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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변주님의 로그 입니다.

Never blame anyone in your Life. Good people give you Happiness. Bad people give you Experience. Worst people give you a Lesson. and Best people give you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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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움의변주(@gs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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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22
    베토벤 교향곡 1번

    서른이 되서야 표출된 베토벤의 자기다움
    서양음악사 가운데 유명한 신동 중 한 명이었던 멘델스존이 〈현악 8중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때 그의 나이는 16세였다. 그런가 하면 모차르트가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통해서 혜성같이 자신의 걸작을 선보이며 소년티를 막 벗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이에 비해 베토벤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장르였던 교향곡에서 〈1번〉을 통해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서른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이 작품을 통해서 베토벤의 음악은 새로운 얼굴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 곡을 작곡하기 8년 전, 베토벤은 자신의 후원자였던 발트슈타인 공작으로부터 “고향인 본을 떠나서 빈에 정착하라”는 조언을 듣게 된다. “하이든의 손을 통해 모차르트의 정신을 전수 받으라”는 것이 그의 주문이었다. 이 조언을 받아들여서 베토벤은 본을 떠나 빈으로 가게 된다. 빈에서 실제로 베토벤이 하이든을 만난 것은 불과 몇 번에 불과했지만, 빈은 베토벤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된다.

    충격적인 오프닝
    하이든이 살아있는 전설로 활동하고 있었고, 모차르트 죽음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도시인 빈에서 작곡된 베토벤의 〈교향곡 1번〉이 완전히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모델로 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첫 몇 마디만 들어보아도 우리는 이 작품이 베토벤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 시작부분에서 베토벤은 매우 특이한 시작을 보여준다. 작품은 C장조로 시작하지만, 음악이 진행되는 방향은 전혀 C장조의 전형적인 진행이 아니다. 오히려 이 진행은 듣는 이의 조성감각에 혼란을 주는데, 이것이 이 작품에서 베토벤이 보여주고 있는 대담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초연되었던 1800년 4월 연주회는 베토벤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 연주회는 베토벤의 첫 번째 공개 연주회이기도 했다. 베토벤 개인에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던 이 음악회에서 베토벤은 〈교향곡 1번〉의 충격적인 시작을 통해서 빈 청중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가장 기본적인 조성에서 가장 이례적인 방식으로
    베토벤이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의 조성으로 선택한 C장조는 아무런 조표도 붙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조성이지만, 다룬 방식은 절대 기본적이지 않았다. 베토벤이 비슷한 시기에 C장조로 어떤 음악을 작곡했는가는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보아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 두 작품 모두 강렬한 에너지와 낭만주의적인 부드러움을 적절하게 섞고 있는 동시에, 그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나게 될 평화로움과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에너지를 모두 보여주고 있다.

    18세기에 고별을 고하는 작품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음악평론가이자 음악학자였던 영국의 도널드 토베이 경(Sir Donald Tovey)은 이 작품을 두고 “베토벤의 18세기에 대해 고별을 고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 작품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전혀 회고적이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사실 베토벤은 이 작품에서 완전히 전형적인 18세기 사이즈의 오케스트라, 다른 말로 하자면 하이든의 마지막 작품과 정확히 같은 편성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작곡했다. 하지만 이 곡의 내용의 새로움과 풍부한 아이디어는 분명히 하이든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베토벤적인 조성감각과 리듬감각
    작품은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다. 1악장은 독특한 조성감각의 오프닝뿐만 아니라 갑작스러운 조성 변화와 놀라운 리듬 감각으로 가득 차 있다. 목관과 현악을 섞어서 탄생하는 음색은 꽤 모차르트적으로 들릴지도 모르나, 팀파니의 연타는 확실히 이 곡의 초연되었던 1800년의 감성에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자, 매우 베토벤적인 사운드라 할 수 있다. 3악장에서 매우 특징적으로 들리는 당김리듬의 미뉴에트는 이미 베토벤적인 스케르초의 색채를 지니고 있다. 3악장의 간결함을 뒤로 하면, 마지막 악장인 론도 악장은 다시 1악장 서주부의 오프닝을 떠올리면서 시작한다. 동시에 이 마지막 악장에서 베토벤은 하이든이 즐겨했던 유머 감각을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각종 스케일적인 패시지들은 이 곡의 매우 특징적인 부분이다. 특히 마지막 악장의 코다에서 들리는 이 스케일 패시지는 이 부분을 매우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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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21
    말러 - 대지의 노래

    동양적 색채로 연 후기 3부작

    말러가 교향곡 8번에 이어 발표한 9번째 관현악 작품 〈대지의 노래〉는 그의 후기 3부작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자, 그가 평생 추구해온 관현악과 성악의 만남이 절정에 이른 작품이기도 하다. 한스 베트게가 83수의 중국 시를 번역하여 출판한 〈중국 피리〉 중 6편의 시에 음악을 붙인 이 작품은 테너와 메조소프라노를 위한 노래를 번갈아 제시하고 있다.

    두 명의 성악가가 교대로 한 악장을 노래하는 독특한 구성 뿐 아니라,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동양의 색채를 짙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중국의 시를 가사로 선택했기 때문인지, 그는 5음음계를 중심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푸치니의 〈나비부인〉에서 소개된 일본음계도 사용하였다. 또한 가믈란 음악을 연상시키는 헤테로포니 풍의 불규칙한 유니즌을 제시하고 있으며 텅 빈 텍스처와 음향으로 한 편의 동양화 같은 여백의 미를 연출하기도 했다.

    대지(大地)의 노래, 죽음 그리고 말러의 새로운 태동을 알리는 노래
    말러의 음악은 거의 언제나 비관적인 정조를 내포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유달리 염세적이고 허무에 찬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시간을 초월한 듯한 부유하는 느낌이 작품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허무한 느낌은 당시 말러가 맞닥뜨렸던 세 차례의 비극적인 사건과 그로 인한 좌절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에 착수했던 1907년, 그는 빈 오페라 극장에서 사임해야 했고, 장녀 마리아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심지어 그 자신도 심장에 심각한 질병이 있음을 선고받고 죽음에의 공포에 시달렸다. 말러의 아내 알마는, 그가 이 작품은 교향곡 ‘9번’이 아닌 〈대지의 노래〉로 발표한 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베토벤이나 브루크너, 드보르작 등 말러가 존경했던 작곡가들이 교향곡 9번을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미신적인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딸의 죽음과 잃어버린 일터와 건강 등 한꺼번에 비극을 경험하면서 느낀 그의 절망과 불안이 이 작품 전반에 깊이 투영되어 있다. 이 가장 자전적인 교향곡은 결국 그의 생전에 연주되지 못했다. 그가 사망하고 몇 달 뒤인 1911년 11월, 말러의 제자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초연되었을 때, 말러를 사랑했던 수많은 음악가들이 감동과 회한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악장 구성
    1악장 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 노래, 빠르고 무겁게(Das Trinklied von Jammer der Erde, Allegro pesante)
    이백(李白)의 시를 기반으로 한 1악장은 A단조를 중심으로 하는데, 이 조성은 말러의 음악에서 비극과 염세적 관점을 상징하는 조성이다. 호른이 시인의 호탕한 취기를 묘사하듯 5음음계를 기초로 한 대지의 팡파르를 연주하면서 악장이 시작되고, 테너가 고음역의 선율을 1절과 2절을 노래한다. 발전부에 해당하는 3절은 오케스트라의 간주로 시작된다. 바이올린의 섬세한 트레몰로 위에서 트럼펫이 동양적인 느낌을 주는 선율을 연주하고, 뒤이어 잉글리시 호른이 낮게 연주하는 대지의 팡파르와 텅잉을 지속하는 플루트가 나른한 봄의 풍경을 묘사하는 가운데 테너는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다. 재현부에 해당하는 4절에서 테너는 격앙된 음성으로 울부짖고 모든 악기들이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흥분을 고조시킨다. 마침내 테너가 최고음에서 ‘삶은 어둡고’라고 외치면서 절정에 이르면, 곧바로 바이올린이 3옥타브에 걸쳐 순식간에 곤두박질치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코다에서는 대지의 팡파르가 다시 힘차게 울려 퍼지고 무겁고 단호한 트롬본의 저음이 울리면서 마치 삶의 문을 닫아버리듯 악장이 종결된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의 시를 기반으로하여 동양적 느낌을 준다.

