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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타라이넨님의 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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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숲빛 (@ veritas0359)

무스타라이넨님의 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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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11-03 13:24:11








    김영하『말하다』중 ‘친구에 대한 생각’에 대한 斷想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잘못 생각했던 거죠. 친구를 훨씬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아요. 쓸데없는 술자리에 너무 시간을 많이 낭비했어요.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어떤 남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 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 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결국 모든 친구들과 다 헤어지게 돼요. 이십 대에 젊을 때에는 그 친구들과 영원히 같이 갈 것 같고 그 친구들과 앞으로도 많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손해 보는 게 있어도 맞춰주고 그렇잖아요. 다 헛되요.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 기울이고 영혼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고 이런 게 더 중요한 거예요. 모든 도시를 다 가보고 모든 음식을 다 먹어보고 그래도 영혼을 구하지 못하면 인간은 불행해요. 밤새 술 먹고 그런 거 안 했어야 하는데.

    그때에는 친구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공허한 술자리에 술 먹고 밤새고 동아리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동아리는 내가 고민하지 않아도 잘만 굴러가요. 지금도 잘만 있더라고요. 그때에는 당시에 대단한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요. 앞으로 동아리는 어떻게 될까를 논의하고 그랬어요. 어릴 때의 친구들은 더 배려도 없고, 불안정하고 인격이 완전하게 형성되기 이전에 만났기 때문에 가깝다고 생각해서 막 대하고 함부로 대하는 면이 있어요. 가깝기 때문에 좀 더 강압적이고 폭력적일 수도 있죠.”

    ※김영하 작가의 친구에 대한 단상에 상당부분 공감한다. 순간「벗과의 관계도 정이 지나치면 소원해 진다(朋友數,斯疏矣;里仁:26)」는 논어의 구절이 스쳤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의 말이지만 공자 문하생의 어록인 만큼 공자의 생각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벗과의 교우관계에 있어서도 친밀함의 표현이 지나쳐 상대방에 폐가 될 정도라면 진정한 우정이라 할 수 없다. 경우없는 우정공세를 취하거나 진짜 친구는 허물없는 사이라는 우정론을 설파하는 사람과는 교우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배려도 없고 눈치도 없는 충고 역시 반복되면 상대로부터 경원시(疏) 당한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받고 관심받길 바라지만 편집과 집착은 사랑도, 우정도 아니다. 우정, 애정과 같은 감정도 배려와 절제 같은 적정한 분한이 지켜져야 한다. 머리가 커졌을 법한 20~30대의 분별없는 우정관은 그만두더라도 그 이후까지 무익한 시간낭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을 깊이 후회하고 부끄러워 한다. 친구와 우정에 대하여 그동안 잘못 가져왔던 관념을 지금이라도 깨닫고 성찰함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젠 자신을 좀 더 아끼고 자존을 회복하는데 시간을 더 들이자.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더 섬세히 살피자.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하여 결국엔 자신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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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9-20 11:03:01










    클래식 애호가를 사로잡은 EMI 시절 크리스티앙 페라스 예술의 기록! II

    그러나 1970년부터 페라스의 커리어는 급격히 붕괴하였다. 이유는 병적인 음주벽 때문이었다. 몰래 술을 마시던 습관이 노골화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맥주를 들이켰다. 곤드레만드레 만취된 상태로 리허설장에 나타나 휘청거리다가 콘서트를 취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대체 원인이 뭐였을까. 그는 음악가로서 빠르게 성장하며 어린이다운 삶을 겪지 못하였다. 야심가인 아버지가 페라스를 또래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하였다. 과묵한 그는 늘 혼자였다. "나는 열세 살 때부터 쭉 이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쳤어요." 그의 고백이었다. 아내와 소원하여 안고 다니는 애완견하고만 대화를 하였다. 우울증이 심해져 1974년 11월 바르비제와 듀오 25주년 기념 리사이틀을 가진 뒤, 파리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면서 페라스는 현역에서 물러났다. 심한 알코올 중독으로 성격마저 비뚤어져 주변 사람들을 심술궂게, 가학적으로 대하였다. 카지노를 출입하다 애지중지하던 두 대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중 한 대를 팔았다. 그래도 연주를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82년 5월, 페라스는 7년 공백을 깨고 무대에 컴백하였다. 그러나 그의 심신은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 8월 25일 열린 연주회가 종막이었다, 1982년 9월 14일, 페라스는 자신의 아파트 10층 창문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직관적이고 독특하고 탐미적인 음악세계

    프랑스 벨기에 바이올린 악파의 적손이라 자처했지만, 크리스티앙 페라스는 실상 그 계보의 판에 박힌 틀에서 벗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제자 필리페 에쉬에 의하면 페라스는 극도로 직관적인 스타일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마주하는 작품을 미리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 대신 음악가로서 느끼는 직감과 자신의 본능을 믿고 이에 따라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바르비제와 토론하면서도 작곡가의 지시보다는 본인의 주장을 앞세웠다. "이렇게 하니 소리가 더 낫게 들리는 거 같아요." 필요시 텍스트의 다이내믹과 프레이징, 음표를 바꾸어 연주하기도 하였다. 악기를 쥐는 자세도 규범과 달랐다. "나를 따라하지 마십시오." 제자들에게 경고하였다. 바이올린을 어깨 견갑골에 올려놓지 않고, 귀와 턱에 밀착시킨 채 팔꿈치를 들어 올려 높은 각도로 활을 잡았다. 왼손 운지법도 특이하였다. 그 결과 파트리스 폰타나로사의 코멘트처럼 페라스는 미끄러운 윤기와 차진 끈기가 공존하는 농염한 바이올린 음을 빚어내었다. 그의 1721년제 스트라디바리우스 더 프레지던트와 1728년제 밀라놀로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퇴폐적인 유미주의를 소환하는 마법의 하프였다.

