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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빗소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자신을 높여 가면 되는 것!
  • 41
  • 태양을품은달°˚(@g168906100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9-20 10:23


    독립운동가 김학규 선생(1900.11.24~1967.9.20) 서거

    광복군의 제3지대장으로 대일전선 최전방을 지휘한 장군

    김학규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 후 조선의용대의 소대장을 거쳐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인 양세봉 장군의 참모장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후 조선혁명당을 대표하여 한국독립당 대표와 협의, 당 통합을 추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곽단체로써 조직 기능을 강화하도록 노력하였고,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항일항쟁의 선봉에 서서 군을 지휘하였다. 또한 광복 이후에는 중국에 있는 한인들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며 1만 2천 명이 넘는 한인들을 무사히 고국으로 귀환시키도록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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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9-17 05:29


    김알렉산드라 선생 서거

    본명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1885~1918

    제정 러시아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이며, 한국 독립운동가이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꼽힌다. 그녀는 한국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굉장히 이른 시간대에 활동하였다. 고려인 거주지 중 하나였던 시넬니코보에서 태어난 이후 아버지 김두수와 함께 러시아에 이민을 갔는데,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돌아가자 10살의 나이로 따라갔다가 아버지가 사망한다.
    이후 아버지의 러시아인 친구였던 표트르 스탄케비치라는 사람에게 입양되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한 후 교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라면 평범한 한인의 삶이었겠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게 된 그녀는 결국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이혼하게 된다. 그리고 우랄 산맥 일대로 이주했는데, 1916년에 한 정당에 가입하게 된다. 이 정당이 다름 아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다.이 이후의 행보도 비범하기 짝이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블라디미르 레닌과 협력 관계가 된 그녀는 동아시아 지역으로 떠나게 된다. 먼저 독일의 밀정으로 오해받아 체포되어 있던 독립운동가 이동휘를 구명운동으로 석방한 그녀는 김립,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게 되는데 그게 1918년이다. 이때의 직위는 무려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인민위원". 비록 짧은 시간 존속했던 조직이었지만, 그녀는 한국계 최초의 외국 장관이다. 볼셰비키 측에서 "인터내셔널리스트"로 분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볼셰비키당 하바롭스크 시위원회 사무국원(일부 국내 기록에서는 책임 비서라고도 한다..)이었는데, 소비에트 러시아의 특성을 볼 때 김알렉산드라가 정말로 시위원회 사무국장, 책임 비서(서기장)였다면 하바롭스크시 시장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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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9-17 05:08


    독립운동가 심훈 선생 (1901.9.12 ~ 1936.9.16) 서거


    어머님!
    우리가 천번 만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민족독립)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누구나 맹세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기에 나이 어린 저까지도 이러한 고초를 그다지 괴로워하여 하소연해 본 적이 없습니다.

    - 선생이 어머님에게 올린 옥중편지 중에서(1919)

    흔히 심훈 선생은 「상록수」의 작가, 「그날이 오면」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선생은 거기에 더하여 열혈 독립운동가였고,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에 대한 열정을 자신의 소설과 시로 표출한 항일 문학운동가이기도 하였다.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금강생(金剛生), 백랑(白浪) 등이 있다
    선생의 원래 이름은 대섭(大燮)이나, 훈(熏)이란 필명이 널리 알려졌다. 훈이란 이름은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할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계속 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막내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양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났다. 남달리 머리가 영민하였기 때문에 부모를 비롯한 주위의 기대 또한 매우 컸다. 선생의 성장과정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1915년 서울 교동(校洞)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당시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들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합격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철기 이범석이 재학하고 있었고, 같이 입학한 동기생들로는 동요 「반달」의 작가 윤극영,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로 이름 높은 박열,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가로 유명한 박헌영 등이 있었다. 감수성이 누구보다 예민했던 선생이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하에서 이들과 같이 학창생활을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학창생활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이들과 더불어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수탈에 분노하면서 항일 독립운동 의지를 굳혀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생은 20세기 첫 해인 1901년 9월 12일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에서 출생하였다.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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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9-15 09:34


    독립운동가 양근환 선생(1894.5.9~1950.9.15) 서거

    국민협회를 만들어 반민족적 친일행위를 일삼던
    민원식을 처단하다.

    “나는 학문도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론으로 일본인에게는 지지 않는다. 일본 사람은 조선 사람 중에는 조선독립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불찬성하는 사람도 있는 줄로 생각하지만 어찌 그럴 리가 있으랴. 조국의 독립은 누구든지 희망하는 것이다. 헌병 제도가 변하여 순사 제도가 되고 무단정치가 문화정치가 되는 것은, 결국 별 차이 없는 것이다. 조선독립을 일본 사람도 자기 일같이 생각하여 주기를 바란다.”

