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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üß Gott~♥ Ciao~♥ 전악장 감상 고전음악 방송입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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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veritas0359)

  • 23
    숲빛 (@veritas0359)
    2021-09-01 14:34










    차이코프스키

    Tchaikovsky - Concert Fantasia in G, Op.56

    이곡은 차이코프스키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나 그후 연주가들의 레퍼토리에서 사라져 갔고 어느덧 세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당시 20대의 나이로 전 유럽을 열광의 물결에 빠지게 했던 20대의 글래스고우 출신의 젊은 음악가인 오이겐 달베르(Eugen d'Albert)의 연주에 감흥을 받아 작곡한 곡이다. 달베르는 이후 독일로 移住, 연주가에서 작곡가로 전향하여 2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몇 개의 성공적인 오페라 작품들을 썼다. 당시 리스트는 달베르를 타우지히의 뒤를 잇는 대가로 여긴 반면, 차이코프스키는 루빈슈타인형제들의 계승자로 달베르를 평가했다.

    원래 차이코프스키는 일반적인 협주곡을 쓸 생각이었으나, 느린 악장을 피날레에 도입해보자는 악상이 떠올라 2개악장의 구조를 갖게 되었다. 환상곡(Fantasia)이라는 제목도 차이코프스키가 자유로운 악상을 가지고 음악적 실험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 주제는 통상 도입부에 제시되는 소나타형식의 주선율의 비중을 줄이는 대신 차이코프스키 곡의 피날레에서 상당부분 나타나는 경쾌하고 재기넘치는 러시아풍(a la russe)의 무곡으로 처리했다. 두 번째 주제는 서정적 대비를 이루도록 구성되어 있으나 발전부에 와서는 거대한 피아노 카덴차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피아노 독주 연주자에게 거대한 교향악적 변수를 온전히 맡기게 된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처음은 아니다. 발전부의 핵심적인 패시지들을 오로지 솔로 연주자에게 맡긴 사례는 많이 있었으나 이곡에서만큼 극단적인 사례는 없었다. 이곡을 감상하다가 오케스트라가 있었나 망각할 때 즈음이면 이미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악장이 다시 시작된다.

    2악장은 작심한듯 더욱 기묘하다. 2악장은 유려한 이탈리아풍 주제(곤돌라의 노래)를 가지고 통상적인 느린 속도로 시작한다. 그러나 갑자기 배후에서 탬버린의 타격음과 함께 빠른 춤곡이 끼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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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21-08-29 08:30












    요한 빌헬름 빌름스

    요한 빌헬름 빌름스(Johann Wilhelm Wilms, 1772~1847)는 독일계 네덜란드 작곡가로 1815년 네덜란드 왕국의 건국이래 1932년까지 네덜란드國歌로 사용된 Wien Neerlands Bloed를 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빌름스는 독일 졸링언(Solingen)인근의 비츠헬던(Witzhelden)에서 출생했으며, 그 지역 학교교장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아버지와 맏형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플룻은 독학으로 배웠다. 1791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그곳 오케스트라 두곳에서 플룻 연주자로 활동하였으며, 모차르트의 플룻협주곡과 베토벤의 실내악 플룻곡의 네덜란드 초연에 솔로이스트로 무대에 섰던 기록도 있다. 빌름스는 네덜란드 왕립음악원(Koninklijk Nederlandsch Instituut voor Wetenschappen)에서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몇몇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직에 지원했던 적도 있다. 아울러 작곡 콩쿨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음악신문인 일반 음악 신보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게재용 곡을 쓰기도 했는데, 일반 음악신보는 본인처럼 그당시 네덜란드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자주 연주되지 못하는데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창구역할을 했다. 프랑스 혁명이 네덜란드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이벤트성 의미로, 몇개의 애국적인 讚歌를 작곡했으나 이내 나폴레옹내각은 실각하고 말았다. 네덜란드 공화국 창설로 새로운 네덜란드를 위한 國歌가 필요해짐에 따라 1816년 國歌응모 콩쿨이 개최되었다. 거기서 Wien Neerlandsch bloed라는 곡으로 우승한 빌름스는 네덜란드내의 주요 교회들과 여러 단체로부터 작곡 위촉을 받게 되었다. 빌름스는 23년간 암스테르담의 세례자교회에서 오르가니스트로서 활동하다가 삶을 마감했다.

