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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님의 로그 입니다.

좋은글 하나라도 놓칠까봐 노심초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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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1-12 02:23
    "혼밥 안 하고 숨지 않겠다"던 대통령,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영장을 무시하는 대통령에게 고3이 쓰는 글... 이제 그만 내려 오세요
    25.01.11
    이한림(hansunforest)

    저는 지난해 11월 수능을 마친 고3 학생입니다.
    연일 나오는 뉴스를 보다 지금의 상황이 어이가 없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어이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다들 잘 아시겠지만, 공수처에서 적법한 절차에 따라 발부받은 영장을 통해 체포하려고 하는데 대통령 측이 거부하고 있는 사실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이는 법치 국가인 대한민국의 수장이 적법한 절차의 이행을 방해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준법'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왜 법을 안 지키나요?

    헌법 제 69조에 따르면 대통령은 취임 시 아래와 같은 내용의 선서를 합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 선서 내용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헌법을 준수하고" 입니다.
    또한 헌법 제 66조 2항에서는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할 뿐만 아니라 수호하고 받들어야 하는 의무를 가집니다.

    그리고 헌법 제 12조 3항에는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라는 서술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번 구속영장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발부되었기에 해당 헌법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헌법에 따라 제정된 법률 중 형사소송법 제 200조의 2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피의자가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정당한 이유없이 제200조의 규정에 의한 출석요구에 응하지 아니하거나 응하지 아니할 우려가 있는 때에는 검사는 관할 지방법원판사에게 청구하여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피의자를 체포할 수 있고, 사법경찰관은 검사에게 신청하여 검사의 청구로 관할지방법원판사의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피의자를 체포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체포를 거부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억울한 점이 있다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변호를 하면 될 일 아닌가요?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하고 타의 모범이 되셔야 할 분께서 왜 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부 극우단체 및 대통령이 주장하시는 것처럼 억울하신 게 있다면 당당하게 나서시는 것이 좋습니다.

    계속해서 위헌과 위법 그리고 비호세력들의 뒤에 숨어서 편지와 같은 비겁한 수단을 통한 선동을 통해 국민들끼리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일국의 국가 원수가 할 행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상술한 헌법 제 66조에서 규정하는 대통령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계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때 말한 대로만 해도 좋겠다

    대통령은 지난 2021년 9월 대선 후보 당시 예능 프로그램 에 출연해 자신의 정치 철학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때 했던 발언들을 다시 되짚어 볼까요?

    '본격 집사부 청문회'에서 당시 윤석열 대선 주자는 "청문회 받은 게 내 전공이니까"라며 "청문회 받는 거로는 대한민국에서 아마 나보다 청문회 많이 받아본 사람을 없을 것"이라고 운을 뗐습니다.

    어떤 질문이라도 (답변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윤석열 대선 주자는 "소신대로 말하면 되는 거니까, 정답이 없는 거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집사부 청문회 첫 번째 키워드는 2013년 10월 21일 국정원 댓글 관련 국정 검사에서 한 발언, "사람에 대해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말이었는데요.

    윤석열 대선 주자는 말의 배경에 대해 "내가 원래 후배들한테 검사는 사람에 충성하면 안 된다. 내가 말하는 사람은 인사권자, 나의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사, 그런 사람들에게 충성하면 안 되고... 신입검사가 회식 자리에서 뭘 모르고 검사장이 폭탄주 한 잔 주니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래 가지고 나한테 많이 혼났지. (그 자리에서요? 뭐라고 하셨어요?) 검사장에게는 충성 하는 게 아니야. 검사장은 존경하면 되는 거야. 충성하는 건 아니야. (중략) 원래 충성이라는 것은, 충이라는 것은 그 대상이 국가와 국민이지. 그 외의 나머지는 충성의 대상이 아냐. (중략) 충이라는 것은 그런 데 쓰는 말이 아냐. 우리가 말하는 충성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지"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역대 대통령 관련 사건(김대중 대통령 당시 경찰청 정보국장 구속,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시 최측근 안희정 지사 금품수수 조사, 이명박 대통령 당시 BBK 사건 조사, 박근혜 대통령 당시 2013년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조사, 2016년 박근혜 대통령 당시 최순실 게..이트 조사)을 맡은 일에 대해 "대통령하고 싸우고 대통령한테 도전하는 게 아니고 맡게 된 사건을 법에 따라 처리한 거고 내가 대통령하고 도전할 그럴 이유도 없고, 대통령도 국가적으로 대사가 얼마나 많은데 일개 검사와 싸울 시간도 없고 그런 문제는 아니에요.
    권력의 편보다 법의 편이 되는 게 훨씬 든든하고. 국민들한테 똑같이 이 법을 지키라고 해야 하잖아. 그런데 권력자가 법을 어긴 게 드러났을 때 그거를 제대로 처리를 안 하면 국민들한테 법을 지키라고 할 수가 없고 사회가 혼란에 빠져요.

    그러기 때문에 힘이 있는 사람에 대한 사건을 얼마나 원칙대로 제대로 하느냐에,
    국민이 검찰을 어떻게 보는가는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거는 뭐 겁이 나고 안 나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원칙대로 해야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야.
    내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싸우는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고, 이거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무조건 원칙대로 갈 수밖에 없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이것만은 절대 안 하겠다'고 하신 말도 있습니다. 그 말도 적어보겠습니다.


    ▲지난 2021년 예능 집사부일체에 출연했던 윤석열 당시 대선 주자. ⓒ SBS관련사진보기

    "두 가지. 점심 저녁 절대 혼밥 하지 않겠다. 사람이 밥을 같이 나눈다는 게 기본적으로 소통의 기본이 되는 거거든. 야당 인사, 언론인, 격려가 필요한 국민들 해가지고, 그분들이랑 늘 점심, 저녁을... 필요하면 점심 저녁을 두 끼씩 먹더라도 여러 사람들과 밥을 먹으면서 소통하겠다.
    혼밥 안 한다 하는 것 하나하고,

    두 번째 절대로 국민들 앞에서 숨지 않겠다.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앞으로 나와서 잘했든 잘못했든 국민들 앞에 나서겠다. 혼밥 안 하고 숨지 않겠다."

    지금 한남동 관저에 계시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때 하신 말씀들을 지키시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대통령은 지금 국민들 앞에서 당당하십니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의 혼란과 갈등을 일으킨 책임을 지시고 내려와 주세요.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94887&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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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1-12 02:09
    "몸싸움 피하세요" 경호처 직원을 위한 법률상담
    [판사 출신 차성안 교수] "가장 확실한 건 위법한 명령 거부… 무기 사용 절대 안돼"
    25.01.11
    차성안(news)


    윤석열 대통령 2차 체포영장 집행 시도가 임박한 가운데 판사 출신 차성안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대통령경호처 직원들을 위한 글을 보내왔다. 는 불안에 떨고 있을 경호처 직원들과 가족들에게 정확한 법률 문제를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싣는다.[편집자말]


    누구든 이 글을 불안에 떨고 있을 MZ세대 경호처 직원과 그 가족, 지인에게 전달해, 유혈사태 없는 평화적 체포영장 집행이 이뤄지도록 해 주기를 부탁드린다.