    - 1921년 민원식 척살에 성공한 뒤 도쿄로
    압송되는 도중 경관에게 남긴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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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9-15 09:30


    독립운동가 오성술 선생(1884.5.15~1910.9.15) 서거

    "호남 벌판 지킨 의병장"

    독립운동가 오성술 선생은 호남 벌판을 지켰던 의병장으로 유명합니다.
    어릴적 오성술 선생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는 공무원의 신념, 지식인의 자세, 매국대신들의 처단을 요구하며 의병항쟁을 주창하는 모습에 감동받아 최익현 선생을 존경하며 선생의 강론에 참석하였습니다. 최익현 선생의 강론이 끝났을때 오성술 선생은 의병부대를 만드는 의사를 밝혔고 최익현 선생은 매우 대견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합니다.
    “나는 이미 늙은 몸, 그대와 같은 열혈 청년들이 나서겠다니 마음 든든하네. 천하대세와 국세민계(國勢民計)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일사보국(一死報國)할 기회가 온 것 아니겠는가. 한시도 지체하지 말기 바란다.”
    강회 참석 후 귀향한 선생은 곧 바로 의병부대의 창립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손자병법같은 병서를 탐독하며 병법을 익히고,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신분의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되는 이유는 독립운동에 귀천이 어디있으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남자와 여자를 왜 구별해야하며, 나라를 지키는데 신분이 왜 중요하냐는 정신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그러던 중, 1906년 6월 최익현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부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의병항쟁의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는데 이때 선생이 아버지에게한 말이 역사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버지, 국가흥망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소자 비록 백면서생이오나 혈기방장하온데 썩은 선비들처럼 글만 읽고 앉아 있겠습니까. 면암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국적(國賊)을 몰아내고자 하오니 의병부대 창립에 필요한 자금을 승낙해 주십시오.”
    부친은 선생의 뜻에 감화되었고 전적으로 찬성하여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선생은 이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동지규합에 나섰다. 드디어 1907년 2월 선생은 격문을 띄우고 거의함으로써 구국 의병항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수학하던 용진산을 근거지로 하여 2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의진을 편성한 것이다.
    선생은 독립 의병부대를 이끌면서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침투하여 경제침탈에 앞장선 일본인 소유의 농장을 우선적으로 공격하였다.

    댓글 5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9-14 16:21


    노여움(화) 이 많아진다?

    -------- > 그럼 늙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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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9-14 10:03


    독립운동가 최팔용 선생(1891.7.13~1922.9.14) 서거

    2.8 독립선언을 이끌다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 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멸망의 길을 걷던 폴란드는 지금 독립이 되고, 이에 반해서 천하에 위엄을 자랑하던 러시아 제국은 지금 망하지 않았는가?”

    -1918. 4. 13 동경 YMCA 강연회에서 선생의 웅변 중-

    댓글 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9-14 04:01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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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9-12 09:26


    독립운동가 후세 다쓰지(후세 다츠지)

    1880년 11월 13일 ~ 1953년 9월 12일

    국적: 일본

    직업: 검사-> 인권변호사 -> 사회 운동가

    특징: 2004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최초의 일본인 독립운동가이자 유공 수훈자)

    한국 정부가 건국 훈장을 수여한 후세 다쓰지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일본의 조선인 토지 강탈에 대항해 한국인을 변호했으며,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서 발표 후 체포된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을 대변했다. 또 '조선독립운동에 대해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로 세상에 3·1 운동 소식을 알렸고,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후 일본의 한국인 학살사건의 보고서를 작성해 이를 막지 못한 참회의 글을 남겼다.
    어릴 적부터 묵자의 겸애 사상을 접하게 된 이 아이는 신학교에 들어간다.
    1880년대 동학농민운동 이후 운동을 진압하러 갔다가 돌아온 귀향 군인들이

    “일본도를 한번 날리니, 조선인 두 놈의 목이 동시에 떨어졌다”는 ‘무용담’을 들으며 그는 처음으로 조선인에 대해 동정과 연민의 정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 후 처음으로 도쿄의 메이지 법률학교(오늘날 메이지 법대의 전신)에서 조선인 친구를 만나 그들과 어울리며 조선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책을 사랑했으며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우쓰노미야 지검 검사로 부임한다. 그러나, 검사로 활동하던 어느 날 그는 가난한 생활고로 인해 어머니와 아들이 동반 자 살을 시도한 비극적인 사건을 맡게 되는데, 이 사건의 결과 아들은 죽고 어머니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살인미수로 기소하여 무기징역에 처하게 하라는 검찰의 압박에 법률의 미비함과 법 윤리, 법 도덕의 철학적 갈등 속에서 검사직을 벗고 그때부터 인권변호사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검사로서는 도저히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 없다는 자각이 컸다.
    그는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역사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훗날 조선의 후손들에게 최초로 일본인 독립운동가로 선정되는 명예를 부여 받는다. 그의 이름은 후세 다쓰지다.

    댓글 25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09-12 09:12


    독립운동가 나철 선생(1863.12.2~1916.9.12) 서거

    "민족 기개가 꺾일 순 없다." 항일 근거지 대종교 창시
    조선 독립 촉구하며 도쿄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항쟁, 매국 5적 처단 추진하다 10년 유형

    나철 선생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료의 길을 걸어갔으나 일제의 침략 야욕에 항의하여 사표를 던졌다. 경술국치 후에 민족 정기를 수호하기 위해 단군 신앙인 대종교를 창시하였다. 총본사를 백두산 아래 화룡현 청파호에 두고 애국 지사들을 길러냈다. 청산리전투를 주도한 서일 김좌진과 박은식 김규식 등 수많은 애국 열사들이 대종교의 토양 위에서 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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