    빌름스는 생전에 총7곡의 교향곡을 작곡했으나, 그 중 F장조 교향곡은 유실되었고 다른 작품들은 그의 사후 잊혀져 갔다. 에른스트 클루젠(Ernst Klusen)에 따르면 E 플랫장조 교향곡의 피날레는 모차르트 교향곡 39번(K.543)을 모델로 했고, 교향곡 6번 D단조로 켄트 보자르협회(Societe des Beaux-Arts Ghent)에서 주관한 콩쿨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교향곡 6번 D단조와 7번 C단조는 2003년 도이취 그라모폰 레이블로 레코딩 되었다.(콘체르토 쾰른의 연주) 지휘자인 콘체르토 쾰른의 지휘자인 베르너 에어하르트(Werner Ehrhardt)는 출판일자 오류로 인해 빌름스가 기록보다 더 오래 생존했고, 이 때문에 더 고풍스러운 스타일의 작품을 작곡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류가 밝혀지게 되자, 빌름스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섞인 열정이 생겨났고, 에어하르트는 빌름스의 교향곡들중 두곡(6,7번)을 레코딩하기로 했다.

    오늘날 빌름스는 작곡가로서보다는 행정가로서 기억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는 네덜란드의 가장 중요한 음악가 가운데 한사람이었으며, 네덜란드 왕립음악원의 음악 학부를 포함하여 Letteren en Schoone Kunsten in Amsterdam, the Maatschappij tot Bevordering der Toonkunst 등 다수의 위원회의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작곡 콩쿨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빌름스는 솔로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15곡을 작곡했으나, 이들 대부분은 출판되지 못한 채 남아있으며, 그의 사후에 무시되어 왔다. 많은 작품들이 회복 불가능하게 손실되었으나, 다만 그의 생전에 출판되었던 5곡의 작품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빌름스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 바로는 다양한 악기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이해와 당시 그의 작품들을 연주했던 암스테르담 음악가들의 능력이 긴밀하고도 통찰력있게 결합되어 나타났다. 그의 작품들의 대부분은 비인의 고전주의 음악가 스타일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나, 자신이 음악적인 성장을 이루었을 때는 이미 고전주의가 낭만주의에게 자리를 물려준 이후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드물지만 낭만주의적인 열정이 드러난 작품들도 보인다.

    빌름스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고 있을 무렵 모짜르트의 망령이 빌름스의 어깨너머로 오선지를 보고 있었는지 짤츠부르그 출신 천재 작곡가의 미소가 이곡에 반영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의 도입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1번 (K.467)을 연상시키는 행진곡 풍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다분히 팽창적이다. 이어지는 아다지오는 목관의 색채적인 매력을 비롯한 몇몇 탁월한 패시지들이 담겨있다. 피날레인 론도는 저음의 현악기들이 피치카토로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됨과 거의 동시에 독주연주가 끼어들며 연주하다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마지막 코다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피아노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교향곡 E플랫 장조(Op.14)는 비록 Op.9번 교향곡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 중 빌름스의 가장 초기 작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모차르트에게 받은 영향이 이 교향곡에서도 나타나 있으며, 지적인 감수성과 위트, 열정과 세련미 등이 잘 혼합되어 있어서 모차르트의 영향으로 인한 결정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유희와 유쾌함이 주저와 막힘없이 30여분간 관통하는 즐거운 곡이다.

    완숙기에 접어든 시기의 작품으로 역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이 배어있는 플롯협주곡 D장조(Op.24)는 피아노 협주곡에 비하여 스케일은 작지만, 완성도 높은 탁월한 작품이다. 기록에 의하면 빌름스는 밝고 유쾌하지만,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길지 않은 협주곡을 썼다고 한다. 이는 동시대 작곡가들의 바람이기도 했으며 빌름스는 이러한 바람에 부응한 것이다. 공허한 음악적 기록을 택하기보다는, 聽者의 정서와 감정에 적절히 부합할 수 있는 실체로써의 음악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 음반의 연주는 핵심이 흐트려지지 않은 정확하고 정교하며 명확하다. 스타일리쉬한 우아함을 자연스럽게 펼쳐보여주고 있다. 빌름스 내면에 존재했을 모차르트에 대한 존경심에 부합될만한 연주이며, 이결과 탑클래스의 연주가 탄생되었다. 미하엘 알렉산더 빌렌스(Michael Alexander Willens)를 위시한 연주자들은 이 작품의 연주에서 요구되는 따뜻함과 감각적인 프레이징, 그리고 기교적인 기민성으로 무장된 知性과 신선함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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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8-16 09:56








    하인리히 비버 ‘브뤼셀 미사곡’

    Heinrich Biber - Missa Bruxellensis

    비버의 브뤼셀 미사는 시대를 앞서간 선지자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총 23성부로 나누어진 이 곡은 악보를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난해해 실제 연주하기가 쉽지 않고 또 흔히 연주되지도 않으며 음반도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었는데, 2000년도에 비로소 훌륭한 연주가 실황녹음 되어 등장하였다. 거장 조르디 사발이 지휘하는 르 콩세르 데 나시옹(Le Concert des Nations, 1989)과 라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La Capella Reial De Catalunya, 1987)의 연주로 총 23성부가 생생하게 재현된 웅대한 녹음반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탁월한 음질로 연주된 이 음반은 1600년대 후반에 작곡된 이 음악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파격적인 관현악법을 사용하였으며, 얼마나 거대한 규모로 연주되었던가를 역설한다. 이 음악은 역시 비버의 잘츠부르크 미사(총 53부로 이루어진 이곡은 브뤼셀 미사보다 더 장대하다.)와 더불어 전기 바로크 음악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다.

