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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하나라도 놓칠까봐 노심초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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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8-15 21:27
    독립운동가들은 왜 기생집에서 모였나? 대담했던 여인들
    [일제강점기 군산 기생조합과 권번 기생들의 활동 ①] 독립운동 숨은 조력자
    조종안(chongani)
    25.08.15


    ▲3·1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한 조선 기생들 ⓒ

    야만의 시대였던 일제 36년, 국가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독립 운동에 참여한 여성은 2000명을 웃돈다.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훗날 훈·포상 받은 여성 독립 유공자는 유관순, 권기옥, 김명시, 남자현, 김마리아, 박자혜, 황에스터, 조마리아, 정칠성 등 272명이다.
    백범 김구 모친 곽낙원 여사와 를 쓴 정정화 여사도 빼놓을 수 없겠다.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직업은 학생, 교사, 간호사, 회사원, 종교인, 기생, 이발업, 재봉업에서 평범한 주부까지 다양하다.
    지난 2018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린 제99주년 삼일절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당시 "독립운동은 애국지사만이 아니라 상인들은 철시 운동을 벌였고, 나무꾼, 기생, 맹인, 광부들까지 앞장서 참여했다"고 밝힌 바 있다.

    3.1운동 당시 많은 기생이 만세 시위에 앞장서 참여했다.
    옥고를 치른 기생도 많았다.

    그들은 국채보상운동 때(1907)도 패물을 내놓는 등 적극적으로 동참하였고,
    독립단체 정보원으로 활동하거나 독립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각종 출판물과 박물관, 기념관 등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군산에서 일어난 광복회원 '우리견 사건'

    전북 군산은 한강 이남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난 도시로 알려져 있다.
    군산 기생들도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구전을 통해 전해진다.

    3.1운동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1920년대 초, 군산에 온 광복회 회원들이 친일파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된 사실이 신문과 책자, 문헌 등에서 발견된다.


    ▲광복회원 우리견(본명 '우재룡') 체포 소식 전하는 1921년 6월 11일 치 기사 ⓒ 동아일보 기사 갈무리


    "장승원(張承遠)을 총살한 광복회원 우리견(光復會員 禹利見)
    최근에 군산 지방에서 운동 중 4년만에 경기 경찰부에 체포" - (현대어로 수정)

    1921년 6월 11일자 기사 제목이다.
    기록에 따르면 '광복회'는 1915년 대구에서 창립된 '무장투쟁 항일결사체'였다.
    회원은 200여 명.
    그들은 친일파 처단, 일본 헌병대 공격, 현금 수송차 탈취, 일본인 금광 습격 등의 무장 투쟁을 펼쳤다.
    1916년에는 각 도와 만주에까지 지부를 설치하는 등 전국에 조직망을 갖춰 3.1운동과 의열단 창단 밑거름이 된다.

    기사 제목에서 '장승원'은 경상도에 거주하는 인물로 지휘장이자 군자금 모집책인 '우리견' 요구에 불응하다 총살 당한 친일파 부호였다.

    '우리견'은 우재룡의 가명이다.
    그는 우경옥, 김재수, 김재서 등의 가명을 사용했으며, 의병대장, 광복회, 주비단 등의 독립 운동 단체를 조직, 각지로 군자금을 모집하러 다녔다.


    ▲우재룡 선생 ⓒ 대구경북연구원,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1921년 봄 우재룡은 군산항에 잠입, 청년단체 맥을 통해 부호들을 방문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으나 그해 5월 29일 경기도에서 파견 나온 왜경에게 체포된다.

    당시 신문은 "(왜경 앞에서) 우리견의 행동은 자못 씩씩하여 조금도 굴하는 빛이 없었으며 다만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잡힌 것이 큰 한으로 분개할 뿐이라 했다"고 전하였다.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 도운 조선 기생들

    2021년 8월 '대구경북연구원'과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에서 펴낸 책 )에는 군산 내항에서 왜경에게 체포된 우재룡(일명 우리견)과 광복회 활동 상을 자세히 다루고 있어 눈길을 끈다.

