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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건 빛을 낸다 ♡

♡ 행복충만 ♡
  • 2
  • 그리나a(@rlaghkdud)

  • 2
    그리나a (@rlaghkdud)
    2016-04-19 06:03


     
     

     
     
    ^^* 정말 큰 사각형에는 모서리가 없다^^*
     
     
    아침공감 ^^*

    노자는 <도덕경>제41장에서 ‘대기면성’을 말합니다.
    즉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죠.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굳지 않고
     
    그냥 너덜너덜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로 읽어도 됩니다.
    그런데 보통은 이 구절을 대기면성으로 읽지 않고,
    ‘대기만성’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새기죠.
    이런 말도 할 수 없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노자의 의도가 반영된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기면성이라는 구절 앞에는
    “정말 큰 사각형에는 모서리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뒤에는 “정말 큰 음에는 소리가 없고,
    정말 큰 형상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구절들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말 큰 사각형’ , ‘정말 큰 음’ 그리고 ‘정말 큰 형상’은
    대기, 즉 ‘정말 큰 그릇’에 상응하는 말들이겠지요?
    ‘정말 큰 그릇’에 상응하는 말들은 모두,

    ‘소리가 없고, 형태가 없고 모서리가 없다’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말 큰 그릇’도 문장의 전개상 당연히 ‘완성되지 않는다’로 해석해야만
    질서있는 문장을 이루게 됩니다
    .
    여기서 ‘정말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로 해석한다면
    매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조합이 되는 것이지요.



    *최진석 교수의 책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에서 따온 글입니다.
     

     

    댓글 0

  • 2
    그리나a (@rlaghkdud)
    2016-04-14 19:46
    hey tonight -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cha cha cha - finzy kontini 

    댓글 0

  • 2
    그리나a (@rlaghkdud)
    2016-04-12 06:47



     
     
     
    ^^* 거기 있어야 할 것은 거기 두는 것이 사랑이다^^*
     

    아침공감 ^^*

    아파트 베란다에서 진달래가 꽃을 피웠다. 열흘쯤 된다.
    지난해 가을에 우리 집에 이사 온 아가씨인데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겨우내 감추어두었던 봄을 누구보다 일찍 보여줘서 반갑고 고맙다.
     
    덕분에 베란다가 환해져서 평수가 몇 배나 넓어진 것 같다.
    어릴 적에 우리는 진달래보다 ‘참꽃’으로 더 많이 불렀다.
    참꽃은 먹어도 되지만 ‘개꽃’으로 부르는 철쭉은 먹을 수 없다고 배웠다.

    빨래들이 널린 베란다를 환하게 밝혀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 아가씨 가만 보니 참 게으르기 짝이 없다.
    하루종일 햇볕하고만 어울려 논다. 나를 통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샘이 나서 불쑥 입을 맞춰본 적도 있다. 하지만 몸을 부르르 떨다가
    또 나를 외면한다. 아침인데도 이불을 개거나 머리를 빗거나
    밥을 차려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외출한 뒤에도 햇볕하고만 눈을 맞추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요즘 이 참꽃에 빠져 있지만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읽었던 수필의 한 대목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 키우는 진달래가 꽃을 피워 반가웠는데,
    딱 한 해만 꽃을 피우고 그다음 해부터는 영 소식이 없더라는 것이다.
    차가운 바람과 눈이 덮어주는 이불을 덮고 자라지 않은 탓에 그만
    생식능력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과보호가 불러일으킨 화였다.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하지?
    바람 불고 비 오고 눈 내리는 베란다 밖으로
    이 참꽃아가씨를 자주 데리고 나가야 하나?
    원래 살던 산속으로 다시 보내야 하나?


    *안도현의 에세이 <참꽃아가씨> 였습니다.

     

    댓글 0

  • 1
    o바다새o (@a269842)
    2016-04-11 09:55





    러브님 부국 되심을 축하 드림니다 ^^

    댓글 1

  • 2
    그리나a (@rlaghkdud)
    2016-04-11 08:07




     
     ^^*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
     
    아침공간^^*
     
    오분간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아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버릴 생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 그늘을 벗어난다.
     