    조르디 사발 Jordi Savall (1941년~ 스페인)

    사발의 원숙한 음악활동은 그가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1987)와 '르 콩세르 데 나시옹'(1989)을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라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는 이베리아 반도의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을 노래하던 여러 궁정의 합창단을 모델로 삼아 조직한 성악 및 기악연주단체로, 중세로부터 후기 바로크 시대까지의 곡들을 연주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또 르 콩세르 데 나시옹은 라 카펠라 레이알 데 카탈루냐의 단원들을 중심으로 그 멤버를 확대하여 1989년에 사발이 창립한 원전악기를 위한 오케스트라인데, 주로 바로크에서 초기 낭만주의에 이르는 오케스트라나 심포닉한 레퍼토리를 연주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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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8-15 13:22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제2번

    Rachmaninov - Piano Sonata No.2 in B flat minor, Op.36

    1913년 11월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작곡가 자신의 연주로 초연. 1940년 호로비츠가 작곡가의 동의를 얻어 약 22분 길이의 연주시간으로 재편곡

    모든 장르에서 뛰어나고자 노력했던 라흐마니노프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피아노 음악이다. 근본적으로 그의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예를 들어 피아노 협주곡은 라흐마니노프가 가장 몰두했던 장르인 반면, 실내악이나 오페라에는 거의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했던 장르인 교향곡과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와 가곡에서도 그 안에는 성공작과 실패작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작곡기법과 내용에 있어서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양하고 과감한 시도를 꾸준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피아노 소나타 장르에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쏟아부으며 정성을 들였다. 커다란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코렐리나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들과는 달리, 유독 두 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순탄치 않은 운명을 갖고 태어났다. 우선 파우스트 전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표현한 [소나타 1번 Op.28]은 너무나 길고 내용이 난해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알려지는데 실패했다. 아직까지도 이 작품은 명쾌하고도 뛰어난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뒤이은 [소나타 2번]은 표면적으로 성공을 거둔 듯 했지만 그 음악적, 구조적인 측면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했던 만큼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한 후대 연주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머리 아픈 고민을 계속 해야만 했다.

    1909년 라흐마니노프는 처음으로 미국으로 연주회 여행을 떠나 이듬해에 되돌아왔고, 이 무렵 이바노프카에 있는 아름다운 별장을 소유하면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작곡가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특히 1909년부터 1917년 사이는 그가 조국 러시아에서 보낸 마지막 시기로서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친 시기였다. [피아노 협주곡 3번](1909년)을 비롯하여 [전주곡 Op.32]와 [회화적 연습곡 Op.32와 39], [합창 교향곡 ‘종’]과 [피아노 소나타 2번]이 바로 이 시기의 대표작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1913년에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로마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에드가 앨런 포우의 詩에서 영감을 받아 ‘종’을 작곡하기 시작했고 이바노프카에 돌아온 뒤 작품을 완성, 그해 겨울 모스크바에서 초연을 가졌다.

    이와 같은 시기 그는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그 해 11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작곡가 자신이 직접 초연을 했다. 이 작품은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의 동창인 피아니스트이자 로스토프 아카데미의 원장인 마트베이 프레스만(Matvey Presman)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장황하다는 평을 들었던 라흐마니노프는 1931년 여름 이 소나타를 대대적으로 개작하게 되었다. 중복되는 음과 복잡한 성부를 생략하여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120여마디에 이르는 부분들을 삭제했고 일부 화성을 변화시켜 선율이 더욱 뚜렷해졌으며, 특히 악장들의 발전부에서 많은 패시지의 텍스추어를 새롭게 다듬은 한편 부분 부분을 새롭게 작곡했다.

    라흐마니노프가 음악학자인 알프레드 스완(Alfred Swan)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담겨 있다.