    [Q. 1] 제가 영장 집행 막으라는 지시·명령을 거부하면 항명죄로 처벌받지 않나요?

    A. 법원이 발부한 체포·수색영장 집행의 저지처럼 위법함이 명백한 명령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번에 나온 채 상병 사건의 박정훈 대령 무죄 판결은 물론 그 전에도 다수의 판결에서 확인된 확고한 법리입니다.
    더구나 경호처 직원은 군인이 아닌 공무원(대통령경호법 제6조)으로서 군인의 명령불복종만 처벌하는 항명죄(군형법 제44조)의 대상도 아닙니다.

    [Q. 2] 경호하는 시늉만 할까도 하는데, 직무유기죄로 처벌받을까요?

    A. 공무원의 직무유기죄(형법 제122조)는 "정당한 이유 없이" 직무수행을 거부하거나 직무를 유기한 때 성립하는데, 위법한 지시에 대한 복종 의무는 없기 때문에 아예 거부하셔도 처벌되지 않습니다.

    또한 실제 직무유기죄 처벌 사례는 매우 적은데, 판례가 "직무에 관한 의식적인 방임 내지 포기"가 아닌 "태만, 분망, 착각 등으로 인하여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아니한 경우나 형식적으로 또는 소홀히 직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성실한 직무 수행을 못한 것에 불과한 경우"에는 직무유기죄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입니다(대법원 97도675 판결 등 다수).

    현장에 서 있되 적극적 실력 행사를 안 하는 것은 직무유기가 아닌 직무태만 정도로 평가될 가능성이 큽니다.
    직무유기는 형량도 1년 이하의 징역(중한 형 기준, 이하 같음)으로 특수공무집행방해죄의 7년 6개월 이하의 징역(형법 제144조, 제136조)보다 훨씬 낮습니다.

    [Q. 3] 그래도 지시불이행으로 징계는 받지 않을까요?

    A. 위법함이 명백한 지시에 복종할 의무는 없기 때문에(대법원 99도636, 2015도9010 판결 등 다수) 그 거부도 징계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설사 억지로 징계하려고 해도 경호처 직원 직권면직은 고등징계위원회 동의(대통령경호법 제10조), 징계는 고등(1-5급)·보통(6급이하)징계위원회 심사·의결 등 절차가 필요하고, 이에 대한 소청심사 등 불복 절차도 있어 몇 개월이 걸립니다.

    [Q. 4] 지시받은 대로 한 건데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될까요?

    A. 지시·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특별한 상황'이 있으면 '강요된 행위'(형법 제12조)로서 적법행위에 대한 '기대 가능성'이 없어 처벌을 면할 수 있으나,
    법원 발부 영장 집행 저지처럼 그 위법성이 명백한 경우는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대법원 2015도9010 판결).

    경호처 직원들은 단체·다중이므로 특수공무집행방해죄(징역 7년 6개월 이하)로 처벌되고, 단 1명의 경찰관이 작은 상해라도 입으면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죄(징역 3년 이상), 사망 시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죄(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가 공동정범(형법 제30조)인 윤석열 대통령과 경호처 직원 전체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형법 제144조 제2항).

    추가적으로 법원의 체포영장 집행에 응하는 것은 대통령 신체에 가하여지는 위해(危害)(대통령경호법 제2조 제1호)가 아니므로, 영장 집행을 막는 것은 경호업무에 관한 직권남용죄(5년 이하의 징역)로도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대통령경호법 제21조 제1항, 제18조).

    [Q. 5] 경호하는 시늉까지 거부할 용기가 안 나는데 처벌을 면할 방법이 없나요?

    A. 확실한 것은 영장 집행 거부 현장 투입 지시·명령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경호처 직원 동료들과 본 법률상담 Q&A를 나누고 거부 방법을 협의해 보시고, 외부에 도움을 청하세요.
    제 상담이 필요하시면 저에게 이메일(hyesungan1@uos.ac.kr), 페북(https://www.facebook.com/sungan.cha) 댓글, 메신저로 연락 주세요(이메일, 페북에 전화번호 남겨주시면 전화로 연락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경호하는 시늉을 하는 경우에는, 공무집행방해는 공무원에게 광의의 폭행, 협박, 즉 "사람에 대한 일체의 유형력의 행사"를 하면 성립하는 것이니(대법원 2017도21537 판결),
    몸싸움은 완전히 피하십시오.
    폭행죄의 협의의 폭행, 즉 "신체"에 대한 유형력의 행사보다 넓은 "사람"에 대한 유형력의 행사이니, 경찰, 공수처 사람을 때리지 않는 것은 물론,
    소극적인 힘을 사용하는 몸싸움도 피하세요.

    몸이 접촉되지 않도록 하고 절대 어떤 식으로든 경찰, 공수처 사람의 행동을 막는 식의 일체의 실력행사나 위협을 피하세요.

    [Q. 6]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치사) 유죄 판결은 제 신분, 연금에 영향이 있나요?

    A. 징역형 실형 또는 징역형 집행유예 유죄 판결이 확정되면 즉시 당연퇴직됩니다(국가공무원법 제69조, 제33조 제3, 4호).
    공무원 연금은 수사·재판 중 퇴직해도 퇴직급여 및 퇴직수당의 일부(재직기간 5년 미만 1/4, 5년 이상 1/2)가 일단 지급정지되고(공무원연금법 제65조 제3항),
    징역형 판결이 확정되면 퇴직급여의 1/4(재직기간 5년 미만) 또는 1/2(5년 이상)과 퇴직수당의 1/2이 감액(박탈)됩니다(공무원연금법 제65조 제1, 3항, 공무원연금법 시행령 제61조 제1, 4항).

    [Q. 7] 제가 총기 등 무기를 쓰면 어떤 처벌을 받나요?

    A. 절대 그러시면 안됩니다.
    총기를 쓴 본인은 물론 영장 집행 저지에 가담한 대통령과 경호처 직원 모두를 살인죄(사형, 무기, 5년 이상 징역, 형법 제250조) 공동정범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총기는 그 자체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라, 사람을 향해 쏘는 것 자체로 살인죄 고의가 인정되기 쉽고, 이 경우 안 죽어도 살인미수죄로 처벌됩니다(형법 제254조, 제25조).

    더 큰 문제는 1명의 그러한 일탈이 공동정범(형법 제30조) 관계로 묶여 있는 대통령과 그 경호처 직원들 전체에게도 미친다는 것입니다.

    안 죽더라도 만약 사전에 총기 사용이 허용된 경우 영장 집행 저지에 가담한 대통령, 경호처 직원 모두 살인미수의 공동정범으로도 처벌됩니다.

    동시에 총기 사용으로 누군가 다치거나 죽으면 영장 집행 저지에 참여한 대통령과 경호처 직원들 모두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죄 또는 치사죄의 공동정범으로 각 3년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처벌됩니다.
    이 경우 형량은 법정형이 더 높은 살인(미수)죄가 적용됩니다(형법 제40조).

