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쪽지
쪽지 플러스 구매
쪽지
삭제 전체 삭제
  • 쪽지
  • 친구
로즈선물
  • 임의지정
  • 내 보유로즈
    0

젤리선물
  • 임의지정
  • 내 보유젤리
    0

하트선물
  • 임의지정
  • 내 보유하트
    0

메시지 상세
00:00

logo

http://s647b5701bf664.inlive.co.kr/live/listen.pls

tradbred님의 로그 입니다.

좋은글 하나라도 놓칠까봐 노심초사했다
  • 29
  • tradbred(@tradbred)

  • 29
    tradbred (@tradbred)
    2025-04-07 20:03
    [서라백 만평]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서라백 작가
    입력 2025.04.07


    시리즈는 계속된다.
    해치웠다고 생각한 최종 보스는 매번 되살아난다.
    그들의 DNA는 또 다른 숙주를 순식간에 찾아내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게임은 그렇게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달라진 건 '아직' 없다.
    내란수괴는 놀랍게도 아직도 '자유의 몸'이며, 이에 빌붙었던 빌런들은 여전히 명패를 움켜진 채 호흡기를 돌리고 있다.
    몽매한 좀비들에겐 텔레파시가 송출되고 태극기와 미국기를 흔들어 대며 모여든다.

    계엄군의 장갑차를 몸으로 막았다.
    혹한의 겨울 속 알루미늄 호일을 뒤집어 쓰고 아스팔트 위에서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대선 일자가 확정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개헌'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지금이야말로 미루던 개헌 '적기'라는 것이다.

    기실 개헌 필요성은 일찌감치 제기됐다.
    골자는 대통령 임기와 권력구조 개편이다.
    하지만 급조한 과정에선 행정수도 이전 명문화나 5.18민주화운동의 헌법 전문 수록 등은 곁가지로 밀려날 우려가 있다.
    의미의 퇴색이다.

    순서가 잘 못 됐고 의도가 불손하며 괘씸하다.

    떫은 감을 홍시라고 따먹어도 충분하다고 호들갑을 떤다.
    설익은 밥인데 솥뚜껑을 열고 주걱을 집어넣는다.
    남은 60일 동안 국회 특위에서 개헌안을 마무리 짓고 이어 남은 한 달 새에 국민에게 찬반을 묻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답정너'다.
    아직도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태도다.

    '포용'이라는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담겨 나온다.
    쌀로 밥 짓는 뻔한 레퍼토리로 '대화'와 '타협'을 논한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위 아 더 월드', '손에 손잡고'를 부른다.

    선거가 개헌론에 잠식되면 내란 심판이라는 본연의 취지가 희석될 위험성이 농후하다. 3년 전 '삽질'을 다시 반복해도 된다는 것인가.

    전임 대통령이 퇴임 후 시골 책방에서 느긋하게 낭만을 즐기는 동안 이태원 골목에서 159명이 압사했고, 해병대원이 물에 휩쓸려 세상과 이별했다.
    500여 명이 수거돼 확인 사살 당하거나 바다에 수장될 뻔 했다.
    영현백에 3천 명의 주검이 담길 뻔 했다.

    '촛불혁명'으로 어렵게 쟁취한 국민권력을 문재인 정부는 5년만에 적폐권력에게 반납했다.

    윤석열의 횡포를 방관하다 결과적으로 내란수괴를 잉태한 꼴이 됐다.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되도 모자랄 지경이건만, 말끔한 사모관대를 걸치고 수염이나 다듬으며 '선비질'을 해대는 누구가 있다.

    닥치고 칼같은 촛불을,
    총같은 응원봉을,
    피와 뼈같은 붉은 인주가 묻은 투표용지를 들고 전선에 나설 지어다.

    명심하라,
    '협상'을 제안하는 자가 배신자이며 프락치이며 내란 동조자다.

    닥치고 내란 척결이 우선이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8596

    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
    2025-04-07 20:00
    [교수논단] 누가, 왜 지금 개헌을 말하는가
    맹수석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입력 2025.04.07


    어제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새삼 떠오른 날이었다.
    탄핵 선고후 모처럼 숨 돌린 일요일 오후였는데, 국회의장이 기자회견을 한다는 소식에 계엄 트라우마가 다시 떠오르며 머리 끝이 쭈뼛해졌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시절 군부독재의 종식과 함께 개정된 ‘87년 헌법’의 개정 필요성이 학계, 정치계,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폭넓게 논의되어 왔다.

    필자 역시 점점 높아지는 국민의 권리의식과 사회적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한 개헌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해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개헌이 갖는 상징성과 중요성은 물론, 그 시점에 있어서도 지금은 개헌론에 불을 지필 때가 아니다.

    개헌은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일이고, 극도로 예민한 이슈이기 때문에 개헌 시기의 선택도 매우 신중해야 한다.

    물론 계엄 사태 전부터 87년 헌법 체제의 여러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개헌을 늦춰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에 많은 국민들도 공감했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일의 처리는 선후가 있기 마련인데, 지금은 개헌을 할 시기가 아니라고 본다.

    작년 12월 3일 계엄선포라는 황당한 비상상황이 창졸간에 발생했고, 넉달 동안 지난한 과정을 거쳐 헌법재판소가 지난 4월 4일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파면을 선고하였다.

    이렇게 파면이 결정된 지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고, 내란에 대한 진상 규명에 이은 법적 단죄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뜬금없이 개헌 이슈를 불쑥 들고나오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과거의 평화적인 상황과 달리, 12. 3 계엄사태로 인해 엄중한 비상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개헌 논의 여건과 전혀 다른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은 아니다.

    군대까지 동원한 ‘대통령 윤석열’의 계엄선포 행위에 대해 주권자인 국민은 물론, 자신이 임명한 헌법재판관마저도 만장일치로 헌정 유린행위로 보아 파면을 선고했다.

