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iet nights of quiet stars
-
19
-
깊고 푸른 밤(@djckvl)
- 35 팔로워
- 36 팔로잉
- 소속 방송국 없음
-
19
깊고 푸른 밤 (@djckvl)2023-11-08 10:44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ㅤ댓글 0
-
19
깊고 푸른 밤 (@djckvl)2023-11-06 10:49santiago 通信_ 98
모처럼 결혼식에 다녀왔다. 평소 결혼식에도 장례식에도 넥타이까지 갖추지는 않는데 이번엔 사정이 있어서 간만에 맸다. 은색 싱글은 주로 결혼식용이다. 몇 년 전에 입었던 게 마지막이라 그동안에 작아졌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몸에 맞았다. 다만 와이셔츠는 목까지 잘 잠기지 않았다. 군살이 붙은 탓이다. 그래서 두 번을 꼬아 매는 이른바 ‘윈저 노트’ 식 넥타이는 어울리지 않았다. 목이 더 뚱뚱해 보이니까. 식장 안까지 마지막 단추는 푼 채로 들어갔다.
양복에는 방금까지도 스며 있던 물기가 이제 막 날아간 듯한 ‘세탁소 냄새’ 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저번에(그때도 보나 마나 결혼식이었겠지만)입고 집으로 오자마자 세탁소에 맡긴 덕분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나의 이 습관 하나만큼은 기특하다고 생각한다. 차일피일 미루다 세탁소에 맡기는 걸 깜박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양복이 묵은 빨래가 되어 버려 혹시나 급하게 다시 찾아 입을 때 낭패이기도 하거니와 잠시의 외출에 묻은 때와 얼룩들이라도 시간이 지나고나면 잘 지워지지 않으니까. 명색이 예복이라고는 몇 벌 되지도 않는데 관리를 잘해둬야 한다.
오랜만에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구두까지 신고 나서니 꽤 어색하다. 팔과 다리, 등짝과 가슴에 큼직한 마분지를 오려 덧댄 것만 같다. 쇼윈도에 비치는 내 얼굴은 이마에 물기로 번들번들하다. 매일 이렇게 입고 일터로 나가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나 같은 인간은 이 복장의 구속 때문에라도 그런 일자리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마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사직서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도대체 이 갑갑한 느낌을 얼마 만에 다시 견디는 중일까 따져보니 다른 건 몰라도 코로나로 해서 그거 하나는 편했구나 싶다. 코로나 기간 동안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대한 참석의 의무가 완전히 유예된 시기였으니까. 경사에는 축의금만 부치더라도 애사는 가급적 참석하자는 게 나 역시 생활의 작은 방침이지만 코로나가 유행하는 동안에는 큰일을 당한 쪽에서도 가급적 부고를 알려오지 않았다.
결혼식이 열리는 ‘연회장’ 이란 곳에 들어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곳은 마치 일상의 남루한 흔적들이 표백되고 윤기로 덧입혀져 한 시간 여 동안 전혀 다른 아바타로 거니는 가상의 광장 같다. 할 수 있는 한 최대치의 자태와 용모로 다듬어진 하객들 모두가 연회장의 대리석 바닥만큼이나 반들반들하다. 앞선 다른 예식의 피날레인지 함성과 박수가 쏟아지고 우렁찬 축가가 울려 퍼졌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데 또 하나의 커플이 무덤으로 들어가는 걸 모두가 저렇게 축하 하는구나…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젠 나도 장난 삼아 이죽거리는 것도 볼썽사나운 나이에 이르렀으니까. 축하만 해줘야지. 이 가을, 무난하고 아름다운 절기에 새로운 출발을 하는 두 사람을 진심으루 축하합니다. 그건 그렇고 내 주변엔 벌써 네 쌍의 부부가 이혼을 했다. 설마 그 사람들이? 싶었던 사람들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아니, 축하만 해야지. 부디 지금 그대들의 열정적인 사랑이 끝까지 축복 속에 존재하길 바랍니다. 다만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혼을 고민할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라. 내가 이 사람과 늙어서까지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댓글 0
-
19
깊고 푸른 밤 (@djckvl)2023-10-25 10:32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ㅤ댓글 2
-
19
깊고 푸른 밤 (@djckvl)2023-10-23 10:30santiago 通信_ 97
흔히 가장 기억에 남는 식사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어보면 거의가 소박한 대답들이 돌아온다. 할머니댁에서 먹은 푸근한 밥상이나 여행길 허기에 지쳐 먹었던 김밥과 라면이나, 엄마가 해준 그저 보통의 집밥 같은 것들이다.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먹은 디너 코스 요리나 일 인당 오십만 원의 오마카세를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맛있었던 밥에 대한 기억이 늘 소박한 것은 우리 삶의 본질적인 모습이 모두 잔잔하고 밋밋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가장 맛있었던 밥은 두 번이었다. 산골의 음식과 전라도에서 먹었던 음식들이다.
