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uiet nights of quiet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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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djckv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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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2-01-17 10:54santiago 通信_ 44
겨울 아침, 일어나자마자 실내 환기를 위해 창문을 한껏 열어젖힌다. 왜 이제서야 여는 거냐고 눈을 부라리듯 겨울 찬바람이 순식간에 집안으로 들이닥치고 아침이 지나가고 있는 세상의 소란이 왁자지껄 뒤따라 들어온다. 칼날 같은 겨울 바람이 마치 집달리처럼 온 집안을 뒤지는 동안 두꺼운 패딩을 입고서는 라디오를 켜고 물을 끓이고 집안 곳곳의 전등을 켠다. 겨울 아침의 환기는 매섭고 지루하다. 꽤 시간이 지났지 싶어 맨발을 동동거리며 시간을 확인해보면 겨우 몇 분이 흘렀을 뿐이다. 금세 일어날 소파에 잠시 엉덩이를 붙이자니 그제서야 설정해둔 타이머의 알람이 울린다. 나는 모든 창으로 다가가 창문을 닫는다. 이제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직감한 듯 뒤늦은 바람들이 기를 쓰고 머리를 디밀지만 창문의 차단은 완벽하다. 먼지가 가라앉듯 잠시 정적이 일어난 후, 차가웠던 창문 앞의 공기는 이내 미지근해지고 실내는 점차 따뜻해진다. 새삼스럽게 아늑해지자 마음도 따라 푸근해진다.
따뜻한 실내에서 창 밖 차갑고 딱딱한 겨울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것은 말하자면 안도감이랄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 밖은 말 그대로 '냉혹한' 현실이 존재하건만 나의 거처는 이렇듯 안온하다는 만족의 상대성인지도 모르겠다. 비를 좋아하는 심리의 본질은 비에 젖고 싶다거나 물웅덩이를 철벅철벅 디디며 쏘다니고 싶다는 따위의 수용성의 동화작용同化作用이 아니라 빗소리를 들으며 쾌적하고 '뽀송뽀송' 한 실내에서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관전의 쾌감이라고 한다. 수필가 김소운은 '외투' 라는 수필에서 자신이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가 "추위는 문 밖에 세워 두고 혼자서 뜨끈하게 군불 땐 방 속에 앉아 있고 싶은 이를테면 그런 '에고ego'의 심정" 이라고 했다.
시골 외갓집에서는 겨울의 풍경이 도회와는 완연히 달라서 아침에 일어나 쪽마루에 서서 담장 너머를 내다보면 전원의 풍경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라도 내린 날엔 마을 인근의 작은 채마밭이나 산기슭에 버려진 묵정밭까지 눈이 소복한 채로 사람의 자취 없이 순결했고 너른 들판 군데군데 플라타너스가 마을의 충직한 일꾼처럼 하얀 하늘의 경계를 떠받치고 있었다. 이윽고 이른 아침 동리의 밥 짓는 굴뚝 연기가 매운바람에 섞여 어린 후각에 닿으면 그제서야, 아 겨울 외가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들곤 했다. 눈도 허구헌 날 오면 눈사람이고 눈싸움이고 어린것들도 시들하다. 겨울방학 동안 우리의 의무는 간결했으니 매일 탐구생활 4장과 일기 쓰기, 독후감을 위한 책 읽기가 전부였다. 대낮에 오늘의 일기까지 후다닥 해치운 다음 사촌형제들은 깔깔거리며 구들장을 뒹굴었다. 창 밖에선 함박눈이 온 세상을 먹먹하게 뒤덮고 눈 덮인 먼 산의 실루엣은 소처럼 누웠는데 우리의 실내는 포근하고 천진했다. 노동도 고뇌도 유예된 시절, 그때 불어난 추억의 살집들이야말로 '삶의 맷집' 이 된다. 인생의 비정한 골목을 지날 때마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을 방치해둔 채 '에고의 심정' 으로 따뜻하기만 했던 유년의 온도는 다시금 세계와 겨울을 새롭게 일깨우는 것이다. 차디찬 풍경과 따뜻한 집, 세상 모든 겨울의 서정은 결국 이 두 가지로 압축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할당되었던 축복을 감사하느니, '시골 외가의 추억' 을 가진 모든 어린 시절은.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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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2-01-1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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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2-01-10 11:13santiago 通信_ 43
A와 B는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 여중 여고를 함께 다녔다. 둘은 자매지간처럼 죽고 못살아서 서로의 집에서 밥도 먹고 잠도 같이 잤다. 집안이 넉넉한 편이었던 A의 집에서 어느 날 돈이 없어졌다. A의 엄마는 조용히 B를 불러 너희 집이 어렵다보니 어린 마음에 잠시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거 충분히 이해하니까 돈을 가져오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 A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않을테니 시끄럽게 하지 말자고. B는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울면서 뛰쳐나갔고 얼마 후 돈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요즘 B가 나를 대하는 게 이상하다는 딸의 하소연에 A의 엄마는 아무리 자식이지만 미안하고 죄스러워 그저 꿀 먹은 벙어리 노릇이었다. 결국 A와 B는 영영 멀어졌고 나중에 A가 결혼할 때 즈음에야 무슨 이야기 끝에 엄마가 실토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제서야 차갑게 돌변했던 친구의 사정을 알게 된 A는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B의 행방을 수소문 했지만 누구도 그녀의 근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의 실수였지만 마치 자신이 친구의 어린 마음을 마구 할퀴어 놓은 것만 같아서 언제나 마음 한구석엔 어두운 그늘이 드러워져 있었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오십 줄에 접어 들어서 호주로 여행을 갔는데 도심의 복잡한 인파 가운데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자니 건너편에 서있는 동양인 여자가 유난히 낯이 익더란다. A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혹시 저를 모르시겠냐고 물었다.
