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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 nights of quiet stars
  • 13
  • 깊고 푸른 밤(@djckvl)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12-2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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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0

  • 29
    아기작 (@can439)
    2023-11-21 05:40
    밤님..홧팅입니다...

    댓글 1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11-20 22:10
    santiago 通信_ 100


    백 회다. 드디어 백 회째를 맞았다. 칼럼도 에세이도 아닌 이 어정쩡한 글의 연재가 끝내 100 번째에 도달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조차도 100 회를 쓰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맨 처음 글을 쓸 때만 해도 몇 회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그만두겠지 싶었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미욱한 구석이 있었던 것인지, 이제 '회사' 와는 연을 끊어버리고 그야말로 바람 찬 황야에 홀로 남겨진 낭인이 된 처지의 절박함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이런 길고 지루한 작업이 어울리는 '적령' 에 도달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여기까지 왔다. 또다시 말하지만 처음 이곳에서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습작'이었다.

    힘을 빼고 일상의 가벼운 이야기를 쓰는 곳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늘 했었다. 블로그는 막연했다. 그 영역이 너무 넓어서 망망대해에 종이배를 띄우는 기분이었다. 일기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긴장감이 없다면 글을 써야 한다는 절박함도 덜해지게 마련이다. 블로그가 아니라도 다른 대안은 있었지만 그런 곳에는 선뜻 글을 올리는 게 망설여졌다. 회사와 일 할 때에도 '마감후기' 같은 글은 몇 번 써 보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메모에 불과한 짧은 글이었다. 말도 글도 이젠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으니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나 주제를 잡아서 글을 쓴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연습 삼아 우선 여기서 몇 번 써 볼까...가 그 시작이었다.

    인라이브에서 강산이 변하고 남을 만큼의 시간을 보내면서 알게 된 각별한 분들이 있다. 일일이 안부를 묻거나 근황을 알 수는 없지만 간혹 생각이 날 때는 그들의 '로그'를 찾아보게 된다. '팔로워'라는 기능이 그래서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그들을 둘러보듯 그들도 가끔 나를 들여다본다는 것을 안다. 시나 노래 가사를 그래픽으로 올리는 건 그 이유다. 개인적으로 그런 작업이 재밌기도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 오랜 지기들을 위해 내놓는 마음의 차茶 같은 것이다.

    처음 글을 썼던 날을 기억한다. 당시의 시국에 나름 비분해서 좀 쓸쓸한 기분이었다. 그땐 윤석열이 결국 대통령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로부터 2년 10개월이 흘렀다. 가끔 써 놓은 글을 다시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부끄러운 글도 있고, 거의 매주 규칙적으로 올리는 터라 마감이라는 기분이 있어서인지 후다닥 몰아서 대충 써갈긴 글도 있다. 뭐가 됐든 '이것은 어디까지나 연습' 이라는 전제가 있으니 여태까지 엉망진창 뻔뻔하게 써온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세상은 맨 처음의 그날보다 더 암울하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마음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이 바닥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그걸 하나씩 주워 들어서 마치 김밥의 속재료를 싸듯 한 줄 한 줄 지면을 메워가는 것이다. 충분히 쓸 수 있을 거라고 집어 들었는데 막상 재료로 쓰기엔 부족한 것도 있고, 별 거 없을 줄 알았는데 쑥쑥 진도가 나가는 착상들도 있다. 언제나 문제는 도대체 뭘 써야 하나이다. '글감' 만 잡히면 그다음부턴 어떻게든 해결이 된다. 오늘은 또 뭘 쓰나를 고민하느라 글 쓰는 전체 시간의 2/3를 허비한 날도 있었다.

    글을 써오는 동안 내 생활의 많은 부분도 바뀌었다. 새로운 일을 준비해야 한다. 그동안 내가 편안히 안주했던 시스템은 없어졌다. 나를 가려 주던 지붕이 사라진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비와 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것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다시 살렸다. 새롭게 시작하는 일을 알리는 홍보의 일환이다. 여태의 연습이 어쩌면 실전으로 돌입할지도 모르겠다. 거의 10년만에 열어 본 그곳엔 먼지를 덮어 쓴 낡은 편지들이 수북했다. 톡친 여러분, 멀지 않은 날에 SNS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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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11-1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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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11-13 10:57
    santiago 通信_ 99


    휴먼 리그 The Human League 의 ‘Don’t You Want Me’ 란 곡만 들으면 여름이 생각난다. 중학교 2학년의 이른 여름이었다. 학교에서 무슨 행사였는지 오전 수업만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그날은 마침 아버지도 일찍 퇴근해 계셨다. 화단에서 뭘 매만지고 계시길래 나는 아버지 등에다 대고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내 방으로 들어왔다. 교복자율화 시절이라 사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는데 나는 그날 입었던 옷마저도 생각이 난다. 이렇게 시시콜콜 많은 것을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그날이 바로 내가 난생처음으로 레코드점에 가서 ’맞춘 테이프‘ 를 찾아온 날이었기 때문이다.

