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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5-06-16 00:25"디올백 사건 후, 되레 김건희에 명품 선물 폭주…'윤핵관' 부인도 있었다"
박세열 기자
기사입력 2025.06.15.
윤석열 전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전 코바나 대표가 대통령 영부인으로 있던 시절 명품 가방 등을 수차례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언론 보도를 통해 제기됐다.
은 14일 보도를 통해 '한남동 대통령실 관저에 출입했던 김건희 여사의 지인'의 증언을 공개하며 "디올백 사건으로 여사의 취향이 확인되자 오히려 디올 명품 선물이 폭주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해당 지인은 이 매체에
"온갖 군데서 디올 명품과 선물권이 들어온 것이다.
여사 생일(9월) 전후로는 도배할 정도로 들어왔다.
디올 명품 선물을 준 사람 중에서는 실세 윤핵관 의원 부인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만 실세 윤핵관 부인'으로 지목당한 인사는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해명을 거부했다.
김 전 대표에게 디올백을 직접 건넸던 최재영 목사는 이 매체외 인터뷰에서 '자신이 건넨 300만원 상당의 디올백은 김 여사가 비서에게 쓰라고 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관련해 전직 대통령실 관계자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김건희가) 평소에 입는 옷도 디올이다. 관저에서 입는 평상복도 디올이었다"고 증언했다.
최 목사는 인터뷰를 통해
"그 사람들(윤석열·김건희)은 남의 눈을 신경 쓰는 사람들이 아니다.
타임라인을 살펴보면 내 사건(디올백 수수 사건)으로 나라가 온통 들썩이는 와중에 (건진법사를 통해 전 통일교 고위간부로부터) 샤넬백을 받은 것이다.
내 사건 때문에 온통 시끄러웠다면 돌려주거나 안 받아야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받은 것이다. 애초부터 그런 사람들이다"라고 주장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061523243678707&utm_source=naver&utm_medium=mynews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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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5-06-16 00:15[나]
대통령의 장관 입각 제의를 끝까지 거부한 기업가
[어떤 어른] 일반적인 기업인 문법에서 벗어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김종성(qqqkim2000)
25.06.15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제13권에 따르면,
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 자격으로 임시정부에 '정치자금'을 보내고 일명 맹호군인 한인국방경위대 편성을 후원했다.
1945년에는 미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무전법·촬영법·파괴법·낙하산 훈련 등을 받았다.
미국에 체류 중인 회사 오너가 이런 활동까지 했으니, 얼마나 적극적인 '정경유착주의자'인지 알 수 있다.
유일한은 '하지 말아야 할 정경유착'과 '해야 할 정경유착'을 구분했다.
일반적으로, 앞의 정경유착을 하면 돈이 들어오고, 후자의 정경유착을 하면 돈이 빠져나간다.
그런데 그는 후자의 정경유착을 하면서도 기업을 지켜내고 크게 키워냈다.
일반적인 기업인 문법에서 벗어난 인물이었다.
전자의 정경유착을 일관되게 거부해 세상의 주목을 받던 유일한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세상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소유한 유한양행 주식 전부를 유한중고교 재단에 기증하고 재산 일체를 사회교육사업에 쓰도록 했다.
유한동산을 꾸미라고 딸에게 준 묘지 일대 5000평과 학자금으로 쓰라고 손녀에게 건넨 1만 달러 이외의 재산은 사회에 다 환원했다.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라"가 자녀들에 대한 그의 유언이었다.
돈 많은 사람은 힘센 사람은 되기 쉽지만, 존경받는 어른은 되기 힘들다.
큰돈을 버는 과정에서 그런 어른이 될 기회를 잃기가 쉽다.
정당하게 벌었더라도 돈을 기반으로 존경을 얻는 것도 만만치 않다.
돈이 많은 재력가나 사업가보다는 돈이 없는 성직자들이 더 많은 존경을 받는다.
위의 기사 첫머리에 인용됐듯이 '돈이 말을 많이 하면 진리가 침묵한다'는 격언도 있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재력가나 사업가 중에 존경받는 어른이 거의 없는 것은
이들이 돈을 벌거나 쓰는 방식이 세상의 칭송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일한은 큰 사업을 일으키고 큰돈을 벌었으면서도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어른이 되어 있다.
이는 그가 재산 전부를 사회에 되돌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의한 정경유착을 일관되게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옳게 벌고 옳게 쓰는 기업인이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39724&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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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5-06-16 00:14[가]
대통령의 장관 입각 제의를 끝까지 거부한 기업가
[어떤 어른] 일반적인 기업인 문법에서 벗어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김종성(qqqkim2000)
25.06.15
▲부천시 중앙공원에 위치한 유일한 박사상위키미디어 공용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은 '재산의 사회적 환원'을 실천해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재산의 환원 못지않은 가치를 실천했다.
큰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정경유착을 일관되게 거부했다.
그 시절에는 정치지도자들이 '재산의 정치적 환원'을 기업가들에게 요구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 그런 시절에 정권과의 유착 없이 큰 기업을 키우고 지켜낸 것은 경이적인 일이다.
일본군의 동학혁명군 진압이 막바지에 달한 1895년 1월 15일에 평양에서 출생한 유일한은 아홉 살 때인 1904년에 미국 유학을 떠났고, 미시간대학 상과를 졸업한 지 3년 뒤인 1922년에 숙주나물 통조림 판매처인 라초이식품회사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에도 참여한 그는 서른 살 때인 1925년에 31세 많은 독립운동가 서재필과 함께 류한양행을 창립하고 영어로는 뉴일한(New il-han & Company)으로 표기했다.
1926년에 귀국해 그해 12월 10일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은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등을 판매해 회사를 키웠고, 1936년에는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는 선구자적 모습을 보였다.