    2악장 가을에 고독한 자 - 천천히 기어가는 것처럼, 지친 듯이(Der Einsame im Herbst - Etwas schleichend., Ermüdet)
    느린 8분음표로 조용히 물결치는 바이올린의 오스티나토가 관조적인 음향을 만들어내면서 한 편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며 악장이 시작되고, 시인은 ‘나의 마음은 지쳤노라’라고 노래한다. 말러는 성악가에게 ‘에스프레시보 없이 건조하게’ 노래하라고 지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창법으로 인해 고독한 가사가 더욱 쓸쓸한 느낌으로 전달된다. 담담하고 절제된 음악으로 전개되던 노래는 4절에서 감정을 폭발시키면서 절정에 이른다. 다이내믹을 억제해왔던 악기들이 포르티시모로 힘차게 터져 나오고 하프가 만들어내는 물결 위에서 목관이 열정적인 선율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절정은 조성이 단조로 바뀌면서 다시금 절망에 찬 탄식의 노래로 돌아가고 사라지듯이 악장이 마무리된다.

    3악장 청춘에 대하여, 편안하고 명랑하게(Von der Jugend, Behaglich heiter)
    말러는 청춘의 활기와 싱그러움을 노래한 3악장을 위해 가볍고 투명한 음향을 만들어내려 했다. 무거운 느낌의 트롬본과 팀파니를 제외하고 더블베이스와 트럼펫의 사용도 자제하였다. 가끔씩 들려오는 베이스드럼과 심벌즈의 울림은 민속음악 같은 느낌을 만들어내고 트라이앵글이 영롱한 느낌을 자아낸다. 작은 연못 가운데에 자리한 정자에 모여 환담하는 청년들을 묘사한 노래는 가벼운 음악으로 이어지다가 투명한 신기루처럼 종결된다.

    4악장 아름다움에 대하여, 편안하고 매우 부드럽게(Von der Schönheit, Comodo Dolcissimo)
    이백의 시를 가사로 한 4악장은 연꽃 따는 여인들을 묘사한 우아하고 서정적인 음악과 거칠게 말을 타고 등장한 한량들을 묘사한 격렬한 음악이 대조를 이루는 악장이다. 알토가 5음음계로 이루어진 부드러운 선율을 노래하고 목관과 현악성부가 섬세하게 반주하면서 여인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갑자기 템포가 빨라지고 트럼펫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면서 말 탄 한량들의 등장을 알린다. 이 부분에서 말러는 「대지의 노래」에서 유일하게 팀파니를 사용하고 있으며, 오케스트라의 총주 역시 1악장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면서 분위기의 급변을 충격적으로 제시한다. 첼로의 피치카토와 탬버린, 만돌린의 음색은 이국적 음색을 강조한다. 현의 질주는 더욱 박차를 가하고 가수는 빠른 리듬의 가사를 절규하듯 외친다. 폭력과 혼란이 가득했던 장면은 다시금 우아한 연꽃의 음악으로 돌아오면서 안정을 찾고 관현악의 긴 후주로 악장이 마무리된다.

    5악장 봄과 술을 노래하며, 빠르게(Der Trunkene im Frühling, Allegro)
    〈대지의 노래〉 중 두 번째로 제시되는 술노래인 5악장은 1악장과 마찬가지로 이백의 시를 기반으로 한다. 봄의 정취와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이 시를 말러는 저음부를 배제한 성악과 혼란스럽게 교차되는 성부진행으로 보다 취기어린 음향으로 표현했다. 호른이 호탕한 취기를 묘사하듯 5음음계의 팡파르를 연주하면서 악장이 시작된다. 이어지는 주제선율은 레가토의 느긋한 노래로, 유절형식으로 전개되다가 4절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노래로 진행한다. 동경하는 듯한 성악선율과 새소리를 모방한 목관성부가 봄의 정취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뒤이어 하프가 글리산도를 연주하면서 현악기와 관악기가 서로 성부를 어지럽게 교차하면서 만취한 시인의 심경을 허풍스럽게 묘사한다.

    6악장 고별, 무겁게(Der Abschied, Schwer)
    마지막 악장은 연주시간이 거의 30분에 달하는 가장 긴 악장으로,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과 왕유의 두 시를 하나의 음악으로 엮어내고 있다. 호른과 콘트라바순이 음산한 저음을 연주하는 가운데 탐탐이 공허하게 울리면서 음악이 시작되면, 하프와 첼로, 더블베이스가 무거운 피치카토를 연주하고 뒤이어 오보에가 구슬픈 선율을 연주한다. 첼로가 낮게 깔리는 가운데 알토가 ‘해는 서산으로 지고’로 시작되는 맹호연의 시를 레치타티보로 노래한다. 알토의 노래는 플루트의 오블리가토로만 반주되어 텅 빈 음향을 만들어냄으로써 한 편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뒤이어 하프와 클라리넷, 플루트가 잔잔한 시냇물을 묘사한 뒤 다시 알토가 새의 모습을 노래하고 목관이 새소리를 모방한 음형을 연주한다.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만돌린과 플루트가 신비로운 저음을 연주하는 가운데 알토가 서정적인 아리아를 노래한다. 아리아의 말미에 말러가 삽입한 ‘오 아름다움이여, 오 영원한 사랑과 인생에 취한 세상이여’라는 가사에서 음악은 절정에 이르고 곧바로 붕괴해 버린다.

    뒤이어 왕유의 시를 가사로 한 발전부가 음산하게 시작된다. 탐탐이 죽음의 그림자처럼 어둡게 울리고 잉글리시호른이 앞서 오보에가 연주했던 구슬픈 선율을 나지막이 반복한다. 뒤이어 목관이 비탄에 찬 칸틸레나를 연주한 뒤, ‘나는 간다네, 산속을 방황한다네’로 시작되는 아리아가 제시된다. 어둡고 쓸쓸한 노래가 이어지다가 조성이 장조로 변하면서 영원의 아리아가 시작된다. 하프와 첼레스타가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면서 청아하고 신비로운 천상의 음향을 연출하고, 가수가 ‘영원히’라는 가사를 끝없이 반복하면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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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21
    거문고의 유래와 특징
    거문고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현금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악기 중 음넓이가 가장 넓다. 고구려 때(552년경) 왕산악이 중국 진나라의 칠현금을 고쳐 만든 것이라고 한다. 왕산악이 이것을 탈 때 검은 학이 날아들어 춤을 추었다고 해서 현학금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현금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가야금과 더불어 우리나라 현악기의 쌍벽을 이루는 악기이다.


    앞면은 오동나무, 뒷면은 밤나무로 속이 비게 울림통을 짜고, 그 위에 명주실을 꼰 6개의 줄을 맨다. 3개의 줄에는 16개의 괘를 받쳐 놓았다. 연주할 때는 거문고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술대를 오른손에 낀 다음 왼손으로 패를 짚으면서 줄을 퉁겨 소리를 낸다. 술대는 가는 대쪽으로 만든 것으로 연필만 한 크기이다. 음정은 16개의 괘로 조절한다.

    가야금의 음색이 여성적이라고 한다면 거문고는 무게가 있어 남성적인 것으로 비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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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20
    음악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가장 거대한 악기인 ‘오케스트라’에 대해 알아보는 건 어떨까요? 오케스트라를 이루는 악기들의 모습과 소리를 이해하고 나면 어떤 음악을 듣더라도 각각의 악기 소리를 구별하고 그 미묘한 음색의 차이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보통 ‘오케스트라’(Orchestra)라는 말은 ‘여러 기악 연주자들의 집합체’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고대 희랍에선 연극을 공연하는 무대 앞의 반원형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하니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지요. 당시에는 연극을 공연할 때 합창단이 노래하고 춤을 추었던 장소를 오케스트라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6세기 말에 오페라가 발생하면서 악기 연주자들이 앉는 장소를 의미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악기 연주자들의 집합 자체를 오케스트라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하지만 악기들을 아무렇게나 모아놓는다고 해서 모두 다 오케스트라인 것은 아닙니다. 대편성 관현악곡을 연주하는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그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있거든요. 악기의 종류에 따라 현악기군과 목관악기군, 금관악기군, 타악기군의 네 가지 악기군을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심포니 오케스트라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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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20
    Joseph Maurice Ravel (1875.3.7~1937.12.28)

    〈볼레로 Boléro〉(1928)·〈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1899)·〈스페인 광시곡 Rapsodie espangnole〉(1907), 발레곡 〈다프니스와 클로에 Daphnis et Chloé〉(1912년 초연),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 L'Enfant et les sortilèges〉(1925) 등의 작품에서 형식과 양식의 완성미와 장인정신을 잘 나타냈다.