    “제 초기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과잉된 부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2번 소나타에서도 너무 많은 성부가 동시에 열려 나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길이가 너무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Op.35는 19분 남짓 하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베토벤과 슈만, 리스트와 쇼팽의 뒤를 잇는 대작 소나타를 염원했던 라흐마니노프는 총 25분이 넘는 연주시간을 필요로 하는 오리지널 버전을 대폭적으로 줄여 20분에 채 미치지 않는 정도의 시간으로 줄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정판 또한 음악의 윤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오리지널 버전의 중요한 부분을 너무 많이 삭제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전조부도 어색하며 양식적인 측면 또한 지나치게 절제했다는 평가 또한 그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레퍼토리에서 아예 이 작품을 삭제해 버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이에 대한 돌파구는 자신이 아닌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정신적, 예술적 후계자로 생각했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에 의해 만들어졌다. 1940년 작곡가의 동의를 얻은 호로비츠는 이 두 종류의 버전의 장점을 한데 섞은 버전을 만든 것이다. 그가 평생토록 즐겨 연주했던 약 22분 정도의 길이의 이 혼합버전은 작곡가의 두 가지 버전에 대한 훌륭한 대안으로서, 현재에는 소수의 피아니스트들이 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연주가의 관점에 따라 각자 조금씩 변형된 버전을 사용하기도 한다.

    1악장 Allegro agitato

    [피아노 소나타 2번 B플랫 단조 Op.36]의 오리지널 버전은 연주자에게 과도할 정도의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하는 만큼 비르투오소용 피아노 작품으로서의 자기과시적인 패시지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1악장 Allegro agitato는 B플랫 단조의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대범한 하강 분산화음부터 이러한 느낌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이 하강 주제는 뒤이어 장조로 변형되며 악장 곳곳에서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순환구조 형식을 갖고 있는 이 1악장은 낭만주의 시대에 발전된 중요한 기법을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스타일로 흡수한 것이다. 특히 개성적인 붓점 리듬의 변형된 사용이라든지 양손의 교묘한 엇박 진행에서 그만의 개성을 찾아볼 수 있는데, 짧은 카덴차 뒤에 제시되는 시칠리아노 풍의 부드러운 D플랫 장조에서 다양한 붓점으로 합성된 리듬이 특히 인상적이다. 발전부는 라흐마니노프가 개정판을 내면서 쟁점으로 삼았던 부분이다. 오리지널 버전은 보다 강한 비르투오시티를 요구하는 한편 하강 주제와 주요 조성으로의 명확한 회귀가 담겨 있는데, 1931년 개정판은 이를 대부분 삭제하며 간결하게 만들었지만 핑거링과 도약, 양손의 교차에 있어서 이전보다 더 어려운 테크닉을 담아내며 G플랫 장조의 두 번째 주제를 재현한다. 마무리 코다(coda)는 다음 악장과의 연결을 위해 조용한 어조로 끝을 맺는다.

    2악장 Non allegro - Lento

    2악장 Non allegro – Lento는 서주를 갖고 있는 ‘A-B-A’의 3부 형식이다. 특히 부드러운 하강 음향의 선율이 2악장의 서주를 장식하는데 D장조에서 E단조 렌토(lento)로 변화하는 모습은 대단히 몽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낭만적인 G장조를 거친 뒤 다시 E단조의 주제로 돌아오며 이 악장은 클라이맥스를 갖게 된다. 첫 악장에 등장하는 첫 하강 멜로디 주제나 부드러운 두 번째 D장조 주제를 연상케 한다는 점에 있어서 이 두 번째 악장은 1악장에 대한 회고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마지막은 다시 첫 번째 Non Allegro로 돌아가며 끝을 맺는다.

    3악장 Allegro molto

    2악장과 서주가 조성만 B플랫 장조로 바뀐 채 그대로 사용된 짧은 서주 뒤에 스펙타클하고 웅장하기 그지없는 3악장 Allegro molto가 시작된다. 개선 행진곡을 연상시키는 1주제가 악장 전체를 걸쳐 전조를 통해 수차례 등장하는데, 이 악장 또한 1931년 버전에서는 많은 부분이 삭제되고 몇몇 패시지들은 완전히 수정되었다. 지극히 낭만적인 리리시즘(lyricism)을 담고 있는 두 번째 주제는 첫 주제와 함께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고. 피아니스트의 강한 에너지와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마지막 재현부에 이어 압도적인 승리감에 도취된 B플랫 장조의 화성으로 끝을 맺는다.



    [음반] 블라지미르 호로비츠 런던 실황, 호로비츠 버전(RCA)
    [음반] 졸탄 코치슈, 오리지널 버전 (Philips)
    [음반] 데니스 마추예프, 개정판 버전 (RCA)
    [음반] 엘렌 그리모, 그리모 버전 (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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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8-10 13:40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

