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아 있는건 빛을 낸다 ♡
♡ 행복충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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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a(@rlaghkd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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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a (@rlaghkdud)2015-08-03 19:24아침공감 ^^*
어렸을 때 가장 많이 걸던 주문은 ‘할 수 있다’였다.
달음박질하며 장애물을 뛰어넘었을 때, 농구공을 처음으로 링 안에 넣었을 때,
나는 속으로 저 주문을 외고 있었다.
할 수 있다는 주문은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도 했지만,
할 수 있었음에도 결국 실패했을 때 맛보던 쓴맛은 더욱 강렬했다.
자라면서 ‘하고 싶다’는 주문이 많아졌다.
놀이동산에 가고 싶었고 어른들처럼 늦게 잠자고 싶었다.
친구들의 꿈을 들으면 그게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는 대통령이 하고 싶다가 오늘은 문득 체조 선수를 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늘어날수록 슬퍼지는 순간도 많았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니 앞선 두 주문이 아닌 다른 주문을 외고 있었다.
‘해야 한다’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까지는 이 일을, 그리고 내일은 그 다음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
해야 하는 게 점점 많아질수록 ‘할 수 있다’와 ‘하고 싶다’는 작아졌다.
다 해낼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바쁜 와중에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고 싶다, 해야 한다 등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 많아질수록
‘하다’는 점점 희미해진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아진다.
정작 지금 하는 일이 갖는 의미는 퇴색되고 만다.
집에 돌아와 잘하고 있다고, 오늘 하루도 잘 견뎠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오늘만큼은 주문하지 않고, 위로를 ‘한다’.
* 시인 오은의 에세이 <주문하지 않기> 였습니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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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a (@rlaghkdud)2015-08-01 11:24아침공감 ^^*
먹을 것을 말리고 저장하는 행위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것은 삶에 밀착된 행위이기에 아름답다.
아파트에서 사는 지금 나는 늘 그 아름다운 행위를 재연해보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그래서 여름의 끝물쯤 되면 시장으로 달려가
말리고 저장해둘 거리들을 사다 나른다.
호박, 가지, 토란대를 사다가 쪼개서 아파트 베란다에 말린다.
그 말라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는 평화를 만끽한다.
모든 말라가는 것들은 그렇게 평화롭다
.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토란잎 무침도 못 먹고 살다가,
어느 해 정월 보름 저녁 고향 큰댁에 가서,
큰엄마가 내놓은 시커먼 토란잎 무침을 보고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큰엄마의 토란잎 무침은 내가 이 세상에서 맛 본 음식 중
가장 단순한 맛과 조리법을 가진 음식이다.
말린 토란잎을 삶아내 마늘도 파도 없이 아무것도 안 넣고
그냥 조선간장에 살짝 무친 것이다.
간장만으로 무친 토란잎은 단순해서 깊은 안식을 주는 음식이다.
큰엄마, 하고 들어선 큰집 구들방에서
나는 인정 없는 도회의 거리를 떠돌다 어둠을 틈타 돌아온 귀향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큰어머니의 쭈글쭈글한 손으로 무쳐낸 그 토란잎 무침을
찰밥과 함께 정신없이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었다.
말할 수 없는 타양살이의 회한도 토란잎과 함께 밀어넣었다.
*소설가 공선옥의 에세이집 <행복한 만찬>에서 따온 글입니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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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a (@rlaghkdud)2015-08-01 11:20아침공감 ^^*
육체의 근육이 발달한 사람은 같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기초대사량이 높아 살이 잘 찌지 않는다고 하지요.
감성 근육이 발달한 사람 역시 더 많은 것을 느끼면서도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잘 느끼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자기 느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와인을 전문적으로 테이스팅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별점을 보고
와인을 고를까요?
평생 음악을 사랑하고 들어온 사람들이 남의 평가만 듣고
콘서트 티켓을 살까요?
저만 해도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살 때
독자 서평이나 리뷰를 전혀 보지 않습니다.
한 작가가 저에게 한 번이라도 깊은 즐거움을 주었다면
그 즐거움은 제 정신과 육체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 작가가 새 작품을 냈다면 일단 사보는 겁니다.
만약 그 작품에 실망했다면 그것 역시 고스란히 남습니다.
자신만의 느낌의 데이터베이스가 충분한 사람은
타인의 의견에 쉽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참고는 하겠지만 의존하지는 않을 겁니다
.
세상에 대해서는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윤리적으로 건강한 개인주의를 확고하게 담보하려면
단단한 내면이 필수적입니다.
남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단단한 내면은 지식만으로는 구축되지 않습니다.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지식만 있고 자기 느낌은 없는 사람,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개인이라고 보기 힘들 겁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보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내 감정은 감추고 다중의 의견을 살펴야 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겠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느끼는가. 뭘,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소설가 김영하의 에세이 <말하다>에서 따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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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a (@rlaghkdud)2015-08-01 11:17아침공감 ^^*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
*‘희미한 옛사랑의 노래‘ 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 김광규의 시 ’생각의 사이‘ 였구요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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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a (@rlaghkdud)2015-07-27 10:01아침공감 ^^*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은하수와 반딧불이는 청정지역의 지표와도 같다.