해방 뒤에는 교육 분야로도 영역을 넓혀 1952년에 고려공과기술학교(유한공고)를 설립했다. 71세 때인 1969년에 경영 일선을 떠났다가 2년 뒤 타계했다.
1922년부터 1969년까지의 기간 동안, 노동자 권익을 보장하고 신제품을 개발하고 기업을 확장시키는 동안에 그가 특히 역점을 둔 것은 기업을 정치로부터 차단하는 일이었다.
그의 정경유착 거부는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면서 친분을 쌓았던 이승만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미주 지역 시장 개척을 위해 1938년에 미국으로 떠난 유일한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7월 18일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그해 연말에 재계는 8년 만에 귀국한 51세의 유일한을 경성상공회의소 회장(11.25)에 이어 조선상공회의소 회장(12.3)으로 추대했다.
이즈음에 그가 만난 인물이 71세의 이승만이다.
그는 미군정의 지원하에 해방정국의 실력자가 되어 있는 이승만을 예방하고자 서울 성북구 돈암장으로 찾아갔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쓴 은 "그 당시 장면을 말해준 사람에 의하면, 이승만 박사는 유일한 회장의 내방을 받고 직접 대문까지 나와서 맞았다고 한다"는 말을 들려준다.
이승만의 정경유착 요구 끝까지 거부
▲1969년 유한양행 대방동 사옥유한양행
그날 이승만은 "함께 앞날의 조국을 위해 일하자"는 말을 했다.
유일한은 이 말을 정치자금을 달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위 전기는 "이승만 박사의 심중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유일한 회장은 틀림없이 이승만 박사가 정치자금을 요청해올 것을 직감했다"라며 "미국에 있을 때도 그런 관계가 있었고"라고 기술한다.
정치자금을 달라는 의미가 얼른 드러나지 않는 "함께 앞날의 조국을 위해 일하자"라는 요청에 대해 의례적인 대답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유일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교적 명시적인 방법으로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저는 그렇게 큰 인물도 못 되지만, 기업과 민생 문제에 전념키로 했다'는 뜻을 표했다고 위 전기는 알려준다.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1948년 정부수립에 즈음한 시점에도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했다.
1992년 2월 27일 자 '결단의 한국인 (7):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은 "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그에게 상공장관으로 입각하기를 원했을 때
'내가 상공인인데 상공장관을 맡으면 정경분리의 순수성이 훼손된다'
고 고사"했음을 알려준다.
정경유착을 거부하는 자세는 정권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2017년 제20권 제4호에 실린 이기은 대구대 교수의 논문 '윤리적 관점에서 유일한의 리더십 분석'은 "유일한에게 탈세와 정치자금은 없었다"라며 "유일한은 기업과 정치는 결탁하거나 그 힘을 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강조하였다"고 한 뒤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의 정치자금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에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기술한다.
유일한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그곳에 기반을 쌓았다.
그가 이승만의 정경유착 요구를 끝까지 거부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요인도 작용했으리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철권을 휘두르는 정권의 압력에 맞서는 일은 신념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독재정권의 자금 요청을 거부하고 그 대신 야당을 지원하는 일은 좋은 평을 들을 수도 있다. 유일한은 이것도 하지 않았다.
위 논문은 "친분이 있는 야당의 정치자금 부탁에 대해서도 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원칙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해서도 적용됐다.
1961년에 군사정권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그들에게도 협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때보다도 정경유착을 거부하기가 더 힘들었던 시절은 일제강점기다. 이 시기에도 당연히 압력이 있었다.
1991년 8월 23일 자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78 유일한'은 "유한양행이 일본의 제약회사를 제치고 정상의 제약회사로 떠오르자 조선총독부의 직·간접적인 견제와 협박·권유가 훨씬 강화"됐다고 기술한다.
1994년 제9권에 실린 김신웅 청주대 교수의 논문 '유한양행과 한국 제약사업'은 "유한 말살을 목적으로 꾸민 세금 탄압 등 갖가지 압박"이 총독부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유일한은 제국주의 압력하의 식민지 한국에서 기업을 지켜냈다.
총독부에 굴하지도 않고 뇌물을 주지도 않았다.
이런 내공이 이승만·박정희의 압력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됐으리라 볼 수 있다.
히트 상품인 안티푸라민으로 정경유착이라는 염증을 제거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옳게 벌고 옳게 쓰는 기업인
▲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유한양행
그런데 그가 모든 유형의 정경유착을 다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세우는 일에는 아낌없이 투자했다.
제국주의 지배를 몰아내고 자주 국가를 건설하는 독립운동 앞에서만큼은 정경분리 논리를 내세우지 않았다.
지금은 독립운동과 정치 활동이 명확히 구분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이 정치로 인식될 때도 있었다.
일례로, 이정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의 에는 일제 간수가 어린 독립운동가 수형자들에게 "네까짓 것들이 건방지게 정치에 무슨 상관을 하느냐?"라며 면박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유일한도 그런 의미의 정치에는 헌신적이었다.
그가 그런 '정경유착'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미주 지역 사업을 위해 미국에 체류한 기간 동안의 행적이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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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5-06-16 00:00스무 살에 결혼자금 당겨 쓰더니, 3개 축구팀 구단주 된 '관습파괴자'
[멋있으면 다 언니 - 미셸 강②] "그냥 그래야 하는 사회에서 나는 문제아였다... 이제 기회 제공할 차례"
이주연(ld84)
25.06.15
성과만으로 이를 수 없는 '리더'에 오른 여성들에게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에 사회적 울림까지 담겨 있다면, 멋지다. 멋있으면 다 언니다.