    놀라운 점은 군산 한호예기조합(漢湖藝妓組合)과 기생 세 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래는 책(39~41쪽)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책 표지 ⓒ 대구경북연구원,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광복회원으로, 유일한 여성 회원이지만 잊혀진 인물이 있다.
    바로 경성(서울)의 어재하(魚在河)이다.
    비록 기녀의 신분이지만 200여 명의 회원 가운데 나름의 역할로 일제 재판 기록에 등장한다.(중략) 어재하의 인사동 집과 어재하와 관련 있는 남대문 밖 남문여관은 광복회원들이 모이는 장소로 활용된 점은 예사롭지 않다.(중략)"

    "어재하처럼 오송월(吳松月)과 강국향(姜菊香)도 기생이지만 광복회원의 활동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한 여성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오송월 역시 어재하처럼 권영만의 예심신문 조서 등을 통해 등장한다.
    경성의 종로통 청년회관 뒤의 오송월 집은 광복회원의 거처 겸 연락 장소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중략)"

    기생 어재하는 1894년생으로 추정만 할 뿐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재판 기록과 증언, 단서 등을 통해 그의 광복회 활동은 평가 받을 만하다고 책에 적혀 있다.
    1917년 9월(음력) 광복회 지휘장 우재룡이 박상진 총사령과 만주에서 온 손일민과 충청지부 소속 장두환 등이 모였음이 확인되는 등 서울 인사동 어재하의 집이 광복회원들의 활동 거점이었고 남문여관은 광복회원들이 모이는 비밀 장소로 사용됐다는 것.

    어재하 집은 만주로 떠나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송별 장소가 되기도 했다.
    김재풍의 에는 "만주에 양병 학교를 건립하여 전사를 양성키로 백방으로 운동하던 중 동년(1917) 8월경 경성 남문 밖 남문여관 어재하 방에서 김좌진과 모임을 갖고 6만 원을 최준에게 의뢰하고, 여비 약간은 어재하가 제공하여 김좌진을 만주로 보내 양병학교 경영을 착수케 하고 전별시(餞別詩) 한 수씩을 지었다"라고 적혀 있다.

    오송월 집에서도 광복회 박상진 총사령과 우재룡, 권영만 지휘장, 김동호 강원도 지부장 등 핵심 간부가 자주 모였단다.
    이는 비밀 유지가 보장돼야 가능했을 것이니 이곳도 어재화의 집처럼 비밀 회합을 위한 건물이었을 것이다.
    오송월도 광복회 회원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변 안전과 비밀을 지킴으로써 그 집은 안전한 공간으로 애용됐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군산 한호예기조합과 기생 강국향


    ▲기생 강국향, 형사 최기배, 김병순 세 사람이 창평에 머물고 있던 우재룡을 택시에 태워 군산까지 안전하게 안내했다는 대목(붉은 줄) ⓒ 발췌


    강국향은 1918년 광복회가 왜경에 의해 와해되고 3.1운동을 계기로, 해외로 피했던 회원들이 귀국하면서 제2기 광복회 활동이 재개될 때 우재룡이 주비단(籌備團)을 조직, 전북 군산과 충남 일부 지역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할 때 군산에서 만난 한호예기조합 소속 기생으로 등장한다. 이때 우재룡은 강국향과 사업가 백운학의 도움으로 고등계 형사 최기배, 김병순 등과 결합할 수 있었다.

    군산에 도착한 우재룡 일행은 한호예기조합에 근거를 두고 활동한다.
    최기배와 김병순은 일제 경찰 신분으로 광복회에 포섭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에 도움을 준다.

    두 경찰은 우재룡 일행이 지역 부호들을 만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가 하면 중국 상해에서 광복회로 전달되는 무기 반입을 돕는 등 회원들이 전북 지역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강국향이 비밀 장소 제공과 연락 거점 역할, 고등계 형사와의 만남 주선 등 광복회 단원들의 독립자금 모금 활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일조했음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재룡이 창평의 박홍주 집에 머물고 있을 때도 강국향은 최기배, 김병순 형사와 함께 차를 타고 달려가 우재룡을 태워 군산까지 안전하게 안내했다는 것.

    우재룡의 에는 그가 3·1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를 시도할 때, 권영만, 이재환, 안종운, 소진형, 임계현 등과 군산에 도착, 한호예기조합 기생 강국향을 만난 사연이 적혀 있다.

    강국향은 의(義)를 실천한 기생, 즉 한국 독립운동의 숨은 조력자이자 의기(義妓)로 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참고문헌]

    (2021), 디지털달성문화대전, 디지털군산문화대전, 동아일보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56256&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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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8-15 20:58
    ‘지게차 괴롭힘’ 공론화, 누가 어떻게 이끌어냈나 보니 [사람IN]
    〈시사IN〉이 주목한 이 주의 사람. 더불어 사는 사람 이야기에서 여운을 음미해보세요.
    광주·김동인 기자
    입력 2025.08.15
    호수 934


    손상용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 운영위원장. ⓒ시사IN 이명익


    7월24일,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가 공개한 영상이 온 나라를 발칵 뒤집었다.

