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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 nights of quiet stars
  • 13
  • 깊고 푸른 밤(@djckvl)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11 11:25
    santiago 通信_ 56


    의학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고 나서 다시 깨어나는 임사체험臨死體驗의 경우가 있다.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체험자들은 사후死後 세계를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사망 직후 강렬하고 황홀한 빛을 보았다는 것과 자신의 일대기가 마치 필름처럼 촤르르 흘러 가더라는 공통된 증언이 있고, 그다음부터는 이야기가 제각각이다.

    우선 종교에 따라 달라지기를,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나 천사들이 마중을 나오더라고 하고 불교에 깊었던 사람들은 강을 건너자 크고 화려한 사찰이 있더라는 식이다. 가톨릭 신자는 성녀聖女 같은 분이 데리러 오신다는데 보나 마나 성모 마리아의 현신現身일 것이고. 그러나 종교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현상을 겪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거의 가족이 등장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오래전에 작고하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주로 마중을 나오신단다. 팝스타 조지 마이클이 급성 폐렴 치료 중 코마 상태가 되었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나 아직 때가 아니니 다시 가라고 했다고 한다. 조지 마이클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White Light' 란 곡을 썼다. 개나 고양이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먼저 가 있던 아이들(개나 고양이)이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과학자들이야 당연히 뇌의 특정한 상태에 의한 착각이거나 환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체험자 가운데는 이런 경우도 있다. 죽음 직후 영혼이 된 청년이 슬퍼할 부모님 걱정에 마음이 미치자마자 순식간에 시골 고향집 안방 천정에 둥둥 떠있더라는 것이다. 순간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당시 방에 있던 부모님이 농협에서 빚을 낸 영농자금 상환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그는 들었는데 죽음에서 깨어나고 난 후에 그 빚 상환 이야기를 했더니 노인들이 깜짝 놀라셨다고 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환각이건 착각이건 간에 커다란 빛의 존재를 느꼈다는 공통점 말고 죽음을 체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주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당부를 한다는 것인데 이미 사바세계의 경계를 넘나든 이력이 있는 몸이니 코인은 손절하라거나 어떤 테마주를 사서 묻어 두라거나 모처의 지역이 재개발에 들어간다는 따위 신기神氣 있는 조언이면 좋으련만, 그들의 당부란 것은 그저 "절대 남 해코지 말고 착하게 살라" 고 한다는 것이다. 저승을 다녀왔던 어느 한 사람도 돈이나 명예, 물질과 부귀에 대한 미련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이제 죽음이 두렵거나 남은 생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도 했다. 흔히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고들 한다. 죽음의 '본때' 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삶의 욕망이나 인간사 희로애락의 안간힘은 한낱 허무 속을 날아다니는 티끌 같은 것인가.

    일본의 전 총리 아베 신조가 사망했다. 자국민의 총에 맞아 죽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평소 그가 지껄인 무도한 언행들을 생각하면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일말의 '통석의 념' 조차 없다. 아베의 망언은 헤아릴 수 없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의 편지를 보낼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그는 "한국에는 기생이 있어서 그런 것(위안부 활동)이 생활 속에 녹아든 것이 아닌가 한다"고 했다. 죽는 날까지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을 꿈꾸던 전범 가문의 황태자는 비명에 눈을 감은 후 삼도천을 건널 무렵 과연 누가 마중을 나왔을까.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위안부 할머니들의 혼백이 잠시나마 평온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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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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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04 11:40
    santiago 通信_ 55


    오래전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리시버를 귀에 꽂고 있었는데 주파수가 잘 잡히지 않았다. 겨우 잡힌 채널은 뉴스. 심심하니 이거라도 들으면서 가자고 별생각 없이 켜놓았는데 귀에 꽂은 리시버를 통해 들려오는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발음이 어찌나 부드럽고 가지런하던지 마치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그 안정되고 편안한 '어조'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와 까무룩히 잠든 적이 있었다.

