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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빗소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자신을 높여 가면 되는 것!
  • 41
  • 태양을품은달°˚(@g168906100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7 15:08


    (故)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1년. 그가 남긴 목소리와 철학, 그리고 음악은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며 세대를 넘어 울림을 전하고 있다.

    신해철은 2014년 10월 17일 서울 모 병원에서 위장관유착박리술 수술을 받고 고열과 가슴 복부 통증을 호소한 뒤 심정지로 쓰러졌다. 이후 27일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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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7 14:54


    독립운동가 권준 선생(1895.5.2~1959.10.27)

    항일전의 선봉에 선 정통 무장

    권준 선생은 1919년 만주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과 함께 의열단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의열투쟁을 지원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전방위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였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이후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으로 중국 내의 교민사회 보호를 위해 많은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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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7 14:52


    독립운동가 공백순 선생( 1919.2.4 ~ 1998.10.27)

    한인자유대회, 태평양회의 참석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

    신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글 게재
    1942~1943 신한민보, 국민보 영자판에 한국독립에 관한 글 발표

    1943 독립신문의 발기인 참가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은 지역 특성상 교민사회의 자치 및 단합을 도모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거나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에 대한 독립외교활동 등의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공백순은 미국 워싱턴, 캐나다 퀘백 등지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와 ‘태평양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는 한편, 신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글을 게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42년 2월 미국 워싱톤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여 ‘태평양전쟁에 한국인은 총동원되어 미국과 연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전후 일본의 위상에 관한 문제 등을 포함한 아시아의 재건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캐나다 퀘백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보장을 주장하였다. 그후 그는 1942~1943년 2년 동안 「신한민보(新韓民報)」·「국민보(國民報)」 영자판에 한국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고, 1943년 「독립」신문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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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7 14:49


    독립운동가 이상정 선생
    1896.6.10. ~ 1947.10.27.

    교사에서 장군이 된 예술가.

    1917 대구 계성학교 교사
    1926 중국 국민당 펑위샹 군 참모부 활동
    1937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주도
    1938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교관
    1942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
    1945 신한민주당 창당, 흥사단 입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군에서 활동한 장군이며 해방 이후 중국에서 한인들의 귀환에 힘썼다. 유고집으로 『표박기』가 있고, 시(詩)·서(書)·화(畫)에 능하였다.

    이상정 선생은 1896년 대구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대한민국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시인 이상화(1901~1966)가 둘째,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 이상백(1904~1966)은 셋째, 수렵가이자 저술가인 이상오(1905~1969)는 넷째 동생이었다.

    1910년 초 이상정은 일본에 유학하여 역사학, 미술, 군사학을 배웠다. 특히 예비군사교육기관의 성격을 가진 성성중학교에서 수학한 경험은 훗날 중국군에 복무할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17년경 국내로 들어와서는 대구 계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1920년 초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광성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까지 그는 예술과 군사학을 공부한 교육자였다.

    1925년 이상정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다음 해 인생의 짝인, 위대한 여성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권기옥과 결혼했다. 권기옥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조종사이자, 군인이고, 독립운동가였던 인물이다. 특히 대한민국 공군의 초석을 닦은 초창기 인물 중 한 명으로 그 위상과 업적이 대단하다.

    이들 ‘부부 독립운동가’는 광복이 될 때까지 내몽고, 베이징, 상하이, 난징, 충칭 등 중국 대륙을 다니며 부부이자 동료로서 독립운동을 함께했다.

    이상정은 이 시기 중국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항일전선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1926년 중국 국민당 펑위샹 군 참모부에서 근무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소장교관으로 취임하여 한중연대에 주력했다.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을 주도하여 한국독립운동 진영의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에 선임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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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7 14:43


    독립운동가 조완구 선생(~1954.10.27)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킨 30년.

    선생은 6. 25전쟁이 발발한 후 조소앙 등과 함께 납북되었다. 그리고 1954년 10월 27일 ‘통일을 못보고 가는 게 한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용성에 있는 중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생은 작은 키에 몸은 수척하였지만, 강단진 조선의 선비형이었고,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30년 동안 지켜온 민족의 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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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6 09:18


    독립운동가 김대지 선생(1891~1942.10.26)

    조국의 독립이 우선이었던 민족의 지도자

    김대지 선생이 그의 고향인 밀양에서 동화학원을 졸업하고 밀양에 청년회관을 건립하여 비밀결사 조직의 터전을 마련한 뒤 이곳을 중심으로 항일투쟁단체인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여 밀양지역의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전개 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

    일합사는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 망국의 비애를 통감하고 국권 회복에 청춘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품은 20세 전후의 밀양 지방 청년들이 조직한 단체였습니다. 겉으로는 친목 단체이지만 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방한 항일투쟁 단체였죠.

