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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후함 단아함 아름다움

좋은 멜로디에 담긴 좋은 글을 좋아합니다.
  • 30
  • 누들︎︎︎︎︎

    @jackbenoodle

  • 30
    누들︎︎︎︎︎ (@jackbenoodle)
    2026-04-03 02:40


    결혼 기차 / 문정희



    어떤 여행도 종점이 있지만
    이 여행에는 종점이 없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에
    한 사람이 기차에서 내려야 할 때는
    묶인 발목 중에 한쪽을 자르고 내려야 한다

    오, 결혼은 중요해
    그러나 인생이 더 중요해
    결혼이 인생을 흔든다면
    나는 결혼을 버리겠어

    묶인 다리 한쪽을 자르고
    단호하게 뛰어내린 사람도
    이내 한쪽 다리로 서서
    기차에 두고 온 발목 하나가
    서늘히 제 몸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서둘러 다음 기차를 또 타기도 한다

    때때로 차창 밖을 내다보며
    그만 이번 역에서 내릴까 말까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선반에 올려놓은 무거운 짐을 쳐다보다가
    어느덧 노을 속을
    무슨 장엄한 터널처럼 통과하는

    종점이 없어 가장 편안한 이 기차에
    승객은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댓글 0

  • 30
    누들︎︎︎︎︎ (@jackbenoodle)
    2026-04-03 02:38


    아침 / 천상병

    아침은 매우 기분 좋다
    오늘은 시작되고
    출발은 이제부터다

    세수를 하고 나면
    내 할 일을 시작하고
    나는 책을 더듬는다

    오늘은 복이 있을지어다
    좋은 하늘에서
    즐거운 소식이 있기를.

    댓글 3

  • 30
    누들︎︎︎︎︎ (@jackbenoodle)
    2026-04-01 13:57


    젖은 생각 / 권현형​​

    마른 빨래에서 덜 휘발된 사람의 온기,
    달큰한 비린내를 맡으며 통증처럼
    ​누군가 욱신욱신 그립다
    ​삼월의 창문을 열어놓고 설거지통 그릇들을
    ​소리나게 닦으며 시들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며
    ​나는 자꾸 기린처럼 목이 길어진다
    ​온 집안을 빙글빙글 바람개비 돌리며
    ​바람이 좋아 바람이 너무 좋아 고백하는 내게
    ​어머니는 봄바람엔 뭐든 잘 마르지 하신다
    ​초봄 바람이 너무 좋아 어머니는
    ​무엇이든 말릴 생각을 하시고
    ​나는 무엇이든 젖은 생각을 한다

    댓글 2

  • 30
    누들︎︎︎︎︎ (@jackbenoodle)
    2026-03-30 02:26


    밤 산책 / 심보선


    당신이 잠든 사이 몰래 밖으로 나가
    공원 벤치에 한참을 앉았다 돌아왔다

    아침에 당신이 나를 안고는
    재스민 향이 나니 해서

    그 후로 새벽에 줄곧 그리하였다

    요새는 밤새 공원을 쏘다니고
    집에 와 몸 구석구석을 쿵쿵대도

    좋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애초부터 산책과 무관한 일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네가 봄에 써야지 속으로 생각했던” 중에서

    댓글 0

  • 30
    누들︎︎︎︎︎ (@jackbenoodle)
    2026-03-29 06:30


    꽃그늘 / 나태주


    아이한테 물었다

    이담에 나 죽으면
    찾아와 울어줄거지?

    대답대신 아이는
    눈물 고인 두 눈을 보여주었다.

    댓글 0

  • 30
    누들︎︎︎︎︎ (@jackbenoodle)
    2026-03-27 09:17


    사막 / 이문재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댓글 0

  • 30
    누들︎︎︎︎︎ (@jackbenoodle)
    2026-03-26 05:06


    언젠가는 그 길에서

    갔던 길을 다시 가고 싶을 때가 있지.
    누가 봐도 그 길은 영 아닌데
    다시 가보고 싶은 길.

    그 길에서 나는 나를 조금 잃었고
    그 길에서 헤맸고 추웠는데,
    긴 한숨 뒤, 얼마 뒤에 결국
    그 길을 다시 가고 있는 거지.

    아예 길이 아닌 길을 다시 가야 할 때도 있어.
    지름길 같아 보이긴 하지만 가시덤불로 빽빽한 길이었고
    오히려 돌고 돌아 가야 하는 정반대의 길이었는데
    그 길밖엔, 다른 길은 길이 아닌 길.

    - 이병률, '바람이 분다.당신이 좋다' 중에서-

    댓글 0

  • 30
    누들︎︎︎︎︎ (@jackbenoodle)
    2026-03-26 04:30


    장래 희망은 인어 / 성미정

    소녀는 인어가 되기 위한 긴 여행을 떠났지

    어느 곳에서도 소녀는 인어를 보 지도
    인어를 보았다는 사람도 만나지 못했지만
    가족들에게 편지 쓰는 건 잊지 않았지

    인어의 지느러미를 봤다던가
    인어의 노래를 들었다던가
    가족을 안심시키기 위한 편지였지만
    자꾸 쓰다 보니 정말 그런 기분이 들기도 했지

    들르는 곳마다 인어가 되기 위해
    기나긴 여행 중인 소녀의 사연은 화제가 되었지
    인어가 되기 위해 기나긴 여행 중인 소녀를
    줄여 사람들은 인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소녀는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인어로
    통하기 시작했지 소녀는 기쁜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지
    이제 인어가 되었어요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가족들은 조금 걱정이 되었지
    이젠 지느러미가 생기고 물을 더 좋아할
    소녀를 위해 커다란 수족관을 마련했지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녀는
    흰머리가 조금 생긴 것 외에는
    떠날 때와 다른 게 하나도 없었지

    가족들은 그제서야 알았지
    소녀가 세상을 마음껏 헤엄치다
    돌아온 진짜 인어임을

    댓글 0

  • 30
    누들︎︎︎︎︎ (@jackbenoodle)
    2026-03-24 14:43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 박성우

    거실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고 보니
    티브이는 꺼져 있고
    내 몸에는 이불이 덮여 있다

    아내는 연수받으러 가고 없는데
    누구지?

    유정란을 휴지에 싸서 부화시키려다
    깨뜨리고 말던 유치원생 딸애는
    그새 중학생이 되었다,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댓글 0

  • 30
    누들︎︎︎︎︎ (@jackbenoodle)
    2026-03-24 09:24


    무언으로 오는 봄 / 박재삼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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