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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빛님의 로그입니다.

Grüß Gott~♥ Ciao~♥ 전악장 감상 고전음악 방송입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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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veritas0359)

  • 23
    숲빛 (@veritas0359)
    2022-08-04 12:38








    『기분을 관리하면 인생이 관리된다』
    김다슬

    ★복수심은 삶을 움직이는 커다란 원동력이다. 핵심은 이 강력한 에너지를 상대를 증오하는데 쓰지 않고, 오롯이 자신을 위해 쓰는 현명한 자세에 있다.

    ◆멘탈이 흔들릴 때 명심할 세 가지

    ①다른 사람이 뭐라든 신경쓰지 않는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세인의 비난과 칭찬에 초연하라. 본인의 삶이 초라한 인간일수록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법이다. 진정으로 잘난 사람은 자기 계발하고 주위 사람들 챙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따라서 타인 일상의 가십거리엔 별 관심이 없다. 못난 사람은 열등감에 가득찬 나머지 자기 삶을 타인의 험담으로 가득 채우는 우매한 짓을 한다. 실제로 본인의 가장 귀한 재산인 시간을 타인을 위해 쓰고 있으니 말이다.

    ②시샘은 잘 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지금 아주 잘 하고 있다는 증거다. 못살고 있는 사람에겐 시샘을 느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싸구려는 아무런 논란도 짝퉁도 생기지 않지만, 명품은 생기듯 말이다..

    ③멘탈이 강한 사람은 없다. 단단한 멘탈을 타고난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더 자주 멘탈을 붙잡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멘탈은 누구나 흔들리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속으로 한번 더 붙잡는 사람이 강해 보이는 거다. 멘탈이 자꾸 흔들린다고 무너지지 말기 바란다! 자주 흔들리고 더 자주 붙잡으면 되는 일이다. 마음은 몇 번이고 다잡을 수 있다.

    ◆잘 배운 사람이 티가 나는 대목

    ①타인이 싫어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이 좋아할 만한 행동으로 환심을 사는 일에 급급하지도 않는다. 싫어할 짓을 하지 않고, 그저 자기 할 본분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조급하지도 않고 관심을 구걸하지도 않으니 사람을 대하는 게 늘 담백하다. 이러면 상대가 알아서 호감을 품는다.
    ②상황을 예측한다. 아무 생각없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을 경계한다. 특정 언행을 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지 예측한다. 이는 상대와 갈등이나 마찰을 피하는데 효과적이다.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떠든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자랑이 아니다. 자신은 다른 거 재지않고 그만큼 가식없이 솔직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실제론 생각없이 행동하는 무례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③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음을 안다. 무엇이든 대가가 따른다는 걸 안다. 그만큼 상대의 수고와 노력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보답할 줄 안다. 잘못배운 사람이 되기는 쉬워도 잘 배운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선천적으로 타고 난 사람도 있으나 소수에 불과하다. 보통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이 뭉개지고 당하고 반면교사를 삼는 각고의 노력 끝에 터득한다.

    ◆잘못 배운 사람이 티가 나는 순간

    ①편한 대상을 막 대할 때! 그 사람의 인성을 알고 싶으면 가족, 노인, 어린아이, 반려동물, 종업원, 경비원 등을 유심히 살펴 보면 된다. 사람은 일상에서 편한 대상을 대할 때 가면을 벗고 비로소 무방비한 인성이 드러난다.

    ②돈을 쓴다고 갑질할 때! 돈 쓰는 걸 마치 권력처럼 생각한다. 돈을 쓰고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면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따지면 될 일이다. 화내고 윽박지르고 당연히 그래도 되는 것처럼 갑질할 일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 사는 사회임을 망각한 짓일 뿐이다!

    ③타인의 취향을 무시할 때! 자기의 취향만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부류이다. 클래식, 락, 힙합 등 특정 장르를 찬양하면서 대중 가요나 아이돌 가수를 우습게 안다. 독립영화나 미술은 인정하고 상업 영화나 예술은 비난한다. 특정 작가나 책은 좋다면서 많은 대중이 찾는 에세이나 웹소설을 쓰레기 취급한다. 예술 분야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현상이다. 일종의 선민의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주로 그런다. 심할 경우 예술병에 걸렸다고도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본인이 찬양하는 예술을 비하하면 발끈한다는 점이다. 정작 본인은 타인의 취향을 깎아내리면서 말이다. 본인의 취향이 귀하면 남의 취향도 귀한 줄 알아야지!

    종교라고 다를 것 같은가! 미국 노틀담 대학 종교철학 교수인 존 던(John Dunne)의 말로 대신한다.

