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 플러스 구매
메시지 채널 리스트
삭제
젤리선물
  • 임의지정
  • 내 보유젤리 0

하트선물
  • 임의지정
  • 내 보유하트 0

메시지 상세
00:00

logo

http://s5f0kttgr61sov.inlive.co.kr/live/listen.pls

 

quiet nights of quiet stars
  • 13
  • 깊고 푸른 밤(@djckvl)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5-08 10:37
    santiago 通信_ 76


    사흘이나 내린 비로 유리창이 퉁퉁 불어 버렸다. 창으로 내다보는 세상은 온통 물빛으로 흥건하다. 희끄무레한 회색빛 도심을 배경으로 자동차의 불빛들이 착각처럼 피었다가 건망증처럼 사라지고 빛의 입자들은 잉크처럼 퍼져나간다. 비를 기다린 사람들이 많았다. 모든 것이 메말라 있었던 것이다. 물기를 머금은 축축한 바람이 낮게 지나간다.

    나의 척박한 땅에도 비가 내렸다. 단 하나의 풀도 나무도 자랄 수 없는 모래의 사막. 한낮의 폭염과 한밤의 혹한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나는 깃발도 거처도 없이 무작정 배회했었다. 나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멀리 보이는 신기루 같은 마을의 경계였다. 밤이 되면 따뜻한 불빛들이 저희끼리 두런거리던 새까만 지평선. 나는 언제나 방관하는 자였고 간섭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며,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돌멩이를 던져도 누구 하나 내다보 지 않던 경계의 바깥. 그곳에서 나는 하늘을 가릴 지붕 하나 없이 말라붙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엔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밤하늘에 칼날처럼 유성이 지나갔고 이후 나의 꿈은 온통 예감으로 뒤덮였다. 물을 찾는 일은 벌써 포기하고 말았다고 생각했는데 찌그러진 깡통 속에선 언제나 파도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래를 상상했고 고요한 섬을 상상했으며 해류와 철새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상상했다. 쓰리고 메마른 날은 태양처럼 이어졌다. 메아리마저 말라붙어 되돌아오는 음향에 먼지가 풀풀 일던 내 깊은 사막. 나는 왜 여기서 홀로 쓸쓸한 것일까. 그리고 어느 날, 아주 오래된 예언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흙들은 일제히 후두둑 소리를 질러대고 나는 내리는 비에 옴팡 젖는다. 갈아입을 옷도 없으니 이 비를 피할 순 없지. 땅을 충분히 적신 빗방울은 이내 웅덩이가 되고 웅덩이는 도랑이 되고 도랑은 개천이 된다. 물줄기를 이끄는 목자처럼 나는 지팡이 하나를 주워 들고 휘청휘청 물길을 따라다닌다. 신이 나서 뛰어다닐 때마다 맨발이 젖은 땅에 푹푹 빠진다. 아 얼마만인가, 땅의 탄력을 확인하는 이 기쁜 순간이.

    비는 그치지 않고 개천의 물길은 점점 불어난다. 이제는 새로운 꿈을 꾸어야지. 이 비가 이대로 불어나 강으로 변해 함께 바다로 가는 꿈. 그 강물에 올라 저 먼바다, 따뜻하고 그늘 좋은 해변까지 닿는 꿈을. 나는 가야지. 갈매기 날고 물고기 가득 실은 배들이 입항하며 처음 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 고래가 있고 섬이 있고 해류가 있고 철새가 바람 속을 날아다니는 그 곳. 그리고는 다시 꼭 껴안아야지. 내 서러운 사막에 눈물처럼 내리는 이 빗물의 강을.

    댓글 2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5-03 10:32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ㅤ

    댓글 0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5-01 10:39
    santiago 通信_ 75


