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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 nights of quiet stars
  • 19
  • 깊고 푸른 밤(@djckvl)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9-1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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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9-11 11:00
    santiago 通信_ 93


    전자책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나는 거들떠 보 지도 않았다. 마치 오랜 시간 엘피 레코드로만 재즈나 클래식을 듣던 사람들이 시디에 담겨 나온 음악들을 경멸하는 것처럼. 경멸까진 하진 않았지만 나는 한 번도 전자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종이책에는 ‘부피’가 존재한다. 내가 넘겨서 읽은 종이들의 두께, 앞으로 남은 책의 분량, 그러다 읽은 양과 남은 양이 두께가 비슷해지는 시기가 되면 손으로 전해져 오는 책의 균형감. 지루하고 어려운 책일수록 ‘벌써 반이나 읽었구나’ 하는 성취감이 들면서 책을 읽고 난 뒤의 감명이 그 책의 무게만큼이나 느껴졌다. 책이 ‘세상을 향한 창’이라는 말이 맞다면 책을 읽고 난 뒤에 얻게 되는 새로운 인식이 꼭 그 책의 두께만큼 확장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전자책에는 그런 느낌이 없다.

    아주 오래전에 출판된 책들은 활판인쇄라 하여 금속활자를 꾹꾹 눌러 인쇄하는 방식이다. 그 누르는 힘에 의해 그대로 종이에 활자의 자국이 남는다. 그걸 손으로 만져보면 점자책을 만지듯 희미한 문자의 요철들이 느껴지는 데 나는 종이책의 그런 느낌도 좋아했다. 다량으로 인쇄된 것이지만 마치 한 권 한 권, 식자공에 의해서 수작업된 듯한 서적. 시디의 음악과 엘피 레코드의 음악을 비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있다. 같은 재즈를 들어도 엘피에서 흘러나오는 재즈는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 재즈바에서 듣는 듯한 끈적함이 있는 반면, 시디의 재즈란 말끔하게 턱시도를 차려입고 호텔 라운지에서 단정하게 연주하는 걸 듣는 기분이라고 했다. 같은 내용의 책을 읽어도 종이책으로 읽는 편이 전자책으로 읽는 것보다 진지하고 ‘자명하게’ 머리에 들어왔다. 나는 종이로만 이루어진 책의 형식을 독서의 정통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환경 문제는 날로 악화되고 있고 세상은 상당 부분 디지털화 되었다. 보수적인 구역이라 다른 분야보다 느리긴 해도 출판시장도 디지털의 바람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무엇보다도 스마트폰의 출현은 기존의 매체와 미디어를 구닥다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맨 처음 아이폰을 사용하면서 앱을 이용해 pdf 파일을 폰으로 다운 받아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었다. 책을 누워서 읽으려고 시도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은근 까다로워서 자세를 잡는 일이 쉽지 않다. 몇 번을 뒤척대다가 결국은 도로 차분히 앉거나 툴툴거리며 책상으로 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독서는 모니터의 크기나 기기의 무게나 또한 그립감까지 뒹굴거리면서 책을 읽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작가 스티븐 킹은 운전을 하면서도 오디오북을 듣는다는 얘기를 읽고 나서 ‘이런 대가도 이렇게나 읽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네까짓게 뭔데’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전자책 플랫폼에 가입해 구독하고 있다. 4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원하는 책이 입맛대로 다 있는 건 아니다. 상당히 저명한 국내 작가의 책이 단 한 권도 비치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주로 신간 위주로 서비스되고 있는데 소장하기엔 애매하지만 무슨 소릴 해놨나 궁금한 책을 훑어보기엔 그만이다. 벌써 ‘나의 서재‘엔 150여 권이 쌓여있다. 자꾸 접하다 보니 책에 직접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할 수 없다 뿐이지 어쩌면 펄프를 위한 나무의 훼손을 막는다거나 제작과정의 물적 소모를 줄인다는 방편으로 보면 환경보호를 위해서는 차라리 전자책이 나은 게 아닌가 하는 배신(?)의 감정마저 든다. 전자책이 처음 나올 때 시큰둥했던 나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사람일은 정말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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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9-06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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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9-04 11:55
    santiago 通信_ 92