- [미셸 강①] "대륙마다 축구팀 갖겠다"는 여자 축구계의 '미친자'
▲미셸 강은 2024년 7월 키니스카 스포츠 재단을 설립하며, 하나의 재단이 여러 축구팀을 관리하는 멀티클럽 모델 구축에도 나섰다. 기원전 396년 올림픽에 출전해 마차 경주 종목에서 최초로 우승한 여성 '키니스카'의 이름을 딴 재단이다. 사진은 재단 홈페이지 갈무리. ⓒ kynisca.com
"'그냥 하면 된다'는 어떤 관습도 따르는 게 싫었어요. 규칙을 따라야 하는 사회에서 저는 문제아였습니다." (더 애슬레틱, 2024년 11월 22일)
세 개 나라의 세 개 여자 축구팀(프랑스의 OL리옹, 미국의 워싱턴 스피릿, 영국의 런던시티 라이오네스)을 소유한 구단주, 미셸 강(66)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옆집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네가 못할 게 없다"
던 아버지와 11대·13대 국회의원을 지낸 변호사이자 정치인(이윤자 의원)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그의 반골 기질이 잘 나타난 것은 스무 살 때 였다.
전두환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1980년 정치적 격동기 때 서강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일찌감치 "여기서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해도 CEO의 비서밖에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녀는 미국 유학을 택했다.
"(나중에) 제 결혼 자금으로 쓰실 돈을 지금 저에게 주세요. 1년 학비만 대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부모님은 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는 그렇게 '한국'이라는 천장을 깨고 나갈 수 있었다.
훗날 미셸 강은 "그게 나의 첫 번째 비즈니스 거래였다"(더 애슬레틱, 2024년 11월 22일)고 말했다.
두 번째 천장 '여성이 세운 회사는...'
▲는 미셸 강을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자수성가 여성 중 한 명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포브스 홈페이지 갈무리. ⓒ forbes.com
CEO의 비서가 아닌 CEO를 꿈꿨던 미셸 강은 시카고 대학 경제학 학사를 마치고 예일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고, 방위산업체 임원이 됐다.
그의 나이 48세이던 2008년, '모두가 미쳤다'고 말한 두 번째 비즈니스 거래가 이뤄졌다. 미국발 금융위기 한복판에 IT 기업을 창업한 것이다.
"미국에서 여성이 세운 회사는 100만 달러 매출을 넘기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그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게 팀워크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조직의 힘을 키우기 위해 회사 매출이 2000만 달러일 때도 10억 달러 회사에 뒤지지 않는 조건을 내세워 직원들을 뽑았어요.
과감한 투자를 했기에 매년 매출이 두 자릿수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경제, 2022년 9월 21일)
결혼 자금을 당겨 쓰며 자신의 미래에 투자했던 미셸 강은, 이제 자신의 회사를 세워 공격적 투자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여성, 이민자, 창업가가 마주하게 되는 허들을 뛰어넘었다.
성공을 거뒀고, 2024년에는 기업을 매각하며 부호가 됐다.
포브스에 따르면, 미셸 강의 재산은 12억 달러(약 1조 6376억 원)규모다.
세 번째, 다른 여성들을 위해 천장 깨기
▲파산 직전이었던 런던시티는 미셸 강이 구단주가 된 후 1년 반 만인 2025년 5월 잉글랜드 여자 챔피언십 우승을 확정했다. 우승을 함께 축하하고 있는 미셸 강과 선수들의 모습 ⓒ www.londoncitylioness.com
그녀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세 번째 비즈니스 거래는, 시중 거래금의 10배를 주고 여자 축구단을 인수하면서 이뤄졌다.
미국의 여자 프로 축구 리그에서 지분을 소유한 '최초의 유색 인종 여성' 구단주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잇따른 협상 결렬 끝에 미셸 강은 2021년 12월 워싱턴 스피릿을 3500만 달러(약 470억 원)에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워싱턴 스피릿과 같은 리그 내 팀인 시애틀 레인FC가 대부분의 지분을 351만 달러에 매각한 데 비하면 10배에 달하는 규모다.
워싱턴 스피릿을 인수할 당시, 선수들은 전임 감독의 폭력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셸 강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축구단 운영을 맡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단순히 축구단을 떠맡은 게 아니었다.
2022년 한국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급한 불은 껐으니 선수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미국에서 남자 축구 선수는 40만 달러가 넘는 연봉을 받지만 여자 선수의 평균 연봉은 4만 달러에 그쳐 대부분 여자 선수들이 대학 졸업 후 축구를 포기한다"는 현실을 명확히 짚고 있었다.
미셸 강은 "3년 내 선수 연봉과 팀 운영 등 모든 면에서 워싱턴 스피릿을 세계 최고의 여자 축구팀으로 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셸 강은 본인 소유 팀의 처우 개선에만 나서지 않았다.
2024년 11월 미국 축구협회에 향후 5년 간 3천만 달러(약 410억 원)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축구협회는 이 소식을 알리며 "미국 여자 축구에 대한 역대 최대 기부액"이라고 전했다.
"미국 축구는 현재 운영 중인 국가대표팀 캠프의 수를 두 배로 늘릴 수 있으며, 이는 유소년 국가대표팀을 위한 연령대별 6개 캠프에 해당합니다.
특히 여성과 소녀들을 위한 캠프에 자금을 지원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미국 축구 협회의 디지털 인재 발굴 플랫폼 구축에 도움이 돼, 청소년 국가대표팀 선수 선발 과정에서 10만 명의 여성 선수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미국 축구협회, 2024년 11월 19일)
여자 축구계의 지평을 바꿔내고 있는 미셸 강은 2024년 8월 여성 엘리트 운동선수들의 건강과 성과 향상 등을 위해 5천만 달러(약 680억 원) 규모의 글로벌 투자 펀드를 설립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올해 4월 2500만 달러(약 340억 원)를 추가 기부하겠다고 나섰다.
