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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 nights of quiet stars
  • 19
  • 깊고 푸른 밤(@djckvl)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3-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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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3-13 10:43
    santiago 通信_ 68


    노슈가 아메리카노 NO SUGAR AMERICANO의 교도들이자 아메리카노 무당파無糖派 동지 여러분들께 선언하거니와 나는 이제 '모던'한 여러분들의 곁을 떠나 '아메리카노에 설탕이나 쳐서 마시는 무식한 촌놈'의 일원으로 합류하려 한다. 미리 말해둘 것은, 그러나 나에게 무설탕 노시럽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대체할 것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더운 계절에 마시는 아메리카노는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커피 그대로여야 한다. 공기도 몸도 끈적거리는 점액질의 습기 속에서, 마시는 음료마저 들쩍지근하다면 상상만 해도 습도의 체감이 상승할 것 같지 않은가. 저 머나먼 자메이카와 탄자니아, 브라질과 베트남의 들판에서 발원한 이국의 향기 물씬 배인 이 쓰디쓴 정열의 액상은 차가운 얼음의 냉기를 품은 채 더없이 담백한 청량감으로 목구멍을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얘기가 좀 다르다. 돌이켜보면 나는 진심으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걸 식도로 꿀꺽꿀꺽 들이부은 이유는 아마도 '대세'를 거스르는 별종이 되기 싫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럴 때만 쓸데없이 소심하다) 하기야 아메리카노 말고 다른 커피는 뭐가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무슨 맛인지도 모른다. 내가 원체 트렌드에 후진 인간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 커피의 역사라는 게 그리 오래지 않은 탓도 있다. 프렌차이즈 커피숍이라는 게 들어오기 전까지 다방이나 카페, 레스토랑에서 파는 커피는 대부분 커피 하나에 프림 둘, 설탕 셋의 전국민적 레시피로 획일화된 이른바 '다방커피'였다. 걸쭉하고 진한 자판기 커피같은 걸 폼 잡고 앉아서 마시는 것이다. 보다 젊은 패들이 이때부터 '블랙커피'라는 걸 마시긴 했다. 인스턴트로 만들던 블랙커피가 이후 다국적 커피 자본에 의해 아메리카노로 고급화된 셈인데 설탕도 프림도 첨가하지 않는다는 제조의 공정은 비슷하다 해도 맛과 향은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난 블랙커피든 아메리카노든 뜨겁고 쓴 커피를 후후 불어가며 마실라치면 가끔은 달인 한약을 마시는 것처럼 힘이 들어서 동양의학의 문화권에서 이게 인기가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메리카노는 대세가 되었고 '국민음료'로 등극했다. 커피 소비량이 프랑스에 이은 세계 2위다. 일인당 년간 367잔을 마신다.

    내가 과민했던 것이겠지만 "아메리카노에 설탕 넣어 먹어요" 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마치 "나는 과일을 싫어해요"와 비슷한 뉘앙스다. 과일처럼 순수하고 정갈한 입맛이 싫다고 말하면 뭔가 기름지고 느끼한 취향으로 낙인 찍히는 기분처럼. 카페라떼니 에스프레소니 하는 것들을 마셔 봤지만 텁텁해서 나는 별로였다. 쓰지만 않다면 아메리카노가 깔끔했다. 쓴 맛을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하다가 어느 날 설탕을 조금 넣어 마셨다. 오호, 쓰지도 않았고 커피의 맛이 더욱 부드럽고 깊어졌다. 그날부터 몰래 설탕을 넣어 마신다. 아메리카노가 이땅에 전래된 순간부터 봉인되었던 '무설탕 원칙'의 터부를 건드린 것이다. 설탕을 몰래 넣는 순간마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전율을 느낀다. 누군가 불쑥 나타나 내 손목을 낚아 채고는 “아메리카노에 설탕이라니, 당신 제정신이야?” 마구 삿대질을 할 것 같다. 빈정대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무설탕의 아메리카노를 고집하는 이유는 커피의 쓴맛과 향을 즐기는 취향이 어딘가 세련되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설탕의 유해성에 대한 보편적 인식 탓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설탕은 비만의 주적이니까.

