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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변주님의 로그 입니다.

Never blame anyone in your Life. Good people give you Happiness. Bad people give you Experience. Worst people give you a Lesson. and Best people give you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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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3 22:27:15


    Lacrim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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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at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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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on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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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28:33
    2021. 03. 03 방송
    장 시벨리우스는 러시아 통치하에 핀란드 교원양성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에게 있어 지속적인 영감의 근원이 된 핀란드의 신화적 서사시 를 접하게 되었다. · 등을 포함한 시벨리우스의 많은 교향시들이 이 서사시에서 비롯되었다. 법률가가 되려 했으나 시벨리우스는 곧 헬싱키에서 법률 공부를 중단하고 음악에만 전념했다. 처음에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려고 했으나 베겔리우스의 지도를 받아 많은 실내악곡과 기악곡을 작곡했다. 20대 중반에 핀란드를 떠난 시벨리우스는 베를린과 빈에서 계속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작곡가인 로베르트 푹스와 카를 골트마르크에게서 사사했다. 핀란드로 돌아오자마자 발표한 최초의 대규모 관현악 작품 은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과 그 뒤를 잇는 ··로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부상했다. 시벨리우스의 대표적 교향시 는 1899년에 작곡되어 1900년에 개정되었다.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스웨덴계 핀란드 작곡가이다.

    ⓒ fi:Daniel Nyblin/wikipedia | Public Domain

    장 시벨리우스는 러시아 통치하의 핀란드에서 핀란드어로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였던 핀란드 교원양성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핀란드의 문학, 특히 그에게 있어 지속적인 영감의 근원이 되었던 핀란드의 신화적인 서사시 〈칼레발라 Kalevala〉를 접하게 되었다.

    〈포횰라의 딸 Pohjola's Daughter〉·〈루온노타르 Luonnotar〉 등을 포함한 장 시벨리우스의 많은 교향시들이 이 서사시에서 비롯되었다. 법률가가 되려 했으나 시벨리우스는 곧 헬싱키에서 법률 공부를 중단하고 음악에만 전념했다. 처음 시벨리우스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려고 했다. 베겔리우스의 지도를 받아 많은 실내악곡과 기악곡을 작곡했다.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음악 활동을 위해 원래의 세례명 대신 '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0대 중반에 핀란드를 떠난 시벨리우스는 베를린과 빈에서 계속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작곡가인 로베르트 푹스와 카를 골트마르크에게서 사사했다.

    핀란드로 돌아오자마자 발표한 장 시벨리우스의 최초의 대규모 관현악 작품 〈쿨레르보 교향곡 Kullervo Symphony〉(1892)은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과 그 뒤를 잇는 작품들인 〈엔 사가 En Saga〉·〈카렐리아 Karelia〉·〈4개의 전설 Four Legends〉로 장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부상했다. 〈교향곡 1번 E단조〉(1899)를 작곡하기 이전인 1897년 핀란드 의회는 시벨리우스의 재능을 인정하여 그에게 연금을 지급하도록 의결했다.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 Finlandia〉는 1899년에 작곡되어 1900년에 개정되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시벨리우스의 명성은 대륙을 관통했다. 학생으로서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와 친교를 맺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페루치오 부조니는 베를린에서 〈교향곡 2번 D장조〉(1901)를 지휘했고, 영국의 작곡가 그랜빌 밴톡은 〈교향곡 3번 C장조〉(1907)를 의뢰했다.

    이 작품에서 장 시벨리우스는 2번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1903)와 같은 민족적 낭만주의에 등을 돌리고 〈엔 사가〉와 〈교향곡 4번 A단조〉(1911)에서처럼 더욱 철저하고 단호한 양식을 취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벨리우스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인 마지막 3개의 교향곡(5번 내림 E장조, 6번 D단조, 7번 C장조)과〈타피올라 Tapiola〉(1925)를 출판했지만 말년에는 긴 침묵에 빠졌다.

    8번 교향곡(1930년대초에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음)과 심지어는 9번 교향곡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발견되지는 않았다. 장 시벨리우스가 죽은 후 그의 자필 악보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1930년대에는 영국의 세실 그레이와 컨스턴트 램버트, 미국의 올린 다운스 등의 작가들 덕분에 장 시벨리우스에 대한 인기가 유행처럼 번져갔다. 이러한 유행에 대한 다음 세대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시벨리우스는 음악 대중에 대한 확고한 영향력을 견지했다. 비록 시벨리우스의 음악적 영감이 스칸디나비아의 경관과 내밀한 연관이 있다고는 해도, 시벨리우스를 대뜸 '자연시의 시인'쯤으로 기억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교향시와 7곡의 교향곡에서 성취한 업적은 주로 형식에 대한 탁월한 섭렵에 기인한 것이다. 3번 교향곡의 1악장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교향곡의 1악장에서 볼 수 있는 구조적 명료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기적 총체성과 음구조의 구축은 오히려 그 모델들을 능가하고 있다. 장 시벨리우스의 천재성의 비밀은 이러한 유기적 구조물의 구축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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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27:21
    2021. 03. 04 Georges Bizet

