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빗소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자신을 높여 가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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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g16890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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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11-02 08:34
독립운동가 정태진 선생(1903.7.25~1952.11.2)
[큰사전] 편찬 위해 헌신한 조선어학회 한글학자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우리는 지나간 마흔 해 동안 저 잔인무도한 왜적이 우리의 귀중한 말과 글을 이 땅덩이 위에서 흔적까지 없애기 위하여 온갖 독살을 부려 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고 몸서리가 쳐진다(…)이 땅의 모든 애국자는 다 함께 일어나 우리의 말 우리의 글을 피로써 지키자!”
-선생의 글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키자!] 중에서-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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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11-01 09:14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1859.9.30~1925.11.1)
'한국사는 나라의 혼' 임시정부 2대 대통령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국혼(國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함선(艦船) 기계(器械)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 하지 않는다.
- 박은식 선생이 지은 (1915년)의 결론
독립협회 가입하고, 황성신문 주필로 민중계몽 운동을 실행했다. 이 무렵 일제는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노골적이고 본격적인 침략 정책을 감행하고 있었다. 더구나 러일전쟁에서의 승전으로 한국에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성과 침략성을 격렬하게 비판하자 일제는 이 신문을 정간시켜 버렸다. 그 뒤 황성신문은 1906년 복간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장지연의 복귀는 어려웠다. 때문에 주필로 혼자 남게 된 선생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황성신문이 강제 폐간될 때까지 각종의 애국적 논설을 발표하여 국민을 계몽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의 저변을 넓혀 갔다.
서북협성학교 오성학교 교장으로 민족교육 실천. 비밀결사 신민회에서 활동했다.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무단정치를 시행하면서 신민회 등 민족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통치체제의 안정을 위하여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애국적인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켰다. 그리고 선생의 저작을 비롯하여 민족혼이 담긴 간행물을 로 분류하여 그의 발행과 열람을 엄금하였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민족혼이 실린 역사서가 모두 압수, 소각됨으로써 일반 국민은 물론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긍지를 상실하지 않을까 우려하게 되었다. 선생은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어도 국혼(國魂)이 소멸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서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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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10-29 18:47
독립운동가 김약연(金躍淵)
1868년 9월 12일 ~ 1942년 10월 29일
일제강점기 간민교육회 임원, 회장, 간도 한인 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교육자.
김약연 선생은 1899년 중국 만주로 넘어간 다음 북간도 화룡현에 자리를 잡고 명동학교와 간민교육회를 설립하여 나라 없이 만주로 온 동포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북간도에서 독립선언서를 발간하였으며,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김약연(金躍淵, 1868.9.12~1942.10.29) 선생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호는 규암(圭巖)이다. 선생은 8세 때인 1875년부터 10여년 간 함북 종성 출신의 유학자들인 남종구․오삼열․주봉의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 때 선생은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품성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여러 선생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온 마을의 모범 소년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또한 이 시기 선생은 ≪맹자≫에 심취하였던 것 같다. 때문에 선생에게 글을 가르치던 스승 남종구는 “약연은 ≪맹자≫를 만독 (萬讀)해서 이제는 눈감고도 줄줄 욀 수 있으니 틀림없는 맹판(孟板)이야”하고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선생이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인해 날로 참담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고, 그 난국의 해법을 맹자의 경세론(經世論)에서 찾아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즈음의 정세는 급박하였다.
개항 이후 일제의 개항장을 통한 미곡의 대량 반출과 연연이 계속된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우리 농촌은 피폐하여 유랑민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들 유랑민들은 “앉아서 굶어 죽느니 배불리 먹기 위하여 가다 죽는다”는 각오로 월경하여 간도로 대거 이주를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85년 청나라 또한 만주족의 근거지이자 청 황실의 발상지인 만주지역에 수백년간 실시해오던 봉금령(封禁令)을 완전히 폐지하고, 두만강 이북의 길이 700리, 넓이 4․50리의 넓은 지역을 한국 이주민이 개간하여 정착할 수 있는 전간구역(專墾區域)으로 지정하였다. 따라서 이후 한인의 만주이주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댓글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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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10-29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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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10-27 15:08
(故)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1년. 그가 남긴 목소리와 철학, 그리고 음악은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며 세대를 넘어 울림을 전하고 있다.