눈물의 재회, 40년 만의 해후였다. 하필 그 멀고도 낯선 이국의 하늘 밑에서. 너무너무 미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는 A의 말에 B는,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말이 커지면 어른들 싸움으로 번질까 싶어 혼자 삼켰단다. 둘의 우정은 전처럼 극진해졌다. 다시 자매지간처럼 지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에는 희한할만큼 늘 비슷한 후일담이 따라온다. "근데 알고보니 세상에, 두 사람 집이 여태 차로 10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었던 거 있지" 게다가 재회 당시, 한 사람은 오늘부터 호주 관광을 막 시작한 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내일자로 귀국하는 일정이었단다. 반나절만 어긋났어도 두 사람은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는 분의 친구 이야기다. 이젠 모두 손주들을 보셨다.
전염병이 창궐한 이후 사람들은 예방의 일환으로 코와 입을 가린다. 요즘 같은 시절이면 동창회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더라도 A는 마스크 때문에 B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사람이 많이 모인 곳을 피하라는 충고가 있지만 최소한의 용건은 해결해야 하니 때로 번화한 요지를 걷는다. 세태가 이 지경이라도 거리는 여전히 붐빈다. 반 이상 얼굴을 가린 채 오고 가는 사람들을 스치면서 '40년 만의 재회' 같은 건 당분간 기대하기 어렵겠구나 생각했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만난다"는 말처럼 누구에게나 필연적 인연이 우연을 가장하여 다가오는 때가 있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드물게 있지만, 한 번이라도 그런 인연을 경험해 본 사람은 보잘것 없는 나의 삶도 아득한 우주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니 바이러스라는 놈의 것은 얼마나 비정하기까지 한 것인가. 인간사 가슴 뭉클한 기적의 확률마저 가리고 있으니.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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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2-01-05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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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2-01-03 11:22santiago 通信_ 42
힘을 빼고 아무 생각없이 넋두리하듯 끄적거릴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처음엔 브런치 brunch 를 해볼까 싶었다. 대단한 걸 쓸 건 아니지만, 블로그는 독자의 대상이 지나치게 넓고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위로 노출된다는 게 께름칙했다. 대단한 걸 쓸 게 아니라서 더 그랬다. 블로그는 전성기에 비해서 대중적인 인지도도 많이 줄어들었고 다른 소셜 네트워크가 백가쟁명처럼 다양하게 펼쳐져 있긴 했다. 그러고보면 브런치가 오히려 더 넓고 다양한 다수에게 노출되는 편이다. 그래서겠지만 상업성을 꽤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현재 주류 플랫폼이 무엇이냐의 문제였다. 거기다 브런치는 다소 정형화된 컨셉을 가져야 한다는 제한도 있어서, 그렇다면 우선 연습 삼아 여기서 몇 회 자판을 두드려볼까,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다. 아무 생각없이 하소연하는 공간이라도 너무 폐쇄적이거나 지나치게 노출이 제한된 지면은 긴장감이 없다. 미미하더라도 타인의 열람을 의식해야 자극이 된다. 일기장이나 마찬가지인 내밀한 공간이 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인라이브 로그에 글을 쓰게 된 사연이다.
