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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 nights of quiet stars
  • 13
  • 깊고 푸른 밤(@djckvl)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6-12 10:43
    santiago 通信_ 81


    눈에 띄게 술자리가 줄었다. 생업이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의 영역인데다 접대를 받거나 할 일도 거의 없는 탓에 주로 가까운 지인이나 동업들과 친목을 목적으로한 모임이 대부분이다. 기세 좋던 시절엔 며칠씩 일로 밤을 새우고 나서도 사우나 한탕 다녀와서는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셔도 다음날 거뜬히 다시 책상으로 달려들곤 했다. 마치 태엽을 감아놓은 것처럼. 일주일에 사흘도 좋고 나흘도 별 거 아니었는데 나이가 드니까 이제는 슬슬 술자리를 피하게 되거나 카페나 식사 따위의 다른 방식으로 모임이 대체된다. 무엇보다도 이젠 체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술에 대한 맷집의 문제만이 아니라 술자리가 파한 후 귀가하는 과정 또한 상당히 피로하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이 끊기기 전에 대충 마시고 후다닥 막차라도 타야 낭패가 없지, 예전에 미련하게 마시던 시절에는 버스도 지하철도 다 끊긴 시간에 술집을 나와서 한겨울 거의 2시간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택시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기껏 마신 술이 홀랑 깨버려서 뜨개질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단 체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른바 멘탈의 ‘굳은 살’ 도 이젠 자주 술을 찾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이를 먹게 되면 좋게 말해서 세상일에 달관하게 되는 것이고 다르게 말하자면 세상사 전부 부질없다는 허무를 느끼기 때문이다. 뭔소린가 하면 예전엔 별 거 아닌 일로도 사람들을 불러 앉혀 놓고 술을 주고 받으며 사느니 마느니 근심 고민을 털어놨는데 막상 세월의 강들을 허다히 건너고보니 글쎄 세상사 그토록 애달캐달 쥐어짤 게 있나 싶은 생각이 보편화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정서에 물기가 빠지고 감정에 굳은 살이 박히는 것이다. 굳이 애써 술로 달랠 일이 뭐냐라는 인식의 확산이다. 나는 이것 또한 술자리가 확연히 줄어드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둘만 모여도 어떻게 목구멍에 때 한 번 벗겨볼까 작당하던 소싯적 가락이 어디 가나. 마음 맞는 지기들끼리 둘러 앉으면 못내 몇 순배가 돌고야 만다. 대신 밤의 연회가 아니라 대낮의 향연이다. 늙으면 약아진다고 밤의 술자리 피로에 며칠씩 시달리느니 점심 약속으로 모여서는 반주 삼아 한잔씩 꺾는 것이다. 술은 낮술이 제일 맛있다고 했던 선배들의 말은 역시나 맞았다. 꿀떡꿀떡 달게 넘어간다. 게다가 사무실로 돌아가서 술이 깨고 나면 이후의 저녁 시간이 오롯이 남는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또 술을 마시거나 뭐든 여가를 새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술은 술대로 먹고 맨숭맨숭 맑은 정신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다. 대낮에 모이다 보니 차들은 전부 두고 오느라 음주운전의 위험도 없다. 해서 요즘 가끔 마시는 낮술의 재미가 쏠쏠한 중이다. 이 풍진 세상, 이런 낙이라도 있어야 살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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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6-0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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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6-05 10:28
    santiago 通信_ 80