    영장 집행 저지 목적은 무기를 사용할 상당한 이유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무기 사용 자체는 대통령경호법 제21조 제1항에 따라 제19조(무기의 휴대 및 사용) 제2항을 위반한 범죄행위로서 5년 이하의 징역으로 추가로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95871&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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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1-12 01:48
    (ㄴ)
    되살아나는 극우폭력··· 서북청년단 이어 반공청년단·백골단까지
    2010년대 이후 극우폭력 단체 재건 움직임··· 극우세력 백색테러 재현되나?

    권종술 기자 epoque@vop.co.kr
    발행 2025-01-11


    이승만은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인 자신에게만 연임 규정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면서 장기 집권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1956년 3대 대선에서 관권과 금권을 동원해 선거를 치렀음에도 무소속 조봉암 후보가 득표율 30.01%를 기록하며 이승만을 긴장시켰다.
    심지어 부통령 선거에선 자유당 후보인 이기붕이 44.03%에 그치며 46.43%를 기록한 민주당 장면 후보가 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반공청년단의 테러로
    1960년 3.15 부정선거 과정에
    김주열 열사 등 수많은 이들이 사망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선 야권 대선후보인 조병옥이 미국에서 서거하며 이승만이 대통령선거에 단독후보로 나서면서 사실상 당선을 확정했지만, 이기붕의 당선을 염려한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에 사활을 걸었다.
    고령인 이승만의 유고를 대비해야 했던 만큼 중요한 선거였다.

    지난 선거에서 장면에게 패배했던 이기붕의 당선은 어려웠고, 관권과 금권에 더해 정치깡패 조직인 반공청년단까지 만들어 선거를 치렀다.
    이 선거가 바로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이끈 3.15 부정선거다.

    반공청년단은 단원들을 동원해 야당인 민주당 간부와 당원들을 공격했다.
    심지어 이들의 테러로 민주당 간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당시 관련 희생자가 수십 명이 넘었다.
    그리고 반공청년단의 이런 정치폭력은 결국 자유당 정권을 몰락을 부른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열사 시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마산 시민들은 분노했고, 그러한 저항의 물결은 전국으로 퍼지면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기타


    1960년 선거 당일 마산 시내에선 1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부정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물론 반공청년단원들이 학생과 시민들을 몽둥이로 무차별 폭행했다.
    분노한 마산 시민들이 결집하면서 항쟁이 벌어졌다.

    시위대를 향해 경찰과 반공청년단 등의 폭력이 이어졌고,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한 중학생이 실종됐다.
    전북 남원에서 올라온 어머니는 아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4월 11일 마산 부두에서 아들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눈에 최루탄이 박혀있는 처참한 모습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고, 그가 김주열 열사다.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민들은 분노했고, 제2차 항쟁이 일어났다.
    마산 시내 모든 관공서와 파출소, 어용 언론이던 서울신문사, 자유당사 등이 불탔다. 이날의 시위는 전국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전위대인 반공청년단을 향한 분노도 커졌다.
    당시 반공청년단의 본거지는 광화문 세종로에 있던 반공회관이었다.
    서울에선 이승만 정권에 분노한 시민들이 경무대(현 청와대)로 행진했고, 경찰의 발포로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반공회관이 불을 질렀다.
    결국, 이승만의 몰락과 함께 반공청년단은 해체됐다.

    전두환 정권의 전위대였던
    사복체포조 ‘백골단’
    하얀 헬멧에 청바지·청자켓
    몽둥이와 쇠파이프로 시위대 폭력 진압
    강경대 열사 등 백골단에 의해 사망

    폭력적인 지난 정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반공청년단이란 이름이 여당 국회의원을 통해 국회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의 예하 조직이라는 ‘백골단’은 군사정권의 폭력을 떠올리게 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향한 비판이 커지자 ‘백골단’이라는 이름을 재고하겠다고 밝혔지만,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백골단은 원래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의 외각조직 가운데 하나였다.
    백골단은 반공청년단과 마찬가지로 관제 시위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벌인 정치깡패 집단이다.

    백골단은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지만,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이승만의 백골단처럼 외각조직이 아니라, 하얀 헬멧에 청바지·청자켓을 입고 시위대를 폭력 진압하던 경찰 사복기동대(사복체포조)의 별칭이었다.

    1980년대 중반 탄생한 백골단은 전두환 정권의 전위대였다.
    무술 특채 경찰관 등이 주를 이뤘던 백골단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공포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전투경찰이 방패와 방석모 등으로 무장한 채 시위대를 막는 역할이었다면 가벼운 복장의 백골단은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며 시위대 체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다쳤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89년 4월 고려대에서 열린 전민련 3차 국민대회 중 백골단에 연행되는 참가자 ⓒ고 박용수 선생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91년 강경대 열사와 김귀정 열사 사망 사건이다. 지난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다.
    이후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의 불길이 거세졌고, 그해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은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폭력 진압으로 질식사했다.

    박창수 열사 안치된
    영안실 벽 뚫고 시신 탈취까지

    그해 백골단은 반인륜적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대우조선 노조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 수감돼 있던 1991년 5월 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했다가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이틀 뒤 사망했다.

    그는 수감 기간 안기부에 의해 여러 번 고문을 당했고, 그가 사망하기 전에 의문의 남성들이 병실을 찾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조와 시민사회에선 고문치사 의혹을 제기했다.

    경찰은 사건을 덮기 위해 그해 5월 7일 박창수 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안양병원에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투입했다.
    쏟아지는 최루탄과 함께 백골단은 영안실 벽을 부수고, 박창수 위원장의 시신을 탈취했다.

    이후 강제로 부검한 뒤 박창수 위원장이 18m 높이의 병실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발표하며 사건을 덮어 버렸다.

    윤석열 내란과 함께 부활한
    과거의 극우단체 우려스럽다

    이런 폭력 때문에 백골단은 처음 만들어진 1980년대 중반부터 시민들의 폐지를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경찰도 이런 여론에 부담을 느껴 여러 차례 폐지를 검토했다.
    백골단 폭력 사건이 연이어 터진 1991년엔 노태우 정부가 백골단 폐지를 선언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복기동대는 복장과 편제가 바뀌며 더는 ‘백골단’이라 불리진 않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다 지금은 사라졌다.

    윤석열의 시대착오적 비상계엄은 과거 극우폭력 단체의 이름을 우리 사회에 다시 등장시켰다.
    국민의힘은 소속 의원들은 그들과 함께 관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그들을 국회에 세우기까지 했다.

    이승만과 전두환이 ‘서북청년단’과 ‘반공청년단’, ‘백골단’을 동원해 벌인 극우폭력 정치가 윤석열 내란과 함께 다시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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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1-12 01:47
    (ㄱ)
    되살아나는 극우폭력··· 서북청년단 이어 반공청년단·백골단까지
    2010년대 이후 극우폭력 단체 재건 움직임··· 극우세력 백색테러 재현되나?