"운 좋게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내가, 이제 기회를 제공할 차례입니다"
▲워싱턴 스피릿의 구단주 미셸 강. ⓒ 워싱턴 스피릿 SNS 갈무리
이처럼 막대한 돈을 기부하는 이유는 걸까.
"결국 우리의 목표는 모든 여성 팀이 (우리 팀처럼) 여성 선수를 훈련시키는 방식을 채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하는 것보다는 미국 축구 같은 조직에서 훨씬 더 (이 목표를) 잘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인구의 절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ESPN, 2025년 5월 6일)
더 궁극적으로는, '기회의 제공'이다.
인구 절반의 머리 위에 있는 '유리 천장'을 깨는 데 일조하려는 것이다.
"저는 지금의 여성 세대가 제가 겪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겪은 일이라는 건, 항상 더 많은 것을 증명하고 직장에서 한 시간을 더 보내야 한다는 걸 뜻합니다." (파이낸셜타임스, 2024년 5월 25일)
"나는 이민자고 운이 좋게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어요.
이제 내가 기회를 제공할 차례입니다.
제가 동등한 기회는 줄 수 있으니까요." (가디언, 2024년 8월 19일)
자기 앞에 놓인 관습을 파괴해 온 그는 이제, 세상의 관습을 깨고자 한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38863&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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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5-06-15 17:28이재명의 공감정치- 이런 환한 미소를 본 적이 있는가?
유영안 논설위원
기사입력 2025/06/14
위의 사진은 이재명 대통령이 대통령실 식당에서 근무하는 분들을 격려하는 장면이다.
근래 저토록 환하게 웃고 있는 국민들을 본 적이 없다.
반가운, 너무나 반가운 표정들이 아닌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정부의 대통령이 식당 근무자들을 일부러 찾아가 인사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회에서도 청소를 하는 분들을 찾아가 고마움을 표시했다.
사진 속의 한한 미소, 저게 바로 공감이고 진정성이다.
그것은 결코 사진으로 연출할 수 없는 것으로, 거기엔 항상 낮은 곳을 지향한 이재명 대통령의 전생애가 투영되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전통시장에 가면 바닥에 앉아 장사를 하는 할머니들을 찾아가 대화하고 소소하나마 물건을 사기도 하였다.
전에 시장에서 일하신 어머니를 떠올린 것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바로 그런 모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공감이란 경험의 공유와 진정성에 나오는 마음의 작용이다.
누구든 말로는 “고맙다, 잊지 않겠다, 여러분을 위해 일하겠다”고 할 수 있지만,
때론 언어의 수사에 지나지 않고 오히려 역행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과 고난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온 이재명 대통령의 언행은 다르다.
지난 대선 때 이재명 후보가 성남시 상대원동 시장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백한 어린 시절은 전국민을 울렸다.
그 공감이 오늘날의 이재명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감은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가짜뉴스나 다른 잡음이 들려와도 그 믿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수구들이 온갖 죄를 조작해 이재명 대통령을 제거하려 했지만 이렇다 할 증거 하나 내놓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국민들은 이재명 대통령이 수구, 특히 검찰과 언론에 당하고 살았구나, 하고 알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수구들이 주구장창 외친 ‘이재명 사법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당선을 가져다 준 것이다.
반면에 윤석열은 수십 가지가 넘은 소위 ‘본부장 비리’를 모두 검찰을 이용해 덮었다. 거기에다 내란까지 일으키자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윤석열을 파면시키게 한 것이다.
가짜뉴스와 선동으로 형성된 여론은 금방 물거품이 될 수 있지만,
오랜 시간 공감으로 형성된 민심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전자가 모래성이라면 후자는 견고한 돌담이다.
수구 언론이 아무리 떠들어도 돌담처럼 견고한 국민 정서는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수구들이 이재명을 제거하고 싶어도 제거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국민을 이기는 정권은 없기 때문이다.
지난 아픈 시간과 그것을 같이 극복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필자가 쓴 시 두 편을 소개한다.
[우린 잠시 터널을 지나고 있을 뿐이야 ]
때때로 예고도 없이 바람이 불고 땅이 흔들리며 등고선이 좁혀지는 그런 시간이 찾아오곤 하였지. 그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면마비 현상이 일어나곤 하였다.
간혹 앞이 흐려지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진앙(震央)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로부터 뭔가 꿈틀거렸고 악몽을 꾸다가 부스스 일어났다.
그때마다 어느 산골 소문도 없이 우거진 자작나무 가지에 흩뿌려진 하오의 햇살 밑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엎드려 적군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사내들이 떠올랐다.
고개를 들면 멀리 능선을 이루며 타오르던 그토록 많은 나방들이 저마다 푸른 눈을 뜨고 성난 파도처럼 꿈틀거리며 야만의 기슭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범도 이 사람아, 그냥 포수나 하지 왜 먼 땅으로 가 극장지기를 하다가 수십 년 만에 찾아온 조국 땅에서 그런 수모를 당하고 사는지 그대 옆구리에 찬 권총이 슬퍼 보인다.
하여도 근원(根源)을 알 수 없는 깊은 땅속으로부터 뭔가 꿈틀거리는 게 보이는가. 잠시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다고 설마 저토록 뿌리 깊은 조선 소나무가 쓰러지겠는가.
조금 더 가면 저만큼 반원의 햇살이 점점 커지며 온몸 가득 햇살 환한 그런 시간이 다시 올 거라 믿고 걸어가는 사람들, 우린 잠시 터널을 지나고 있을 뿐이야.
[바람이 살다간 집 ]
지붕에 쌓인 눈이 햇살에 녹아 밑으로 자란 시간을 만들었다. 살짝 건드려도 떨어질 것 같은 무딘 창끝을 바닥에 겨누고 무슨 말을 하려다 혼자 운다. 흐르지 못하고 얼어버린 생애가 너 하나뿐이랴.
