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uiet nights of quiet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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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djckv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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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5-30 11:00santiago 通信_ 79
며칠 바짝 날이 더워 한여름을 방불케했을 때 한낮의 기온이 밤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해 반팔에 반바지로 돌아다니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저녁과 밤으론 아직도 기온이 서늘한 것이다. 봄이 그러하듯 여름도 쉬이 오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부드러운 봄의 기운도 이젠 완연히 이울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청량한 초여름이 찰나처럼 지나가고 나면 이내 맹렬한 더위가 시작될 것이다.
사람마다 여름의 ‘기미’를 느끼는 순간은 모두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여름이 얼마나 가까운지 실감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생긴 감각인데 운전을 하면서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이 휴양지의 쇼핑몰에서 들려 오는 것처럼 유난히 부담없고 쿵짝쿵짝 흥겨우면 이제 거의 여름이 다가왔다는 징후인 것이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음악의 특징은 아무리 구슬픈 가사의 노래나 애조띤 멜로디의 노래를 불러도 자꾸 듣다 보면 뭔가 ‘흥겹다’ 는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 메가 히트의 톱스타가 된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이 리조트 쇼핑몰의 BGM처럼 건더기 없이 흐물흐물 하다거나 두리뭉실 무난하기만한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으로 많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다만 가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이 쓸데없이 흥겹거나 지나치게 대중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느껴지는 건 아마도 라틴 음악 특유의 어떤 활기 탓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운전을 하면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를 들었을때 괜스레 신나고 들뜨면 이제 곧 여름이구나,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여름에 즐겨 듣는 음악이야 많다. 여름을 표현한 음악도 많고 듣자마자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도 있다. 시즌송이라고 따로 구분하지 않아도 여름철 특수에 해당되는 리퀘스트 넘버들이다. 비치보이스가 그렇고 서핀 뮤직들이 그러하며 언제부터인가 레게 음악도 이 영역에 은근슬쩍 편승한 것 같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라디오에서 일제히 갇혀 있던 새떼를 한꺼번에 방류하듯 ‘셔터’ 를 올리면 세상엔 온통 여름의 노래들이 날아다닐 것이다. 이 로그를 통해서 여러 번 말했듯 각 계절마다 어울리는 노래가 있고 특정한 계절이 되면 그 노래들이 일제히 들려온다는 것은 기다리던 기념일의 이벤트처럼 설레는 기분마저 든다. 마치 크리스마스 캐롤처럼 들뜨는 것이다. 여름의 바캉스, 더위를 이겨낸 가을의 커피, 세밑을 밝히는 눈 오는 날의 촛불이며 새 봄 새로 돋아난 잔디밭 위에서의 김밥같은 즐거움이다. 지구가 여름을 지나갈때 전세계가 같은 음악을 들으며 계절을 노래한다는 것. 이렇게 재미있게 지내는 행성이 또 있을까 싶어진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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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5-2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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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5-22 10:26santiago 通信_ 78
요즈음엔 어쩐지 ‘양심’ 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식당 주인이 자주 오던 단골이 한참 발을 끊었다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것처럼. 가만히 돌이켜보면 누군가 양심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을 거의 수년 동안 본 적이 없다. 내 어린 시절엔 심보가 고약하거나 수단이 야비하다 싶으면 대번에 “양심에 털 났냐!” 고 일갈하기도 했고 “양심에 찔리지도 않느냐” 라든가 “내 양심을 걸고 맹세한다“ 같은 말들을 자주 했었다. 이 시절의 양심이란 마음의 각서 같은 것이었다. 법적인 효력도 없고 윤리적 규범에 의거한다는 보증도 없지만 급기야 ‘양심’을 꺼내는 순간에는 이것이 최후의 수단이라는 절박한 호소였다. 아니 양심이라고까지 하는데도 못 믿는단 말이야? 같은 분위기다. 그러니 양심을 들고 나오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약간 비장한 느낌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양심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네이버 사전)’ 이라고 나와 있다.