    그렇게 소심하게 무설탕 아메리카노에 대한 레지스탕스를 이어가던 내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난 지금도 싱겁고 연해서 멀겋게 끓여낸 밥 탄 숭늉 같은 이른바 '아메리칸 스타일'의 커피라면 질색이다...언젠가부터 소위 '원두커피'는 미국식 멀건 커피의 대명사가 되고 이제는 호텔에서 시골 역전에 이르기까지 전국이 '아메리칸'으로 획일화 되어 버렸다. 그 멀건 물에 각설탕까지 넣으면 아예 마시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가 된다."
    (황석영 에세이 '황석영의 밥도둑 - 추억의 에스프레소 한 잔' 중에서)

    역시 배우신 분. 이 분은 문단에서 미식가로도 정평이 나신 분이다. 내가 바로 '그 멀건 물에 각설탕 넣어 먹는' 사람이지만 유명 작가의 질타와도 같은 소회 덕분에 나처럼 ‘새같은 심장’도 용기를 얻게 되었다. 문맥의 본뜻이야 어떻든 무설탕 아메리카노를 싫어한다고 말해도 되는거였군요. 이제 점점 깊어가는 나이에 자꾸 무언가 눈치를 보며 사는 것도 어째 미련한 짓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당당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아메리카노에 설탕 쳐서 마시는 인간' 이다, 어쩔래.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커피에 대한 이런 나의 취향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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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3-0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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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3-06 10:37
    santiago 通信_ 67


    기억이 맞다면 크리스마스가 들어 있던 한 주가 몹시 추웠고 연말이 지나고 난 뒤 다시 며칠 바짝 추웠다. 내내 춥지 않다가 갑자기 한파가 닥치니 사람들은 더 못 견뎌했지만 그것 말고는 이 겨울 꽤나 온화한 편이었다. 저녁을 들고 나면 강변으로 운동을 나가는데 한겨울 둔치에 장미가 피었던 것이다. 장미만이 아니라 이 꽃 저 꽃이 다같이 피어서 아닌 밤중에 꽃놀이였다. 장미 딴에야 워낙에 사방이 포근하다보니 별 고민 없이 피었겠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세상이 꽝꽝 얼어붙을 때엔 나는 맨 먼저 그 장미 군락을 걱정했다. 얼어 죽지나 않았을까.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렇게 완벽하다는 '자연의 법칙' 이라는 것도 별 거 없네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기야 요즘에 뭐가 제대로 돌아가는 게 있을까마는. 봄의 개화를 위해 겨우내 기력을 가다듬고 양분을 축적해야 하는 장미가 엄동설한에 '때'를 잘못 맞춰 피어난 후 그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맥없이 얼어 죽었거나 아니면 사기당한 계절에 눈을 흘기면서 끝끝내 생명의 부활을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어떤 일이든 적당한 '때'를 파악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친구들 중에는 아직도 공부에 대한 미련이 있는 이들이 더러 있다. 공부를 덜 했거나 안 한 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그때는 왜 그렇게 하기 싫었나 몰라. 그때 열심히 했으면 지금 이러구 살지는 않을 텐데." 나는 말없이 웃음을 삼킨다. 그게 운명이라는 것이라네, 친구여. 지금이라도 다시 해보 지 그래. 듣고 있던 다른 친구가 농반진반으로 권한다. 이젠 머리가 굳어 버렸는데, 되나. 다 때가 있는 건데. 타임머신이 있어서 지금의 기억과 심정, 각오 그대로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정말로 친구들 중 몇 명은 전혀 다른 학생이 되어 열심히 공부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필버그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고, 다시 돌아가더라도 결과는 역시나 신통치 않을 가능성이 높다. 가령 지금 한창 공부에 집중하고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선배들이 찾아와 자신들이 함부로 탕진한 진로의 실패담을 목이 쉬도록 설명해줘 본들 그들이 이해할까. 그러니까 너희들 지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정말이라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호소해도 아이들은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랬으니까. 우리가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성적이 1점씩 올랐거나 잠깐이라도 진지하게 공부에 몰두했다면 모르긴 해도 지금쯤 존스 홉킨스 같은 곳에서 심장이식에 대한 외래 강의를 하거나 나사에서 항공우주공학의 미적분을 풀고 있을지도 모른다. 때를 붙잡는 것도 때를 놓치는 것도 모두 운명인 것이다.

    자랑스레 하는 말은 아니지만 (당연히 자랑이 아니니까) 나는 단 한 번도 공부를 안 하거나 덜 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지나간 것에 미련을 두는 타입도 아니고 밑천도 별로 없는 주제에 대책 없이 태평한 성격 탓도 있지만 애저녁에 나는 공부하고는 맞지 않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운명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내가 공부로 성공할 운명이었다면 굳이 아득바득 애쓰지 않아도 공부가 쉬웠을 것이다. 공부라는 것에 대한 이런 '남다른 신념’으로 해서 어릴 적부터 나는, 가난한 시절을 살았던 어른들이 흔히 하는 회고담 중에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아이들이 부러워서 남몰래 울었다던가,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아침마다 몇 십리 길을 걸어도 힘들지 않았다 같은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공부를 왜 하고 싶었을까. 수능 시험날 아침 긴장하지 말라고 복식호흡을 배운다느니 한약을 달여 먹이느니 하는 호들갑도 마찬가지다. 왜 긴장을 할까. 어차피 다 모르는 문젠데.