    그런데 정작 그 우두머리는 사죄는 고사하고 해괴한 말로 자신의 극렬 지지층을 선동하는 언사를 일삼고 있어, 사회적 분열과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역사와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도 모자랄 판에, 작금의 내란을 주도하고 동조했던 세력들의 행태는 헌재의 결정에 대한 불복은 물론 국민과 헌법정신을 우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위헌적·불법적인 계엄으로 인해 국가가 큰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고, 국민들은 갈수록 극한적인 대립의 장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헌법을 짓밟는 또 다른 폭거가 다시 반복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개헌보다는 내란의 종결이 선결적 최우선 과제이다.

    그리고 ‘개헌’은 개개의 일반적 법률 개정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국가의 중대사이다. 따라서 헌법 개정의 주체인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수렴하면서,
    전문가들의 진지한 논의의 장을 거쳐 개정안이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번 개헌 논의는 국회를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국은 곧이어 대통령 선출을 위한 전국적인 선거 국면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국회에서도 보다 진지하고 충실한 개헌 논의가 진행되기 곤란할 것이라는 점은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불과 두달도 남지 않은 대선 과정에서 권력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한 개헌 논의가 진행되다 보면 ‘게도 구럭’도 다 놓치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따라서 ‘대통령 궐위’라는 백척간두의 비상한 상황에서 민주적 절차에 의해 대통령을 원만히 선출한 뒤에 헌법 개정을 논하더라도 결코 늦지 않다고 본다.

    아직 내란사태도 제대로 종식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개헌론으로 지리멸렬한 공방을 거듭하게 되면 또 다른 위기를 낳을 수도 있다.

    이번 내란사태를 겪은 국민들은 다시금 친위 쿠데타 망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려는 세력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의 불행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민주적 위헌 행위를 자행한 자들과 그 세력에 대해 법률이 정한 바대로 준엄하게 의율(擬律)해야 한다.

    지금 이 절체절명의 시점에 국회가 할 일이 정말 많다.
    국회는 계엄으로 흐트러지고 땅에 떨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폭망 직전이라고 아우성인 서민들의 민생을 챙기면서 경제회복을 위해 올인해야 하며,
    전 세계적으로 추락한 국격을 회복하는 일에 팔을 걷고 나서야 한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8597

    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
    2025-04-07 02:10
    아직도 반성 없는 尹, 또 지지자들 향한 선동 입장문 내놔
    한남동 관저 퇴거 언급도 내란 사태에 대한 사죄도 없어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4.06

    12.3 내란 사태의 수괴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지난 4일 탄핵심판 인용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이후에도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탄핵심판 직후 낸 입장문과 마찬가지로 6일 발표한 입장문에서도 자신의 지지자들을 향한 선동을 이어갔다.

    아울러 한남동 관저에서 언제 퇴거할 것인지에 대한 언급도 12.3 내란 사태에 대한 사죄도 전혀 없었다.

    윤 전 대통령은 6일 변호인단을 통해 낸 입장문에서 “여러분의 지지와 성원에 깊이 감사드린다”며 “나라의 엄중한 위기 상황을 깨닫고 자유와 주권 수호를 위해 싸운 여러분의 여정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국민변호인단 여러분. 2월13일 저녁 청계광장을 가득 메웠던 여러분의 첫 함성을 기억한다”며 “몸은 비록 구치소에 있었지만 마음은 여러분 곁에 있었다”고 했다.
    국민변호인단은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과정에서 탄핵 반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윤 전 대통령 측 석동현 변호사가 주도해 만든 지지 단체로 지난 2월 13일 청계광장에서 출범식을 열었다.

    이어 그는 “여러분의 지지와 성원에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죄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라며 “나라의 엄중한 위기 상황을 깨닫고 자유와 주권 수호를 위해 싸운 여러분의 여정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자신을 지지하는 청년들을 향해서도 “청년 여러분. 이 나라와 미래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이라며 “오늘의 현실이 힘들어도 결코 좌절하지 말라”고 했다.
    아울러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라. 청년 여러분께서 용기를 잃지 않는 한 우리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윤 전 대통령은 “저는 대통령직에서는 내려왔지만 늘 여러분 곁을 지키겠다”며 “힘냅시다! 감사합니다”고 했다.

    결국 파면된 이후에도 그는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에서 윤 전 대통령 본인이 주장했던 '경고성 계엄', '호소용 계엄' 등에 대해서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고 12.3 내란 사태 당시 선포한 비상계엄이 중대한 위헌, 위법행위였다고 인정한 이상 그는 중형을 면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하기는커녕
    자신을 지지하는 소수의 지지층들을 선동하는 메시지만 반복해서 내놓은 셈이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이상 더는 한남동 관저에 머물러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틀이 지나도록 퇴거하지 않은 채 그곳에 머물고 있다.

    박근혜 씨의 경우 2017년 3월 10일 탄핵심판 인용으로 파면된 이후 이틀이 지난 12일 밤에 청와대에서 퇴거했는데 윤 전 대통령은 아직도 퇴거를 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이같은 메시지에 더불어민주당 황정아 대변인은 서면브리핑을 통해 "내란수괴 윤석열이 또다시 극우세력에 대한 선동을 획책하고 나섰다"며
    "헌재가 헌정질서를 유린한 불법 계엄을 헌법의 이름으로 단죄했는데도 윤석열은 사죄의 의사도 없이 극우 세력을 선동하고 나섰다"고 질타했다.

    아울러 윤 전 대통령의 이같은 메시지에 대해
    "헌재 결정에 대한 불복이고 조롱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형사 재판을 앞두고, 극렬 지지층을 선동해 자신의 안위를 지키겠다는 내란수괴의 후안무치함에 분노한다"고 일갈했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8578

    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
    2025-04-07 01:39
    韓, 황교안처럼 12.3 내란 문건 '대통령기록물'로 지정해 봉인?
    민주당 "'내란 문건' 봉인, 꿈도 꾸지 말라!"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4.06

    지난 4일 탄핵심판 인용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되면서 또 하나 관심을 모으는 것이 바로 '대통령기록물'이다.