    크리스티앙 페라스는 1947년 11월, 열 네 살 나이로 드뷔시 를 녹음하여 첫 번째 레코드를 만든 이래 은퇴하기 직전까지 다양한 앨범을 내놓았다. 1977년 칩거 중에 레코딩한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Ages Records)과 소수의 실황 녹음들을 제외한다면 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의 유산은 EMI 레이블에서 제작한 전반기 기록과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에서 제작한 후반기 기록,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 레코딩들이 최근 들어 잘 정리된 반면, EMI 레이블 레코딩은 따로따로 구해야하는 현 상황에서 전반기 녹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본 세트의 출시는 실로 반가운 기획이라 하겠다. 연주는 하나같이 일품이다. 일례로 1번 디스크에 수록되어 있는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와 포레 바이올린 소나타 1번 1957년 첫 번째 녹음을 들어 보라. 유려한 활 움직임, 섬세한 펄스로 떨리는 비브라토, 어슴푸레한 색조가 가히 환상적이다. 바르비제가 인간의 신경이 견딜 수 있는 한계치의 영역에 도달한 듯 극도로 예민해진 바이올린 음을 매번 현세로 되돌아오도록 다독이는 역할로 기능하고 있다.

    12번 디스크에 수록되어 있는 포레 바이올린 소나타 1번과 2번 1964년 녹음, 혹은 9번 디스크에 수록되어 있는 드뷔시 바이올린 소나타 G단조와 라벨 치간느 1962년 녹음도 감미롭고 아름답다. 일단 감상하게 되면 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 9번 디스크에는 또 하나 특필할만한 레코딩이 드뷔시와 라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페라스의 은사이기도 한 제오르제 에네스쿠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1962년 녹음이 그것으로 오묘한 시정 표현과 자유분방한 광시곡 분위기 연출 면에서 에네스쿠 본인이 1948년 10월 콜롬비아 레이블에서 만든 자작자연 반을 능가하고 있다고 장담해도 과언이 아닌 명반이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금번 박스 세트 등장으로 마침내 리이슈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바이올리니스트가 프랑스 음악에만 능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오판이다. 4번 디스크, 5번 디스크, 6번 디스크에 담겨있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이 단적인 증거물이다. 1958년 녹음으로 깔끔하니 세련된 싱잉 라인을 뽑아내는 페라스의 바이올린, 그와 대등한 차원의 서포트를 들려주는 바르비제의 피아노가 하나 된 마음으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소나타 6번 같이 대중에게 자주 언급되지 않는 작품들의 연주가 특히나 돋보인다.

    협주곡 레코딩도 가득하다. 여든 번 넘게 실연에서 선보였다고 전해지는 페라스의 장기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 는 앙세르메/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과 협연한 1957년 실황(Claves), 라파엘 쿠벨릭/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협연한 1960년 실황(Forgotten Records), 요제프 카일베르트/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한 1960년 실황(Testament), 조르쥬 프레트르/파리 음악원 관현악단과 협연한 1963년 레코딩(EMI), 마시모 프레치아/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협연한 1964년 실황(Audite), 총 네 종류의 음원이 발굴되어있는데, 이 세트에는 프레트르와 협연한 스튜디오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음 감각과 차가운 동시에 뜨거운 비브라토 주법이 눈부신 빛을 발하는 걸작 녹음이다. 같은 11번 디스크에 커플링되어 있는 귈라 반도(1903-1989)의 헝가리 협주곡은 곡 자체가 접하기 대단히 힘든 진귀한 작품으로 1958년 이 바이올리니스트가 직접 초연을 맡았다는 사실이 더욱 호기심을 돋운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한 1964년 리메이크 버전(DG)이 유명하나, 본 박스에 수록되어 있는 콘스탄틴 실베스트리/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1957년 첫 번째 레코딩도 연주가 훌륭하다. 스테레오 사운드로 녹음되어 있어 음질도 들을만하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은 볼프강 자발리쉬/프랑스 국립 방송관현악단과 협연한 1965년 실황(Doremi), 알렉산더 브로트/캐나다 방송관현악단과 협연한 1963년 영상물(VAI) 이전에 만든 1957년 스튜디오 레코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역시 콘스탄틴 실베스트리/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것으로 풍요로운 로맨티시즘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가연이다. 발터 쥐스킨트/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랄로 스페인 교향곡 1958년 레코딩도 매혹적이기는 매한가지다. 맬컴 서전트/로열 필하모닉과 협연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앙드레 반데르노트/파리 음악원 관현악단과 협연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4번, 5번도 연주가 엘레건트하며,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WV.1043과 브람스 이중 협주곡은 각각 파트너가 예후디 메뉴인과 폴 토르틀리에라 눈길을 끈다. 연주가 빼어남은 물론이다. 마지막 디스크에는 쇼송 피아노, 바이올린과 현악4중주를 위한 협주곡 D장조와 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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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9-20 10:58:18
















    클래식 애호가를 사로잡은 EMI 시절 크리스티앙 페라스 예술의 기록! I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앙 페라스의 EMI 레코딩 선집

    Christian Ferras - The Art of Violin (13CD)

    오랜 세월 동안 잠들어 있다 마침내 부활한 전설의 명반 '에네스쿠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과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 그리고 프랑크, 포레, 드뷔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비롯하여,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음 감각과 차가운 동시에 뜨거운 비브라토 주법이 눈부신 빛을 발하는 걸작 녹음"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멘델스존, 브루흐, 랄로, 바흐, 베토벤, 브람스 등 바이올린을 위한 위대한 협주곡에 이르기까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앙 페라스 예술의 진수를 담고 있는 EMI의 위대한 레코딩 선집!

    바이올린의 이카로스, 그 아름다운 도약의 궤적

    찬란하도다. 조반니 바티스타 비오티(1775-1824)를 태두로 하는 프랑스 바이올린 악파는 19세기, 무수한 활의 명인들을 배출하였다. 파리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바이올린 메소드를 공동 저술한 비오티의 제자들이 각기 일가를 형성하였다. 피에르 바이요(1771-1842)는 프랑스와 아브넥(1781-1849), 장 달팡 알라르(1815-1888)와 위베르 레오나르(1819-1890), 마르탱 마르시크(1848-1924)로, 로돌포 크로이처(1766-1838)는 랑베르 마사르(1811-1892)로 연계되었다. 한편, 벨기에 음악원에서는 샤를 오그스트 드 베리오(1802-1870)를 사사(師事)한 앙리 비외탕(1820-1881)과 에밀 소레(1852-1920), 외젠 이자이(1858-1931)로 이어지는 또 다른 분파가 둥지를 틀었다. 20세기 들어 이른바 프랑스 벨기에 바이올린 악파라 일컬어지는 이 문파 중 유독 비극적인 삶을 산 아티스트가 크리스티앙 페라스(Christian Ferras)이다.