    인생에는 모두 그 '때' 가 있다. 말하자면 타이밍이다. 이 경우의 '타이밍'이란 가장 적절한 때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지체하면 모든 걸 놓쳐버리고 마는 마지막 기회를 의미한다. 후회는 아무리 빨리 도착해 본들 이미 늦은 것이다. '인연'의 타이밍은 더욱 절실하다. 강물 위로 흘러가는 꽃잎을 건져 올리는 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하다. 헤라클레이토스를 인용하자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으니까. 사실 저 우주 높은 곳에서 전지와 전능의 눈으로 내려다보자면 우연처럼 보이는 속세의 모든 일들도 실은 필연에 의한 운명의 섭리에 다름 아니겠지만 언제나 우리의 자의식은 때를 놓치고 난 후에야 땅을 치고 발을 구른다. 그런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고 손을 내밀어 다정하게 웃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물을 양보하는 사막의 병사처럼 다정하게. 이번 생에서 안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반드시, 이 건조하고 가파른 고독의 밤을 이기고 서로의 새벽으로 다시 만날 것을 굳게 믿으면서. 삭막한 모래 언덕 위에서 빛나는 별과 같이, 마주 잡은 서로의 체온만으로 뚝뚝 눈물이 녹아 흐를 수 있도록 그렇게, 다정하게, 더 할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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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3-0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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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2-27 10:23
    santiago 通信_ 66


    도시 외곽의 주택가를 걷노라니 철물점 앞에 낯익은 물건들을 늘어놓았다. 저걸 뭐라고 불렀더라.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선 그냥 간단히 '연탄통'이라고 했다. '탄통'이라고 부르는 집도 있었다. 다 탄 연탄을 들어내고 새 연탄을 집어넣기 위해 연탄을 담아 오는 일종의 캐리어다. 저게 아직도 있구나. 시커먼 연탄을 담는 주제에 분홍색 바탕에 울긋불긋한 패턴을 수놓았다. 이 겨울도 막바지, 큰 추위 없이 밋밋하고 핏기없이 지나가는 계절에 오랜만에 다시 만난 물건으로 해서 추억도 잠시 울긋불긋해졌다. 연탄이라면 우리는 할 말이 많지.

    연탄통이란 게 진작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등장한 이후 이내 가정마다 하나씩 비치되었던 물건이다. 마치 스카이콩콩처럼. 함석을 대충 잘라 나사로 드르륵 끼워 박은 철가방이 뭐 대수로울까 싶어도 일견 이 간단한 걸 왜 진작 만들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따져보면 사람들의 통념이라는 것도 단순하고 안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탄의 추억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먼저 저 헙수룩한 골목 안, 오밀조밀 이어지던 브로크 벽돌의 낮은 담들과 그 담장 안에서 오랜 세월 색이 바랜 주택들을 떠올려야 한다.

    우리 유년 시절의 상당 부분은 이곳이 터전이었다. 드물게 아파트가 있긴 했지만 낡고 좁아도 주택이 보편적인 주거형태였다. 주인이 사는 안채가 있고 세 들어 사는 사랑채가 있으며 화장실과 창고는 마당을 가로질러 따로 떨어져 있던 단층 양옥. 집집마다 잊지도 않고 꼭 대추나무나 감나무가 한 그루씩 자란다. 판에 박힌 아파트의 외관과는 다르게 이런 주택들은 사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봄날의 졸리운 햇볕이나 강렬한 여름의 태양, 퍼붓는 장마의 빗줄기며 혹독한 겨울의 눈발에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주택의 벽들은 그대로 산화되고 발효되었던 것이다. 얼룩들은 나중에는 어떤 무늬처럼 자리 잡게 되는데 어린 시절 나는 그것이 마치 그 집의 고유한 표정처럼 느껴졌다.

