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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veritas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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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5-28 12:11






    구노 오페라 생크 마르(Cinq-Mars)

    샤를 구노의 4막 오페라. 권력에 저항하는 젊은 귀족의 짧은 생애를 그린 작품

    아베 마리아로 유명한 샤를 구노(Charles Gounod: 1818-1893)는 오페라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파우스트',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불후의 걸작들을 남겼다. 구노의 오페라 중에는 '생크 마르스'라는 것도 있다. 4막의 그랜드 오페라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별로 공연되지 않고 있는 오페라이다. 아마 정치적인 내용 때문에 보이지 않는 제재를 받아왔던 것 같다. 오페라 '생크 마르스'의 내용은 생 마르라는 귀족이 루이 13세 시대의 재상인 리슐르를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을 다룬 것이다. 그런 '생 마르'가 최근에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역시 음악적으로 뛰어난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어에서 생 마르는 3월 5일이라는 뜻도 된다.

    '생크 마르스'의 스토리를 설명하기 전에 우선 생 마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소개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근세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생 마르가 누구인지 금방 알겠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생 마르는 루이 13세 시대의 사람이다. 루이 13세라고 하면 혹시 오랫동안 오크 통에서 숙성한 값비싼 코냑을 연상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거고 루이 13세는 일찍이 9살 때에 왕위에 올라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랑스의 국왕을 지낸 사람이다. 루이 13세의 부인은 안느 왕비였고 당시의 재상(수상)은 리슐르라는 추기경이었다. 루이 13세, 재상 리슐르, 안느 왕비 등의 이름이 나오면 당장 알렉산더 뒤마 페레가 쓴 저 유명한 '삼총사'(Les Trois Mousquetaires)를 연상할 것이다. 가스콘느 출신의 달타냥, 아토스, 아라미스, 프르토스가 나오는 불후의 명작이다. 생 마르는 그러한 시대에 루이 13세의 총신이었다. 그러나 생 마르는 왕의 총애를 업고서 사치를 일삼고 오만하였기에 적이 많았다. 한편, 아무리 리슐르 재상이 국왕을 무시하고 권력을 흔들었다고 해도 프랑스를 위해 뛰어난 공적을 쌓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리슐르를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리슐르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에 앞장선 생 마르에 대하여 좋게 생각할 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생크 마르스라고 부르는 이 사람의 풀네임은 앙리 쿠아피에 드 뤼제(Henri Coiffier de Ruzé)이다. 호칭은 생 마르 후작(Marquis de Cinq-Mars)이다. 1620년에 태어나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1642년에 세상을 떠난 실존인물이다. 생 마르는 국왕보다도 더 높은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재상 리슐르 추기경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계획하였으나 거의 성공 단계에서 발각되어 처형장의 이슬이 된 인물이다. 생 마르의 아버지는 리슐르 재상의 오랜 친구로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어린 아들인 생 마르를 리슐르의 손에 의탁한바 있다. 리슐르 재상은 루이 13세를 더욱 조정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19세의 생 마르를 루이 13세의 연애 상대자로 들여보냈다. 어떤 역사학자에 의하면 생 마르는 루이 13세와 침대를 함께 사용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추기경은 생 마르를 아주 쉽게 콘트롤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 마르는 사치와 오만, 방종한 생활을 하여 리슐르 재상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생 마르는 리슐르가 자기를 견제하고 있는 것을 알고 오히려 루이 13세를 충동하여서 리슐르 재상을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혁명이나 마찬가지의 대사건이었다. 생 마르는 1641년 수아송 백작이 시도했다가 실패로 돌아간 반리슐르 음모에 가담했으나 그때에는 발각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그후 직접 음모를 꾸미기로 했다. 생 마르는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 가스통 및 다른 고위 귀족들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고 프랑스와 전쟁중이던 스페인에 국경을 열어줄 계획을 짰다. 1642년 3월 13일 그는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비밀협정을 체결했고 이에 따라 펠리페는 반란군에게 무기·군사 원조를 약조했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리슐르의 스파이가 미리 거사를 알아채고 리슐르에게 고변하는 바람에 모두 체포되었다. 생 마르는 참수형을 당했다. 리옹의 플라스 데 트러(Place des Terreaux)에서였다. 생 마르의 처형 소식을 들은 루이 13세는 동정은 커녕 '처형장에서 그 친구의 찌푸린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라고 가볍게 말했다고 한다.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또는 진정으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프랑스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인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 1797-1863)이 생 마르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소설은 1826년에 출판되었다. 샤를르 구노가 그 소설을 읽고 감동하여서 오페라로 만들었다. 대본은 폴 푸아르송(Paul Poirson)과 루이 가예(Louis Gallet)가 공동으로 완성했다. 1877년 4월 5일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의 반응은 미지근한 것이었다. 만일 이 오페라가 구노의 작품이 아니고 다른 누구가 작곡한 것이었다면 아마 금방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구노의 작품이므로 매장되지 않고 오늘날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구노의 '생 마르'는 그랜드 오페라의 장르에도 속하고 오페라 코미크의 장르에도 속한다. '생 마르'는 파리에서의 초연 이후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한번 공연되었을 뿐이며 그후 줄곧 침묵을 지키다가 2013년, 구노 서거 120 주년을 맞이하여 재평가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오페라의 스토리는 생 마르의 실화와 차이가 있다. 리슐르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는 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했지만 여기에 생 마르와 마리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덧붙였다. 마리 공주는 폴란드 왕과 정략결혼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공주의 입장을 고려하여서 강요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루이 13세와 리슐르 재상도 생 마르와 마리 공주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 마르가 반역죄를 저질러서 참수형을당하게 되었다. 마리 공주는 폴란드 왕과의 결혼을 승락하고 대신 생 마르의 목숨을 살려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사형집행 시간이 갑자기 변경되는 바람에 생 마르는 살아나지 못했다.