    비제는 1838년 파리 근교의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악 강사인 아버지에게서 음악 교습을 받은 비제는 일찍 재능을 보여 10살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파리음악원에서 작곡, 피아노, 오르간을 배운 그는 주로 샤를 구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56년 18세의 비제는 로마대상 작곡 콩쿠르에 칸타타 '다윗'을 출품해 입상, 이듬해에는 마침내 대상을 차지한다.[3] 부상으로 로마에 3년 동안 장학생으로 유학을 갔다온 후, 비제는 오페라에 주력한다.

    1863년 '진주조개잡이'로 오페라 작곡가로서 첫 이름을 알린 후, 계속해서 작곡에 몰두하지만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여기도 소포모어 징크스인가? 그러던 중 1869년 로마 유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로마의 회상' 모음곡을 발표하였고[4], 같은해 스승의 딸과 결혼한다.이쪽과는 달리 키잡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향곡 같은 장르보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하기 갈망하는 그로서[5] 하필이면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인 바그너와 베르디의 시대에 살았던 탓인지, 상당수의 작곡물들이 두 작곡가의 아류라고 평가절하 되는 상황이 빈번했다고 한다. 때문에 떨어지는 자존감으로 폭음을 일삼는 등 건강을 좀먹는 행동을 일삼곤 했다.

    1872년 알퐁스 도데의 소설을 각색한 '아를의 여인'의 극음악을 작곡해 성공하고 그중 몇곡을 모아 모음곡으로 발표한다.[6] 하지만 그의 일생일대의 걸작은 1875년에야 나온다. 바로 카르멘. 비제는 이 오페라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으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될 때의 반응은.. 아 망했어요. 자세한 것은 카르멘 문서 참조.

    결국 건강이 안 좋은 상황에서 초연 실패로 결정적인 타격을 맞은 그는 카르멘이 빈에서 대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 채 초연으로부터 3개월 뒤인 1875년 6월 3일에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뒀다. 불과 향년 3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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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25:22
    2021. 03. 06 Mozart Piano Concerto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Vladimir Ashkenazy

    러시아 태생의 아이슬란드의 피아니스트.

    풍부한 색채감과 서정적 표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쉬케나지는 이 시대가 낳은 독특한 연주 품격을 가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이며,역사적 격동기에 정치적 시련을 거치면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예술혼을 지켜온 금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존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가장 안정된 기교와 음악성을 갖춘 아쉬케나지의 탁월한 리듬감각은 비견될 사람이 없으며 다양한 음색과 풍부한 울림, 거기에 성숙한 인간적인 면모까지 반영,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열성팬들로 매진행렬을 이루고 있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Vladimir Ashkenazy)는 1937년 7월6일 모스크바 서쪽 고르키라는 도시에서 유태인 피아니스트의 아버지 슬하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전문 실내악 피아니스트, 즉 앙상블 피아니스트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아쉬케나지는 7세 때에는 학생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하이든의 을 연주할 정도로 천부적인 음악적 기질을 발휘하였다.

    초창기 그의 피아노 레퍼토리는 전통적인 곡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후에 프랑스 작곡가, 특히 러시아 작곡가들의 곡도 섭렵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가 밝고 가벼운 곡만을 연주하는 즐기기 위한 음악을 만드는 피아니스트였던 것에 반해 아쉬케나지는 무엇을 연주하든 훌륭한 연주를 들려준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다양하고 폭 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해내었는데,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 만큼 서로 다른 두 작곡가의 곡을 그토록 완벽하게 마스터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는 찾을 수 없다는 평을 얻고 있다.



    1940년 아쉬케나지와 그의 가족은 고르키에서 모스크바로 이사하였는데,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으나 그를 위한 음악 교육적 환경만은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그의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성장은 9세 때부터 출발하는데, 그가 모스크바 음악원 부속의 중앙음악학교(Central School of Music)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1955년, 18세 때 음악학교를 졸업한 아쉬케나지는 같은 해 바르샤바 쇼팽 국제 콩쿠르(Warsaw Chopin Competition)에 나가 2위에 입상하였으며, 모스크바 음악원(Moscow Conservatoire)에 입학하여 레프 오보린(Lev Oborin)의 피아노 수업에 참여하며 더욱 심도있는 음악교육을 받았다.