    ‘사주정설四柱精說’이란 책은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 분야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책이다. '백영관白靈觀'이란 저자의 이름은 가명인데 이 책을 쓸 당시에 현직 검사여서 본명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고시 공부를 할 때 낙방을 거듭하자 낙담한 나머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주를 보러 갔는데 거기서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자네는 2년만 고생하면 틀림없이 합격하니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정진하라.” 실제로 백영관은 2년 후에 고시에 합격했고 검사가 되었다. 그는 ‘2년 후에 틀림없이 합격한다’ 고 장담했던 사주의 원리가 궁금했고 곧바로 여러 명리학 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 결국 책까지 내게 된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명리학자이자 의학박사인 ‘오구시‘씨는 그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해마다 이질을 앓아 입원하는 어린 환자들을 돌보는 데 똑같은 치료를 기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이는 완쾌되고 어떤 아이는 오히려 악화되어 죽고 만다.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이유가 무엇인가. 원래 허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던가 치료 방법이 아이의 체질과는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면 애초에 허약하게 태어난 것이나 하필이면 그런 체질로 세상에 나온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것은 결국 운명이나 팔자 소관으로 밖에 헤아릴 길이 없는 것이다…

    내가 사주명리라는 것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게 된 것은 나이가 들수록 세상의 모든 일이나 현상이 1 더하기 1은 2라는 공식처럼 단순하고 명료하지 않았다는게 가장 큰 이유였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O 와 X 로만 구분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답이 없는 것이 바로 답인 경우도 있었다. 과학은 만능이 아니었다. 또한 이 사주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명이 반드시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사주를 직접 보는 것이다. 사주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맨 처음 들여다본 사주는 본인의 사주였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때 그 결과가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것이었다면 이 학문은 진작에 폐기되고 말았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제일 잘 아니까. 사주명리를 한낱 미신으로 치부하거나 나약한 마음이 기대는 허수룩한 점술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난 그들을 설득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념의 문제일 뿐이다. 반대로 생활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사주나 팔자에 입각 헤서 수선을 떠는 사람들도 질색이다. 이 넓은 세상엔 이런 학문도 있다는 정도니 어디까지나 참고만 하면 될 일이다.

    사주는 천문과 우주의 음양오행이 출력한 인생의 매뉴얼 같은 것이라는 게 사주명리학의 주장이다.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잘 나가고 대단한 줄 알지만 실은 태어난 년 월 일 시의 운명에 따라 빈부와 귀천이 가려진 것뿐이라는 것이다. 전생과 윤회의 개념까지 끌어오면 다음 생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릴지 모른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의 교훈이 여기처럼 절절한 비유로 다가오는 곳도 드물다. 잘 나가기만 하는 인생도 없고 안되기만 하는 인생도 없다는 것이 사주명리학의 기본이다. 고난에 지친 삶도 머지않아 양지 바른 인생의 봄날이 기다리는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고, 지금 인생 최고의 전성 기를 누린다해도 그 영광이 얼마나 갈지 모르는 것이니 겸손하고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주명리를 안다면 적어도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게 제대로 된 인간의 상식이다. 그런 최소한의 상식마저 없는 인간이 부리고 휘두르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시무시하고 천박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정말로 두렵지 않은가 묻고싶다. 도대체 이 수많은 ‘업보‘를 어떻게 감당할 작정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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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8-3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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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8-28 10:31
    santiago 通信_ 91


    휴가를 냈지만 어디 멀리 가지는 않았다. 한여름 맹렬한 뙤약볕 아래서는 휴가고 뭐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지 말고 그저 집에서 더위를 피하는게 상책이라는 게 경험에서 터득한 요령이기도 하거니와 한 달쯤 후에 나는 따로 여행이 예정되어 있다. 누군가의 휴가처럼 맛집을 찾아가 배를 채우고 다시 시원한 집으로 들어와 빈둥거리는 일정도 좋으련만 나는 '맛집' 이라는 것이 그다지 탐탁지 않은 사람이다. 책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에라, 마실이나 다녀오자 싶어 오래된 지인들을 찾아다녔다. 우정의 통로라는 것은 일부러라도 자주 다녀야 반듯한 길이 나는 법인데 오랜 벗들을 찾아가는 마음의 오솔길엔 이미 잡초가 무성했다.

