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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 nights of quiet stars
  • 13
  • 깊고 푸른 밤(@djckvl)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2-08 10:56
    santiago 通信_ 46


    막히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로 진입한 귀경길. 네비게이션이 시키는대로 예의 충주 지나 여주, 이천으로 접어들자 이 길도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로 가득하다. 멀찌감치 신호등이 몇 번을 바뀌는 동안에도 행렬은 꼼짝하지 않는다. 어제 오늘 일인가 체념하다가도 허구헌 날 이러는 게 맞는 일인가 싶다. 설날 아침에 내리는 눈은 서설瑞雪이라 좋은 징조라고 하지만 먼 길을 가야하는 운전자에게는 어지간히 부담스러운 일기日氣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생각만큼 눈은 많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설 연휴의 눈 내리는 귀경길' 이라는 상황에 비해선 길은 다소 수월한 편이었다.

    요지부동인 차 안에 갇혀 하품을 거듭하며 멍하니 시선을 던지자니 거친 바닥의 덤불 더미에서 참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전선 위에 가지런히 앉는다. 그러다 이내 와르르 전선을 내려와 다시 덤불 위에 제각각 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앉자마자 다시 또 후다닥 전선 위로 옮겨간다. 십 초도 되지 않는 찰나에 이걸 몇 번이나 되풀이 한다. 전선에서도 덤불에서도 이들은 마땅한 용건이 없다. 먹이를 찾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올라왔다 내려앉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처음엔 저 참새들의 군집을 주도하는 리더가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딱히 그래보이진 않았다. 어느 한 마리가 자리를 뜨면 동시에 전부 그를 따라 움직일 뿐이다. 철새들이 겨울하늘을 떼 지어 날아갈 때 맨 앞에서 나는 새가 우두머리일 것이라고 사람들은 오랜 시간 착각했지만 과학자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무리 중 하나가 어쩌다 맨 앞에서 날아갈 뿐이라고. 뒷차가 빵빵대는 바람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마종기 시인의 '낚시질' 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낚시질 하다
    찌를 보기도 졸리운 낮
    문득 저 물 속에서 물고기는
    왜 매일 사는 걸까

    물고기는 왜 사는가
    지렁이는 왜 사는가
    물고기는 平生을 헤엄만 치면서
    왜 사는가...

    한 마리 참새의 작심作心에 무리 전체가 이동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도 어쩌면 관성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번 고향의 부모님을 뵙고 나서 이제 남은 여생의 시간을 헤아리자면 언제나 가슴이 먹먹하고 물기가 어린다. 그들에게 아직도 나는 반백을 넘긴 '물가의 어린 것'일 뿐이다. 서로의 연륜이 깊어갈수록 혈육의 정리는 점점 더 애절하기만 하는 것인데 집을 나서는 순간, 싸늘한 도회로 돌아가야 하는 나와 가족들은 이내 냉엄한 현실을 감당해야 하는 낯선 객지의 주민住民으로 바뀐다. 가슴에 고이 담아둔 묵직한 가족간의 애정이 채 그 온기가 가시기도 전에 귀가의 피로는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교통체증, 미끄러운 길, 폐쇄된 휴게소, 버벅거리는 네비게이션, 도착 후의 피로, 피로 후의 일상...

    부모를 사랑하고 가족과 화목하는 방법이 이럴 수 밖엔 없을까. 먹고 사는 일이 다 그렇지 뭐...그러면 대관절 먹고 사는 일이 무엇이길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릴없이 전선과 덤불을 오가는 참새의 이동처럼 고단하고 권태로운 일상의 중력에 갇혀서 우리는 매번 진실의 갈피들을 함부로 흩날리며 사는 것은 아닌가. 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늙으신 부모와 정다운 고향집을 버리고 이 차가운 길로 들어섰을까.