    음악 신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크리스티앙 페라스는 1933년 6월 17일,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해변 휴양도시 르 투케에서 태어났다. 손바닥에 심한 상처를 입어 연주를 그만둔 전직 바이올리니스트인 호텔리어 아버지 로베르로부터 일곱 번째 생일날 작은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선물 받으며 그의 인생은 이른 나이에 결정되었다. 페라스는 매일 세 시간씩 초보 연습을 하였다. 1941년 니스 음악원에 입학, 정식으로 바이올린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스승은 벨기에의 명바이올리니스트 세자르 톰슨의 직계 제자 샤를르 비스테시였다. 금새 연주가 능숙해진 페라스는 1944년 5월, 니스시의 공직원 앞에서 생상스 바이올린 협주곡 3번과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을 연주하여 만장일치로 1등을 차지하였다. 1944년 8월에는 해방된 파리로 이사하여 파리 음악원으로 전학하였다. 르네 베네디티와 칼베 사중주단의 리더 조세프 칼베 아래에서 바이올린과 실내악을 수학하였다. 성장 속도가 빨라 1946년 양 부문에서 수석 졸업을 하였다.

    음악원을 나오자마자 페라스는 13세 나이에 프로 연주가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1946년 10월 알베르 볼프가 지휘하는 파들루 관현악단과 랄로 스페인 교향곡과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일주일 간격으로 협연하며 파리 데뷔하였다. 랄로 콘서트를 들은 저명한 음악 평론가 베르나르 가보티는 르 피가로지에 그를 격찬하는 장문의 리뷰를 썼다. '테크닉, 시정(詩情), 정열,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이 소년 바이올리니스트는 벌써 스페인 반도를 알고 있는 것인가!' 교육도 계속 받았다. 1947년 파리에 체류 중인 루마니아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제오르제 에네스쿠와 알게 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1948년 5월 슈베닝겐 콩쿠르에서 우승하였고, 1949년에는 롱 티보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에 입상하였다. 상보다 더 중요한 일은 평생 파트너인 프랑스 피아니스트 피에르 바르비제(1922-1990)와 만난 것이다. 콩쿠르에 출전한 바르비제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듣고 페라스는 아버지에게 졸랐다. "저 사람과 연주하고 싶어요." 바르비제는 11살 연하 소년의 요청에 응하였다.

    눈부신 영광과 알코올 중독, 재기의 몸부림

    페라스와 바르비제의 첫 번째 공연은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아미앵 음악원 강당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가지기로 약속 잡았으나,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페라스가 나타나지 않자 바르비제는 그냥 혼자서 독주회를 준비하였다. 페라스 가족이 새벽 기차를 놓쳐서였다. 15분 지각하여 분장실로 허겁지겁 들이닥친 페라스는 코트를 벗어 던지고 연습 없이 바르비제와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K.526 등 오리지널 프로그램을 즉석에서 멋들어지게 공연하였다. 이후 둘은 완벽한 호흡으로 40곡 가량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암보로 연주해내는 명콤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바르비제는 페라스의 유일한 벗이 되어주었다. 함께 고전 문학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극장과 박물관을 관람하였으며, 해수욕장에서 축구를 즐겼다. 솔리스트로서도 페라스는 승승장구하였다. 1951년 11월 카를 뵘의 초청으로 티타니아 팔라스트 극장에서 베를린 필하모닉과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독일에도 얼굴을 알렸다. 1956년 2월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처음 조우, 빈에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였다. 페라스의 재능에 매료된 거장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은 다른 연주자들을 압도합니다."

    같은 해 에르네스트 앙세르메가 이끄는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과도 공연하였다. 음반사와 계약해서 다양한 레코드를 속속 내놓았다. 1959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샤를르 뮌시의 지휘 아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렀다. 1960년 5월,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페라스-바르비제 듀오 결성 10주년을 자축하는 리사이틀을 열었고, 그 해 여름에는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주관하는 프라드 음악제에 등장하였다. 음악제에서 그는 프렌치 바이올린 스쿨을 대표하는 뛰어난 아티스트라는 호평을 들었다. 이듬해 재초청을 받았다. 청년 바이올리니스트 페라스의 행보는 한창 물이 올랐다. 1963년 9월 그리스 아테네 음악제에서 카라얀과 콘서트를 가진 뒤 이 거물 지휘자와 일련의 협주곡 레코딩 작업을 하였다. 세계 각지의 명사들이 그에게 쉼 없는 러브 콜을 보냈다. 1967년 덴마크 국왕의 결혼식에 초대되어 축하 연주를 하였다. 1968년에는 샤를르 뮌쉬와 그가 창설한 파리 관현악단과 미국 투어를 다녀왔다. 노지휘자의 급서로 여행을 완수하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페라스는 올림포스 정상을 넘어 태양을 향해 늠름히 비상하는 이카로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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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9-01 14:34:05










    차이코프스키

    Tchaikovsky - Concert Fantasia in G, Op.56

    이곡은 차이코프스키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나 그후 연주가들의 레퍼토리에서 사라져 갔고 어느덧 세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당시 20대의 나이로 전 유럽을 열광의 물결에 빠지게 했던 20대의 글래스고우 출신의 젊은 음악가인 오이겐 달베르(Eugen d'Albert)의 연주에 감흥을 받아 작곡한 곡이다. 달베르는 이후 독일로 移住, 연주가에서 작곡가로 전향하여 2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몇 개의 성공적인 오페라 작품들을 썼다. 당시 리스트는 달베르를 타우지히의 뒤를 잇는 대가로 여긴 반면, 차이코프스키는 루빈슈타인형제들의 계승자로 달베르를 평가했다.