    지난 2017년 3월 박근혜 씨가 파면됐을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황교안 전 총리는 '세월호 7시간' 관련 문건을 대통령기록물로 지정해 봉인해버려 논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한덕수 국무총리가 12.3 내란 사태 관련 문건을 봉인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되어 ‘대통령지정기록물’ 지정 권한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로 넘어갔다.
    통상적으로 대통령 임기 종료 1년 전부터 대통령기록관으로 대통령 기록물을 이관하는 작업이 시작되는데 기록물 이관 대상 기관은 대통령비서실, 경호처, 국가안보실 등에서 생산한 기록물이다.

    퇴임을 앞둔 대통령은 대통령 기록물을 ‘대통령지정기록물’로 지정해 비공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데, ‘지정기록물’로 지정되면 15년 동안 열람이 제한된다.
    사생활과 관련된 기록은 비공개 기간이 최대 30년까지 늘어난다.
    현행법은 ‘지정기록물’ 지정권한을 대통령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한 대행이 ‘지정기록물’ 지정 권한을 갖게 된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국가기록원은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별도 규정이 없고, 권한대행의 직무 범위에도 제한 규정이 없다.권한대행도 지정기록물을 지정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이 때문에 한 대행은 윤 전 대통령 재임 중 생산된 기록뿐 아니라, 자신과 최상목 경제부총리 등이 권한 대행으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한 기간에 만들어진 기록도 ‘지정기록물’로 지정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생활과 관련된 기록'이 최대 30년 동안 '비공개'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지난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씨가 탄핵심판 인용으로 파면된 이후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황교안 전 총리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박 씨의 행적에 관한 기록물들을 모두 '지정기록물'로 정하며 봉인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당시에도 논란이 됐던 박근혜 씨의 '세월호 7시간' 행적은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 밝혀지지 않았다.
    지정기록물을 열람하기 위해선 국회 재적 의원 2/3 이상이 찬성하거나 고등법원장이 중요한 증거라고 판단해 영장을 발부하면 공개가 가능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초기는 여소야대였기에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인해 지금까지도 다 열람이 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당시 밝혀진 '세월호 7시간' 미스터리 중 절반 정도는 검찰 수사를 통해 해소됐는데 대표적인 것이 최초 보고, 최초 지시 시각 등이 모두 조작된 것이었으며 최순실이 그 때에도 국정에 개입하고 있었고 그가 청와대에 들어와서 회의를 주재했다는 점, 박근혜 씨가 올림머리 손질을 하느라 1시간 반을 허비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2047년이 돼야 알 수 있는 판이다.

    이 때문에 한덕수 권한대행이 비상계엄 국무회의록 등 내란 혐의 수사에 결정적일 수 있는 자료들까지 봉인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윤석열 내란 수사가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아울러 이 정권 들어서 논란이 됐던 대통령 취임식 초청자 명단, 김건희 전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 관련 자료, 대통령실 용산 이전 등 관련 기록 등도 마찬가지다.

    특히 대통령기록물 관리 업무를 총괄하는 대통령기록관장 채용에 대통령실 행정관 출신인 정 모 씨가 최종 후보에 포함된 것이 JTBC 단독 보도로 확인됐다는 점도 우려를 낳는 부분이다.
    정 전 행정관은 윤 대통령 취임 두 달 뒤인 2022년 7월부터 지난 2월 20일까지 대통령실에 파견돼 근무했다.

    현재 국회에는 대통령 권한 대행이 대통령지정기록물의 보호 기간을 정할 수 없도록 하는 대통령기록물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지만 아직 계류 중이다.
    행안부 대통령기록관은 이르면 7일부터 ‘대통령기록물 생산기관’을 차례대로 찾아 이관 대상 기록물 현황 파악을 한다.
    대상 기관은 대통령실과 국가안보실, 경호처를 비롯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와 같은 대통령 자문기관 등 28곳이다.

    한편 더불어민주당은 6일 황정아 대변인 서면브리핑을 통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황교안 전 총리와 같은 행태를 저지르지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했다.
    황 대변인은 "대통령기록물은 공개가 원칙"이라며 "헌법 질서를 짓밟고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12.3 내란 관련 기록물은 응당 국민께 있는 그대로 모두 공개되어야 한다. 그것이 주권자인 국민께서 요구하는 진실이다"고 강조했다.

    특히 황교안 전 총리가 '세월호 7시간'의 진실을 봉인했던 것을 언급하며 "기록은 역사이며, 역사는 국민의 것이다. 기록물 공개가 공익이고 역사에 대한 사죄"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덕수 권한대행은 내란 정권 내각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기록물들이 어떠한 손상이나 누락, 삭제, 조작 없이 모두 신속하게 공개될 수 있도록 조치하시라"고 주장했다.

    만일 한덕수 권한대행이나 대통령실이나 내란의 진실을 훼손하거나 은폐한다면 "명백한 내란 공범이며, 역사의 법정에서 내란의 진실을 숨긴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8582

    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
    2025-04-06 22:16
    나)
    내 몸보다 대의 앞세워 목숨 건 '참 보수' 이 사람, 달리 보인다
    허균도 직에 오르지 못한 항일과 절의의 고장... 홍주읍성과 두번의 항일의병
    이영천(shrenrhw)
    25.04.06


    홍주를 격하?

    가야산과 삽교천 중심인 내포가 어떤 곳인가?
    곧은 절개와 굳은 의리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추상같은 기세로 학문과 시서화에 매진한 추사 김정희가 있다.
    사육신 성삼문이 최영 장군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전설 같은 곳이다.

    윤봉길과 김좌진은 무장봉기로 항일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다.
    불교발전은 물론 독립과 우국으로 한 생을 살다 간 한용운은 어떠한가?


    내포신도시 북쪽은 예산, 남쪽은 홍성으로 행정구역이 둘로 갈린다.
    따라서 이곳 신도시 명명에 많은 고심이 있었으리라.
    수백 년 만에 홍주로 도청을 옮겨오는 일이니 더욱 그랬을 터이다.
    가야산에서 덕숭산, 다시 용봉산으로 이어지는 빼어난 산세를 신도시가 고스란히 받아 안았다.