    마종기 시인의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낚시질 하다
    문득 온 몸이 끓어오르는 대낮,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만은 없다고
    중년의 흙바닥에 엎드려
    물고기같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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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1-2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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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1-24 10:47
    santiago 通信_ 45


    투표권을 가진 후 대통령 선거가 몇 번이나 있었나 세어봤더니 모두 여섯 번이다. 도대체가 살면서 이번처럼 흥미진진한 대선은 처음 본다. 뉴스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몰라, 반전에 반전, 멀찌감치 던져둔 복선의 재구성, 얽히고 설킨 내막과 그 내막을 파헤칠수록 드러나는 경악할 실체. 어느 오락 영화가 이보다 더 박진감 넘칠 것이며 어느 스릴러가 이보다 더 손에 땀을 쥐게 할까. 무엇보다 이것은 전부 실화다. 흔히 '현실은 픽션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고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라는 단서 앞에서는 그 어떤 황당무계한 사건도 실존의 생명력을 지닌다. 앞으로 이런 거 내내 보여줄테니 월정액 9,900원! 이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겠지만 4,900원? 이라면 슬몃 구미가 당길 판이다.

    내가 태어나고 2년 후, 박정희의 10월 유신이 시작되었다. 내가 세상 물정을 깨닫기 훨씬 전부터 독재는 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79년 10.26이 일어나기 전까지 내 어린 사고방식 속에 대통령이란, 그 지위도 위상도 불변하는 신령의 존재에 가까웠다. 따라서 대권大權이란것도 보통 사람 아무에게나 차례가 돌아가는 게 아니라 천부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존재가 그의 수명이 다할때까지 집권하는 것인 줄만 알았다. 마치 왕권王權의 신화처럼. 백일장이나 반공포스터를 만들어 학교에 제출할 때 어린 학생들은 작고 여린 손으로 대통령의 만수무강과 이 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새마을 운동의 무궁한 발전을 아낌없이 축원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그마한 것들이 벌써 유언비어 유포죄니 국가 원수 모독죄니 해서 말조심해야지 까딱 잘못하면 나뿐 아니라 집안 전체가 거덜난다는 따위의 눈치도 멀쩡했다. 가난하고 고생 많은 집 아이들이 일찍 철이 들 듯이. 그렇지만 그런 부당한 상식에 의문을 가지거나 따져 볼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아이들 사고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그때는, 어른들도 모두 겁에 질려 있었으니까. 10.26 다음날 학교에 모였을때 여자아이들 몇 명은 자기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눈물바람을 했다.

    이후에 일어났던 '서울의 봄'이나 군부의 쿠데타, 광주의 비극같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비탄과 통한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훨씬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 숨가쁘고 절박했던 혼란의 시간을 차라리 세상 모르는 어린 시절에 흘려버렸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아이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도록 한다"는 선언이 나왔을 때 난 뭔가 낯설고 기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말해두는데, 난 결코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편도 아니고. 다만, 교활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 큰소리 치며 뻔뻔스레 사는 꼴을 보는 게 그저 화딱지 나는 소시민일 뿐이다.

    "한국인은 들쥐떼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돼도 따를 것이고, 체질상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

    1980년 한미연합군 사령관 존 위컴의 말이다. 후일 그는 자신의 발언이 '미국이 전두환의 쿠데타를 지지' 한 증거처럼 와전돼서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들쥐란 '레밍'이라는 나그네쥐를 일컫는다. 얘들은 집단으로 이동할 때 선두 그룹을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습성이 있어 선두가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전체가 우르르 다같이 떨어져 죽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선동에 따라다니는 심리를 '레밍효과' 라고 부른다. '들쥐'의 비유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존 위컴은 나중에 해명하기를, 한국인을 비하한 것이 아니라 전두환을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의 언론과 엘리트들, 그리고 신군부에 줄을 대려는 고위 공직자들의 꼬락서니를 비판한 말이었다고 전했다.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이 유명한 말은 프랑스의 보수주의자 조지프 드 메스트르가 한 말이다. 이 말을 검색하면 비슷한 뉘앙스의 어록이라고 따라오는 것이 있다. 새뮤엘 스마일스의 '자조론 自助論' 에 나오는 말이다.