    원래 차이코프스키는 일반적인 협주곡을 쓸 생각이었으나, 느린 악장을 피날레에 도입해보자는 악상이 떠올라 2개악장의 구조를 갖게 되었다. 환상곡(Fantasia)이라는 제목도 차이코프스키가 자유로운 악상을 가지고 음악적 실험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 주제는 통상 도입부에 제시되는 소나타형식의 주선율의 비중을 줄이는 대신 차이코프스키 곡의 피날레에서 상당부분 나타나는 경쾌하고 재기넘치는 러시아풍(a la russe)의 무곡으로 처리했다. 두 번째 주제는 서정적 대비를 이루도록 구성되어 있으나 발전부에 와서는 거대한 피아노 카덴차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피아노 독주 연주자에게 거대한 교향악적 변수를 온전히 맡기게 된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처음은 아니다. 발전부의 핵심적인 패시지들을 오로지 솔로 연주자에게 맡긴 사례는 많이 있었으나 이곡에서만큼 극단적인 사례는 없었다. 이곡을 감상하다가 오케스트라가 있었나 망각할 때 즈음이면 이미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악장이 다시 시작된다.

    2악장은 작심한듯 더욱 기묘하다. 2악장은 유려한 이탈리아풍 주제(곤돌라의 노래)를 가지고 통상적인 느린 속도로 시작한다. 그러나 갑자기 배후에서 탬버린의 타격음과 함께 빠른 춤곡이 끼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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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8-29 08:30:29












    요한 빌헬름 빌름스

    요한 빌헬름 빌름스(Johann Wilhelm Wilms, 1772~1847)는 독일계 네덜란드 작곡가로 1815년 네덜란드 왕국의 건국이래 1932년까지 네덜란드國歌로 사용된 Wien Neerlands Bloed를 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빌름스는 독일 졸링언(Solingen)인근의 비츠헬던(Witzhelden)에서 출생했으며, 그 지역 학교교장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와 맏형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플룻은 독학으로 배웠다. 1791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그곳 오케스트라 두곳에서 플룻 연주자로 활동하였으며, 모차르트의 플룻협주곡과 베토벤의 실내악 플룻곡의 네덜란드 초연에 솔로이스트로 무대에 섰던 기록도 있다. 빌름스는 네덜란드 왕립음악원(Koninklijk Nederlandsch Instituut voor Wetenschappen)에서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몇몇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직에 지원했던 적도 있다. 아울러 작곡 콩쿨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음악신문인 일반 음악 신보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게재용 곡을 쓰기도 했는데, 일반 음악신보는 본인처럼 그당시 네덜란드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자주 연주되지 못하는데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창구역할을 했다. 프랑스 혁명이 네덜란드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이벤트성 의미로, 몇개의 애국적인 讚歌를 작곡했으나 이내 나폴레옹내각은 실각하고 말았다. 네덜란드 공화국 창설로 새로운 네덜란드를 위한 國歌가 필요해짐에 따라 1816년 國歌응모 콩쿨이 개최되었다. 거기서 Wien Neerlandsch bloed라는 곡으로 우승한 빌름스는 네덜란드내의 주요 교회들과 여러 단체로부터 작곡 위촉을 받게 되었다. 빌름스는 23년간 암스테르담의 세례자교회에서 오르가니스트로서 활동하다가 삶을 마감했다.

    빌름스는 생전에 총7곡의 교향곡을 작곡했으나, 그 중 F장조 교향곡은 유실되었고 다른 작품들은 그의 사후 잊혀져 갔다. 에른스트 클루젠(Ernst Klusen)에 따르면 E 플랫장조 교향곡의 피날레는 모차르트 교향곡 39번(K.543)을 모델로 했고, 교향곡 6번 D단조로 켄트 보자르협회(Societe des Beaux-Arts Ghent)에서 주관한 콩쿨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교향곡 6번 D단조와 7번 C단조는 2003년 도이취 그라모폰 레이블로 레코딩 되었다.(콘체르토 쾰른의 연주) 지휘자인 콘체르토 쾰른의 지휘자인 베르너 에어하르트(Werner Ehrhardt)는 출판일자 오류로 인해 빌름스가 기록보다 더 오래 생존했고, 이 때문에 더 고풍스러운 스타일의 작품을 작곡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류가 밝혀지게 되자, 빌름스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섞인 열정이 생겨났고, 에어하르트는 빌름스의 교향곡들중 두곡(6,7번)을 레코딩하기로 했다.

    오늘날 빌름스는 작곡가로서보다는 행정가로서 기억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는 네덜란드의 가장 중요한 음악가 가운데 한사람이었으며, 네덜란드 왕립음악원의 음악 학부를 포함하여 Letteren en Schoone Kunsten in Amsterdam, the Maatschappij tot Bevordering der Toonkunst 등 다수의 위원회의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작곡 콩쿨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빌름스는 솔로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15곡을 작곡했으나, 이들 대부분은 출판되지 못한 채 남아있으며, 그의 사후에 무시되어 왔다. 많은 작품들이 회복 불가능하게 손실되었으나, 다만 그의 생전에 출판되었던 5곡의 작품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빌름스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 바로는 다양한 악기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이해와 당시 그의 작품들을 연주했던 암스테르담 음악가들의 능력이 긴밀하고도 통찰력있게 결합되어 나타났다. 그의 작품들의 대부분은 비인의 고전주의 음악가 스타일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나, 자신이 음악적인 성장을 이루었을 때는 이미 고전주의가 낭만주의에게 자리를 물려준 이후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드물지만 낭만주의적인 열정이 드러난 작품들도 보인다.

    빌름스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고 있을 무렵 모짜르트의 망령이 빌름스의 어깨너머로 오선지를 보고 있었는지 짤츠부르그 출신 천재 작곡가의 미소가 이곡에 반영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의 도입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1번 (K.467)을 연상시키는 행진곡 풍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다분히 팽창적이다. 이어지는 아다지오는 목관의 색채적인 매력을 비롯한 몇몇 탁월한 패시지들이 담겨있다. 피날레인 론도는 저음의 현악기들이 피치카토로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됨과 거의 동시에 독주연주가 끼어들며 연주하다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마지막 코다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피아노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교향곡 E플랫 장조(Op.14)는 비록 Op.9번 교향곡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 중 빌름스의 가장 초기 작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모차르트에게 받은 영향이 이 교향곡에서도 나타나 있으며, 지적인 감수성과 위트, 열정과 세련미 등이 잘 혼합되어 있어서 모차르트의 영향으로 인한 결정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유희와 유쾌함이 주저와 막힘없이 30여분간 관통하는 즐거운 곡이다.