구멍 난 창호지 사이로 바람이 오가고 문풍지가 밤새 떨고 있다. 달빛이 슬며시 찾아와 방안을 고요히 비추면 아랫목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사진 속 할머니를 바라본다.
인기척 없는 집에 빗소리만 요란하다. 먼지 쌓인 장독이 더욱 까매지고 마당가 감나무에 열린 홍시 한 알이 아직 남아 있으나 누구도 딸 생각이 없고 참새도 그냥 지나간다.
뚜껑 열린 가마솥이 눈을 널름널름 받아먹고 있다. 타다 만 장작에 눈이 내려 흑백의 시간들이 서로 껴안는다. 녹슨 낫 하나가 황토벽에 걸려 멀리 펼쳐진 들녘을 바라본다.
아직 입을 벌리고 있는 우체통엔 빛 바란 편지들이 쌓여 있다. 구멍 난 창호지 사이로 도둑고양이가 드나든다. 휘어진 철사가 깨진 벽돌을 붙잡고 있다.
~~~~~~~~~~~~~~~~~
인용한 필자의 시 두 편에 뭔가 공감되는 게 있다면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우리 뮤지컬 ‘어쩌면 헤피엔딩’이 공연계의 아카데미상인 토니상에서 6개 부분을 휩쓸었다.
한국 축구도 쿠웨이트를 4대0으로 이기고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주가도 2900을 돌파해 곧 3000이 될 것 같다.
TV를 안 보던 국민들이 요즘엔 뉴스 보는 재미로 산다고 한다.
‘어찌 우리가 가난하랴’, ‘상록수’ 같은 국민이 있는 이상 한국은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그걸 해 낼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끝까지 응원하자.
‘비판적지지’란 회색주의자들의 변명이다.
아가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그냥 지지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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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5-06-15 16:48'독립군 토벌' 백선엽 미화 영화, 국회 시사회 개최 논란..국회 "허가 이유 말 할 수 없다"
'국회, 김건희 비판 영화 는 불허 / 친일 백선엽 영화 은 허용',
'독립운동가 후손, 조국혁신당 일부 의원 등, 현장 찾아 격렬히 항의',
'백범 김구 증손 김용만 민주당 의원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비판'
윤재식 기자
기사입력 2025/06/13
[국회=윤재식 기자]
독립군 토벌대인 일제괴뢰 만주국의 ‘간도특설대’ 장교 출신인 백선엽을 6.25전쟁 영웅으로 미화한 영화 ‘승리의 시작’ 13일 오후 국회에서 시사회를 가져 논란이 되고 있다.
▲ 13일 오후 백선엽 미화 영화 '승리의 시작' 시사회가 열리는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 앞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 윤재식 기자
해당 영화는 일제강점기 당시 스스로가 독립군을 토벌한 적 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던 백선엽을 6.25 전쟁의 위기 속에서 공산군을 막아내고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등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만 편협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편협한 내용임에도 국회는 해당 영화의 국회 내 시사회를 허가했다.
앞서 2달 전 예약된 서울의소리가 제작한 김건희 다큐영화 ‘퍼스트레이디’의 시사회를 ‘국회 질서 유지’ 명목으로 개최 5일을 남기고 일방적으로 취소시킨 것과 너무도 다른 결정은 한 것이다.
▲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백선엽 영화 국회 시사회장 앞에서 항의하는 모습 © 윤재식 기자
결국 이날 시사회에서는 국회가 ‘퍼스트레이디’ 무산의 명분으로 삼았던 ‘질서 유지’가 되지 않았다.
시사회 30분 전인 오후 1시30분께부터 백선엽 미화 영화 상영을 반대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시민단체 그리고 조국혁신당 강경숙 의원과 황운하 의원 등이 시사회가 열리는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 앞을 찾아 거센 항의를 했다.
이 과정에서 시사회장을 찾은 관람객과 시민들 사이에 욕설이 오가는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 국회 시사회 거부당한 김건희 비판 영화 '퍼스트레이디' 국회 시사회 포스터 (좌)/ 국회 시사회 승인된 백선엽 미화 영화 '승리의 시작' 국회 시사회 포스터 © 서울의소리
조국혁신당은 이와 관련해
“백선엽을 미화하는 영화의 국회 상영은, 단순한 기념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독재의 향수, 친일의 망령, 그리고 학살의 책임을 지우려는 정치적 기획이다”라고 정의하면서
“이러한 시도가 국회의 문을 통과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곧 국민주권의 부정이자 대한민국 헌법이 천명한 ‘항일독립의 역사’와 ‘민주항쟁의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소리 높였다.
이어
▲국회의장과 관련 상임위는 즉각 이 영화 상영에 대한 진상 조사 및 국회 내 역사 왜곡 및 반헌법적 콘텐츠 상영에 대한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책 마련
▲국민의힘은 친일과 독재의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 채 역사왜곡을 선동하고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책임 있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
▲국회는 특정 정파의 역사전쟁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공공 공간의 역사윤리 지침’을 제정하여 제도화 등을 촉구했다.
▲ 조국혁신당 강경숙 의원도 이날 백선엽 미화 영화 ''승리의 시작' 시사회를 규탄했다 © 서울의소리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인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이날 오전 백선엽 미화 영화가 국회 내에서 시사회를 갖는 것에 대한 입장문을 발표하고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며 탄식했다.
김 의원은 또 “백선엽은 지난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인정한 ‘국가공인 친일파’라면서
”이런 인물을 영웅으로 찬양하는 시사회를 기획한 국민의힘은 대체 어느 나라 정당인가. 내란당에 친일파 정당임을 셀프 인증하나“라고 일갈했다.