    "고상한 국민은 고상하게 다스려질 것이고, 무지하고 부패한 국민은 무지막지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정치에만 국한되는 비유가 아니라 여러 상황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것이어서 가끔 내 자신을 돌아볼때 자주 떠올리는 문장이 있다.

    "개는 날아온 돌멩이에 화를 내지 그 돌을 던진 사람에게 화를 낼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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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1-1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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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1-17 10:54
    santiago 通信_ 44


    겨울 아침, 일어나자마자 실내 환기를 위해 창문을 한껏 열어젖힌다. 왜 이제서야 여는 거냐고 눈을 부라리듯 겨울 찬바람이 순식간에 집안으로 들이닥치고 아침이 지나가고 있는 세상의 소란이 왁자지껄 뒤따라 들어온다. 칼날 같은 겨울 바람이 마치 집달리처럼 온 집안을 뒤지는 동안 두꺼운 패딩을 입고서는 라디오를 켜고 물을 끓이고 집안 곳곳의 전등을 켠다. 겨울 아침의 환기는 매섭고 지루하다. 꽤 시간이 지났지 싶어 맨발을 동동거리며 시간을 확인해보면 겨우 몇 분이 흘렀을 뿐이다. 금세 일어날 소파에 잠시 엉덩이를 붙이자니 그제서야 설정해둔 타이머의 알람이 울린다. 나는 모든 창으로 다가가 창문을 닫는다. 이제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직감한 듯 뒤늦은 바람들이 기를 쓰고 머리를 디밀지만 창문의 차단은 완벽하다. 먼지가 가라앉듯 잠시 정적이 일어난 후, 차가웠던 창문 앞의 공기는 이내 미지근해지고 실내는 점차 따뜻해진다. 새삼스럽게 아늑해지자 마음도 따라 푸근해진다.

    따뜻한 실내에서 창 밖 차갑고 딱딱한 겨울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것은 말하자면 안도감이랄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 밖은 말 그대로 '냉혹한' 현실이 존재하건만 나의 거처는 이렇듯 안온하다는 만족의 상대성인지도 모르겠다. 비를 좋아하는 심리의 본질은 비에 젖고 싶다거나 물웅덩이를 철벅철벅 디디며 쏘다니고 싶다는 따위의 수용성의 동화작용同化作用이 아니라 빗소리를 들으며 쾌적하고 '뽀송뽀송' 한 실내에서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관전의 쾌감이라고 한다. 수필가 김소운은 '외투' 라는 수필에서 자신이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가 "추위는 문 밖에 세워 두고 혼자서 뜨끈하게 군불 땐 방 속에 앉아 있고 싶은 이를테면 그런 '에고ego'의 심정" 이라고 했다.

    시골 외갓집에서는 겨울의 풍경이 도회와는 완연히 달라서 아침에 일어나 쪽마루에 서서 담장 너머를 내다보면 전원의 풍경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라도 내린 날엔 마을 인근의 작은 채마밭이나 산기슭에 버려진 묵정밭까지 눈이 소복한 채로 사람의 자취 없이 순결했고 너른 들판 군데군데 플라타너스가 마을의 충직한 일꾼처럼 하얀 하늘의 경계를 떠받치고 있었다. 이윽고 이른 아침 동리의 밥 짓는 굴뚝 연기가 매운바람에 섞여 어린 후각에 닿으면 그제서야, 아 겨울 외가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곤 했다. 눈도 허구헌 날 오면 눈사람이고 눈싸움이고 어린것들도 시들하다. 겨울방학 동안 우리의 의무는 간결했으니 매일 탐구생활 4장과 일기 쓰기, 독후감을 위한 책 읽기가 전부였다. 대낮에 오늘의 일기까지 후다닥 해치운 다음 사촌형제들은 깔깔거리며 구들장을 뒹굴었다. 창 밖에선 함박눈이 온 세상을 먹먹하게 뒤덮고 눈 덮인 먼 산의 실루엣은 소처럼 누웠는데 우리의 실내는 포근하고 천진했다. 노동도 고뇌도 유예된 시절, 그때 불어난 추억의 살집들이야말로 '삶의 맷집' 이 된다. 인생의 비정한 골목을 지날 때마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을 방치해둔 채 '에고의 심정' 으로 따뜻하기만 했던 유년의 온도는 다시금 세계와 겨울을 새롭게 일깨우는 것이다. 차디찬 풍경과 따뜻한 집, 세상 모든 겨울의 서정은 결국 이 두 가지로 압축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할당되었던 축복을 감사하느니, '시골 외가의 추억' 을 가진 모든 어린 시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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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1-1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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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1-10 11:13
    santiago 通信_ 43