    담배를 끊은 지 5년이 넘었다. 나는 내가 담배를 끊을 수 있으리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리고 다시 몇 번이나, 금연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것이다. 금단의 고통을 참다 참다 결국 식은땀을 흘리며 서랍안에 던져 둔 담배를 허겁지겁 꺼낼라치면 담뱃갑은 나에게 미끌미끌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결국 다시 찾을 거면서 쓸데없이 용쓰기는. 그냥 하던 대로 하구 살어. 인생 별 거 있나.”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피우기 시작했으니 거의 30년 세월이었다. 아시다시피 이쯤 되면 담배의 맛이니 향이니 때문에 피운다기 보다는 그냥 습관이다. 이 습관 하나를 잡아들이자고 해마다 세상이 탕진하는 재정이 얼마인지. 아직도 가끔 내가 끊은 줄 모르고 담배를 권하는 이들이 있다. 끊었습니다 안 피웁니다 긴 소리 하기도 거북하고 내쪽에서도 이쯤해서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라나 궁금해서 일부러 받아 쥘 때도 있다. 한 모금 겨우 피우고는 바로 퉤퉤 뱉어버린다. 이젠 몸도 아예 담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금연을 시도했던 이유 중에서 ‘건강’은 다소 부차적인 것이었다. 늙마에도 아랑곳없이 줄담배를 피워대도 무병하게 장수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흡연이 지속될수록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담배로 인한 질환 또한 팔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담배를 피우면서도 담배를 싫어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지독한 냄새와 습관에 구속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는 나도 몰랐는데 어쩌다 며칠 금연을 할 때면 맡게 되는 타인의 담배냄새가 그토록 지독하고 찌든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비행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기차나 버스에서, 때로는 남의 집에 하룻밤 묵어야 할 때도 흡연의 습관 때문에 욕구를 억제하는 것은 무척 귀찮고 난감한 일이었다. 친지의 집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을 때, 담배 한 대를 피우자고 비 오는 날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해가며 아파트 17층에서 1층까지 저녁 내내 세 번 네 번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비는 추적추적 오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컴컴하고 낯선 아파트 화단 한구석에 우산을 쓴 채 엉거주춤 서서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만하면 한심해서라도 끊을텐데 끝내 끊지 못했다. 오랜 시간 금연을 위한 여러 차례의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끝나자 나는 이거 도저히 못 끊나 보다,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가급적 적게나 피우자고 하나마나한 방침을 정했는데 어느 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오늘은 피우지 말아볼까… 정도로 느긋하게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담배를 끊으려고 그렇게 안달복달하던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할 뿐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아주 가끔은 정말로 운명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찾아온다. 좋은 일로 찾아올 수도 있고 나쁜 일로 찾아올 수도 있지만 나쁜 일은 운명이라기보다는 그저 보통의 ‘일상‘이라고 봐야한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나. 인생의 디폴트(기본값)는 ‘불행’이라고. 오십 년 넘게 인생을 살아본 나는 그 말을 지지한다. 좋은 일들만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금연이 내게 '우연히' 찾아왔던 것처럼. 아주 드물게 인생이 보내오는 선물 같은 것이다. 잊혀진 줄 알았던 인연이 우연히 다시 회복되는 일이나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의 즐거움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일, 좋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에게 나의 기쁨을 알리는 일들이 모두 그러하다. 치유와 안식과 평화로 가득한 순간을 위해 나의 생활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모든 일들과 사람. 그것만이 진정한 운명이라고.

    댓글 1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4-26 10:24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ㅤ

    댓글 1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4-24 10:26
    santiago 通信_ 74


    전에 자주 들었던 시부야 계열의 음악이 문득 생각나서 다시 듣고자 검색을 할려니 곡목을 잊어버렸다. 아티스트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다. 연주곡이라 가사로 찾는 건 더욱 난망하다. 유튜브에 접속해서 겨우 생각나는 몇 개의 키워드를 인절미 삼아 이런저런 장르와 카테고리 속에 콩고물 묻히듯 뒹굴뒹굴 굴렸더니 ‘떡’ 하니 떴다.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세태가 변하고 나날이 진보하는 사회 속에서 격세지감의 감회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가끔은 기술과 문화적 환경의 놀라운 변화에 단순히 감사한 마음을 넘어 저릿해지는 순간마저 있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에 레이프 가렛 Leif Garrett 이 내한 했고 그 이듬해에 둘리스 The Dooleys 의 한국 공연이 있었다. 조숙한 국민학생들 중에는 레이프 가렛이나 둘리스의 ‘팝송’ 들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문제는 이 ‘음원’을 찾아들을 방법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형이나 누나가 있는 집 아이들은 그들의 레코드나 카세트테이프를 같이 들으면 됐지만 형도 누나도 없는 나 같은 맏이들은 혼자 어디서 노래를 찾아 듣기가 힘들었다. 아직 중학생도 아닌 주제에 알파벳도 모르면서 되바라지게 무슨 팝송이냐고 타박하던 시절이기도 해서 당당히 레코드 점에 가서 그들의 레코드를 사는 일도 난감했기 때문이다. 겨우 겨우 라디오에서 한 번씩 흘러나오는 것을 타이밍 좋게 들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나마 레이프 가렛의 ‘I Was Made for Dancing’ 이나 둘리스의 ‘Wanted’ 는 거의 ‘국민 팝송’ 처럼 유명하고 친숙해서 자주 나오긴 했지만.