보다 젊은 시절의 나는 국가가 부유해지고 시민들의 삶이 윤택해지면 보편적인 마음의 여유로 인해 금전만능주의나 이기심 같은 천박하고 편협한 기질들이 상당히 사라지거나 경멸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나 몰라, 마치 한 마리의 동물도 죽이지 않고 매일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휘황찬란해진 국가의 시민으로 살고 있는 요즘이지만 우리는 돈과 수익에 대해 훨씬 더 강박적이다. 세상에 돈이 많아질수록 바닷물의 갈증처럼 오히려 사회는 점점 더 비정해져만 간다. 부의 양극화는 커지고 팍팍한 현실에 비해 사람들의 욕망은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러니 돈만 생길 수 있다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양심 같은 건 이제 귀찮고 거추장스러울 뿐이어서 양심 이라는 말 자체를 서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생겨난 것만 같다. 조르주 베르낭스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미래의 사람들의 양심을 간지르기 위해서는 아마도 쇠망치와 못이 필요할 것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과연 양심적인 인간인가 다시 생각해야 했다. 나 역시도 양심적이지 못했다. 양심적이어야 할 상황에서 “남들도 다 하는데” 하며 빠져나갔던 적도 있었고, 논어에 나온다는 말처럼 ‘드러나지만 않으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 은 적도 많았다. 나의 불찰은 충분히 무겁게 인정하지만 어차피 개인 각자가 성인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흔해빠진 말로 양심을 지키면 본인만 손해를 본다는 의식이 팽배한 사회도 문제 아닌가. 하물며 높은 권력에 있는 사람들이 양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남을 해코지 하는데만 혈안이 된 꼴을 매일 쳐다보고 앉은 국민들의 의식 속에 무슨 생각이 싹 틀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양심을 지키고 사는 일이란 때론 고독한 일이다. 심지어 양심적이지 않은 다수로부터 손가락질 받기도 한다. 그러나 독선과 기만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그나마 가끔은 그래도 살만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성가시기만한 양심의 일을 기꺼이 떠맡는 누군가의 희생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선량한 사람들을 위해서 다행히도 옛 사람들이 남겨둔 말이 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積善之家 必有餘慶” 착한 덕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말이다.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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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5-1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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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5-15 10:39santiago 通信_ 77
뮤지컬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딘가 과장되고 무언가 과잉된 느낌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한다. 쉽게 감정이입이 일어나지 않았다.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가끔, 유재석이나 김연아 같은 인간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을 쳐다 보듯이 쳐다본다. 어떻게 뮤지컬을 싫어할 수 있죠? 꼭 그런 표정이다. 내가 뮤지컬이라는 개념을 인식한 후 처음으로 감상한 것이 ‘사운드 오브 뮤직’ 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어느 방송국에서 연말 특선으로 뮤지컬 영화들을 연속 방영 했는데 ‘사운드 오브 뮤직’ 다음 날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가 편성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는 재미 없었지만 ‘사운드 오브 뮤직’ 은 정말 재미있었다. 아마도 그건 음악에 대한 감흥이라기 보다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뮤지컬 중에서도 더욱 싫은 건 대사까지 온통 노래로 불러대는 것이다.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마지막 보이스카웃’ 이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악당이 묻기를 “너같은 놈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비명을 지르게 할 수 있나?” 그러자 브루스 윌리스가 대답한다. “랩을 들려주면 돼.” 누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그 뮤지컬 말이야, 대사까지 전부 노래로 하는 뮤지컬, 그걸 틀어 놓으면 3초에 한 번씩 닭모가지 움켜쥐는 소리를 낼 걸.“ ‘사운드 오브 뮤직’ 이 재미있었던 것도 아마 대사까지 노래로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연전에 본 ‘레 미제라블’ 은 훌륭한 영화였지만 역시나 뮤지컬이어서 인지 몰입할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비련의 여인을 연기한 앤 헤서웨이가 거의 목숨이 다 꺼져가는 상황에서 삐리리 노래를 부를때는 정말로 폭소가 터져 버렸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는 설정이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했기 때문이다. 예술의 장르에 따른 표현의 변용(이런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도로 이해하면 될 일을 그 슬픈 장면을 보면서 껄껄 웃다니, 이만저만한 무식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뮤지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지인 중에 라면을 거들떠 보 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 소화도 잘 되지 않고 라면 특유의 풍미를 그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취향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가거나 뮤지컬 영화를 보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여태 별 불편없이 살아가는 중이다.