    완숙기에 접어든 시기의 작품으로 역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이 배어있는 플롯협주곡 D장조(Op.24)는 피아노 협주곡에 비하여 스케일은 작지만, 완성도 높은 탁월한 작품이다. 기록에 의하면 빌름스는 밝고 유쾌하지만,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길지 않은 협주곡을 썼다고 한다. 이는 동시대 작곡가들의 바람이기도 했으며 빌름스는 이러한 바람에 부응한 것이다. 공허한 음악적 기록을 택하기보다는, 聽者의 정서와 감정에 적절히 부합할 수 있는 실체로써의 음악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 음반의 연주는 핵심이 흐트려지지 않은 정확하고 정교하며 명확하다. 스타일리쉬한 우아함을 자연스럽게 펼쳐보여주고 있다. 빌름스 내면에 존재했을 모차르트에 대한 존경심에 부합될만한 연주이며, 이결과 탑클래스의 연주가 탄생되었다. 미하엘 알렉산더 빌렌스(Michael Alexander Willens)를 위시한 연주자들은 이 작품의 연주에서 요구되는 따뜻함과 감각적인 프레이징, 그리고 기교적인 기민성으로 무장된 知性과 신선함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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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8-16 09:56:47








    하인리히 비버 ‘브뤼셀 미사곡’

    Heinrich Biber - Missa Bruxellensis

    비버의 브뤼셀 미사는 시대를 앞서간 선지자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총 23성부로 나누어진 이 곡은 악보를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난해해 실제 연주하기가 쉽지 않고 또 흔히 연주되지도 않으며 음반도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었는데, 2000년도에 비로소 훌륭한 연주가 실황녹음 되어 등장하였다. 거장 조르디 사발이 지휘하는 르 콩세르 데 나시옹(Le Concert des Nations, 1989)과 라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La Capella Reial De Catalunya, 1987)의 연주로 총 23성부가 생생하게 재현된 웅대한 녹음반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탁월한 음질로 연주된 이 음반은 1600년대 후반에 작곡된 이 음악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파격적인 관현악법을 사용하였으며, 얼마나 거대한 규모로 연주되었던가를 역설한다. 이 음악은 역시 비버의 잘츠부르크 미사(총 53부로 이루어진 이곡은 브뤼셀 미사보다 더 장대하다.)와 더불어 전기 바로크 음악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다.

    조르디 사발 Jordi Savall (1941년~ 스페인)

    사발의 원숙한 음악활동은 그가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1987)와 '르 콩세르 데 나시옹'(1989)을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라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는 이베리아 반도의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을 노래하던 여러 궁정의 합창단을 모델로 삼아 조직한 성악 및 기악연주단체로, 중세로부터 후기 바로크 시대까지의 곡들을 연주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또 르 콩세르 데 나시옹은 라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의 단원들을 중심으로 그 멤버를 확대하여 1989년에 사발이 창립한 원전악기를 위한 오케스트라인데, 주로 바로크에서 초기 낭만주의에 이르는 오케스트라나 심포닉한 레퍼토리를 연주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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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8-15 13:22:06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제2번

    Rachmaninov - Piano Sonata No.2 in B flat minor, Op.36

    1913년 11월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작곡가 자신의 연주로 초연. 1940년 호로비츠가 작곡가의 동의를 얻어 약 22분 길이의 연주시간으로 재편곡

    모든 장르에서 뛰어나고자 노력했던 라흐마니노프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피아노 음악이다. 근본적으로 그의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예를 들어 피아노 협주곡은 라흐마니노프가 가장 몰두했던 장르인 반면, 실내악이나 오페라에는 거의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했던 장르인 교향곡과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와 가곡에서도 그 안에는 성공작과 실패작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작곡기법과 내용에 있어서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양하고 과감한 시도를 꾸준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피아노 소나타 장르에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쏟아부으며 정성을 들였다. 커다란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코렐리나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들과는 달리, 유독 두 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순탄치 않은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우선 파우스트 전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표현한 [소나타 1번 Op.28]은 너무나 길고 내용이 난해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알려지는데 실패했다. 아직까지도 이 작품은 명쾌하고도 뛰어난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뒤이은 [소나타 2번]은 표면적으로 성공을 거둔 듯 했지만 그 음악적, 구조적인 측면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했던 만큼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한 후대 연주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머리 아픈 고민을 계속 해야만 했다.

    1909년 라흐마니노프는 처음으로 미국으로 연주회 여행을 떠나 이듬해에 되돌아왔고, 이 무렵 이바노프카에 있는 아름다운 별장을 소유하면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작곡가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특히 1909년부터 1917년 사이는 그가 조국 러시아에서 보낸 마지막 시기로서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친 시기였다. [피아노 협주곡 3번](1909년)을 비롯하여 [전주곡 Op.32]와 [회화적 연습곡 Op.32와 39], [합창 교향곡 ‘종’]과 [피아노 소나타 2번]이 바로 이 시기의 대표작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1913년에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로마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에드가 앨런 포우의 詩에서 영감을 받아 ‘종’을 작곡하기 시작했고 이바노프카에 돌아온 뒤 작품을 완성, 그해 겨울 모스크바에서 초연을 가졌다.

    이와 같은 시기 그는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그 해 11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작곡가 자신이 직접 초연을 했다. 이 작품은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의 동창인 피아니스트이자 로스토프 아카데미의 원장인 마트베이 프레스만(Matvey Presman)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장황하다는 평을 들었던 라흐마니노프는 1931년 여름 이 소나타를 대대적으로 개작하게 되었다. 중복되는 음과 복잡한 성부를 생략하여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120여마디에 이르는 부분들을 삭제했고 일부 화성을 변화시켜 선율이 더욱 뚜렷해졌으며, 특히 악장들의 발전부에서 많은 패시지의 텍스추어를 새롭게 다듬은 한편 부분 부분을 새롭게 작곡했다.

    라흐마니노프가 음악학자인 알프레드 스완(Alfred Swan)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담겨 있다.