    1956년, 아쉬케나지는 처음으로 서방세계로 연주여행을 떠나게 되고 벨기에 브뤼셀의 라이네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Reine Elisabeth Competition)에서 1위로 우승하였으며, 이로 인한 연주회에서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가 연주한 베토벤 에 열광한 언론은 아쉬케나지가 아니라 베토벤 자신에 의해 직접 연주된 것과 같은 사운드였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는 위대한 연주자로서의 3가지 덕목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음악적 재능, 지적인 이해력, 완벽한 테크닉이다.

    아쉬케나지는 1962년, 콩쿠르의 최고봉인 제2회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 우승으로 또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아쉬케나지는 1963년, 모스크바 음악원시절 만난 아이슬란드의 피아니스트 토룬 요한스도티어(Thorunn Johannsdottir)와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아들을 하나 낳은 후 영국으로 건너가 네 명의 아이들을 더 낳았고, 그 중 두 명은 각기 피아노와 클라리넷 연주자가 되었다.

    1968년부터 아이슬란드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해 온 그는 보다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위해 1974년 소련국적을 버리고 아이슬란드 국민이 되었다.

    1970년부터 그에게는 중요한 제2의 음악인생이 시작되는데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뿐 아니라 지휘자로서의 음악활동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

    방대한 녹음작업과 전세계로의 연주여행을 통해 점차 그의 음악성을 서방에 알리게 된 아쉬케나지는 자신이 피아노 연주자 뿐 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새로운 음악세계에 빠져들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드디어 그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제 1 객원 지휘자),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음악 감독),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제 1 객원 지휘자), 베를린 독일 심포니 오케스트라(chief conductor 및 음악감독) 등에서 세계 최정상의 지휘자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지휘자로서 활동하는 가운데에도 피아니스트로서의 연주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던 아쉬케나지는 라흐마니노프 전집을 레코딩하는 등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였는데, 이제 그는 소문이 아닌 자신의 순수한 음악적 품위로 전세계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1998년 1월, 아쉬케나지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Czech Philharmonic Orchestra)의 상임지휘자의 자리에 임용되어 오늘날까지 다양한 순회공연과 레코딩으로 할발한 음악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1999/2000 시즌에는 유럽, 일본, 북미와 남미 순회공연을 가진 바 있으며, 2000/2001 시즌에는 런던, 비엔나, 루체른, 독일,그 리스 등 유럽 및 한국과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활동 외에 European Union Youth Orchestra의 음악감독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계관지휘자로도 일하고 있다.

    아쉬케나지는 지휘자로서의 활동 외에도 유럽, 극동, 미국에서 피아노 독주회와 레코딩작업으로 자신의 끊일 줄 모르는 음악적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이 시대의 위대한 음악가임에 틀림없다.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의 음악교육에 따라 6세때부터 피아노 수업을 시작하여 온 아쉬케나지는 1955년 18세 때 국제 쇼팽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하면서부터 그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956년부터 시작된 서방으로의 연주여행은 그를 언제나 신선한 이미지를 주는 피아니스트이며, 항상 청중이 크게 기대하는 연주가라는 평을 받게 하였다.

    연주를 함에 있어 그의 지향적인 규범은 자신의 감정을 살리는 동시에 선천적인 날카로운 평형감각을 음악적 조형에 적용하는 데에 있다.

    그의 연주법은 소련의 명교수들이 창조한 합리적인 방법을 자신에 맞게 완전히 소화해내었다고 볼 수 있다.

    유난히 작은 체구의 아쉬케나지는 자신의 큰 손으로 전신을 강한 스프링과 같이 움직이며 손 끝에 전신의 중량을 얹은 듯 정확한 기술과 감성으로 작품을 연주해낸다.

    자신의 연주기법에 대한 아쉬케나지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허식을 제거하는 것이다.

    베토벤이나 모짜르트의 핵심을 잡고 거기에 숨겨져있는 고유의 간결성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의 연주에 감명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찬사는 그의 연주가 매우 유연하며 천부적 예술가의 기질로 생명이 약동하는 신선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그의 연주는 바흐로부터 프로코피에프에 이르는 다양한 레퍼토리로 최근의 연주는 인간적 성숙까지도 반영하는 깊은 정서적 표현을 가능케 해내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아쉬케나지는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위해 고국인 러시아를 떠났고, 아픈 희생을 치른 만큼 독자적 연주양식을 확립해내었다.