    흔히 홍주와 결성에서 한 글자씩 빌어 홍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공주와 일본어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홍성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차분하게 살펴야 한다.
    조선의 지방 관제 중 州(주)가 붙은 지명은 부윤·부사·목사가 파견되는 부나 목이 통상적이다.
    충청도엔 청주·충주·공주·홍주가 있었고 이들 도시에 번갈아 충청감영이 설치되었다.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홍주 일부를 청양에 떼어주고, 이름을 홍성으로 바꾼다.

    하지만 전국 어디도 이름에서 州가 빠진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네들의 행정편의를 뛰어넘어, 식민체제에 강력히 반발한 홍주의 저항정신과 항일의식을 말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이름이 곧 지역이고, 지역이 곧 정신이니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웅장한 홍주읍성이 그나마 제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 옛 지도엔 없는 남문을 가파른 언덕에 세운 뜻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대나무처럼 곧은 절개와 의리, 충의가 오래된 성벽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오래된 성 돌이, 따스한 봄볕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고 있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16297&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
    2025-04-06 22:14
    가)
    내 몸보다 대의 앞세워 목숨 건 '참 보수' 이 사람, 달리 보인다
    허균도 직에 오르지 못한 항일과 절의의 고장... 홍주읍성과 두번의 항일의병
    이영천(shrenrhw)
    25.04.06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봄바람이 간지럽다. 홍주 가는 길이 뭔지 모를 신명에 살짝 달뜬다.
    희망, 새로움, 설렘 같은 정취는 봄이란 계절의 전유물일까.
    길에서 풍운아 허균(許筠)이 떠오른다.

    내자시정에 임명된 1607년,
    홍주목사에 오르려 요로에 청탁했던가 보다.

    홍주 출신인 스승 이달(李達)의 영향이었을까.

    예로부터 글 잘하는 이의 몫이었으니, 자부심 가득한 그도 내심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벗 '이안눌'의 차지였고, 허균은 부끄러움에 시 한 수를 남긴다.

    홍주 고을은 예로부터 글 잘하는 신하를 불러 썼으니 洪州自古用詞臣(홍주자고용사신)

    시인 소세양과 정사룡 이름이 그중 가장 뛰어났네. 蘇鄭詩名最絶倫(소정시명최절윤)
    검은 인 끈이 오늘 아침 이안눌에게 돌아갔으니 黑紱今朝歸子敏(흑불금조귀자민)
    자잘한 재주는 처음부터 남들보다 못하다네. 謏才元是不如人(소재원시불여인)
    乞洪陽不得而子敏爲之(걸홍양부득이자민위지) (허균평전. 허경진. 돌베개. 2002. p210)

    얼마나 살기 좋은 고을이었으면 직을 탐냈을까.
    탄핵과 모함에 수도 없이 관직에서 쫓겨나기를 되풀이했어도, 홍주목사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만은 시로 남겼으니 말이다.

    홍성 나들목을 벗어나자, 졸린 봄 햇살이 아지랑이를 피워올리는 와룡천 건너로 기와집이 번듯하다. 4월 햇살에 검은 지붕 선이 돋보이고, 낮은 산에 기댄 집에선 강한 기운이 뻗쳐온다. 그런데 남향이 아닌 북서향이라니?


    이곳은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항일무장투쟁의 본산이다.
    19세기 조선을 뒤흔든 안동김씨 세도가 저 지붕 선에 아직도 남아 있을까?
    어린 시절 노비를 해방하고 전답을 나눠줬다는 김좌진 장군 생가다.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한 김상용의 11대손이다. 내포 지역이 올곧은 보수의 본향이란 사실을 저 검은 기와가 묵언으로 알려주는 듯하다.

    오늘날 타락한 그런 극우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에 재산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질서와 법률, 전통과 정의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긴 '참 보수'였다.

    김좌진은 조카뻘인 김복한에게 글을 배웠다.
    김복한이 누구던가?
    죽으면서 '일본의 패망을 알려달라'는 유언을 남긴 지사다.

    을미 의병과 여하정

    홍주아문을 지나면 동헌 안회당이다.
    동헌 뒤 네모난 연못 안에 네모난 섬이 있고, 그 위에 육각정이 섰다. 절로 시흥이 돋는 여하정(余何亭)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이던 1896년 이승우가 세웠으니, 나라의 앞날과 백성의 안위를 걱정한 우국충정이 이름에 서렸을까?
    '나(余)는 어찌(何)할 것인가?'라는 매우 철학적인 뜻을 담은 이 정자는 그러나, 이름에 걸맞진 않았나 보다.

    승지였던 김복한의 낙향은 동학혁명이 배경이다.
    청일전쟁과 조선을 악용할 명분을 찾던 일본이 1894년 7월 경복궁을 점령한다.
    꼭두각시 정권을 내세워 개혁을 강요하며 내정을 쥐락펴락하자, 분개한 김복한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것이다.

    이듬해 왕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당하고, 뒤이어 단발령이 시행된다.
    상투를 자르라는 말은 선비들에게 목숨을 내놓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우국지사이던 김복한이 의거를 일으킨다.
    1차 홍주 의병이다.
    무장봉기였으되, 홍주성을 손쉽게 함락한다.
    1896년 정월 초하루 수백 의병이 무혈입성한다.

    이어 정월 대보름과 이튿날 청양과 정산 등지에서 각 수백 명이 합류함으로써 기세를 올린다. 김복한이 대장으로 추대된다.
    홍주목사 이승우도 김복한의 설득에 의병에 합류, 그야말로 민관이 하나가 되어 일본군에 맞선 셈이다.


    그런데 이는 속임수였다.
    이승우가 배신하여 순검대를 끌어들인다.
    김복한 등 의병 주요 인물들을 체포, 투옥함으로써 결국 강제 해산당한다.
    이런 관리가 나라를 위해 어찌할까를 고민했다고 생각들지는 않는다.
    그에겐 모름지기 자신의 안위가 우선 아니었을까?

