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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빗소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자신을 높여 가면 되는 것!
  • 41
  • 태양을품은달°˚(@g168906100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1-0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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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1-05 11:50


    독립운동가 채응언 선생(~1915.11.4)

    국권이 강탈된후 역사상 가장 긴 의병 활동 펼친 청춘


    "헐벗은 옷 조악한 밥을 달게 여기고, 부하와 침식을 함께하며, 재물은 털끝도 범한 바가 없다. "


    역사상 가장 긴 의병 활동을 보여준 의병장 채응언 선생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중 한 분입니다. 8년 이라는 시간동안 의롭고 담대하며 기민하게 활동한 선생은 민중의 지원을 암암리에 받았고 이로인해 일제는 선생의 의병부대를 매우 어려워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워지자 무기의 열세에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물결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군인들에게 그 의지가 이어져 내려오게 됩니다.

    채응언 선생은 실제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실제 서거일만 기록되어있으며 역사적 전후관계를 고려해 선생이 1883년도에 태어났다고 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출생지는 기록마다 달라 말들이 많지만 선생이 체포된 지역이 평안남도 성천군이었기에 그곳에서 태어나셨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선생은 의병 활동을 하기 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생활고에 허덕이며 농사를 짓고 힘들게 생계를 꾸려가던 농부였습니다. 그러나 어릴적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성실하게 농사를 짓던 선생은 나라가 어려워지자 호미를 내려놓고 돌과 총을 들고 일본군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오랜시간 피해를 입힌 전설적인 의병장으로 변신합니다.

    선생이 10살이 되던 해, 우리나라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전국을 휩쓸게 되었고 세계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수탈, 그리고 이어지는 을사늑약 및 을사5적의 소식에 선생은 다음과같이 말하며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난신적자가 횡행하여 권세를 희롱하므로 송병준(宋秉畯)•이완용(李完用)과 같은 7적(賊)•5귀(鬼)의 살점은 2천만 동포가 모두 xx 먹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선생은 의병을 일으킬만한 학문적 존경, 경제적 부유함 그 어느 것도 없었기에 우선적으로 다른 의병부대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역사에 의하면 1907년을 기준으로 선생의 의병활동을 추정하는데 군대가 강제해산된 시점을 기준으로 선생의 활동이 기록되는 점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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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1-05 11:36


    독립운동가 이윤철 선생

    마지막 광복군 이윤철 지사


    임시정부 의정원 이광 선생 아들
    청년들에 올바른 역사 인식 당부
    발인 2017년 11월 6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독립운동을 했던 항일투사 이윤철 광복군 지사가 4일 오후 숙환(폐렴)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생존해 있는 몇 안 되는 ‘마지막 광복군’ 중 한 명이었던 이 지사는 오늘날 국무위원격인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낸 이광 선생의 아들이다. 그의 본가, 처가에는 민필호·김준엽 등 독립운동 유공자들이 적지 않다. 1925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그는 이같이 독립운동에 매진해온 친지·가족들을 보면서 자라왔다.


    청년이 된 이 지사는 광복군 5지대 전신인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1942년 9월에는 임시정부의 인재 양성 계획에 따라 항공통신군관학교에 입교했다. 1945년 5월에 졸업과 동시에 사천성(四川省) 신진(新津) b29기지에 배속돼 전선 출격 작전을 지원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이 지사는 광복군 활동 등을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 지사는 생전에 독립운동에 애정이 깊었다. 그는 임시정부 가족들이 광복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김구 선생 덕분이었다고 전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해 임시정부에 대한 각계각층의 지원이 전면 중단됐지만 김구 선생이 나서 이를 해결했다고 한다. 이 지사는 “김구 선생은 모든 면에서 참 모범적인 분이셨다”며 “동포애가 크신 분”이라고 말했다.
    이 지사는 광복 이후 득세해 온 친일파 후손들, 가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선 따끔한 ‘죽비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지사는 광복 70주년을 앞둔 2015년 8월에 이데일리와 만나 “이승만 대통령 치하에서 특히 김구 쪽 임시정부 요인들은 홀대를 받았다. 반민특위가 실패하면서 일본에 붙었던 이들은 득세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이 지사는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친일파, 엉터리 독립유공자들이 득세하고 있다. 선조 때부터 중국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해온 독립운동가들과 자손들은 지금도 홀대를 받는 게 현실”이라고 탄식했다. 이어 이 지사는 “시대가 변해도 내가 서 있는 우리 땅의 역사는 반드시 알았으면 한다”며 “역사를 바로 알면 진실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있다”면서 청년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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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1-05 11:32


    독립운동가 남상목 선생(1876.4.12~1908.11.4)