    “제 초기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과잉된 부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2번 소나타에서도 너무 많은 성부가 동시에 열려 나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길이가 너무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Op.35는 19분 남짓 하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베토벤과 슈만, 리스트와 쇼팽의 뒤를 잇는 대작 소나타를 염원했던 라흐마니노프는 총 25분이 넘는 연주시간을 필요로 하는 오리지널 버전을 대폭적으로 줄여 20분에 채 미치지 않는 정도의 시간으로 줄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정판 또한 음악의 윤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오리지널 버전의 중요한 부분을 너무 많이 삭제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전조부도 어색하며 양식적인 측면 또한 지나치게 절제했다는 평가 또한 그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레퍼토리에서 아예 이 작품을 삭제해 버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이에 대한 돌파구는 자신이 아닌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정신적, 예술적 후계자로 생각했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에 의해 만들어졌다. 1940년 작곡가의 동의를 얻은 호로비츠는 이 두 종류의 버전의 장점을 한데 섞은 버전을 만든 것이다. 그가 평생토록 즐겨 연주했던 약 22분 정도의 길이의 이 혼합버전은 작곡가의 두 가지 버전에 대한 훌륭한 대안으로서, 현재에는 소수의 피아니스트들이 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연주가의 관점에 따라 각자 조금씩 변형된 버전을 사용하기도 한다.

    1악장 Allegro agitato

    [피아노 소나타 2번 B플랫 단조 Op.36]의 오리지널 버전은 연주자에게 과도할 정도의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하는 만큼 비르투오소용 피아노 작품으로서의 자기과시적인 패시지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1악장 Allegro agitato는 B플랫 단조의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대범한 하강 분산화음부터 이러한 느낌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이 하강 주제는 뒤이어 장조로 변형되며 악장 곳곳에서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순환구조 형식을 갖고 있는 이 1악장은 낭만주의 시대에 발전된 중요한 기법을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스타일로 흡수한 것이다. 특히 개성적인 붓점 리듬의 변형된 사용이라든지 양손의 교묘한 엇박 진행에서 그만의 개성을 찾아볼 수 있는데, 짧은 카덴차 뒤에 제시되는 시칠리아노 풍의 부드러운 D플랫 장조에서 다양한 붓점으로 합성된 리듬이 특히 인상적이다. 발전부는 라흐마니노프가 개정판을 내면서 쟁점으로 삼았던 부분이다. 오리지널 버전은 보다 강한 비르투오시티를 요구하는 한편 하강 주제와 주요 조성으로의 명확한 회귀가 담겨 있는데, 1931년 개정판은 이를 대부분 삭제하며 간결하게 만들었지만 핑거링과 도약, 양손의 교차에 있어서 이전보다 더 어려운 테크닉을 담아내며 G플랫 장조의 두 번째 주제를 재현한다. 마무리 코다(coda)는 다음 악장과의 연결을 위해 조용한 어조로 끝을 맺는다.

    2악장 Non allegro - Lento

    2악장 Non allegro – Lento는 서주를 갖고 있는 ‘A-B-A’의 3부 형식이다. 특히 부드러운 하강 음향의 선율이 2악장의 서주를 장식하는데 D장조에서 E단조 렌토(lento)로 변화하는 모습은 대단히 몽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낭만적인 G장조를 거친 뒤 다시 E단조의 주제로 돌아오며 이 악장은 클라이맥스를 갖게 된다. 첫 악장에 등장하는 첫 하강 멜로디 주제나 부드러운 두 번째 D장조 주제를 연상케 한다는 점에 있어서 이 두 번째 악장은 1악장에 대한 회고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마지막은 다시 첫 번째 Non Allegro로 돌아가며 끝을 맺는다.

    3악장 Allegro molto

    2악장과 서주가 조성만 B플랫 장조로 바뀐 채 그대로 사용된 짧은 서주 뒤에 스펙타클하고 웅장하기 그지없는 3악장 Allegro molto가 시작된다. 개선 행진곡을 연상시키는 1주제가 악장 전체를 걸쳐 전조를 통해 수차례 등장하는데, 이 악장 또한 1931년 버전에서는 많은 부분이 삭제되고 몇몇 패시지들은 완전히 수정되었다. 지극히 낭만적인 리리시즘(lyricism)을 담고 있는 두 번째 주제는 첫 주제와 함께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고. 피아니스트의 강한 에너지와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마지막 재현부에 이어 압도적인 승리감에 도취된 B플랫 장조의 화성으로 끝을 맺는다.



    [음반] 블라지미르 호로비츠 런던 실황, 호로비츠 버전(RCA)
    [음반] 졸탄 코치슈, 오리지널 버전 (Philips)
    [음반] 데니스 마추예프, 개정판 버전 (RCA)
    [음반] 엘렌 그리모, 그리모 버전 (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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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8-10 13:40:03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