    권종술 기자 epoque@vop.co.kr
    발행 2025-01-11


    김정현 반공청년단 단장과 단원들이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반공청년단 출범 기자회견을 한 뒤 취재진 질의에 답하고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하얀 헬멧을 쓰고 관저 사수 시위를 벌인 이들은 "백골단은 반공청년단의 예하 조직"이라며 "윤 대통령을 지키고 대한민국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5.1.9 ⓒ뉴스1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1980~1990년대 시위대를 폭력을 동원해 체포하던 경찰 사복체포조인 ‘백골단’을 자처한 극우 성향의 청년들이 하얀 헬멧을 쓰고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 주선으로 단상에 오른 이들은 자신들을 ‘반공청년단’이라 소개했고, 예하 조직으로 ‘백골단’이란 자경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백골단’이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의 폭력 정치를 상징하는 이름이라면,
    ‘반공청년단’은 이승만 시절의 극우폭력 정치를 상징하는 이름 가운데 하나다.

    해방 직후 ‘빨갱이 사냥’에 나선 서북청년단
    2014년 등장한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

    우리 사회에 극우폭력 정치가 부활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본격적으로 나온 건 지난 2014년이었다.
    그해 9월 28일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라는 단체가 광화문에서 세월호 참사 추모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제거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서북청년단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악명’ 높은 이름이다.
    공식명칭은 ‘서북청년회’지만 대중들은 이들을 ‘서북청년단’이라 불렀다.

    서북청년회는 해방공간에서 좌익세력 등을 대상으로 암살과 테러를 자행했고,
    특히 제주4.3항쟁에 토벌군으로 참여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이란 보수연합단체 회원들이 지난 2016년 12월 17일 헌법재판소 인근 안국역 5번 출구 앞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에서 '서북청년단'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서북청년단 재권위 회원이 행진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모습. ⓒ민중의소리


    이들은 2014년 11월 28일 서울 중구 을지로3가 서울청소년수련관에서 회원 50여 명이 모여 재건총회를 열고 서북청년단의 부활을 알렸다.
    당시 수련관에서 내부 규정을 이유로 행사를 불허했지만, 직원들에게 막말과 멱살잡이까지 벌이며 총회를 강행했다.

    이들은 이날 과거 서북청년회 중앙집행위원 출신의 손 진(당시 95세, 2017년 사망)을 회장으로 선출하며 해방공간에서 악명을 떨친 서북청년단과 자신의 연관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이들은 이후 각종 극우집회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지난 2023년엔 75주년 제주4.3 추념식이 열리던 제주4.3평화공원 앞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서북청년회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절규하듯 항의했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북청년회는 영락교회 청년회가 중심이 돼 만들어진 조직이다.
    영락교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초대회장을 지내는 등 한국개신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한경직 목사가 1945년 세운 교회다.

    한 목사는 북한 신의주 지역에서 활동하다 해방 이후 소련군이 진주하자 남으로 내려와 영락교회를 세웠다.
    당시 영락교회엔 북한 서북지역(황해도 평안남북도) 사람들이 대거 집결했고, 이북 출신의 반공주의 개신교 청년들은 영락교회 청년회를 통해 서북청년회를 조직했다.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북청년단 단원들. ⓒ기타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말 출범해 이승만이 1948년 12월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이라는 어용단체를 꾸릴 때까지 2년 정도 활동했다.
    기간을 짧았지만, 폭행과 암살을 전국 각지에서 벌이는 등 테러를 자행했다.
    이른바 ‘빨갱이 사냥’에 나선 것이다.

    좌익세력은 물론,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에게 좌익과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학살했다.
    1948년에 일어난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이들도 서북청년회였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서북청년회 종로지부 총무부장 출신이다.
    이들은 좌익을 편들었다는 이유로 현직검사를 암살했고, 기업가의 요구를 받고 노동조합 파괴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공산주의라는 괴물과 싸우겠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서북청년단은
    제주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서북청년회는 정치깡패였지만, 자신들의 테러가 하나님을 위한 성전이라 믿었다.
    한경직 목사는 1947년에 한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설교에서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한 괴물이 유럽을 횡행하고 있다. 곧 공산주의란 괴물이다.’
    저들의 말 그대로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입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목사는 공산주의를 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 괴물과 싸울 것을 설교를 통해 독려한다. 이듬해 제주 4.3항쟁 진압에 서북청년단이 참여한 것도 바로 이런 독려가 바탕이 된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괴물과 싸우겠다는 서북청년단은 제주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지난 2003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서북청년회는 4.3사건 발발 전부터 도민들과 갈등을 빚어 사건 발생의 한 원인으로까지 지목받아왔는데, 이승만과 미군은 강경작전을 앞두고 서북청년회를 아예 군경에 편입시켰다.
    이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대량 주민 희생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북청년회 위주로 경찰이 재편됐고, 군대에는 ‘서청중대’가 따로 편성됐다”며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 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밝히고 있다.

    서북청년회의 악몽은 한국전쟁 과정에서도 되풀이됐다.
    1950년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 정권은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했다.
    희생자 대다수는 이승만 정권이 좌익세력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만든 반공단체인 ‘국민보도연맹’에 영문도 모른 채 가입한 이들이다.

    이들을 각 지역에서 모아 이른바 사상 전환 교육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부역하거나 동조할 수 있다면서 예비검속해 학살했다.
    군과 경찰은 물론 서북청년회와 같은 각종 반공 청년 단체들도 학살에 직접 가담했다. 그렇게 전국에서 죽어간 민간인이 수십만 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는 항일독립운동가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이승만의 정치깡패 전위대
    반공청년단이 2025년 다시 등장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은 극우 성향의 반공 청년들을 자신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1959년 만들어진 ‘대한반공청년단’이다.
    반공청년단은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의 자유당 선거 승리를 위해 나선 정치깡패 집단이다.

    지난 9일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준 반공청년단은 이런 이승만의 청년전위대 이름을 빌어와 내란수괴인 윤석열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청년단의 만행을 되짚어보면 2025년 다시 살아난 반공청년단의 위험성을 잘 알 수 있다.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이 반공청년단 총재였고, 부통령 후보 이기붕이 부총재, 신도환이 단장을 맡았다.
    반공청년단엔 여러 주먹조직이 가입했고, 임화수 등 유명한 정치깡패들이 반공청년단에서 활동했다.



    1960년 광화문 세종로 반공회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대한반공청년단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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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1-11 21:36
    ((꼭 반드시 읽어 봐야만 하는 글))
    대한민국 극우 테러의 역사, 백골단이 계승하나
    이득신 작가
    기사입력 2025/01/10


    서북청년단이라는 극우 테러 단체가 있었다.

    초기에 그들은 북에서 월남한 이들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북한 정권 초기 종교 탄압을 피해 월남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매국 친일 행위에 가장 앞장선 이들이 바로 개신교였다.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는 물론이고 성도들에게 헌금을 거두어 ‘조선장로호’라는 전투기를 총독부에 헌납하기도 했다.
    북한 정권이 친일 척결의 움직임을 보이자 적극적 친일분자였던 개신교 일당이 월남하여 만든 조직이 바로 서북청년단이었다.

    그 친일의 무리들이 남한에서는 반공으로 포장하고 온갖 테러를 자행했다.

    그들은 이승만 정부의 사병과 다름없는 준군사조직이자 자유당의 편에서 백색테러를 무수히 자행하던 정치깡패였다.
    줄여서 서청(西靑)이라고 부른다.

    정부의 비호 아래에서 보도연맹 학살 사건, 제주 4.3 사건, 여순항쟁 등의 사건에서 민간인 학살과 고문 등의 범죄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사조직인 그들은 곧 경찰이며 법이었고 재판관이었으며 사형집행인처럼 행동하며 온갖 테러를 저질렀다.