    영상에는 스리랑카 출신 한 외국인노동자가 벽돌 화물 더미에 비닐 래핑으로 결박된 채 지게차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전남 나주의 한 공장에서 지게차 운전자는 화물을 들어올리며 피해자를 괴롭혔고,
    동료들은 웃으며 이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영상이 공개되자마자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페이스북을 통해 진상규명을 지시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 영상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와 괴롭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데에는 외국인노동자 인권 문제에 대해 꾸준히 구조적 개선을 요구해온 지역 네트워크의 역할이 컸다.

    손상용(51)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 운영위원장에 따르면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경로는 다음과 같다.
    한국어가 서툰 피해자가 수소문 끝에 대구 성서공단노조 스리랑카 커뮤니티와 연락이 닿았고, 괴롭힘 장면이 담긴 영상을 제보했다.

    사건을 파악한 성서공단노조에서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에 피해자 지원을 요청했고,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는 곧장 영상 속 괴롭힘 문제에 대한 팩트체크를 진행하고, 피해자 지원 절차를 마련했다.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가 공개한 영상에는 외국인노동자가 벽돌 화물 더미에 비닐 래핑으로 결박된 채 지게차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전남이주노동자인권네트워크 제공


    사건 제보를 받은 외국인노동자 커뮤니티, 지역을 넘나드는 연락을 통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전국적인 네트워크, 그리고 지역에서 꾸준히 이주노동자의 인권 문제를 지적해온 지역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건의 파장이 워낙 큰 탓에 폭로 일주일 만에 지자체와 주무 부처가 허겁지겁 설익은 대책과 지원을 내밀고 있다.

    그러나 손상용 위원장은 오히려 이번 사건을 통해 행정관청 간 엇박자가 드러났다며 “컨트롤타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라고 말한다.


    비수도권 지역에서 이주노동자는 이제 필수적인 존재다.
    이주노동자 없이는 산업도, 농촌도, 어촌도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다.

    한국 사회는 고용허가제와 계절노동자 제도를 통해 지역사회를 지탱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주노동자가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손 위원장은 컨트롤타워 외에 각종 의제별 보완도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고용·의료·주거·통역 문제 등 외국인노동자가 한국 사회에서 겪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다층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영상을 통한 충격 이면에 우리가 먼저 고쳐야 할 것들이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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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8-15 19:43
    ((꼭 반드시 읽어 봐야만 할 글))
    막 나갔던 윤석열... 독립군 장군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윤석열 정권의 역사 파괴] 홍범도 장군을 폄하한 윤석열 정권
    김종성
    25.08.15


    윤석열 정권의 국방부가 일으킨 쿠데타는 1건이 아니다.

    윤 정권의 국방부 장관은 총 3명이다.
    김용현 장관의 전임자는 이종섭과 신원식이다.
    두 사람은 국군의 정통성과 관련된 역사 쿠데타의 장본인들이다.

    이종섭·신원식 두 장관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영웅인 홍범도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 경내에서 철거하고자 했다.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소련 경내로 밀려 들어 간 이력을 근거로 홍범도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며 육사에서 밀어내고자 했다.


    이 시도의 본질은 독립군을 배제하고 국군의 정통성을 재편하는 데 있었다.

    흉상 논란이 절정에 달한 시점인 2023년 8월 28일,
    국방부는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이라는 글에서 "육사의 전통과 정체성, 사관생도 교육을 고려할 때" 홍범도 흉상은 부적절하다고 밝혔다.

    육사의 정체성은 곧 국군의 정체성이다.
    독립군 장군인 홍범도가 국군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는 논리는 윤 정권이 육사에서 치우고자 했던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홍범도로 대표되는 독립군들에 대한 윤 정권의 싸늘한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독립군의 정통성을 부정한 윤 정권

    1945년 1월 15일에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고 이는 동년 6월 15일에 조선경비대로 개칭되고 1948년 8월 15일에 국군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군 출신보다는 친일 군인 출신들이 좀 더 주도적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항쟁이 그달 27일에 실패한 뒤로는 국군에 대한 친일파의 장악력이 한층 공고해졌다.

    윤 정권을 떠받치는 극우세력은 이 같은 사실관계를 떠올리며 '독립군이 어떻게 국군의 뿌리인가'라고 말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친일 군인들이 힘을 발휘한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지만,
    그들을 중심으로 국군의 정통성을 세울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또 다른 현실임을 간과한 결과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후원을 받는 친일세력이 이끌어온 나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친일반공정권들이 걸핏하면 비상계엄을 발포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대중이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중은 일제와 친일반공정권들에 짓밟은 독립군들을 존경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독립군에 있다는 것이 한국인들의 확신이다.