    「우리 시대의 성인(聖人)은 고타마나 예수나 모하멧같이 세계적인 종교를 창시한 인물들이 아니고, 간디처럼 동정적인 이해심을 가지고 자기 종교에서부터 남의 종교들로 넘어갔다가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자기 종교로 되돌아오는 인물일 것이다. 넘어가봄과 되돌아옴은 우리 시대가 감행해야 할 영적 모험이다.

    넘어가봄이란 입장을 바꾸어봄, 다른 문화, 다른 생활양식, 다른 종교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다. 이것은 "되돌아옴"이라 칭할 수 있는 동일하면서도 반대되는 과정, 곧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자신의 문화, 자신의 생활양식, 자신의 종교로 되돌아옴을 수반한다.」

    잘못 배운 사람은 굳이 설득하기보다 멀리 하는 것이 낫다. 가만 보면 사람은 고쳐쓰는게 아니라는 유명한 말이 타당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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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22-04-13 17:20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받으라!

    「친애하는 베토벤군! 그대는 오래도록 염원하던 바를 이루기 위하여 이제 곧 비인으로 떠나려 한다. 모차르트의 수호신은 그 비장(秘藏)의 아들을 잃고 아직도 슬픔에 빠져있다. 수호신은 마르지 않은 창작의 샘인 하이든에게서 잠시 의탁할 곳을 찾았으나 안식처는 찾지 못하였으니, 하이든을 통해 다른 누군가와 하나 되기를 바라고 있다. 부디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여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이어받으라!

    Lieber Beethoven! Sie reisen itzt nach Wien zur Erfüllung Ihrer so lange bestrittenen Wünsche. Mozarts Genius trauert noch und beweinet den Tod seines Zöglings. Bei dem unerschöpflichen Haydn fand er Zuflucht, aber keine Beschäftigung; durch ihn wünscht er noch einmal mit jemandem vereinigt zu werden. Durch ununterbrochenen Fleiß erhalten Sie: Mozarts Geist aus Haydns Händen」

    베토벤이 비인을 처음 방문한 시기는 17세 때인 1787년 봄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방문하였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시기에 모차르트를 만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서른을 넘긴 비인 시절의 모차르트가 청년 베토벤을 만나 무엇을 얼마나 공감하고 소통했는지는 둘 만이 알 일이지만, 모차르트가 베토벤의 피아노 즉흥연주에는 꽤 흥미를 보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비인에 온지 얼마 안돼 베토벤은 어머니의 병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베토벤이 비인을 다시 찾은 것은 스물두 살이 된 1792년이었다.

    무엇이 베토벤으로 하여금 비인(Wien)을 향한 열망으로 이끌었을까?

    베토벤의 가슴속에 피어오른 음악에의 웅대한 뜻과 비인을 향한 동경은 서로 동의어였는지 모른다. 베토벤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보다 큰 세상을 그리면서, 한발 한발 차분하게 거인의 발걸음을 디뎠다.

    베토벤은 13세 때「드레슬러 변주곡(9 Variationen über einen Marsch von Ernst Christoph Dressler in C minor, WoO.63)」을 썼다. 이를 본 그의 초기 스승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는 ‘또 하나의 모차르트가 될 것’이라며 격려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스승에게서 받은 칭찬과 격려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자 희망이었다. 베토벤은 아마도 네페에게서 모차르트와 비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13세 베토벤은 이 때 이미 모차르트를 상상하며 비인을 꿈꾸기 시작했다.

    10대 무렵 출입하기 시작한 브로이닝(Breuning)家에서 베토벤은 브로이닝 부인의 여러 아이들의 피아노 선생이 돼주었고, 따뜻한 환대속에서 모처럼 자유와 행복을 맛보며 브로이닝가가 소장하던 많은 도서들을 접했다. 베토벤의 음악관은 브로이닝가에 머무르며 자유롭게 사색하고 독서하던 시기에 형성되었고, 이때 길러진 인문학적 소양은 그의 음악적 양식과 내용을 한층 풍요롭게 했다. 음악과 문학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상호 보완의 관계라고 생각한 베토벤이 문학적 내용을 충실히 이행해주는 시녀로서 음악을 대한 괴테와 대립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베토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기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된다. 브로이닝가에서 주최하는 음악과 문학 살롱에서 수많은 귀족들을 만나 교분을 쌓은 것이다. 이들 귀족은 열렬한 음악 애호가였음과 동시에 훗날 베토벤이 돈걱정 안하고 비교적 안정되게 작품활동에 전념하는데 큰 도움을 준 ‘베토벤 숭배자’들 이기도 했다.

