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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 nights of quiet stars
  • 19
  • 깊고 푸른 밤(@djckvl)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2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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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25 11:11
    santiago 通信_ 58


    무슨 금융 앱이 편리하다고 지인이 추천을 해줘서 연초에 깔았다. 처음엔 열어보지도 않다가 요즘 그거 쓰냐고 지인이 일부러 묻고 나서야 회원 가입을 하고 며칠 들여다봤다. 별 게 별 게 다 된다. 입출금은 물론 보험이나 이자 조회, 신용등급에다가 심지어 다른 은행 관리까지 가능하다. 스위스군용 칼처럼 아주 다용도다. 덕분에 요즘 잘 쓰고 있다. 게다가 예금 이자까지 후하다. 와, 이게 다 가능해, 이야- 이야- 넋 빠지는 소리를 연발하고 나서는 꼭 이런 멍청한 소리를 덧붙인다. "이 좋은 걸 왜 진작에 몰랐지." 옆에 계신 분이 요즘 세상에 어디 가서 그렇게 감탄하면 사람들이 당신을 호롱불 켜놓고 천자문 읽는 사람인 줄 안다고 구박했다.

    매번 은행까지 찾아가서 특정된 용지에 수기手記로 금액을 기입해 돈을 찾거나 통장을 들이밀어 입금을 하던 시절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디지털의 방식은 견줄 수 없이 편리하고 안전하다. 은행 업무 전산화의 결과로 오프라인 지점들이 대폭적으로 정리가 되는 바람에 인원 감축이나 노년층의 '금융접근성 저해' 등은 우려스럽긴 하지만 이미 디지털 금융은 대세가 되었다. 나부터도 은행을 찾아가 창구 직원과 대면한 게 2, 3년 래에는 드물고 그마저도 "스마트폰에서 뭘 좀 할랬더니 잘 안되는데 어떡하죠?" 같은 용건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발명이 나타날 때마다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냈다. 전통적 가치와 질서를 존중하는 보수적 견해는 언제나 새로운 발견과 발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가령 사진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현대 예술의 평범함에서 비롯된 발명일 뿐 재능 없는 화가의 피난처”라는 악평이 있었고 결코 예술로 평가받지 못할 것이라는 많은 미술평론가들의 견해가 있었다. 물론 이 시대에도 사진의 예술성을 미리 간파한 선구적 예술가들은 있었다. 워드 프로세서가 보편화되자 사람들은 작가들에게 "손으로 글을 쓸 때와 타자打字로 글을 칠 때 영감이라든지 착상이라든지 작업의 방식에 차이가 있느냐" 고 물었다. 워드 프로세서도 넘어 이젠 컴퓨터 텍스트 프로그램이 대세인 요즘에야 이런 질문조차 마치 고물상 좌판에서도 밀려나 창고에 처박혀 먼지를 쓰고 있는 고철처럼 고루하고 촌스러운 것이지만.

    새로운 기술이 반드시 재앙의 전조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계'와 '장치'에 과몰입하는 상황이나 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오염과 폐기에 대한 환경 문제들이야 새로운 기술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디지털이라는 게 지나친 정확성 내지는 기계적인 선택과 출력의 방식으로 해서 비인간적이지 않은가란 질문에는 수긍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술의 역기능에 비해 그 순기능은 혁혁하다. 특히 언제나 대충대충, 두리뭉실, 좋은 게 좋은 거고 '우리 편은 무조건 통과'에다가 '야매'와 '가라'와 '유도리'가 오랜 시간 득세해온 혼탁한 사회에서는 디지털의 정확성이 더욱 선명한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닌가 한다.

    내가 가진 애플리케이션 하나는 문득 몇 년 전 오늘의 날짜에 찍은 사진들을 돌이켜 보여준다. 3년 전, 5년 전 같은 날짜, 같은 계절에 있었던 나의 인생. 나와 가족들과 친구들과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 별 거 아니지만 얕게 흘러갔다고 느낀 세월 동안에도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그 앱의 이벤트로 느낄 수 있다. 나 같은 기계치가 이런 말 하는 건 주제넘지만, 현대의 발명은 여기까지 왔다. 함부로 비인간적인 디지털이니 하는 말도 쉽게 하면 안 되는 세상 같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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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20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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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18 11:01
    santiago 通信_ 57


    아동문학가이자 마종기 시인의 아버님 되시는 마해송 선생의 작품 가운데 ‘정불서 靜不暑’ 라는 제목의 수필이 있다. 제목을 풀이하자면 '가만히 있으면 더위를 모른다' 정도가 될까. 이 염천에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글을 쓰시니 얼마나 덥겠느냐며 지인이 선풍기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기계 바람을 원체 싫어하는 자신에겐 무용無用이라, 아예 준 것이면 팔아서 돈으로 바꾸겠는데 그러지 못하니 손님이 오면 접대나 하는 용도다. 펜을 든 손목에서는 구슬땀이 흐르지만 장판방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 그리 더운 줄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정-불서다. 수필의 말미에 이렇게 적고있다. "종일토록 땀 흘려 일하고 저물어 한 탕(목욕)한 다음 진건한 청요리를 하고 다시 한 탕 하는 맛이란 여름밖에 없는 즐거움이었다."