    1막. 생 마르(T) 후작의 성이다. 귀족들이 생 마르가 궁중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 것을 축하한다(A la Cour vous allez paraitre). 어떤 사람들은 생 마르가 리슐르 재상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루이 13에게 봉사하기 위해 간다고 믿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리슐르가 아니라 루이 13세(B)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믿고 있다. 그런 의견이 분분하지만 생 마르는 오히려 무관심하다. 생 마르는 오랜 친구인 드 투(de Thou: Bar)와 둘이서만 있게 되자 실은 마리(S) 공주를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궁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털어 놓는다(Henri! Vous nous parliez). 두 사람은 마리 공주를 사랑하는 일이 불행으로 끝날 것 같은 예감을 갖는다. 손님들이 다시 등장한다. 그중에는 리슐르 재상의 대변인인 조셉)Bar) 신부와 마리 공주도 포함되어 있다. 조셉 신부는 마리 공주와 폴란드 왕과의 결혼이 주선되고 있다는 얘기를 한다. 생 마르와 마리 공주는 당황한다. 그리고는 밤중에 따로 만나기로 약속한다. 손님들이 떠나자 마리는 밤의 달콤함으로 마음의 평정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Nuit resplendissante). 잠시후 생 마르가 나타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다짐한다(Ah! Vous m'avez pardonne ma folie).

    2막. 1장은 루이 13세의 거실이다. 궁정의 귀부인들이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정부인 마리온 들롬(Marion Delorme: S)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합창을 부른다(A Marion, reine des belles). 퐁트레이유(Bar), 몽트레소르(B), 몽모르(T), 드 브리앙(Bar), 몽글라(T)를 비롯한 귀족들이 생 마르의 왕에 대한 영향력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를 한다. 한편, 귀족들은 리슐르 재상의 권력이 너무나 강대한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생 마르가 자기들과 뜻을 함께 해줄지 모른다고 말한다. 마리온이 나타나서 리슐르가 생 마르를 멀리 추방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퐁트레이유는 놀라면서 만일 그렇다면 파리에는 우아한 살롱이 없어질 것이므로 따분한 생활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On ne verra plus dans Paris). 마리온은 다음날 무도회를 개최할 것이며 이때 리슐르 재상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기를 바란다. 잠시후 생 마르가 나타나자 여인들이 그를 환영한다(Ah! Monsieur le Grand Ecuyer). 잠시후 마리도 궁전에 도착한다. 생 마르와 마리는 다시 만나는 기쁨에 넘쳐 있다(Quand vous m'avez dit un jour). 마리는 루이 국왕이 생 마르와의 결혼을 묵시적으로나마 승락했다고 전한다. 생 마르의 기쁨은 더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축복의 순간도 조셉 신부가 나타나서 비록 국왕이 마리와 생 마르의 결혼을 묵시적으로 승락했지만 리슐르 재상은 그 결혼을 공식화 하기를 거절하며 원래대로 마리와 폴란드 왕과의 결혼을 추진할 것이라고 전한다.

