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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빗소리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자신을 높여 가면 되는 것!
  • 41
  • 태양을품은달°˚(@g1689061000)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21 22:42


    성수대교 붕괴(199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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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1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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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19 00:41
    여순사태(여수·순천 10·19사건)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또는 여순 사건(麗順事件)은 1948년 10월 19일은 이승만 대통령이 10월 27일까지 당시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을 중심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무장 반란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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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18 09:57


    독립운동가 차희식 선생(~1939.10.18)

    화성 지역의 민중 3.1 운동을 주도하다


    "지금부터, 일본경찰서를 파괴하고 일본 순사를 처단한다!"


    경기도 화성의 우정, 장안면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에서 행동대장으로 운동을 주도한 선생은 주민들과 함께 일제 탄압의 저항으로 면사무소와 경찰서주재소를 파괴하고 일 순사를 처단하였다.

    차희식 선생이 생활했던 화성지역은 동학과 기독교가 전파되어 민족의식이 강했던 지역입니다. 특히 동학이 천도교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지역 주민들의 독립의지와 자주의식이 매우 높았던 곳이죠. 선생은 이곳에서 3.1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고 그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5년 형을 선고 받은 뒤 서대문 형무소에서 온갖 고문과 악형에 시달리다 출옥하였습니다.

    여기서 잠시 선생의 3.1운동을 살펴보기 전에 당시 화성지역의 큰 문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10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우리 농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토지를 말 그대로 빼앗기게 되었고 갑자기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갈 곳도 없이 그저 농촌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렇게 머무르게 된 농민들을 송충이를 잡는데 동원시키고 바닷가 간척공사 작업에 강제로 동원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전통적으로 수원지역에 잘 정착되어있던 농업기반 시설을 식민 정책 기구인 권업모범장을 설치하며 곡물 종자를 강제로 바꿔버리고 생산과정을 간섭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동척농장이 설치되며 일본인 지주들이 대거 이주하여 혜택을 받고 이곳에 원래 거주하던 우리 농민들은 그들의 노예가 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열악한 소작농의 처지에 강제 불법동원, 설상가상으로 화성지역에서 일본인 지주들은 염업을 벌였고 염세를 엄청나게 부여하여 주민들의 수탈이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3.1 만세시위운동. 당연히 이 지역의 주민들은 그 어느 곳보다 격렬하게 3.1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전개력은 천도교. 기독교. 유교의 서로 다른 종교가 하나가 되어 태극기를 들고 달려들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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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18 09:53


    독립운동가 조만식 선생(1883.2.1~1950.10.18)

    물산장려운동부터 신간회 결성까지

    선생은 민족의 사표(師表)였다. 오산학교 교사로 출발한 그의 활동은, 열렬한 애국심과 독립정신 속에서 독립만세운동, 국산품애용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선생은 좌우파가 하나가 되는 신간회가 결성되도록 애썼으며, 광복 후 반탁운동과 민족자주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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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18 09:52


    독립운동가 이광민 선생(1895~1945.10.18)

    만주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진 애국지사

    한국 근대 시기 명문가로 칭송 받을 수 있는 가문은 부를 축적한 가문, 높은 권력을 지닌 가문이 아니다. 조선후기 외세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구국활동을 펼쳤거나 일제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가문이 바로 명문가다. 가풍에 의한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 시기 가족 중 어느 누가 구국 또는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 나오면 그 가문의 구성원은 대체적으로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 안중근 일가, 김구 일가, 이회영 일가가 그랬다.

    이광민의 가문도 바로 그 대열에 설수 있는 명문가였다. 그의 작은할아버지 이승화(李承和)와 백부 이상룡(李相龍)을 비롯한 3형제, 그리고 자신과 3명의 사촌 및 조카 병화(炳華)까지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니 한국근대사에서 그의 가문을 빼놓고 어찌 명문가를 운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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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16 11:37


    관계에 기대지 않기

    살면서 내 딴에는 진심이었는데
    뜻대로 관계가 잘 풀리지 않는 경험을 하고 나니
    누군가를 도대체 어디까지 믿고,
    내 마음은 어디까지 줘야 하는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때마다
    나만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서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 자체에 점점 피곤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또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내가 관계의 균형을 위해 찾은 방법은 ‘흐르게 두기’이다.
    나를 대하는 사람의 감정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고 그 사람의 몫으로 내버려 두기.

    호구가 됐든 오지랖이 됐든
    나에게 악의가 없었고 내가 예의를 지켰다면
    그 순간에 충실하도록 내 감정도 내버려두기.