    어느 일본 만화의 주인공은 동네 야구시합이 있던 날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윈드브레이커까지 입은 채로 땀을 줄줄 흘려가며 시합에 열중한다. 적당히 쉬어가며 해도 되는데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조차 않고 그는 무아지경으로 열심이다. 그가 전력으로 시합에 임했던 이유는 바로 시합이 끝나고 마시는 맥주, 차갑게 식혀 아이스박스에 재워둔 그야말로 뼛속까지 써늘한 맥주를 들이키는 쾌감을 위하여 그는 일부러 온몸이 열화에 들떠 땀범벅이 되도록 체력을 소진했던 것이다.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어 사지가 더할 수 없는 시원함으로 해방되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억지로 사우나의 열기를 참는 노력과 비슷한 것이다.

    더위에 지쳐 집으로 돌아온 다음 찬물에 목욕을 하고 새로 갈아입은 속옷과 반바지 티셔츠에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인 채로 여름 저녁밥상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던 시절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러자면 여름이란 계절이 다소 우직하달까, 어딘가 빈틈이 있는 여름이어야 한다. 아무리 더워도 결코 어떤 '선'을 넘지 않는 소박한 성정의 여름. 물론 그 시절에도 가끔 40도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더위가 존재했지만 산업화의 굴뚝이 매연을 뿜어내고 하천으로 오염된 물이 흘렀을 망정 도회의 여름은 지금처럼 '처절'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거짓말 같지만 그때는 도심 한복판의 가옥이라도 한밤의 어느 시간엔 어디선가 서늘한 기운이 제법 불어왔다. 동네 개들이 일없이 깨어나 돌아가면서 짖어대던 심야. 그래서 그 서늘한 온도에 대비하고자 모두는 한여름에도 얇은 이불을 지참하고선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더위에 지친 낮의 피로를 회복하고 다음 날 또다시 일터로, 학교로 가곤 했다.

    이 자연친화적이었던 '열기의 순환'이 깨져버린 것이 에어컨의 등장 이후부터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새삼스레 고마워하는 문명의 이기에다 대고 나 같은 인간이 투덜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운이 좋으면 하루 종일도 좋도록 뜨겁고 숨 막히는 외기外氣에 거의 노출되지 않고 '에어컨 빵빵한' 집까지 도착할 수 있는 세상이 되다 보니 찬물에, 서늘한 대기에, 불현듯 불어오는 바람에, 더위가 산산히 씻겨나가는 그 상쾌한 '타격감' 이 그립다는 것이다. 기상도 일기도 세태에 따라 변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구과학적 불안에 따른 이슈를 따로 들고 오지 않더라도 요즘의 더위는 우리의 어린 시절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원인과 예방의 방안이 무엇이든 간에 여름날에만 느낄 수 있었던 낭만들은 점점 드문 일이 되어간다. 카디건을 걸치고 양말을 신은 채로 뜨거운 국을 마시는 한여름을 보면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 는 말이 불현듯, 모골이 송연하게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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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1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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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11 11:25
    santiago 通信_ 56


    의학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고 나서 다시 깨어나는 임사체험臨死體驗의 경우가 있다.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체험자들은 사후死後 세계를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사망 직후 강렬하고 황홀한 빛을 보았다는 것과 자신의 일대기가 마치 필름처럼 촤르르 흘러 가더라는 공통된 증언이 있고, 그다음부터는 이야기가 제각각이다.

