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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빗소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자신을 높여 가면 되는 것!
  • 41
  • 태양을품은달°˚(@g168906100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12 23:36


    산양면~~

    댓글 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12 14:20








    문경의 산양면 화수헌 카페에서 ~~

    반려견 동반 카페임에도 이제야 알았다니 ㅡㅡ
    다음에 새로운 강쥐와 오기를 기약하며....

    댓글 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12 13:51


    독립운동가 양세봉 선생(1896.6.5~1934.8.12) 서거

    친애하는 동지들, 이번 전투는 동포 동지들의 생사를 담판하는 결전입니다.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중략) 조국광복군과 동만 백만동포들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일당백의 용감한 정신과 아울러 이번 전투에 승리의 믿음을 선포합니다. - 1932년 양세봉 장군 연설문 中 -

    양세봉 선생은 어려서부터 가정이 매우 어려워 남의 집에서 끼니를 때우며 살았습니다. 이 시기에 일본의 침략행위가 선량한 주민들까지 괴롭히고 온갖 더러운 행동을 자행하는 것을 보며 어쩌면 어린 나이부터 선생의 가슴속에는 피끓는 항일 의식이 싹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에 의하면,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처단하였을때 안중근 의사의 기개에 존경심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때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것도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1920년대의 선생의 기록은 천마산대에 가입하여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인데 비폭력운동에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바뀐점에서 의식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천마산대는 1920년 12월 청장년 500여 명으로 조직한 무장독립군으로서 재래식 무기인 화승총 및 적에게 빼앗은 무기로 무장하고 도내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의 주재소,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일제의 밀정과 경찰들을 처단하는 등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젊은시절의 경험을 통해 훗날 선생은 참의부 소속의 소대장으로 임명이 되었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한 만주 쪽 강변 절벽에 정예병을 배치하고 사이토가 압록강 경비선을 타고 지나갈 때 저격을 지휘했습니다.
    경비선이 다가오자 사격이 시작되었으나, 의외로 사거리가 너무 멀었고, 경비선은 빗발치는 탄환을 피해 전속력으로 도주했죠. 결국 조선 총독 처단이라는 큰 일은 시도로 그쳤지만, 한국 독립군의 정보력과 실행력으로 일본의 간담을 철렁 내려앉게 한 당시 위대한 작전이었습니다.

    댓글 9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11 18:58




    독립운동가 김한종 선생(1883.1.14~1921.8.11) 서거

    일본 헌병경찰들의 눈길 피해 모았던 피 같은 독립군 자금

    우리 4천년 종사는 회진(灰塵)되고 우리 2천만 민족은 노예가 되었다. 섬오랑캐(島夷:일제)의 악정폭행(惡政暴行)은 일가월증(日加月增)하니 이것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끓어올라 조국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念)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소이(所以)이니, 각 동포는 그 지닌 바 능력을 다해 이것을 돕고, 앞으로 본회의 의기(義旗)가 동쪽에 오를 것을 기대하라.


    김한종 선생은 충효의 전통을 지닌 사대부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아버지인 김재정 의사는 의병장 민종식의 휘하에서 활약해 홍주성 공략에 큰 공을 세운 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충효사상을 중요시하게 자란 선생은 서구열강들과 일제의 침탈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아버지와 아들 둘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거나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런 경우입니다.
    1906년 5월, 의병들이 활약으로 홍주성을 되찾았을때, 김한종 선생과 그의 아버지 김재정선생은 함께 홍주 의병에 참여하여 전투를 벌였습니다. 비록 일본군에게 홍주의병은 패하고 말았지만, 선생은 당시 의병장들을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며 훗날을 기약하였고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이후부터 충청도 지역에서 나라를 회복하는 운동을 다시 시작합니다.
    조선총독이 부여지방을 시찰한다는 정보를 들은 선생은 동료들과 함께 총독암살 작전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무단 가택 수색으로 인해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박상진. 대한광복회의 조직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던 독립운동가입니다. 박상진 선생의 권유로 김한종 선생은 1917년 혁명적인 비밀결사 조직인 '대한광복회'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충청도 지역 지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선생은 박상진, 채기중 선생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이끌어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선생의 활약은 이때부터 두드러지는데 김한종 선생은 충청도 지부를 홍성,예산,천안,아산 등에 설치하였고 친척들을 포함한 과거 의병 동지들을 모아 대한광복회 조직을 확대해 나아갔으며 우선적으로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활동을 합니다.

    댓글 3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9 03:01


    태양 아래에서는 달을 볼 수 없고
    빛이 있는 곳에서는 별을 볼 수 없듯이.

    좋은 마음이 없으면
    좋은 게 보이지 않고
    선한 마음이 없으면
    따뜻함을 느낄 수 없어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시선에서만 머물고
    보이는 것만 느껴서

    수많은 아름다움과
    셀 수 없이 행복한 순간을 놓치고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어제를 버텨낸 오늘의 대견한 나와
    출근길에 뜨는 해의 아름다움
    그런저런 점심을 애써 챙겨 먹는 나와
    퇴근 후에 바라본 노을의 따스함
    그런 하루에서 문득 찾아오는 행복들을.

    너무 슬픈 것들만 보고 사는 건 아닐까요.
    너무 힘든 것들만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요.

    매일이 아름다운 것 투성이인 세상.
    해질녘 보랏빛의 낭만적인 하늘과
    하늘을 붉게 만드는 노을,
    밤이 되면 수놓아지는 하늘의 별과 새초롬한 달까지.