    라벨은 프랑스의 생장드뤼 근교의 마을에서 스위스인 아버지와 바스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예술적이고 교양이 풍부했으며, 어려서부터 라벨이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보이자 그의 아버지는 가능한 모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1889년 14세 때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1905년까지 다녔다. 이 기간 동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현악 4중주〉 등 잘 알려진 작품들을 작곡했다. 이들 작품들, 특히 뒤의 2개의 작품은 평생동안 그의 작품에 품질 보증과 같이 따라다니는 완성된 양식과 장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기의 작품이 완숙기의 작품보다 완성도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몇 안되는 작곡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파리 음악원 재학 당시 3번의 시도 끝에 로마 작곡 대상에서 낙선한 사건(음악학자·소설가인 로맹 롤랑을 비롯한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음악가와 저술가들은 라벨을 지지했고, 그가 제출한 작품은 심사원들 중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에게 너무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음)은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파리 음악원 원장 테오도르 뒤부아는 사임하고 그 자리는 라벨에게 작곡을 가르쳤던 가브리엘 포레가 맡게 되었다.

    그러나 라벨은 결코 혁신적인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는 조성(調性)에 기초한 당시의 형식적·화성적 기존 전통을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을 주로 썼다. 그러나 전통 음악 양식에 대한 그의 조작과 적용은 너무나 개성적이어서 바흐나 쇼팽 등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음악 언어를 창조해냈다.

    그의 선율은 거의 언제나 선법적(즉 서구의 전통적인 장·단 온음계가 아니라 옛날 그리스의 프리지아와 도리아 선법에 근거함)인 데 반해, 그의 화성은 '부가음'과 아포자투라를 화성적으로 해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신선한 맛을 풍긴다. 그는 초기의 〈물의 유희 Jeux d'eau〉(1901 완성)에서부터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1908)·〈쿠프랭의 무덤 Le Tombeau de Couperin〉(1917), 2개의 피아노 협주곡(1931)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걸작들을 통해 피아노 문헌을 풍부하게 확장시켰다.

    협주용이 아닌 순수한 관현악 작품 가운데 〈스페인 광시곡〉과 〈볼레로〉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것들은 관현악법의 완벽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활동의 절정은 러시아의 안무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프랑스의 작가 콜레트와의 공동작업으로 탄생시킨 작품들일 것이다. 라벨은 디아길레프의 발레를 위해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작곡했고, 그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은 콜레트의 대본에 의한 작품이다.

    〈어린이와 마술〉에서 라벨은 개구쟁이 소년이 등장하는 마법·마술 이야기 속에 동물들을 등장시키고,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등 기발하고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 기회를 가졌다. 그외의 오페라로는 풍자적 내용을 담은 〈스페인의 한때 L'Heure espagnole〉(1911 초연)뿐이었다.

    가곡 작곡가로서 라벨은 〈자연의 역사 Histoires naturelles〉·〈스테판 말라르메의 3편의 시 Trois poémes de Stéphane Mallarmé〉·〈샹송 마데카스 Chansons madécasses〉 등의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으로 위대한 개성을 성취했다.

    라벨의 생애는 대체로 평이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몇몇 친구들과의 사교 모임을 즐겼지만 파리 근교 랑부예 숲의 몽포르라모리에 은둔하다시피 지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잠시 전선에서 트럭 운전병으로 복무했는데 허약한 체질로는 감당하기에 벅차 1917년 육군에서 제대했다.

    1928년 4개월 동안 캐나다와 미국 여행길에 올랐으며, 같은 해 영국을 방문하여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명예 음악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해에는 독창적인 형식의 〈볼레로〉가 이다 루빈슈테인의 주역으로 발레 작품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죽기 전 마지막 5년 간은 실어증에 시달렸다.

    이 병으로 인해 언어력을 상실했으며, 단 한 줄의 음악도 더이상 작곡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서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진짜 비극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의 음악적 상상력이 다른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뇌로 통하는 혈관의 폐색(閉塞) 제거 수술은 성공하지 못했고, 스트라빈스키와 다른 음악가들과 작곡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살았던 파리 교외의 르발루아 공동묘지에 묻혔다.

    라벨에게 있어서 음악은 신비한 제식(祭式)과도 같아서, 높은 장벽 뒤에서 작용해 외부세계로부터 감춰져 있으며 부당한 침입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독자적 법칙을 가졌다.

    동시대인인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을 '가장 완벽한 스위스의 시계제조업자'에 비유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사실 이 비유를 통해 그 스스로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복잡성과 정확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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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19
    에릭사티를 듣는 밤



    최형심







    에릭사티를 듣는 밤, 집집마다 마을이 있어 나뭇잎이 서성이는 창밖이 여섯.

    음악이 흐르는 동안 이곳은 고요의 잠복기에 든다.

    강의 심연이 한 방울의 빗소리로 내려온다.

    강의 밑바닥을 생각하며 자주 눈을 깜빡거려야 할까 하얀 수련과 인연을 다하는 날,

    우리는 옆으로 누워 문을 여닫는 수생의 뿌리가 될 것이다.



    가난이 낙수 소리 곁에 가만히 앉아

    어둠을 건너가는 신발의 무늬를 듣는다.

    온밤 내내 비의 풍경에 흔들리는 공중의 마음이나 될까

    꿈속까지 엄습해오는 외딴 섬과 돌 벽 틈새에

    맹세를 묻은 이교도와 늙은 천문학자의 무릎으로 나가 소리의 밀거래를 만난다.

    우리는 구전(口傳)의 부리를 가졌으나

    흑백으로 조우할 수 있는 거리의 망명자가 될 것이다.



    적막에 든 편지의 매립지에는 제 살을 벗겨 슬퍼질 수 있는 것들만 있다.

    그리하여 긴 안부의 말을 묻기 위해 단어들에 음절이 생기면

    정물화 속 흑점은 생멸하는 것들의 고해가 된다.

    어깨가 들썩이는 풀빛을 위하여

    빗소리의 밖까지 나가 귀를 묻을 때

    온종일 문 앞을 서성이는 백발은 오래 흔들린 것들이다.



    반복적으로 관절을 허무는 손과 꽃을 말하기에 게을렀던 입을 반성한다.

    비로소 네 개의 거울을 빌려 사방이 되는 침묵이 거기 있다면

    우리는 음과 음의 입술로 벌거벗은 강을 소요할 것이다.

    별을 향해 떠나기 전

    물질을 서두르는 천공의 한가운데,

    나무가 갈라지며 날아오르는 새들의 소리가 고요의 내부를 소등하면

    우리는 일찍 잠든 연인의 곁으로 가 밤이 되어야 한다.







    —서울대〈대학신문〉2012. 10. 15 개교66주년기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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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심 / 1971년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 수료. 2008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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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18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1830), 합창이 있는 교향곡인 〈로미오와 줄리엣 Roméo et Juliette〉(1839)·〈파우스트의 저주 La Damnation de Faust〉(1846)가 대표작이다.

    말년에 그의 명성은 국외로 널리 퍼졌으며 고향에서도 환대를 받았다.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강한 개성(극적 표현력과 다양함)으로 청중에게 열광과 혐오의 양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러한 극단적 변모로 인해 사람에 따라서는 똑같은 그의 작품이라도 어떤 곡은 무척 좋아하면서도 또다른 곡은 싫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이것은 셰익스피어는 좋아하지만 〈오셀로 Othello〉는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등 특정한 나라의 전통보다는 좀더 근원적인 음악의 뿌리를 탐색했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난해했다.