    2막 2장은 마리온 들롬의 살롱이다. 저녁 모임은 마델레느 드 스퀴데리(Madeleine de Scudéry)의 마지막 소설인 Clélie의 낭독회로 시작한다. 그런 후에 발레가 포함된 목가풍의 공연이 따른다. 양치기가 부르는 De vos traits mon ame est navrée라는 소네트가 박수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마음은 왜그런지 무겁기만 하다(Viendra-t-il?). 생 마르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퐁트레이유는 생 마르가 분명히 음모에 가담할 것이라고 말한다. 퐁트레이유의 예언이 적중하듯 잠시후 생 마르가 도착한다. 생 마르는 국왕이 더 이상 나라를 통치하지 못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리슐르가 통치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리슐르를 제거하기 위한 봉기가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이미 스페인과 비밀리에 조약을 맺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설명한다. 모두들 안심하는 듯한 표정이다. 그때 생 마르의 친구인 드 투가 생 마르를 가로막고서 프랑스의 문제를 외국의 힘에 의존하여 해결하려고 하면 안된다고 경고한다.그러나 생 마르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3막. 다음날 교회 앞의 광장이다. 음모가담자들의 모임이 곧 열릴 예정이다. 잠시후 마리 공주가 나타난다. 모두들 음모에 대한 구체적인 회의를 가질줄 알았으나 생 마르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우선 마리와 결혼 서약을 하기로 얘기를 나눈다(Madame, c'est le lieu du rendez-vous). 모두들 실망하여 자리를 뜬다. 조셉 신부와 스파이 외스타셰(Eustache: B)가 숨어 있던 곳으로부터 나온다. 외스타셰는 조셉 신부에게 귀족들의 음모에 대하여 자세하 보고한다. 이제 생 마르의 운명은 조셉 신부의 손에 달여 있게 된다(Tu t'en vas). 조셉 신부는 마리 공주를 만나 생 마르가 비밀리에 스페인과 음모를 꾸미는 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폴란드 대사가 왕과의 사냥에서 돌아오는 대로 떠날 것이므로 그 이전에 마리의 마음을 결정해 달라고 권고한다. 만일 마리가 폴란드 왕과의 결혼을 결심하면 생 마르의 목숨을 건져 주겠다는 것이다. 멀리서 사냥을 나갔던 왕과 일행들이 돌아온다. 마리는 어쩔수 없이 항복한다. 그러면서 생 마르의 목숨은 살려 준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말한다(Hallali! Chasse superbe).

    4막. 감옥이다. 생 마르는 처형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생 마르는 마리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여 괴롭다. 하지만 지난 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며 위로로 삼는다(O chére et vivante image). 마리가 감옥을 찾아온다. 마리는 생 마르에게 조셉 신부와 조건을 내걸고 폴란드 왕과의 결혼을 수락했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면서 언제나 생 마르를 사랑하였다고 말한다(Ah! Qu'aije dit). 생 마르의 친구인 드 투는 생마르에게 다음날 생 마르를 탈출 시킬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조셉 신부와 판사가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생 마르는 다음날 새벽의 동이 트기 전에 사형에 처하게 된다고 한다. 드 투는 탈출 계획이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Messieurs, appelez a vous, votre courage). 생 마르는 드디어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생 마르는 드 투와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린다. [오페라에서는 전편을 통하여 리슐르는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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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5-27 11:39






    18세기 만능스타, 검은 모차르트 조셉 불로뉴 '생-조르주(1748-1799)의 기사'

    'Joseph Boulogne called Chevalier de Saint-Georges'