    애써 좋은 사람이 되려 하지 않으니
    오히려 자연스럽게 더 좋은 관계가 따라왔고,
    눈치 보 지 않으니 누굴 만나도 불편할 게 없었다.
    마음을 건넨 뒤에도 그 결과에 매달리지 않으니
    상처받을 일이 없어졌다.

    물론 여전히 뾰족한 사람에게 찔려
    아프고 서운할 때도 있지만
    그 감정조차 억지로 다스리려 하지 않는다.
    지금 아픈 상처도 흐르게 두면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걸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관계는 내가 조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 마음을 진심으로 다 쓰고
    그 이후는 흘러가게 두는 일뿐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_ 나를 살필 줄 아는 너그러운 어른이 되고 싶다.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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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16 11:27


    우아한 어른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말에 상처받아 왔던가.
    가족에게 들은 무심한 한마디,
    친구가 농담처럼 던진 비아냥,
    직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평가성 멘트들.

    그땐 별일 아니라고 넘겨도
    마음 어딘가엔 분명 멍처럼 남아 속앓이해본 적,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릴 때 쓰던 말들을 그대로 쓰는 건
    어쩐지 멋쩍은 일이다.
    전 성 기 때의 패션 스타일을
    고스란히 고수한 채 나이 든 사람이 묘하게 어색해 보이는 것처럼
    말투에도 나이에 어울리는 무게감이 필요했다.

    “그냥 하는 말인데 왜 그렇게 예민하냐”라고들 말하지만
    ‘그냥’이라는 말에 담긴 무심함이 사람을 얼마나 깊게 할퀴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예민함’도 대부분은 말하는 사람의 기준으로,
    오히려 듣는 사람을 판단하는 단어로 느껴질 수 있다.

    말은 결국 사람을 담는 그릇이다.
    그 그릇이 꼭 예쁘지 않더라도
    그 안에 담기는 진심만큼은 따뜻했으면 좋겠다.

    내가 던진 말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가볍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말은 충분히 의미 있다.
    이제는 내 말이 벽이 아닌 다리가 되기를,
    경계가 아닌 초대가 되기를 바란다.

    _ 나를 살필 줄 아는 너그러운 어른이 되고 싶다.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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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16 11:00


    독립운동가 고광순 선생(1848.2.7~1907.10.16)

    임란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
    구한말 의병장으로 다시 칼을 잡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의 혈손(血孫)으로 태어나다.
    고광순에게는 그가 의병전선의 선봉에 서지 않을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명분이 주어져 있었다. 그 첫째는 일제의 극심한 경제침탈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을사조약 늑결 후 광무황제의 밀칙이 내려와 있었다는 사실이며, 셋째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저명한 의병장의 직손으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도 의병을 일으켜야 했던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도발한 직후부터 일제는 대한침략정책을 한층 강도 높게 진행시켜 갔다. 1895년에 들어와 나라에 대변고가 두 번이나 연이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고광순은 드디어 항일구국의 기치를 들게 된다.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그것이다. 일제는 삼국간섭으로 조선에서의 정치적 우위를 러시아에게 빼앗김에 미쳐 1895년 8월 배일파의 핵심인물로 명성황후를 지목, 극악무도하게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10월에는 민족 자존에 일대 타격을 가하는 단발령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고광순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무찔러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통렬하게 주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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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
    태양을품은달°˚ (@g1689061000)
    2025-10-13 10:49


    이강년(李康秊)
    1858.12.30~1908.10.13

    대한제국기 용소동전투, 갈기동전투,

    백담사전투 등에 참전한 의병장.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이 되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가산을 털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을 체포해 농암(籠巖)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제천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유인석의 문인이 되고,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 해 4월에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해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도 의병을 해산하고 유인석을 따라갔다. 그 곳에서 3년 동안 지내고 돌아와 단양 금채동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하여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선위하고 정미칠조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였다.

    1907년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해 9월 16일에는 싸릿재[杻峙],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故里平), 10월 23일에는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 해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각도 의병장을 따라 양주에 집결해 13도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이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의병부대의 서울진격작전이 미수에 그치자, 다음 해인 1908년 봄부터 휘하장병들을 독려하여 2월 17일의 용소동전투(龍沼洞戰鬪)를 비롯해 2월 26일의 갈기동전투(葛其洞戰鬪), 3월 12일의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 4월의 안동서벽전투(安東西壁戰鬪)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강년의 의병활동 지역은 주로 강원도·충청도·경상북도 일대에 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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