    그의 선율은 풍부하면서 확장되어 있어 4마디로 이루어진 악구(樂句)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며, 그의 화성은 모호하고 미묘하지만 언제나 기능적이며 음색의 요소들에 자주 의존하고 있다. 조바꿈은 거칠며 다른 작곡가들의 경우보다 더 조잡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이는 그가 절제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절묘한 대조를 통한 조바꿈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관현악법은 일반적으로 밝고 투명하지만 결코 창백하지는 않다. 조지 버나드 쇼는 "어떤 지휘자도 베를리오즈·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듣기 전에는 음악적 인상에서 최고로 민감한 지휘자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벨기에의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는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모든 작품이 걸작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베를리오즈의 작품 하나하나는 일련의 작품들 가운데 마지막, 혹은 최상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완벽함을 잃지 않으려는 계속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그 각각마다 서로 다른 독창적인 개념을 구현한 것임을 뜻한다.

    프랑크의 판단은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베를리오즈는 거의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히려 그는 어떤 것에 대한 친숙함은 다른 것에 대한 손쉬운 접근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결론에서 주제 하나하나를 위한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다. 한 작곡가의 작품인데도 〈장송과 승리의 교향곡〉·〈로미오와 줄리엣〉·〈그리스도의 어린시절〉만큼 서로 닮지 않은 작품도 없을 것이다. 그의 화성체계는 시종 같아 보이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보편적인 기대에서 현저하게 벗어나 있는 화성에 기인하고, 또 한편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서투른 시도로 보는 대신 있는 그대로 감상되어야 하는 뉘앙스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그의 선율과 자유분방한 대위법은 작품 어디에나 나타나 있는 특징인데, 선율은 강렬한 독창성과 역동적인 균형을 가지고 있으며 대위법은 능숙하면서도 소탈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적 요소들 말고도 베를리오즈는 각각의 오페라와 그 등장인물들에게 서로 다른 개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 작품들 각각을 반복해서 듣는 것만이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힘과 미적 차원(심리적 차원을 포함하여)에 대한 안목을 열어줄 것이다.

    물론 이들 작품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작품 하나하나에 특이한 개성을 부여했다는 말은, 곧 다른 작곡가라면 결코 제시할 수 없는 독특한 개념을 각 작품 속에 구현했음을 뜻한다.

    극과 분위기의 창조에 있어 베를리오즈는 우수, 자기 성찰, 부드럽고 격정적인 사랑, 자연에 대한 명상, 군중의 소동 등을 다루는 장면에서 탁월했다. 그의 일관된 의도는 진실과 음악 감각의 결합이었다. 이때 음악 감각은 강렬할 수도 있지만 또 한편(다시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한다면) '가늘고 섬세하며 세상의 것이 아닌 예기치 않은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를리오즈의 음악에 관한 보다 신중하고 냉철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첨가하고 인용할 필요가 있다.

    1935년 존경받는 영국의 음악학자 도널드 토비 경은 〈트로이 사람들〉을 처음 듣고는, 이 작품은 '음악극 분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설득력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결코 베를리오즈의 진가를 모른다"라고 했다. 분명한 것은 19세기에 저술된 책들은 바그너나 드뷔시에 대한 편견이 있든 없든 간에 학생들을 잘못 인도할 것이며 청중의 귀를 막을 수도 있는 것이다.

    베를리오즈를 단순히 관현악의 재료적 측면을 개발한 데 불과한 음색의 기술자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행히도 서구 전역에서는 그의 주요작품들이 계속 반복적으로 연주되면서 베를리오즈를 최고 수준의 극적인 작곡가로 보는, 보다 수긍할 만한 견해가 한편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1945년 이전에는 베를리오즈의 작품 가운데 정규 레퍼토리에 포함된 것은 〈환상 교향곡〉과 몇 곡 되지 않는 짧은 발췌곡뿐이었다.

    청중의 충분한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연주된 그의 대작들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으며 그들을 그대로 묻어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LP 음반의 등장은 상황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청중은 이제 연주자들의 해석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베를리오즈 작품의 연주에 대해서도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사전 지식과 비평적 태도를 가지고 듣게 되었다.

    초기 활동
    베를리오즈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 알프스 지역의 그르노블에서 북서쪽으로 약 56km 떨어진 곳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학교는 엉망이었으나 베를리오즈는 교양을 갖춘 계몽된 의사였던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았는데 아버지는 그에게 라틴어뿐만 아니라 음악도 가르쳤다. 그러나 다른 많은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베를리오즈는 어린시절에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스스로 화성법을 공부하고 12세 때 지방 실내악단을 위한 곡을 작곡했다. 연주자들의 도움으로 플루트와 기타를 배웠으며 기타 연주는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1821년 그의 아버지는 의학을 공부시키려고 그를 파리로 보냈고 그는 1년 동안 첫번째 학위를 얻을 수 있도록 교과 과정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는 기회만 생기면 파리 오페라단의 공연을 보러 갔으며, 그곳에서 손으로 악보를 베끼면서 전체 레퍼토리를 공부했고 특히 글루크의 작품에 깊이 매료되었다. 마음속에 음악에 대한 소명의식이 분명히 자리잡게 되자 파리 음악원 작곡교수였던 장 프랑수아 르쉬에르의 제자가 되었다. 이 일로 베를리오즈는 그의 인생에서 거의 8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부모와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는 끝내 의지를 굽히지 않고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1830년 마침내 로마 대상을 받았으며 그 이전 대회에서는 2등상을 받았다. 이러한 성공으로 가족과의 관계는 회복되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음악 경력에서 이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다. 같은 해 그의 첫번째 대작이자 19세기의 신기원을 이룩한 작품인 〈환상 교향곡〉을 작곡하여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성공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고 로마 대상의 특전으로 부여된 2년 동안의 이탈리아 체재를 포함한 3년간의 외국생활은 어떤 측면에서는 그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파리에서 오랜 견습 기간에 그는 베토벤과 베버, 그리고 위대한 두 시인 셰익스피어와 괴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파리를 떠들썩하게 했던 셰익스피어 배우인 해리엇 스미드슨을 먼발치에서 사랑하게 되었고, 이 짝사랑의 열병에서 벗어난 후 그는 재능있고 아름다운 피아니스트인 카미유 모크(후에 플레이엘 부인)와 약혼했다. 로마 대상의 의무 조항으로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면서 그는 약혼녀는 물론 창작력을 자극했던 예술적 환경까지 버려야 했다. 그는 결국 천재적 감각으로 근대 프랑스 음악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셈이 되었다.

    대중은 17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파리 악파'에 만족해 있었고,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있는 빈을 포함한 모든 유럽 지역은 앙드레 그레트리, 에티엔 메윌, 루이지 케루비니 등이 작곡한 작품을 환영했다.

    반면 베를리오즈는 베버와 베토벤의 작품들(마지막 현악 4중주를 포함한)을 내세우려 했고 자신의 작품이 그 대열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또한 그는 음악의 극적 표현을 위해 그가 잘 알고 있는 무대음악의 대가인 글루크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베를리오즈에게 있어 음악은 무엇보다 먼저 극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으며, 이들 세 음악가는 모두 일면 극작가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1823년 첫번째 음악 평론에 이미 이 강령이 나타나 있으며 초기의 이러한 예리하고 강렬한 시각은 완숙기에 가서도 예술적 근원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지적이고 직관적인 시각의 바탕을 이해하려면 그의 정력적인 활동이 추구하는 바를 이해해야만 한다.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연주되게 하려는 자기 본위의 끊임없는 노력은 사실 엄청난 정력이 필요했다. 독일, 벨기에,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지로의 잦은 여행의 결과로 그는 유럽 굴지의 관현악단에 새로운 양식을 전파했으며, 반대로 그들을 통하여 젊은 작곡가와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는 비평가들에게 새로운 음악 어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전파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에서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회고록 Mémoires〉(1870)에서 〈환상 교향곡〉은 물론 오라토리오와 수많은 칸타타, 24편의 가곡과 2편의 서곡, 미사와 오페라의 일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Tempest〉에 붙인 환상곡, 괴테의 〈파우스트 Faust〉의 8장면의 음악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쏟아냈던 파리 시절 이후 얼마나 그가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냈는가에 대해 쓰고 있다.

    그러나 심지어 이탈리아에서도 베를리오즈는 창작 노트를 채우고 러시아의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를 만났으며 멘델스존과는 평생의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기타를 어깨에 메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그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 농부들과 유랑민들을 위해 연주를 했다. 이탈리아에서 받았던 인상은 〈트로이 사람들 Les Troyens〉과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 Béatrice et Bénédict〉(1862 초연) 등 마지막 작품에까지 음악적·극적 영감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그러는 동안 연애는 시들해졌고 로마의 메디치 저택에서의 생활을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18개월의 유랑생활 끝에 파리로 돌아왔으며 로마 대상의 나머지 특전은 박탈되었다.