    Richard Strauss - Metamorphosen for 23 solo strings

    1946년 1월 25일 취리히에서 파울 자허의 지휘로 초연.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을 바라보는 작곡가의 참담한 마음이 아름다운 현악언어로 표현된 명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1945년 3월 13일부터 4월 12일에 걸쳐서 작곡, 1946년 1월 25일 취리히에서 파울 자허의 지휘로 초연된 [메타모르포젠]. 23인의 현악기 독주자를 위한 습작(바이올린 10, 비올라 5, 첼로 5, 더블베이스 3)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이 작품은 네 개의 마지막 노래와 오보에 협주곡 D장조, 클라리넷과 바순을 위한 협주곡과 더불어 80이 넘은 老大家가 남긴 마지막 걸작군 가운데 하나다. 처참하게 파괴된 자신의 고향과 전쟁에 대한 비참한 마음을 느린 템포의 악상으로 담아낸 이 작품을 보면 그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인 [카프리치오] 이후에도 작곡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은 전혀 노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주의 깊게 들어본다면 폐허가 된 독일을 바라보는 작곡가의 그 형언할 수 없이 쓸쓸하고 참담한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현악 언어로 표현되어 강렬한 설득력과 탐미주의적인 아이러니를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 작품을 작곡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1943년 연합군이 감행한 대공습 때문이다. 뮌헨 오페라 극장을 시작으로 드레스덴 젬퍼오퍼가 무너지고 베를린의 린덴 오페라 등등이 차례로 화마에 휩싸였는데, 특히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 사이 3600여 대의 폭격기와 1300여 대의 대형 폭격기들이 몇 만 톤 이상의 폭탄을 쏟아부어 古都 드레스덴을 순식간에 날려버려 폼페이 최후의 날로 만들어버린 것이 작곡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나의 아름다운 드레스덴-바이마르-뮌헨, 모두가 끝났다”며 자신의 추억과 꿈이 서려있는 도시들이 파괴되는 현실에 몹시도 괴로워했다. 이 공습으로 인해 작곡가는 자신의 과거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로브 음악 사전에는 이 작품에 대해 “슈트라우스 자신이 반세기 동안 이끌어 온 독일 음악문화에 대한 비가(悲歌)‘라고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살로메]와 [엘락트라] 같이 그리스 고전을 통한 에너지와 다이내믹의 강력한 포효를 시작으로 [장미의 기사]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이후 드라마와 음악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통한 새로운 극-오페라의 탄생을 이끌어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천성적으로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이며 호기심 많은, 그리고 복잡함을 넘어선 화려함과 단순함을 넘어선 순수함을 동시에 갖고 있던 작곡가이다. 이렇듯 모차르트 이후 최고의 천재로 일컬어진 그에게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1차 대전도 겪은 그였지만 당시에는 참호전과 국지전을 중심으로 전쟁이 벌어진 반면 이렇게 도시 전체와 시민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참혹하고 무자비한 경우는 없었기에 그 슬픔의 강도는 더욱 컸다.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이라는 단어는 괴테의 詩 ‘동물의 정화, 식물의 정화’에서 인용한 것으로서 탈바꿈, 변형, 변모(變貌), 변성(變性)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작곡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드레스덴을 상징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로 추측할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전쟁 교향곡들이나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와 같은 전쟁 음악들이 표현주의적인 방식으로 직접적인 반영을 그려냈다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은 보다 개인적인 은밀함과 은유적인 간접성이 두드러지며 다른 전쟁 음악들과 대조를 이룬다. 전쟁을 연상시키는 통렬한 심경이나 묘사가 없는 약간은 신비로운 측면을 담고 있어 리얼한 전쟁 음악으로서의 강도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을 겪는 한 개인의 내적인 강렬함을 가장 정제된 형태와 압축된 언어로 담아낸 얼음 속의 불꽃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메타모르포젠]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자신의 도시가 폐허로 변한 변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폐허 위에 미래를 위한 일말의 희망을 심고자 하는 새로운 변형을 염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음악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의 2악장 장송 행진곡으로부터 인용한 첼로와 더블 베이스의 몇몇 마디들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한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등장하는 셋잇단음 리듬이 빈번히 사용된다. 이와 동시에 말러의 교향곡 느린 악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심원하고도 낭만적인 성격과도 닮아 있고 그 특유의 자유로운 폴리포니적 성격(23개의 악기가 모두 독립된 라인을 갖고 있는)과 자유로운 변주양식을 연상시킨다. 비통하면서도 명상적인 주제에 가해지는 색다르고 끊임없는 유기적 변형을 담고 있는 이 음악은 정신적으로는 ‘트리스탄’적이지만 마음으로는 절친한 친구였던 ‘말러’를 회상하며 결국은 ‘베토벤’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귀결시키는 듯하다.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제목과 상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전쟁의 상흔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인 치유를 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 초감각적인 ‘멜로디적인 폴리포니’를 통해 현악 테크닉에 있어서 가장 발전된 승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작곡가의 현대적인 기악어법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로부터 아무도 알아챌 수 없는 사이에 벨벳과도 같은 부드럽고 찬연한 사운드로 정화시켜나가고, 신중하게 선택된 음조를 통해 현혹적이고 ‘아리아드네’적인 화성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창조력만이 해낼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이 죽은 다음 일종의 ‘유품’으로 발표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실행되지는 못했고 그 자리는 이후에 작곡한 네 개의 마지막 노래가 대신하게 되었다.