    미국의 PG&E(퍼시픽 가스 앤 일렉트릭 : Pacific Gas & Electric)는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전역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산 280억 달러(1993년 기준)의 대기업이다. 캘리포니아주 힝클리에는 PGE의 천연가스를 압축하는 냉각탑이 있는데 냉각탑의 부식을 막기 위해 PGE는 식수 허용치 기준 ppm의 1000배에서 5000배나 초과하는 화학물질 크롬을 사용했고 오염된 폐수를 1952년부터 1966년까지 힝클리 마을 주변으로 흘려보냈다. 1966년 한 해에만 크롬으로 오염된 폐수 65만 톤이 무단 방류됐다. 이로인해 식수원은 오염되었고 오염된 식수를 마신 힝클리 마을은 가축들이 잇달아 폐사하고 주민들 대부분은 유산하거나 크론병, 뇌종양, 각종 암으로 죽어갔다. 그러나 오히려 PGE는 의사들을 매수해 크롬이 몸에 좋은 성분이라고 주민들을 속이고 몇 푼 안되는 의료비를 던져주며 선심 쓰는 척했다. 30년이 지난 1993년에 이르러서야 크롬 폐수로 인한 식수 오염 피해에 대해 힝클리 주민 634명이 PGE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고 1996년 PGE는 3억 3천3백만 달러(현재 환율 기준 약 4천4백 억원)를 힝클리 주민들에게 배상해야 했다. 이는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보상금액이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스티븐 소더버그가 감독하고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가 바로 ‘에린 브로코비치‘다. 줄리아 로버츠는 이 영화로 2001년 제7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에선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피해 주민들을 법률 대리하는 힝클리 시골 깡촌의 법률회사를 찾아온 화려한 경력의 PGE 측 변호사들은 ”피해자들이 평생 꿈조차 못 꿀 금액” 이라며 2천만 달러에 합의할 것을 종용한다. 택도 없는 소리라고 에린 브로코비치(줄리아 로버츠)가 몰아붙이는 도중 PGE 측의 변호사가 테이블에 놓인 물을 마시려 하자 에린이 말한다. “댁들을 위해서 내가 특별한 물을 준비했죠. 힝클리에서 가져온 물입니다.” 에린의 말에 얼어붙은 변호사는 마치 방사능 폐기물을 만진 것처럼 물컵을 내려놓는다. 내 개인적으로 영화의 가장 통쾌한 장면이었다.

    진실은 언제나 단순하다. 그렇게 멀쩡한 ‘물’ 이라고 주장하고 싶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벌컥벌컥 마시면 된다. 양잿물도 희석만 잘하면 한 번은 원샷 할 수 있는 것이니 앞으로도 꾸준히 이 물만 마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물의 순결’ 을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없다. 기왕이면 하급 공무원 말고 고위직의 책임자가 시음하면 더욱 좋겠지. 고위직의 늙은 부모, 어린 자식까지 다 데리고 나와 정답고 화목하게 ‘오염수’ 를 나누어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욱 더 좋다. 이런 장면을 보고서도 못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오로지 꼬투리를 잡기 위한 좌파의 난동에 불과하다. 보수와 진보, 중도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이 감동적인 ‘증명’ 조차도 믿지 못하는 그를 비난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자명하다. 이게 어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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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5-3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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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5-30 11:00
    santiago 通信_ 79


    며칠 바짝 날이 더워 한여름을 방불케했을 때 한낮의 기온이 밤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해 반팔에 반바지로 돌아다니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저녁과 밤으론 아직도 기온이 서늘한 것이다. 봄이 그러하듯 여름도 쉬이 오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부드러운 봄의 기운도 이젠 완연히 이울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청량한 초여름이 찰나처럼 지나가고 나면 이내 맹렬한 더위가 시작될 것이다.