    완숙기의 활동
    방랑생활에서 파리로 돌아온 그는 다시 파리 무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초기 작품을 가지고 당시 유행하던 모노드라마(한 사람의 연기자에 의한 낭송에 음악적으로 처리된 장면이 군데군데 삽입됨)의 형태로 재구성했다. 〈환상 교향곡〉이 주인공의 고통과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에 베를리오즈는 그의 이 새로운 작품을 〈생활로의 복귀 Le Retour à la vie〉(나중에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렐리오 Lélio〉라 했음)라 불렀다. 1832년 초연되었고 그 안에 3~4곡의 쾌활한 소품을 포함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베를리오즈는 다시 시작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들은 1833년 10월 3일에 결혼했다.

    처음 몇 년 동안 그들 부부는, 후에 모리스 위트리요가 그림을 그렸던 몽마르트의 집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곳을 찾았던 방문객들 가운데는 알프레드 드 비니와 쇼팽을 포함한 낭만주의 운동에 동참한 젊은 시인들과 음악가들도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그곳에서 유일한 후손 루이를 얻었으며, 진혼곡 〈죽은 자를 위한 대미사 Grande Messe des morts〉(1837), 교향곡 〈이탈리아의 아롤드 Harold en Italie〉(1834)·〈로미오와 줄리엣〉(1839),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1838, 파리)를 작곡했다.

    〈이탈리아의 아롤드〉 초연 이후 베를리오즈는, 유명한 바이올린의 거장 파가니니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베를리오즈야말로 베토벤에서 시작된 새로운 음악 전통을 계속 수행해나갈 운명을 타고난 천재라고 단언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다음날 베를리오즈는 파가니니로부터 그 찬사를 되풀이하는 편지와 함께 2만 프랑을 받았다. 그 돈으로 원고 쓰는 일에서 해방된 그는 합창을 포함한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하여 파가니니에게 헌정했다. 파리에서 작곡가들은 어떤 성향을 가졌든 간에 으레 파리 오페라단에서 자신의 재능을 시험받고 싶어했다. 베를리오즈의 친구들이 오페라 대본을 손에 넣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결과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을 각색한 대본이 확보되었고 베를리오즈는 짧은 시간 안에 그 악보를 완성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파리 오페라단에서 〈벤베누토 첼리니〉의 공연은 실패로 끝났다. 이 타격 이후 프랑스에서 이 작품과 베를리오즈의 평판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음악이 좋았으나 대본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것은 대본과 음악 둘 다의 성질을 제대로 모르는 판단에 불과하다.

    진혼곡 〈죽은 자를 위한 대미사〉(1837)는 로마 대상을 받은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기념행사에 사용하려고 정부에서 위촉한 작품이다.

    공공 행사를 위해 위촉된 또 다른 군악대·합창·현악을 위한 〈장송과 승리의 교향곡 Symphonie funèbre et triomphale〉(1840)은 7월 혁명 10주년을 위해 위촉된 작품으로 〈벤베누토 첼리니〉의 실패에 대한 위안을 삼고자 작곡한 것이다. 몇 해 전 베를리오즈는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파리의 대표적인 일간지 〈주르날 데 데바 Journal des Débats〉의 음악 평론가가 되었는데, 때마침 그의 고용주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장송과 승리의 교향곡〉의 악보는 바스티유 부대의 출발을 위해 준비되었다. 그러나 그 음악은 불행하게도 드럼 대열의 소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게 되었고, 베를리오즈는 다음달에 연주회장에서 이 음악을 다시 연주함으로써 그때의 실패를 만회했다.

    당시 파리에서 명성을 얻고 있던 바그너는 이 작품에 대해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베를리오즈는 바그너를 음악 잡지 평론에 소개했고 30년 동안 지속된 두 사람의 변덕스러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근대 음악에 미친 영향은 마치 이념의 싸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베를리오즈는 오직 음악을 통한 극의 창조를 목표로 했으나 바그너는 교향곡과 오페라의 결합을 시도했다. 1855년 두 사람은 런던에서 다시 만나 서로 기질이 닮았음을 알았지만 철학의 차이가 여전히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1840년 이후 베를리오즈는 계속되는 유럽 연주여행을 강행했는데 마지막 여행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1867년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무리한 일련의 연주들이 되었으며 당시 그는 극도로 병세가 악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연주는 악보와 연주를 통해 러시아 5인조, 특히 무소르크스키에게 자신의 음악 양식을 소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명지휘자였던 베를리오즈는 지휘자들의 결함을 보완하여 새 법칙을 따르는 새로운 음악으로 이끌었다. 즉 그의 주문은 악보에 있는 대로 연주하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의 악보에 나타나 있는 난해한 리듬과 생소한 선율 굴절은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관현악 단원들은 새로운 정확성, 활력, 앙상블을 습득해야 했고 이것은 베를리오즈의 몫이었다. 바그너의 회상은 그가 1839년 베를리오즈의 지휘에서 경험했던 '신세계의 발견'을 증언하고 있다.

    베를리오즈는 관현악법에 관한 대표적 저서인 〈근대 악기 편성법과 관현악법의 특징 Traité d'instrumentation et d'orchestration modernes〉(1844)을 썼다. 기술적인 지침서 이상의 가치를 지닌 이 책은 다음 세대에서는 음악의 표현 미학에 대한 입문서가 되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보여주었듯이 그 원리는 바흐에게도 적용할 수 있으며 이른바 표제음악에 대한 생각에 지배받지도 않는다. 표제음악에 대한 베를리오즈의 공헌은 첫번째 교향곡 악보에 함께 인쇄된 '이야기'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 교향곡도 표제가 없이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베를리오즈의 극음악 가운데는 〈파우스트의 저주〉(1846)와 〈그리스도의 어린시절 L'Enfance du Christ〉(1854)의 두 작품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또다른 두 작품이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했는데, 베르길리우스의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거대한 2부작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1855~58)과, 셰익스피어의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을 기초로 작곡된 짧고 익살스러운 코미디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1860~62)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이 모든 작품들의 대본은 베를리오즈 자신이 직접 썼다.

    그는 또한 진혼곡의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주 찬양 Te Deum〉(1849, 초연 1855)을 작곡했으며, 1843~56년 연가곡집 〈여름밤 Les Nuits d'été〉을 포함한 자신의 가곡들을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서곡인 〈리어 왕 Le Roi Lear〉(1831)과 〈로마의 사육제 Le Carnaval romain〉(1844)는 〈벤베누토 첼리니〉와 〈해적 Le Corsaire〉(1831~52)에서 각각 그 소재를 취한 것이다.

    말년에 베를리오즈는 질병으로 무력하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죽음으로 상심했다.

    1854년, 이혼했지만 그때까지도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첫번째 부인이 죽었고, 여러 해 동안 그의 동반자였으며 1862년 그가 홀로 되었을 때 결혼했던 2번째 부인 마리아 레치오도 갑자기 죽었다. 게다가 말년에 그가 애정을 쏟았던 아들 루이는 선장으로 일하다가 33세에 아바나에서 황열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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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17
    Listz

    대표적 작품으로 12개의 교향시와 2개의 피아노 협주곡, 여러 개의 종교 합창곡, 헝가리 광시곡, 다양한 피아노 독주곡 등이 있다. 당대 최고의 거장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는 피아노 연주기법을 혁신시켰고, 오늘날 보편화된 '피아노 독주회'를 최초로 만들어냈다. 피아노를 위한 새로운 작곡 기법들을 고안해냄으로써 근대 피아노 연주법에 중대한 기초가 되었다.

    서로 다른 형태를 띤 1~2개의 주제가 작품 전체의 기초로 사용되는 관현악을 위한 교향시와 '주제 변형'이라는 기법을 고안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바그너 악극의 주도동기를 낳게 했다. 그는 또한 당대의 화성 어휘를 주목할 만하게 넓혔으며 만년의 작품 중 일부는 20세기 화성을 예견하기도 했다(→ 무조성). 당대의 주도적인 예술가와 사회 명사들과 사귀었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나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를 비롯해 그때까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대가들의 음악과 엑토르 베를리오즈, 로베르트 슈만, 리하르트 바그너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를 촉진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노르웨이 작곡가 에드바르드 그리그, 러시아의 밀리 발라키레프, 알렉산드르 보로딘,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 등 젊은 작곡가들을 도왔고, 훗날 많은 피아노 거장들로 성장한 여러 제자들을 가르쳤다.