대학 시절에 집안의 가까운 분이 시골의 농가들로 며칠 다녀야 하는데 마땅한 차편이 없는 터라 아버지의 지프를 좀 빌리자고 부탁을 해오셨다. 아버지는 흔쾌히 빌려 주시면서 나더러 운전을 도와드리라고 하셨고 주말이 낀 며칠을 나는 그분을 모시고 경북의 오지와 강원도의 산간마을을 돌아다녔다. 지금도 그때의 일은 깨끗하고 선명한 푸른 초록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아직도 깊은 산중의 풍경들이 그토록 청정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연찮게도 운전을 하면서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 OST(네, 엔니오 모리코네)테잎을 줄창 들으며 다녔는데 산속 깊은 오지의 풍경과 잘 어울렸다. 그렇게 산중의 농가들을 돌아다니다가 밥때가 되면 가끔 주인의 권유에 못 이겨 집안으로 들어가 밥을 얻어먹곤 했는데 그 슴슴하고 멋내지 않은 양념들로 이루어진 반찬들이 가히 기가 막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일까. 고기반찬은 드물고 거의가 푸성귀의 무침이나 장아찌들이었는데도 허기진 속도 아니었건만 밥이 꿀맛 같았던 것이다. 집 가까운 밭이 온통 먹거리의 산지인 셈이니 싱싱한 자연의 풍미가 고스란히 담긴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랜 서울 생활에 지쳤을 때 주말마다 전라도로 놀러 간다는 친구 놈이 있어서 그를 따라 몇 번 같이 간 적이 있었다. 내게는 그것이 평생에 작정하고 전라도를 돌아본 첫 여행이었다. 친구는 미리 말했다. "너 전라도에서 밥을 먹어보고 나면 다른 데서 돈 주고 밥 사 먹기 아까울 걸." 지금은 그 악명이 다소 희석되긴 했으나 내 고향이 원체 음식이 별로인 것으로 유명한 도시인지라 나는 관광이나 풍물 보다도 내심 전라도 음식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다. 꼬막 비빔밥이니 떡갈비니 복어탕이니 다 좋았지만 내가 특히 감탄했던 것은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린 어느 항구에서 먹은 갈치조림이었다. 백반에 가까운 한 상에 갈치조림이 찌개로 나오는 일반적인 식당밥에 불과했는데 반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밥까지도 그 차원이 달랐다. 여러 찬들 중에서도 보통의 김치가 나는 인상 깊었는데 양념이 무난한 가운데에도 독특한 감칠맛이 있었다. 두 번이나 더 달래서 먹고 나왔다. 이후 K항에서 두당 고작 5만 원 짜리의 회 정식에 따라 나온 삼십 여 가지의 ‘찌그다시’ 를 만난 순간에는 거의 흥분하고 말았다. 이게 진짜 5만 원 짜리란 말이야? 이렇게 퍼주고도 장사가 되는 거냐고 나는 얕은 셈을 했지만 음식은 인심이라는 인정과 도리가 이해타산을 넘어서는 그 마음의 발로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라도는 그런 곳이었다. 이 나이를 먹고서야 전라도에 처음 왔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이제 곧 김장도 앞두고 있고 덥고 습하던 계절과는 다르게 그윽하고 자작한 국과 찌개들이 밥상에 올라오는 계절이다. 우리에게 가장 근접한 행복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차가운 추위를 밖에 세워두고 가족이나 친밀한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더운 김을 피워 올리며 밥을 나눠 먹는 것은 생활 속의 기쁨이다. 한없이 오르는 물가로 해서 식탁이 날로 빈한해지더라도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소박한 찬과 국, 그리고 마주 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마음의 허기마저도 채울 수 있다. 거칠고 힘든 시절을 우리는 여태 그렇게 이겨왔다. 밥심으로 산다는 말을 허투루 들을 게 아니다. 그렇게라도 힘을 내야지 어떡하나.댓글 0
-
19
깊고 푸른 밤 (@djckvl)2023-10-18 10:41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ㅤ댓글 0