    Richard Strauss - Metamorphosen for 23 solo strings

    1946년 1월 25일 취리히에서 파울 자허의 지휘로 초연.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을 바라보는 작곡가의 참담한 마음이 아름다운 현악언어로 표현된 명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1945년 3월 13일부터 4월 12일에 걸쳐서 작곡, 1946년 1월 25일 취리히에서 파울 자허의 지휘로 초연된 [메타모르포젠]. 23인의 현악기 독주자를 위한 습작(바이올린 10, 비올라 5, 첼로 5, 더블베이스 3)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이 작품은 네 개의 마지막 노래와 오보에 협주곡 D장조, 클라리넷과 바순을 위한 협주곡과 더불어 80이 넘은 老大家가 남긴 마지막 걸작군 가운데 하나다. 처참하게 파괴된 자신의 고향과 전쟁에 대한 비참한 마음을 느린 템포의 악상으로 담아낸 이 작품을 보면 그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인 [카프리치오] 이후에도 작곡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은 전혀 노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주의 깊게 들어본다면 폐허가 된 독일을 바라보는 작곡가의 그 형언할 수 없이 쓸쓸하고 참담한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현악 언어로 표현되어 강렬한 설득력과 탐미주의적인 아이러니를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 작품을 작곡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1943년 연합군이 감행한 대공습 때문이다. 뮌헨 오페라 극장을 시작으로 드레스덴 젬퍼오퍼가 무너지고 베를린의 린덴 오페라 등등이 차례로 화마에 휩싸였는데, 특히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 사이 3600여 대의 폭격기와 1300여 대의 대형 폭격기들이 몇 만 톤 이상의 폭탄을 쏟아부어 古都 드레스덴을 순식간에 날려버려 폼페이 최후의 날로 만들어버린 것이 작곡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나의 아름다운 드레스덴-바이마르-뮌헨, 모두가 끝났다”며 자신의 추억과 꿈이 서려있는 도시들이 파괴되는 현실에 몹시도 괴로워했다. 이 공습으로 인해 작곡가는 자신의 과거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로브 음악 사전에는 이 작품에 대해 “슈트라우스 자신이 반세기 동안 이끌어 온 독일 음악문화에 대한 비가(悲歌)‘라고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살로메]와 [엘락트라] 같이 그리스 고전을 통한 에너지와 다이내믹의 강력한 포효를 시작으로 [장미의 기사]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이후 드라마와 음악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통한 새로운 극-오페라의 탄생을 이끌어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천성적으로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이며 호기심 많은, 그리고 복잡함을 넘어선 화려함과 단순함을 넘어선 순수함을 동시에 갖고 있던 작곡가이다. 이렇듯 모차르트 이후 최고의 천재로 일컬어진 그에게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1차 대전도 겪은 그였지만 당시에는 참호전과 국지전을 중심으로 전쟁이 벌어진 반면 이렇게 도시 전체와 시민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참혹하고 무자비한 경우는 없었기에 그 슬픔의 강도는 더욱 컸다.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이라는 단어는 괴테의 詩 ‘동물의 정화, 식물의 정화’에서 인용한 것으로서 탈바꿈, 변형, 변모(變貌), 변성(變性)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작곡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드레스덴을 상징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로 추측할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전쟁 교향곡들이나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와 같은 전쟁 음악들이 표현주의적인 방식으로 직접적인 반영을 그려냈다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은 보다 개인적인 은밀함과 은유적인 간접성이 두드러지며 다른 전쟁 음악들과 대조를 이룬다. 전쟁을 연상시키는 통렬한 심경이나 묘사가 없는 약간은 신비로운 측면을 담고 있어 리얼한 전쟁 음악으로서의 강도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을 겪는 한 개인의 내적인 강렬함을 가장 정제된 형태와 압축된 언어로 담아낸 얼음 속의 불꽃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메타모르포젠]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자신의 도시가 폐허로 변한 변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폐허 위에 미래를 위한 일말의 희망을 심고자 하는 새로운 변형을 염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음악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의 2악장 장송 행진곡으로부터 인용한 첼로와 더블 베이스의 몇몇 마디들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한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등장하는 셋잇단음 리듬이 빈번히 사용된다. 이와 동시에 말러의 교향곡 느린 악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심원하고도 낭만적인 성격과도 닮아 있고 그 특유의 자유로운 폴리포니적 성격(23개의 악기가 모두 독립된 라인을 갖고 있는)과 자유로운 변주양식을 연상시킨다. 비통하면서도 명상적인 주제에 가해지는 색다르고 끊임없는 유기적 변형을 담고 있는 이 음악은 정신적으로는 ‘트리스탄’적이지만 마음으로는 절친한 친구였던 ‘말러’를 회상하며 결국은 ‘베토벤’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귀결시키는 듯하다.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제목과 상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전쟁의 상흔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인 치유를 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 초감각적인 ‘멜로디적인 폴리포니’를 통해 현악 테크닉에 있어서 가장 발전된 승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작곡가의 현대적인 기악어법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로부터 아무도 알아챌 수 없는 사이에 벨벳과도 같은 부드럽고 찬연한 사운드로 정화시켜나가고, 신중하게 선택된 음조를 통해 현혹적이고 ‘아리아드네’적인 화성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창조력만이 해낼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이 죽은 다음 일종의 ‘유품’으로 발표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실행되지는 못했고 그 자리는 이후에 작곡한 네 개의 마지막 노래가 대신하게 되었다.

    추천음반

    1. 베를린 필하모닉/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DG)
    2. 비인 필하모닉/ 앙드레 프레빈 (Philips)
    3.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쥬제페 시노폴리 (DG)
    4.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루돌프 켐페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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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8-03 11:06:56








    클래식음반의 녹음을 새벽에 하는 이유

    연주자들이 잠도 못자고 새벽에 녹음하는 이유는 단순히 조용한 분위기에서 적막함을 담아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따로 물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전기가 가장 깨끗할 때라 그렇습니다. 현대의 어느 국가이든 전압은 대부분 안정적입니다. 그렇긴해도 전원이 여러 곳을 경유한 후에 건물에 유입되기 때문에 전압, 즉 교류의 파형이 오염됩니다. 전원을 파형으로 찍어보면 정반원으로 위상(位相)이 바뀌어야 하는데 이것이 찌그러지는 것이지요. 이 상태에서 녹음을 하면 음의 순도가 떨어집니다.

    반대로 아무리 녹음이 뛰어난 음반도 AC 노이즈가 유입이 될 때 재생을 하면 음이 혼탁해집니다. 그러나 새벽에는 전기를 거의 쓰질 않기 때문에 AC 노이즈 유입이 되질 않습니다. 클래식 레코딩을 일부러 새벽시간을 골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어느 레이블의 레코드사 중 음질이 아주 뛰어나기로 유명한 곳이 있었습니다. 많은 엔지니어들이 나름대로 추측을 내놓았지만 레코드사는 끝내 그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입니다만 노하우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잠든 새벽에 녹음을 합니다. 왜냐고요? 그때가 전기가 가장 깨끗할 때니까요."

    조르디 사발 같은 古음악 전문악단의 녹음은 더욱 깨끗한 전기가 필수입니다. 고음악 악기가 현대 악기보다 배음(倍音)이 더 섬세하고 여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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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숲빛 (@veritas0359)
    2021-07-31 11:25:51












    게오르기 카트와르
    Georgy Catoire (1861~1926)

    카트와르는 프랑스 혈통을 가진 러시아 작곡가이다.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14세 무렵 리스트의 제자이자 바그너의 친구였으며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이기도 했던 칼 클린트보르트(Karl Klindworth)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바그너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작곡가로는 드물게 親바그너적인 경향을 갖는 작곡가의 한사람으로 1879년 바그너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바그너에 대한 한결같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오늘날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림스키-코르사코프협회 소속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바그너를 강력하게 혐오했다는데 기인한 것으로 러시아 대중과 음악가들에게 바그너의 음악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그의 서클에 속한 일련의 작곡가들은 바그너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던 카트와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카트와르는 처음부터 음악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그는 1884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졸업후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 당시 그를 가르쳤던 클린트보르트는 베를린으로 떠난 상황이어서, 그의 제자였던 빌보르크(V.I. Willborg)에게 기초적인 화성과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이 시기에 카트와르는 피아노 소나타와 성격적 소품 등을 포함한 몇곡의 피아노 작품들을 작곡했으며, 리스트 등의 작품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향악 작품들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관현악 모음곡 1번 작품 43의 첫 악장을 편곡했는데, 이 편곡 작품은 차이코프스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카트와르가 편곡한 작품에 더해 세밀하게 보필했다 한다. 계획적이고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아보는것이 어떻겠냐는 차이코프스키의 권유를 받아 들인 것은 바로 이 무렵으로 당시 카트와르의 나이는 24살이었으나 작곡가가 되기에 그의 능력과 열정은 모자람이 없었다.