    그 주택들의 온수와 난방을 책임지고 또한 부엌의 화구 역할을 하던 연탄이다. 욕실이 바깥채에 있어 추운 날에 목욕은 엄두도 낼 수 없던 탓에, 집으로 돌아온 가족들은 연탄아궁이 위에 펄펄 끓는 물을 떠 와 손발을 씻었고 외풍 심한 방 안, 캐시미어 담요가 덮인 아랫목을 '절절 끓도록' 한 것도 연탄의 일이다. 엄마들의 월동 준비는 연탄과 김장이었다. 연탄을 몇십 장 창고에 쌓아두고 김장까지 마치고 나면 집집마다 엄마들은 이렇게 환호했다. "아이고, 인제는 잊어버렸다!" 먹성 좋은 축들은 각종 간식을 연탄불에 구워 먹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오징어나 노가리 같은 어포들은 연탄의 불맛이 가미된 때문인지 풍미가 각별했다. 연탄의 추억이란 단순히 지나간 기억 속 어느 구간의 반추反芻만이 아니다. 가난과 결핍의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피워 올렸던 희망의 온기, 구들장만큼이나 절절 끓어대던 삶의 안간힘에 대한 낡은 영수증 같은 것 아니겠는가.

    아직도 연탄을 쓰는 집이 있구나... 나는 작은 감동마저 일었다. 메뚜기 마빡만한 땅만 있어도 기어이 아파트가 비집고 들어서는 도시에서 아직도 석탄을 태워 추위를 이기는 동네라니. 용케도 재개발이니 신축이니 하는 개발의 광풍이 비껴갔구나 싶었다. 어쩌면 이곳의 주민들은 스위치만 켜면 금세 온 집안이 따뜻해지는 편리가 부러웠을지도 모르지만 요즘 창졸간에 두 배, 세 배가 올랐다는 가스값이다. 한 달 가스 사용료로 천만 원을 내야 한다는 목욕탕, 6백만 원이 청구되었다는 하우스 농가, 30만 원이 말이 되느냐는 원룸의 사정을 들으면 아직도 연탄을 쓴다는 걸 축복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연탄재 발로 차지 말라는 안도현의 시가 세간에 많이 알려져 있지만 연탄을 노래한 시는 의외로 많다.



    내 죽으면 화장을 하거라
    뼛속까지 속속들이 잘 태워
    몽근 가루로 빻은 다음
    달동네
    별동네
    그 굽이굽이 어둡고 미끄러운
    골목길에 뿌려다오

    가스보일러, 기름보일러
    등 따시고 배부른 사람들 자가용 밑에는
    염화칼슘 그 마약 같은 흰 가루를
    뿌린다 하더라만
    아직도 부끄러운 살빛으로 쌓였다가
    일상의 피로에 지친 저 어미와
    노동의 완력에 다친 저 아비의 발 밑에서
    차라리 나는 자진하겠으니
    더러는 덩어리째 던져다오


    김영천 시인 '연탄재의 유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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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2-22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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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2-20 10:30
    santiago 通信_ 65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한창 좋을 때(?)는 서너 살 무렵의 기억도 주절주절 이야기해서 부모님을 오싹하게 만들기도 했다. 흔히 사람들은 기억력이 좋으면 머리도 좋을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그것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예컨대 나보다 훨씬 더, 옛날 일을 또렷이 기억하는 친구가 있다. 30년 전 같이 놀러 갔을 때 타고 다녔던 렌터카의 차번을 아직도 외우고 당시 숙소 주인장의 옷차림까지 기억하는 실력이지만 공부는 지지리도 못해서 대단하지도 않은 대학들을 4번이나 떨어졌다. 그러니 좋은 기억력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특성에 불과하다. 기억력이 조금 좋은 대신 나는 수리數理에 약했다. 이 세상의 직업이 이과理科적인 것으로만 존재했다면 아마도 나는 일찌감치 가축을 돌보거나 공장에서 아주 단순한 업무를 반복하는 노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전혀 스트레스 받지 않고 희희낙락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 틀림없다. 4수한 친구나 나나 도찐 개찐인 것이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라고 과거형이 된 이유는 지금은 그다지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술도 많이 마셨고 무엇보다 이젠 머리가 늙어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권하는 술잔을 마다할 순 없지 않은가. 기억력이 눈에 띄게 저하되었지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점도 있다. 가령 예전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를 TV에서 다시 볼라치면 이건 완전 처음 보는 새 영화다. 저 영화에 저런 장면이 있었어? '매트릭스'를 보면서도 쿨쿨 졸았던 집중력이라 할 말 없긴 하지만 몹시 지루한 영화가 아니라면 누구나 그렇듯 줄거리는 대개 기억을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기억력이 감퇴한 요즘에는 워낙 유명해서 내용이 여러 번 회자된 영화가 아니면 다시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것이다. 처음 보는(것 같은)영화가 전부 공짜니까.