    사람마다 여름의 ‘기미’를 느끼는 순간은 모두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여름이 얼마나 가까운지 실감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생긴 감각인데 운전을 하면서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이 휴양지의 쇼핑몰에서 들려 오는 것처럼 유난히 부담없고 쿵짝쿵짝 흥겨우면 이제 거의 여름이 다가왔다는 징후인 것이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음악의 특징은 아무리 구슬픈 가사의 노래나 애조띤 멜로디의 노래를 불러도 자꾸 듣다 보면 뭔가 ‘흥겹다’ 는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 메가 히트의 톱스타가 된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이 리조트 쇼핑몰의 BGM처럼 건더기 없이 흐물흐물 하다거나 두리뭉실 무난하기만한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으로 많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다만 가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이 쓸데없이 흥겹거나 지나치게 대중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느껴지는 건 아마도 라틴 음악 특유의 어떤 활기 탓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운전을 하면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를 들었을때 괜스레 신나고 들뜨면 이제 곧 여름이구나,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여름에 즐겨 듣는 음악이야 많다. 여름을 표현한 음악도 많고 듣자마자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도 있다. 시즌송이라고 따로 구분하지 않아도 여름철 특수에 해당되는 리퀘스트 넘버들이다. 비치보이스가 그렇고 서핀 뮤직들이 그러하며 언제부터인가 레게 음악도 이 영역에 은근슬쩍 편승한 것 같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라디오에서 일제히 갇혀 있던 새떼를 한꺼번에 방류하듯 ‘셔터’ 를 올리면 세상엔 온통 여름의 노래들이 날아다닐 것이다. 이 로그를 통해서 여러 번 말했듯 각 계절마다 어울리는 노래가 있고 특정한 계절이 되면 그 노래들이 일제히 들려온다는 것은 기다리던 기념일의 이벤트처럼 설레는 기분마저 든다. 마치 크리스마스 캐롤처럼 들뜨는 것이다. 여름의 바캉스, 더위를 이겨낸 가을의 커피, 세밑을 밝히는 눈 오는 날의 촛불이며 새 봄 새로 돋아난 잔디밭 위에서의 김밥같은 즐거움이다. 지구가 여름을 지나갈때 전세계가 같은 음악을 들으며 계절을 노래한다는 것. 이렇게 재미있게 지내는 행성이 또 있을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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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5-2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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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5-22 10:26
    santiago 通信_ 78


    요즈음엔 어쩐지 ‘양심’ 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식당 주인이 자주 오던 단골이 한참 발을 끊었다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것처럼. 가만히 돌이켜보면 누군가 양심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을 거의 수년 동안 본 적이 없다. 내 어린 시절엔 심보가 고약하거나 수단이 야비하다 싶으면 대번에 “양심에 털 났냐!” 고 일갈하기도 했고 “양심에 찔리지도 않느냐” 라든가 “내 양심을 걸고 맹세한다“ 같은 말들을 자주 했었다. 이 시절의 양심이란 마음의 각서 같은 것이었다. 법적인 효력도 없고 윤리적 규범에 의거한다는 보증도 없지만 급기야 ‘양심’을 꺼내는 순간에는 이것이 최후의 수단이라는 절박한 호소였다. 아니 양심이라고까지 하는데도 못 믿는단 말이야? 같은 분위기다. 그러니 양심을 들고 나오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약간 비장한 느낌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양심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네이버 사전)’ 이라고 나와 있다.

    보다 젊은 시절의 나는 국가가 부유해지고 시민들의 삶이 윤택해지면 보편적인 마음의 여유로 인해 금전만능주의나 이기심 같은 천박하고 편협한 기질들이 상당히 사라지거나 경멸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나 몰라, 마치 한 마리의 동물도 죽이지 않고 매일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휘황찬란해진 국가의 시민으로 살고 있는 요즘이지만 우리는 돈과 수익에 대해 훨씬 더 강박적이다. 세상에 돈이 많아질수록 바닷물의 갈증처럼 오히려 사회는 점점 더 비정해져만 간다. 부의 양극화는 커지고 팍팍한 현실에 비해 사람들의 욕망은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러니 돈만 생길 수 있다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양심 같은 건 이제 귀찮고 거추장스러울 뿐이어서 양심 이라는 말 자체를 서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생겨난 것만 같다. 조르주 베르낭스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미래의 사람들의 양심을 간지르기 위해서는 아마도 쇠망치와 못이 필요할 것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과연 양심적인 인간인가 다시 생각해야 했다. 나 역시도 양심적이지 못했다. 양심적이어야 할 상황에서 “남들도 다 하는데” 하며 빠져나갔던 적도 있었고, 논어에 나온다는 말처럼 ‘드러나지만 않으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 은 적도 많았다. 나의 불찰은 충분히 무겁게 인정하지만 어차피 개인 각자가 성인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흔해빠진 말로 양심을 지키면 본인만 손해를 본다는 의식이 팽배한 사회도 문제 아닌가. 하물며 높은 권력에 있는 사람들이 양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남을 해코지 하는데만 혈안이 된 꼴을 매일 쳐다보고 앉은 국민들의 의식 속에 무슨 생각이 싹 틀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양심을 지키고 사는 일이란 때론 고독한 일이다. 심지어 양심적이지 않은 다수로부터 손가락질 받기도 한다. 그러나 독선과 기만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그나마 가끔은 그래도 살만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성가시기만한 양심의 일을 기꺼이 떠맡는 누군가의 희생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선량한 사람들을 위해서 다행히도 옛 사람들이 남겨둔 말이 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積善之家 必有餘慶” 착한 덕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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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5-1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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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5-15 10:39
    santiago 通信_ 77