    그것이 국민정서이기 때문에 친일반공정권들은 이 부분만큼은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1948년 이후의 역대 헌법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3·1운동에 있다고 선언했다.
    항일 독립운동이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인정한 것이다.

    친일세력이 지배하는 국가의 헌법이 이처럼 반일적·항일적인 것은
    '명분은 대중이 쥐고 실권은 친일파가 쥐는' 모순적인 동거관계의 산물이다.

    친일파와 합작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광복군 참모장 출신인 이범석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에 임명했다.
    국방부 군사(軍史)편찬연구소가 발행한 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은 건군의 방향을 설정함에 있어서 '군의 정신은 광복군의 독립투쟁정신을 계승한다'고 천명하여 건국이념인 독립정신과 자주독립국가 재건에 대한 역사적 소명의식을 건군정신으로 계승하고자 하였다."

    친일정권 대통령인 이승만은 독립군 출신을 초대 총리 겸 국방부 장관에 임명하고,
    초대 국방부 장관은 국군의 정통성이 독립군에 있다고 선언하고,
    국방부의 사관(史官)들은 이승만의 인사조치와 이범석의 선언이 갖는 의미를 위와 같이 기록했다.

    독립군을 지지하는 국민정서를 존중하지 않고는 대한민국을 운영할 수 없기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런데 윤 정권은 동거관계에 손을 댔다.

    표면상으로는 흉상에 손을 대면서, 본질적으로는 동거관계에 손을 댔다.
    친일반공세력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대한민국 명분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일이었다.

    이는 국군의 정통성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반(反)대한민국 쿠데타다.

    이 쿠데타의 시동을 건 것은 국방부장관이 되기 이전의 신원식이다.
    2022년 10월 24일, 국회 국방위원회 여당 간사인 그는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홍범도를 소련과 엮으면서 "굳이 흉상을 세우고 육사에 만들라고 했는지"라며 "굉장히 의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다음 달, 육사는 '국회 지적사항'이라는 이유로 '교내 기념물 재정비 사업'을 추진했다. 그런 뒤 교내 흉상들을 독립기념관이 받아줄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절차에 착수했다.

    육사가 홍범도 장군 등을 학교 밖으로 내보낼 방법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외부에 노출됐고, 그런 뒤인 2023년 8월 하순부터 윤 정권은 홍범도를 노골적으로 박대했다.

    그달 25일에는 육사가 철거 당위성을 주장하는 입장문을 발표했고,
    이종섭 장관이 국회에서 동일한 입장을 개진했다.
    28일에는 국방부도 거들었다.
    국방부는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개칭 필요성도 함께 거론했다.

    29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지원사격을 했다.

    이날 그는 국무회의에서 흉상 이전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독립기념관으로 옮기는 방안을 거론했다.
    30일에는 한덕수 총리와 조태용 안보실장도 거들었다.
    9월 3일에는 이철규 국민의힘 사무총장도 말을 보탰다.

    정권이 총체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런데 홍범도를 공격하는 시점이 고약했다.
    8월 22일은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날이고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날이다.

    한국인들이 경술국치에 민감해지는 8월 하순에 대통령·국방부·육사가 일치단결해 홍범도를 연타했다.
    윤석열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저격한 8월 29일에 홍범도를 저격하는 발언을 했다.


    막 나가는 윤 정권의 행보, 싸늘했던 국민들

    막 나가는 윤 정권을 국민들이 그냥 지켜볼 리 만무했다.
    2023년 8월부터 국민들과 역사단체들이 강렬한 분노를 표시했고,
    이는 윤 정권이 쉽사리 어쩌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8월 31일에 육사가 "(이회영·김좌진·지청천·이범석흉상은 두고) 홍범도 흉상만 철거하겠다"라며 나름의 타협안을 제시한 것도 그런 분위기의 영향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국방부가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또 다른 상황이 이 시기에 조성됐다.
    흉상 문제가 불거지기 직전인 2023년 7월 19일, 경북 예천군에서 호우피해 실종자를 수색하던 해병대 채 상병이 급류에 휩쓸렸다.
    윤 정권이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등의 책임 은폐를 시도했다는 의혹과 박정훈 해병대수사단장이 이에 맞서는 상황은, 이 사건과 연루된 이종섭 장관의 정치적 입지를 좁혀놓았다.