    발트슈타인 백작(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 리히노프스키 공작(Karl Alois Lichnowsky 1761~1814), 라주모브스키 백작(Andrei Kirillowitsch Rasumowski ,1752∼1836), 슈비텐 남작(Gottfried van Swieten 1733~1803), 롭코비츠 공작(Joseph Franz von Lobkowitz 1772~1816), 루돌프 대공(Erzherzog Rudolph, Johann Josep Reiner,1788∼1831)은 그 중에서도 가장 열렬히 베토벤을 후원했던 귀족들이다. 그리고 본(Bonn)에 진출해 있는 귀족들 상당수가 하나같이 비인 출신이라는 점도 베토벤의 음악적 상경(上京)을 재촉했다.

    베토벤의 열혈 찬미자이자 후원자 가운데 가장 먼저 베토벤의 진가를 눈여겨 보고 돕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발트슈타인 백작이었다. 발트슈타인은 비인의 귀족 가문 중에서도 가장 상류층에 속하는 가문출신이었고, 진정한 음악 애호가였음과 동시에 본인 스스로도 수준급의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다. 발트슈타인은 이제 갓 성인이 된 베토벤을 한 문학 살롱에서 처음 만나 첫 인연을 맺었다. 베토벤의 재능을 알아 본 발트슈타인은 그 후 하이든에게 베토벤을 소개하는 추천서를 써주고 장학금을 주선해 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돕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발트슈타인은 혹시 자신의 재정 지원이 자존심 강한 베토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당시 본(Bonn)의 선제후였던 막시밀리안 프란츠가 돕는 것이라고 거짓말까지 해가며 베토벤을 지원했다. 또 본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에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선제후를 설득해 비인으로 진출할 수 있게 도왔다.

    베토벤이 비인으로 진출하기까지엔 발트슈타인 백작의 도움이 다른 무엇보다도 컸다. 그리고 1792년 발트슈타인은 자신이 써 준 추천서를 베토벤의 손에 쥐어 주면서 벅찬 꿈을 안고 장도에 오르는 청년 베토벤의 앞날을 축복했다.「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이어받으라!」는 아름다운 격려사와 함께..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이어받으라(Mozarts Geist aus Haydns Händen)’ 는 격려의 말은 베토벤이야말로 모차르트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선언하는 축복의 찬사이기도 하였지만, 당시 베토벤을 후원했던 사람들의 궁극의 목표가 바로 모차르트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진심으로 모차르트를 경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베토벤을 비인으로 이끄는 압도적 동력이었던 것이다.

    발트슈타인을 비롯한 후원자들은 베토벤 음악의 가치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고, 그가 가진 특별함을 통찰하는 안목이 있었으며, 아낌없이 베토벤을 후원했다. 베토벤의 삶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음악적 영감은 방해받지 않는 자유의지로 만들어졌고, 발상은 다시 찬연한 창작물로 쏟아져 나왔다. 부와 교양을 겸비한 후원자들의 배려와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피아노와 목관을 위한 5중주(K.452)'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도 피아노와 관악을 위한 5중주(작품 16)를 썼다. 악기 편성과 조성마저도 같지만, 곡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모차르트 실내악 장르의 가장 특별한 보석이라 할 만한 5중주 곡의 구성과 편성을 흉내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베토벤에게 모차르트가 어떤 존재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또 피아노 소나타 장르에서 ‘영웅 교향곡’과 비견될 만큼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피아노 소나타 21번(작품 53)은 바로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베토벤은 그의 5중주를 통해 모차르트에게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21번 소나타에 ‘발트슈타인’이란 이름을 봉인함으로써 그간 입은 무한한 은혜에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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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22-01-21 13:53








    리하르트 게오르크 슈트라우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Richard Strauss - Also sprach Zarathustra Op.30

    1896년 8월에 완성되어 같은 해 11월에 초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교향시.

    조숙한 천재가 도달한 교향시(交響詩) 장르의 정점
    인류의 기원에서 발전까지의 과정을 그린 철학적인 교향시

    8개의 작은 표제가 붙어 니체의 철학시에 조응하지만 굳이 해당 제목을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책 자체를 읽지 않았더라도 곡을 감상하는 데 큰 지장은 없다(물론 알면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슈트라우스는 당시까지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철학의 음악화’를 시도했다.
    “나는 철학적인 음악을 쓰려 한 것이 아니며, 인류가 그 기원에서부터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해가는 모습을 음악이라는 수단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굴레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초인(超人)으로 거듭나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그의 동굴을 떠났다. 컴컴한 산 뒤에서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처럼 불타는 모습으로 늠름하게.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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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22-01-21 13:30




    Friedrich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의 성장드라마

    超人(Übermensch)에 대하여..