▲ 백선엽 미화 영화 '승리의 시작' 국회 시사회 © 윤재식 기자
이어 ”국회에서 선열들을 토벌 대상으로 삼은 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국회에 올리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이번 시사회 관련 국회 담당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자신은 사건 당시 담당자가 아니었으며 이번 시사회 개최 관련해 어떤 것도 말해 줄 수 없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앞서 영화 경우
국회는 시사회 불과 5일 남기고 불허를 통보한 이유에 대해 ‘국회 질서 유지’ 때문이라면서 국회 회의장 내규에 의해 김민기 국회사무총장이 소집한 운영자문위원회에서 자문위원들의 도출해 낸 결정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었다.
한편 백선엽 미화 영화 ‘승리의 시작’ 국회 시사회는 국민의힘 성일종, 나경원, 박덕흠, 임종득 의원이 공동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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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5-06-14 15:40美서도 발생한 '입틀막' 사건
현직 상원의원도 수갑 채우고 무릎 꿇려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6.14
최근 미국에선 강압적인 불법 이민자 단속이 이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로스앤젤레스(LA)에선 연일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져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민자 추방을 주도하고 있는 장관이 "사회주의에서 LA를 해방시키겠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이 과정에서 한 상원의원이 영장도 없이 체포해도 되는 거냐고 질문을 하려하자, 무릎 꿇리고 수갑을 채워 제압하는 일이 벌어졌다.
크리스티 놈 미국 국토안보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LA를 사회주의자 그리고 주지사와 시장의 답답한 지도력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며 LA를 사회주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방위군을 계속 주둔시킬 거라고 말했다.
이때 한 남성이 질문 있다고 다가가자 현장 요원들이 거칠게 밀어냈다.
이에 그 남성은
"손 떼라! 저는 알렉스 파디야 상원의원이다. 장관님께 질문 있다"
며 자신이 상원의원이라고 밝혔지만 그래도 현장 요원들이 강제로 회견장 밖으로 끌어내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급기야 무릎을 꿇리고, 바닥에 눕힌 채 몸 뒤로 수갑을 채웠다.
'미국판 입틀막' 사건에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들끓었다.
이에 국토안보부는 신원을 밝히지 않아서 공격자로 오인했다고 해명했다.
문제의 알렉스 파디야 의원은 멕시코 출신인데 범죄자가 아닌 지역사회를 공포에 떨게 하는 일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 전날 하루 LA에서만 80명이 체포됐다.
텍사스 주지사도 공공안전국 요원 2000명과 주방위군 5000명을 배치했고,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주지사 동의 없이 주방위군을 배치한 건 법률과 헌법 위반이라는 연방법원 판결이 나왔다.
아울러 주방위군 통제권도 주지사에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이번에도 법원 판결을 무시했다.
트럼프가 항소하면서 2심 판결이 나올 때까지 주방위군은 일단 LA에 계속 남게 됐고 항소법원의 심리는 오는 17일에 열릴 예정이다.
이미 인터넷 상에선 상습적인 불통 행보를 보인 트럼프를 가리켜 '트석열(트럼프 + 윤석열)'이란 별명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제 정말 '트석열'로 굳어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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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5-06-14 15:03((꼭 한 번 읽어 봤으면 하는 좋은 기사!)
에로배우 아니었어?... 배우 이혜영이 선사한 감동 메시지
기자명 아이엠피터(임병도)
입력 2025.06.14
[리뷰] 영화 '파과' 배우 이혜영
▲ 영화 '파과' 포스터 © (주)NEW
OTT 서비스 에서 영화 를 봤습니다.
원작 소설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저 무료 쿠폰이 지급돼 선택했습니다.
영화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60대 여성 킬러라니, 그리고 배우 이혜영이라니
5~60대 남성이라면 배우 이혜영을 '에로 배우'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혜영은 1980년대 '무릎과 무릎 사이', '땡볕', '여왕벌', '티켓 '등 이른바 '성인 영화'에 다수 출연한 배우입니다.
1970년생인 기자는 고등학생 때 영화 한 편 가격만 내면 두 편을 볼 수 있는 변두리 극장에서 이혜영이 출연한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몰래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이혜영은 서구적인 외모와 도도한 연기로 많은 남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배우였습니다.
이혜영 "독재정권이 여배우를 창 녀로 만들어"
▲ 1988년 11월 배우 이혜영의 인터뷰 기사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80년대 한국은 성인 영화의 전성 기였습니다.
배우 안소영, 이보희 등의 노출신을 연상케 하는 포스터는 남성들을 극장으로 달려가게 만들었고, 남학생들은 성인 영화를 봤다며 친구들에게 무용담을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중에서야 한국에 성인 영화가 범람했던 이유가 전두환 군부독재가 민주화를 막기 위해 시행했던 3S( Screen, Sports, S e x)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배우 이혜영은 1988년 와의 인터뷰에서
"독재정권이 여배우를 창 녀처럼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혜영은 "독재란 게 다 남성 중심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며
"배우, 특히 여배우를 정당하고 진진하게 보는 풍토가 생기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우 이혜영은 '페 미 니스트'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대에 이미 여성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 선구자였던 셈입니다.
2025년 60대 여성 킬러를 연기하면서 다시금 증명했습니다.
이혜영은 뮤지컬 배우 출신입니다.
그래서 배우의 목소리가 아닌 성우 더빙이 기본이었던 80년대 영화에서도 본인의 목소리로 연기했던 배우였습니다.
이혜영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만든 거장 이만희 감독의 딸이기도 합니다.
60대 여성 킬러로 돌아온 이혜영 "나이 들어도 쓸모를 증명해야"
▲ 영화 '파과' 스틸컷 © (주)NEW
영화 를 보는 내내 '60이 넘은 여배우가 저렇게 액션을 한다고?'라며 깜짝 놀랐습니다.