    조셉 불로뉴(Joseph Boulogne), 또는 생-조르주의 기사(Chevalier de Saint-Georges)... 그를 단순히 재능있는 흑인 작곡가로보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흑백 혼혈인 뮬라토로 태어나 프랑스 사교계 스타로 데뷔!! 무슨 인생역전 TV 드라마 소재가 아닌 실제상황이었다. 스피드와 유연함을 겸비한 운동선수요, 유럽 최고수준의 검사(劍士)였으며, 프랑스 혁명때에는 부하 1천명을 이끈 혁명군 지휘관이었고, 무엇보다도 바이올린 비르투오조에 선율감각 좋은 작곡가였다. 강인한 체력과 리더십, 그리고 예술적 재능의 이상적 결합 - 이것은 클래식음악사상 초유의 사태(?)였을 뿐더러 다재다능의 극한을 보여 주는 표본이라 할 만하다.

    재능의 종합선물세트 생-조르주는 1748년 오늘날 아이티에 해당하는 생 도밍그(산토 도밍고)에서 태어났다. 출생시기로 보면 하이든(1732)과 모차르트(1756)의 중간 세대라고 하겠다.

    그의 아버지 조르주는 부유했으나 미필적 고의의 살인죄를 짓고 도망치는 신세였다. 모친인 나농은 젊고 아름다운 세네갈 노예였다. (플랜테이션으로 보내진 아프리카 노예 중 최고의 미녀였다고...)

    그런데 이상한 점 발견. 어떻게 불륜(?)으로 태어난 아들이 정식으로 가문의 성을 받고 파리 사교계까지 진출할 수 있었나? 그것이 호부호형 못한 홍길동과 생-조르주의 차이점이었다. 생-조르주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챘던것 같다. 당시로서는 최고급 개인과외을 통해 천재기질이 보였던 아들을 집중교육 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보무도 당당하게 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입성해 사교계에 첫 발을 내딛을수 있었다. (당시 일반적인 혼혈아의 경우 한갓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음) 천국에서 지옥까지 파리에서의 생-조르주는 그야말로 만능 스타로 발돋움한다.펜싱, 승마, 사격, 스케이트에 심지어 세느강을 한 손으로 헤엄칠 정도로 능숙한 수영선수이자 흠 없는 에티켓을 구사하는 이국적 외모의 신사였으며,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할 정도로 '武器의 神'이었다. 세간에는 여성을 울리는 '검은 돈 주앙'이라는 소문도나돌았다.

    생-조르주는 이 때 음악계에도 본격 데뷔했는데, 바이올린 스승은 르클레르와 롤리였으며, 대 작곡가 고섹으로부터 작곡수업을 받기도 했다. 생-조르주는 고섹이 맡은 Concert des Amateurs에서 연주자로 활약했고, 생 조르주의 op.2 협주곡집을 출판했던 출판사는 향후 6년간 출판계약을 미리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781년 악단이 재정문제로 와해되자 생 조르주는 재빨리 악단을 하나 창단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이든의 파리 교향곡집을 초연해 유명해진 Concert de la Loge Olympique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이 악단마저 해산되자 잠시 영국에 도피했던 그는 곧 되돌아와 혁명군에 가담, 아프리카인 1000명으로 구성된 일명 '생 조르주 부대'를 이끌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 모함으로 곧 좌천되고 단두대로 갈 위기에까지 처한다. 간신히 살아 고향인 생 도밍그로 낙향한 생-조르쥬, 그곳 역시 혁명과 반혁명의 피튀기는 싸움이 한창이었다. 환멸을 느낀 그는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생 조르주는 더이상 화려한 사교계 명사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다시 한 번 혁명군에 참여하려는 탄원편지에서 그는 '생 조르주'라는 성 대신 그냥 '조르주'라고만 썼다. 하지만 그의 요청은 거부되었다. 대신 Cercle de l’Harmoni 악단에서 그를 음악감독으로 모셔간다. 하지만 생 조르주 인생의 끝은 이미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방광질환으로 지켜보는 가족 하나 없이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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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5-26 18:06








    광시곡(狂詩曲,Rhapsody)이란??