    A와 B는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 여중 여고를 함께 다녔다. 둘은 자매지간처럼 죽고 못살아서 서로의 집에서 밥도 먹고 잠도 같이 잤다. 집안이 넉넉한 편이었던 A의 집에서 어느 날 돈이 없어졌다. A의 엄마는 조용히 B를 불러 너희 집이 어렵다보니 어린 마음에 잠시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거 충분히 이해하니까 돈을 가져오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 A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않을테니 시끄럽게 하지 말자고. B는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울면서 뛰쳐나갔고 얼마 후 돈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요즘 B가 나를 대하는 게 이상하다는 딸의 하소연에 A의 엄마는 아무리 자식이지만 미안하고 죄스러워 그저 꿀 먹은 벙어리 노릇이었다. 결국 A와 B는 영영 멀어졌고 나중에 A가 결혼할 때 즈음에야 무슨 이야기 끝에 엄마가 실토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제서야 차갑게 돌변했던 친구의 사정을 알게 된 A는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B의 행방을 수소문 했지만 누구도 그녀의 근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의 실수였지만 마치 자신이 친구의 어린 마음을 마구 할퀴어 놓은 것만 같아서 언제나 마음 한구석엔 어두운 그늘이 드러워져 있었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오십 줄에 접어 들어서 호주로 여행을 갔는데 도심의 복잡한 인파 가운데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자니 건너편에 서있는 동양인 여자가 유난히 낯이 익더란다. A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혹시 저를 모르시겠냐고 물었다.

    눈물의 재회, 40년 만의 해후였다. 하필 그 멀고도 낯선 이국의 하늘 밑에서. 너무너무 미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는 A의 말에 B는,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말이 커지면 어른들 싸움으로 번질까 싶어 혼자 삼켰단다. 둘의 우정은 전처럼 극진해졌다. 다시 자매지간처럼 지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에는 희한할만큼 늘 비슷한 후일담이 따라온다. "근데 알고보니 세상에, 두 사람 집이 여태 차로 10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었던 거 있지" 게다가 재회 당시, 한 사람은 오늘부터 호주 관광을 막 시작한 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내일자로 귀국하는 일정이었단다. 반나절만 어긋났어도 두 사람은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는 분의 친구 이야기다. 이젠 모두 손주들을 보셨다.

    전염병이 창궐한 이후 사람들은 예방의 일환으로 코와 입을 가린다. 요즘 같은 시절이면 동창회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더라도 A는 마스크 때문에 B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사람이 많이 모인 곳을 피하라는 충고가 있지만 최소한의 용건은 해결해야 하니 때로 번화한 요지를 걷는다. 세태가 이 지경이라도 거리는 여전히 붐빈다. 반 이상 얼굴을 가린 채 오고 가는 사람들을 스치면서 '40년 만의 재회' 같은 건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겠구나 생각했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만난다"는 말처럼 누구에게나 필연적 인연이 우연을 가장하여 다가오는 때가 있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드물게 있지만, 한 번이라도 그런 인연을 경험해 본 사람은 보잘것 없는 나의 삶도 아득한 우주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니 바이러스라는 놈의 것은 얼마나 비정하기까지 한 것인가. 인간사 가슴 뭉클한 기적의 확률마저 가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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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1-05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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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1-03 11:22
    santiago 通信_ 42