    댓글 0

  • 2
    그리나a (@rlaghkdud)
    2016-04-10 07:28



     

     
    ^^*'합'하러 간다, 일과 세상에 합하러 간다 ^^*
     
    아침공감 ^^*


    “보리 여물 때 홍합도 같이 여물제라.”
    만재로 사람들에게 봄은 홍합이 여무는 계절이다.
    한 달에 두 번 물이 많은 사리 물때라야 합을 할 수 있다.
    그 기간에 날씨가 궂으면 다시 보름을 기다려야 한다.
     
    만재도에선 홍합을 ‘딴다’ 고도 ‘캔다’고도 하지 않고, 다만 ‘한다’.
    ‘딴다’나 ‘캔다’같은 부분적 행위를
    넘어서는 훨씬 많은 의미와 행위가
    ‘한다’라는 용량 큰 말에 담긴다.
     
    이곳에선 홍합의 ‘홍’자도 거추장스러운 듯 떼버리고
     ‘합하러 간다’고 말하기 일쑤다. 일상의 반복,
    중요한 행위를 부르는 말은 그처럼 축약되기 마련이다.
    “물땐디(물때인데) 안 나가문 엉덩이가 근질근질하제.”
    아짐들의 이구동성이다.

    어촌계장이 모는 ‘광명호’에 올라탄
    아짐들은 배 위에서 급히 옷단속을 한다.
    겉으로만 보면 마실이라도 나가듯 일상복이다.
     속에는 모두 고무옷을 껴입었다.

    오늘의 작업현장은 검은여 부근. 바위벼랑에 내린
     아짐들은 날큼하고 울퉁불퉁한
    바위 위를 성큼성큼 걸어 파도 속으로 주저없이 몸을 던진다.
    길 없는 길을 헤쳐 간다.
     래프팅과 암벽타기 등 지형지물을 이용한
    고난도 기술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출근길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이 떠오르는 표표한 행진.
    출렁이는 저 너른 바다 어디에 마치 저마다의
     ‘지정석’이라도 있는 양
    나아가는 몸짓에 거침이 없다.

    바위 벼랑은 평탄하게 발 붙이고 설 반반한 공간이라곤 없다.
    온통 가파르고 미끄럽다. 한 발을 내딛기도 위태롭다.
    파도소리만 들릴 뿐, 깊은 정적 속에 작업이 진행된다.
    빗창으로 홍합을 따고, 그물망인 망사리에 담고, 허리 펼 새 없는,
    쉼 없는 반복이다. 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서둘러야 하는 작업이다.

    파도 거센 바위에 단단하게 들러붙어 있는 홍합.
    파도와 부대끼지 않고는 만재도 말로 ‘내야’, 홍합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홍합의 무게가 금세 옷자락을 추욱 처지게 만든다.
    그 엄청난 무게를 오로지 이를 악물어 버틴다.
     
    “한 2키로를 입으로 꽉 물고 버티는 거여.
    애기를 보듬고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제.”
    몸에 와 부딪는 파도, 몸을 순간 휘청이게 할만큼 위력적이지만
    만재도의 아짐들은 모두 파도에 몸을 맡긴다.
     
    저렇게 파도에 휩쓸리다가 날카로운 갯바위에 스치기라도 하면
    살점이 떨어질 정도로 깊이 베일 터. 위태롭기 짝이 없는 ‘극한 직업’이다.
    “힘들제라 어째 안 힘들겄소만 전디고(견디고) 허제.
    인자 또 갈라문 보름 지달려야된께.

    우리는 물 때 되문, 눈 떠져라.(눈이 절로 떠진다).“
    내일도 ‘합하러’ 갈 것이다. 바위벼랑에 파도 속에 온몸을 합하러.
    그래야만 홍합을 얻는다. 



    *월간잡지 <전라도닷컴 4월호>에 실린 만재도 홍합따는,
    아니 '합하는' 아짐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댓글 0

  • 2
    그리나a (@rlaghkdud)
    2016-04-09 06:56




     
     
    ^^* 검색보다 사색을~~~^^*
     
     
    아침공감 ^^*

    “잠깐만, 땡땡땡한테 물어볼게요.”
    이런 말이 일상이 된 사회는 불량하지 않은가.
    모르면 찾고 연구하는 과정이 응당 필요한데,
    도서관 장서실을 누비며 시간 속에서 캐내어지던 지식은
    이제 초간편 인터넷 검색으로 대체되었다.
     