    고종실록 1896년 4월 9일 기사에 김복한을 비롯한 홍건·이상린·송병직·안병찬·이설을 벌하자는 법부 의견에, 고종은 특별사면하여 방면하는 아량을 보인다.

    서문 수로, 조양문과 병오 의병

    고을 위상에 어울리는 성문의 위용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나라는 누란의 지경에 빠져버린다.
    을씨년스런 그해(1905) 외교권이 강제로 일제에 찬탈당한다. 을사늑약이다.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발각되어 김복한을 비롯한 지사들이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다.
    이 고문으로 김복한은 평생 불구로 살아야만 했다.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또 다른 지사가 있었다.
    가산을 털어 무기를 마련한 민종식이다.
    '광수장터 봉기'라 부르는 몇 번의 홍주성 공략에 말미를 찾지 못한다.
    무기 열세를 느낀 그는, 소수 병력의 거사로는 불리하다는 걸 깨닫는다.


    1906년 4월 보령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라도 여산·진안·장수·용담·무주 등을 돌며 병력을 모은다.
    기세를 몰아 청남·서천·남포·보령 등을 점령하며 홍주로 향한다.
    홍주 남산에 이르러 5천 의병이다.

    일본군이 지키던 홍주성을 공략한 날이 5월 19일 장날이다.
    성문이 굳게 닫혀 공격이 여의치 못했다.
    이에 날랜 의병 셋을 서문 수로를 통해 잠입시킨다.
    이들이 안에서 성문을 열자 성이 함락된다.
    그러나 성안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이미 달아나고 없는 상태였다.


    성을 함락시킨 민종식은 부대를 재편하여 적의 반격에 대비한다.
    일본군이 이튿날부터 공격을 개시한다.
    28일까지 여섯 차례다. 소총과 화승총의 싸움이다.
    월등한 화력의 일본군에 맞서 열흘 가까이 성을 지켜낸다.

    당황한 일제는 한양에서 1개 대대를 급파한다.
    첨단 무기인 기관포와 폭약, 기마대까지 딸려 보낸다.
    5월 31일 새벽 2시 30분, 일본군이 조양문에 폭탄을 터트리고, 시가전이 벌어진다. 성안이 쑥대밭으로 파괴된다.
    날이 밝은 7시 30분까지였다 하니, 의병의 분전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천여 명이 학살당하고 수백 명이 포로가 된다.
    홍주성의 이 싸움은 1907년 이후 들불처럼 일어난 전국적 항쟁의 불씨였다.
    1909년 일제가 잔악한 살육을 벌인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이어진다.

    어느 식목일, 학생들이 나무를 심는 과정에서 당시 사상자 유해가 발견된다.
    이들 유해를 모아 만든 의사총이 읍성 가까운 언덕에 자리한다.
    전투 후 사상자들을 흙으로 덮었음이 밝혀진다.
    참으로 잔인한 족속이다.
    죽지 않은 부상자도 적잖이 생매장되었을 터다.


    이때 일본군을 찬양하는 비석을 이완용이 읍성에 세운다.
    현명한 백성들이 그 비석을 허물고 의병을 기리는 비석으로 바꿔 놓는다.

    대마도에 끌려간 9인의 의병 대표자들이 갖은 고초를 겪다 4년 만에 가까스로 석방된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16297&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
    2025-04-06 21:36
    문형배 안부인사에, 김장하 선생 "단디해라 했다"
    파면 선고 뒤 '김장하 장학생' 문형배 대행 이야기 회자 ... 국회 청문회 발언 다시 관심
    윤성효(cjnews)
    25.04.06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창원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긴장 속에 차량에 설치된 대형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속에서는 문형배 헌법재판소 소장권한대행이 12·3 불법비상계엄을 일으킨 윤석열 전 대통령의 헌법 위반 사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문 대행이 한 마디 할 때마다 시민들 속에서, 특히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맞어! 맞어!'하는 소리가 연달아 나왔다.
    넉 달 동안 광장과 거리에서 '윤석열 파면'을 외쳤던 시민들은 문 헌법재판관이 읽어내려가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 내용에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오전 11시 22분. 문 대행이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고 하자 시민들은 벌떡 일어나 부둥켜 안거나 소리를 지르며 "국민이 이겼다"라고 외쳤다. 눈물을 흘리는 청년들도 많았다.

    흥분 속에 기쁨을 만끽하던 무리 속에서 몇몇 사람들이 말했다.
    김영만(82) 열린사회희망연대 고문은
    "김장하 이사장께 고맙다고 인사해야 할 거 같다"라고 했다.
    민예총(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이사장을 지낸 고승하(77) 작곡가는
    "진주 김장하 선생께 전해달라. '똘똘한 문형배 헌법재판관을 키워주어 고맙다'라고 말이다"라고 했다.

    잠시 뒤 광장을 나오면서 김장하(81)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께 전화를 드렸다.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파면'이라고 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셨는지 물었다.
    김영만 고문과 고승하 작곡가가 했던 말을 전하자 김장하 선생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면서 "그랬나"라고만 대답했다.
    말씀을 아낀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핵 찬반 갈등 속에 문 대행이 겪었을 고민이나 마음고생을 함께 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통화에서 '단디해라'고 말했던 거 같다"

    헌재의 탄핵 선고가 늦어지면서 문 대행과 김장하 선생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더러 "김장하 이사장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냐"고 묻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12·3 불법비상계엄 이후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탄핵 관련해 말을 아꼈다.