일부 액션신은 스턴트맨이 대역을 했지만 배우 이혜영이 보여준 연기는 처절함마저 보였습니다.
실제로 이혜영은 영화 촬영을 하면서 갈비뼈 3개가 부러졌다고 합니다.
이혜영은 영화 내내 '쓸모 있음'을 반복적으로 말하며 증명하려고 합니다.
의사에게 자신의 질병을 회사에 알리지 말라며 아픈 몸을 숨깁니다.
대모로 불리지만 한물간 킬러 취급을 받고 있는 와중에 버려질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입니다.
수의사 강봉희 (연우진 분)는 노견을 구해준 이혜영에게
"늙고 병들었다고 버림받는 거 너무 잔인하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킬러 투우(김성철 분)는 오래되고 무른 과일 (파과 破瓜)을 발로 짓밟습니다. 쓸모 없으면 버려지는 지금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70살이 넘어서도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60살, 아니 50살만 넘어도 고용해 주는 회사를 찾기 어렵고 일할 수도 없습니다.
냉장고에서 겨우 버틴 물러진 과일처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만 같습니다.
쓸모가 없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쓸모 있음을 증명하려는 배우 이혜영의 연기와 자격증을 따려고 학원을 기웃거리는 동년배들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배우 이혜영은
"젊은 배우에게도 기회가 없다는데 나에게 이런 역이 들어오다니 놀랐다"면서
"편하게 배우를 할지, 도전할지 고민하다가 도전을 선택했다"고 밝혔습니다.
(관련기사: "'킬러 할머니' 도전하다 갈비뼈 부러졌지만… 한 수 배웠다")
영화 는 아직도 성인 영화를 몰래 보던 고등학생 때의 기억이 생생하지만
현실은 쓸모없어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50대, 60대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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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5-06-14 01:23[사설] 이스라엘-이란 전면 대결, 미국 리더십 더 이상 믿을 수 있나
수정 2025-06-13
이스라엘군의 13일 대대적인 선제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이란이 보복을 위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중동의 ‘숙적’인 두 국가 간의 전면 대결이 현실화하면서 유럽과 중동에서 진행 중인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 중국 견제에 국력을 집중하려던 미국의 향후 전략에도 큰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치밀한 전략 없이 섣부른 호언장담만 쏟아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리더십에도 큰 상처가 나며, 한반도가 속한 인도·태평양 지역에까지 상당한 파장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미 동맹에 전적으로 기대는 외교안보 정책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날 이란에 공격을 가한 직후 대국민 연설에 나서 “방금 전 이스라엘이 라이징 라이언(떠오르는 사자) 작전을 시작했다. 이는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란의 위협을 격퇴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200대 이상의 전투기를 동원해 100곳 이상의 타깃을 동시에 공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 공격으로 이란의 나탄즈 핵시설이 큰 피해를 입었고, 호세인 살라미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총사령관 등 군 수뇌부와 페레이둔 아바시 에너지위원회 위원장 등 핵 개발을 이끌어온 핵심 과학자들이 숨졌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시오니스트 정권(이스라엘)은 스스로 씁쓸하고 고통스러운 운명을 확정했고, 반드시 그 운명이 자기에게 찾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은 100대 이상의 무인기를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의 이날 공격은 지난 4월 미국과 이란 사이의 핵 협상이 재개된 가운데 이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유산이었던 이란 핵협정(JCPOA)을 파기하며,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부활했다.
그러자 이란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우라늄 농축 작업을 이어가 농축도가 60%에 이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분석에 따르면,
이란은 9발 정도의 핵탄두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핵 잠재력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협상을 통해 미국은 우라늄 농축을 ‘전면 중단’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란은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현재 상황을 자신들이 감내할 수 없는 안보 위협이라 판단한 이스라엘이 미국과 사전 협의 없이 대담한 군사 작전에 나선 꼴이 됐다.
미국은 협상에 성공하지도, 이스라엘의 공격을 억누르지도 못하면서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나아가 이란이 ‘피의 보복’에 나서면서 중동 정세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자신이 취임하면 우크라이나(유럽)·가자(중동) 전쟁을 단숨에 끝낼 수 있다고 말해왔지만, 동맹을 경시하는 무분별한 접근으로 세계를 더 큰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에게도 ‘가혹한 관세’를 부과하며 견디기 힘든 경제적 고통을 안기고 있고,
머잖아 ‘대중 포위망’의 최전선에 서라며 비합리적인 압박을 가해올 게 뻔하다.
미국만을 맹종하는 의존적 자세를 버리고,
끈질긴 협상을 통해 우리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1202744.html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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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5-06-14 01:22((꼭 한번 읽어 봤으면 하는 좋은 글))
대동사상의 어제와 오늘 [안병욱 칼럼]
수정 2025-06-13
안병욱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이재명 대통령은 6월4일 당선이 확실해진 뒤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행한 첫 연설에서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공평하게 기회를 함께 누리는 억강부약의 대동세상을 우리 함께 만들어” 가자고 했다.
선거 유세 중에도 자주 대동세상을 언급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도 선거 유세에서 “전봉준의 땅에서부터 함께 사는 대동세상을 만들어나가고 싶다”고 했다.
대동 용어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개혁 이념과 이상적인 염원을 담는 표현이다.
이 말은 대부분 ‘예기’의 ‘예운편’(禮運編)과 ‘서경’의 ‘홍범’(洪範), 그리고 ‘주역’의 ‘동인괘’(同人卦) 풀이에 연원을 두고 있다.