나이가 들수록 음악이든 영화든 취향의 호불호가 점점 더 명확해지고 또 그것이 점차 고착되는 느낌이 든다. 이십여 년 전쯤에 ‘비밥’이라는 재즈 장르를 좀 들어 보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어렵고 난해해서 들을 때마다 몸도 마음도 파김치가 되는 기분이었지만 억지로라도 듣다 보면 언젠가 귀가 트이겠지 했으나 끝내 나는 비밥의 내부로 초대받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버티고 들었던 시간의 결과물이 내 몸이나 감각의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 이 ‘억지로라도 버티고’ 의 대목에서 다들 나가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이젠 감각의 ‘기력’ 이 딸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가서는 "예술이고 나발이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 골치 아프기 싫어" 같은 노선이랄까. 이젠 비밥을 다시 들어볼까 하는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 나와 잘 맞고 즐거운 장르들과 만나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예술적 취향을 선택하게 되는 그 편향성이란 어쩌면 좋은 문장의 정의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한다. ‘짧고, 쉽고, 분명한‘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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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5-1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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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5-08 10:37santiago 通信_ 76
사흘이나 내린 비로 유리창이 퉁퉁 불어 버렸다. 창으로 내다보는 세상은 온통 물빛으로 흥건하다. 희끄무레한 회색빛 도심을 배경으로 자동차의 불빛들이 착각처럼 피었다가 건망증처럼 사라지고 빛의 입자들은 잉크처럼 퍼져나간다. 비를 기다린 사람들이 많았다. 모든 것이 메말라 있었던 것이다. 물기를 머금은 축축한 바람이 낮게 지나간다.
나의 척박한 땅에도 비가 내렸다. 단 하나의 풀도 나무도 자랄 수 없는 모래의 사막. 한낮의 폭염과 한밤의 혹한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나는 깃발도 거처도 없이 무작정 배회했었다. 나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멀리 보이는 신기루 같은 마을의 경계였다. 밤이 되면 따뜻한 불빛들이 저희끼리 두런거리던 새까만 지평선. 나는 언제나 방관하는 자였고 간섭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며,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돌멩이를 던져도 누구 하나 내다보 지 않던 경계의 바깥. 그곳에서 나는 하늘을 가릴 지붕 하나 없이 말라붙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엔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밤하늘에 칼날처럼 유성이 지나갔고 이후 나의 꿈은 온통 예감으로 뒤덮였다. 물을 찾는 일은 벌써 포기하고 말았다고 생각했는데 찌그러진 깡통 속에선 언제나 파도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래를 상상했고 고요한 섬을 상상했으며 해류와 철새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상상했다. 쓰리고 메마른 날은 태양처럼 이어졌다. 메아리마저 말라붙어 되돌아오는 음향에 먼지가 풀풀 일던 내 깊은 사막. 나는 왜 여기서 홀로 쓸쓸한 것일까. 그리고 어느 날, 아주 오래된 예언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흙들은 일제히 후두둑 소리를 질러대고 나는 내리는 비에 옴팡 젖는다. 갈아입을 옷도 없으니 이 비를 피할 순 없지. 땅을 충분히 적신 빗방울은 이내 웅덩이가 되고 웅덩이는 도랑이 되고 도랑은 개천이 된다. 물줄기를 이끄는 목자처럼 나는 지팡이 하나를 주워 들고 휘청휘청 물길을 따라다닌다. 신이 나서 뛰어다닐 때마다 맨발이 젖은 땅에 푹푹 빠진다. 아 얼마만인가, 땅의 탄력을 확인하는 이 기쁜 순간이.
