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uiet nights of quiet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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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djckv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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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10-09 10:31santiago 通信_ 95
한 해에 꼭 한 번씩은 몸살을 앓았다. 봄 아니면 가을이었는데 환절기의 변덕스러운 기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학창 시절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개근한 것이니 병이 생겨도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아프진 않았던 모양이다.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 다소 병약했던 것을 감안하면 중고등학교 시절 야구나 농구로 시간을 보낸 것이 체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동네마다 공터가 있던 시절이라 아이들은 틈만 나면 공을 가지고 나와 놀았으니까. 요즘 아이들의 지나치게 편리한 일상은 오히려 질환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엔 병이 오는 것이 싫었다. 온갖 통증이 뒤섞인 늪에서 어린 내 몸뚱아리가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앓는 맛’ 이랄까 ‘아픈 재미’ 를 터득하게 된 것이 사춘기 무렵이다. 몸살이 엄습할 때엔 그 특유의 느낌이 있다. 철커덩, 마치 몸이 감각의 감옥에 갇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열이 오르며 입이 마르고 동시에 전신이 몹시 쑤셔온다. 무언가 들어왔다는 확실한 신호가 감지되면 담임을 찾아가서 조퇴를 허락받았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거리는 전쟁 중인 도시처럼 차도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나른하고 끈적한 통증에 휩싸인채 나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차창 밖으로 창백한 오후의 햇살이 힘없이 널려 있었다.
몸살을 앓던 밤의 잠은 깊고 깊었다. 수면의 심해. 의식의 빛이 전혀 스며들지 않는 먹먹한 ‘혼수’.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 새카만 무의식의 경계를 해파리처럼 떠다녔다. 나를 이 죽음 같은 암흑의 동굴 속에 재운 뒤에 내 몸속의 모든 항체들은 어린 주인의 안전을 위해 몸 안으로 들어온 병균을 맞아 밤새도록 죽을힘을 다해 싸웠을 것이다. 악몽 같은 밤이 폭풍우처럼 지나고 나면 뿌연 여명이 움트듯 의식도 차츰 또렷해져 온다. ‘살았네, 나…’ 고작 몸살에서 깨어난 주제에 나는 가끔씩 나의 존재를 잠꼬대처럼 확인하곤 했다. 앓고 일어난 몸은 먼지처럼 가볍고 사우나를 마친 것처럼 개운했다. 몸 안의 독소와 노폐물들을 한 바가지는 쏟아낸 기분이다. 병후의 이 상쾌한 감각을 나는 차츰 즐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 번 앓고 나면 이 해에는 다시 아프지 않았다. 마흔 초반까지도 연례행사처럼 해마다 몸살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어찌 된 셈인지 갱년기 무렵부터는 한 번도 앓은 적이 없다. 코로나도 걸리지 않았다.
자주 병석에 드는 체질이거나 숙환이 있으신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가끔은 며칠 푹 앓았으면 싶을 때가 있다. 학업의 피로(같은 게 나한테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에 지친 사춘기의 젊음이 하룻밤의 몸살로 쌓였던 과로를 털어 내듯 인생의 보다 깊은 지점에 도달한 나의 고단한 심신도 며칠간의 투병으로 그간에 쌓인 만성적인 피로를 훌훌 날려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 시인 조지훈은 ’병에게‘ 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긋이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병마가 반가울리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타까운 생명들이 병으로 운명을 달리하는 것을 생각하면 병을 바라는 것은 철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의 성장통처럼 생의 늦은 계절에 만나는 통과의례와 같은 감기가 있다면. 앓는 순간에는 열에 들뜨고 식은땀을 흘릴지라도 새 날 새 아침에는 새로 태어난 듯 가뿐한 몸과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또 한 번의 몸살 쯤이야 대수일까 싶은 것이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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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9-2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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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9-18 10:44santiago 通信_ 94
1955년 9월 30일. 은색 포르셰 스파이더 550 한 대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46번 도로에서 시속 180킬로로 달리다 마주 오는 차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운전자는 엠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 도중 사망한다. 향년 24세. 사망자의 이름은 제임스 딘이다.
중학생 시절에 배우나 가수들의 사진을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학교 앞 문방구 한쪽엔 코팅기계가 있는 코너가 따로 있었고 코팅 책받침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주는 가게도 등장했다. 입구에 줄줄이 크리스마스 카드를 엮어서 걸어놓듯 스타들의 사진이 즐비했는데 여학교 앞의 풍경은 잘 모르겠으나 남자 중학교 앞의 가게엔 언제나 김혜수, 채시라, 이상아, 하희라, 브룩 쉴즈,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 정도가 늘 걸려 있었다. 풋내 나는 사춘기의 성장호르몬들이 갈망하는 이성의 어떤 표준들이었을 것이다. 코팅한 사진을 두 장 세 장씩 가지고 다니는 놈도 있었고 한 달에 한 번씩 책받침을 바꾸는 녀석도 있었는데 난 이 짓을 한 번도 안 했다. 딱히 조숙했다거나 이성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유치하고 한심스러워 보였달까. 그런 걸 가지고 다닌다고 사진 속의 사람이랑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짓궂은 놈들은 간혹 “이건 순전히 자 위용이지.” 하며 킬킬대기도 했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한심한 걸 멍청한 것으로 덮으려는 걸로 보였을 뿐이다.