    이는 국방부와 육사가 흉상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감소시켰다.
    결국 이종섭은 홍범도를 어쩌지 못한 채 호주로 날아갔고,
    흉상 문제의 발단을 만든 신원식이 장관직에 앉았다.

    그러나 신원식에게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여론의 강렬한 비판 앞에서 어쩌지 못하던 윤 정권은 2024년 4·10 총선을 계기로 이 문제를 수습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달 30일, 복수의 군 소식통을 근거로 "육사가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 밖으로 옮기지 않고 육사 안의 별도 장소에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런 뒤 10월 17일에는 정형균 육사교장이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육사 내부적으로 여론을 수렴한 결과, 존치를 시켜야겠다는 의견이 많다"라고 발언했다.

    이런 상태에서 국방부가 그해 12월 3일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다가 실패했다.

    이는 홍범도 흉상 문제를 더 이상 언급조차 하기 환경을 조성했다.
    공수처가 윤석열을 체포하기 전날인 2025년 1월 14일, 그냥 놔두는 것이 유력한 방안이라는 육사 핵심 관계자의 발언이 보도됐다.


    이는 흉상 이전 계획을 백지화하는 의사표시로 해석됐다.

    흉상 이전을 추진할 세력이 12·3 내란으로 와해된 결과다.

    결국, 윤 정권이 홍범도 장군의 코털만 건드려보고 물러선 셈이다.

    그러나 코털을 건드린 것도 중대한 일이다.
    윤석열 정권의 시도는 헌법이 규정한 대한민국과 국군의 정통성을 허무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이 항일독립운동의 토대 위에 서 있음을 부정하는 시도였다.

    홍범도 흉상과 관련된 역사 쿠데타와 관련해서도 국방부와 국군과 육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56379&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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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8-15 19:26
    ((꼭 반드시 한 번은 읽어 봐야만 하는 글))
    남과 북, 그리고 중국마저 외면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주장] 광복절에 생각나는 약산 김원봉, 이제라도 명예 회복해야
    김성수(wadans)
    25.08.15


    ▲약산 김원봉(해방 후 모습) ⓒ 몽양기념사업회


    제80회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바로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의열단을 창설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했으며, 한국광복군 부사령관까지 역임한 그는 일제강점기 가장 활발한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공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1919년 중국에서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은 1920년대 일제와 친일파들이 가장 두려워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다.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친일파 암살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원봉은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았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문제는 해방 이후였다.

    김원봉은 1948년 김구(1876~1949)·김규식(1881~1950)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이것이 그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남한에서는 보수세력들이 그를 '월북자'로 낙인찍으며 배척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목숨을 걸고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운 그의 공로는 순식간에 묻혀버렸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에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욱 참혹한 것은 가족들이 당한 비극이었다.
    1950년 7월 초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경남 밀양의 김원봉 생가에 군경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표적은 김원봉의 네 동생인 김구봉·김용봉·김봉기·김덕봉이었다.

    당시 22세로 부산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막내 김구봉(1928~1950)은 아내가 임신한 상태에서 끌려갔다.
    아무런 죄목도, 재판도 없었다.
    단지 '월북자' 김원봉의 형제라는 이유만으로였다.

    이렇게 끌려간 네 형제는 밀양 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국민보도연맹원 300여 명과 함께 집단 학살당했다.

    이승만의 철저한 정치적 숙청


    ▲경남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1898~1958)의 막내 동생 김학봉씨가 생전인 2015년 8월 14일 오전 밀양시 삼문동 자택에서 약산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 연합뉴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뿌리째 제거하는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김구 계열과 김원봉 일가는 그 핵심 타깃이었다.

    김구는 1949년 6월 암살당했고, 김원봉의 형제들은 1950년 7월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이라는 혼란을 틈타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멸균실 수준'으로 철저히 제거해버린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좌익 전향자들을 계몽·지도한다'는 명목으로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전시에 적에게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예비검속해 대량 학살한 것이다.

    공식 통계만으로도 4934명이 희생됐지만,
    실제로는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까지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원봉의 동생들은 보도연맹원도 아니었지만, 단지 '빨갱이의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이 참극에 휘말린 것이다.

    김구봉의 아들 김용건씨는 2020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어떤 얼굴인지도 모른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아버지가 학살당하던 1950년 7월 어머니 배 속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원봉은 초기에는 국가검열상·노동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지만, 1950년대 중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8년 의문의 죽음을 맞은 이후 북한에서도 그에 대한 명예 복원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김원봉이 중국을 무대로 30여 년간 항일투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던 아나키스트 출신의 비주류 좌파라는 이유로 굳이 기릴 이유를 찾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렇게 김원봉과 그의 가족은 남한에서는 '월북자'로, 북한에서는 '반당 분자'로,
    중국에서는 '비주류'로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야말로 삼중고의 비극을 겪은 것이다.