    동네 레코드점에 가서 듣고 싶은 노래 목록을 종이에 적어서 주면 레코드점에서 노래들을 공테이프空tape 에 녹음해서 며칠 뒤에 찾아갈 수 있게 했다. 보통의 ‘카세트테이프’ A면 B면 합쳐서 60분 짜리. 이것을 '맞춘 테이프' 라 불렀다. CD가 나오기 전이다. 관록이 있는 오래된 레코드점의 경우엔 자신들이 소장한 LP판의 음원 그대로 녹음 해주지만 보유한 음반이 빈약한 레코드점의 경우엔 더블데크 카세트 플레이어로 라이선스 테이프의 음원을 녹음해 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이유로 소장한 음반이 많거나 매장 앞에 비치한 스피커를 통해 평소 수준 높은 음악을 자주 트는 레코드점일수록 맞춘 테이프를 신청하려는 손님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우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길보드 테이프' 의 효시가 된다. 요즘처럼 엄격해진 저작권법의 잣대로 보자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마치 새로 개봉한 영화를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해서 파는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누구 하나 조금도 법적인 구속을 겁내거나 의식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때는 법률도 느슨했을뿐더러 창작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무지하던 시절이었다. 이때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후에도 '도서대여점' 이란 것이 버젓이 번성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 당시에 '문화적 근대' 는 그저 요원한 망상이었을 뿐이다. 철 모르는 시절의 나도 이 행렬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내 사춘기 팝의 향연은 이로서 그 막이 오르게 된다.

    군부 독재의 냉혹한 시절이었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군사 정권은 미국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인지 그 당시의 세계사적 흐름이 그러했던 것인지 그때는 FM 라디오 프로그램의 선곡 대부분이 팝송이었다. 라디오를 틀기만 하면 팝송이 흘러나왔다. 레이거노믹스와 냉전의 종식과 광주항쟁과 민주화의 열망이 들끓던 용광로와 같던 시대였다. 전문가들이 회고하기를 이 80년대야말로 팝 역사상 가장 전 성 기라고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개인적으로도 이때만큼 걸출한 아티스트들이 앞다투어 활약했던 시기도 드물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직은 '시대의 상흔' 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의 나에겐 부강한 나라에서 건너온 이 대중문화는 미군들이 던져주는 초콜릿마냥 달콤하기만 했다. 이 첫 테이프는 진작에 잃어버리고 없지만 내 기억으로는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앨범에서 몇 곡, 빌리 조엘의 'An Innocent Man' 앨범에서 또 몇 곡, 비틀즈의 'Yesterday' 도 있었고 톰슨 트윈스 Thompson Twins 의 곡들도 채워져 있었다. 테이프의 맨 첫 곡이 바로 휴먼 리그의 'Don’t You Want Me' 였다.

    휴먼 리그가 들려오던 내 방의 모습이 떠오른다. 정오를 지난 이른 오후의 초여름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내 책상을 땅따먹기 하듯 직선으로 분할하고 있었다. 그 병아리색 햇살 속에 책장에서 피어 오른 하얀 먼지들이 느리고 부드럽게 떠다녔다. 골목길로 오토바이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고 동네 공터로 야구를 하러 가는 내 또래들이 누군가에게 동참을 호소하고 있었다. 바깥 화단에서는 연신 물을 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직은 선선한 바람이 잠시 창문으로 들어왔다가 이내 하늘로 빨려 올라갔다. 음악이 나를 찾아온 유년의 첫여름 오후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음악이 있어 인생의 아름다운 것인지 인생이란 아름다운 것이기에 음악마저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지나간 시절을 되돌아볼수록 우리 삶의 여러 모퉁이에서 음악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끔 깨닫곤 한다. 지금은 저작권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하지만 한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레코드점에서 울려퍼지던 형형색색의 캐럴로 빛나던 겨울의 거리를 우리는 반짝이며 걸을 수 있었으니까. 스웨덴의 속담 중에 '사랑이 없는 인생은 여름이 없는 일 년과도 같다' 라는 게 있는데 나는 여기에 사랑 대신 '음악' 을 넣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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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11-0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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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11-06 10:49
    santiago 通信_ 98