    우선 종교에 따라 달라지기를,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나 천사들이 마중을 나오더라고 하고 불교에 깊었던 사람들은 강을 건너자 크고 화려한 사찰이 있더라는 식이다. 가톨릭 신자는 성녀聖女 같은 분이 데리러 오신다는데 보나 마나 성모 마리아의 현신現身일 것이고. 그러나 종교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현상을 겪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거의 가족이 등장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오래전에 작고하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주로 마중을 나오신단다. 팝스타 조지 마이클이 급성 폐렴 치료 중 코마 상태가 되었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나 아직 때가 아니니 다시 가라고 했다고 한다. 조지 마이클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White Light' 란 곡을 썼다. 개나 고양이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먼저 가 있던 아이들(개나 고양이)이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과학자들이야 당연히 뇌의 특정한 상태에 의한 착각이거나 환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체험자 가운데는 이런 경우도 있다. 죽음 직후 영혼이 된 청년이 슬퍼할 부모님 걱정에 마음이 미치자마자 순식간에 시골 고향집 안방 천정에 둥둥 떠있더라는 것이다. 순간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당시 방에 있던 부모님이 농협에서 빚을 낸 영농자금 상환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그는 들었는데 죽음에서 깨어나고 난 후에 그 빚 상환 이야기를 했더니 노인들이 깜짝 놀라셨다고 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환각이건 착각이건 간에 커다란 빛의 존재를 느꼈다는 공통점 말고 죽음을 체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주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당부를 한다는 것인데 이미 사바세계의 경계를 넘나든 이력이 있는 몸이니 코인은 손절하라거나 어떤 테마주를 사서 묻어 두라거나 모처의 지역이 재개발에 들어간다는 따위 신기神氣 있는 조언이면 좋으련만, 그들의 당부란 것은 그저 "절대 남 해코지 말고 착하게 살라" 고 한다는 것이다. 저승을 다녀왔던 어느 한 사람도 돈이나 명예, 물질과 부귀에 대한 미련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이제 죽음이 두렵거나 남은 생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도 했다. 흔히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고들 한다. 죽음의 '본때' 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삶의 욕망이나 인간사 희로애락의 안간힘은 한낱 허무 속을 날아다니는 티끌 같은 것인가.

    일본의 전 총리 아베 신조가 사망했다. 자국민의 총에 맞아 죽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평소 그가 지껄인 무도한 언행들을 생각하면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일말의 '통석의 념' 조차 없다. 아베의 망언은 헤아릴 수 없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낼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그는 "한국에는 기생이 있어서 그런 것(위안부 활동)이 생활 속에 녹아든 것이 아닌가 한다"고 했다. 죽는 날까지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을 꿈꾸던 전범 가문의 황태자는 비명에 눈을 감은 후 삼도천을 건널 무렵 과연 누가 마중을 나왔을까.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위안부 할머니들의 혼백이 잠시나마 평온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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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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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04 11:40
    santiago 通信_ 55


    오래전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리시버를 귀에 꽂고 있었는데 주파수가 잘 잡히지 않았다. 겨우 잡힌 채널은 뉴스. 심심하니 이거라도 들으면서 가자고 별생각 없이 켜놓았는데 귀에 꽂은 리시버를 통해 들려오는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발음이 어찌나 부드럽고 가지런하던지 마치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그 안정되고 편안한 '어조'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와 까무룩히 잠든 적이 있었다.

    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감미롭달까, 귀에 감겨 듣기 좋은 순간은 바로 가을과 겨울 사이 환절기의 깊은 밤, 홀로 운전을 하던 차 안이었다. 국도國道를 달리고 있었고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사람의 장례식에 가는 길이었다. 예전에 어느 장례식을 다녀오던 오후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박기영의 '산책' 이란 노래의 가사가 인상 깊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와, 관계와 시간의 유한성에 대해 불현듯 돌아보는 시간과 가끔 마주친다. 그 밤의 쓸쓸한 길과 공기와 계절 속의 드라이브도 그랬다. 망자亡者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도착하면 그가 늘 자랑하던 그의 아내와 어린 딸을 처음 만나게 될 것이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건만 이젠 세상에 없는 이의 마지막 절차를 배웅하러 가는 길은 멀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시각도 청각도 무중력 상태처럼 먹먹한 가운데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길만이 또렷했다. 대전 부근을 지나자 주파수를 놓친 라디오에선 노이즈가 통곡처럼 터져 나왔고 서둘러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중 우연히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다이얼은 멈췄다. 그 지역의 종교 방송 채널이었는데 불교방송이었는지 원불교 방송이었는지 가톨릭 방송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으나 전문적이지 않은 느낌으로 미루어 수녀님이거나 스님이거나 교무님이지 않았을까. 고향에서 올라온 편지를 읽듯 담담한 목소리로 읽어내려 가는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우리가 일을 하면서 얻는 상처는
    육신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는 몸의 흔적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받는 마음의 생채기는
    일체의 소통으로부터 소외된 누군가가
    애타게 갈망하는 관계의 흔적입니다.
    우리의 피곤했던 오늘 하루는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입니다.
    우리의 보잘것 없는 것들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간절한 소망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세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행복을 자주 생각하세요.
    그리고 언제나 영원을 꿈꾸세요.