    그러나 역시 오래된 지기는 ‘낯짝’만 봐도 흐뭇했다. 실없는 안부가 오가고 날씨 이야기, 먹고사는 이야기, 시국에 대한 토론을 한참 나누고 나면 문득 영영 남처럼 이제는 그 종적을 알 수 없는 얼굴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디서 뭐하구 지내는지, 사는 건 괜찮은지, 아이들은 잘 크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사람 간의 친분이란 때로 지극히 개별적인 것이어서 나는 한 번도 들어보 지 못한 누군가의 근황을 다른 누군가는 옆집 사람처럼 상세히 알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와 선배, 후배와 동료들의 근황들을 마치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듣듯 들을 수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지인들의 근황을 듣는 일이 점점 버거워진다. 잘 돼서 잘 나가고 잘 먹고사는 중이면 그런 다행이 없건만 어딘가 틀어지거나 곤궁에 빠졌거나 난관을 만난 이야기가 더 자주 들려오기 때문이다.

    왕년엔 그렇게 잘 나갔는데 하루아침에 몰락한 신세가 되어 얼굴 한 번 보자고 아무리 나오라고 해도 동굴 속에 틀어박힌 것처럼 사람들을 피하는 이도 있고, 저런 인생도 풍파가 있을까 싶도록 부모에게 받은 게 많았던 지인도 결국엔 다 털어 먹고 매일을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사람 팔자 뒤웅박이라, 아무도 내일의 일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는 해도 때로 운명은 너무 가혹하다. 아쉬운 소리 않고 사는구나 싶은 집은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우리가 불러낸 이름들 중에는 벌써 이번 생을 마친 이도 있었다. 지인은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한때 좀 잘 나간다고 사람 우습게 알고 거들먹 거리고 그러면 안 돼. 끝은 모르는 거야. 사람은 좌우지간에 끝이 좋아야 되거든.“ 나는 침묵으로 동의하며 잔을 비웠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나의 근황은 어떤 모습인가. 나와 만난 지인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근황을 어떻게 전할까. 나의 근황이 그들에게 부끄럽게 전해지지 않도록 늘상 노력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도 한편으론 보이지 않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생활을 궁금해하는 벗들의 마음이 새삼 고마워졌다. 남의 말을 괜히 나쁘게 하거나 자기 생활만이 중요한 자들도 있긴 하지만 시간의 세례가 쌓이면 이런 부류들은 자연스럽게 걸러지게 마련이다. 우정이란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인간끼리의 교분이니까. 비록 처지는 달라지고 상황은 나빠졌어도 ‘잘 나갔던’ 모두는 아직도 남은 여생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가슴 뻐근한 일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는 말이 자주 떠오른다. 정답이 없다는 건 곧, 모든 답이 정답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인생은 있을지언정 ‘틀린’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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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8-2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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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8-21 10:40
    santiago 通信_ 90