    700곡이 넘는 작품 외에도 리스트는 프레데리크 쇼팽, 헝가리 집시 음악, 바그너의 〈로엔그린〉·〈탄호이저〉, 존 필드의 야상곡, 로베르트 슈만의 리트, 바이마르의 괴테 기금 등에 대한 책을 썼다. 출판된 그의 논문이나 편지들도 몇 권의 분량이 되었다. 당대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인물이었으며 혁신적인 성향으로 인해 사람들의 공격 대상이 되거나 화려함과 허세로 질투를 받기도 했다.

    리스트는 오랫동안 화려하기만 하고 내용은 없는 작곡가로 여겨졌지만, 근래에 들면서 당대 음악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이후의 여러 변화들을 예견한 작곡가로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의 말대로 '리스트는 미래를 향해 창을 내던진 인물'이었다.

    초기생애


    리스트의 아버지인 아담 리스트는 니콜라스 에스테르하지 공을 모시던 관리로 그가 거주하던 아이젠슈타트 궁정에는 요제프 하이든, 루이지 케루비니, 요한 후멜 등 유명한 음악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재능있는 아마추어 음악가였으며, 궁정 연주회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리스트는 5세 때 이미 피아노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곧 아버지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교회음악과 집시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2년을 보내는 등 종교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일찍이 8세에 작곡을 시작했고, 9세 때 쇼프론과 포조니(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피아니스트로서 처음으로 공개 연주회를 가졌다.

    그의 연주에 감동을 받은 헝가리 귀족들은 기금을 모아 리스트로 하여금 이후 6년간 음악 교육을 받도록 했다. 공직에서 휴직한 아버지의 인도로 빈에 가서 베토벤의 제자이며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카를 체르니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게 되었고, 빈 궁정의 음악감독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작곡 레슨을 받았다.

    빈에서 가진 리스트의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연주회에 참석한 베토벤이 어린 신동의 이마에 입맞추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실제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리스트가 베토벤을 만난 것만은 분명하다.

    1823년 리스트는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계속해서 연주회를 열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파리 음악원 입학을 거절당했고, 대신 하이든의 형제인 미하엘의 제자이며 음악이론가였던 안톤 라이하와 파리 테아트르 이탈리엔 극장의 음악감독이자 경가극 작곡가였던 페르디난도 파에르에게 배웠다.

    1824년 3월 7일 파리 데뷔에서 사람들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이후 계속해서 파리 연주회와 영국 방문 연주회를 열었다. 이듬해 영국을 다시 방문하여 윈저 성에 있는 조지 4세 앞에서 연주를 했고, 맨체스터에서는 〈새로운 대서곡 New Grand Overture〉을 초연했다. 이 곡은 그 자신이 지은 단막 오페라 〈동 상슈 Don Sanche〉(〈사랑의 성 Le Château d'amour〉이라고도 함)의 서곡으로 만든 것인데 1825년 10월 17일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1826년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순회 연주한 뒤 다음해 영국에 다시 돌아왔다. 신경쇠약증에 시달렸던 리스트는 신부가 되고 싶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를 불로뉴 해변으로 데려가 요양을 시키던 아버지는 그곳에서 장티푸스로 죽었다. 파리로 돌아온 리스트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기를 원했지만 어머니는 잠시 그의 곁에 머물다가 리스트가 순회공연중 오스트리아의 스티리아로 다시 돌아갔다.

    리스트는 주로 피아노 교습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게 되었고, 1828년 제자 중의 한 사람과 사랑에 빠졌으나, 제자 아버지의 반대로 또다시 심한 신경쇠약증에 걸렸다.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러 그의 사망 부고(訃告)가 신문에 실릴 정도가 되었다. 건강을 회복한 뒤에도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고 이제까지의 음악 활동에 회의를 느꼈다. 1년 이상 피아노에 손을 대지 않았고, 신부가 되고자 하는 뜻이 어머니에 의해 계속 좌절되어 종교적 염세주의를 경험했으며 화려한 연주 활동을 혐오하게 되었다. 폭넓은 독서와 알퐁스 드 라마르틴, 빅토르 위고, 하인리히 하이네 등 당대 위대한 예술가들과의 만남으로 부족한 교육을 보충했다.

    1830년 7월 혁명 때 샤를 10세가 왕위에서 내려오고 루이 필리프가 새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혁명교향곡 Revolutionary Symphony〉의 초안을 썼다.

    1830~32년 리스트는 그의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될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1830년말 엑토르 베를리오즈를 만나 그의 〈환상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의 초연을 듣게 된 그는 베를리오즈로부터 관현악법과 악마적 표현을 배웠고, 이후로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33년 〈환상교향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는 놀라운 일을 해냈고, 베를리오즈의 다른 작품들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여 직접 연주했다. 1831년 3월 2번째로 만난 사람은 니콜로 파가니니인데, 그의 연주를 접한 리스트는 장인적 연주에 흥미를 느낀 나머지 파가니니의 환상적인 바이올린 효과를 피아노로 표현해낼 것을 결심했고, 실제로 파가니니의 〈종 La Campanella〉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작곡했다.

    3번째로 만난 사람은 프레데리크 쇼팽으로, 그의 시적인 음악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중기생애
    마리 아구 백작 부인과의 만남
    1834년 리스트는 라마르틴의 시 모음집을 바탕으로 만든 모음곡 〈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 Harmonies poétiques et religieuses〉과 3부분으로 된 모음곡 〈환영 Apparitions〉으로 성숙한 작곡가로 부상했다.

    이 작품들의 서정적인 양식은 이전의 작품들과 현저한 대조를 보였고, 이것은 스승인 체르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같은 해 시인이자 극작가인 알프레드 드 뮈세를 통해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 다구 백작의 부인 마리 드 플라비니를 만났으며, 플라비니(마리 아구 백작 부인)와 연인 사이가 되었다. 1835년 플라비니는 남편과 가족을 떠나 스위스에서 리스트와 살게 되었다. 12월 18일 둘 사이에 첫딸인 블랑딘이 태어났고, 가끔 리스트가 파리를 방문하기도 했으나 두 사람은 주로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지에서 4년 동안 같이 살았다.

    리스트는 새로 설립된 제네바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예술가의 지위에 대하여 On the Position of Artists〉라는 일련의 논문을 출판했다. 리스트는 이 글을 통해 그때까지만 해도 고급 하인 정도로 취급받던 예술가의 지위를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위로 향상시키고자 했다.

    리스트는 각기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풍경을 시적으로 그린 〈순례의 해 Années de pélerinage〉의 첫 2권에서 다구 백작 부인과의 만남을 축하했다.

    또한 젊은 시절에 쓴 〈48개의 연습곡 Étude en 48 exerices〉을 바탕으로 여기에 연주적 측면을 강화시킨 〈초절기교연습곡 Transcendental Studies〉의 첫 판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6개 작품들(5개 연습곡과 환상곡 〈종〉)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했고, 베토벤의 교향곡 3곡, 슈베르트의 가곡 몇 곡, 그밖에 베를리오즈의 작품 등도 편곡했다.


    이러한 편곡 작업으로 사람들에게 편곡 전 원래의 작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고, 그결과 그다지 사람들의 눈에 들지 못하던 이 작품들을 널리 보급시켰다. 또한 당시의 인기 오페라들과 수많은 환상곡을 작곡해서 청중에게 감동을 주었다. 1837년 2번째 딸인 코지마와 1839년 아들 다니엘이 태어났지만, 그해말 플라비니와의 사이가 나빠져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파리로 가버렸다. 리스트는 본에서 베토벤 기념비 완공을 목적으로 발족된 베토벤 기념 위원회 기금 마련 연주회를 계기로 다시 거장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8년 동안 유럽 전역에 순회 연주를 다녔고, 아일랜드·포르투갈·터키·러시아 등지에서도 연주회를 열었다.