    강연차 진주를 찾았던 김승환 전 전북도교육감과 3월 20일 같이 했던 식사 자리,
    부산 공연 하루 전날인 3월 28일 저녁 진주에 들렀던 이승환 가수와 함께 했을 때도 탄핵 관련 이야기가 나왔지만, 김 이사장은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올해 1월 새해 인사차 만났던 자리에서 여쭈었더니, 김 이사장은 "지난 연말에 문 대행하고 짧게 통화 한 번 했다. 연말에 안부를 전하는 휴대전화 문자가 왔는데 내가 답을 안했더니,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서 전화를 했더라. 탄핵 관련해 특별히 말은 없었는데 '단디해라'고 말했던 거 같다"라고 말했다.

    김장하 선생이 12·3 계엄 이후 진주에서 벌어진 시국대회에 한번 참석했던 적이 있다. 계엄 직후인 지난해 12월 6일 저녁 진주시청 앞에서 윤석열퇴진 진주시민모임이 열었던 '윤석열 체포 진주시국대회'였다.

    김 선생은 집회가 시작될 때부터 거리행진이 시작되기 전까지 촛불을 들고 앉아 있었다. 김 선생은 주최측에 소개를 하지 말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날 김 선생과 함께 했던 하정우 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경남본부 집행위원장은 "낮에 점심을 하면서 저녁에 집회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고, 댁에 모셔다 드렸는데 오후에 전화가 와서 시국대회에 가보자고 하셔서 모시고 갔다"라고 말했다.

    그는 "집회 중간에 추우니까 가자고 말씀을 드렸더니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이 정도 추위는 견뎌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라"라고 전했다.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사회에 갚으라"

    4일 문형배 헌법재판소 소장권한대행이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고 선고한 뒤, 김장하 선생을 함께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많은 사람들이 관련 글을 올리고 있다.

    문 대행이 2019년 4월 국회 청문회 때 했던 말이 이번에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대학 다닐 때 김 이사장의 장학금을 받았던 문 대행이 공식적으로 거론하기는 두 번 정도다.

    문 대행은 고등학교와 대학 다니는 동안 김장하 이사장의 장학금을 받았다.

    국회 청문회가 있기 전인 같은 해 1월 16일 경상국립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행사 때였다. 김 이사장의 생일날에, 그의 도움을 받았던 많은 시민들이 "김장하 선생님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연 행사였다.

    김 이사장과 늘 함께 하며 사회문제 등에 대해 고민해왔던 고 김수업(1939~2018) 경상국립대 교수(한글학자)와 고 박노정(1950~2018) 시인(옛 대표이사 겸 발생인)이 같은 해 세상을 떠나자,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 홍창신 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전민규 큰들문화예술센터 대표를 비롯한 여러 시민·사회·문화단체들이 김 이사장 몰래 행사를 준비했다.

    김 이사장께 '좋은 공연이 있다'고 해서 모시고 와서 시민들이 "고맙습니다"라며 인사를 드렸다.
    당시 부산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였던 문형배 대행이 그 자리에 함께 해서 울먹이면서 김 이사장의 도움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김장하 선생은 경남 진주에서 50여년간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다가 2022년 5월 문을 닫았고, 자신의 호를 딴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교육과 문화예술, 사회, 여성, 인권 등 분야를 지원했다.

    그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해 이듬해 명신고등학교를 세워 10여 년간 이사장으로 있다가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했고, 1990년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주주·이사로 참여했으며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신문)가을문예'를 지원했다.

    김 이사장은 2021년에 재단을 해산하면서 당시 남은 기금 34억 원을 경상국립대학교에 기탁했고, 평생 사회에 환원한 기부금이 수백억원에 이른다.
    그날 생일 때 있었던 행사에는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시민들이 참석해 마련했던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열린 국회 청문회에서 문 대행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경남 하동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업사로서 번 돈으로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국가에 기증하셨고, 수백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했으며, 형평운동기념사업회와 진주오광대 복원사업, 경상(국립)대학교 남명학관 건립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하여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하게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사회에 갚으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고, 저는 그 말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법관의 길을 걸어온 지난 27년 동안 한결 같은 마음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숭고한 의지가 우리 사회에서 올바로 관철되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것만이 선생의 가르침대로 우리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이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간직한 저의 초심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형배 헌법재판소 소장권한대행은 임기 6년을 마치고 오는 18일 퇴임한다

    댓글 1

  • 29
    tradbred (@tradbred)
    2025-04-06 19:44
    [교수논단] 부역자 처벌에 앞선 ‘국민의힘’ 정당해산
    반민특위의 실패를 복원할 절호의 기회
    배재대 명예교수 이규봉
    입력 2025.04.06

    마침내 ‘국민의힘’이 배출한 내란의 수괴 윤석렬 대통령을 탄핵했다.

    비상계엄 이후 탄핵 되는 과정에서 국힘당 주류는 반성하기보다는 내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많은 자들이 동조했다.

    과거 통합진보당은 단지 내란을 사전 모의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정당이 해산되었는데 이에 비추어 보면 내란에 직접 가담한 국힘당은 해산되는 것이 마땅하다.

    국힘당의 과거를 살펴보자.
    국힘당의 뿌리는 해방 후 자유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유당은 1951년 12월 정치적 기반이 없는 이승만을 당수로 하여 다수의 친일파와 반공주의자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당이다.

    정권 유지를 위해 온갖 불법을 저질렀고 반공을 빌미로 수많은 독립군을 탄압하고 민중을 학살했으며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그 결과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1961년 박정희는 5·16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1963년 자유당의 뒤를 이어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그 자신이 친일파인 박정희 역시 반공주의를 내세워 정적을 해치며 독재를 펼치다 결국 자신의 심복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은 전두환에 의한 민주정의당이 1981년 1월에 그 뒤를 계승했다.

    1987년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1988년 총선에서 과반 획득 실패로 정국이 불안정해지자 1990년 김영삼· 김종필과 함께 이른바 3당 합당을 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차기 대선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었다.

    1996년 총선을 앞둔 1995년에 신한국당으로 개명을 한다.
    신한당은 대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97년 11월에 한나라당으로 탈바꿈하였으나 정권 창출에 실패했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2011년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한 후 박근혜 중심으로 2012년 다시 재편된 정당이 새누리당이다.