    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감미롭달까, 귀에 감겨 듣기 좋은 순간은 바로 가을과 겨울 사이 환절기의 깊은 밤, 홀로 운전을 하던 차 안이었다. 국도國道를 달리고 있었고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사람의 장례식에 가는 길이었다. 예전에 어느 장례식을 다녀오던 오후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박기영의 '산책' 이란 노래의 가사가 인상 깊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와, 관계와 시간의 유한성에 대해 불현듯 돌아보는 시간과 가끔 마주친다. 그 밤의 쓸쓸한 길과 공기와 계절 속의 드라이브도 그랬다. 망자亡者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도착하면 그가 늘 자랑하던 그의 아내와 어린 딸을 처음 만나게 될 것이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건만 이젠 세상에 없는 이의 마지막 절차를 배웅하러 가는 길은 멀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시각도 청각도 무중력 상태처럼 먹먹한 가운데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길만이 또렷했다. 대전 부근을 지나자 주파수를 놓친 라디오에선 노이즈가 통곡처럼 터져 나왔고 서둘러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중 우연히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다이얼은 멈췄다. 그 지역의 종교 방송 채널이었는데 불교방송이었는지 원불교 방송이었는지 가톨릭 방송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으나 전문적이지 않은 느낌으로 미루어 수녀님이거나 스님이거나 교무님이지 않았을까. 고향에서 올라온 편지를 읽듯 담담한 목소리로 읽어내려 가는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우리가 일을 하면서 얻는 상처는
    육신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는 몸의 흔적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받는 마음의 생채기는
    일체의 소통으로부터 소외된 누군가가
    애타게 갈망하는 관계의 흔적입니다.
    우리의 피곤했던 오늘 하루는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입니다.
    우리의 보잘것 없는 것들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간절한 소망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세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행복을 자주 생각하세요.
    그리고 언제나 영원을 꿈꾸세요.


    내용은 다소 도식적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나를 둘러싼 마음의 어둠을 갉아먹었다. 사과를 먹는 청순한 치아처럼 아삭아삭. 어떤 절망이라고 할까, 모순이라고 할까, 비닐봉지에 담긴 것처럼 우울이 낙엽처럼 바스락거릴 때 낮고 따뜻한 구원의 목소리는 물기처럼 왔다. 그녀의 성대는 영혼의 통로처럼 은혜로운 것, 더없이 잔잔하고 포근했으니, 난 잠시 어떤 의례를 치르는 기분으로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해 커다란 비애 속으로 걸어가야 하는 내게 그녀의 목소리는 강江의 수면 위에 잔잔히 떠있는 나룻배처럼 나를 위로했던 것이다. 멘트가 끝나자 양희은의 노래가 흘러 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른 잡음 속에서 양희은은 분해되었다.

    미망인은 나와 목례를 나눈 후 와 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일부러 울지 않기로 작정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너무 울어서 진이 빠져 버린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절벽에 맺힌 암염巖鹽처럼 창백하고 건조했다. 사람의 음성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음향 가운데 누군가에게 건네는 위안의 말처럼 귀하게 빛나는 것이 있을까. 느리고 낮을수록 언어의 의미는 더욱 단단하고 선명해진다. 축축한 늦가을의 낙엽들이 죽은 파충류처럼 아스팔트에 붙어 있던 그날의 국도를 생각한다. 그 검은 길을 지날 때 캄캄한 자동차 안에서 담요처럼 나를 감싸던 그 정갈하고 침착했던 목소리를.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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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7-0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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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6-27 12:03
    santiago 通信_ 54


    청춘靑春이 한 마리 고래 같은 것이라면, 내게 청춘은 언제 왔다가 언제, 영원永遠의 심해深海로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나는 아직 그 고래에 올라타고 있나. 설마, 세월이 내게만 그렇게 친절 할리가. 내 동정童貞의 밤을 지배하던 여배우가 있었다. 밤마다 정염情炎을 한 바가지씩 퍼붓고 가던 이탈리아의 중년 여인. 요즘 그녀의 부고가 뜨지나 않았는지 IMDB를 가끔 뒤적인다. 그녀가 팔순에 든지도 한참이 지났다. 밤마다 나를 찾아왔던 필름 속의 그 화려한 관능은 이제 흔적도 없지만 다행히 그녀는 아직도 무고하시다.

    매일매일 한 세대의 부스러기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우리 세대의 추억들을 고물처럼 실은 낡고 육중한 화물선은 날마다 망각의 지역과 기억의 보관소로 뱃고동을 울리며 떠난다. 배의 꽁무니에 따라붙은 시간의 갈매기들은 크로노스의 정령처럼 선박의 항로를 조력한다. 배 떠나는 항구의 서정이 서글픈 것이면 차라리 하늘로 날려 보낼까. 수만 개의 풍등風燈처럼 이 행성의 끝을 향해 망망히. 의미도 기념도 없이 마른 재처럼 황황하게.

    머리숱은 줄고 흰머리는 늘어나며 한 번 달라붙은 살은 좀 체 빠져나갈 생각을 않는다. 나이가 들면 '체형의 평준화' 가 이루어진다는 우스개처럼 늙도록 육신에 매달리는 미련을 섭리는 비웃는 것이겠지. 노안이 찾아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자세히 들여다보며 애쓰지 말라는 신의 귀띔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늙은 눈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들이 오히려 선명하다.