    여름이면 마리 드 플라비니와 아이들과 함께 라인 강 노넨베르트 섬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다. 그러나 1844년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되었고, 리스트는 아이들을 파리로 보냈다. 그동안 리스트는 거장 연주자로 인기 절정에 올랐으며 어느 곳에서나 열렬한 갈채와 선물 공세가 쏟아졌다. 또한 애인도 많았는데, 그중에는 무용수 롤라 몬테츠,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 〈춘희 La Dame aux camélias〉의 모델이 된 마리 뒤플레시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리스트는 계속해서 피아노곡뿐 아니라 가곡 등을 작곡했다.

    1839~40년에는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헝가리를 방문했고,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리스트는 집시 음악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갖게 되었고, 이것은 〈헝가리 광시곡 Hungarian Rhapsodies〉을 비롯한 헝가리풍으로 된 그의 여러 작품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1845년 베토벤 축제를 위해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그의 최초의 칸타타 1곡과 그밖에 합창 소품 몇 곡을 작곡했다.

    바이마르에서의 작품활동
    1847년 2월 리스트는 키예프에서 카롤리네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폴란드에 있는 그녀의 저택에서 얼마간 보냈다.

    얼마 안 지나 그녀는 리스트에게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을 그만두고 작곡에 전념할 것을 권했으며 리스트는 그해 9월 옐리자베트그라드(키로보그라드)에서의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을 끝마쳤다. 1843년 독일 바이마르 궁정에서 음악 감독을 지냈고 1844년 이후 그곳에서 연주회를 열어왔으며, 1848년에는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을 불러들였지만 남편과 이혼하고자 한 그녀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둘은 알텐부르크에서 동거했다. 리스트는 궁정 악단의 오페라나 연주회를 지휘했을 뿐 아니라 작곡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 기간이야말로 리스트가 최대로 창작에 몰두할 수 있던 때였다. 12개의 교향시를 작곡했고, 이밖에도 〈파우스트 교향곡(3명의 인물묘사에 의함) Eine Faust-Symphonie in drei Charakterbildern〉·〈단테 교향곡(단테의 〈신곡〉에 의한 교향곡) Eine Symphonie zu Dantes Divina Commedia〉, 피아노 소나타, 2개의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죽음의 춤 Totentanz〉, 〈초절 기교 연습곡〉 수정판,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초절 기교 연습곡 Etudes d'exécution transcendante d'après Paganini〉 수정판, 〈순례의 해〉 Ⅰ, Ⅱ집 수정판, 합창곡 등 수많은 작품들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 중 어떤 것들은 1849년 이전에 초고를 적어놓은 것이긴 하지만, 당시 리스트의 작품 창작은 수적인 면에서만도 엄청난 것이었다.

    당대 전위적 작곡가들은 바이마르를 최첨단 작품을 접할 수 있는 도시 중 하나로 꼽았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리스트에게 배우러 왔다. 이른바 신독일악파에 속한 사람들은 모더니즘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이것은 당연히 전통적인 음악 이론을 추구하는 음악가들을 분개하게 했다.

    바이마르 궁정에 속한 일부 음악가들은 리스트가 계속해서 바그너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리스트는 1849년 바그너가 정치적 행동으로 독일을 탈출해 스위스로 도망가는 것을 도왔음). 엄격한 도덕성을 지닌 바이마르의 시민들은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이 공공연하게 리스트와 동거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개했고, 바이마르의 대공 부인은 러시아에 있는 오빠 니콜라스 1세로부터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의 궁정 내 모든 활동을 금지시켜 달라는 압력을 받았다.

    더구나 애초에 리스트를 임명한 바이마르 대공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후임자는 음악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결국 리스트는 5년 뒤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후 1861년까지 바이마르에 계속 머물렀지만 그는 점점 더 수세에 몰렸다. 1859년 아들 다니엘이 20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리스트는 깊은 슬픔에 싸여 관현악을 위한 3개의 장송 송가 중 첫번째 곡 〈죽은 자들 Les Morts〉로 아들의 죽음을 위안했다. 1860년 5월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은 교황에게 러시아에 있는 남편과의 이혼을 허락 받기 위해 바이마르를 떠나 로마로 갔고, 그해 9월 리스트는 정신 혼란의 상태에서 유언을 할 정도였다.

    리스트는 이듬해 8월 바이마르를 떠났고, 베를린과 파리를 여행하고(거기서 마리 아구 부인을 만나게 됨) 로마에 도착했다. 리스트와 비트겐슈타인 후작부인은 리스트 50세 생일에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교황이 후작과의 이혼에 대한 허락을 취소했다. 이후 둘은 로마에 남았지만 서로 다른 곳에 있었다.

    후기생애
    로마에서의 8년
    다음 8년 동안 리스트는 주로 로마에서 살면서 종교음악에 더욱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오라토리오 〈성녀 엘리사베트 전설 Die Legende von der heiligen Elisabeth〉·〈그리스도 Christus〉 등 여러 종교 소품들을 작곡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감상적인 유형보다 표현이 좀더 직선적이고 감동적인 새로운 종류의 종교 음악을 작곡하고자 했다. 당시 작곡가로는 드물게 그레고리오 단성성가에 관심을 보였지만 성직자들의 반대에 부딪쳐서 그의 종교 음악은 대부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

    1862년 딸 블랑딘이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는 바흐의 칸타타 〈울어라, 슬퍼하라 Weinen, Klagen〉를 주제로 변주곡을 작곡했다. 리스트가 이 곡을 주제로 사용하게 된 것은 이 곡의 끝에 나오는 코랄 〈Was Gott tut das ist wohlgetan〉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864년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더이상 둘 사이에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1865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4개의 소품을 받았지만 사제가 되지는 않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의 프란시스 요제프 1세 황제의 헝가리 왕 대관식을 위해 〈헝가리 대관식 미사 Hungarian Coronation〉를 작곡했고, 이것을 계기로 고국인 헝가리와의 유대를 새로 갖게 되었다. 그동안 19세에 리스트의 아끼는 제자 한스 폰 뷜로와 결혼했던 딸 코지마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코지마와 바그너 사이에는 사생아가 생겼고, 이때문에 리스트는 바그너와 줄곧 불편한 관계로 지내다가 1872년 화해했다.

    만년
    1869년 리스트는 대공의 초청으로 바이마르로 다시 돌아가 피아노 마스터 클래스를 맡았고, 2년 뒤 부다페스트에서도 같은 일을 요청받았다. 그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로마·바이마르·부다페스트를 오가면서 수업을 계속했다. 1872년 바그너와 화해한 후 정규적으로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석했다. 때로 피아니스트로서 자선 연주회에 그 모습을 나타내면서 작곡활동도 계속 했다. 만년의 작품들에는 클로드 드뷔시의 화성 양식의 특성이 나타나는데 그중 〈조성이 없는 바가텔 Bagatelle Without Tonality〉은 벨라 바르토크나 심지어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양식적 특성을 예견하고 있기도 하다.

    1886년 리스트는 마지막으로 로마를 떠났다. 부다페스트·리에주·파리에서 열린 자신의 작품 연주회들에 참석했고, 이어서 45년 만에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했다. 런던에서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7개의 연주회가 열렸다. 이후 안트베르펜·파리·바이마르를 옮겨다녔고, 7월 19일 룩셈부르크에서 마지막으로 직접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2일 후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도착했다.

    그는 몇 달 동안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고, 열이 높아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지만, 바그너의 공연에 2번이나 참석했다. 병세는 급기야 폐렴으로 번졌고, 코지마는 냉정하게도 바이로이트 축제를 감독하기 위해 리스트를 혼자 남겨두고 가버려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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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17
    희가극으로 '오페라 부파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명 부라넬로는 출생지 부라노에서 유래한다.

    이발사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버지에게 배웠으며 베네치아에서 A. 로티 밑에서 공부했다. 1728~29년 G. B. 페스체티와 함께 2편의 오페라를 작곡한 뒤 베네치아의 오페라 극장들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741년 런던을 방문해서 〈페르시아의 알렉산더 Alexander in Persia〉라는 제목이 붙은 파스티초(pasticcio : 몇몇 작곡가의 작품에서 일부를 빼내어 그것을 한데 모은 곡)를 편곡했다. 〈엔리코 Enrico〉(1743)를 비롯한 그의 여러 오페라가 영국에서 공연되었으며, 그 당시 음악사가 찰스 버니는 갈루피가 영국 작곡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썼다.