    광시곡이 본격적인 음악장르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19세기 초반임

    아주 오래 전 [랩소디](1954)란 영화가 TV로 방영된 적이 있다. 지금은 故人이 된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여주인공으로 나온 이 영화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두 남자 사이에서 번민한다.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 두 사람 중 과연 누구를 택해야 할까? 두 사람 모두 그녀를 사랑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에겐 사랑보다 음악이 우선이고 피아니스트는 음악보다 사랑에 더 매달린다. 결국 여주인공은 그녀를 더 필요로 하는 피아니스트를 선택하게 된다.

    영화 [랩소디]에서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두 남자 주인공의 이미지를 대변하며 로맨틱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두 곡 모두 감성적인 성격의 음악이기에 주인공들의 연애감정을 살려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음악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음악은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이 아닐까 싶다. 바이올리니스트로 분한 배우 비토리오 가스만이 식당에서 즉흥적으로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을 현란하게 연주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전문 바이올리니스트가 보아도 손색이 없는 그의 바이올린 연주 폼과 열정적인 연기는 감탄스럽다. 이 영화를 위해 가스만은 프로 바이올리니스트로 보이기 위해 바이올린 레슨을 받으며 대단한 노력을 했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재미있게도 영화 [랩소디]를 장식하는 주요 음악작품들은 ‘랩소디’란 이름이 붙은 음악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랩소디’라는 음악의 주요 특징이라 할 만한 환상적이고 자유분방한 느낌이 충분히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치고이네르바이젠] 덕분인 듯하다. 사실 ‘치고이네르바이젠’이란 제목은 ‘집시의 노래’라는 뜻을 담고 있지만 그 음악적 성격으로 볼 때 이 곡은 일종의 ‘랩소디’라 할 수 있다. 랩소디란 바로 이렇게 격한 감정의 기복을 드러낸 열정적인 음악이기 때문이다.

    격한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는 열정의 음악

    ‘狂詩曲’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랩소디’(Rhapsody)가 음악작품의 한 장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반이다. 본래 고대 그리스에서 서사시를 노래하면서 여러 나라를 유랑한 음유시인의 작품을 뜻하는 ‘랩소디’는 체코의 작곡가 토마셰크에 의해 기악곡에 도입되었다. ‘토마셰크’(1774~1850)라는 이름은 음악애호가들에게도 다소 낯설긴 하지만 그는 당대 최고의 즉흥연주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랩소디’의 역사에선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체코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그가 작곡한 피아노곡들은 슈베르트와 슈만, 드보르작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중 15개의 ‘랩소디’는 랩소디라는 음악을 최초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토마셰크 이후 그의 제자들이 랩소디를 작곡하면서 음악작품에 종종 ‘랩소디’란 말이 등장하게 되었고, 리스트와 드보르작, 도흐나니, 버르토크, 에네스코 등이 ‘랩소디’라는 음악장르에 기여하게 된다.

    사실 ‘랩소디’는 어떤 성격의 음악이라고 정의해야할지 매우 모호하다. 음악에서 랩소디는 어떤 정해진 형식이 없으며 꼭 어떤 악기로 연주해야 한다든가 하는 원칙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래 ‘랩소디’란 말이 고대 그리스 敍事詩와 관련이 있는 만큼 음악에서의 랩소디에도 역시 서사적이고 영웅적이며 민족적인 성격이 드러나고,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표출하는 자유분방한 음악으로 발전해갔다. 본래 그리스의 ‘랩소디’가 즉흥적인 口傳文學이었으니 음악으로서의 랩소디 역시 아카데믹한 규칙보다는 영감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음악작품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처럼 헝가리나 집시 바이올린 음악의 분방한 전개 방식이야말로 랩소디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민족 음악 특성의 반영