    실제로 그는 지적인 구성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과 병행하여 감정을 더욱 대담하게 표현해 왔는데, 그러면서도 음악적 순수성에서 멀어지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예술가가 만족했을 때 그 예술적 생명은 끝이 난다고 믿고 있는 그는 요즈음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성을 보이며 누구보다도 예술가로서의 여정을 지속시켜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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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24:45
    2021. 03. 07 Rachmaninofff -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짧은 시간에 쓰인 명곡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으로 귀화하기 바로 전 해인 1934년, 스위스 루체른 호숫가에 피서 차 머물면서 작곡한 곡이다. 한 달 반 정도라는 짧은 작곡 기간을 거쳐 8월에 완성되었으며, 그 해 11월 7일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이 되었다. 피아노 독주는 물론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작곡가 본인이 맡았다. 이들은 1934년 12월에 바로 첫 녹음에 돌입하였으며, RCA에서 발매된 이 레코딩은 뉴저지 캠든에 있는 Victor’s Trinity Church Studio에서 이루어졌다.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서방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사실상 작곡보다는 연주에 몰두했는데, 아마도 생계를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대단히 활발하게 작곡활동을 했던 것과는 달리 망명 후에는 소수의 작품밖에 남기지 못했는데, 이 명곡이 그 몇 안 되는 작품에 속한다.

    아름답고 기교적인 협주곡적 변주
    제목에는 변주곡의 기본 주제로 사용된 파가니니의 작품만이 드러나 있지만, 이 주제와 대비되는 선율을 만들기 위해 라흐마니노프는 〈진노의 날〉(dies irae)을 차용하였다. 진노의 날은 라흐마니노프가 즐겨 차용한 것인데, 〈죽음의 섬〉과 〈교향적 춤곡〉뿐 아니라 세 개의 교향곡 모두에 이 선율이 들어있다.

    24개의 변주를 가지고 있는데 짧은 서주와 피아노가 드러나지 않는 1변주 이후에 바이올린으로 제시되는 테마가 등장하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피아노는 2변주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관현악부가 먼저 나오고 독주악기가 주제를 반복하는 것은 일반적인 협주곡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이 전곡을 템포에 따라 구분하면 빠른 부분(1~10변주), 느린 부분(11~18변주, 특히 18변주 안단테 칸타빌레는 그 서정성으로 큰 사랑을 받는 부분이다), 빠른 부분(19~24변주)이 되는데, 이 역시 일반적 협주곡 구성과 다르지 않다. 피아노의 비루트오지티와 관현악파트의 현란하고도 풍부한 색채가 각각 돋보이면서도 서로 잘 어우러지는 이 명곡은 20세기에 작곡된 협주적 작품 중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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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24:03
    Hisaish Joe 久石譲 - Beethoven, Violin Concerto Op.61

    출처: https://tendowork.tistory.com/55 [TENDOWORK]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20년 8월 4일 히사이시조가 지휘, 신일본필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곡이다.

    개최 전에 코로나로 인해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실시간 온라인 시청과 아카이브, 그리고 거리두기로 좌석수를 제한한 홀 감상이 진행됐다.





    더블베이스를 제외하고는 보면대가 연주자당 하나씩. 악수대신 주먹인사, 팔꿈치인사가 눈에 띄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해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이 당 시대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프란츠 클레멘트를 위해 작곡한 곡이다. 솔로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마감일까지 악보를 주는게 관례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베토벤도 마감일에 쫓겼던 작가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파격적인 면도 있고, '반복'이 계속되는 음악이다. 베토벤의 생전에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바탕으로 피아노 협주곡(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d장조 op.61)도 작곡됐지만, 바이올린 협주곡은 초연 이후 연주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38년이 지나고 당시 13세의 요제프 요하임의 연주로 세상에 다시 주목받는 곡이 됐고, 지금은 바이올린 협주곡의 명곡으로 꼽힌다. 베토벤이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도 이 곡이 유일하다.



    히사이시조의 카덴차에 대해


    카덴차란 악곡이나 악장이 끝나기 직전에 독주자나 독창자가 연주하는 기교적이고 화려한 부분을 말한다. 베토벤은 이 곡을 작곡할 때 1악장, 3악장의 카덴차를 미완성으로 두었다고 한다. 이후에 많은 카덴차가 생겨났는데, 카덴차 부분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이 곡의 청취 포인트다.



    히사이시조는 앞서 이야기했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d장조 op.61에 베토벤이 직접 집어넣은 카덴차를 바탕으로 바이올린 버젼의 카덴차로 편곡했다. 아마 베토벤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마저 완성했더라도 피아노 협주곡의 카덴차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출처: https://tendowork.tistory.com/55 [TENDO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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