은하수는 광해가 적은 곳이라야 볼 수 있고,
반딧불이 역시 인위적인 시설이 적을수록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반딧불이의 서식지는 주변에 깨끗하게 흐르는 물이 있고,
인공불빛과 인적이 없어야 하는 등 그 조건이 까다롭다.
근방에 전신부만 있어도 전기의 자력선 때문에 반딧불이가 사라진다는
주장도 있다.
애반딧불이와 운문산반딧불이는 알에서 성충까지 자라는데 1년 정도 걸리고,
늦반딧불이는 애벌레로 2년을 살지만, 성충으로서의 수명은 고작
2주 정도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연속적으로 서식환경이 유지되어야 개체 수가
늘어날 텐데 불행히도 우리 주변의 환경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이들과 함께 캠핑을 떠난다면
도시에서 거리가 있는 외진 캠핑장을 찾아가 보자.
캠핑장은 대부분 주변에 물을 끼고 있으므로 조금만 벗어나면
반딧불이를 만날지도 모른다.
멋진 은하수와 반딧불이를 찾으려면 조명 램프의 불은 모두 끄고,
목소리는 물론 발소리까지 죽여야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반딧불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어른들의 잘못이다.
경제 개발의 명분과 논리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미래에 반딧불이가 없다면
참으로 슬플 것이다.
혹시라도 반딧불이를 채집하여 배 부분에서 발광하는 노란 신비의 빛을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조심스럽게 관찰 후
반드시 다시 놓아줄 것을 잊지 말자.
*월간 아웃도어 7월호에서 따온 글이었습니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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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a (@rlaghkdud)2015-07-25 13:44아침공감 ^^*
나는 원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서
누가 인생의 목표 같은 걸 물으면 당혹스럽다.
그래도 굳이 뭔가 말해야 한다면,
최선을 다해 행복하기? 진심을 다해 사랑하기? 후회 없을 만큼 자유롭기?
올해가 지상에서의 마지막 해인 듯, 이달이 마지막 달인 듯,
이번주가 마지막 주인 듯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수밖에.
그런데도 또다시 누군가 인생의 목표를 물으면 요즘은 이런 대답을 한다.
‘잘 늙어가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생물학적으론 어른인데 정신적으론 유아상태로 퇴행하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
젊어서 ‘괜찮았던’ 사람들이 늙어서 형편없어지는 걸 보면 슬프다.
나는 스스로 그것을 염려한다.
막연하게 생각한 ‘늙음’은 냉혹한 자기갱신을 끊임없이 병행하지 않으면
금방 무너져 내린다.
그러니 ‘아름답게 늙기’는 인간으로 태어나 도전해볼만한 진짜 멋진 일 아닌가.
젊음은 꿈과 이상, 자유에의 갈망, 도전의식 등을 비교적 쉽게 가진다.
육체와 정신이 싱싱하게 균형을 이루기 좋은 조건 탓이다.
늙음은 그와 같지 않다.
‘내가 한때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식으로 고착된 갑각은
타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고집불통의 보수화 경향으로 나타나기 쉽다.
육체를 닦고 매만지듯이 정신을 돌봐야 한다.
일찍 늙어버린 정신은 육체의 빛을 쉬이 꺼뜨리지만,
정신이 젊은 한 생동감의 빛은 꺼지지 않는다.
결국은 혁명이다. 날마다의 혁명이 없다면 마침내 늙은 것이다.
*시인 김선우의 에세이 <늙어감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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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a (@rlaghkdud)2015-07-24 11:16아침공감 ^^*
옛 선인들에게 피서라는 개념은 다소 생소했나 보다.
물론 그 당시에도 피서라는 말을 쓰기는 했으나,
지금처럼 먼 곳으로 떠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서 대신 그들은 ‘망서’, 즉 더위를 잊는 방법을 택했다.
어디를 가도 눅눅함과 끈끈함은 있게 마련이다. 피한다고 파할 수 없다.
잊는다고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잊는다는 것은
마음을 그렇게 고쳐먹는다는 뜻이다. 마치 더위를 못 느끼는 양, 마음을 다스리는 게다.
‘덥다 덥다 덥다!’하고 더위 자체에 집착하기보다,
더위를 잊고자 삶의 현장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다.
덥다고 여기면 더욱 덥고, 그것은 습사처럼 들러붙어 일상을 잠식하다.
누가 그랬는가? 바로 내 마음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현진 스님의 글 <오늘이 전부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름날이면 모든 사람들이 피서를 떠난다지만,
이 산천 어디에 간들 더위가 없을 것인가?