우선 조선 시대 위정자들은 정책을 논의하고 토론할 때 자기주장을 높이는 수단으로 ‘홍범’의 ‘당신도 같은 의견이고 점괘도 부합하고 고관들과 서민들의 의견도 모두 같게 되면 이것을 대동이라 한다’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
혹은 ‘동인괘’의 전(傳)에서 ‘남과 함께하는 자가 천하 대동의 도리로서 하고… 사사로운 바에 매이지 않으면 지극히 공정하고 대동한 도여서 먼 곳도 함께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형통함을 알 수 있다’고 풀이한 것을 내세웠다.
이상사회 지향의 대동사상은 ‘예기’ 예운편에 설명돼 있다.
예운편에 대도(大道)가 행해지면 천하에 공의(公義)가 구현된다고 했다.
‘현명한 자를 지도자로 뽑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수여하며 신의와 화목을 가르치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은 재화를 꼭 개인적으로 저장해야 할 필요도 없고 또 일하는 것도 오직 자기만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며, 남을 해치려는 음모가 생기지도 않고 도적이나 난적(亂賊)도 발생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대동이라 한다’고 풀이했다.
조선 사회에서 대동사상으로 나타내고자 한 바는 역대 중국의 이상사회 논의와는 차이가 있었다.
곧 조선 대동론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의식이었다.
당시 조선 지배층은 신분 차별적인 통치체제를 고수하면서 고질적인 폐단들을 미봉책으로 넘기곤 했다.
이 같은 지배층에 맞서 사회 변화에 따른 제도 개혁을 위해 내세운 평등 지향의 이념이 곧 대동이었다.
민중은 과중한 수취와 부역, 심화한 빈부격차, 신분 차별의 불합리한 제도 운영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동 이념을 강조했다.
이런 개혁의식은 공납제 폐단을 혁신한 대동법 창안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대동법은 그동안 가호(家戶)에 부과해오던 공납제를 폐지하고 토지세를 신설하여 쌀로 납부하게 하는 새로운 세법이다.
이 제도로 많은 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배층과 세도가들이 결과적으로 그동안 평민들이 납부하던 세금을 대신 부담하게 됐다.
따라서 토지 소유층인 양반 지배층으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이에 사회적 인식을 획기적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에 따라 새로운 제도 명칭을 민중이 앞서 대동법으로 호칭하고 나섰다.
정책 당국자들도 처음에는 선혜법으로 부르다가 민중의 의지를 쫓아 뒤늦게 명칭을 대동법으로 변경했다.
뒷날 정조도
‘대동법이라는 이름은 기자 홍범(洪範)에서 취한 것이며 그런 이름은 옛날 삼대 이전에도 없었고, 삼대 이후에도 없었으며, 중국에도 없던 이름이다. 오직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이름’
이라고 하면서 의미를 높게 부여했다.
이 같은 사회의식은 비단 공납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았다.
영조 대에는 군역 변통책 마련이 시급한 과제였다.
군역은 평민들만이 부담해온 신분 차별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다.
영조는 군역을 신분 차별을 없애는 호포제로 개혁해서, 위로는 왕자 대군 등 왕족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균등하게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혁신을 영조는 대동론을 앞세워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19세기 초 연기군에서는 양반·평민이 함께 개최한 향회에서 그동안 빈민들이 부당하게 떠맡아 왔던 것을 부민들에게 부담시키기로 했다.
수령은 ‘부민은 원망하고 빈민은 혜택받게 된’ 저간의 논란을 순영(巡營)에 보고하면서 이런 해결 방안을 ‘대동’ 또는 ‘대동지역’(大同之役)이라 표현했다.
부민은 ‘토지가 많고 넉넉하게 사는 자’들이고 빈민은 ‘토지가 적고 가난한 자’들이라고 했다. 당시 평민·양반이 함께 향회를 열어 고을의 행정을 논의하는 이념적 기조는 바로 이 대동사상이었다.
대동이란 용어를 누가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따라 그 지향하는 의미가 달랐다.
체제와 정책 비판을 위해서, 때로는 현실의 불가피한 사정을 설명하기 위한 논거로 거론했다.
19세기 농민들은 개별적 논의에서 집단적 저항운동으로 이행하는 시기의 첨예한 사회의식을 대동으로 표방했다.
그렇게 대동론은 사회 변동을 추동하는 이념 구실을 했다.
대동론은 조선 후기 사회 변화를 투영하는 역사의식이었다.
수유리 4·19 묘지에서 진달래 능선을 따라 북한산에 오르다 보면 성벽을 좌우로 거느린 큰 성문을 만난다.
이 성문에 대동문(大同門)이라는 현판이 1980년대 초까지 걸려 있었다.
동쪽으로 난 문을 뜻하는 한자 표기 東(동) 자를 새기지 않고 왜 함께 같이한다는 뜻의 同(동) 자를 사용하였을까.
지금은 물론 그때의 현판은 떼어지고 東(동) 자의 대동문이 걸려 있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살인 학살의 계엄군대를 몰아내고 헌혈로 피를 나누어 부상자를 살리고 주먹밥으로 끼니를 함께하면서 해방의 대동세상을 펼쳤다.
1984년 고려대 학생들은 대학 축제 명칭을 그동안의 ‘석탑축전’에서 ‘석탑 대동제’로 바꾸었다.
이를 기점으로 다른 대학들도 행사명에 ‘대동제’를 덧붙인 명칭으로 축제를 진행했다.
당시 대학축제 대동제는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고,
그때부터 대동제는 대학 반정부 시위의 또 다른 표현이 됐다.
이를 빌미로 천박한 위정자들은,
수백년 전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깊은 산속 문루까지 역사의 방향을 가리키며 대동(大同)이라 하던 것까지 왜곡시켜 단순히 동쪽의 문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나는 그 문루 밑을 지날 때마다 늘 죄지은 듯 송구스럽다.
그래도 역사의 방향을 지시하는 그 대동문 현판이 언젠가 다시 걸릴 대동세상을 상상하며 북한산을 오른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02580.html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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