    1748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 관현악단의 부악장이 되었으며 1762년 악장이 되었고 동시에 델리 인큐라빌리 음악원의 성가대지휘자가 되었다. 1766~68년 러시아에서 예카테리나 2세의 궁정 악장으로 일했으며 그곳에서 정가극인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 Ifigenia in Tauride〉를 작곡하였다. 1768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오페라 부파 중에는 〈시골의 철학가 Il filosofo di Campagna〉(1754)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관현악의 전악기가 연주하는 가운데 등장인물들이 모두 무대에 나와서 끝마무리를 하는 '앙상블 피날레'(ensemble finale) 기법을 도입한 초기 오페라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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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
    그리움의변주 (@gs00)
    2022-04-11 18:15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1844~1908)-Symphonic Suit Sheherazade(Шехерезада) Op.35

    창작욕이 정점에 달하다
    1887년, 동료 보로딘이 미완성으로 남긴 오페라 〈이고르 공〉을 완성한 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의욕적으로 다음 작품에 착수했다. 1887~1888년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가장 많은 작품을 작곡한 시기로,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서곡 ‘러시아 부활제’〉와 교향적 모음곡 〈세헤라자데〉가 이 시기에 탄생했다. 이처럼 창작욕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천일야화》의 에피소드들을 주제로 한 관현악 소품을 쓰기로 결심했다.

    러시아 음악으로 해석한 동양의 ‘천일야화’
    19세기 말,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을 이끌었던 러시아 5인조는 민속적인 어법과 함께 동양적인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러시아의 음악적 특징을 정의하려 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역시 동양적 소재를 즐겨 사용했으며, 특유의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동양적 풍미를 더욱 효과적으로 연출해냈다. 그러한 그가 동양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문학으로 인식되었던 《천일야화》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천일야화》의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에서 네 가지를 선택하여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적 모음곡을 구상했다. 이 작품은 색채감 넘치는 오케스트레이션, 흥미로운 선율, 부드러운 동양적 풍미 등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19세기 후반의 관현악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생기 넘치는 리듬과, 당시 교향곡의 복잡한 구성을 절제한 표현의 직접성은 청중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으로 다가갔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사후 2년이 지난 1910년,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가 발레 〈세헤라자데〉에 이 곡의 3악장을 사용함으로써 이 작품은 더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안무가 미하엘 포킨과 화가 레온 박스트, 인기절정의 무용가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참여한 이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미망인은 작곡가의 의도와 달리 3악장만을 사용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도 했지만, 이 공연의 성공은 교향적 모음곡 〈세헤라자데〉의 인기에도 크게 기여했다.


    동양적이고 동화적인 이미지들의 만화경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처음에는 각 악장의 제목을 ‘프렐류드, 발라드, 아다지오, 피날레’로 계획했다. 지나치게 분명한 표제를 기피했던 그는, 주위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원래의 제목을 《천일야화》와 관련된 제목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의도적으로 모호한 제목을 붙였다. 심지어 이후의 판본에서는 이 변경된 제목을 모두 없애버리기까지 했다. 그는 청자들이 자신의 음악을 특정한 내러티브에 맞추기보다는 동양의 환상적인 모험이라는 주제 속에서 자유롭게 상상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작곡가의 의도를 보여주듯, 이 작품은 모든 악장이 눈부신 상상력과 풍부한 색채감으로 가득하다. 그는 각 악장을 독립된 에피소드로 구성했지만, 네 개의 악장이 통일성을 가지기를 원했다. 첫날밤을 지낸 뒤 왕비를 처형하는 술탄 샤리야르와, 환상적인 이야기로 처형을 천 하루 동안 미루고 결국 샤리야르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는 매력적인 이야기꾼 세헤라자데의 관계를 큰 흐름으로 제시하기 위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두 인물을 상징하는 주제선율을 모든 악장에서 사용하였다. 이 작품이 “동화적이고 동양적인 이미지들의 만화경”이 되기를 원했던 그는 이 두 주제를 기반으로 하여 자유롭고 현란한 진행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1악장 라르고 에 마에스토소-렌토-알레그로 논 트로포-트란퀼로
    1악장은 ‘바다와 신드바드의 배’를 주제로 하였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술탄 샤리야르와 세헤라자데의 만남을 제시하면서 첫 악장을 연다. 엄숙한 베이스 모티브가 술탄을 상징하면서 서주를 시작한다. 이 모티브는 크게 E-D-C-A#로 하행하는 온음음계를 구성하면서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술탄의 위엄을 드러낸다. 곧이어 목관이 멘델스존의 서곡 〈한여름 밤의 꿈〉을 연상시키는 화음을 연주하면서 환상의 세계로 초대한다. 이에 뒤따라 세헤라자데의 주제가 바이올린 독주로 제시된다. 부드러우면서도 감각적인 바이올린 선율은 하프가 반주하면서 세헤라자데의 관능적인 여성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렇게 두 사람의 만남을 보여준 음악은 곧 제시부로 들어서면서 세헤라자데가 풀어놓는 신드바드의 모험 이야기로 이어진다. 현 성부는 요동치는 파도를 그려내고 샤리야르의 선율이 1주제로 사용되면서, 신드바드의 모험 이야기에 몰입하는 술탄의 호기심을 그려낸다.

    2악장 렌토-안단티노-알레그로 몰토-비바체 스케르찬도-모데라토 아사이-알레그로 몰토 에드 아니마토
    이 악장은 ‘칼렌다르 왕자 이야기’를 주제로 주제와 변주 양식으로 된 3부분 형식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변주는 빠르기와 반주형태에 의해서만 변화하는데, 이처럼 단순한 진행은 림스키코르사코프 특유의 명료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세헤라자데의 선율이 악장의 첫머리를 열면서 세헤라자데의 이야기 속으로 청자를 초대하고 있다. 곧이어 느리고 고요한 동양풍의 선율이 순례여행에 나선 칼렌다르 왕자를 소개한다. 세 번째 변주에서는 트롬본과 트럼펫이 팡파르의 형태로 샤리야르의 주제를 제시하면서 이야기의 통일성을 이어가고, 샤리야르의 주제와 칼렌다르 왕자의 주제가 함께 어우러지며 마무리된다.

    3악장 안단티노 콰시 알레그레토-운 포코 라르게토
    ‘젊은 왕자와 공주’의 3악장 역시 ABA의 3부분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형식과 주제 면에서 가장 단순한 악장이다. A와 A' 부분은 서정적인 선율을 제시하면서 젊은 왕자와 공주의 사랑이야기를 묘사한다. 경과구에서 목관이 제시하는 화성단음계는 아라비아의 색채를 가미한다. 밝고 경쾌한 B부분에서는 발라키레프의 〈타마라〉에서 선율을 가져오고, A부분에서 사용된 모티브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트라이앵글 등 다양한 타악기를 사용하여 동화적인 느낌을 탁월하게 표현하였다. A'부분은 세헤라자데의 주제로 시작하면서 다시금 악장 간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각 악기들이 현란한 독주선율을 선보이는 이 부분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독주서법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4악장 알레그로 몰토–렌토-비보-알레그로 논 트로포 에 마에스토소-템포 프리모
    ‘바그다드의 축제, 바다, 난파당하는 배’를 주제로 4악장에서는 앞의 세 악장에서 요소들을 하나로 묶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술탄 샤리야르의 주제가 빠른 리듬으로 제시되고 세헤라자데의 주제는 유니즌으로 더블링되면서 제시된다. 이어서 독특한 리듬이 교차되고 다양한 타악기들이 활약하면서 축제로 떠들썩한 바그다드의 풍경을 그린다. 축제의 풍경에는 3악장에서 사용된 〈타마라〉의 선율이 삽입되기도 한다. 격렬한 현 성부와 금관의 팡파르가 반복되면서 험난한 바다의 풍경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이 부분에서는 1악장에서 사용된 모티브들이 다시 등장하여 신드바드가 겪었던 거친 항해를 연상시킨다. 이윽고 샤리야르의 주제가 금관 성부에서 느리고 음산하게 반복되면서 배가 난파되는 장면을 연출한다. 마침내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끝을 맺고, 세헤라자데의 주제와 샤리야르의 주제가 장조로 융합되면서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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