    이승만 정권 후반기엔 이정재 등의 정치깡패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선거를 방해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향한 테러가 일상이었으며 정치인들의 연설회를 방해하는 등 그 패악질이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이승만과 이기붕의 비호를 받으며 이정재는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등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에 대한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4.19 혁명 즈음에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던 시위대인 '고려대학생 습격사건'을 일으켜 국민들의 분노에 더욱 부채질을 가하기도 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는 사형선고를 당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정치판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국회의원이 된 김두한도 역시 정치깡패에 지나지 않았다.


    유신 시절에는 사쿠라라고 불린 신민당의 이철승이 차지철과 손잡고 정치깡패를 동원했다.

    1976년 5월 신민당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해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영삼의 1인 지도체제에 반발한 이철승은 최고위원제를 도입해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비주류를 규합했다.
    여기에 박정희의 최측근인 차지철 경호실장이 직접 실무를 맡아 이철승을 지원했다.

    신민당 내에서 세력이 밀리던 이철승은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게 되자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판을 뒤엎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측근들을 시켜서 당시 서울에서 한참 뜨고 있던 26세의 조직폭력배 김태촌을 포섭했다.

    차지철이 이철승에게 ‘사람만 죽이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뒤탈이 없도록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전해들은 김태촌은 고향 광주에서 자신의 조직원들과 고등학교 불량학생들까지 300여명을 전당대회 5일 전에 서울로 급하게 불러올렸다.

    당시 이철승은 명백하게 당 내 세력구도에서 김영삼에게 밀리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당 대의원들이 모두 투표를 하면 패배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깡패들을 동원해서 김영삼계 대의원들을 못 들어오게 막고 자기 지지자들만 모아서 전당대회를 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전당대회를 사흘 앞둔 5월 22일 김태촌은 부하 수백명을 흉기로 무장시켜서 김영삼과 당직자들이 머물고 있는 종로구 관훈동 신민당사를 대낮에 습격했다.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조폭 수백명이 대낮에 국회의원들이 머무는 야당 사무실에 테러를 가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의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이 있었다.
    1987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통일민주당 창당 대회를 열었는데,
    그 때 초대받지 않은 조폭 100여 명이 창당 대회를 불현듯 덮쳐 통일민주당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한 곳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창당 대회 기간 동안 통일민주당 사무실 47곳 중 18곳이 김용남(일명, 용팔이)이 동원한 조직폭력배들에 의해 부숴지고 당원들은 크게 다치게 된다.

    당연하게도 통일민주당 측에서는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당 내의 일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관망만 했으며,
    언론은 보도지침을 따라 당 내부의 갈등으로 일어난 사태로 사건을 왜곡해서 보도하였다.

    이후 김영삼 정부에서 치열한 수사를 거듭한 끝에 전두환 정권의 2인자 장세동 안기부장이 배후 세력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하는 강력한 야당이 생기는 것을 사전에 막고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장세동이 꾸민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독재시절에는 언제나 정치깡패들이 득세했다.
    그들은 정권의 비호 아래 자신들의 돈벌이라면 사람의 목숨까지도 앗아가는 일을 서슴치 않고 자행했던 자들이다.

    그런 극우 테러단체의 계보를 잇겠다는 단체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반공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조직내 테러 임무를 담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백골단이다.

    백골단은 전두환 정권에서 운영했던 경찰 내 존재했던 특수 조직의 별칭이었다.
    청바지와 청자켓을 입고 머리에 흰색 헬멧을 쓰며 학생 시위대를 무자비한 방식으로 붙잡아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둘렀다.
    당시 대학생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체격과 건장한 체구를 지닌 이들을 중심으로 선발된 경찰 내부의 특수부대와도 같았던 자들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던 백골단이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은 명분마저 윤석열 지키라고 한다.

    내란 범죄자를 지키기 위해 또 다시 테러 단체의 이름을 사용하며 폭력시위로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겠다는 속셈이다.

    윤석열이라는 인물이 끼치는 해악은 이토록 지대하다.
    하루빨리 그를 파면하고 체포하고 구속해야 할 것이다.



    https://www.amn.kr/5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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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1-11 21:17
    바보조일[바로보는 조선일보] - 55. 박정훈 대령 무죄와 조선일보의 비겁
    이득우 조선일보 폐간 시민실천단 단장/언소주 정책위원
    기사입력 2025/01/10


    1월 9일 박정훈 대령이 무죄라는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그것도 군사법원에서. 지난 2023년 7월 19일 채수근 해병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대한민국이 부여한 임무대로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던 박정훈 대령은 항명죄로 법정 최고형인 3년을 구형받았다.

    애초에는 저들은 박정훈 대령에게 집단항명수괴죄라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항명죄나 집단항명수괴죄는 전시에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중범죄다.


    이번 사건의 판결은 명령이나 지시가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항명이 아니라는 판결이다.

    형식을 갖추지 못한 윤석열의 격노는 명령도 지시도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형식을 갖췄다 하더라도 부당하다면 따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격노는 명령이 될 수 없고 명령이 되더라도 부당하기에 따르지 말아야 한다.

    이번 윤석열 일당의 내란 시도와 아주 닮았다.
    이제 무고한 군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던 자들에게 죄를 물어야 할 때다.


    묘하게도 박정훈 대령 사건이 윤석열 정권의 허상과 균열을 동시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시스템에 따라 처리하면 그만인 사안을 마치 군대 더 나아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사건인 양 덩달아 호들갑을 떨어댄 집단이 바로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채해병 사망 사건과 관련된 국회 활동을 군에게 모욕을 주는 사안으로 몰아갔다.
    억울한 채해병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것이 군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임에도
    이에 대한 노력을 군의 사기를 꺾는 행위로 선동하던 집단이 조선일보였다.


    양상훈 주필이 쓴 2024년 5월 칼럼이 그중 눈에 띈다.
    ‘‘이러면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나’엔 공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면‘의 실체에는 관심이 없고 진상 파악을 방해하려는 윤석열의 발언을 인용해 두둔한 셈이다.

    당시 김건희 관련설이 파다했고 관계자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양주필은 논점을 흐려 사단장을 구하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군용 중대재해법‘이란 억지 조어까지 만들어냈다.
    군 조직의 핵심은 일반 병사이며 그들의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너무나 평범한 사실을 묻어버리려 했다.


    ’군복을 모욕하지 말라‘는 7월 2일 자 기고가 별들의 모임인 성우회장의 명의로 등장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처음부터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청문회에서 모욕당하고 희화화되었다는 군 장성들만 안쓰러웠던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져야 한다고도 했다.

    내란 주범 김용현이 불법 수사로 군을 모욕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 겹친다.
    윤석열의 내란 시도로 대한민국이 혼란에 처한 지금 그가 다시 나서주길 바란다.
    그리고 윤석열과 내란범 일당에게 정녕 국가와 국민을 위했는지를 물어 주었으면 좋겠다.

    조선일보는 채해병 순직 1주기인 2024년 7월 19일에 채해병이란 말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당시 국회에서는 채해병 특검법이 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일에는 채해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라는 시민들의 요구도 빗발쳤다.