    75년 만에 밝혀진 진실과 과제


    ▲밀양에 있는 의열기념관과 의열체험관. ⓒ 윤성효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오랫동안 금기시돼 왔다.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은폐작업은 군사정권 시대를 거쳐 민주화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하지만 1990년대 말 전국 각지에서 희생자들의 유해가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난 2009년 11월,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정부는 마침내 "국가기관에 의해 민간인이 집단 학살당한 사건"임을 공식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희생자들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했다.

    김원봉 집안의 비극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나 명예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김원봉의 경우 남북분단과 이념대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의 월북이라는 선택을 두고 여전히 찬반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일제강점기 동안의 독립운동 공로만큼은 이념을 떠나 인정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역사학자들은 김원봉을 독립운동가 재평가 1순위로 꼽고 있다.

    이념을 떠나 순수하게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2015년 영화 에서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는 대사가 큰 화제가 됐고,
    2019년에는 그의 출생지인 밀양에 의열기념관이 개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차원의 명예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원봉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그의 동생들이 당한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공식적인 사과나 명예회복 조치도 없었다.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이런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념과 체제를 초월해 순수한 애국정신으로 조국광복에 헌신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
    그리고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불의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사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국민통합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역사교육과 인권의식 제고가 필요하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동포를 적으로 규정하고 제거하려 했던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광복절을 맞아 우리는 묻는다.
    언제까지 약산 김원봉과 그 가족들을 비운의 희생자로 남겨둘 것인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에서 '빨갱이'로 몰려야 했고, 그의 형제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너무나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역사적 정의를 실현할 때가 아닌가?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5725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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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8-15 19:17
    도쿄 인생사진 '핫플', 그 다리에서 수류탄 던졌던 이 사람
    [리뷰] 광복절... , 이 책에 편안하게 압도당하는 이유
    이정환(bangzza)
    25.08.15


    ▲양근환, 김구, 박열(왼쪽부터). 1948년 경교장에서 함께 한 모습이다. ⓒ 독립기념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훌륭한 영화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AI가 내놓는 답이다.
    "단순한 영웅담을 넘어 인간적인 고뇌와 희생, 그리고 뜨거운 애국심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는 이 말,
    그만큼 많은 사람들 소감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영화 을 통해 안옥윤 지사(전지현 역)의 삶과 마주했을 때 소감이 그랬다.
    영화 에서 격렬하게 총격전을 벌이는 그 장면으로 김상옥 지사(박희순 역)를 접했을 때도 역시 그랬다.

    김종훈 기자가 새로 내놓은 (필로소픽)는 이런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이다.

    와 를 통해 중국 등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전한 바 있는 저자가 이번에 선택한 무대는 '하필', 일본이다.
    앞서 중국을 무대로 했던 이야기와는 또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양근환 지사의 경우만 봐도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일본 심장부에서 친일파를 처단한 이야기다.
    양 지사와 민원식이 1921년 3월 25일 마주쳤던 그 장소, 도쿄역 호텔 2층 14호실은 2025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은 지금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희미해 보일 뿐이다.

    그를 의열단으로 이끈 '직장 상사'의 유서


    ▲양근환 지사가 친일파를 처단한 도쿄역 호텔의 옛 모습. ⓒ thetokyostationhotel.jp

    저자가 전하는 양 지사의 삶은 드라마틱하다.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양 지사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창덕궁 경비부대에 있었으며, 또한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초의 여성 기자였던 최은희의 부친이 면천해줬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엘리트로서의 자질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양 지사가 거사를 벌인 상황 역시 '훌륭한 영화 소재' 그 자체다.
    자신을 유학생으로 소개하고 민원식(일제강점기에 시사신문 대표 등을 역임한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면담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쿄역 호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양 지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독립을 부르짖는데 어떻게 국내가 평온할 수 있겠냐는 양 지사,
    그 코앞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을 모두 폭도로 매도했다는 민원식.
    거사 직전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논쟁이었다고 한다.


    도쿄 한복판에서 의열단의 마지막 거사를 결행한 김지섭 지사의 삶도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다.

    책에 나오는 그의 얼굴은 천상 선생님의 그것.
    보통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일본어를 익혀 재판소에서 일했다고 한다.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던 그 삶을 바꾼 것은 '직장 상사'가 남긴 한 장의 유서.