    그나마 읽은 책에 대한 망각은 좀 덜한데 그것은 밑줄 그어가며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기억을 증진시키는 가장 좋은 약은, 감탄하는 것이다." 생업의 일이다 보니 어쩌면 망각의 폭풍 속으로 난파되려는 기억의 화물선을 지키기 위해 나의 뇌가 성난 파도와 싸워가며 벌이는 처절한 사투의 생리학적 결과인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행복의 조건은 건강한 신체와 적당한 건망증"이라고 한 건 마크 트웨인이다. 적당히 잊고 사는 게 정신건강에도 좋다는 말이다. 인생은 늘 상상 이상으로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끊임없는 실수와 실패의 반복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우리는 이 사실을 고통스럽게 절감하게 된다. 그러니 그 모든 실책들을 몸의 어딘가에 담아둔다면 이내 과부하로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강렬한 기억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남기 마련이다. 이제는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남지 않은 인생. 부디 따뜻하고 아름다운 ‘강렬한’ 기억들만이 앞으로 우리의 추억 속에 자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질구레한 미움과 원망의 기억들은 서둘러 사라지기를. 사멸死滅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완벽한 토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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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9-2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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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깊고 푸른 밤 (@djckvl)
    2022-09-26 10:34
    santiago 通信_ 64


    "당신은 88세의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납니다."
    이것은 숙명宿命이다.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무슨 짓을 하며 살아도 어쨌든 간에 여든여덟 살 성탄절에 눈을 감는다.

    "88세까지 당신은 재물운이 좋지만 갑작스러운 경제적 손실의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이것은 운명運命이다. 가변적이다. 여든여덟 살 크리스마스 때까지 부자로 살것인지 가난뱅이로 살것인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숙명이나 운명이나 그게 그 소리 아니냐고 오해들 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엄연히 다르다.

    날 때부터 타고난 운명, 즉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숙명이고 앞으로의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가 운명이다(네이버 국어사전) 그래서 숙명은 잘 숙宿을 쓰고 운명은 움직일 운運을 쓴다. 말인즉슨,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운명이고 이미 결정된 결말이 숙명이란 것이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에서 '운명적 사랑'은 흔해도 '숙명적 사랑'은 드물고 '운명의 장난'이지 '숙명의 장난'은 없다. 결말이 미리 지어진 것은 재미없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엔 운명도 숙명도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남몰래 경멸했다. 요행에 기대는 나약하고 무능한 심리라고 생각했다. 모든 순간들은 (무려)'숙명'이 바뀌는 순간이 될 수 있으며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패와 흥망이 결정된다고 굳게 믿었다. 철이 없었다. 겨우 한두 개 어디서 주워들은 걸 무슨 대단한 깨우침 인양 착각 하고 세상 모든 일에 달관한 듯 우쭐거리던 주제가, 인간사 모든 일이 운명과 숙명의 굴레 아래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마흔을 넘고나서 였다.

    우선은 내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다. 예측의 범위를 완전히 넘어서는, 그저 우연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일들을 겪고 나면 합리合理라든가 인과因果라든가 필연必然 따위의 말들이 두리뭉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 봐도 운명이라고 밖엔 볼 수 없는 여러 사례들이 있었다. 많은 사례들 중에서도 나를 깊이 고뇌하게 했던 것은 '선량한 사람들의 불행'이었다. 결국 노력과 성공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으며 선과 악의 구분조차 모호하다, 인생에서 마냥 궂은날도 마냥 맑기만 한 날도 없다는 걸 깨닫고 나자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을 '대중화' 시킨 사람은 한보의 정태수 회장이다. 그는 나이 오십에 사주를 보러 갔다가 사업을 하라는 말을 듣고 나서 한보를 일으켰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운칠기삼이 아니라 운칠운삼運七運三이지." 아직까지 나의 판단과 결정은 어디까지나 과학에 근거하지만 과학의 예봉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학교에서는 절대로 가르칠 수도 가르칠 방법도 없는 비결祕訣. 말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헤아리는 것도 역시 나이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에게 무슨 집단적 업보가 있어서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한 번은 넘겨야 하는 운명이거나 숙명이려니...이렇게라도 생각을 해야 그나마 숨을 쉴 수가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따지고 들면 허파가 뒤집힐 지경이다. 그래, 다 하늘의 깊은 뜻이라고 믿자,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가는 중이고 그러다 보면 눈앞을 뿌옇게 가로막는 5년이란 시간도 언젠가는 안개처럼 사라지겠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아직도 가끔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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