    왜적들을 향한 의로운 총


    남상목 선생은 어려서부터 힘이 출중하여 장수의 재목이였다고 합니다. 남상목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강제로 조선인의 인력과 재원을 수탈하던 때 입니다. 선생이 29세가 되던 1904년. 선생의 고향에까지 일제의 수탈이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으로 3개 면에 수목을 전부다 벌채하고 주민들에게 운반을 시키고는 단 한 푼의 임금도 지불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를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선생은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를 죽도록 패버렸습니다. 당연히 선생은 이 일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온갖 체벌을 당하고 풀려났는데 이 사건은 선생의 가슴속에 잠재돼있던 독립운동 정신을 일깨우는 사건이 됩니다.
    이 약간의 시간이 지나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 나라의 외교권이 빼앗기는 심각한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죠. 선생은 일제의 침략 야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던 1906년 제천지역 의병장 이강년 의진에 들어가 항일전에 수 차례 참전하였고 1908년 8월 경기도 용인 용곡천 일대에서 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새로운 의진을 이끄는 의병장 활동을 시작합니다. 1908년 8월부터 과거 의병 동지들을 자신의 의병부대에 편입시켜 활동하였으며 경기도 음성에서 벌인 전투가 유명합니다. 비록 패했으나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힌 격전이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선생의 의병 부대는 경기도 용인부터 충북 충주까지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1908년 11월 판교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밀정에 의해 미리 잠복해있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됩니다. 의병장이었던 선생은 곧 바로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참혹한 고문을 받게 됩니다. 의병장이었으니 그 누구보다 잔인하게 고통 받으셨고 결국 고문을 받던 도중 장이 파열되어 1908년 11월 4일 형무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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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1-02 08:34


    독립운동가 정태진 선생(1903.7.25~1952.11.2)

    [큰사전] 편찬 위해 헌신한 조선어학회 한글학자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우리는 지나간 마흔 해 동안 저 잔인무도한 왜적이 우리의 귀중한 말과 글을 이 땅덩이 위에서 흔적까지 없애기 위하여 온갖 독살을 부려 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고 몸서리가 쳐진다(…)이 땅의 모든 애국자는 다 함께 일어나 우리의 말 우리의 글을 피로써 지키자!”


    -선생의 글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키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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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1-01 09:14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1859.9.30~1925.11.1)

    '한국사는 나라의 혼' 임시정부 2대 대통령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국혼(國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함선(艦船) 기계(器械)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 하지 않는다.
    - 박은식 선생이 지은 (1915년)의 결론

    독립협회 가입하고, 황성신문 주필로 민중계몽 운동을 실행했다. 이 무렵 일제는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노골적이고 본격적인 침략 정책을 감행하고 있었다. 더구나 러일전쟁에서의 승전으로 한국에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침략성을 격렬하게 비판하자 일제는 이 신문을 정간시켜 버렸다. 그 뒤 황성신문은 1906년 복간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장지연의 복귀는 어려웠다. 때문에 주필로 혼자 남게 된 선생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황성신문이 강제 폐간될 때까지 각종의 애국적 논설을 발표하여 국민을 계몽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의 저변을 넓혀 갔다.

    서북협성학교 오성학교 교장으로 민족교육 실천. 비밀결사 신민회에서 활동했다.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무단정치를 시행하면서 신민회 등 민족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통치체제의 안정을 위하여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애국적인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켰다. 그리고 선생의 저작을 비롯하여 민족혼이 담긴 간행물을 로 분류하여 그의 발행과 열람을 엄금하였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민족혼이 실린 역사서가 모두 압수, 소각됨으로써 일반 국민은 물론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긍지를 상실하지 않을까 우려하게 되었다. 선생은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國魂)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서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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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9 18:47


    독립운동가 김약연(金躍淵)

    1868년 9월 12일 ~ 1942년 10월 29일

    일제강점기 간민교육회 임원, 회장, 간도 한인 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교육자.

    김약연 선생은 1899년 중국 만주로 넘어간 다음 북간도 화룡현에 자리를 잡고 명동학교와 간민교육회를 설립하여 나라 없이 만주로 온 동포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북간도에서 독립선언서를 발간하였으며,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김약연(金躍淵, 1868.9.12~1942.10.29) 선생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호는 규암(圭巖)이다. 선생은 8세 때인 1875년부터 10여년 간 함북 종성 출신의 유학자들인 남종구․오삼열․주봉의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 때 선생은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품성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여러 선생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온 마을의 모범 소년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또한 이 시기 선생은 ≪맹자≫에 심취하였던 것 같다. 때문에 선생에게 글을 가르치던 스승 남종구는 “약연은 ≪맹자≫를 만독 (萬讀)해서 이제는 눈감고도 줄줄 욀 수 있으니 틀림없는 맹판(孟板)이야”하고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선생이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인해 날로 참담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고, 그 난국의 해법을 맹자의 경세론(經世論)에서 찾아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즈음의 정세는 급박하였다.

    개항 이후 일제의 개항장을 통한 미곡의 대량 반출과 연연이 계속된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우리 농촌은 피폐하여 유랑민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들 유랑민들은 “앉아서 굶어 죽느니 배불리 먹기 위하여 가다 죽는다”는 각오로 월경하여 간도로 대거 이주를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85년 청나라 또한 만주족의 근거지이자 청 황실의 발상지인 만주지역에 수백년간 실시해오던 봉금령(封禁令)을 완전히 폐지하고, 두만강 이북의 길이 700리, 넓이 4․50리의 넓은 지역을 한국 이주민이 개간하여 정착할 수 있는 전간구역(專墾區域)으로 지정하였다. 따라서 이후 한인의 만주이주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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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9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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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7 15:08


    (故)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1년. 그가 남긴 목소리와 철학, 그리고 음악은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며 세대를 넘어 울림을 전하고 있다.

    신해철은 2014년 10월 17일 서울 모 병원에서 위장관유착박리술 수술을 받고 고열과 가슴 복부 통증을 호소한 뒤 심정지로 쓰러졌다. 이후 27일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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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7 14:54


    독립운동가 권준 선생(1895.5.2~1959.10.27)

    항일전의 선봉에 선 정통 무장

    권준 선생은 1919년 만주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과 함께 의열단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의열투쟁을 지원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전방위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였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이후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으로 중국 내의 교민사회 보호를 위해 많은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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