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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빗소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자신을 높여 가면 되는 것!
  • 41
  • 태양을품은달°˚(@g168906100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7-15 12:54


    독립운동가 조마리아 선생 서거

    조마리아는 안중근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아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제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자 항소하지 말라고 권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고,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8월 조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뒤에는 누군가의 격려와 위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숨은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일대기가 근래에 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열사의 어머니, 조 여사의 삶과 활동을 조명한 3․1여성동지회 박용옥 회장은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의 항일구국적 생애」라는 논문에서 "안중근이란 인물을 만든 것은 그 어머니의 '모성 리더십' 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조 여사는 국채보상운동 때 자신의 패물을 선뜻 내놓아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29일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해 안 의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을 결심했을 때 조 여사는 "최후까지 남자스럽게 싸우라"고 격려했으며, 2년 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수감됐을 때는 안 의사의 동생들을 보내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노니 …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선고 받은 뒤 조 여사는 당부의 말과 함께 수의를 보냈고, 안 의사는 1910년 3월26일 그 수의를 입은 채 순국하였습니다.
    그 해 안 의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을 결심했을 때 조 여사는 "최후까지 남자스럽게 싸우라"고 격려했으며, 2년 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수감됐을 때는 안 의사의 동생들을 보내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노니 …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선고 받은 뒤 조 여사는 당부의 말과 함께 수의를 보냈고, 안 의사는 1910년 3월26일 그 수의를 입은 채 순국하였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무엇에 대한 확신이 있었길래 그렇게 강한 어머니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요.

    댓글 3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7-13 11:50




    독립운동가 권병덕 선생 서거

    1868년 4월 25일 충북 청주군 미원면 성화동(현재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에서 태어난 권병덕 선생은 평등한 사회로의 개벽을 주장하는 동학의 교의에 감명을 받고 동학에 입교하게 되었는데요. 입교 이후 1886년 2월에는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이후 동학농민운동의 2차 봉기에도 참여하는 등 동양의 전통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사회개혁을 꿈꾸었으며, 191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천도교를 기반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의 2‧8독립선언이 일어나는 등 우리 민족은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게 됩니다.
    이처럼 독립을 열망하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천도교에서는 1918년 말부터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손병희와 협의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는데요. 천도교에서는 행정 자치 청원, 독립 청원, 독립 선언의 방식으로 순차적으로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도교 인사들은 기독교의 이승훈·함태영, 불교의 한용운 등과 협의하여 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민족대표의 선정 등을 협의하는 등의 계획을 2월 20일경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리고 1919년 2월 21일. 권병덕 선생은 손병희로부터 민족대표가입을 제의받았고,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이후 독립선언서의 제작과 배포, 미국 대통령 및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열국 대표에게 건의서와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에 보내는 청원서의 날인과 제출 등에 대하여 협의 및 서명하였습니다.

    댓글 3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7-12 10:21


    모든 날의 마무리


    마음에 새기세요.
    오늘은 올해 최고의 날이라는 것을

    하루를 온전히 누리는 자가 진정한 부자입니다.
    근심과 불안으로 하루를 침범 당하면
    그 누구도 그 하루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루를 마쳤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당신은 할 수 있는 만큼 했습니다.
    실수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더라도
    가능한 한 빨리 잊으십시오.

    내일은 새로운 날입니다.
    평온하고 당당하게 시작하세요.
    어제의 어리석음에 얽매이기엔
    당신의 정신은 너무 고귀하니깐요.

    댓글 1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7-12 00:57






    잠 못자는 나날로
    비몽사몽 지금도 몽롱하여 ....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난다.

    몽롱하니 평소의 내가 아니다.ㅡㅡ

    댓글 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7-11 10:45


    독립운동가 현순(玄楯) 서거
    (1880년 2월 28일 ~ 1968년 7월 11일)

    일제강점기 13도대표 국민대회 평정관,
    임시정부 외무차장,
    내무부차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감리교회의 목사이며 일제강점기 13도대표 국민대회 평정관, 임시정부 외무차장, 내무부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별명은 송원상(宋元相)으로 경성에서 출생하였다. 상해 임시점부의 외무위원과 내부차장으로 일하였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였다.
    1919년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그는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1919년 8월부터는 구미위원부 위원과 위원장 대리로 활동했으며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평화회의, 군축회의에 한국 임시정부의 참석 요청과 독립청원서를 보냈다. 임시정부 외무위원, 내무차장을 지냈으며 구미위원부 위원으로도 활약했다. 1923년부터는 감리교회 목사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 교회를 세워 1940년까지 시무하였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이다.
    가명은 송원상(宋元相)으로 경성부 옥인동(玉仁洞) 출신이고 원적지는 함경남도 함흥이다. 1902년(광무 5년) 배편으로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기독교회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하와이 이민
    현순은 1903년 3월 하와이로 정식 이민, 하와이 카후쿠와 와이알루아농장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1년 귀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다가 이승훈, 윤치호, 양기탁 등이 데라우치 마다사케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105인 사건이 발생하자, 그도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동대문 상동교회의 목사인 전덕기가 옥사하자, 석방된 뒤 동대문 상동교회 목사 손정도와 함께 정동제일교회에 가 전도사로 활동하며, 담임목사 최병현을 도와 교회 확장과 전도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손정도, 최병헌 등과 함께 협성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했다.
    삼일운동 후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하여 협력을 하다가 1920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구미위원부에서 일을 하였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목사로서 미국 현지에서 적극 참여하였다.

    댓글 7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7-05 12:35


    인생은 마음 하나만으로도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빛낼 수 있다.
    "자, 지금부터다.
    새로운 목표를 향해 전진하자."
    이런 적극적인 자세가
    뇌세포에도 자극을 주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댓글 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7-02 14:06
    팽이가 안정되게 서 있는 까닭은 회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온 힘을 다해 움직이는 속에 안정이 생긴다.

    댓글 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7-02 11:11


    독립운동가 신팔균 선생 서거

    독립운동가 신팔균 선생(1882.5.19~1924.7.2)

    " 압록강 이남으로 밀고 내려가
    일본 경찰대를 섬멸하라! "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 국권이 빼앗겼던 1900년대 초 우리나라는 국권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일화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과 집안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독립운동을 하다 순직을 한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신팔균 장군은 우리에게 친숙한 김좌진, 홍범도, 김동삼 장군들과 함께 중국 만주를 무대로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던 아주 대표적인 무장투쟁가입니다.

    댓글 7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6-25 01:11






    문경시 산양면 산양정행소에.....

    댓글 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6-25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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