-
19
깊고 푸른 밤 (@djckvl)2023-10-16 10:30santiago 通信_ 96
횡단보도 건너편에 중년 남자가 신호등을 기다리며 서 있다. 나이는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였다. 짧게 깎은 머리엔 흰머리가 절반 정도 섞여 있고, 육체 노동자는 아닌 모양인지 피부는 희고 깨끗한 편이었다. 적당한 키에 약간의 나잇살. 아랫배가 조심스럽게 나왔고 목둘레에 군살이 붙어 있었다. 산행길인지 가벼운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신었는데 대체로 중저가의 수수한 것들이었다. 주말 오전의 주택가에서 흔하디 흔하게 눈에 띄는 중년 남자의 모양새에 불과했지만 그가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바로 그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 자신은 아마도 무표정하게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는 그랬다. 표정 없이 멍하게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내 눈에는 그의 얼굴이 중년의 삶이 들려주는 고단한 서사가 고스란히 얹혀 있는 것만 같았다. 오락 영화 중에 상대의 몸과 접촉만 하면 그 사람의 일상이 영상처럼 바로 눈앞에 떠오르는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순간의 내가 마치 그 초능력자가 된 것처럼 그의 생활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언제 불려 가서 무슨 통보를 받을지 모르는 불안정한 직장, 밑 빠진 독 같은 아이들의 양육비, 날로 가파르기만 한 생활의 비용, 대책 없는 노후, 불안한 건강. 젊은 날의 꿈과 희망은 바스라진 지 오래다. 그저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 매일매일을 악착같이 버티는 중일뿐. 그러다 이 모든 것에 늘 쫓겨 다니느라 잠시도 들어가 쉴 수 없었던 내 마음의 방이 있어 그는 그 방에 들어가 숨을 한 번 고르고자 부랴부랴 배낭을 메고 나선 것일지도 모른다. 불안한 건강도 예방한다고 생각하니 일석이조다.
예전 다른 나라에 관광을 갔을 때 반딧불이 투어라고 해서 두어 시간 버스로 이동을 한 적이 있었다. 어느 강변의 숲에 밀집해 있다는 반딧불이들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늦은 오후에 출발한 버스가 행선지의 반쯤에 이르렀을 무렵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사방은 온통 캄캄한 밤이 되었고 간간히 농가의 불빛만이 스치고 지나갔다. 더운 나라여서 농가를 둘러싼 주변이 온통 활엽수로 무성했는데 전구에서 발산되는 빛에 비친 열대의 잎들이 선명하게 빛나서 마치 수십 개의 작은 태양의 알갱이들이 각각의 집으로 흩어진 것처럼 아름다웠다. 고작 전깃불로도 저렇게 아름다운 정경이 있을 수가 있구나. 정작 목적지에 도착해서 본 반딧불이는 관광을 목적으로 억지로 끼워 맞춘 어설프고 실망스러운 프로그램이었다. 출발 전에 읽었던 수많은 리뷰들은 다 뭐였단 말인가.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며. 반딧불이는 고사하고 날파리 한 마리 안 날아드는 중인데. 인생이란 여행은 때로 힘주어 작정한 어떤 결과를 따라가기보다는 불현듯 예측하지 못했던 전구의 불빛처럼 평범하고 흔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소망이 끝내 저 반딧불의 희미한 빛처럼 작고 실망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캄캄한 어둠 속 선명한 빛의 아름다움을 목격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리라. 나는 맥락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마음도 산행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산으로 가는 그 ‘마음속의 여정’ 에 있는 것이라고.