    추천음반

    1. 베를린 필하모닉/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DG)
    2. 비인 필하모닉/ 앙드레 프레빈 (Philips)
    3.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쥬제페 시노폴리 (DG)
    4.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루돌프 켐페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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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21-08-03 11:06








    클래식음반의 녹음을 새벽에 하는 이유

    연주자들이 잠도 못자고 새벽에 녹음하는 이유는 단순히 조용한 분위기에서 적막함을 담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따로 물리적인 이유가 있다.

    전기가 가장 깨끗할 때라 그렇다. 현대의 어느 국가이든 전압은 대부분 안정적이다. 그렇긴 해도 전원이 여러 곳을 경유한 후에 건물에 유입되기 때문에 전압, 즉 교류의 파형이 오염되기 마련이다. 전원을 파형으로 찍어보면 정반원으로 위상(位相)이 바뀌어야 하는데 이것이 찌그러지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녹음을 하면 음의 순도가 떨어진다.

    반대로 아무리 녹음이 뛰어난 음반도 AC 노이즈가 유입이 될 때 재생을 하면 음이 혼탁해진다. 그러나 새벽에는 전기를 거의 쓰질 않기 때문에 AC 노이즈 유입이 되질 않는다. 클래식 레코딩을 일부러 새벽시간을 골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본 어느 레이블의 레코드사 중 음질이 아주 뛰어나기로 유명한 곳이 있었다. 많은 엔지니어들이 나름대로 추측을 내놓았지만 레코드사는 끝내 그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노하우는 아주 간단했다.

    "우리는 모두 잠든 새벽에 녹음을 합니다. 왜냐고요? 그때가 전기가 가장 깨끗할 때이니까요."

    조르디 사발 같은 古음악 전문악단의 녹음은 더욱 깨끗한 전기가 필수이다. 고음악 악기가 현대 악기보다 배음(倍音)이 더 섬세하고 여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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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21-07-31 11:25












    게오르기 카트와르
    Georgy Catoire (1861~1926)

    카트와르는 프랑스 혈통을 가진 러시아 작곡가이다.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14세 무렵 리스트의 제자이자 바그너의 친구였으며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이기도 했던 칼 클린트보르트(Karl Klindworth)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바그너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작곡가로는 드물게 親바그너적인 경향을 갖는 작곡가의 한사람으로 1879년 바그너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바그너에 대한 한결같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오늘날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림스키-코르사코프협회 소속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바그너를 강력하게 혐오했다는데 기인한 것으로 러시아 대중과 음악가들에게 바그너의 음악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그의 서클에 속한 일련의 작곡가들은 바그너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던 카트와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카트와르는 처음부터 음악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그는 1884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졸업후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 당시 그를 가르쳤던 클린트보르트는 베를린으로 떠난 상황이어서, 그의 제자였던 빌보르크(V.I. Willborg)에게 기초적인 화성과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이 시기에 카트와르는 피아노 소나타와 성격적 소품 등을 포함한 몇곡의 피아노 작품들을 작곡했으며, 리스트 등의 작품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향악 작품들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관현악 모음곡 1번 작품 43의 첫 악장을 편곡했는데, 이 편곡 작품은 차이코프스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카트와르가 편곡한 작품에 더해 세밀하게 보필했다 한다. 계획적이고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아보는것이 어떻겠냐는 차이코프스키의 권유를 받아 들인 것은 바로 이 무렵으로 당시 카트와르의 나이는 24살이었으나 작곡가가 되기에 그의 능력과 열정은 모자람이 없었다.

    빌보르크의 레슨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1885년 후반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다시 클린트보르트에게 레슨을 받았다. 1886년 잠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차이코프스키와 교분을 쌓았는데, 이때 그의 피아노 변주곡 세트를 본 차이코프스키는 카트와르에게 “작곡에 대한 재능을 썩히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고 하며 크게 만족해 했다 한다. 모스크바 방문동안 카트와르는 차이코프스키로부터 출판업자인 유르겐손(Jurgenson)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카트와르는 1886년 한해동안 줄곧 클린트보르트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음과 동시에 오토 티르쉬(Otto Tirsch)에게 작곡과 음악 이론을 배웠다. 그러나 티르쉬의 교습방식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필립 루처(Philip Rufer)에게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교습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레슨의 산물로 한곡의 현악 사중주가 탄생했다.