    “늬들도 사십만 넘어봐라. 뽕짝이 좋아질 거야. 아주 귀에 착착 감긴다구.” 어느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으면서 선배가 말했다. 그때 나는 아직 삼십 대 후반이었다. 그런가, 좋아지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예전에 어느 잡지에서 읽었던 음악 대학 교수의 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교수는 트롯이니 뽕짝이니 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질색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독사를 피해 다니듯이 그는 평생 트롯이나 뽕짝에 진저리 치며 살았다. 어느 겨울 그는 자동차가 퍼져서 정비서비스가 올 때까지 추운 길바닥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몸을 웅크린 채 발을 동동거리던 그는 무의식 중에 콧노래를 부르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득 알아채고 보니 자신이 줄창 뽕짝을 부르고 있더란 것이다. 뭐 이런 식이었겠지. “목이 메인 이별가아아를 부울러야 오오르냐, 돌아서서 피이눈무우를 흘려야…? 내가 지금 뭘 부르고 있지?” 음악 대학의 교수였던 그는 그런 식으로 ‘뽕짝’ 과 화해했다. 뽕짝의 ‘정서’가 이런 때 이런 식으로 발현하는구나, 느꼈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의 잔재이든 대중문화의 저속한 산물이든 모름지기 모든 음악이란 아름다운 것이며 그 음악을 향유하고 애청하는 청중들의 편력도 소중하고 귀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그런 취지의 결말이었다. 난 트롯에 거부감이 없이 평생을 살아왔고 술자리에서 얼큰해졌을 때엔 트롯만큼 신명 나는 레퍼토리도 없는지라 미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최근 들어 일어난 이상한 붐에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는 듯하여 관심이 없을 뿐이다. 글이 또 삼천포로 빠지려고 하는데 정리하면, 이제 불혹을 넘어 지천명에 도달했건만 나는 아직도 뽕짝이 좋아지지 않았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고, 애써 찾아서 듣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대에서 기계체조 하는 것 같은 아이돌의 음악들은 한두 번은 요즘 애들은 뭐 하고 노나 싶어 구경삼아 듣기는 해도 이걸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반복해서 들을 만큼 나는 명랑하지 않다. 누가 본다고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이제 우리 세대의 취향과는 완전히 무관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적당히 알아서 물러나 주는 게 어른의 의무 같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다고 젊은 시절부터 주구장창 듣던 노래들을 또 듣는 건 가끔 지겹다.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고 추억에 젖는 것도 어쩌다 말이지 허구헌 날 옛날만 파고 있는 것 또한 지루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돌고 돌아 고르고 골라서 도착한 게 ‘인디 indie’ 였다. 여긴 적어도 신곡이 계속 나오는 중이고 음악씬의 ‘주류’ 를 비켜가는 어딘가 반항적인 자신감 같은 게 있었다. 가사와 멜로디도 신선했다. 나는 인디라는 장르를 좋아하게 됐고 자주 찾아서 듣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인디가 정확히 뭔가, 뭘 두고 인디라고 하나, 내가 어렴풋이 개념을 잡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의문이 들었다. 그 당시 내가 어렴풋이 잡고 있었던 개념이란 ‘주류 음악의 상업적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만의 음악적 색깔을 고집하는 “독립적인” 예술성’을 추구하는 음악을 인디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달랐다. 인디라는 장르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배급과 유통에 국한되는 명칭으로 이른바 거대 자본의 레이블이나 대기업 산하 음반사의 유통구조로부터 독립된 음악적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밴드멤버 전원이 포장마차를 해서 번 돈으로 자신들의 데뷔 앨범을 직접 제작한 ‘국카스텐’ 1집의 경우가 전형적인 한국 인디의 효시라는 것이다. 가령 마이클 잭슨이 대형 음반사와 계약을 끊고 자기 집에서 음반을 만들어 자기가 직접 팔면 그는 인디 가수다. ‘대기업의 통제로부터 독립’ 한 탓에 ‘큰 돈이 없’ 다보니 앨범이 대체로 소박하고 홍보 활동이 영세한 형태이지만 반대로 상업적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아티스트 본연의 순수한 예술적 구현에 매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거였어…이런 식이면 여태 인디 아티스트라고 알고 있었던 대부분은 인디가 아니었다. 거칠게 정의한다고 해도 그들은 인디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어딘가 인디적인, 뭔가 모르게 인디틱한, 오버그라운드의 메이저일 뿐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싹수가 좀 보인다 싶은 ‘인디’ 가 있다면 어마어마한 자금과 유통망을 갖춘 대형 음반사가 그냥 둘 리가 없을 것이다. ‘인디’란 단지 제작방식에 따른 구분일 뿐이라는 정리에 다소 허탈해지기 까지 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써 놓고 보니, 이러한 분류에 입각하자면 내가 인디가 아닌가. 나만 그런가. 세상의 제도권으로부터 밀려나 어두운 그늘에서 맹물을 삼키며 와신상담 오버그라운드의 양지를 지향하는 모든 마이너들이 인디다. 굳이 양지의 햇볕을 지향하지 않아도 안분지족, 서툰 야망 없이 소소한 일상을 가볍게 꾸려 나가는 모든 인생들이 인디다. 거대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화려하고 각광받지 않아도, 넘쳐나고 질펀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길을 밝히는 굳건한 마음의 등불 하나 있다면 그것이 인디였던 것이다. 높고 거대한 빌딩 숲 사이에 초라한 우산 하나의 존재감 일지라도 사랑하는 이의 어깨를 가려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디적 사랑이다. 작은 것은 작은대로 나름의 이유로 살아간다. 인생은 때로 그런 식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아아 우리는 인디였어, 생활의 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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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8-0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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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8-07 10:32
    santiago 通信_ 89