    힘을 빼고 아무 생각없이 넋두리하듯 끄적거릴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처음엔 브런치 brunch 를 해볼까 싶었다. 대단한 걸 쓸 건 아니지만, 블로그는 독자의 대상이 지나치게 넓고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위로 노출된다는 게 께름칙했다. 대단한 걸 쓸 게 아니라서 더 그랬다. 블로그는 전성기에 비해서 대중적인 인지도도 많이 줄어들었고 다른 소셜 네트워크가 백가쟁명처럼 다양하게 펼쳐져 있긴 했다. 그러고보면 브런치가 오히려 더 넓고 다양한 다수에게 노출되는 편이다. 그래서겠지만 상업성을 꽤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현재 주류 플랫폼이 무엇이냐의 문제였다. 거기다 브런치는 다소 정형화된 컨셉을 가져야 한다는 제한도 있어서, 그렇다면 우선 연습 삼아 여기서 몇 회 자판을 두드려볼까,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다. 아무 생각없이 하소연하는 공간이라도 너무 폐쇄적이거나 지나치게 노출이 제한된 지면은 긴장감이 없다. 미미하더라도 타인의 열람을 의식해야 자극이 된다. 일기장이나 마찬가지인 내밀한 공간이 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인라이브 로그에 글을 쓰게 된 사연이다.

    작년 봄부터 매주 쓰기 시작했다. 흔히 하는 말처럼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 은 몰랐다. 문제는 뭘 쓰느냐였다. 일단 '글감' 만 잡히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든 대충은 해결이 된다. 매번 뭘 써야 하나, 오래 붓방아를 찧었다. 모바일 앱 가운데 매일 글감을 선별해서 이것을 주제로 글을 써보시오 하는 게 있다. 세상은 참 넓기도 하지.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역시나 디지털 환경이 심화될수록 읽기와 쓰기에 대한 원형적 수요는 오히려 늘어나는게 아닌가 한다. '쓰기'를 독려하는 앱이 존재하는 것도 그렇고, 유튜브 세대들의 저조한 문해력文解力을 한탄하는 글들이 요즘 게시판에 자주 올라오는 것을 보면.

    스탭으로 있을 때 방송국 게시판에 이런저런 게시물들을 만들어 연재하듯이 올린 적이 있었다. 스탭으로서 운영진을 비롯한 시제이들의 수고에 보답한다는 차원에서 시작한 자발적인 일이었는데 비슷한 맥락으로 로그에 사진으로 詩나 문장들을 그래픽해서 올리는 것은 이를테면, 오랜 지기들을 위해 내어 놓은 한 잔의 차와 같은 것이다. 인라이브에서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을 보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중에는 깊숙이 말이 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와 생각이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 그렇게 드물게 서로의 소회를 말없이 교환하는 사람들이 가끔 이 로그에 다녀간다는 것을 안다. 내가 그들의 로그에 일없이 들르듯이. 각자의 삶에 매몰되어 이제 만날 기회는 거의 없지만 칠판 한 구석에 끄적인 메모처럼 서로의 근황을 그런 식으로 확인하는 셈이다. 그러니 나로선 로그에 올리는 글과 사진들은 말하자면 그들을 위해 주간週刊으로 발행하는 아주 짧은 잡지같은 것이랄까. 발행인 '깊고 푸른 밤' 구독자는 '그리운 닉네임들 모두' 이다. 일주일에 두 번, 지금껏 로그를 채우고 있다.

    새해가 밝았다. 깊고 푸른 밤의 로그에 오시는 그리운 모든 이름들이여. 건강과 행복이 여러분의 일상에 빈번하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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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1-12-2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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