    카트와르는 스승인 클린트보르트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의 데뷔를 거절하고 1887년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모스크바에서 차이코프스키를 다시 만난 카트와르는 구베르트(Gubert)와 타네예프(Sergei Taneyev)가 배석한 자리에서 자신이 베를린에서 루퍼를 위해 쓴 현악 사중주를 선보였다. 배석자들은 카트와르의 작품이 음악적인 흥미는 있으나 텍스츄어가 빈약하다고 지적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추천을 받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로 간 카트와르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과 음악이론에 대한 교습을 받았다. 차이코프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쓴 편지에서 "재능은 많으나...진지한 교육이 요구된다"고 썼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카트와르를 리아도프에게 보내기 전에 한번의 레슨을 해주었는데, 이 레슨의 결과로 태어난 3곡의 작품이 훗날 3개의 피아노를 위한 소품, 작품 2로 출판되었다. 그후 카트와르는 리아도프에게 대위법을 배웠으며, 기상곡 작품 3을 비롯한 몇몇 작품을 작곡하였다. 리아도프로부터의 레슨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교습은 종결되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 시기동안 2번째 사중주와 칸타타 루살카(Rusalka", 독창, 여성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타 작품 5)를 작곡하였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과 가족 및 동료들은 작곡 이력을 쌓은 과정을 탐탁치 않아 했다. 카트와르는 결국 1899년에 일련의 실망스러운 작품을 뒤로 한 채 시골에 칩거하였으며 작곡을 거의 그만두게 되었다. 칩거 2년 후쯤에는 그의 음악 친구들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은둔의 결과로 작품 7번 교향곡이 작곡되었다.

    1919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되었으며, 재임기간동안 이론과 작곡에 관한 몇개의 논문을 썼다. 미야스코프스키(Nikolai Myaskovsky)는 카트와르가 가르친 가장 뛰어난 학생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그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이 연주한 피아노 작품들과 알렉산더 골덴바이저(Alexander Goldenweiser)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David Oistrakh)의 연주로 레코딩된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 등 몇몇 음반이 발매된 바 있다. 그의 음악은 분명 초기 스크리아빈의 작품과 포레, 차이코프스키의 것과 유사하다. 그의 작품은 상당한 수준의 비르투오시티와 아울러 악기의 색채감에 대한 변별력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카트와르는 작가이자 음악가이기도 하였던 장 카트와르의 삼촌이기도 하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悲歌,작품 26)는 1916년에 출판된 것으로 카트와르의 제자였던 미야스코프스키의 표현처럼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견실한 작품으로 카투아르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 매우 커다란 아취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5분여 밖에 안되는 작은 외형의 이 작품 안에는 음악적 아이디어와 분위기, 어법 등 카투아르의 음악세계의 모든 것이 반영되어 있다.

    음반의 첫 곡으로 수록된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작품 15)은 1898-1902년 사이에 작곡된 것으로 그의 창작 1기에 해당하는 다수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작품일 뿐 아니라 이 시기의 가장 후반부 무렵에 작곡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장대한 첫 악장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적 작품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2악장인 뱃노래는 우수적 분위기와 뒤섞인 매우 세밀한 장식법과 부드러운 서정성의 전형이다. 여기에 더해진 詩的인 사운드는 온전히 카트와르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반짝이는 수채화 그림물감의 촉촉함으로 가득찬 분위기 좋은 그림과 그 속에 부유(浮遊)하는 밝게 굽이치는 물결에 대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詩曲(작품 20) 두 번째 소나타는 카트와르의 실내악 작품중 가장 중요한 곡이며,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1906년에 작곡된 것으로 그의 작품 2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작곡되었는데, 심각한 병으로 인해 1902년부터 1904년 말까지 잠정 중단되었던 창작활동이 병세의 회복으로 재개된 이후 작곡된 것이다. 병으로 인해 1904년 티롤에 머물르다 창작을 위해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이후 정력적인 작곡활동이 재개되었다.이 작품은 알렉산터 골덴바이저에게 헌정되었다. 두곡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엘레지(작품 26)는 악보 草稿의 형태로 남아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본음반의 맨 마지막 트랙에 수록된 로망스는 본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었으나 본 음반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편곡 버젼이 수록되었다. 이 작품은 그가 작곡한 다른 여타의 작품들에서는 거의 시도된 바 없는 것으로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처음으로 차이코프스키를 만났을 때 차이코프스키 앞에서 연주했던 자신의 첫번째 작품으로 훗날 작품번호 1이 되었다. 또한 이작품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작품이며,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詩에 붙여진 작품으로 1883년에 출판되었으며 작곡가의 부인이었던 소피아에게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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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21-07-29 14:06








    몽테뉴(Montaigne)의 수상록(Essais) 중..

    사람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그릇된 사상을 품게 되는 주요한 요인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데서 온다고 본다.

    ‘고전’을 읽는 묘미는 그 안에서 훌륭함을 찾아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옛 사람의 생각을 엿보고 시차를 뛰어넘어 공감하는 데 있다.