    1910년대 후반부터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중국, 만주 등지를 왕래하며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당시 선생의 활동은 2가지로 귀결됩니다. 첫째는 군자금의 확보이고 둘째는 대한광복회가 거의 와해되었기에 새로운 비밀결사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도중 1918년 5월경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출옥 후 선생은 만주로 망명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전념하는데 당시는 3.1운동 직전이라 일제의 감시가 절정이었고 선생 역시 주요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망명 전 선생은 전 재산을 처분하여 비축한 자금과 일부 친지들의 의연금을 가지고 떠나게 되는데 아직 어린 두 남매, 임신 중인 부인, 그동안 뜻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대화도 못해본 채 야밤에 해외 망명길에 오르게됩니다.

    1919년 3월 말. 독립운동자 대표의 일원으로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이회영 등의 애국지사들과 임시정부 수립 준비를 위해 상해로 건너갔는데 이 무렵 상해에는 각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하여 그 숫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임시정부에서 선생은 조사원 자격으로 고향인 밀양에 파견되었는데 임시정부는 교통국과 연통제라는 비밀조직망을 활용하여 국내와 비밀연락을 주고 받았고 군자금을 지원받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주로 이 곳을 통해 임시정부는 군자금을 받았고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밀명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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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5 13:45
    독도의 날 (10.25)

    * 대한제국칙령 제41호를 기념하고, 일본의 영유권 야욕으로부터 독도 수호 의지 표명 및 대내외적으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천명하기 위하여 제정한 날이다. 매년 10월 25일이다.


    1900년 10월 25일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칙령 제41호에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명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한 날로, 10월 25일이다. 독도의 날 제정은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널리 알리고 강력한 독도수호 의지를 세계 각국에 드러내기 위해 이뤄졌다. 독도는 울 릉도에서 동남쪽으로 90 km 해상에 위치한 화산섬으로, 행정구역상 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96번지'이다.



    2000년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 가 독도의 날을 지정하고 2005년부터 국가기념일 제정을 위하여 서명운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2008년 8월 27일 '독도의 날 제정을 위한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고, 2010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이 16개 시·도 교총, 우리역사교육연구회, 한국청소년연맹, 독도학회와의 공동 주최로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전국 단위의 독도의 날을 선포하였다.



    한편, 경상북도 의회는 2005년 6월 9일 독도의 달 조례안을 가결하여 매년 10월을 독도의 달로 정하였다. 그리고 2012년 10월 28일 당시 국토해양부는 국가지명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동도의 봉우리를 우산봉으로, 서도의 봉우리를 대한봉이라 명명하였고, 바위로 분류되던 것은 탕건봉으로 재분류해 독도는 3개의 봉우리를 가진 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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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5 12:03


    독립운동가 홍범도 선생(1868.8.27~1943.10.25)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여천(汝千)이다. 선생은 매우 어렵게 성장하였다.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고, 또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선생은 작은 아버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다가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1895년 8월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기상통하여 봉기한 뒤, 경기, 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이동한 뒤, 여기에서 12명의 동지를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안변의 석왕사에 주둔하면서 1896년 8월 북천지계(北遷之計)에 따라 북상하던 유인석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세 번의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서 김수협은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선생 혼자 남게 되었다. 때문에 이후 선생은 1897년까지 평남과 함남, 그리고 황해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을 살상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는 등 단독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함남 북청에 정착하여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사에 종사하였다. 특히 이 때 선생은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포연대를 주축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포수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한편 망국적 상황에서 포수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1907년 9월 3일 제정 공포된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의 강제 시행이었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무기와 탄약 및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정부와 관청에서 거두어들이고, 그 위반자를 처벌하도록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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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2 21:56


    영월 청령포 관음송은 강원 영월군 남면 광천리 청령포에 있는 수령 600년 추정 소나무로, 1988년 4월 30일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5m이며 지상 1.2m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자랍니다.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각각 3.3m와 2.95m입니다.
    수관 폭은 동서 23.3m, 남북 20m입니다.


    ‘관음송’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관(觀)’하고 슬픈 말소리를 ‘음(音)’ 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이 이름은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로 보인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청령포는 세조 2년(1456) 단종이 유배된 곳으로, 단종이 갈라진 줄기에 걸터앉아 지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껍질이 검게 변해 변고를 알렸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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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2 21:50


    영월 청령포 들어가기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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