가을이 어지간히 깊어 있었다. 아직 나무들이 잎을 떨궈내지는 않았지만 아스팔트의 싸늘한 먼지 냄새는 이내 다가올 계절의 건조한 풍경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파란 불이 켜졌다. 성큼성큼 나를 지나친 그는 묵묵히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십 번이나 자욱한 가을을 보낸 어느 소년의 뒷모습처럼. 잘 다녀 오시오, 형씨. 하산 길에는 부침개보다는 도토리묵이나 두부를 드시고 담배 끊고 술 줄이고 맵고 짠 음식과 밀가루 음식을 피하길 바랍니다. 운동은 최소한 일주일에 세 번, 스트레스 받지 말고 명상을 통해 숙면을 취하여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시기를. 우리 다음 생에서 또 만납시다.댓글 2
-
19
깊고 푸른 밤 (@djckvl)2023-10-11 10:49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ㅤ댓글 0
-
19
깊고 푸른 밤 (@djckvl)2023-10-09 10:31santiago 通信_ 95
한 해에 꼭 한 번씩은 몸살을 앓았다. 봄 아니면 가을이었는데 환절기의 변덕스러운 기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학창 시절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개근한 것이니 병이 생겨도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아프진 않았던 모양이다.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 다소 병약했던 것을 감안하면 중고등학교 시절 야구나 농구로 시간을 보낸 것이 체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동네마다 공터가 있던 시절이라 아이들은 틈만 나면 공을 가지고 나와 놀았으니까. 요즘 아이들의 지나치게 편리한 일상은 오히려 질환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엔 병이 오는 것이 싫었다. 온갖 통증이 뒤섞인 늪에서 어린 내 몸뚱아리가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앓는 맛’ 이랄까 ‘아픈 재미’ 를 터득하게 된 것이 사춘기 무렵이다. 몸살이 엄습할 때엔 그 특유의 느낌이 있다. 철커덩, 마치 몸이 감각의 감옥에 갇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열이 오르며 입이 마르고 동시에 전신이 몹시 쑤셔온다. 무언가 들어왔다는 확실한 신호가 감지되면 담임을 찾아가서 조퇴를 허락받았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는 전쟁 중인 도시처럼 차도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나른하고 끈적한 통증에 휩싸인채 나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차창 밖으로 창백한 오후의 햇살이 힘없이 널려 있었다.
몸살을 앓던 밤의 잠은 깊고 깊었다. 수면의 심해. 의식의 빛이 전혀 스며들지 않는 먹먹한 ‘혼수’.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 새카만 무의식의 경계를 해파리처럼 떠다녔다. 나를 이 죽음 같은 암흑의 동굴 속에 재운 뒤에 내 몸속의 모든 항체들은 어린 주인의 안전을 위해 몸 안으로 들어온 병균을 맞아 밤새도록 죽을힘을 다해 싸웠을 것이다. 악몽 같은 밤이 폭풍우처럼 지나고 나면 뿌연 여명이 움트듯 의식도 차츰 또렷해져 온다. ‘살았네, 나…’ 고작 몸살에서 깨어난 주제에 나는 가끔씩 나의 존재를 잠꼬대처럼 확인하곤 했다. 앓고 일어난 몸은 먼지처럼 가볍고 사우나를 마친 것처럼 개운했다. 몸 안의 독소와 노폐물들을 한 바가지는 쏟아낸 기분이다. 병후의 이 상쾌한 감각을 나는 차츰 즐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 번 앓고 나면 이 해에는 다시 아프지 않았다. 마흔 초반까지도 연례행사처럼 해마다 몸살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어찌 된 셈인지 갱년기 무렵부터는 한 번도 앓은 적이 없다. 코로나도 걸리지 않았다.
자주 병석에 드는 체질이거나 숙환이 있으신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가끔은 며칠 푹 앓았으면 싶을 때가 있다. 학업의 피로(같은 게 나한테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에 지친 사춘기의 젊음이 하룻밤의 몸살로 쌓였던 과로를 털어 내듯 인생의 보다 깊은 지점에 도달한 나의 고단한 심신도 며칠간의 투병으로 그간에 쌓인 만성적인 피로를 훌훌 날려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 시인 조지훈은 ’병에게‘ 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긋이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병마가 반가울리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타까운 생명들이 병으로 운명을 달리하는 것을 생각하면 병을 바라는 것은 철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의 성장통처럼 생의 늦은 계절에 만나는 통과의례와 같은 감기가 있다면. 앓는 순간에는 열에 들뜨고 식은땀을 흘릴지라도 새 날 새 아침에는 새로 태어난 듯 가뿐한 몸과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또 한 번의 몸살 쯤이야 대수일까 싶은 것이다.댓글 0
-
19
깊고 푸른 밤 (@djckvl)2023-09-20 10:27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ㅤ댓글 0
-
19
깊고 푸른 밤 (@djckvl)2023-09-18 10:44santiago 通信_ 94
1955년 9월 30일. 은색 포르셰 스파이더 550 한 대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46번 도로에서 시속 180킬로로 달리다 마주 오는 차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운전자는 엠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 도중 사망한다. 향년 24세. 사망자의 이름은 제임스 딘이다.