내가 원했던 사진이 있긴 있었다. 제임스 딘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의 사진은 몇 장 붙어있지도 않았고 그나마 걸린 사진은 전부 표정이 어색하거나 카메라를 의식한 듯한 부자연스러운 사진뿐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에 ‘월간 스크린’ 이라는 영화 잡지가 있었는데 어느 호에 제임스 딘의 화보집을 부록으로 발행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제임스 딘의 친구였던 사진작가 ‘데니스 스탁‘의 작품으로 유명해진 그의 흑백 사진들이다. 난 이 사진들을 코팅했다. 간혹 드물게 경주용 자동차나 전투기, 항공모함 같은 걸 코팅한 친구들이 있었고 그 외의 남자 스타라면 ‘브루스 리’ 가 유일하던 세계였다. 모르긴 해도 이소룡 말고 남자 배우 사진을 코팅해서 가지고 다닌 아이는 전 학년을 통틀어도 나 하나였을 것이다.
제임스 딘이 주연했던 영화 세 편을 모두 다 본 건 고등학생이 된 이후였다. 막상 영화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그를 보았을 때는 어딘가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다소 실망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내 마음 안에 건재했다. 마치 어떤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 완전히 독립된 섬의 형태로. 중학생 시절부터 내가 그의 ‘이미지’ 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흔히 그를 수식하는 말처럼 ‘영원한 청춘’ 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작 열다섯 살짜리에게 청춘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고 '불멸의 영원'이 어떤 식으로 이해가 됐을까마는 그것은 어떤 본능적인 감응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끝나버렸기 때문에 확립되는 영속성.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의 간절함. 그는 그것을 구현했던 것이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그는 스물네 살이다. 예수보다 존 레논보다 엘비스보다 더 젊은 채로 그는 박제되었다.
그가 떠난 가을은 휴가처럼 떠들썩했던 여름의 여운이 모두 가신 채 긴 셔츠와 재킷으로 몸을 감싸는 시점이기도 하다. 겉옷 위로 내려앉는 가을의 온도는 차고 쓸쓸하기만 해서 청춘 같은 것, 허무 같은 것, 사춘기의 소년과 흑백 영화 같은 것들이 아스팔트의 낙엽처럼 감정 속에서 부유한다. ‘호텔 캘리포니아’ 의 이글스는 ‘제임스 딘’ 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당신은 너무 빨리 살았어요, 죽기엔 너무 어렸지요. 안녕, 안녕."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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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9-1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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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9-11 11:00santiago 通信_ 93
전자책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나는 거들떠 보 지도 않았다. 마치 오랜 시간 엘피 레코드로만 재즈나 클래식을 듣던 사람들이 시디에 담겨 나온 음악들을 경멸하는 것처럼. 경멸까진 하진 않았지만 나는 한 번도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종이책에는 ‘부피’가 존재한다. 내가 넘겨서 읽은 종이들의 두께, 앞으로 남은 책의 분량, 그러다 읽은 양과 남은 양이 두께가 비슷해지는 시기가 되면 손으로 전해져 오는 책의 균형감. 지루하고 어려운 책일수록 ‘벌써 반이나 읽었구나’ 하는 성취감이 들면서 책을 읽고 난 뒤의 감명이 그 책의 무게만큼이나 느껴졌다. 책이 ‘세상을 향한 창’이라는 말이 맞다면 책을 읽고 난 뒤에 얻게 되는 새로운 인식이 꼭 그 책의 두께만큼 확장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전자책에는 그런 느낌이 없다.