    대표적인 랩소디 작곡가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를 들어보면 랩소디 특유의 열정적 기질을 귀로 확인할 수 있다. 헝가리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헝가리의 민요와 집시의 바이올린 연주에 친숙했던 리스트는 젊은 시절에 15곡의 헝가리안 랩소디를 작곡한 데 이어 말년에 다시 4곡의 헝가리 랩소디를 작곡해 그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집시의 혼을 일깨웠다. 아마도 리스트의 전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 제2번]은 자유로운 형식과 열정적인 표현이 넘치는 랩소디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본래 피아노곡이지만 관현악 편곡으로 연주되거나 때때로 피아노와 관현악이 협연하는 협주곡 스타일로 연주되기도 한다.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 2번]은 전형적인 헝가리 음악의 구성에 따라 느리고 장중한 ‘라수’(Lassu)와 빠르고 역동적인 ‘프리스’(Friss)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느리고 애수 띤 음악으로부터 점차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집시 음악의 전형적인 구성이다. 도입부에서부터 이국적이고 독특한 느낌의 음악으로 시작해서 처음부터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깊은 우울함으로부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이르기까지 감정의 폭이 넓어서 음악이 끝날 때까지 듣는 이들을 몰입하게 한다.

    분위기를 급격히 반전시키는 랩소디 특유의 특징은 드보르작과 도흐나니, 버르토크, 에네스코의 랩소디에도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에네스코의 랩소디는 인기가 많다. 2곡의 루마니안 랩소디 작품11을 작곡한 에네스코는 고국인 루마니아의 민속적인 음악 어법을 독특한 방식으로 그의 작품에 도입한 음악가로 매우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다. 에네스코는 루마니아 민속음악에 독일음악의 형식을 입히고, 여기에 프랑스음악의 색을 칠할 수 있었던 흔치 않은 음악가였다. 그래서 그의 제자 바이올리니스트 메뉴인도 그를 가리켜 “극히 특별한 인종의 혼합체”라 말할 정도이다.

    에네스코의 루마니아 랩소디에서도 다문화적 음악어법이 녹아든 그 특유의 분방함을 느낄 수 있어 흥미롭다. 루마니아의 민속성과 집시 계통의 음악이 세련된 서유럽의 작곡기법으로 드러난 그의 [랩소디 제1번]을 들으면 루마니아 민속무곡의 생생하고 열광적인 율동미와 더불어 탄탄한 형식미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 에네스코의 [루마니아 랩소디] 외에도 드보르자크의 3곡의 [슬라브 랩소디]와 라벨의 [스페인 랩소디], 랄로의 [노르웨이 랩소디] 등 국가가 민족의 이름이 붙은 랩소디가 대부분이다. ‘랩소디’라는 음악이 대개 민족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독일의 진지한 작곡가 브람스가 남긴 [알토 독창과 남성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랩소디 작품53]은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문학적 표현, 풍부한 색채, 열광적인 기교

    독일의 문호 괴테의 詩 ‘겨울 하르츠 여행’을 가사로 하는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는 민족적인 요소보다는 문학적 요소가 강조되어 있고 감정표현이 다소 다듬어져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깊은 감명을 받은 괴테가 하르츠를 여행하면서 지은 이 시에는 인간의 고통과 체념, 그리고 신을 향한 간구가 녹아있는데, 작곡가 브람스는 이 시에 담긴 슬픔과 체념의 정서를 그윽하고 풍부한 알토의 음색과 남성합창으로 표현해냈다.

    이 랩소디를 작곡할 당시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의 딸 율리아를 짝사랑하다 그녀의 약혼 소식에 홀로 상처받았다고 한다. 그 마음이 녹아있는 듯, 브람스의 랩소디엔 은근한 슬픔과 체념의 감정이 음악으로 승화되어 있어 더욱 큰 감동을 준다.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는 재즈 풍의 음악이란 점에서 색다른 랩소디라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거쉰은 클래식 음악에 재즈적인 요소와 경음악적인 형식을 도입한 미국적인 음악으로 인기를 모았다. 그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랩소디 인 블루]는 폴 화이트만 오케스트라와 작곡자의 독주로 초연된 이후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아직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거쉰의 대표작이다. 디즈니 만화영화 [판타지아 2000]에도 나왔던 작품이라 어린이들에게도 친숙한 음악이다. 무엇보다 곡의 도입부의 클라리넷이 마치 사이렌소리처럼 음을 끌어올리며 연주하는 부분은 정말 인상적이다. 변화무쌍한 피아노의 표현력, 재즈 풍의 연주방식을 도입한 관악기의 색채 등, 무한한 매력을 지닌 이 작품은 랩소디의 자유분방한 매력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해낸 작품이라 할 만하다.

