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빗소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자신을 높여 가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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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g16890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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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9-07 08:37
독립운동가 안무 선생(1883. 6. 29 ~ 1924. 9. 7) 서거
봉오동 청산리 전투 승리에 빛나는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안무 장군은 경성지역의 무인집안 출신이신데, 대한제국의 군인이었습니다. 군인이 된 후 주된 보직은 국경 지대에서 군사 훈련을 담당하는 교관으로 근무하였고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함경북도 지방에서 체육 교사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3년 뒤 국권이 피탈되자 이를 계기로 북간도로 망명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듭니다.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안무 장군에게 조국으로부터 3.1 만세운동시위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를 계기로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국민회군' 사령관으로 취임하게됩니다. 과거 교관시절의 경험을 살려 국민회군의 훈련을 맡았으며 독립군의 양성과 세력확장에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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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9-02 13:24

독립운동가 황상규 선생 (~1931.9.2) 서거
1919년 2월 중국 길림에서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11월 그 실행기관으로 의열단을 조직하고 조선총독부 등을 폭파하려다 체포되어 7년 간 옥고를 치렀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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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8-31 14:26

새로운 길
윤동주 / 시인, 독립운동가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년 5월 10일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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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8-31 11:08
인간 세상에 떠다니는 허영의 먼지를 초월해
강철같은 신념을 갖고 하루 또 하루 세월을 반복하면서
꿋꿋이 살아간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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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8-31 10:48
"자기가 빛이 되면 어디에 있다고 해도
이 세상에 어둠은 없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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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8-31 09:48

독립운동가 이종일 선생(1858.11.6~1925.8.31)
3.1독립선언문을 낭독하다.
오늘에 이르러 봉건의식을 벗어나 ‘신촌정신’을 특별히 강조하는 뜻은 먼저 ‘정신을 개조’하고 그 다음에 물질의 풍요가 뒤따라야 되기 때문이다.
- 선생의 비망록 中 -
이종일 선생은 어려서부터 두뇌가 영특하여 신동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며 사서삼경을 공부했던 선생은 16세에 부모님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1882년 선생은 박영효 수신사의 사절단 멤버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쇄국정책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여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일본의 개화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선생은 유교사상만 고집하는 기존의 태도에서 벗어나 실학과 개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실제로 독립신문에 개화의식에 관한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습니다.
1898년 3월, 동료들의 만장일치로 개화사상을 알리는 '대한제국민력회' 를 조직하여 1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재밌다고 생각되는 점은, 이때 선생은 중추원 의관에 임명이 됐는데 급제를 한 오늘날로 따지면 고시를 패스해서 고위공무원이 된 사람이 공권력과 어찌보면 정 반대되는 활동을 같이 하고 있던 것이죠. 실제로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철학과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거의 같이 전파가 되니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종일 선생의 이런 혁신적인 태도가 3.1독립선언문을 낭독하게 되는 모습까지 이어진다고 봅니다.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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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8-29 21:2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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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8-29 18:53
경술국치일 8.29.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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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8-29 18:42

독립운동가 홍범식 선생(1871.7.23~1910.8.29) 서거
경술국치 당일, 순국의 길을 택하다
홍범식 선생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 집안의 자제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후기 정조대왕의 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집안이였죠. 조선후기 대표적인 명문가 집안으로서,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의 교리였던 성리학을 공부하던 학자였기에 선생은 충효와 의리를 최고의 덕목이자 신념으로 살았습니다.
17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34살이 되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체결소식에 비분강개하게됩니다. 그러던 도중 선생은 태인군수로 임명이 되었으며 의병부대를 진압하러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모든 것을 다해 설득하고 막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태인군에 있던 무고한 백성들까지도 일본군 수비대가 학살과 폭력을 일삼았기에 피해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군수로 재직하면서 이러한 그의 노력에 감동한 지역 주민들은 마을마다 선생을 기리는 비를 세웠고 그 수가 무려 38개에 이르게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홍범식 선생의 인품과 성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발생한 사건,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국권을 상실하게됩니다.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한가지는 친일파 이완용과 밀접한 관련이있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아 잘 모르실겁니다. 1909년 12월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 처단 작전을 실행하였고 안타깝게도 칼에 맞은 이완용은 살아나게 됩니다. 미수 사건으로 그쳐버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친일단체였던 일진회를 통해 마치 우리나라가 한일병합을 원한다. 우리는 일본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청원서와 성명서를 발표하게 합니다.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주장하는 한국은 식민지시대를 통해 발전할 수 있었다는 말도안되는 논리는 바로 여기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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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2025-08-22 08:47
독립운동가 남자현 선생(1872.12.7~1933.8.22)
효부, 열녀, 열사 등 지조와 도덕•예지와 의용이 만인의 귀감이 될만한 여사.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남자현 선생은 영화에서 배우 전지현씨가 맡은 역할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실존인물이기에 더욱 이슈가 되었던 남자현 열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선생은 7세에 국문에 능통하였고 소학과 대학을 통달하였다 합니다. 19세가 되던 무렵 김영주에게 시집을 가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일본의 만행이 점점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영주는 부인 남자현 열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집을 나간 후 영양군 지역 의병장이었던 김도현 선생과 함께 왜군과 전투 중 전사합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선생은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어린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수 없어 직접 명주를 짜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1919년, 시간이 흘러 남자현 선생이 46세가 되던 무렵, 전국에서 일어나는 3.1만세 운동을 따라 이제야 남편의 원수를 갚을 때가 왔다고 판단한 선생은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있는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일하며 북만주 일대에 12개의 교회를 건립하였고 여성계몽운동에 힘써 10여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였고 여성의 권리 신장과 자질향상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서로군정서에서의 생활이 어느덧 6년이 지날 무렵, 선생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927년 봄, 안창호 선생이 독립운동가들과 망명해있는 조선인들 500명을 모아 나석주 의사의 추도회 및 미래의 조국을 위한 강연회를 열자 일본은 중국 헌병사령관을 협박하여 안창호, 김동삼 선생 등 3백 명을 강제, 불법 체포하였습니다. 이때 남자현 열사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으며 끊임없이 탄원서를 넣어 결국 보석으로 풀려나게 한 공이 있습니다.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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