신해철은 2014년 10월 17일 서울 모 병원에서 위장관유착박리술 수술을 받고 고열과 가슴 복부 통증을 호소한 뒤 심정지로 쓰러졌다. 이후 27일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으로 사망했다.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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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10-27 14:54
독립운동가 권준 선생(1895.5.2~1959.10.27)
항일전의 선봉에 선 정통 무장
권준 선생은 1919년 만주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과 함께 의열단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의열투쟁을 지원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전방위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였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이후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으로 중국 내의 교민사회 보호를 위해 많은 활동을 펼쳤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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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10-27 14:52
독립운동가 공백순 선생( 1919.2.4 ~ 1998.10.27)
한인자유대회, 태평양회의 참석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
신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글 게재
1942~1943 신한민보, 국민보 영자판에 한국독립에 관한 글 발표
1943 독립신문의 발기인 참가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은 지역 특성상 교민사회의 자치 및 단합을 도모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거나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에 대한 독립외교활동 등의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공백순은 미국 워싱턴, 캐나다 퀘백 등지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와 ‘태평양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는 한편, 신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글을 게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42년 2월 미국 워싱톤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여 ‘태평양전쟁에 한국인은 총동원되어 미국과 연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전후 일본의 위상에 관한 문제 등을 포함한 아시아의 재건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캐나다 퀘백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보장을 주장하였다. 그후 그는 1942~1943년 2년 동안 「신한민보(新韓民報)」·「국민보(國民報)」 영자판에 한국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고, 1943년 「독립」신문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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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10-27 14:49
독립운동가 이상정 선생
1896.6.10. ~ 1947.10.27.
교사에서 장군이 된 예술가.
1917 대구 계성학교 교사
1926 중국 국민당 펑위샹 군 참모부 활동
1937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주도
1938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교관
1942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
1945 신한민주당 창당, 흥사단 입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군에서 활동한 장군이며 해방 이후 중국에서 한인들의 귀환에 힘썼다. 유고집으로 『표박기』가 있고, 시(詩)·서(書)·화(畫)에 능하였다.
이상정 선생은 1896년 대구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대한민국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시인 이상화(1901~1966)가 둘째,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 이상백(1904~1966)은 셋째, 수렵가이자 저술가인 이상오(1905~1969)는 넷째 동생이었다.
1910년 초 이상정은 일본에 유학하여 역사학, 미술, 군사학을 배웠다. 특히 예비군사교육기관의 성격을 가진 성성중학교에서 수학한 경험은 훗날 중국군에 복무할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17년경 국내로 들어와서는 대구 계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1920년 초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광성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까지 그는 예술과 군사학을 공부한 교육자였다.
1925년 이상정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다음 해 인생의 짝인, 위대한 여성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권기옥과 결혼했다. 권기옥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조종사이자, 군인이고, 독립운동가였던 인물이다. 특히 대한민국 공군의 초석을 닦은 초창기 인물 중 한 명으로 그 위상과 업적이 대단하다.
이들 ‘부부 독립운동가’는 광복이 될 때까지 내몽고, 베이징, 상하이, 난징, 충칭 등 중국 대륙을 다니며 부부이자 동료로서 독립운동을 함께했다.
이상정은 이 시기 중국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항일전선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1926년 중국 국민당 펑위샹 군 참모부에서 근무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소장교관으로 취임하여 한중연대에 주력했다.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을 주도하여 한국독립운동 진영의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에 선임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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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10-27 14:43
독립운동가 조완구 선생(~1954.10.27)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킨 30년.
선생은 6. 25전쟁이 발발한 후 조소앙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그리고 1954년 10월 27일 ‘통일을 못보고 가는 게 한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용성에 있는 중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생은 작은 키에 몸은 수척하였지만, 강단진 조선의 선비형이었고,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30년 동안 지켜온 민족의 거인이었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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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10-26 09:18
독립운동가 김대지 선생(1891~1942.10.26)
조국의 독립이 우선이었던 민족의 지도자
김대지 선생이 그의 고향인 밀양에서 동화학원을 졸업하고 밀양에 청년회관을 건립하여 비밀결사 조직의 터전을 마련한 뒤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투쟁단체인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여 밀양지역의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전개 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
일합사는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 망국의 비애를 통감하고 국권 회복에 청춘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품은 20세 전후의 밀양 지방 청년들이 조직한 단체였습니다. 겉으로는 친목 단체이지만 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방한 항일투쟁 단체였죠.
1910년대 후반부터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중국, 만주 등지를 왕래하며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당시 선생의 활동은 2가지로 귀결됩니다. 첫째는 군자금의 확보이고 둘째는 대한광복회가 거의 와해되었기에 새로운 비밀결사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도중 1918년 5월경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출옥 후 선생은 만주로 망명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전념하는데 당시는 3.1운동 직전이라 일제의 감시가 절정이었고 선생 역시 주요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망명 전 선생은 전 재산을 처분하여 비축한 자금과 일부 친지들의 의연금을 가지고 떠나게 되는데 아직 어린 두 남매, 임신 중인 부인, 그동안 뜻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대화도 못해본 채 야밤에 해외 망명길에 오르게됩니다.
1919년 3월 말. 독립운동자 대표의 일원으로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이회영 등의 애국지사들과 임시정부 수립 준비를 위해 상해로 건너갔는데 이 무렵 상해에는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하여 그 숫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임시정부에서 선생은 조사원 자격으로 고향인 밀양에 파견되었는데 임시정부는 교통국과 연통제라는 비밀조직망을 활용하여 국내와 비밀연락을 주고 받았고 군자금을 지원받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주로 이 곳을 통해 임시정부는 군자금을 받았고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밀명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죠.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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