    神의 사후 과연 인간은 자기극복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학자는 진리탐구를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한 자들이지만, 전체를 못보고 미세한 전문의 함정에 빠져 마치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착각에 빠진 자들!

    노예나 천민의 왕도 위대한가? 금력과 권력, 명성과 욕망만을 추구했다면 그도 왕이 아닌 노예나 천민일 뿐! 삶의 진짜 주인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귀족 역시 자기절제에 대한 부단한 훈련이 되어 있어야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운명은 초인이 되는 것에 있다. 신의 종이 아니다. 고난과 시련을 끊임없이 극복하기에 인간이다. 고난아! 어서오라! 기꺼이 맞아주마! 그럴수록 나는 더욱 강해진다!

    인간은 더러운 강물이다. 더럽혀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바다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위대한 자기경멸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Das ist die Stunde der großen selbstverachtung). 초인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를 경멸하는 시간을 가질 것! 진정으로 부끄러움을 느껴보라! 자기기만과 두려워 눈치보는 노예근성에 대하여 고통스러울 만큼 수치심을 느껴 보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역겨운 본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위대한 경멸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급류가 흐르는 강가의 난간이다. 붙잡을 수 있는 자는 나를 붙잡아라! 그러나 내가 그대들의 지팡이는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Ich bin ein Geländer am Strome: fasse mich, wer mich fassen kann! Eure Krücke aber bin ich nicht. —. Also sprach Zarathu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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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9
    🎏꧁⭕┣추꧂🎭 (@pcw4862)
    2022-01-01 09:01


    한해동안 많은사랑 배풀어주셔서
    여러분들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감성홀릭올댓뮤직방송에서
    부족하지만 임인년해에는
    많은사랑 청취 따뜻한 배려 해주시면
    더욱더발전된모습으로 여러분들곁에 다가가겠습니다.
    흑호랑이 임인년해 2022년!
    2022년 새해가 힘차게 밝았습니다.
    새해에는 항상 희망과 행복,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것 같습니다.
    새해의 좋은 에너지 모두 흡수하셔서
    꿈을 향해 힘차게 도전하시고,
    꼭 뜻하시는 일들 모두 이루시기 바랍니다.
    2022년! 당신의 해로 만드시길 응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추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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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21-12-30 14:19














    탄탄한 실내악 작법

    베토벤 3중주 (작품 38) E flat 장조

    클라리넷, 첼로 & 피아노 3중주로 편곡한 베토벤의 7중주!

    Ludwig van Beethoven - Trio, Es-dur für Klavier, Klarinette und Violoncello, Op.38 [Nach dem Septett, Op.20]

    베토벤이 원곡인 바이올린, 비올라, 클라리넷, 호른, 바순, 첼로 & 더블 베이스를 위한 7중주를 쓴 시점은 이제 갓 교향곡을 손대기 시작한 29세 무렵이었다. 훗날 교향곡의 탄탄한 기초를 만들어 준 것도 다양한 관악기에 대한 실내악 실험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베토벤에게 있어 클라리넷과 바순은 관현악 작품에서는 물론이고 실내악에서도 궁합이 잘맞는 관악기였다.

    이듬해인 1800년에 완성된 1번 교향곡에도 자신이 그간 시도해 왔던 관악의 다양한 화성적 기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비인의 부르크극장에서 초연된 1번 교향곡에 대해 당시 음악 비평지에「아이디어가 넘치는 새로운 예술」이라는 평과 함께「목관이 남용되어, 너무 두터운 목관의 음향층 때문에 전체 오케스트라의 균형에 문제가 있었다」는 비판이 실렸다. 베토벤이 시도했던 창의적인 사운드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원곡인 7중주를 접한 당시 출판업자들은 상당한 대중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아무리 실내악이라 해도 관악기 3대, 현악기 4대로 연주하는 것은 부담이 있다고 생각해, 조금 더 소편성으로 편곡해 줄 것을 베토벤에게 주문했다. 당시에도 첼로 주자보다 바순 연주자 찾기가 훨씬 어려운 시절이었다.

    클라리넷과 바순의 악기 연관성을 잘 이해하고 있던 베토벤에게 악기 편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다, 대중이 연주에 용이하게 하기 위한 일이라 7중주의 편곡 작업에 착수했다. 또 여러 버전으로 편곡하게 되면 악보 판매에도 짭짭한 부수입이 보장되었던 모양이다. 베토벤이 자신의 교향곡 2번을 피아노 3중주 실내악 버전으로 편곡한 것도 그 예이다.