아주 오래전에 출판된 책들은 활판인쇄라 하여 금속활자를 꾹꾹 눌러 인쇄하는 방식이다. 그 누르는 힘에 의해 그대로 종이에 활자의 자국이 남는다. 그걸 손으로 만져보면 점자책을 만지듯 희미한 문자의 요철들이 느껴지는 데 나는 종이책의 그런 느낌도 좋아했다. 다량으로 인쇄된 것이지만 마치 한 권 한 권, 식자공에 의해서 수작업된 듯한 서적. 시디의 음악과 엘피 레코드의 음악을 비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있다. 같은 재즈를 들어도 엘피에서 흘러나오는 재즈는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 재즈바에서 듣는 듯한 끈적함이 있는 반면, 시디의 재즈란 말끔하게 턱시도를 차려입고 호텔 라운지에서 단정하게 연주하는 걸 듣는 기분이라고 했다. 같은 내용의 책을 읽어도 종이책으로 읽는 편이 전자책으로 읽는 것보다 진지하고 ‘자명하게’ 머리에 들어왔다. 나는 종이로만 이루어진 책의 형식을 독서의 정통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환경 문제는 날로 악화되고 있고 세상은 상당 부분 디지털화 되었다. 보수적인 구역이라 다른 분야보다 느리긴 해도 출판시장도 디지털의 바람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무엇보다도 스마트폰의 출현은 기존의 매체와 미디어를 구닥다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맨 처음 아이폰을 사용하면서 앱을 이용해 pdf 파일을 폰으로 다운 받아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었다. 책을 누워서 읽으려고 시도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은근 까다로워서 자세를 잡는 일이 쉽지 않다. 몇 번을 뒤척대다가 결국은 도로 차분히 앉거나 툴툴거리며 책상으로 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독서는 모니터의 크기나 기기의 무게나 또한 그립감까지 뒹굴거리면서 책을 읽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작가 스티븐 킹은 운전을 하면서도 오디오북을 듣는다는 얘기를 읽고 나서 ‘이런 대가도 이렇게나 읽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네까짓게 뭔데’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전자책 플랫폼에 가입해 구독하고 있다. 4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원하는 책이 입맛대로 다 있는 건 아니다. 상당히 저명한 국내 작가의 책이 단 한 권도 비치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주로 신간 위주로 서비스되고 있는데 소장하기엔 애매하지만 무슨 소릴 해놨나 궁금한 책을 훑어보기엔 그만이다. 벌써 ‘나의 서재‘엔 150여 권이 쌓여있다. 자꾸 접하다 보니 책에 직접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할 수 없다 뿐이지 어쩌면 펄프를 위한 나무의 훼손을 막는다거나 제작과정의 물적 소모를 줄인다는 방편으로 보면 환경보호를 위해서는 차라리 전자책이 나은 게 아닌가 하는 배신(?)의 감정마저 든다. 전자책이 처음 나올 때 시큰둥했던 나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사람일은 정말 알 수 없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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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9-06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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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9-04 11:55santiago 通信_ 92
‘사주정설四柱精說’이란 책은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 분야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책이다. '백영관白靈觀'이란 저자의 이름은 가명인데 이 책을 쓸 당시에 현직 검사여서 본명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고시 공부를 할 때 낙방을 거듭하자 낙담한 나머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주를 보러 갔는데 거기서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자네는 2년만 고생하면 틀림없이 합격하니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정진하라.” 실제로 백영관은 2년 후에 고시에 합격했고 검사가 되었다. 그는 ‘2년 후에 틀림없이 합격한다’ 고 장담했던 사주의 원리가 궁금했고 곧바로 여러 명리학 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 결국 책까지 내게 된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명리학자이자 의학박사인 ‘오구시‘씨는 그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해마다 이질을 앓아 입원하는 어린 환자들을 돌보는 데 똑같은 치료를 기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이는 완쾌되고 어떤 아이는 오히려 악화되어 죽고 만다.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이유가 무엇인가. 원래 허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던가 치료 방법이 아이의 체질과는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면 애초에 허약하게 태어난 것이나 하필이면 그런 체질로 세상에 나온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것은 결국 운명이나 팔자 소관으로 밖에 헤아릴 길이 없는 것이다…
내가 사주명리라는 것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게 된 것은 나이가 들수록 세상의 모든 일이나 현상이 1 더하기 1은 2라는 공식처럼 단순하고 명료하지 않았다는게 가장 큰 이유였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O 와 X 로만 구분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답이 없는 것이 바로 답인 경우도 있었다. 과학은 만능이 아니었다. 또한 이 사주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명이 반드시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사주를 직접 보는 것이다. 사주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맨 처음 들여다본 사주는 본인의 사주였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때 그 결과가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것이었다면 이 학문은 진작에 폐기되고 말았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제일 잘 아니까. 사주명리를 한낱 미신으로 치부하거나 나약한 마음이 기대는 허수룩한 점술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난 그들을 설득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념의 문제일 뿐이다. 반대로 생활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사주나 팔자에 입각 헤서 수선을 떠는 사람들도 질색이다. 이 넓은 세상엔 이런 학문도 있다는 정도니 어디까지나 참고만 하면 될 일이다.