    하지만 군의 사기를 걱정하고 국가의 안보를 염려한다는 조선일보는 그저 모르쇠로 일관했다.
    차라리 왜곡된 내용으로 국민들을 현혹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잇속만을 찾아 자발적인 침묵을 선택하는 언론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윤석열의 내란과 외환 시도로 인하여 대한민국이 극도의 혼란에 처해 있다.
    다행히 지각 있는 군인들이 있어 내란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외환유치죄를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시도도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군인은 내란이나 외환에서 최일선에 설 수밖에 없다.

    대통령 경호실이 부당하게 법 집행을 막아설 때도 군을 동원했다고 알려졌다.
    상상할 수 없는 군인에 대한 모욕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개죽음까지 강요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음에도 조선일보는 침묵하고 있다.


    2025년 1월 9일은 대한민국 역사에 뜻깊은 날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박정훈 대령에 대한 무죄 선고는 내란 세력 윤석열과 김건희 일당 등에게 내리는 중죄 선고다.

    지금도 윤석열은 일부 군인과 극우 광신자들을 선동하여 대한민국을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있다.
    박정훈 대령의 정당한 저항이 윤석열 정권에 균열을 가져왔듯이 박정훈 대령에 대한 무죄 선고가 윤석열 일당의 종말을 앞당길 것이다.
    혹한 속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냈고 지금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시민들이 박정훈 대령의 무죄를 이끌어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순리이고 사필귀정이다.

    조선일보는 거짓 안보와 평화를 짖어대던 집단이니 그러리라 예측은 했다.
    박정훈 대령의 무죄 선고 소식을 1월 10일 자 10면에 배치했다.
    참으로 비겁하다.

    박정훈 대령 사건은 윤석열 정권의 본질과 폭압성을 폭로한 최초의 발화점이었다.
    조선일보는 윤석열 집단의 탄생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박대령의 무죄 소식을 의도적으로 소홀히 하는 이유는 파렴치한 집단의 비루한 생존을 위해 어쩌면 당연하다.
    대신 조선일보는 그 더러운 입에 국가 안보나 군인의 명예나 사기를 올리지 말라.

    그리하여 다시 조선일보는 폐간만이 답이다.


    https://www.amn.kr/5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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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1-11 20:40
    민주, '신의한수' 등 극우 유튜버 내란 선전 혐의 고발
    尹 비상계엄 선포 옹호 세력들 강력 처벌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1.11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 국민소통위원회 산하 허위조작감시단이 윤석열 대통령의 12.3 내란 사태를 옹호하는 방송을 한 일부 수구 유튜버들을 내란 선전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사진=더불어민주당 공보국)


    더불어민주당 국민소통위원회(위원장 김현·전용기) 산하 허위조작감시단(단장 김동아·양문석)이 지난 10일 신의한수를 비롯한 여러 수구 유튜버들을 윤석열 대통령의 12.3 내란 사태를 옹호하고 동조한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민주당은 헌법 질서를 훼손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행위에 강력히 대응하기 위해 이같은 조치를 취하게 됐다고 밝혔다.

    고발 대상은 '신의한수' 채널 운영자 유튜버 신혜식 씨와
    '신남성연대' 채널 운영자 배인규 씨,
    '공병호TV' 채널 운영자 공병호 씨,
    '그라운드씨' 채널 운영자 김성원 씨,
    '김채환의 시사이다' 채널 운영자 김채환 씨,
    '김상진TV' 채널 운영자 김상진 씨 등 총 6명이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적 비상계엄 선포를 정당화하고 이를 옹호하는 주장을 통해 헌법과 법치를 훼손하고 내란 행위를 동조하려 한 혐의를 받는다.
    이번 고발은 형법 제90조에 따른 내란선전죄를 근거로 이루어졌으며,
    해당 혐의는 최소 3년 이상의 징역형 또는 유기금고형에 처할 수 있다.

    추후 명예훼손 혐의로 부정선거 음모론을 꾸준히 살포해 온 '민경욱TV' 운영자 민경욱 전 의원과 '이삿갓TV' 채널 운영자 역시 고발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고발은 허위조작감시단이 운영하는 허위 조작 정보 제보 플랫폼 ‘민주파출소’ 출범 후 첫 번째 사례로, 민주파출소는 시민들의 제보를 기반으로 허위 정보에 대한 신속하고 투명한 대응 체계를 구축해왔다.
    출범 이후 현재까지 약 2만 건의 제보가 접수되었으며, 플랫폼 누적 방문자 수는 11만 명에 달한다.

    허위조작감시단은 이번 고발 진행과 결과를 민주파출소 게시판에 투명하게 공개해 시민들과 공유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추가적인 허위 조작 정보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또한, ‘민주파출소’는 단순히 고발에 그치지 않고, 시민들과 함께 허위 정보를 근절하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감시단은 “허위 조작 정보는 우리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라며, “시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제보와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매주 금요일 민주파출소 접수 현황 및 고발 조치 내용을 국민들께 보고하는 정례 기자회견을 열어 투명성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2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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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1-11 19:51
    [긴급성명서] 내전협박 '미친 매국노 윤석열'은 애초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었다
    국민의 생명까지 하찮게 여기는 윤석열을 체포하여 최고형에 처해야 한다.
    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25/01/10

    대한민국의 헌정을 유린한 내란도 모자라, 동족상잔의 참사를 재연할 수도 있는 외환까지 획책했던, 대역죄인 윤석열이 급기야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국민간의 유혈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내전발발 협박까지 일삼고 있어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애초에 윤석열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국민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있었다면, 주가폭락, 환율폭등, 국가신인도 등 경제적 위기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계엄령 선포는 아예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정치경제학자들은 물론, 상식적인 국민 대부분의 공통된 평가였습니다.


    내란수괴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은 것은 바로 민생경제였습니다.
    주가폭락과 환율폭등도 위협적이었지만 국민들이 직접 피부로 느껴야만했던 내수시장 침체는 대다수 국민들의 생계까지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윤석열이 책임회피를 위해 국정혼란을 야기하면 야기할수록 민생경제는 더욱 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파렴치한 윤석열은 모든 헌법유린 범죄를 친위쿠데타에 동조한 수하들에게 떠넘기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애꿎은 경호처 공무원들을 방패삼아 국가 수사기관의 합법적인 법집행을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체포를 시도하면 내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며 감히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을 협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약 윤석열이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헌법을 유린하는 범죄를 넘어서 국가 경제까지 무너트릴 수 있는 친위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총을 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윤석열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내란범죄의 책임을 모두 수하들에게만 떠넘길 수 있을 것이며, 아무런 죄도 없는 경호처 공무원들을 불법적인 방패막이로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윤석열은 불법적인 계엄령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오물풍선 원점타격이나 서해상에서의 국지전 유발 등, 국민의 생명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한반도 전쟁까지 일으키려 했습니다.

    소위 명태균 게..이트로 드러난 김건희윤석열 부부의 명백한 범죄들을 덮기 위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명을 재물로 삼으려했던 것입니다.