    이렇게 하여 5년 뒤인 베토벤 나이 35세에 원곡인 7중주가 클라리넷, 첼로 & 피아노를 위한 3중주 곡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7중주의 현악 파트는 모조리 피아노가 담당하게 했고, 클라리넷은 원곡의 파트를 그대로 가져왔으며, 첼로는 바순 파트를 떠맡았음과 동시에 호른의 패시지도 일부 차용했다. 단 한 음(音)도 무가치하게 버려질 수 없는 밀도감 있는 교향곡이 만들어지기까지 이와같이 실내악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작법이 축적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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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9
    🎏꧁⭕┣추꧂🎭 (@pcw4862)
    2021-12-25 09:04


    올 한해도
    즐겁게 보내셨나요?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행복하고 따뜻한
    겨울 되세요!

    메리크리스마스💝💟💌

    -아추올림-

    댓글 0

  • 23
    숲빛 (@veritas0359)
    2021-11-03 13:24








    김영하『말하다』중 ‘친구에 대한 생각’에 대한 斷想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잘못 생각했던 거죠. 친구를 훨씬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아요. 쓸데없는 술자리에 너무 시간을 많이 낭비했어요.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어떤 남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 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 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결국 모든 친구들과 다 헤어지게 돼요. 이십 대에 젊을 때에는 그 친구들과 영원히 같이 갈 것 같고 그 친구들과 앞으로도 많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손해 보는 게 있어도 맞춰주고 그렇잖아요. 다 헛되요.

    자기 자신의 취향에 귀 기울이고 영혼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고 이런 게 더 중요한 거예요. 모든 도시를 다 가보고 모든 음식을 다 먹어보고 그래도 영혼을 구하지 못하면 인간은 불행해요. 밤새 술 먹고 그런 거 안 했어야 하는데.

    그때에는 친구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공허한 술자리에 술 먹고 밤새고 동아리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동아리는 내가 고민하지 않아도 잘만 굴러가요. 지금도 잘만 있더라고요. 그때에는 당시에 대단한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요. 앞으로 동아리는 어떻게 될까를 논의하고 그랬어요. 어릴 때의 친구들은 더 배려도 없고, 불안정하고 인격이 완전하게 형성되기 이전에 만났기 때문에 가깝다고 생각해서 막 대하고 함부로 대하는 면이 있어요. 가깝기 때문에 좀 더 강압적이고 폭력적일 수도 있죠.”

    ※김영하 작가의 친구에 대한 단상에 상당부분 공감한다. 순간「벗과의 관계도 정이 지나치면 소원해 진다(朋友數,斯疏矣;里仁:26)」는 논어의 구절이 스쳤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의 말이지만 공자 문하생의 어록인 만큼 공자의 생각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벗과의 교우관계에 있어서도 친밀함의 표현이 지나쳐 상대방에 폐가 될 정도라면 진정한 우정이라 할 수 없다. 경우없는 우정공세를 취하거나 진짜 친구는 허물없는 사이라는 우정론을 설파하는 사람과는 교우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배려도 없고 눈치도 없는 충고 역시 반복되면 상대로부터 경원시(疏) 당한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받고 관심받길 바라지만 편집과 집착은 사랑도, 우정도 아니다. 우정, 애정과 같은 감정도 배려와 절제 같은 적정한 분한이 지켜져야 한다. 머리가 커졌을 법한 20~30대의 분별없는 우정관은 그만두더라도 그 이후까지 무익한 시간낭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을 깊이 후회하고 부끄러워 한다. 친구와 우정에 대하여 그동안 잘못 가져왔던 관념을 지금이라도 깨닫고 성찰함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젠 자신을 좀 더 아끼고 자존을 회복하는데 시간을 더 들이자.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더 섬세히 살피자.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하여 결국엔 자신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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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9-20 11:03










    클래식 애호가를 사로잡은 EMI 시절 크리스티앙 페라스 예술의 기록! II

    그러나 1970년부터 페라스의 커리어는 급격히 붕괴하였다. 이유는 병적인 음주벽 때문이었다. 몰래 술을 마시던 습관이 노골화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맥주를 들이켰다. 곤드레만드레 만취된 상태로 리허설장에 나타나 휘청거리다가 콘서트를 취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대체 원인이 뭐였을까. 그는 음악가로서 빠르게 성장하며 어린이다운 삶을 겪지 못하였다. 야심가인 아버지가 페라스를 또래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하였다. 과묵한 그는 늘 혼자였다. "나는 열세 살 때부터 쭉 이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쳤어요." 그의 고백이었다. 아내와 소원하여 안고 다니는 애완견하고만 대화를 하였다. 우울증이 심해져 1974년 11월 바르비제와 듀오 25주년 기념 리사이틀을 가진 뒤, 파리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면서 페라스는 현역에서 물러났다. 심한 알코올 중독으로 성격마저 비뚤어져 주변 사람들을 심술궂게, 가학적으로 대하였다. 카지노를 출입하다 애지중지하던 두 대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중 한 대를 팔았다. 그래도 연주를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82년 5월, 페라스는 7년 공백을 깨고 무대에 컴백하였다. 그러나 그의 심신은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 8월 25일 열린 연주회가 종막이었다, 1982년 9월 14일, 페라스는 자신의 아파트 10층 창문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직관적이고 독특하고 탐미적인 음악세계