사주는 천문과 우주의 음양오행이 출력한 인생의 매뉴얼 같은 것이라는 게 사주명리학의 주장이다.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잘 나가고 대단한 줄 알지만 실은 태어난 년 월 일 시의 운명에 따라 빈부와 귀천이 가려진 것뿐이라는 것이다. 전생과 윤회의 개념까지 끌어오면 다음 생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 모른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의 교훈이 여기처럼 절절한 비유로 다가오는 곳도 드물다. 잘 나가기만 하는 인생도 없고 안되기만 하는 인생도 없다는 것이 사주명리학의 기본이다. 고난에 지친 삶도 머지않아 양지 바른 인생의 봄날이 기다리는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고, 지금 인생 최고의 전성 기를 누린다해도 그 영광이 얼마나 갈지 모르는 것이니 겸손하고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주명리를 안다면 적어도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게 제대로 된 인간의 상식이다. 그런 최소한의 상식마저 없는 인간이 부리고 휘두르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시무시하고 천박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정말로 두렵지 않은가 묻고싶다. 도대체 이 수많은 ‘업보‘를 어떻게 감당할 작정인지.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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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8-3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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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8-28 10:31santiago 通信_ 91
휴가를 냈지만 어디 멀리 가지는 않았다. 한여름 맹렬한 뙤약볕 아래서는 휴가고 뭐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지 말고 그저 집에서 더위를 피하는게 상책이라는 게 경험에서 터득한 요령이기도 하거니와 한 달쯤 후에 나는 따로 여행이 예정되어 있다. 누군가의 휴가처럼 맛집을 찾아가 배를 채우고 다시 시원한 집으로 들어와 빈둥거리는 일정도 좋으련만 나는 '맛집' 이라는 것이 그다지 탐탁지 않은 사람이다. 책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에라, 마실이나 다녀오자 싶어 오래된 지인들을 찾아다녔다. 우정의 통로라는 것은 일부러라도 자주 다녀야 반듯한 길이 나는 법인데 오랜 벗들을 찾아가는 마음의 오솔길엔 이미 잡초가 무성했다.
그러나 역시 오래된 지기는 ‘낯짝’만 봐도 흐뭇했다. 실없는 안부가 오가고 날씨 이야기, 먹고사는 이야기, 시국에 대한 토론을 한참 나누고 나면 문득 영영 남처럼 이제는 그 종적을 알 수 없는 얼굴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디서 뭐하구 지내는지, 사는 건 괜찮은지, 아이들은 잘 크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사람 간의 친분이란 때로 지극히 개별적인 것이어서 나는 한 번도 들어보 지 못한 누군가의 근황을 다른 누군가는 옆집 사람처럼 상세히 알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와 선배, 후배와 동료들의 근황들을 마치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듣듯 들을 수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지인들의 근황을 듣는 일이 점점 버거워진다. 잘 돼서 잘 나가고 잘 먹고사는 중이면 그런 다행이 없건만 어딘가 틀어지거나 곤궁에 빠졌거나 난관을 만난 이야기가 더 자주 들려오기 때문이다.
왕년엔 그렇게 잘 나갔는데 하루아침에 몰락한 신세가 되어 얼굴 한 번 보자고 아무리 나오라고 해도 동굴 속에 틀어박힌 것처럼 사람들을 피하는 이도 있고, 저런 인생도 풍파가 있을까 싶도록 부모에게 받은 게 많았던 지인도 결국엔 다 털어 먹고 매일을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사람 팔자 뒤웅박이라, 아무도 내일의 일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는 해도 때로 운명은 너무 가혹하다. 아쉬운 소리 않고 사는구나 싶은 집은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우리가 불러낸 이름들 중에는 벌써 이번 생을 마친 이도 있었다. 지인은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한때 좀 잘 나간다고 사람 우습게 알고 거들먹 거리고 그러면 안 돼. 끝은 모르는 거야. 사람은 좌우지간에 끝이 좋아야 되거든.“ 나는 침묵으로 동의하며 잔을 비웠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나의 근황은 어떤 모습인가. 나와 만난 지인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근황을 어떻게 전할까. 나의 근황이 그들에게 부끄럽게 전해지지 않도록 늘상 노력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도 한편으론 보이지 않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생활을 궁금해하는 벗들의 마음이 새삼 고마워졌다. 남의 말을 괜히 나쁘게 하거나 자기 생활만이 중요한 자들도 있긴 하지만 시간의 세례가 쌓이면 이런 부류들은 자연스럽게 걸러지게 마련이다. 우정이란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인간끼리의 교분이니까. 비록 처지는 달라지고 상황은 나빠졌어도 ‘잘 나갔던’ 모두는 아직도 남은 여생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가슴 뻐근한 일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는 말이 자주 떠오른다. 정답이 없다는 건 곧, 모든 답이 정답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인생은 있을지언정 ‘틀린’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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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8-2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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