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빗소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자신을 높여 가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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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g16890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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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7-24 17:06
살아있음에
그냥 살아가는 삶은 아닌지
무의미한 건 아닌지
의심하며 절망하지 말기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버텨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견한 삶이니까
그러니
그저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
애써 살아가는 삶이 되길
흩어지는 날들로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뭉쳐지는 날들로 살길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삶이 즐겁고 생기 넘치는 것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니
꼭 그렇게 되길
우리 그렇게 살아가게 되길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책 - 작은 별이지만 빛나고 있어- 중에서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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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7-24 08:39
독립운동가 김광제 선생(1866.7.1~1920.7.24) 서거
"조국이 예속 굴레 벗는데
내가 금연 못하겠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다.
대구의 출판사 광문사 사장으로
계몽도서를 펴냈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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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7-23 14:52
2018년 92년 만에 서훈을 받은 일본인
여성 혁명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아내라고 불리는 아나키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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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박열(1902- 1974) 선생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선생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았다.
이로서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가로 지정된 2번째 일본인 독립운동가가 탄생했다.
첫 번째는 박열선생을 포함한 수 많은 독립운동가를 무료 변호한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다.
아마 영화 을 본 국민이라면 박열 선생을 변호하고 감옥에 찾아가는 일본인 변호사를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가 후세 다쓰지다.
실제로 후세 다쓰지는 가네코 후미코의 시신을 찾고 장례를 도와주는 등 박열 선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정의와 양심에 편에 서려 노력했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가네코 후미코 선생의 한국명은 ‘박문자(朴文子)’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이틀 만에 치안 경찰법에 근거한 예비 검속으로 남편 박열 선생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다이쇼 덴노와 히로히토 황태자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덴노의 명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갑작스럽게 의문사 하였다.
여전히 가네코 후미코 선생의 사망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스스로 죽었다고 유가족에게 사망원인을 통지했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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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코는 8살 때 어머니를 따라 새 아버지가 살던 야마나시 현 기타쓰루(北都留)로 갔지만 곧 삼촌과 함께 어머니의 친정 가네코(金子) 가문이 있는 야마나시 현 히가 시 야마나시 군 스와무라 오오아기 소마구치(같은 군 마키오카, 현 야마나시 시)에 가서 자랐다.
후미코가 9살 때 생부의 여동생, 곧 고모가 결혼한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 부강면에 있던 이와시타(岩下)의 집에 맡겨진다. 사위의 집에 살고 있던 후미코의 친할머니는 후미코를 친손녀로 인정하지 않았고, 후미코를 외조부의 5녀로 입적시켰고 후미코를 학대했다. 조선에 와서도 친척들에게 학대를 받자, 후미코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고 했다.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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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7-23 14:33

방정환(方定煥)(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선생 서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이며 어린이날의 창시자이다.
1909년 매동보통학교에 입학, 이듬해 미동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였다. 그 해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가정 사정으로 중퇴하였다. 1917년 손병희(孫秉熙)의 딸 손용화(孫溶嬅)와 결혼하였다. 그 해에 청년운동단체인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였다. 1921년 김기전(金起田)·이정호(李定鎬) 등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월간으로서 일본 동경에서 편집하고 서울 개벽사(開闢社)에서 발행을 대행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장을 배포하였다. 1925년에는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童話口演大會)를 개최하였다.
1920년에도 세계 20여 개 나라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방정환이 남긴 작품은 번안물이 대부분이다. 원문의 뜻과 흐름을 손상시키지 않고 외국어의 장벽을 무난히 돌파하여 동화 번안작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그가 번안 내지 개작한 동화들이 지닌 일관된 특징은 풍자와 해학의 정신과 교훈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종래의 유교도덕에 얽매어 있던 어린이들을 어린이다운 감성으로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감성 해방은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그들을 웃기기보다는 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웬일인지 별 하나/보이지 않고/남은 별이 둘이서/눈물 흘린다.”(형제별)와 같은 동요에서 이러한 모습은 잘 나타나고 있다.
생전에 실천하고 남긴 업적을 간추려보면, 첫째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화운동가요, 사회운동가였다.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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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7-19 11:14


독립운동가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 선생 서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겸 저술가이다.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구한 말 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계몽 활동을 하다가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되어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에서 활동하다가 1917년 상하이[上海]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에 상해고려민친목회(上海高麗民親睦會)를 조직하였으며, 같은 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조직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관여하고, 김규식(金奎植)을 상하이로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결정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힘썼으며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아동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일본을 방문하여 일제 고위관리들과 여러 차례 회담하면서 일제의 자치제 제안을 반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하였다.
1920년 사회주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極東被壓迫民族大會)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김구(金九)·손정도(孫貞道) 등과 함께 한인노병회(韓人勞兵會)를 조직하여 노농병 양성과 군비 조달에 힘썼다.
1923년 임시정부의 진로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였으며, 1925년 쑨원(孫文)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1926년 중국혁명운동이 실패한 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2년 출옥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으며, 이 무렵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Clark. C. A) 목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기호학회에 참여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당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승동교회(勝洞敎會)를 출입하였다.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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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7-18 14:56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 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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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7-18 10:37


독립운동가 전해산 선생(1879.10.18~1910.7.18) 서거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
의병대장으로 일군경과 70여 차례 교전하다
“사람이란 어차피 한 번 죽고 마는 것이니 왜놈과 가까이해서 죽게 될 진데 어찌 의병에 충실하다 죽어서 끝내 좋은 이름을 차지하는 것만 하겠느냐.”
-[전해산진중일기](1908) 中-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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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7-18 10:35
독립운동가 조시원 선생 서거
(1904.10.23~1982.7.18)
16살 소년 때 상해로 망명. 25년간의 항일투쟁
선생은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본부 한인청년총동맹,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화랑소년회 등 민족주의 단체들을 끊임없이 조직하며, 임정을 위해 일했다.
친일모리배들을 숙청하고 광복군 창군에 참여하였으며, 광복 후 사회당 국회의원으로 일하셨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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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7-16 15:04


충남 부여 궁남지 ~~
얼마전에 연꽃 축제 한 듯.....
강쥐들과 왔던 추억 이야기 하며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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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7-16 14:51

익산 나바위 성당에 들르다.
나바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이 조선 헌종 11년(1845)에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금강 뱃길을 통하여 황산나루터에 처음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축되었다. 1906년 베르모렐 신부가 설계·감독하고, 중국인 기술자를 동원하여 지었다. 처음에는 앞면 5칸·옆면 13칸의 한옥 건축물이었으나, 1916년 이후 몇 차례의 수리과정을 거치면서 벽의 일부를 벽돌로 바꾸거나 고딕식 종각을
세우는 등 한국 전통 양식과 서양 건축 양식이 혼합되었다.
김대건신부가 중국에서 1845년(헌종 11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페레올주교, 다블뤼신부와 함께 황산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성당이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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