    작가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이 한일합병에 분개해 자결하면서 남긴 '여운'에 김 지사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그 후 의열단에 가입한 김 지사가 일왕 왕궁 앞에 도착한 것은 1924년 1월이었다.
    일본인으로 위장했던 그의 품에는 폭탄(수류탄) 세 개가 있었다.
    불심검문을 받자 폭탄 하나를 던졌다고 한다.
    불발이었다.
    김 지사는 왕궁 앞 이중교로 내달렸다고 한다.
    다시 폭탄을 던졌지만 또 불발.
    현장에서 붙잡힌 그의 법정싸움은 더 영화 같다.
    김 지사는 "무죄를 선언하든지 사형에 처하든지 하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실로 개나 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소.
    이같은 사실은 일본 안에 있는 일반 일본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일이오.
    나는 이것을 한 번 알려주고 싶었소... (중략) 다시는 (일본) 관리배들에게 속는 일 없이 우리 함께 손을 맞잡고, 세계평화를 위해 싸워주기를 기대하였소."

    355만 9784원짜리 호텔, 그 방에 숨쉬는 '여운'


    ▲양근환 지사가 친일파를 처단한 도쿄역 호텔의 현재 모습. ⓒ 김종훈

    김 지사가 일본 사람들에게 조선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폭탄을 던졌던 그 곳, 이중교 전경 사진은 참 아름답다.
    많은 여행객들이 그 곳을 찾는 이유다.

    저자는 "구글 지도에 단 리뷰에 사람들이 반응할 때마다 알람이 오는데, 그 중 가장 반응이 뜨거운 장소가 바로 이중교"라고 전한다.
    실제로 이중교는 도쿄 여행 중 인생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핫플'로 잘 알려져 있다.

    그 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던 김 지사,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저자로서는 이중교를 마주하며 두 가지를 얻는다.

    직관적으로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이자, 동시에 그 아름다움의 역사적 여운까지 누릴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관광객이면서도, 이렇게 과거와 현재는 연결된다는 걸 경험하는 목격자도 되는 셈이다.

    그래서 저자는 매우 아쉬웠을지 모른다.
    양근환 지사가 친일파를 처단한 도쿄역 호텔, 그 방에 머무르려 했지만 포기했기 때문이다.

    "예약하기를 누르고 들어가는 순간 가격이 이렇게 나왔다.
    세금 포함 355만 9784원. 그랬다.
    도쿄역 호텔은 100여 년 전 그때나, 내가 답사를 진행한 2024년 세밑이나 최고급 호텔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최고급 호텔에 머무를 수 있는 이들은 한정적이다.
    그런 곳에 친일파가 머무르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항일'의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하게 만든다.

    독립운동가들이 싸운 상대는 적국이라는 추상이 아니라 최고권력자들이라는 실체였다는 걸 말이다.

    숙박을 포기한 도쿄역 호텔 앞에 선 저자가
    "그 날 양근환 의사는 어떤 마음으로 이 호텔에 들어간 것일까?"
    란 여운과 마주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압도적인 '0페이지'


    ▲'임정로드 4000km'와 '약산로드 7000km'의 저자 김종훈 기자가 새로 내놓은 책 '항일로드 2000km'. ⓒ 필로소픽


    저자로 하여금 이런 여운을 느끼도록 만든 장소, 일본 남단 가고시마부터 북단 미야기에 이르기까지 9개 지역 49곳에 이른다.
    책표지를 열자마자 보이는 그 경로는 보는 이를 압도한다.

    당대 세계적인 권력과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이 고뇌하고 희생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진짜 수학여행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즐거웠다."

    하지만 책을 통해 전반적으로 흐르는 정서는 엄숙함, 경건함 또는 비분강개 류의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편안함이다.
    저자는 윤동주의 시비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우지산 녹차 아이스크림을 꼭 먹어 보라고 권한다.

    일본 전통 풍취를 즐길 수 있는 교쿠센안 카페나 나가사키 온천에서의 하루도 추천한다. "진짜 수학여행을 떠나자"는 프롤로그 제목, 그대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는 2000km에 이르는 여정에 대한 소감을 정리한 에필로그에도 이어진다.
    애써,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 여행은 혼자 가도 좋고, 둘이 가도 좋고,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가면 더 귀하다"고 강조하는 정도다.
    그저 "그곳에서 알고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이야기들"과 잠시 마주치면 좋다는 것 뿐이다.

    하나하나 '훌륭한 영화 소재'가 될 수 있는 그 삶은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니까.
    그래서 더 귀한 우리의 이야기니까.