    세상은 보기 나름이에요.

    그러니 한없이 예쁜 당신.
    예쁜 것만 보고 살아요.

    별과 같은
    달과 같은

    책 《작은 별이지만 빛나고 있어 》중 에서

    댓글 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9 02:56


    아름다운 무관심

    어느 때는 그냥 두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힘들어하는 것의
    많은 부분은 그사람의 관심
    이라는 간섭 때문입니다

    혼자서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혼자서도 외로움의 아름다움
    고난을 통한 아름다움이
    얼마나 빛나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혼자서 성장하면서
    스스로 깨닫습니다
    어느 것이 좋은지 어떻게
    나 홀로 재밋게 살아 가야 할지
    다 알게 됩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자라고
    열매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저 따스한 햇살로 맑은 공기로
    먼 발치에서 넌지시 지텨봐
    주십시오.

    사랑이란
    일으켜 세워주고 붙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 자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댓글 1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9 01:41


    아주 오래전에 끄적거렸던 글을... 우연찮게 발견....

    방송하던 어떤 CJ 가 했던 말도 적어 놨네. ㅎ

    음악은 기다림에 대해 노래? ㅎㅎ

    또 다른 CJ 왈
    고수?는 감성을 자극하는 곡으로........작업한다고 ,,,,,,,,..
    기억은 소리부터 사라져 간다...며...

    지금 생각해 보니...그들의 단순한 말도..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고 여겨지네.

    댓글 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8 14:31


    독립운동가 김홍일 선생(1898.9.23~1980.8.8) 서거

    러시아와 만주를 넘나들며 독립군을 이끌다.



    오산학교 졸업 후 독립운동 위해 상해로 망명한후 독립군에 합류, 병사들을 이끌고 시베리아행을 감행하였다.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필요한 탄약을 제공했고 중국인 상차도와 함께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에 사용된 폭탄을 직접 제조하였다. 훗날 김구 주석의 요청으로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취임했다. 1945년 6월 1일 광복군 참모장에 부임한 뒤, 선생은 김구 주석과 지청천사령관을 도와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진행되던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에 힘을 쏟았다. 이는 미국전략정보국의 지원 아래 광복군 요원을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국내에 투입시켜 적정을 탐지하고 공작 거점을 확보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 계획은 광복군 요원들이 OSS 교육훈련을 마치고 국내 침투를 기다리던 중 일제가 항복함에 따라 실현되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 선생은 다시 중국군에 복귀하게 되었다. 선생은 1945년 11월 동북보안사령부 고급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에 취임하여 재만 한인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면서 귀국 편의를 도모하는데 앞장섰다. 1948년 8월 귀국한 뒤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선생은 육군사관학교와 육군참모학교 교장,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육군 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고 1951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 후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 신민당 당수 등으로 활약하면서 조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에도 기여하다가 1980년 8월 8일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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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7 11:56






    산화하신 고운 님들의 아이들은 어디 있나?
    - 권영심 작가 -

    목숨은 누구에게나 하나뿐이다.
    그 하나 뿐인 목숨을 일 점의 후회없이 대의 , 조국 광복을 위해 던진 독립의 투사,의사,열사들의 은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아야 한다. 목숨의 값을 무엇으로 치룰 수 있을까?

    남은 가족들은 그 목숨의 값을 나라로부터 받았을까?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의 삶은 참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들의 후손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윤봉길 의사의 후손은 누구며 어찌 되었는지 알아 본다.

    윤봉길의사는 15세 때 배용순여사와 혼인해서 종과 담의 형제를 낳았다. 그러나 의거 후 둘째인 담은,겨우 두 살에 영양실조로 죽고 장남 종만 살아서 광복 후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
    농수산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1984 년 간경화로 하늘로 돌아갔다.

    윤의사 의거 50주년이 되던 해, 배용순 여사에게 국민훈장 목련장이 주어졌고 이후 윤봉길 기념 사업회는 '배용순효부상' 을 제정하여 의거일인 4월 29일에 충의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배용순 여사는 1988년 타계했고 그 장례는 사회장으로 성대하고 위엄있게 치루어졌다. 그나마 정부의 기본 도리는 했다고 본다.

    윤의사의 며느리는 단 하나. 김옥남 여사이다. 아들 하나와 딸 여섯을 낳아 병약한 남편과 함께 가정을 이루었다. 공무원의 능력이 오죽했을까? 생활이 너무나 곤궁했다.

    백범 김구선생의 아들인 김신씨가 교통부 장관 재직 시절, 딱한 사정을 전해 듣고 김포공항 한 쪽에 작은 스넥 가게를 내어 가세를 돕도록 주선해 주었다.

    윤의사의 여섯 명의 손녀들은 잘 자라서 모두 결혼, 가정을 이루 었고 유일한 손자 주웅씨는 고려대 기계 공학과를 졸업해서 1997년 결혼했다. 아들 한 명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윤의사와 배여사 사이에 안순이란 따님이 있었으나 아마 어려서 사망한듯 하다.

    다행히도 윤봉길의사의 가족은 이 대한민국의 품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그저 감사함으로 가슴을 쓸어 내린다. 매헌 장학재단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기념사업회도 가족끼리의 어떤 분란도 없이 잘 꾸려지고 있으니 이 또한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댓글 5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8-0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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