    19세기 초 토마셰크에 의해 음악에 도입된 [랩소디]는 비록 그 역사도 짧고 작품 수도 많은 편은 아니지만 연주효과는 뛰어나다. 그래서 랩소디는 오케스트라의 야외 음악회나 팝스 콘서트처럼 가벼운 음악회에서 특히 사랑받고 있다. 때때로 진지한 음악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나 음악을 그저 즐기고 싶을 때 랩소디를 들어보라. 음악에 담긴 격렬한 감정 변화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랩소디의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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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5-26 17:54








    게오르기 카트와르
    Georgy Catoire (1861~1926)

    카트와르는 프랑스 혈통을 가진 러시아 작곡가이다.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14세 무렵 리스트의 제자이자 바그너의 친구였으며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이기도 했던 칼 클린트보르트(Karl Klindworth)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바그너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작곡가로는 드물게 親바그너적인 경향을 갖는 작곡가의 한사람으로 1879년 바그너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바그너에 대한 한결같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오늘날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림스키-코르사코프협회 소속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바그너를 강력하게 혐오했다는데 기인한 것으로 러시아 대중과 음악가들에게 바그너의 음악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그의 서클에 속한 일련의 작곡가들은 바그너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던 카트와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카트와르는 처음부터 음악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그는 1884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졸업후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 당시 그를 가르쳤던 클린트보르트는 베를린으로 떠난 상황이어서, 그의 제자였던 빌보르크(V.I. Willborg)에게 기초적인 화성과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이 시기에 카트와르는 피아노 소나타와 성격적 소품 등을 포함한 몇곡의 피아노 작품들을 작곡했으며, 리스트 등의 작품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향악 작품들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관현악 모음곡 1번 작품 43의 첫 악장을 편곡했는데, 이 편곡 작품은 차이코프스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카트와르가 편곡한 작품에 더해 세밀하게 보필했다 한다. 계획적이고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아보는것이 어떻겠냐는 차이코프스키의 권유를 받아 들인 것은 바로 이 무렵으로 당시 카트와르의 나이는 24살이었으나 작곡가가 되기에 그의 능력과 열정은 모자람이 없었다.

    빌보르크의 레슨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1885년 후반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다시 클린트보르트에게 레슨을 받았다. 1886년 잠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차이코프스키와 교분을 쌓았는데, 이때 그의 피아노 변주곡 세트를 본 차이코프스키는 카트와르에게 “작곡에 대한 재능을 썩히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고 하며 크게 만족해 했다 한다. 모스크바 방문동안 카트와르는 차이코프스키로부터 출판업자인 유르겐손(Jurgenson)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카트와르는 1886년 한해동안 줄곧 클린트보르트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음과 동시에 오토 티르쉬(Otto Tirsch)에게 작곡과 음악 이론을 배웠다. 그러나 티르쉬의 교습방식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필립 루처(Philip Rufer)에게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교습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레슨의 산물로 한곡의 현악 사중주가 탄생했다.

    카트와르는 스승인 클린트보르트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의 데뷔를 거절하고 1887년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모스크바에서 차이코프스키를 다시 만난 카트와르는 구베르트(Gubert)와 타네예프(Sergei Taneyev)가 배석한 자리에서 자신이 베를린에서 루퍼를 위해 쓴 현악 사중주를 선보였다. 배석자들은 카트와르의 작품이 음악적인 흥미는 있으나 텍스츄어가 빈약하다고 지적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추천을 받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로 간 카트와르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과 음악이론에 대한 교습을 받았다. 차이코프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쓴 편지에서 "재능은 많으나...진지한 교육이 요구된다"고 썼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카트와르를 리아도프에게 보내기 전에 한번의 레슨을 해주었는데, 이 레슨의 결과로 태어난 3곡의 작품이 훗날 3개의 피아노를 위한 소품, 작품 2로 출판되었다. 그후 카트와르는 리아도프에게 대위법을 배웠으며, 기상곡 작품 3을 비롯한 몇몇 작품을 작곡하였다. 리아도프로부터의 레슨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교습은 종결되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 시기동안 2번째 사중주와 칸타타 루살카(Rusalka", 독창, 여성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타 작품 5)를 작곡하였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과 가족 및 동료들은 작곡 이력을 쌓은 과정을 탐탁치 않아 했다. 카트와르는 결국 1899년에 일련의 실망스러운 작품을 뒤로 한 채 시골에 칩거하였으며 작곡을 거의 그만두게 되었다. 칩거 2년 후쯤에는 그의 음악 친구들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은둔의 결과로 작품 7번 교향곡이 작곡되었다.