    빌보르크의 레슨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1885년 후반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다시 클린트보르트에게 레슨을 받았다. 1886년 잠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차이코프스키와 교분을 쌓았는데, 이때 그의 피아노 변주곡 세트를 본 차이코프스키는 카트와르에게 “작곡에 대한 재능을 썩히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고 하며 크게 만족해 했다 한다. 모스크바 방문동안 카트와르는 차이코프스키로부터 출판업자인 유르겐손(Jurgenson)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카트와르는 1886년 한해동안 줄곧 클린트보르트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음과 동시에 오토 티르쉬(Otto Tirsch)에게 작곡과 음악 이론을 배웠다. 그러나 티르쉬의 교습방식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필립 루처(Philip Rufer)에게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교습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레슨의 산물로 한곡의 현악 사중주가 탄생했다.

    카트와르는 스승인 클린트보르트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의 데뷔를 거절하고 1887년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모스크바에서 차이코프스키를 다시 만난 카트와르는 구베르트(Gubert)와 타네예프(Sergei Taneyev)가 배석한 자리에서 자신이 베를린에서 루퍼를 위해 쓴 현악 사중주를 선보였다. 배석자들은 카트와르의 작품이 음악적인 흥미는 있으나 텍스츄어가 빈약하다고 지적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추천을 받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로 간 카트와르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과 음악이론에 대한 교습을 받았다. 차이코프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쓴 편지에서 "재능은 많으나...진지한 교육이 요구된다"고 썼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카트와르를 리아도프에게 보내기 전에 한번의 레슨을 해주었는데, 이 레슨의 결과로 태어난 3곡의 작품이 훗날 3개의 피아노를 위한 소품, 작품 2로 출판되었다. 그후 카트와르는 리아도프에게 대위법을 배웠으며, 기상곡 작품 3을 비롯한 몇몇 작품을 작곡하였다. 리아도프로부터의 레슨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교습은 종결되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 시기동안 2번째 사중주와 칸타타 루살카(Rusalka", 독창, 여성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타 작품 5)를 작곡하였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과 가족 및 동료들은 작곡 이력을 쌓은 과정을 탐탁치 않아 했다. 카트와르는 결국 1899년에 일련의 실망스러운 작품을 뒤로 한 채 시골에 칩거하였으며 작곡을 거의 그만두게 되었다. 칩거 2년 후쯤에는 그의 음악 친구들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은둔의 결과로 작품 7번 교향곡이 작곡되었다.

    1919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되었으며, 재임기간동안 이론과 작곡에 관한 몇개의 논문을 썼다. 미야스코프스키(Nikolai Myaskovsky)는 카트와르가 가르친 가장 뛰어난 학생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그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이 연주한 피아노 작품들과 알렉산더 골덴바이저(Alexander Goldenweiser)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David Oistrakh)의 연주로 레코딩된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 등 몇몇 음반이 발매된 바 있다. 그의 음악은 분명 초기 스크리아빈의 작품과 포레, 차이코프스키의 것과 유사하다. 그의 작품은 상당한 수준의 비르투오시티와 아울러 악기의 색채감에 대한 변별력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카트와르는 작가이자 음악가이기도 하였던 장 카트와르의 삼촌이기도 하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悲歌,작품 26)는 1916년에 출판된 것으로 카트와르의 제자였던 미야스코프스키의 표현처럼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견실한 작품으로 카투아르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 매우 커다란 아취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5분여 밖에 안되는 작은 외형의 이 작품 안에는 음악적 아이디어와 분위기, 어법 등 카투아르의 음악세계의 모든 것이 반영되어 있다.

    음반의 첫 곡으로 수록된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작품 15)은 1898-1902년 사이에 작곡된 것으로 그의 창작 1기에 해당하는 다수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작품일 뿐 아니라 이 시기의 가장 후반부 무렵에 작곡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장대한 첫 악장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적 작품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2악장인 뱃노래는 우수적 분위기와 뒤섞인 매우 세밀한 장식법과 부드러운 서정성의 전형이다. 여기에 더해진 詩的인 사운드는 온전히 카트와르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반짝이는 수채화 그림물감의 촉촉함으로 가득찬 분위기 좋은 그림과 그 속에 부유(浮遊)하는 밝게 굽이치는 물결에 대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詩曲(작품 20) 두 번째 소나타는 카트와르의 실내악 작품중 가장 중요한 곡이며,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1906년에 작곡된 것으로 그의 작품 2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작곡되었는데, 심각한 병으로 인해 1902년부터 1904년 말까지 잠정 중단되었던 창작활동이 병세의 회복으로 재개된 이후 작곡된 것이다. 병으로 인해 1904년 티롤에 머물르다 창작을 위해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이후 정력적인 작곡활동이 재개되었다.이 작품은 알렉산터 골덴바이저에게 헌정되었다. 두곡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엘레지(작품 26)는 악보 草稿의 형태로 남아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본음반의 맨 마지막 트랙에 수록된 로망스는 본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었으나 본 음반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편곡 버젼이 수록되었다. 이 작품은 그가 작곡한 다른 여타의 작품들에서는 거의 시도된 바 없는 것으로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처음으로 차이코프스키를 만났을 때 차이코프스키 앞에서 연주했던 자신의 첫번째 작품으로 훗날 작품번호 1이 되었다. 또한 이작품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작품이며,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詩에 붙여진 작품으로 1883년에 출판되었으며 작곡가의 부인이었던 소피아에게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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