    뮤지컬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딘가 과장되고 무언가 과잉된 느낌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한다. 쉽게 감정이입이 일어나지 않았다.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가끔, 유재석이나 김연아 같은 인간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을 쳐다 보듯이 쳐다본다. 어떻게 뮤지컬을 싫어할 수 있죠? 꼭 그런 표정이다. 내가 뮤지컬이라는 개념을 인식한 후 처음으로 감상한 것이 ‘사운드 오브 뮤직’ 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어느 방송국에서 연말 특선으로 뮤지컬 영화들을 연속 방영 했는데 ‘사운드 오브 뮤직’ 다음 날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가 편성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는 재미 없었지만 ‘사운드 오브 뮤직’ 은 정말 재미있었다. 아마도 그건 음악에 대한 감흥이라기 보다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뮤지컬 중에서도 더욱 싫은 건 대사까지 온통 노래로 불러대는 것이다.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마지막 보이스카웃’ 이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악당이 묻기를 “너같은 놈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비명을 지르게 할 수 있나?” 그러자 브루스 윌리스가 대답한다. “랩을 들려주면 돼.” 누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그 뮤지컬 말이야, 대사까지 전부 노래로 하는 뮤지컬, 그걸 틀어 놓으면 3초에 한 번씩 닭모가지 움켜쥐는 소리를 낼 걸.“ ‘사운드 오브 뮤직’ 이 재미있었던 것도 아마 대사까지 노래로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연전에 본 ‘레 미제라블’ 은 훌륭한 영화였지만 역시나 뮤지컬이어서 인지 몰입할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비련의 여인을 연기한 앤 헤서웨이가 거의 목숨이 다 꺼져가는 상황에서 삐리리 노래를 부를때는 정말로 폭소가 터져 버렸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는 설정이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했기 때문이다. 예술의 장르에 따른 표현의 변용(이런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도로 이해하면 될 일을 그 슬픈 장면을 보면서 껄껄 웃다니, 이만저만한 무식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뮤지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지인 중에 라면을 거들떠 보 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 소화도 잘 되지 않고 라면 특유의 풍미를 그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취향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가거나 뮤지컬 영화를 보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여태 별 불편없이 살아가는 중이다.

    나이가 들수록 음악이든 영화든 취향의 호불호가 점점 더 명확해지고 또 그것이 점차 고착되는 느낌이 든다. 이십여 년 전쯤에 ‘비밥’이라는 재즈 장르를 좀 들어 보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어렵고 난해해서 들을 때마다 몸도 마음도 파김치가 되는 기분이었지만 억지로라도 듣다 보면 언젠가 귀가 트이겠지 했으나 끝내 나는 비밥의 내부로 초대받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버티고 들었던 시간의 결과물이 내 몸이나 감각의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 이 ‘억지로라도 버티고’ 의 대목에서 다들 나가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이젠 감각의 ‘기력’ 이 딸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가서는 "예술이고 나발이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 골치 아프기 싫어" 같은 노선이랄까. 이젠 비밥을 다시 들어볼까 하는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 나와 잘 맞고 즐거운 장르들과 만나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예술적 취향을 선택하게 되는 그 편향성이란 어쩌면 좋은 문장의 정의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한다. ‘짧고, 쉽고, 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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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깊고 푸른 밤 (@djckvl)
    2023-05-1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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