    결국 이 갈증을 해결한 것이 가까이 살던 사촌누나의 카세트테이프였다. 레코드점에 주문해서 좋아하는 노래들만 녹음해 온 것으로 이후 한때 우리의 여가를 풍미했던 이른바 ‘길보드 테이프’ 의 효시가 되는 물건인데 이것에 대한 일화들은 워낙 많은 관계로 나중에 따로 한번 써야겠다. 아무튼 흑백 진공관 텔레비전의 시절과 컴퓨터와 인터넷과 유튜브의 시절을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만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싶어 마치 전쟁터에 나간 아빠의 편지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시절에 비하면 오늘날에 음악을 듣는 일은 너무나도 쉽고 편리해졌다. 게다가 하루종일 돈 한 푼 내지 않고(간접적인 광고료의 영역이 있기는 하지만) 마음껏 들어도 저작권에는 아무런 침해가 없다니 쇼비즈니스의 생태계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는 나로선 알 수 없지만 그저 고맙고 즐거울 따름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음원에 대한 소장의 욕구는 상대적으로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내가 이 나이에 피프티피프티나 유진스를 사러 다닐 일은 없는 것이고 예전에 즐겨 듣던 음악들도 시디플레이어로 들어 본 지가 한참 된 것이다. 일일이 기계를 작동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컴퓨터 스피커의 음질도 그럭저럭 급한 대로 해결하기엔 아쉽긴 해도 그 정도면 족하다.

    어린 시절, 좀 과장해서 '천신만고' 끝에 레이프 가렛이나 둘리스의 노래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게 되었을 때의 순간은 정말로 달콤했다. 40여 년의 시간이 지나 이젠 손쉽게 아무 노래나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세상을 맞이했지만 그 옛날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좋아하던 노래를 두근거리며 기다리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언제나 그립고 마음 한 곳이 왠지 저릿해져 온다. 어린 날, 작은 이파리처럼 푸릇푸릇하던 날들의 라디오 데이즈.

    댓글 0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4-19 10:29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댓글 0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4-17 10:27
    santiago 通信_ 73


    중학 시절 자전거로 통학했는데 딱 이맘때의 봄이었다. 2학년 1학기 오후의 하굣길, 자전거에 앉은 내 가슴팍과 얼굴로 봄날 저녁의 부드럽고 미지근한 바람이 물결처럼 밀려왔고 병아리색으로 바래진 햇살은 노을빛으로 짙어져 먼 건물들의 원경이 차츰 흐릿해지던 시간.

    전두환 덕택에 교복과 두발의 자율화가 시행되던 중이라 일본식 교복을 벗고 사복으로 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이라 머리마저 길게 길러도 선생들은 상관하지 못했다. 요즘 아이들이 봤다면 외국인 학교 학생들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E.T. 를 자전거에 태우고 탈출하던 영화 속의 아이들처럼 우리는 달렸다.