    프랑스 벨기에 바이올린 악파의 적손이라 자처했지만, 크리스티앙 페라스는 실상 그 계보의 판에 박힌 틀에서 벗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제자 필리페 에쉬에 의하면 페라스는 극도로 직관적인 스타일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마주하는 작품을 미리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깊이 연구하지 않았다. 대신 음악가로서 느끼는 직감과 자신의 본능을 믿고 이에 따라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바르비제와 토론하면서도 작곡가의 지시보다는 본인의 주장을 앞세웠다. "이렇게 하니 소리가 더 낫게 들리는 거 같아요." 필요시 텍스트의 다이내믹과 프레이징, 음표를 바꾸어 연주하기도 하였다. 악기를 쥐는 자세도 규범과 달랐다. "나를 따라하지 마십시오." 제자들에게 경고하였다. 바이올린을 어깨 견갑골에 올려놓지 않고, 귀와 턱에 밀착시킨 채 팔꿈치를 들어 올려 높은 각도로 활을 잡았다. 왼손 운지법도 특이하였다. 그 결과 파트리스 폰타나로사의 코멘트처럼 페라스는 미끄러운 윤기와 차진 끈기가 공존하는 농염한 바이올린 음을 빚어내었다. 그의 1721년제 스트라디바리우스 더 프레지던트와 1728년제 밀라놀로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퇴폐적인 유미주의를 소환하는 마법의 하프였다.

    크리스티앙 페라스는 1947년 11월, 열 네 살 나이로 드뷔시 를 녹음하여 첫 번째 레코드를 만든 이래 은퇴하기 직전까지 다양한 앨범을 내놓았다. 1977년 칩거 중에 레코딩한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Ages Records)과 소수의 실황 녹음들을 제외한다면 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의 유산은 EMI 레이블에서 제작한 전반기 기록과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에서 제작한 후반기 기록,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 레코딩들이 최근 들어 잘 정리된 반면, EMI 레이블 레코딩은 따로따로 구해야하는 현 상황에서 전반기 녹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본 세트의 출시는 실로 반가운 기획이라 하겠다. 연주는 하나같이 일품이다. 일례로 1번 디스크에 수록되어 있는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와 포레 바이올린 소나타 1번 1957년 첫 번째 녹음을 들어 보라. 유려한 활 움직임, 섬세한 펄스로 떨리는 비브라토, 어슴푸레한 색조가 가히 환상적이다. 바르비제가 인간의 신경이 견딜 수 있는 한계치의 영역에 도달한 듯 극도로 예민해진 바이올린 음을 매번 현세로 되돌아오도록 다독이는 역할로 기능하고 있다.

    12번 디스크에 수록되어 있는 포레 바이올린 소나타 1번과 2번 1964년 녹음, 혹은 9번 디스크에 수록되어 있는 드뷔시 바이올린 소나타 G단조와 라벨 치간느 1962년 녹음도 감미롭고 아름답다. 일단 감상하게 되면 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 9번 디스크에는 또 하나 특필할만한 레코딩이 드뷔시와 라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페라스의 은사이기도 한 제오르제 에네스쿠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1962년 녹음이 그것으로 오묘한 시정 표현과 자유분방한 광시곡 분위기 연출 면에서 에네스쿠 본인이 1948년 10월 콜롬비아 레이블에서 만든 자작자연 반을 능가하고 있다고 장담해도 과언이 아닌 명반이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금번 박스 세트 등장으로 마침내 리이슈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바이올리니스트가 프랑스 음악에만 능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오판이다. 4번 디스크, 5번 디스크, 6번 디스크에 담겨있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이 단적인 증거물이다. 1958년 녹음으로 깔끔하니 세련된 싱잉 라인을 뽑아내는 페라스의 바이올린, 그와 대등한 차원의 서포트를 들려주는 바르비제의 피아노가 하나 된 마음으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소나타 6번 같이 대중에게 자주 언급되지 않는 작품들의 연주가 특히나 돋보인다.