다만 산과 바다가 더위를 식혀 줄 뿐이다.
그곳을 벗어나면 다시 폭염의 현장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더위는 피해 다닌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피서보다는 ‘망서’가 훨씬 수행자적 자세가 아닐까.
그래서 올 여름은 수행의 현장에서 땀 흘리며 더위를 지낸다.
초원의 동물들은 더위를 피해 물을 찾아 대이동을 한다.
물을 구하는 그들의 여정은 거룩하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더위가 찾아와도
내가 있는 자리를 섣불리 떠나지 않고 마음가짐을 되새긴다는 데 있지 않을까?
마음 속에서 더위를 다루는 힘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점이리라.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정신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대서에 할 수 있는 윤리이다.
*김동철, 송혜경의 책 <절기서당>에서 따온 글입니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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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a (@rlaghkdud)2015-07-22 11:43아침공감 ^^*
내 친구 미선이는 언어치료사다
얼마 전 그녀가 틈틈이 번역한 책을 보내왔다
<삼킴 장애의 평가와 치료>
희덕아,
삼켜야만 하는 것, 삼켜지지 않는 것,
삼킨 후에도 울컥 올라오는 것...... 여러 가지지만
그래도 삼킬 수 있음에 늘 감사하자. 미선.
입 속에서 오래 뒤척이다가
간신히 삼켜져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것,
기회만 있으면 울컥 밀고 올라와
고통스러운 기억의 짐승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삼킬 수 없는 말, 삼킬 수 없는 밥, 삼킬 수 없는 침,
삼킬 수 없는 물, 삼킬 수 없는 가시, 삼킬 수 없는 사랑,
삼킬 수 없는 분노, 삼킬 수 없는 어떤 슬픔,
이런 것들로 흥건한 입 속을
아무에게도 열어 보일 수 없게 된 우리는
삼킴 장애의 종류가 조금 다를 뿐이다
미선아, 삼킬 수 없는 것들은
삼킬 수 없을 만한 것들이니 삼키지 말자.
그래도 토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자. 희덕.
*나희덕의 시집 <야생사과>에 실린 시, <삼킬 수 없는 것들> 이었습니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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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a (@rlaghkdud)2015-07-20 12:38아침공감 ^^*
가족 내에서 존재감이 있는지 없는지는 다음 질문에 답하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자녀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자녀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편인가요?
아니면 아내의 입을 거쳐서 듣게 되나요?
또는 가족에게 고민이 생겼을 때 자신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하던가요 아니면
자신이 가장 나중에 알게 되던가요?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가정에서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회사 생활에서는 최종 보고를 받는 사람이 직위가 높고 존재감이 크지만
집에서는 정반대입니다. 가족들이 원하는 것을 자신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가족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전달받는다면 집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회에서는 골치 아픈 일을 아랫사람이 알아서 해결하고
자신에게 올라오는 불만 사항이 적을수록 존재감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하겠지만
가족들이 소소한 고민거리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가정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겁니다.
평생을 같이 보내야 하는 가족이 자신의 존재감을 말단 직원 정도로
평가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일은 만족스럽지만 가정생활은 불행한 사람이, 일은 불만족스럽지만 가정생활이
행복한 사람보다 훨씬 불행한 법입니다.
사회에서 존재감을 얻기 위해 애쓰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회사에서도 버림받고 집에서의 존재 가치도 사라져버릴 테니까요.
존재감은 어떻게 해야 쌓일까요?
원리는 딱 두 가지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원리입니다. 첫째, 시간을 함께 많이 보내야 합니다.
퇴근도 늦고 심지어 집에서도 회사 업무를 보거나
피곤하다며 휴일에는 소파에서 잠만 잔다면 가정에서의 존재감은 사라집니다.
회식은 절대 빠지지 않지만 가족 식사는 쉽게 거르면서 존재감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다른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존재감은 커집니다.
자녀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부해라”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라로 지시 사항만 잔뜩 늘어놓는다면
존재감은 어느새 사라져버립니다.
부하 직원이라면 자시 사항을 열중해서 듣겠지만 자녀들은 “꼰대... 또 잔소리한다”고 생각하면서 들은 체 만 체 할 것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서글픈 느낌이 듭니다.
팍팍한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남자 중에
휴일에도 힘이 넘쳐나서 가족과 열정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기 때문입니다.
*정신과의사 김병수의 책 <버텨낼 권리>에서 따온 글입니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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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a (@rlaghkdud)2015-07-15 09:15
*** 으슥한 곳에 ......
세월호 출범 반년 아직도 0 이다.
우리나라의 추모공간 자리들을 보면
가장 으슥한 곳에 있다 .
사고자리와 동떨어진 으슥한 곳 ...
잊기위해 잊혀지길 위해 .......현실이다 ...
*** 미국의 경우를 보면 가장 값비싼 자리에
추모 공간이 세워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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