는 제2주제가 등장한다. 구조적이면서도 다이내믹한 발전부와 재현부를 거쳐 이 제2주제는 다시금 절정부에서 강조되어 등장하는데, 이때는 관현악의 합주로 나온다. 이 클라이맥스를 거쳐 음악은 C장조로 바뀌며 승리, 혹은 극복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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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비의향기 (@mecalica)
    2021.03.26.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Symphonic Suit Sheherazade(Шехерезада) Op.35

    창작욕이 정점에 달하다
    1887년, 동료 보로딘이 미완성으로 남긴 오페라 〈이고르 공〉을 완성한 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의욕적으로 다음 작품에 착수했다. 1887~1888년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가장 많은 작품을 작곡한 시기로,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서곡 ‘러시아 부활제’〉와 교향적 모음곡 〈세헤라자데〉가 이 시기에 탄생했다. 이처럼 창작욕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천일야화》의 에피소드들을 주제로 한 관현악 소품을 쓰기로 결심했다.

    러시아 음악으로 해석한 동양의 ‘천일야화’
    19세기 말,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을 이끌었던 러시아 5인조는 민속적인 어법과 함께 동양적인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러시아의 음악적 특징을 정의하려 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역시 동양적 소재를 즐겨 사용했으며, 특유의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동양적 풍미를 더욱 효과적으로 연출해냈다. 그러한 그가 동양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문학으로 인식되었던 《천일야화》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천일야화》의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에서 네 가지를 선택하여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적 모음곡을 구상했다. 이 작품은 색채감 넘치는 오케스트레이션, 흥미로운 선율, 부드러운 동양적 풍미 등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19세기 후반의 관현악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생기 넘치는 리듬과, 당시 교향곡의 복잡한 구성을 절제한 표현의 직접성은 청중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으로 다가갔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사후 2년이 지난 1910년,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가 발레 〈세헤라자데〉에 이 곡의 3악장을 사용함으로써 이 작품은 더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안무가 미하엘 포킨과 화가 레온 박스트, 인기절정의 무용가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참여한 이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미망인은 작곡가의 의도와 달리 3악장만을 사용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도 했지만, 이 공연의 성공은 교향적 모음곡 〈세헤라자데〉의 인기에도 크게 기여했다.


    동양적이고 동화적인 이미지들의 만화경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처음에는 각 악장의 제목을 ‘프렐류드, 발라드, 아다지오, 피날레’로 계획했다. 지나치게 분명한 표제를 기피했던 그는, 주위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원래의 제목을 《천일야화》와 관련된 제목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의도적으로 모호한 제목을 붙였다. 심지어 이후의 판본에서는 이 변경된 제목을 모두 없애버리기까지 했다. 그는 청자들이 자신의 음악을 특정한 내러티브에 맞추기보다는 동양의 환상적인 모험이라는 주제 속에서 자유롭게 상상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작곡가의 의도를 보여주듯, 이 작품은 모든 악장이 눈부신 상상력과 풍부한 색채감으로 가득하다. 그는 각 악장을 독립된 에피소드로 구성했지만, 네 개의 악장이 통일성을 가지기를 원했다. 첫날밤을 지낸 뒤 왕비를 처형하는 술탄 샤리야르와, 환상적인 이야기로 처형을 천 하루 동안 미루고 결국 샤리야르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는 매력적인 이야기꾼 세헤라자데의 관계를 큰 흐름으로 제시하기 위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두 인물을 상징하는 주제선율을 모든 악장에서 사용하였다. 이 작품이 “동화적이고 동양적인 이미지들의 만화경”이 되기를 원했던 그는 이 두 주제를 기반으로 하여 자유롭고 현란한 진행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1악장 라르고 에 마에스토소-렌토-알레그로 논 트로포-트란퀼로
    1악장은 ‘바다와 신드바드의 배’를 주제로 하였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술탄 샤리야르와 세헤라자데의 만남을 제시하면서 첫 악장을 연다. 엄숙한 베이스 모티브가 술탄을 상징하면서 서주를 시작한다. 이 모티브는 크게 E-D-C-A#로 하행하는 온음음계를 구성하면서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술탄의 위엄을 드러낸다. 곧이어 목관이 멘델스존의 서곡 〈한여름 밤의 꿈〉을 연상시키는 화음을 연주하면서 환상의 세계로 초대한다. 이에 뒤따라 세헤라자데의 주제가 바이올린 독주로 제시된다. 부드러우면서도 감각적인 바이올린 선율은 하프가 반주하면서 세헤라자데의 관능적인 여성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렇게 두 사람의 만남을 보여준 음악은 곧 제시부로 들어서면서 세헤라자데가 풀어놓는 신드바드의 모험 이야기로 이어진다. 현 성부는 요동치는 파도를 그려내고 샤리야르의 선율이 1주제로 사용되면서, 신드바드의 모험 이야기에 몰입하는 술탄의 호기심을 그려낸다.