    협주곡 레코딩도 가득하다. 여든 번 넘게 실연에서 선보였다고 전해지는 페라스의 장기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 는 앙세르메/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과 협연한 1957년 실황(Claves), 라파엘 쿠벨릭/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협연한 1960년 실황(Forgotten Records), 요제프 카일베르트/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한 1960년 실황(Testament), 조르쥬 프레트르/파리 음악원 관현악단과 협연한 1963년 레코딩(EMI), 마시모 프레치아/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협연한 1964년 실황(Audite), 총 네 종류의 음원이 발굴되어있는데, 이 세트에는 프레트르와 협연한 스튜디오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음 감각과 차가운 동시에 뜨거운 비브라토 주법이 눈부신 빛을 발하는 걸작 녹음이다. 같은 11번 디스크에 커플링되어 있는 귈라 반도(1903-1989)의 헝가리 협주곡은 곡 자체가 접하기 대단히 힘든 진귀한 작품으로 1958년 이 바이올리니스트가 직접 초연을 맡았다는 사실이 더욱 호기심을 돋운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한 1964년 리메이크 버전(DG)이 유명하나, 본 박스에 수록되어 있는 콘스탄틴 실베스트리/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1957년 첫 번째 레코딩도 연주가 훌륭하다. 스테레오 사운드로 녹음되어 있어 음질도 들을만하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은 볼프강 자발리쉬/프랑스 국립 방송관현악단과 협연한 1965년 실황(Doremi), 알렉산더 브로트/캐나다 방송관현악단과 협연한 1963년 영상물(VAI) 이전에 만든 1957년 스튜디오 레코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역시 콘스탄틴 실베스트리/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것으로 풍요로운 로맨티시즘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가연이다. 발터 쥐스킨트/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랄로 스페인 교향곡 1958년 레코딩도 매혹적이기는 매한가지다. 맬컴 서전트/로열 필하모닉과 협연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앙드레 반데르노트/파리 음악원 관현악단과 협연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4번, 5번도 연주가 엘레건트하며,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WV.1043과 브람스 이중 협주곡은 각각 파트너가 예후디 메뉴인과 폴 토르틀리에라 눈길을 끈다. 연주가 빼어남은 물론이다. 마지막 디스크에는 쇼송 피아노, 바이올린과 현악4중주를 위한 협주곡 D장조와 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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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9-20 10:58
















    클래식 애호가를 사로잡은 EMI 시절 크리스티앙 페라스 예술의 기록! I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앙 페라스의 EMI 레코딩 선집

    Christian Ferras - The Art of Violin (13CD)

    오랜 세월 동안 잠들어 있다 마침내 부활한 전설의 명반 '에네스쿠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과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 그리고 프랑크, 포레, 드뷔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비롯하여,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음 감각과 차가운 동시에 뜨거운 비브라토 주법이 눈부신 빛을 발하는 걸작 녹음" 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멘델스존, 브루흐, 랄로, 바흐, 베토벤, 브람스 등 바이올린을 위한 위대한 협주곡에 이르기까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앙 페라스 예술의 진수를 담고 있는 EMI의 위대한 레코딩 선집!

    바이올린의 이카로스, 그 아름다운 도약의 궤적

    찬란하도다. 조반니 바티스타 비오티(1775-1824)를 태두로 하는 프랑스 바이올린 악파는 19세기, 무수한 활의 명인들을 배출하였다. 파리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바이올린 메소드를 공동 저술한 비오티의 제자들이 각기 일가를 형성하였다. 피에르 바이요(1771-1842)는 프랑스와 아브넥(1781-1849), 장 달팡 알라르(1815-1888)와 위베르 레오나르(1819-1890), 마르탱 마르시크(1848-1924)로, 로돌포 크로이처(1766-1838)는 랑베르 마사르(1811-1892)로 연계되었다. 한편, 벨기에 음악원에서는 샤를 오그스트 드 베리오(1802-1870)를 사사(師事)한 앙리 비외탕(1820-1881)과 에밀 소레(1852-1920), 외젠 이자이(1858-1931)로 이어지는 또 다른 분파가 둥지를 틀었다. 20세기 들어 이른바 프랑스 벨기에 바이올린 악파라 일컬어지는 이 문파 중 유독 비극적인 삶을 산 아티스트가 크리스티앙 페라스(Christian Ferras)이다.