    나는 아무 장식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놓는다. 나는 사람의 비위를 맞출 줄도, 즐겁게 해줄 줄도, 아첨할 줄도 모른다. 내게는 진심을 담아 말하는 재간 밖에 없다.

    솔직히 나는 젊을 적엔 남에게 자랑하려고 공부했다. 그 뒤에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했다. 지금은 재미로 공부한다. 무슨 소득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은 참으로 귀중한 것이다. 이것은 실로, 사람들이 그 추구를 위하여 시간뿐 아니라 땀이나 노력이나 재능까지도, 아니 생명까지도 소비할 값어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니 건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건강을 위해 주의해야 한다. 건강을 위해 충분한 시간을 배려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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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21-07-28 11:32












    드뷔시 피아노 3중주 G장조

    Claude Debussy - Piano Trio in G major

    피아노3중주 G장조는 드뷔시가 18세때인 1880년도에 작곡한 곡으로 이탈리아에서 폰 메크부인의 피아노선생으로 머물렀던 당시에 쓴 곡이다. 이 작품에는 드뷔시가 존경했던 여러 작곡가들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당시 유명한 가곡/오페라 작곡가였던 쥘 마스네(Jules Massenet)의 영향이 잘 드러나고 있고, 슈만의 피아노소나타 g단조, 프랑크의 피아노5중주 f단조 등의 영향도 엿볼수 있다. 총 4악장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제1악장 안단티노 콘 모토는 소나타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느린 서주가 붙은 변주곡형태의 경향을 보이면서 전통적 모델에서 벗어난다. 이후 2악장의 스케르토, 느린 리트형식의 3악장, 론도형식의 제4악장은 전통적 형식미를 따랐지만, 색채감 풍부하고 변화가 많은 和聲을 사용하고 있으며 다양한 전조가 나타나는 특징을 보인다. 이 작품은 드뷔시의 초기양식의 원숙함을 입증하는 작품으로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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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21-07-28 11:27








    접물잠(接物箴) 이식(李植)

    君子律身(군자율신) : 군자가 자기 몸을 단속할 적엔
    如處女然(여처녀연) : 처녀처럼 행동을 해야 할지니
    與惡人言(여악인언) : 좋지 않은 사람과 말을 할 적엔
    當若浼焉(당약매언) : 자기 몸이 더럽혀질 듯 여겨야만 한다
    矧於擇交(신어택교) : 더군다나 친구를 가림에 있어서랴
    惟善是與(유선시여) : 오직 선인(善人)과 함께여야 할 것이니
    宜詳宜愼(의상의신) : 자세히 살피고 신중하게 판단해서
    或取或拒(혹취혹거) : 취하거나 버리거나 결정해야 한다
    人之無友(인지무우) : 친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도
    執之如友(집지여우) : 진정한 친구처럼 어울려 노닐면서
    以色以聲(이색이성) : 안색과 목소리를 일부러 맞춰 가며
    言笑怡怡(언소이이) : 희희낙락거리며 떠들고 웃노라면
    麤心浮氣(추심부기) : 거친 마음 뜬 기운이 어느새 돋아나서
    是長是滋(시장시자) : 날로 자라나 걷잡을 수 없으리니
    寒多曝少(한다폭소) : 추운 날은 많고 따스한 날은 적게 되어
    存者甚危(존자심위) : 지켜야 할 내 마음이 위태롭게 된다
    鮑魚之肆(포어지사) : 건어물 가게 속에 들어가거나
    塗炭之地(도탄지지) : 숯더미나 흙탕 위에 앉아 있어도
    不緇不磷(불치불린) : 더러워지지 않고 얇아지지도 않는 것은
    非吾人事(비오인사) : 나와 같은 사람의 일이 아니니
    如沙染泥(여사염니) : 마치 흰 모래가 진흙 속에서 검어지고
    如衣受膩(여의수니) : 마치 옷에 기름때가 묻는 것처럼
    一切放倒(일절방도) : 내 모습이 완전히 바뀐 가운데
    共就汚下(공취오하) : 더럽게 휩쓸려서 내려가리라
    不知不覺(불지불각) :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그 사이에
    與之俱化(여지구화) : 어느덧 그와 함께 똑같이 변하리라
    盍愼厥與(합신궐여) : 어찌 사귀는 일을 신중히 하지 않겠는가
    戒自今日(계자금일) : 오늘부터라도 부디 경계하라
    言而不語(언이불어) : 말을 하더라도 깊은 말은 하지 말며
    近而勿接(근이물접) : 가까이 있더라도 친하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
    若逢惡臭(약봉악취) : 고약한 냄새 만나면 피해 가듯이
    似防勁敵(사방경적) : 성을 쌓아 사나운 적을 막아 내듯이
    用檢言動(용검언동) : 나의 말과 행동을 제대로 단속하면
    庶免墮落(서면타락) : 타락하는 일을 그런대로 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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