비는 그치지 않고 개천의 물길은 점점 불어난다. 이제는 새로운 꿈을 꾸어야지. 이 비가 이대로 불어나 강으로 변해 함께 바다로 가는 꿈. 그 강물에 올라 저 먼바다, 따뜻하고 그늘 좋은 해변까지 닿는 꿈을. 나는 가야지. 갈매기 날고 물고기 가득 실은 배들이 입항하며 처음 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 고래가 있고 섬이 있고 해류가 있고 철새가 바람 속을 날아다니는 그 곳. 그리고는 다시 꼭 껴안아야지. 내 서러운 사막에 눈물처럼 내리는 이 빗물의 강을.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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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5-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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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5-01 10:39santiago 通信_ 75
담배를 끊은 지 5년이 넘었다. 나는 내가 담배를 끊을 수 있으리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리고 다시 몇 번이나, 금연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것이다. 금단의 고통을 참다 참다 결국 식은땀을 흘리며 서랍안에 던져 둔 담배를 허겁지겁 꺼낼라치면 담뱃갑은 나에게 미끌미끌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결국 다시 찾을 거면서 쓸데없이 용쓰기는. 그냥 하던 대로 하구 살어. 인생 별 거 있나.”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피우기 시작했으니 거의 30년 세월이었다. 아시다시피 이쯤 되면 담배의 맛이니 향이니 때문에 피운다기 보다는 그냥 습관이다. 이 습관 하나를 잡아들이자고 해마다 세상이 탕진하는 재정이 얼마인지. 아직도 가끔 내가 끊은 줄 모르고 담배를 권하는 이들이 있다. 끊었습니다 안 피웁니다 긴 소리 하기도 거북하고 내쪽에서도 이쯤해서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라나 궁금해서 일부러 받아 쥘 때도 있다. 한 모금 겨우 피우고는 바로 퉤퉤 뱉어버린다. 이젠 몸도 아예 담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금연을 시도했던 이유 중에서 ‘건강’은 다소 부차적인 것이었다. 늙마에도 아랑곳없이 줄담배를 피워대도 무병하게 장수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흡연이 지속될수록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담배로 인한 질환 또한 팔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담배를 피우면서도 담배를 싫어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지독한 냄새와 습관에 구속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는 나도 몰랐는데 어쩌다 며칠 금연을 할 때면 맡게 되는 타인의 담배냄새가 그토록 지독하고 찌든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비행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기차나 버스에서, 때로는 남의 집에 하룻밤 묵어야 할 때도 흡연의 습관 때문에 욕구를 억제하는 것은 무척 귀찮고 난감한 일이었다. 친지의 집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을 때, 담배 한 대를 피우자고 비 오는 날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해가며 아파트 17층에서 1층까지 저녁 내내 세 번 네 번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비는 추적추적 오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컴컴하고 낯선 아파트 화단 한구석에 우산을 쓴 채 엉거주춤 서서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만하면 한심해서라도 끊을텐데 끝내 끊지 못했다. 오랜 시간 금연을 위한 여러 차례의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끝나자 나는 이거 도저히 못 끊나 보다,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가급적 적게나 피우자고 하나마나한 방침을 정했는데 어느 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오늘은 피우지 말아볼까… 정도로 느긋하게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담배를 끊으려고 그렇게 안달복달하던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할 뿐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아주 가끔은 정말로 운명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찾아온다. 좋은 일로 찾아올 수도 있고 나쁜 일로 찾아올 수도 있지만 나쁜 일은 운명이라기보다는 그저 보통의 ‘일상‘이라고 봐야한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나. 인생의 디폴트(기본값)는 ‘불행’이라고. 오십 년 넘게 인생을 살아본 나는 그 말을 지지한다. 좋은 일들만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금연이 내게 '우연히' 찾아왔던 것처럼. 아주 드물게 인생이 보내오는 선물 같은 것이다. 잊혀진 줄 알았던 인연이 우연히 다시 회복되는 일이나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의 즐거움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일, 좋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에게 나의 기쁨을 알리는 일들이 모두 그러하다. 치유와 안식과 평화로 가득한 순간을 위해 나의 생활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모든 일들과 사람. 그것만이 진정한 운명이라고.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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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3-04-2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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