    대통령이 된 박근혜가 탄핵당하자 2017년 자유한국당으로 개명을 하였다.
    2020년에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바꾸고 윤석렬을 영입하여 대통령을 배출하였다.


    이처럼 ‘국민의힘’의 역사를 살펴보면 집권자가 마음대로 만들고 그가 죽거나 실각하면 당의 생명이 끝나고 개명하는 작업을 반복적으로 하였다.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김영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후 이명박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배출한 정당이 내부에서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지 못하고 외부에서 정치력을 검정받지 못한 인물을 영입하면서 또 탄핵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명은 수시로 바뀌었으나 정당의 맥은 바뀌지 않았다.

    ‘국민의힘’과 맥을 같이하는 당들이 배출한 대통령의 면면을 정리하자면
    이승만은 혁명으로 쫓겨나 망명했고,
    박정희는 살해당했으며,
    전두환과 노태우는 각각 내란죄로 무기징역과 17년 형을 선고받았고,
    이명박 역시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고,
    박근혜는 탄핵당하고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윤석렬은 정당하지 않은 비상계엄을 선포해 탄핵당하였으며 내란과 외환의 죄까지 범했다.

    윤석렬이 저지른 내란과 외환에는 일반 민중을 제외해도 수많은 지식인이 동조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해방 이후로 제대로 된 역사 청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식민에 대한 역사 청산은 물론이고 분단, 냉전, 내전, 독재에 기생한 자들과 역사, 법, 문학과 같은 학문 분야에서 권력에 기생한 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
    권력에 기대는 기회주의자들이 늘 기득권을 유지하고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승만의 독재와 범죄에 협조한 자들,
    박정희의 쿠데타와 조작에 협조한 자들,
    전두환과 노태우에 부역한 자들,
    이명박의 범죄를 눈감아준 협조자들,
    그리고 박근혜의 뒤를 봐준 이들이 제대로 처벌을 받았는가?
    많은 자들이 사면 복권되고 그들이 받거나 횡령한 재물은 제대로 회수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과 이들의 후예들은 기회주의의 대가인 그 과실을 늘 유지했다.

    군대, 경찰, 검찰, 언론, 학계, 교육계 등에는 그 뿌리가 친일파부터 반공을 앞세워 이익을 얻는 자들의 후대가 아직도 그 이익을 누리고 있어 작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첫 계기는 바로 해방 후 반민특위의 철저한 실패이다.
    반민족주의자는 처벌되지 않고 독립을 위해 투쟁한 애국자들이 오히려 처벌되는 그러한 반민특위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 내란 사태에 협조한 자들에겐 조금의 온정도 베풀지 않고 법을 집행해야 한다.

    그 첫 순서가 바로 ‘국민의힘’ 정당해산이다.

    아울러 이번 내란을 기획하고 협조하며 동조한 모든 부역자는 누구든지 발본색원하여 철저한 처벌은 물론 그들의 행위를 백서로 남겨 교육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8572

    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
    2025-04-06 19:36
    (ㄴ)
    [조하준의 직설] 국민의힘은 대선 후보 낼 자격도 명분도 없다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4.06


    이번 탄핵 정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말 정권 재창출을 할 의사가 있었다면 70대 이상 노년층들의 표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윤석열과 거리를 두고 시대에 걸맞은 새 어젠다를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윤석열이 떠드는 색깔론, 종북몰이 공세를 그대로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아울러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하는 일부 극우 성향 10대, 20대들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마치 진짜 10대, 20대들의 목소리인 양 여기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하는 그 10대, 20대 청년들은 일베저장소 등 극우 커뮤니티에서 주로 활동하거나 수구 개신교 집단들이 이끄는 교회에 다니는 일부 일 뿐이지 그것이 전체 10대, 20대들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부들의 목소리에 심취해 전체를 못보는 오판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대다수 10대, 20대들은 아무리 본인이 보수 성향이 강하다고 해서 70대 이상 노년층처럼 반공 보수에 매몰된 그런 세대가 아니다.
    더군다나 민주 정부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30대, 40대들은 그런 '반공 보수'를 더더욱 싫어한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이들에게 매력적인 어젠다를 전혀 못 내놓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국민의힘은 더더욱 이번 대선에서 후보를 내어선 안 된다.
    관전자의 입장으로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다른 정당이 벌이는 '건전한 정치적 경쟁'이 무엇인지를 보고 배웠으면 한다.
    이렇게 수준 높은 정치를 한국 정치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수강생의 입장에서 보고 배우는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의힘이 국민들에게 진정한 반성의 의미를 보이는 유일한 방법은 윤석열을 출당, 제명시키고 대선에 후보를 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나름의 동정적 여론이라도 받을 수 있겠지만 기어이 후보를 내고 '이재명 네거티브'만 열창한다면 장담하건대 19대 대선 때 기록한 표차인 557만 951표 차보다 더 큰 격차로 패배하는 굴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8570

    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
    2025-04-06 19:31
    (ㄱ)
    [조하준의 직설] 국민의힘은 대선 후보 낼 자격도 명분도 없다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4.06

    이른바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 잔혹사'. 구속 5관왕에 탄핵 2관왕이다.(그래픽 출처=페이스북)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지난 4일 오전 11시 22분 12.3 내란 사태의 수괴 윤석열이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인용으로 임기 중 파면되며 이제 60일 이내에 조기 대선을 실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국민의힘은 끝까지 내란 수괴 배출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고 어떻게든 "이재명의 집권을 막겠다"는 야욕만 드러내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국민의힘은 대선 후보를 낼 자격도, 명분도 없다.

    윤석열이 파면된 이후 소셜 미디어에는 이른바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 잔혹사'를 정리한 그래픽들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이는 일찍이 탄핵 정국 때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비례대표)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언급한 바 있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이른바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등 8명이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윤보선,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 단 4명 뿐이고
    최규하는 어느 정당에도 소속된 적이 없는 유일무이한 무소속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그 8명의 대통령 중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까지 5명이나 구속되는 '구속 5관왕'이란 흑역사가 있다.