    내용은 다소 도식적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나를 둘러싼 마음의 어둠을 갉아먹었다. 사과를 먹는 청순한 치아처럼 아삭아삭. 어떤 절망이라고 할까, 모순이라고 할까, 비닐봉지에 담긴 것처럼 우울이 낙엽처럼 바스락거릴 때 낮고 따뜻한 구원의 목소리는 물기처럼 왔다. 그녀의 성대는 영혼의 통로처럼 은혜로운 것, 더없이 잔잔하고 포근했으니, 난 잠시 어떤 의례를 치르는 기분으로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해 커다란 비애 속으로 걸어가야 하는 내게 그녀의 목소리는 강江의 수면 위에 잔잔히 떠있는 나룻배처럼 나를 위로했던 것이다. 멘트가 끝나자 양희은의 노래가 흘러 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른 잡음 속에서 양희은은 분해되었다.

    미망인은 나와 목례를 나눈 후 와 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일부러 울지 않기로 작정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너무 울어서 진이 빠져 버린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절벽에 맺힌 암염巖鹽처럼 창백하고 건조했다. 사람의 음성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음향 가운데 누군가에게 건네는 위안의 말처럼 귀하게 빛나는 것이 있을까. 느리고 낮을수록 언어의 의미는 더욱 단단하고 선명해진다. 축축한 늦가을의 낙엽들이 죽은 파충류처럼 아스팔트에 붙어 있던 그날의 국도를 생각한다. 그 검은 길을 지날 때 캄캄한 자동차 안에서 담요처럼 나를 감싸던 그 정갈하고 침착했던 목소리를.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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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0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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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6-27 12:03
    santiago 通信_ 54


    청춘靑春이 한 마리 고래 같은 것이라면, 내게 청춘은 언제 왔다가 언제, 영원永遠의 심해深海로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나는 아직 그 고래에 올라타고 있나. 설마, 세월이 내게만 그렇게 친절 할리가. 내 동정童貞의 밤을 지배하던 여배우가 있었다. 밤마다 정염情炎을 한 바가지씩 퍼붓고 가던 이탈리아의 중년 여인. 요즘 그녀의 부고가 뜨지나 않았는지 IMDB를 가끔 뒤적인다. 그녀가 팔순에 든지도 한참이 지났다. 밤마다 나를 찾아왔던 필름 속의 그 화려한 관능은 이제 흔적도 없지만 다행히 그녀는 아직도 무고하시다.

    매일매일 한 세대의 부스러기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우리 세대의 추억들을 고물처럼 실은 낡고 육중한 화물선은 날마다 망각의 지역과 기억의 보관소로 뱃고동을 울리며 떠난다. 배의 꽁무니에 따라붙은 시간의 갈매기들은 크로노스의 정령처럼 선박의 항로를 조력한다. 배 떠나는 항구의 서정이 서글픈 것이면 차라리 하늘로 날려 보낼까. 수만 개의 풍등風燈처럼 이 행성의 끝을 향해 망망히. 의미도 기념도 없이 마른 재처럼 황황하게.

    머리숱은 줄고 흰머리는 늘어나며 한 번 달라붙은 살은 좀 체 빠져나갈 생각을 않는다. 나이가 들면 '체형의 평준화' 가 이루어진다는 우스개처럼 늙도록 육신에 매달리는 미련을 섭리는 비웃는 것이겠지. 노안이 찾아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자세히 들여다보며 애쓰지 말라는 신의 귀띔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늙은 눈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들이 오히려 선명하다.

    오래된 바둑판처럼 영원할 것 같던 사람들도 화물선에 동승하여 하나둘 떠났다. 조지 마이클, 마이클 잭슨, 프린스, 데이빗 보위, 커트 코베인, 휘트니 휴스턴, 신해철... 밑반찬들의 이름처럼 나의 방과 학교에서 익숙했었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마음의 우물 속에 묵직한 돌을 집어넣는 기분이 든다. 이들로 하여 열광했던 시간이 있었으니 해마다 연하장을 써 보내는 수고를 맡는다 해도 유감 없지만, 그러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세월을 보내는 일도 나이를 먹는 일도, 웃으면서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어딘가 진이 빠지는 일이었으니까. 앞으로 남은 시간을 세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새롭게 푸근하다. 영원의 어느 모퉁이에 물고기처럼 착한 영혼들이 별빛처럼 모여 사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마음은 흐뭇해진다.

    병마가 두 해를 넘기는 동안 우리는 수화手話처럼 서로를 헤아리고 마스크처럼 자주 침묵했다. 불행은 이내 걷히리라는 야윈 희망마저 낡은 빨래처럼 쓸쓸히 말라가는 것이니, 어느 날 돌아본 청춘은 완행열차처럼 진부하게 떠나버렸고 추억은 피로연이 끝난 싸구려 국밥집처럼 낭자하다. 청춘이란 말에 닭살 돋을수록 아직 청춘이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청춘아, 되돌아 가는 길 어디에서 쉬느냐. 점심은 먹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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