작년 봄부터 매주 쓰기 시작했다. 흔히 하는 말처럼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 은 몰랐다. 문제는 뭘 쓰느냐였다. 일단 '글감' 만 잡히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든 대충은 해결이 된다. 매번 뭘 써야 하나, 오래 붓방아를 찧었다. 모바일 앱 가운데 매일 글감을 선별해서 이것을 주제로 글을 써보시오 하는 게 있다. 세상은 참 넓기도 하지.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역시나 디지털 환경이 심화될수록 읽기와 쓰기에 대한 원형적 수요는 오히려 늘어나는게 아닌가 한다. '쓰기'를 독려하는 앱이 존재하는 것도 그렇고, 유튜브 세대들의 저조한 문해력文解力을 한탄하는 글들이 요즘 게시판에 자주 올라오는 것을 보면.
스탭으로 있을 때 방송국 게시판에 이런저런 게시물들을 만들어 연재하듯이 올린 적이 있었다. 스탭으로서 운영진을 비롯한 시제이들의 수고에 보답한다는 차원에서 시작한 자발적인 일이었는데 비슷한 맥락으로 로그에 사진으로 詩나 문장들을 그래픽해서 올리는 것은 이를테면, 오랜 지기들을 위해 내어 놓은 한 잔의 차와 같은 것이다. 인라이브에서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을 보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중에는 깊숙이 말이 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와 생각이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 그렇게 드물게 서로의 소회를 말없이 교환하는 사람들이 가끔 이 로그에 다녀간다는 것을 안다. 내가 그들의 로그에 일없이 들르듯이. 각자의 삶에 매몰되어 이제 만날 기회는 거의 없지만 칠판 한 구석에 끄적인 메모처럼 서로의 근황을 그런 식으로 확인하는 셈이다. 그러니 나로선 로그에 올리는 글과 사진들은 말하자면 그들을 위해 주간週刊으로 발행하는 아주 짧은 잡지같은 것이랄까. 발행인 '깊고 푸른 밤' 구독자는 '그리운 닉네임들 모두' 이다. 일주일에 두 번, 지금껏 로그를 채우고 있다.
새해가 밝았다. 깊고 푸른 밤의 로그에 오시는 그리운 모든 이름들이여. 건강과 행복이 여러분의 일상에 빈번하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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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1-12-2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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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1-12-27 11:05santiago 通信_ 41
저녁상을 물리고 사람들이 아파트 단지 주변으로 산책을 나오는 시간이면 가끔 만나는 가족이 있다. 나는 이들을 마스크 쓰기 전부터 알았다. 아버지가 아들과 동행하거나 엄마와 아들이 같이 걷곤 했는데 부부는 대략 60대 초반, 아들은 서른 전후쯤으로 보였다. 아들은 장애가 심했다.
아마도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지내는 아들을 데리고 나와 양주가 번갈아가며 산책을 시키는 것이리라. 나는 늦은 퇴근길이나 뭘 사러 나가다 가끔 그 부자 또는 모자와 마주치곤 했는데 때로는 몇 발자국 뒤에서 그들을 따라갈 때도 있었다. 어머니가 같이 걸을 때는 어머니 쪽에서 가끔 웃거나 농담을 건넸지만 아버지는 거의 말이 없었다. 부자는 그저 걷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들은 걷기 조차 힘든 지경의 장애였기 때문이다. 깊고 어두운 심연에서 길어 올린 듯한 침묵을 뒤따라가는 동안 불행이 어떤 신념처럼 그 침묵 속에 있었다.
삶의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는가. 세상은 왜 우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가. 신은 왜 우리를 방치할까. 그렇다면 신은 왜 있을까. 아니, 정말로 있기는 하나. 밤이 깃들면 생명의 시간을 소진하며 영원을 희구하는 우리의 영혼은 끊임없이 낡아만 간다. 섭리와 운명, 이 굉음처럼 거대한 우주의 음향 속에서 처연한 밤들이 묵묵히 깊어간다.
우리는 어쩌면 동정同情을 학습해왔다. 누군가의 불행과 슬픔을 우리는 나눠야 하고 공감해야 하며 위로해야 한다는 양심의 규범을 사회적인 훈육의 일환으로 배운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쁜 의도는 아니지만 어린 심성에 심어진 감정의 연대라는 것은 절실하지 못했다. 고백하거니와, 어떤 공감과 위로는 피상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타인에 대한 감정은 보다 본질적인 상련相憐의 위무로 구조화된다. 세상엔 슬픔이 지천이란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이 보다 입체적으로 도달한다. 가령, 내가 속한 친구들 무리에선 고맙게도 아직 한 사람도 없지만 다른 그룹들에선 벌써 장례식장으로 친구들을 불러들이는 녀석들이 생겼다. 우리는 친구의 여생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그와 함께 보냈을 앞으로의 시간과 그가 남긴 시간을 동시에 잃었다는 슬픔으로.