    그리고 이 '구속 5관왕'에 해당하는 인물들 모두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됐다.
    또한 박근혜와 윤석열은 아예 탄핵심판 인용으로 임기 중 파면됐기에 '탄핵 2관왕'이기도 하다.
    이 두 사람은 탄핵심판 인용 즉시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됐고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역시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며 모두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됐다.

    그 밖에 이승만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해 권좌에서 쫓겨났고
    박정희는 1979년 10.26 사태로 임기 중 암살당했다.
    사실상 김영삼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천수(天壽)를 누리며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온전하게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당 출신 대통령이 무려 5명이나 구속됐고 최근 배출된 대통령이 2명 연속으로 탄핵으로 임기 중 파면됐다.
    아울러 내란 수괴 역시 3명이나 배출됐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양심이란 것이 있다면 국민의힘은 절대 이번 조기 대선에서 후보를 내어선 안 된다.

    '구속 5관왕'에 '탄핵 2관왕'인 정당이 무슨 자격으로 또 무슨 염치로 대선에 후보를 내어 표를 달라고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국민의힘은 지금까지도 12.3 내란 사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를 밝힌 바가 없다.

    정말 이번 내란 사태에 반성이란 것을 하고 있다면 국회의 비상계엄해제결의안 통과로 내란이 진압된 그 직후인 12월 4일에라도 내란 수괴 윤석열을 출당, 제명시켰어야 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어떻게 했나?

    윤석열의 출당, 제명조치를 취하기는커녕 도리어 개별 의원들이 극우 목사 전광훈 등이 주도하는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해 내란 행위를 옹호하고 폭동을 선동하는 몰지각한 행태를 벌였다.

    아울러 4 : 4 기각설 등을 앞장서서 퍼뜨리며 국민들을 현혹시켰고 공공연히 윤석열의 직무복귀를 바라는 듯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란 특검법에 반대표를 던지고 거부권 행사를 종용하는 등 이번 내란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을 앞장서서 방해했고 마은혁 헌법재판관 임명 지연을 종용해 윤석열 탄핵심판을 지연시키려 갖은 수를 동원했다.

    이렇게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고 제 정권 지키기에만 골몰한 정당이 무슨 자격으로 또 대선에 후보를 낸다는 말인가?

    이미 내란 옹호 세력으로 전락한 국민의힘은 야당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후보를 내어선 안 되며 새 정부가 출범하면 위헌정당으로서 해산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헌법에 명시된 국체인 민주공화국의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정당은 이 땅에서 존재할 이유가 없는 정당이다.

    비록 위헌정당 해산이 현실화되면 무려 90곳 이상에서 재보궐선거를 치러야 하는 혼란이 발생하겠지만 그 혼란도 잠시 뿐이다.
    잠시의 혼란을 두려워해 미래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

    국민의힘은 이미 정상적인 정당으로서의 기능을 잃었고 한국 정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인 이익집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신들 스스로가 보여줬기 때문이다.

    구속 5관왕에 탄핵 2관왕이라는 이런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국민의힘 스스로가 남긴 것이다.
    국내 정치의 주류 세력이라면서 이런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남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들 스스로가 생각해 봐야 한다.

    전직 대통령이 무려 5명이나 범죄자가 되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고 최근 2명은 제 임기도 무사히 마치지 못했다는 것은 정당 내부 구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필자는 보수 정당 출신 대선 후보 중에서 '인물다운 인물'은 이회창 전 총재가 마지막이었다고 본다.
    비록 대선 때마다 운이 따라주지 않아 '대권과 가장 가까웠으면서도 멀었던 인물'이 됐지만 이회창 전 총재는 강직한 인물이었고 비록 필자가 다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정치적 철학과 소신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회창을 끝으로 그 당에선 정말 '인물다운 인물'은 실종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을 거치며 그 인물 수준은 갈수록 바닥을 쳤다.
    그나마 이명박은 유명한 기업인이었고 또 서울시장으로서 보였던 업적도 있었기에 나름대로의 능력치는 있었다지만 박근혜, 윤석열은 어떠했던가?

    박근혜는 단지 '박정희의 딸'이었다는 것 외에 그가 스스로 어떤 정치적 능력을 보여준 것이 없었다.
    그가 정계에 입문한 이래 '선거의 여왕'으로서 선거에서 연달아 당선됐던 것은 선친의 영향력이 컸지 박근혜 개인의 능력으로서 보인 것이라 하긴 어렵다.

    윤석열은 아예 검찰총장으로 있다가 바로 대선에 출마해 한 때의 시운을 잘 만나 그 자리에 올랐을 뿐이다.

    한마디로 정치적 능력과 경륜이 없는 인물들이 한 때의 시운을 잘 만나 대통령이 됐고 결국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올랐으니 제 임기도 다 못 채우고 파면돼는 굴욕을 당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함량미달의 인물들이 2번 연속으로 대통령이 됐다는 것은 당의 구조적 문제가 매우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필자가 생각하는 국민의힘의 구조적인 문제는 당이 매우 '늙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국민의힘은 '늙은 정당'이다.
    각종 여론조사 지표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국민의힘의 콘크리트 지지층은 70대 이상 노년층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독재정권 시절 반공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세대로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이 제대로 된 세대들이라 보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국민의힘은 박근혜 이후 갈수록 '반공 보수'의 입김이 거세졌고
    이번 윤석열 정부는 그 '반공 보수' 세력들이 일으킨 반동 행태 중 최악의 결과물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 70대 이상 노년층들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 보니 계속해서 저질스러운 색깔론,
    종북몰이를 가장 잘 하는 함량미달의 인물들이 대통령이 됐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불로불사의 존재가 아니며 누구든 수명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국민의힘의 든든한 콘크리트 지지층이었던 산업화 세대는 이제 '퇴장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그렇게 사라진 지지층을 벌충할 새로운 어젠다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댓글 1

    • 쪽지보내기
    • 로그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