    1919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되었으며, 재임기간동안 이론과 작곡에 관한 몇개의 논문을 썼다. 미야스코프스키(Nikolai Myaskovsky)는 카트와르가 가르친 가장 뛰어난 학생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그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이 연주한 피아노 작품들과 알렉산더 골덴바이저(Alexander Goldenweiser)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David Oistrakh)의 연주로 레코딩된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 등 몇몇 음반이 발매된 바 있다. 그의 음악은 분명 초기 스크리아빈의 작품과 포레, 차이코프스키의 것과 유사하다. 그의 작품은 상당한 수준의 비르투오시티와 아울러 악기의 색채감에 대한 변별력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카트와르는 작가이자 음악가이기도 하였던 장 카트와르의 삼촌이기도 하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悲歌,작품 26)는 1916년에 출판된 것으로 카트와르의 제자였던 미야스코프스키의 표현처럼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견실한 작품으로 카투아르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 매우 커다란 아취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5분여 밖에 안되는 작은 외형의 이 작품 안에는 음악적 아이디어와 분위기, 어법 등 카투아르의 음악세계의 모든 것이 반영되어 있다.

    음반의 첫 곡으로 수록된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작품 15)은 1898-1902년 사이에 작곡된 것으로 그의 창작 1기에 해당하는 다수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작품일 뿐 아니라 이 시기의 가장 후반부 무렵에 작곡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장대한 첫 악장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적 작품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2악장인 뱃노래는 우수적 분위기와 뒤섞인 매우 세밀한 장식법과 부드러운 서정성의 전형이다. 여기에 더해진 詩的인 사운드는 온전히 카트와르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반짝이는 수채화 그림물감의 촉촉함으로 가득찬 분위기 좋은 그림과 그 속에 부유(浮遊)하는 밝게 굽이치는 물결에 대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詩曲(작품 20) 두 번째 소나타는 카트와르의 실내악 작품중 가장 중요한 곡이며,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1906년에 작곡된 것으로 그의 작품 2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작곡되었는데, 심각한 병으로 인해 1902년부터 1904년 말까지 잠정 중단되었던 창작활동이 병세의 회복으로 재개된 이후 작곡된 것이다. 병으로 인해 1904년 티롤에 머물르다 창작을 위해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이후 정력적인 작곡활동이 재개되었다.이 작품은 알렉산터 골덴바이저에게 헌정되었다. 두곡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엘레지(작품 26)는 악보 草稿의 형태로 남아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본음반의 맨 마지막 트랙에 수록된 로망스는 본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었으나 본 음반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편곡 버젼이 수록되었다. 이 작품은 그가 작곡한 다른 여타의 작품들에서는 거의 시도된 바 없는 것으로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처음으로 차이코프스키를 만났을 때 차이코프스키 앞에서 연주했던 자신의 첫번째 작품으로 훗날 작품번호 1이 되었다. 또한 이작품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작품이며,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詩에 붙여진 작품으로 1883년에 출판되었으며 작곡가의 부인이었던 소피아에게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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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빛 (@veritas0359)
    2021-05-26 17:48




    독일에서 커피하우스가 생겨난 것은 18세기에 와서 였고, 그 때부터 커피를 마시는게 사회적 대 유행이 되었으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도 커피애호가 중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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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방송응원 (@unionsel)
    2015-12-1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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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12-08-06 21:48



    코첼루흐 교향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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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10-03-05 12:21





    한스 피츠너 "오페라" 가련한 하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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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10-03-05 10:18


    도플러,쿨라우,바흐,텔레만,모차르트 플룻소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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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숲빛 (@veritas0359)
    2010-03-05 10:16


    반할의 비올라 소나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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