    이런 천인공노할 내란수괴 역적을 어찌 대한민국 국민이라 할 수 있으며, 대통령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친일파 태생인 윤석열이 국민을 속이고 검찰총장이 돼서 감행한 첫 번째 반역은 일본과의 경재전쟁 중인 대한민국 정부를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경제침략에 고군분투하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이 해외순방길에 오를 때마다 청와대를 압수수색해 대통령의 경제안보외교를 교란시키며 일본을 이롭게 한 이적행위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대통령에 취임한 윤석열의 친일행각은 감히 독도 해상을 일본 자..위대에 개방하는 등 더욱 과감해졌습니다.

    심지어는 친일매국노를 독립기념관장에 임명하면서 대한민국 독립헌정사를 모독하더니 급기야 치욕적인 사도광산 암실합의 등, 일제의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매국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거듭되는 친일매국행각에 악화된 국민여론에도 불구하고 윤석열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감히 국민들을 탓했던 것은 바로 윤석열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일본총독으로 군림하려 했다는 것을 여지없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애초에 윤석열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친위쿠데타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헌정을 위협했던 것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전쟁유발로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했던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 사법체계를 조롱하며 내전 발발을 선동하고 국정을 혼란시켜 국가경제는 물론 민생경제까지 여지없이 무너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매국노 윤석열은 검찰, 경찰, 공수처 등, 국가 3대 수사기관이 한 목소리로 명백히 지목한 내란수괴입니다.
    어떻게 국민의 생명까지 초개처럼 하찮게 여기는 매국노를 대한민국 대통령이라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윤석열 체포는 더 이상 진보와 보수로 나뉘는 이념문제가 아니라 국가생존의 문제입니다.

    친일행각으로 도배되어 있는 미친 매국노 윤석열의 과거를 되짚어 보십시오.
    윤석열은 한반도 전쟁을 일으키려했고
    과거 일본총리는 6.25참사를 ‘신의 선물’이라 기뻐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윤석열은 반드시 체포되어 최고형에 처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https://www.amn.kr/5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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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1-11 16:59
    [조하준의 직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독재자는 절대 장기말을 챙기지 않는다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1.11

    12.3 내란 사태에 개입한 핵심 장군들이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는 소식이 8일 JTBC 단독 보도로 알려졌다.(출처 : JTBC 뉴스 영상 갈무리/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12.3 내란 사태의 행동대장 노릇을 했던 여인형, 이진우, 곽종근 등 3명의 사령관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자신들이 벌인 일을 후회한다는 취지로 눈물까지 흘린 사실이 지난 8일 JTBC 단독 보도로 알려졌다.

    이들은 "총을 쏴서라도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는 등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가 모두 구속된 인물들이다.

    그러나 정작 윤석열 대통령은 그런 지시를 한 적 없단 식으로 혼자 빠져나가려 하고 있다.

    결국 이들은 모두 12.3 내란 사태 당시 장기말로 쓰였다가 버려진 셈이다.
    이진우, 곽종근, 여인형 등 3명이 흘린 눈물의 의미가 후회의 눈물인지 배신당한 것을 뒤늦게 깨닫고 흘린 분노의 눈물인지는 알 수없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든 그들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뭐가 달라지겠나?
    이미 그들은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낙인찍혀 중형을 면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독재자들이 장기말로 쓸 부하들을 끝까지 챙겨준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독재정권 수립을 위해 자신의 추종자 무리인 파쇼 전투단을 이끌고 밀라노에서 로마까지 진군하는 이른바 '로마 진군'이란 퍼포먼스를 연출했고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작 그 '로마 진군' 당시 무솔리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본래 무솔리니란 인물은 기회주의자에 겁쟁이였던 인물인데 혹시나 로마 진군이 실패해 붙잡혀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파쇼 전투단 대원들만 로마로 보내고 자신은 안전한 밀라노에 숨어 있었다.
    실패할 경우 스위스로 도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나마 당시 이탈리아 국왕이었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를 수상으로 임명하며 내각을 맡기겠다는 칙서를 발표했으니 망정이지 만일 군대를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면 당시 파쇼 전투단 대원들은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보고 속된 말로 '개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나치 독일의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 역시 다르지 않다.
    히틀러는 자신이 집권할 때까지 나치 돌격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지만
    그가 1933년 당시 독일 대통령이었던 힌덴부르크의 임명으로 수상이 되며 권력을 잡았고 이듬해 힌덴부르크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까지 승계받으며 대통령과 수상을 겸한 총통이 되자 장검의 밤을 일으켜 그 전까지 수족으로 써먹었던 돌격대를 숙청하며 토사구팽했다.

    이런 사례는 비단 해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박정희의 수족이나 다름 없었던 중앙정보부장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날으는 돈까스'란 별명으로 불리며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지녔던 중정부장 김형욱의 최후는 정말 끔찍했다.
    일설에는 그의 시신이 양계장 해머밀에 갈려 닭모이가 됐단 말까지 있었다.

    김형욱의 후임자였던 이후락은 박정희를 위해 야권 유력 대권주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일본에서 납치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하지만 이후락은 그 사건이 있고 철저하게 박정희에게 버려졌고 이후 전두환이 제5공화국이 설립되고선 '부정축재자'로 몰려 당시 돈으로 194억이나 되는 재산을 모조리 몰수당했다.

    하물며 일개 조폭들의 경우에도 '오야붕'이 감옥에 가는 일이 발생할 경우 만만한 '꼬붕'에게 "네가 큰형님 대신 좀 빵에서 살다 와라"는 식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오야붕'에 대한 충성심으로 대신 복역했던 그 '꼬붕'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독재자들은 본래 의리 같은 것은 없고 권력에 대한 탐욕만 가득한 인물들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례를 볼 때 내란이 실패했을 경우 윤석열이 본인들을 지켜줄 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란이 성공할 것만을 기대하고 내란에 가담했고 결국 모두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신세가 됐다.
    그런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뭐가 달라지겠나?

    이제 와서 울고 불고 난리를 피운다고 해도 동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 지금도 한남동 관저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친윤 집회 참가자들도 당신들이 "윤석열 대통령 지시로 국회를 점거하려 했다"고 자백한 사실이 알려지면 모두 "배신자"라고 욕하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아마도 당신들 가족 외에 동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내란 수괴 혐의자 윤석열을 포함해 내란주요임무종사자들 모두에게 엄벌이 필요하다.

    이번에도 또 '용서'니 '관용'이니 하는 아름다운 단어로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면 또 다시 제2, 제3의 내란이 발생할 것이다.

    이는 보수 논객 조갑제 씨도 지적한 사안이다.
    필자도 그 말에 적극 동의한다.

    더 이상의 내란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윤석열과 그 일당에 대한 일벌백계(一罰百戒)가 필요하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2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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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1-11 15:56
    프리다 칼로가 그토록 강렬하게 그림을 그린 이유
    2024.11.22
    Washington Post


    Frida Kahlo, , 1951. (Galería Arvil/Banco de México Diego Rivera Frida Kahlo Museums Trust/Artists Rights Society)


    프리다 칼로는 왜 그림을 그렸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좀 더 정중한 접근 방식은 그녀가 그린 그림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것이겠다. 하지만 칼로의 경우 '왜'라는 질문은 그 모든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느껴진다.