내가 죽었다 깨어난들 그 장애를 입은 청년과 청년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심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평생에 걸쳐 그 가족을 짓누를 어둡고 무거운 일상과 전망을 어떻게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한 해가 저물고 어김없이 제야除夜의 시간은 다가온다. 또 하나의 성상星霜이 영원 속으로 편입되는 우주의 운행 앞에서, 세상은 아직도 엉망일망정 내게 작은 소망이 있으니 그 밤의 산책을 나오는 가족을 위해 쓰고 싶다. 神이 있다면, 그래서 정말로 신을 대리하는 천사가 있다면, 단 하룻밤만이라도 그들과 함께 잠이 들기를. 그래서 그 밤의 꿈에서만은 천국 같은 낙원에서 세 사람,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모든 짐을 훌훌 벗고 깃털처럼 자유롭기를. 나 같은 게 감히 이런 소원을 빌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해피 뉴 이어.
이 황량하고 눈물겨운 세상이여.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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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1-12-2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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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1-12-20 11:13santiago 通信_ 40
입대 후 6주간의 훈련병 기간은 한겨울이었다. 고난의 시절은 언제나 기억 속에서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그 해 겨울은 정말 미친 듯이 추웠다.
신병훈련소에선 규칙상 훈련 기간 6주 동안 PX(군용 매점) 출입이 금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전부리 좋아하질 않으니 처음엔 그깟 매점 못 가는 게 대수롭지 않았다. 춥지만 않으면 다른 건 뭐든 상관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별 것 아닌 군것질을 못하게 되자 단 걸 일체 입에 대지 못해서 나중엔 달달한 게 땡긴 나머지 금단현상까지 오게 되는데, 단맛을 끊으면 몸이 그렇게나 원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허나 하루 세 끼 배식도 허겁지겁 해치우는 군대에서 딱히 달짝지근할 게 있을 리 없다. 헛헛한 입맛에 담배만 줄창 피워대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오전, 훈련소 안 작은 교회의 예배가 있어 종교 여하를 불문하고 훈련병 전원이 참석해야 했다. 아마도 훈련소장이던 중령이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겐 축복이었다.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로 후끈하게 틀어놓은 히터의 황홀한 온기 속에서 일병을 단 군종병이 집도하는 예배시간에 우리들 대부분은 정신없이 졸았다. 깊은 잠에 빠진 몇몇은 대놓고 코를 골기도 했는데 킥킥대는 우리에게 사람 좋은 군종병은 한 번도 우리의 예배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운 것은,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출구에서 군종병이 훈련병 모두에게 사탕을 한 알씩 나누어 준 것이다. 한 줌도 아니고 딱 한 알의 과일 드롭프스. 본인도 얼마 전까지 생활을 강제당한 경험이 있으니 누구보다 우리의 애환을 헤아렸을 것이다. 한 줌씩 줬다간 그 많은 인원들에게 경비가 감당 안됐을 것이다. 한 알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그 견고하고 달콤하던 과일 합성 감미료. 단맛에 기갈이 들린 육신에 잉크처럼 퍼져나갔다. 사탕을 입에 넣는 순간, 눈동자의 촛점이 풀리던 녀석도 있었는데 이때에만은 아무리 무신론자라도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온다. 그리스도 주 예수의 은사를 그야말로 온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그렇게 영접했다.
아무도 감히 사탕을 깨물어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누군가 그런 '비행'을 저질렀다면 일주일 내내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입 안에서 깨져버린 유리조각을 혀로 골라내는 것처럼 어찌나 공을 들여서 빨아먹었던지 내 평생 사탕이 입 안에서 용해되는 과정을 그토록 침착하고 순차적으로 집중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물론 그 후, 그보다 더 달콤하고 맛있는 사탕은 다시 구경해 본 바가 없다. 추억은 아름다워라, 전역 후에 과일 드롭프스 한 통을 사 봤는데 절반도 먹지 못하고 버려졌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세파에 시달리면서 가끔 이때를 떠올릴 때가 있다. 나는 지금도 종교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리스도 주 예수의 은사로부터 결국 모든 신의 구원이란 바로 이 사탕 한 알 만큼의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단맛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육신의 권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탕이 봉지째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도 아닌 그저 '사탕 한 알' 만큼의 해갈. 딱 그만큼의 어메이징 그레이스. 사탕이 입 안에서 다 녹고 나면 우리는 또다시 세속의 고난 속에서 안간힘을 쓰고 생명의 원죄와 싸우며 고단한 날들을 이어가야 할 뿐이다. '그리하여 착한 주인공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는 이야기가 얼마나 '영원히' 비현실적인지 우린 오래전에 알아채고 말았으니까.
기적이란 때로 멀리 있지 않다.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크리스마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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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djckvl)2021-12-1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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