    모퉁이를 돌아서 어느 여고 앞, 건축이 지연되는 중이던 공사현장의 비포장 길을 신나게 달리는 참인데 그때 먼발치에서 걸어오던 여인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다. 젊은 여자였고 적당한 키에 하얀 원피스, 갈색 스타킹. 비끼는 태양을 등지고 있어서 빛의 간섭으로 그녀의 자세한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중요한 건 햇빛의 역광으로 인해 그녀, 원피스 속에 육체의 실루엣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나는 마치 난생처음으로 여자를 구경하는 프랑켄슈타인처럼 온몸이 얼어붙은 채 그녀를 지나쳤다. 그녀를 스쳐가는 몇 초 동안 내 귓가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 완벽한 정적이 흘렀다. 번개처럼 지나간 순간의 일이었지만 나도, 심지어 자전거도, 나와 자전거를 둘러싼 공기마저도 발갛게 상기 되어서 미열이 있는 것처럼 휘청거리며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 밤, 봄은 한층 원숙해져 있었다. 생의 전혀 다른 이면이 열린 것이다. 알 수 없는 흥분과 설레임이 불규칙적으로 다가왔다 사라졌고, 코 밑의 수염 자리가 유난히 거무튀튀했으며 꽃잎을 깊숙이 들이킬 때 나는 향기 어린 비린내를 맡는 기분도 들었다. 말하자면 나는 ‘여성’ 이라는 '객체'를 그날에 이르러서야 난생처음으로 진지하게 검토하고 사고하며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세계는 인식의 반영이라고.

    그날 밤... 나는 얼마나 당돌하고 발칙했던가. 길고 복잡하고 몽환에 어지러운 꿈이 있었다.

    정말이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 사춘기의 첫 순간. 아득하기만 한 시간의 저 편, 어느 봄날의 오후.
    자전거가 일으킨 부연 먼지 냄새.

    댓글 0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4-12 12:17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댓글 0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4-10 10:41
    santiago 通信_ 72


    가수 현미 선생이 작고 하셨다. 그 며칠 전에는 일본의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 선생이 별세 했다. 나는 현미 선생의 ‘밤안개’ 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왕가위의 영화 중에 ‘화양연화’를 좋아하는데 '밤안개'라는 곡에는 어딘가 그 영화적인 분위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현미 선생의 노래 중에 내가 아는 곡은 '밤안개' 한 곡이 유일했고 비교하자면 사카모토 선생의 음악을 훨씬 많이 들었다. '마지막 황제 OST' 라든가 특히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같은 곡은 요즘도 자주 듣는다(생각난 김에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반복해서 듣고 있다). 게다가 사카모토 선생은 ‘친한파’ 로서 이웃나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하고 반전과 평화를 주장했던 양심적인 음악가로도 명망이 높았다. 인간의 죽음 앞에 경중이 있으랴만 그럼에도 나는 사카모토 선생 보다 현미 선생의 작고가 더 애잔하다. 내 안의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허무가 일어난다. 몇 해 전 배우 신성일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는데 이 기분을 설명하자면 뭐랄까,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나를 둘러싼 세계의 한 부분이 사라지는 느낌이라고 하면 될까. 신성일 선생 역시도 나는, 그분의 영화도 신성일 선생 자체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마치 익숙한 생활의 일부를 상실한 기분이었다. 특별히 좋아하고 추앙했던 적은 없었지만 내가 존재하는 세계에 있어 그들은 언제나 늘 한 곳에 걸려 있는 그림이거나 오래된 나무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 어린 시절부터 현미와 신성일이 있었던 익숙한 정경들과의 작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빠와 엄마’ 였던 때, 두 사람의 공간 안에서 어린 나와 내 동생은 무럭무럭 몸이 자라고 마음이 커져갔던 것이니 나로선 단 한 번도 나의 세계 안에 현미 선생도 신성일 선생도 벽에 걸거나 나무로 심은 적이 없다 해도 그들에 대한 아빠와 엄마의 추억을 온전히 '상속' 받은 셈이다. 은연중에 그들은 벽에 걸린 익숙한 그림이었고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커져버린 나무가 되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떠났다. 그림을 떼어낸 오래된 벽엔 그림크기만큼의 말끔한 면적이 헛헛하게 드러나고 잘려진 오래된 나무의 그루터기는 홀로 기대어 앉기에 충분하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잦아지는 이별에 적응하기 위한 마음의 방어기제 같은 것인지 다시 오지 않을 모든 것들에 대한 작별의 말들도 이제는 괜스레 비감하지 않게 되었다. 고맙다는 마음은 자주 들었다. 뭐가 고마운 건지는 딱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저 이 어설픈 세상을 북적북적 같이 부대끼며 살아줘서 고마운 것일까.

    류이치 사카모토 선생님. 좋은 음악 들려줘서 고마웠어요. 부디 좋은 곳으로 떠나십시오.

    댓글 0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4-05 10:23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ㅤ

    댓글 0

    • 쪽지보내기
    • 로그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