    2악장 렌토-안단티노-알레그로 몰토-비바체 스케르찬도-모데라토 아사이-알레그로 몰토 에드 아니마토
    이 악장은 ‘칼렌다르 왕자 이야기’를 주제로 주제와 변주 양식으로 된 3부분 형식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변주는 빠르기와 반주형태에 의해서만 변화하는데, 이처럼 단순한 진행은 림스키코르사코프 특유의 명료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세헤라자데의 선율이 악장의 첫머리를 열면서 세헤라자데의 이야기 속으로 청자를 초대하고 있다. 곧이어 느리고 고요한 동양풍의 선율이 순례여행에 나선 칼렌다르 왕자를 소개한다. 세 번째 변주에서는 트롬본과 트럼펫이 팡파르의 형태로 샤리야르의 주제를 제시하면서 이야기의 통일성을 이어가고, 샤리야르의 주제와 칼렌다르 왕자의 주제가 함께 어우러지며 마무리된다.

    3악장 안단티노 콰시 알레그레토-운 포코 라르게토
    ‘젊은 왕자와 공주’의 3악장 역시 ABA의 3부분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형식과 주제 면에서 가장 단순한 악장이다. A와 A' 부분은 서정적인 선율을 제시하면서 젊은 왕자와 공주의 사랑이야기를 묘사한다. 경과구에서 목관이 제시하는 화성단음계는 아라비아의 색채를 가미한다. 밝고 경쾌한 B부분에서는 발라키레프의 〈타마라〉에서 선율을 가져오고, A부분에서 사용된 모티브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트라이앵글 등 다양한 타악기를 사용하여 동화적인 느낌을 탁월하게 표현하였다. A'부분은 세헤라자데의 주제로 시작하면서 다시금 악장 간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각 악기들이 현란한 독주선율을 선보이는 이 부분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독주서법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4악장 알레그로 몰토–렌토-비보-알레그로 논 트로포 에 마에스토소-템포 프리모
    ‘바그다드의 축제, 바다, 난파당하는 배’를 주제로 4악장에서는 앞의 세 악장에서 요소들을 하나로 묶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술탄 샤리야르의 주제가 빠른 리듬으로 제시되고 세헤라자데의 주제는 유니즌으로 더블링되면서 제시된다. 이어서 독특한 리듬이 교차되고 다양한 타악기들이 활약하면서 축제로 떠들썩한 바그다드의 풍경을 그린다. 축제의 풍경에는 3악장에서 사용된 〈타마라〉의 선율이 삽입되기도 한다. 격렬한 현 성부와 금관의 팡파르가 반복되면서 험난한 바다의 풍경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이 부분에서는 1악장에서 사용된 모티브들이 다시 등장하여 신드바드가 겪었던 거친 항해를 연상시킨다. 이윽고 샤리야르의 주제가 금관 성부에서 느리고 음산하게 반복되면서 배가 난파되는 장면을 연출한다. 마침내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끝을 맺고, 세헤라자데의 주제와 샤리야르의 주제가 장조로 융합되면서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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