    모처럼 결혼식에 다녀왔다. 평소 결혼식에도 장례식에도 넥타이까지 갖추지는 않는데 이번엔 사정이 있어서 간만에 맸다. 은색 싱글은 주로 결혼식용이다. 몇 년 전에 입었던 게 마지막이라 그동안에 작아졌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몸에 맞았다. 다만 와이셔츠는 목까지 잘 잠기지 않았다. 군살이 붙은 탓이다. 그래서 두 번을 꼬아 매는 이른바 ‘윈저 노트’ 식 넥타이는 어울리지 않았다. 목이 더 뚱뚱해 보이니까. 식장 안까지 마지막 단추는 푼 채로 들어갔다.

    양복에는 방금까지도 스며 있던 물기가 이제 막 날아간 듯한 ‘세탁소 냄새’ 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저번에(그때도 보나 마나 결혼식이었겠지만)입고 집으로 오자마자 세탁소에 맡긴 덕분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나의 이 습관 하나만큼은 기특하다고 생각한다. 차일피일 미루다 세탁소에 맡기는 걸 깜박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양복이 묵은 빨래가 되어 버려 혹시나 급하게 다시 찾아 입을 때 낭패이기도 하거니와 잠시의 외출에 묻은 때와 얼룩들이라도 시간이 지나고나면 잘 지워지지 않으니까. 명색이 예복이라고는 몇 벌 되지도 않는데 관리를 잘해둬야 한다.

    오랜만에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구두까지 신고 나서니 꽤 어색하다. 팔과 다리, 등짝과 가슴에 큼직한 마분지를 오려 덧댄 것만 같다. 쇼윈도에 비치는 내 얼굴은 이마에 물기로 번들번들하다. 매일 이렇게 입고 일터로 나가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나 같은 인간은 이 복장의 구속 때문에라도 그런 일자리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마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사직서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도대체 이 갑갑한 느낌을 얼마 만에 다시 견디는 중일까 따져보니 다른 건 몰라도 코로나로 해서 그거 하나는 편했구나 싶다. 코로나 기간 동안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대한 참석의 의무가 완전히 유예된 시기였으니까. 경사에는 축의금만 부치더라도 애사는 가급적 참석하자는 게 나 역시 생활의 작은 방침이지만 코로나가 유행하는 동안에는 큰일을 당한 쪽에서도 가급적 부고를 알려오지 않았다.

    결혼식이 열리는 ‘연회장’ 이란 곳에 들어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곳은 마치 일상의 남루한 흔적들이 표백되고 윤기로 덧입혀져 한 시간 여 동안 전혀 다른 아바타로 거니는 가상의 광장 같다. 할 수 있는 한 최대치의 자태와 용모로 다듬어진 하객들 모두가 연회장의 대리석 바닥만큼이나 반들반들하다. 앞선 다른 예식의 피날레인지 함성과 박수가 쏟아지고 우렁찬 축가가 울려 퍼졌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데 또 하나의 커플이 무덤으로 들어가는 걸 모두가 저렇게 축하 하는구나…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젠 나도 장난 삼아 이죽거리는 것도 볼썽사나운 나이에 이르렀으니까. 축하만 해줘야지. 이 가을, 무난하고 아름다운 절기에 새로운 출발을 하는 두 사람을 진심으루 축하합니다. 그건 그렇고 내 주변엔 벌써 네 쌍의 부부가 이혼을 했다. 설마 그 사람들이? 싶었던 사람들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아니, 축하만 해야지. 부디 지금 그대들의 열정적인 사랑이 끝까지 축복 속에 존재하길 바랍니다. 다만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혼을 고민할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라. 내가 이 사람과 늙어서까지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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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10-2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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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10-23 10:30
    santiago 通信_ 97


    흔히 가장 기억에 남는 식사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어보면 거의가 소박한 대답들이 돌아온다. 할머니댁에서 먹은 푸근한 밥상이나 여행길 허기에 지쳐 먹었던 김밥과 라면이나, 엄마가 해준 그저 보통의 집밥 같은 것들이다.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먹은 디너 코스 요리나 일 인당 오십만 원의 오마카세를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맛있었던 밥에 대한 기억이 늘 소박한 것은 우리 삶의 본질적인 모습이 모두 잔잔하고 밋밋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가장 맛있었던 밥은 두 번이었다. 산골의 음식과 전라도에서 먹었던 음식들이다.