    책과 시간의 아날로그 만남 속에 풍성해지던 ‘자기 지식’은
    어느덧 점점 엷어지고, 초스피드로 화면에 불러놓은
    ‘남의 지식, 정보들’을 일별해 외우거나
    긁어 붙여 자기 생각인 양 리포트도 쓴다.
     
    시간 속에 무르익게 해 체화하는 지식이라야 자기 사유가 되는 법인데,
    언제 어디서건 인터넷에 물어보는 ‘검색만능주의’는
    생각하는 힘을 죽이는 중요한 원인이다.

    검색해 편집한 지식이 자기 지식인 양 착각하고
    심지어 그것이 자기 사유인 양 착각하면서
    인터넷세대는 점점 사유의 힘을 잃어간다.

    설상가상, 검색한 지식의 절반 이상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은 이 부박한 자본주의시대에
    대항할 힘이 없는 부박한 개인들을 양산한다.
    사유능력이 사라진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각하기 어렵다.

    “오늘 당장 인터넷, 스마트폰을 끊는 사고를 쳐보자”는 권유가
    절박하게 들리는 이유도 한번뿐인 생을 헛것인 정보검색 속에
    낭비하는 게 아깝기 때문일 터.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 중 중요한 것이 자기 사유의 회복이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고픈 진지한 사색의 힘은
    ‘사랑의 능력’, ‘행복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


    *시인 김선우의 글 <검색보다 사색> 이었습니다
     

    댓글 0

  • 2
    그리나a (@rlaghkdud)
    2016-04-08 08:01




     
    ^^* 우리는 늘 두 가지 후회 속에서 삽니다 ^^*
     
     
    아침공감 ^^*

    사는 내내 직업적 성취를 느끼고,
    진실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것은 한 개인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에
    정당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탐색하고,
     방황하며, 시간적 여유를 갖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조금 늦었다고 두려움이나
    불안에 사로잡히지 마라.
    방황에 대한 거부와 후회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힌 청춘에게
    영국 철학자 로먼 크르즈나릭은 조언한다.
     
    아마도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잘못된 전공 선택으로 괴로워하거나,
    졸업한 뒤 곧장 어떤 직업을 얻었으나
    자신이 하는 일에 적지 않은 불만족을
    느끼는 이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지금 우리는
    두 가지 후회 가능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첫 번째는 수년 동안 시간과 에너지, 감정을 쏟아 부은 직업을
    ‘왜 버렸을까’하는 후회이고, 두 번째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돌이켜볼 때
    전혀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던 직업을
    ‘왜 버리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이다.
     
    두 가지 후회 모두 뼈아프지만, 현실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의 일이란 것이,
     아무리 최상의 결정을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후회를 피할 방법이 없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렇다면 새로운 결정을 내릴 때 이 두 가지 후회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할까?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와 저지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어느 쪽이 그나마 덜 아플까?

    최근에 나온 심리연구 결과에 따르면,
    후자가 정신건강에 더 해롭다고 한다.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만큼
    강력한 후회는 없다.
    하지 않은 선택은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에서 커져가고,
    점점 커진 후회는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독서치료 전문가 박민근의 책 <성장의 독서>에서 따온 글입니다.
     

    댓글 0

  • 2
    그리나a (@rlaghkdud)
    2016-04-07 16:15
    Tears Of Gideon Rolling Down From Olympus
    Desire To Stay - Fariborz Lachini
    Field Of Tears - Chris Spheeris & George Skaroulis
    The Last Journey - Sn Daum
    Winter Rose - George Davidson & Eugenia Leon
     
     

    댓글 0

  • 2
    그리나a (@rlaghkdud)
    2016-04-07 08:07




     
    ^^* 너에게로 가서 전파가 되고 싶다 ^^*
     
    아침공감^^*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의 시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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