    음악 신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크리스티앙 페라스는 1933년 6월 17일,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해변 휴양도시 르 투케에서 태어났다. 손바닥에 심한 상처를 입어 연주를 그만둔 전직 바이올리니스트인 호텔리어 아버지 로베르로부터 일곱 번째 생일날 작은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선물 받으며 그의 인생은 이른 나이에 결정되었다. 페라스는 매일 세 시간씩 초보 연습을 하였다. 1941년 니스 음악원에 입학, 정식으로 바이올린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스승은 벨기에의 명바이올리니스트 세자르 톰슨의 직계 제자 샤를르 비스테시였다. 금새 연주가 능숙해진 페라스는 1944년 5월, 니스시의 공직원 앞에서 생상스 바이올린 협주곡 3번과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을 연주하여 만장일치로 1등을 차지하였다. 1944년 8월에는 해방된 파리로 이사하여 파리 음악원으로 전학하였다. 르네 베네디티와 칼베 사중주단의 리더 조세프 칼베 아래에서 바이올린과 실내악을 수학하였다. 성장 속도가 빨라 1946년 양 부문에서 수석 졸업을 하였다.

    음악원을 나오자마자 페라스는 13세 나이에 프로 연주가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1946년 10월 알베르 볼프가 지휘하는 파들루 관현악단과 랄로 스페인 교향곡과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일주일 간격으로 협연하며 파리 데뷔하였다. 랄로 콘서트를 들은 저명한 음악 평론가 베르나르 가보티는 르 피가로지에 그를 격찬하는 장문의 리뷰를 썼다. '테크닉, 시정(詩情), 정열,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이 소년 바이올리니스트는 벌써 스페인 반도를 알고 있는 것인가!' 교육도 계속 받았다. 1947년 파리에 체류 중인 루마니아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제오르제 에네스쿠와 알게 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1948년 5월 슈베닝겐 콩쿠르에서 우승하였고, 1949년에는 롱 티보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에 입상하였다. 상보다 더 중요한 일은 평생 파트너인 프랑스 피아니스트 피에르 바르비제(1922-1990)와 만난 것이다. 콩쿠르에 출전한 바르비제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듣고 페라스는 아버지에게 졸랐다. "저 사람과 연주하고 싶어요." 바르비제는 11살 연하 소년의 요청에 응하였다.

    눈부신 영광과 알코올 중독, 재기의 몸부림

    페라스와 바르비제의 첫 번째 공연은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아미앵 음악원 강당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가지기로 약속 잡았으나,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페라스가 나타나지 않자 바르비제는 그냥 혼자서 독주회를 준비하였다. 페라스 가족이 새벽 기차를 놓쳐서였다. 15분 지각하여 분장실로 허겁지겁 들이닥친 페라스는 코트를 벗어 던지고 연습 없이 바르비제와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K.526 등 오리지널 프로그램을 즉석에서 멋들어지게 공연하였다. 이후 둘은 완벽한 호흡으로 40곡 가량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암보로 연주해내는 명콤비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바르비제는 페라스의 유일한 벗이 되어주었다. 함께 고전 문학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극장과 박물관을 관람하였으며, 해수욕장에서 축구를 즐겼다. 솔리스트로서도 페라스는 승승장구하였다. 1951년 11월 카를 뵘의 초청으로 티타니아 팔라스트 극장에서 베를린 필하모닉과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독일에도 얼굴을 알렸다. 1956년 2월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처음 조우, 빈에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였다. 페라스의 재능에 매료된 거장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은 다른 연주자들을 압도합니다."

    같은 해 에르네스트 앙세르메가 이끄는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과도 공연하였다. 음반사와 계약해서 다양한 레코드를 속속 내놓았다. 1959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샤를르 뮌시의 지휘 아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렀다. 1960년 5월,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페라스-바르비제 듀오 결성 10주년을 자축하는 리사이틀을 열었고, 그 해 여름에는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주관하는 프라드 음악제에 등장하였다. 음악제에서 그는 프렌치 바이올린 스쿨을 대표하는 뛰어난 아티스트라는 호평을 들었다. 이듬해 재초청을 받았다. 청년 바이올리니스트 페라스의 행보는 한창 물이 올랐다. 1963년 9월 그리스 아테네 음악제에서 카라얀과 콘서트를 가진 뒤 이 거물 지휘자와 일련의 협주곡 레코딩 작업을 하였다. 세계 각지의 명사들이 그에게 쉼 없는 러브 콜을 보냈다. 1967년 덴마크 국왕의 결혼식에 초대되어 축하 연주를 하였다. 1968년에는 샤를르 뮌쉬와 그가 창설한 파리 관현악단과 미국 투어를 다녀왔다. 노지휘자의 급서로 여행을 완수하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페라스는 올림포스 정상을 넘어 태양을 향해 늠름히 비상하는 이카로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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