    대학 시절에 집안의 가까운 분이 시골의 농가들로 며칠 다녀야 하는데 마땅한 차편이 없는 터라 아버지의 지프를 좀 빌리자고 부탁을 해오셨다. 아버지는 흔쾌히 빌려 주시면서 나더러 운전을 도와드리라고 하셨고 주말이 낀 며칠을 나는 그분을 모시고 경북의 오지와 강원도의 산간마을을 돌아다녔다. 지금도 그때의 일은 깨끗하고 선명한 푸른 초록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아직도 깊은 산중의 풍경들이 그토록 청정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연찮게도 운전을 하면서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 OST(네, 엔니오 모리코네)테잎을 줄창 들으며 다녔는데 산속 깊은 오지의 풍경과 잘 어울렸다. 그렇게 산중의 농가들을 돌아다니다가 밥때가 되면 가끔 주인의 권유에 못 이겨 집안으로 들어가 밥을 얻어먹곤 했는데 그 슴슴하고 멋내지 않은 양념들로 이루어진 반찬들이 가히 기가 막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일까. 고기반찬은 드물고 거의가 푸성귀의 무침이나 장아찌들이었는데도 허기진 속도 아니었건만 밥이 꿀맛 같았던 것이다. 집 가까운 밭이 온통 먹거리의 산지인 셈이니 싱싱한 자연의 풍미가 고스란히 담긴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랜 서울 생활에 지쳤을 때 주말마다 전라도로 놀러 간다는 친구 놈이 있어서 그를 따라 몇 번 같이 간 적이 있었다. 내게는 그것이 평생에 작정하고 전라도를 돌아본 첫 여행이었다. 친구는 미리 말했다. "너 전라도에서 밥을 먹어보고 나면 다른 데서 돈 주고 밥 사 먹기 아까울 걸." 지금은 그 악명이 다소 희석되긴 했으나 내 고향이 원체 음식이 별로인 것으로 유명한 도시인지라 나는 관광이나 풍물 보다도 내심 전라도 음식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다. 꼬막 비빔밥이니 떡갈비니 복어탕이니 다 좋았지만 내가 특히 감탄했던 것은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린 어느 항구에서 먹은 갈치조림이었다. 백반에 가까운 한 상에 갈치조림이 찌개로 나오는 일반적인 식당밥에 불과했는데 반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밥까지도 그 차원이 달랐다. 여러 찬들 중에서도 보통의 김치가 나는 인상 깊었는데 양념이 무난한 가운데에도 독특한 감칠맛이 있었다. 두 번이나 더 달래서 먹고 나왔다. 이후 K항에서 두당 고작 5만 원 짜리의 회 정식에 따라 나온 삼십 여 가지의 ‘찌그다시’ 를 만난 순간에는 거의 흥분하고 말았다. 이게 진짜 5만 원 짜리란 말이야? 이렇게 퍼주고도 장사가 되는 거냐고 나는 얕은 셈을 했지만 음식은 인심이라는 인정과 도리가 이해타산을 넘어서는 그 마음의 발로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라도는 그런 곳이었다. 이 나이를 먹고서야 전라도에 처음 왔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이제 곧 김장도 앞두고 있고 덥고 습하던 계절과는 다르게 그윽하고 자작한 국과 찌개들이 밥상에 올라오는 계절이다. 우리에게 가장 근접한 행복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차가운 추위를 밖에 세워두고 가족이나 친밀한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더운 김을 피워 올리며 밥을 나눠 먹는 것은 생활 속의 기쁨이다. 한없이 오르는 물가로 해서 식탁이 날로 빈한해지더라도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소박한 찬과 국, 그리고 마주 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마음의 허기마저도 채울 수 있다. 거칠고 힘든 시절을 우리는 여태 그렇게 이겨왔다. 밥심으로 산다는 말을 허투루 들을 게 아니다. 그렇게라도 힘을 내야지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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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10-1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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