    도회지에서만 자라서 여름에 멱 감으러 강으로 갔다거나 계곡으로 몰려갔다는 따위의 추억은 없다. 당시엔 교외 어디에 수영을 할만한 여건의 자연도 없었거니와 설혹 있다고 해도 아이들끼리 작당을 해서 그런 곳에 몰려 갔다면 기겁을 한 엄마들이 쫓아와서는 쥐어 패서 데리고 갔을 것이다. 사회체육시설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이 불과 수년 전부터의 일이고 지방은 아직도 미흡한 요즘이고 보면 내 어린 시절로 말하자면 여름에 수영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곤 백설기에 건포도 박혀있듯 도시 전체에 뜨문뜨문 자리 잡은 사설 수영장이 전부였다. ‘S 센터’ 는 드물게 실내와 야외 풀이 있었고 다이빙풀까지 갖춘 규모가 꽤 큰 수영장이라 우리는 그곳에 자주 가서 수영을 했다.

    한여름의 야외수영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튜브를 허리에 끼고 아장거리는 아기들부터 초등학생들까지가 한떼로 들어가는 뜨뜻미지근한 풀이 있었는데 우리는 머리가 슬슬 커지자 이런 ’젖먹이들‘ 과 한데 섞여 노는 게 ’쪽팔렸‘다. 이건 수영장이 아니라 목욕탕 비스무리 했다. 우리 중 정식으로 수영을 배운 아이는 없었지만 물에 떠서 발버둥이라도 좀 쳐 볼라치면 여기저기에 ’애 새 끼‘들이 걸리적거렸던 것이다. 대중목욕탕 냉탕에서 허용되는 동작의 자유, 딱 고만큼의 반경이었다. 제일 큰 야외수영장이 있었지만 물이 깊어서 어른들이 전부 거기서 놀았다. 거기 들어가면 이번엔 반대로 우리가 ’걸리적거리는 애 새 끼들‘ 이 되는 것이다.

    실내수영장이 있었지만 거긴 사람들이 잘 안 갔다. 물이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다. 물도 깊지 않고 수영장도 꽤 넓어서 놀기엔 딱이었는데 어른들도 거의 안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영장 관리를 왜 그렇게 했을까 싶다. 수온을 조금만 높였어도 밖에서 좀비처럼 복작대는 저 아수라판을 분산시킬 수 있었을 텐데. 하도 물이 차가워서 수영장 바닥이 혹시 아이스링크가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했다. 우리는 과감한 결단을 했다. 실내에서 수영하기로 한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고 생각한다.

    써늘한 물이 출렁대는 실내 수영장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두웠는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둑시근한 내부로부터 진한 염소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이 소독약 냄새는 마치 오래된 신전에서 풍겨오는 재의 냄새처럼 코 끝에 어른거렸다. 널널한 실내수영장에서 놀자고 작심 했으나 실천은 부응하지 못했다. 5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우리는 전부 ‘뭍’ 으로 올라온 어린 고등어들처럼 널브러졌던 것이다. “아아 진짜 추워.”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이가 부딪칠 정도로 떨리면 다시 햇볕을 쪼이기 위해 우리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흥청망청한 바깥엔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속에서 여름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고 살갗에 닿는 뜨거운 태양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검게 그을린 채 핫도그를 먹으며 하얗게 웃던 내 머나먼 유년의 물가는 아직도 그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제 ‘S 센터’ 는 흔적도 없고 어디쯤에 붙어 있었는지 조차 기억에 없지만 그 시절의 여름은 얼음처럼 빛나고 있다. 정식으로 수영도 배웠고 한겨울 수영 강습도 버텨냈으니 이젠 그 차갑던 수영장에서 헤엄칠 수 있을까. 별처럼 쏟아져 내리는 친구들의 앳띈 목소리가 텅 빈 목욕탕의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려 퍼지는 이제 중년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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