    오래된 바둑판처럼 영원할 것 같던 사람들도 화물선에 동승하여 하나둘 떠났다. 조지 마이클, 마이클 잭슨, 프린스, 데이빗 보위, 커트 코베인, 휘트니 휴스턴, 신해철... 밑반찬들의 이름처럼 나의 방과 학교에서 익숙했었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마음의 우물 속에 묵직한 돌을 집어넣는 기분이 든다. 이들로 하여 열광했던 시간이 있었으니 해마다 연하장을 써 보내는 수고를 맡는다 해도 유감 없지만, 그러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세월을 보내는 일도 나이를 먹는 일도, 웃으면서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어딘가 진이 빠지는 일이었으니까. 앞으로 남은 시간을 세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새롭게 푸근하다. 영원의 어느 모퉁이에 물고기처럼 착한 영혼들이 별빛처럼 모여 사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마음은 흐뭇해진다.

    병마가 두 해를 넘기는 동안 우리는 수화手話처럼 서로를 헤아리고 마스크처럼 자주 침묵했다. 불행은 이내 걷히리라는 야윈 희망마저 낡은 빨래처럼 쓸쓸히 말라가는 것이니, 어느 날 돌아본 청춘은 완행열차처럼 진부하게 떠나버렸고 추억은 피로연이 끝난 싸구려 국밥집처럼 낭자하다. 청춘이란 말에 닭살 돋을수록 아직 청춘이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청춘아, 되돌아 가는 길 어디에서 쉬느냐. 점심은 먹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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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6-2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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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6-20 11:50
    santiago 通信_ 53


    집안일 중에서 청소가 제일 싫다. 살다보면 별 다른 이유없이 나와 안 맞는 게 있는데 청소가 그랬다. 청결하고 쾌적한 환경이야 물론 좋아하지만 청소의 과정이 나는 유난히 지루하고 귀찮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남이 청소해 놓은 공간을 염치없이 쓰는 건 또 싫다. 하기 싫어도 내가 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니 평생을 통틀어 한 번도 청소가 즐거웠던 적이 없다. 게다가 청소란, 여자들이 흔히 푸념하는 것처럼 "웬만큼 해서는 티도 안 나고, 그렇다고 조금만 안 하면 금세 티가 나는" 거추장스러운 일인 것이다. 어린 시절 미니카를 모은 적이 있었는데 자꾸만 먼지가 끼는 것이 번거로워 그만두었다.

    반대로 설거지를 좋아한다. 살다 보면 까닭없이 잘 맞는 게 있는데 나에겐 설거지가 그랬다. 10분 청소할래, 1시간 설거지 할래, 물어본다면 당연히 설거지다. 이 일의 매력은 기름진 오물 더미에서 깨끗하고 매끄러운 식기를 건져내는 세척의 희열이다.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 떠돌이 개나 고양이를 데려와 때와 먼지에 찌든 놈을 물로 깨끗이 씻겼을 때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깨끗하고 따뜻한 물을 소나기처럼 흩뿌려 수북히 묻은 불결한 거품을 말끔히 씻어낸 다음, 뽀얀 식기의 표면을 '뽀드득' 어루만질 때엔 영혼이 정화되는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신이여, 우리의 죄를 이처럼 사하시길.

    그러니 설거지의 참맛은 맨 손으로 하는 데 있다. 음식찌꺼기를 초벌로 씻어낼 때나 건조한 계절 동안엔 피부를 걱정하느라 어쩔 수 없이 고무장갑을 끼지만, 하루 종일 창문을 열어두는 계절이 돌아오면 마치 오래 차고 있던 수갑을 벗듯이 상쾌한 기분으로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음식 냄새가 밸지 모르니 내내 끼고 하라고 옆에선 지청구를 늘어 놓지만 거의 취미에 가까운 이 살림의 도락을 짐작하지 못하리라. 헹굼을 시작하기 전 반지를 빼는 순간엔 야릇한 기분마저 든다.

    이 물기 찬연한 가사의 취미에 어울리는 음악은 단연 재즈다. 커피메이커는 부드러운 커피향을 피워올리고 싱크대 위 블루투스 스피커에선 연신 재즈가 흘러 나온다. 낮은 피아노 소리와 고양이처럼 갸르릉 거리며 원두를 내리는 커피메이커와 봄날의 개울물처럼 흐르는 개수대의 잔잔한 물소리. 먹고 사는 일이 불현듯 막막해지면 설거지만 전담하는 가사도우미를 해 볼까,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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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6-1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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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6-13 11:02
    santiago 通信_ 52