    답을 찾으려고 해도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칼로가 자신과 자신의 삶의 에피소드를 너무나 자주, 그리고 매우 강렬하게 그렸던 것을 보면 칼로는 사람들이 그녀를 움직인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기를 원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프리다: 신화 너머》는 텍사스의 댈러스 미술관에서 열리는 매력적인 전시로, 칼로의 실제 작품들보다는 그녀가 살아온 삶과 그녀가 구축한 페르소나에 집중하는 최근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 전시 제목의 함의는 칼로가 (실제 그랬듯) 신화 창조자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 신화가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믿음이므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물론 그러한 충동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칼로(1907~1954)가 왜 그토록 자신을 신화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어했는지 물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다.


    Nickolas Muray, , 1939. (Nickolas Muray/Nickolas Muray Photo Archives)


    이 전시가 칼로의 작품보다 일생에 초점을 맞춘 것은 부분적으로 필요에 따른 결과다. 칼로의 작품을 대량으로 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칼로는 쿠사마 야요이, 앤디 워홀, 뱅크시와 함께 의식적으로 자기를 연출해낸다는 최근의 창의성 개념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하지만 나는 칼로가 반 고흐, 프랜시스 베이컨, 신디 셔먼에 정신적, 질적인 면에서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녀의 작품은 수요가 많다. 작품은 작을 수 있지만 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은 엄청날 수 있고 대여자들은 점점 더 대여를 꺼린다.


    하지만 꼭 필요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 전시가 칼로 일생에 초점을 맞춘 것은 21세기 문화의 산물인 우리 모두가 신화에 빠져있고 진정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화가 거품과 같다면 진정성은 거품이 터질 때 잠깐 동안 나타나는 것이다)


    Frida Kahlo, , 1947. (Banco de México Diego Rivera Frida Kahlo Museums Trust/Artists Rights Society)


    워홀 이전, 셔먼 이전, 마돈나, 레이디 가가, 비욘세 이전에 칼로는 변장과 위장, 감추기와 드러내기 등 자기 발명의 여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든 진정성을 유지했다. 칼로의 의상과 표상(인디오 원주민 드레스, 목걸이, 털 없는 솔로이츠퀸틀레 개, 뻗어나가는 상징물들)은 그녀의 끊임없는 자기 신화화를, 그녀의 일자 눈썹은 그녀의 근본적인 진정성을 가리킨다고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자 눈썹도 신화가 되지 않았나?

    댈러스 미술관의 아구스틴 아르테아가 관장과 동 미술관의 미국 미술 담당 큐레이터인 수 캔터베리가 기획한 이 전시는 두 개의 평행한 복도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한 쪽 복도를 따라갔다가 다른 쪽 복도로 돌아오는 구조다). 칼로의 작품 30점이 전시되어 있다. 절반이 조금 안 되는 작품이 종이에 그려진 작품이지만 결코 가벼운 작품이 아니다. (1926), (1932), (1932), (1952) 같은 드로잉은 마크메이킹(자국을 만드는 것)의 효과가 드러나는 만큼 생생하고 흥미진진하다.


    Frida Kahlo, , (Banco de México Diego Rivera Frida Kahlo Museums Trust/Artists Rights Society)


    또한 자화상, (각각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다양한 정물화, 칼로의 가장 특별한 작품인 (1933-1938)와 (1939) 2점을 포함한 16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칼로의 작품들은 그녀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 이모젠 커닝햄, 루시엔 블로흐, 줄리앙 레비, 니콜라스 머레이 등이 촬영한 같은 수의 칼로 사진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사진들에는 어린 시절부터 사망 직후까지의 날짜가 적혀있고, 한 점 한 점이 모두 매력적이다.


    이 모든 전시물들은 시간순으로 배열되어 있어 오래된 사진첩의 페이지를 넘기거나 특히 매혹적인 인플루언서의 소셜미디어 피드를스크롤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칼로는 왜 그림을 그렸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왜 자기 자신을 그렸을까?


    그녀는 한 가지로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것은 건강한 두려움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칼로는 그것을 아프도록 강렬히 느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결국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와 끔찍한 버스 사고로 인해 신체가 완전히 망가진 자신의 고통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를 위축시킨다. 우리의 다양한 정체성을 단순화시킨다. 칼로는 단순히 고통받는 여성으로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Frida Kahlo, , 1944. (Galería Arvil/Banco de México Diego Rivera Frida Kahlo Museums Trust/Artists Rights Society)


    마찬가지로 그녀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사랑했다. 하지만 리베라는 거대하고 카리스마가 넘쳤으며 어쩌면 압도적일 수도 있는 존재였기에 칼로는 단순히 디에고 리베라의 눈에 띄지 않는 아내로 알려지기를 거부했다.


    그녀의 신체적 고통이 가진 무게와 남편 리베라의 무게는 그녀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오히려 두 가지가 합쳐져 자극제가 되었다. 칼로는 더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자신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극적인 태도는 치명적일 수 있다.


    리베라 이전부터, 사고 발생 이전부터, 건강 문제가 생기기 이전부터 삶을 팽창시켜 살겠다는 열망은 처음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그림 그리기는 비록 위험이 따르기는 했지만(남편의 영역에서 경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극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길을 제공했다.

    내 생각엔 칼로의 자기 연출은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자 약혼한 사람이 경험하는 잊혀지고 소외되고 무시될지도 모른다는 특별한 두려움을 스스로 치료한 것이었다. 다른 이유가 무엇이든, 멕시코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공산주의에 대한 헌신은 그런 두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그녀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무도 프리다 칼로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의 가장 큰 무대에서 삶을 펼치기로 결심했고, 그녀가 영화배우(폴레트 고다르, 돌로레스 델 리오, 마리아 펠릭스), 연기자(조세핀 베이커), 예술가(이사무 노구치), 혁명가(레온 트로츠키) 등과 정사를 가진 것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결심 때문이었다.


    그녀는 멕시코 남성 벽화작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들은 원래의 건축물보다 주목 받으며 수 세기 동안 살아 남을 벽화를 통해 거대한 이념적 비전으로 멕시코 사회를 재구성하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그림들은 작고, 보석같았고, 사적인 암호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시시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 그림들은 그 얼마나 장엄하고 광대하며 심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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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바스찬 스미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워싱턴포스트의 미술평론가이자『라이벌의 예술: 모던 미술의 네 가지 우정, 배신, 돌파구』The Art of Rivalry: Four Friendships, Betrayals and Breakthroughs in Modern Art의 저자이다. 보스턴글로브에서 근무했고, 런던과 시드니에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가디언, 스펙테이터, 시드니 모닝 헤럴드를 위해 일한 바 있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로 대영박물관 어시스턴트를 거쳐 현재 국민대 강사로 강의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역서로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


    원문
    https://www.washingtonpost.com/entertainment/art/2024/10/18/frida-kahlo-beyond-the-myth-dallas/
    필자
    Sebastian Smee
    번역
    이희정
    편집
    김동규
    발행
    원문 2024.10.18번역·편집 2024.11.22


    멋진 그림을 감상하면서 원문에서 읽어 보기 반드시....
    https://www.pado.kr/article/2024112123068855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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