중학생 시절에 배우나 가수들의 사진을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학교 앞 문방구 한쪽엔 코팅기계가 있는 코너가 따로 있었고 코팅 책받침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주는 가게도 등장했다. 입구에 줄줄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엮어서 걸어놓듯 스타들의 사진이 즐비했는데 여학교 앞의 풍경은 잘 모르겠으나 남자 중학교 앞의 가게엔 언제나 김혜수, 채시라, 이상아, 하희라, 브룩 쉴즈,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 정도가 늘 걸려 있었다. 풋내 나는 사춘기의 성장호르몬들이 갈망하는 이성의 어떤 표준들이었을 것이다. 코팅한 사진을 두 장 세 장씩 가지고 다니는 놈도 있었고 한 달에 한 번씩 책받침을 바꾸는 녀석도 있었는데 난 이 짓을 한 번도 안 했다. 딱히 조숙했다거나 이성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유치하고 한심스러워 보였달까. 그런 걸 가지고 다닌다고 사진 속의 사람이랑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짓궂은 놈들은 간혹 “이건 순전히 자 위용이지.” 하며 킬킬대기도 했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한심한 걸 멍청한 것으로 덮으려는 걸로 보였을 뿐이다.
내가 원했던 사진이 있긴 있었다. 제임스 딘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의 사진은 몇 장 붙어있지도 않았고 그나마 걸린 사진은 전부 표정이 어색하거나 카메라를 의식한 듯한 부자연스러운 사진뿐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에 ‘월간 스크린’ 이라는 영화 잡지가 있었는데 어느 호에 제임스 딘의 화보집을 부록으로 발행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제임스 딘의 친구였던 사진작가 ‘데니스 스탁‘의 작품으로 유명해진 그의 흑백 사진들이다. 난 이 사진들을 코팅했다. 간혹 드물게 경주용 자동차나 전투기, 항공모함 같은 걸 코팅한 친구들이 있었고 그 외의 남자 스타라면 ‘브루스 리’ 가 유일하던 세계였다. 모르긴 해도 이소룡 말고 남자 배우 사진을 코팅해서 가지고 다닌 아이는 전 학년을 통틀어도 나 하나였을 것이다.
제임스 딘이 주연했던 영화 세 편을 모두 다 본 건 고등학생이 된 이후였다. 막상 영화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그를 보았을 때는 어딘가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다소 실망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내 마음 안에 건재했다. 마치 어떤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 완전히 독립된 섬의 형태로. 중학생 시절부터 내가 그의 ‘이미지’ 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흔히 그를 수식하는 말처럼 ‘영원한 청춘’ 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작 열다섯 살짜리에게 청춘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고 '불멸의 영원'이 어떤 식으로 이해가 됐을까마는 그것은 어떤 본능적인 감응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끝나버렸기 때문에 확립되는 영속성.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의 간절함. 그는 그것을 구현했던 것이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그는 스물네 살이다. 예수보다 존 레논보다 엘비스보다 더 젊은 채로 그는 박제되었다.
그가 떠난 가을은 휴가처럼 떠들썩했던 여름의 여운이 모두 가신 채 긴 셔츠와 재킷으로 몸을 감싸는 시점이기도 하다. 겉옷 위로 내려앉는 가을의 온도는 차고 쓸쓸하기만 해서 청춘 같은 것, 허무 같은 것, 사춘기의 소년과 흑백 영화 같은 것들이 아스팔트의 낙엽처럼 감정 속에서 부유한다. ‘호텔 캘리포니아’ 의 이글스는 ‘제임스 딘’ 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당신은 너무 빨리 살았어요, 죽기엔 너무 어렸지요. 안녕, 안녕."댓글 0
- 쪽지보내기
- 로그방문

개
젤리 담아 보내기 개
로즈 담아 보내기 개








0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