    생활 속에서 지키는 원칙 중에 하나는 역전驛前의 식당은 가급적 가지 않는 것이다.
    요즘이야 기차역이든 버스 터미널이든 멀티플렉스가 활성화되고 그 안에 각종 프랜차이즈가 벌집처럼 입점해 있어 먹자 골목보다 식당들이 더 즐비하지만, 우리 세대의 저 재래식 기차 역전의 풍속이나 시외버스 차부의 시속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역 부근 식당에서 당한 바가지의 경험과 끔찍하도록 맛대가리 없는 음식의 기억을. 또 볼 일 없는 뜨내기들을 상대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기에는 여러 차례에 걸친 트라우마가 나는 깊었다. 그래서 생긴 선입견이겠지만 같은 프랜차이즈라도 역 구내 매장들의 맛은 어쩐지 다른 곳보다 덜하다는 느낌마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역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내게는 좀처럼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살다보면 원칙대로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또 하릴없이 급하게 역 안에 있는 중국집에서 대충 한 끼를 넘겨야 했다. 빨리 나올 것이고 그나마 맛이 '거기서 거기' 일 것 같아 짜장면을 시켰다. 선불을 하고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주인장이 나를 찾는다. 음식 가져가란다. 역시 열차 시간을 다투는 역 안의 식당이라 빠르구나.

    배급처럼 트레이에 받아온 음식을 식탁에 놓고 보니 이야, 이건 완전 아우슈비츠에서나 나옴직한 짜장면이다. 짜장면처럼 보이고 싶은 어떤 물질, 짜장면적인 어떤 것, 말하자면 유사 짜장면. 국수가락은 여기저기 뭉쳐있고 짜장은 수돗물에 생수를 섞은 것 마냥 밍밍했다. 양파도 춘장도 없이 달랑 단무지 쪼가리만 주는데 그마저도 사막의 뼛조각처럼 말라있었다. 평생 먹어 본 짜장면 중에 가장 강렬했다. 거의 기묘하다는 의미로. 사형수가 사형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 짜장면이라고 해서 이 집 짜장면을 시켜줬다면 아마도 앰네스티 같은 단체의 주도로 세계적인 석방운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빠르다는 것 말곤 전부 꽝이다. 반쯤 먹고는 젓가락을 놓았다. 먹고 난 그릇을 공손히 주인장에게 다시 반납해야 이 식당을 나갈 수 있다.

    집에 도착해 늦은 밤 컴퓨터를 켜고 이 중국집의 리뷰를 찾았다. 짜장면을 남기는 것은 내겐 흔치않은 일이다. 얼마나 많은 비난과 불평의 악플이 여름날의 포도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을까, 연민의 기분마저 들면서. 그러나 내 동정이 무색하게도 평점이 5점 만점에 4점 대. 식당 평점으로는 괜찮은 방어율이다. 그다지 많지도 않은 댓글들은 칭찬 일색이었다. 재방문 의사까지 있다고 했다. 도대체 왜? 너댓 개의 리뷰만이 별 한 개도 아까운 집이라고 썼다. 마침 내가 방문한 요즘이 이렇지 예전엔 정말로 맛있는 식당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끝내주게 맛있다' 는 마지막 리뷰가 불과 두어 달 전이다. 그 새 음식맛이 천양지간 변해버린 것일까.

    이런 식당의 리뷰가 어째서 좋은 건지 나로선 알 수 없다. 사장의 수완인지, 식당과 친한 지인들이 고의로 별점을 조작한 것인지, 그마저도 아니면 희한한 짜장면을 좋아하는 취향이 따로 존재하는지 내 알 바 아니다. 어쩌면 그날의 내 입맛이 유독 별났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짜장면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서 짜장면을 먹던 커플이 속삭였다. "이게 칠천 원이야?"

    만일 계획적으로 리뷰를 조작한 게 사실이라면 입맛을 잡쳐버린 짜장면보다 주인의 그 낯짝 두꺼운 몰염치가 더 씁쓸하고 언짢다. 좋은 음식을 만들 궁리는 하지 않고 교활하고 얄팍한 사기로 뜨내기들에게 그저 한 번 팔아치우면 그만이라는 건지. 그러구보니 호평의 댓글들은 거의가 "완전 맛있어요" 식의 영혼 없는 문구 달랑 한 줄이었다. 여론 조작이 이런 식으로 벌어지는 거겠지.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아무 리뷰도 달지 않고 컴퓨터를 껐다. 원래 선플도 잘 달지 않지만 악플은 더욱 달지 말자가 또한 생활의 원칙이다. 뭐가 됐든 이 사람들은 이게 밥줄이니까. 나야 이제 안 가면 그만이지만 혹시나 나처럼 또 봉변당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마나 별점은 올려둘까 한참 망설였다. 여독이 쌓여 피곤한 잠자리를 늦도록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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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6-0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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