    이 책의 여운이 꽤 오래 가는 이유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57074&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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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8-15 16:37
    '명품사랑'이 빚은 김건희의 비극
    [이충재의 인사이트] 디올백 수수에서 시작해 반클리프 목걸이로 끝난 파멸의 시간...내면의 결핍에서 비롯된 명품욕, 권력형 부패로 변질
    이충재(h871682)
    25.08.13

    윤석열의 배우자 김건희가 결국 구속된 가운데 그의 '비극'이 지독한 명품사랑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김건희를 얽어맨 특검의 단초는 '디올 명품백 수수 사건'이었고,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도 명품 목걸이의 출처가 들통났기 때문입니다.

    특검 수사에선 그라프 목걸이, 샤넬 구두,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 등의 명품도 김건희 수수 리스트에 올랐습니다.

    김건희의 시작과 끝을 명품이 장식한 셈입니다.


    법원이 12일 구속영장을 발부한 핵심 사유는 증거인멸 우려로, 김건희가 나토 순방 당시 착용한 반클리프앤아펠 고가의 목걸이가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당초 김건희 측은 이 목걸이에 대해 "모조품으로 직접 구입한 것"으로 행방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모조품은 김건희 오빠의 장모 집 압수수색에서 발견되면서 수사가 미궁으로 빠지는 듯 했지만, 특검팀이 최근 서희건설로부터 진품을 구입해 제공했다는 자백을 받아내 급반전을 이뤘습니다.

    모조품으로 바꿔치기 한 사실이 입증되면서 김건희 스스로 증거 인멸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셈입니다.


    경호용 로봇개 사업자로부터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쉐론 시계는 김건희가 직접 명품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입니다.

    시계를 구매한 사업가는 윤석열 취임 직후 만난 김건희로부터 "시계를 구매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김건희가 자신이 차고 있는 시계를 보고 "외국에 나갈때 이런 종류의 시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건데, 사실상 뇌물로 달라고 요구한 셈입니다.
    시계가 발견된 장소도 김건희 오빠 장모집으로 이 역시 증거인멸 혐의를 입증하는 요소가 됐습니다.

    김건희의 명품사랑은 특검이 지난달 25일 윤석열 부부 자택에 대해 실시한 압수수색 영장에서도 확인됩니다.
    당시 압수물 목록에는 그라프 목걸이와 샤넬 가방, 인삼주 등 100여개의 품목이 적시됐습니다.

    그라프 목걸이와 샤넬 가방 등을 준비한 건 통일교 전 고위간부로,
    2022년 건진법사 전성배씨에게 "김건희 여사 선물이니 전해 달라"고 말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현재 실물은 확보되지 않았지만 구매 영수증이 확인된 점으로 볼 때 다른 장소에 은닉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특검 주변에선 통일교 측이 명품 선물을 계획한 것도 김건희가 명품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준비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김건희가 명품을 선호한다는 건 정권 초기부터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취임 며칠 뒤 윤석열 부부가 용산 대통령실에서 반려견과 함께 있는 사진이 공개됐는데, 당시 김건희 착용한 신발이 디올 제품이어서 관심을 끌었습니다.

    김건희의 뇌물성 명품 수수가 이뤄진 시점도 대개 윤석열 임기초입니다.
    최재영 목사로부터 디올백을 받은 것은 2022년 9월이었고, 반클리프와 그라프 목걸이, 샤넬 구두 등 수수 시기도 임기 첫해였습니다.

    윤석열 당선 이전부터 김건희의 명품욕이 컸고, 정권을 잡으면서 권력을 이용한 명품 소유 욕구가 더 강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김건희의 명품욕은 널리 퍼져있습니다.
    주요 외신들은 디올백 수수와 리투아니아 명품 편집숍 방문 등 명품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이를 앞다퉈 보도했습니다.

    '사치에 대한 명백한 사랑으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교된다'는 내용도 있었고, '한국의 퍼스트레이디, 50대의 스타일 아이콘'이라는 제목의 기사도 실렸습니다.

    일부 외신은 한국의 명품 구입액이 세계 1위라는 점을 부각하고,
    그 원인으로 '사회적 지위 과시 욕구'를 꼽는 분석 기사를 싣기도 했습니다.


    전문가들 가운데는 김건희의 과도한 명품사랑을 내면의 결핍이나 외모, 학력 등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찾는 시각도 있습니다.

    논문을 표절해 학력을 세탁하고, 경력을 위조해 교수 행세를 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을 쓴 크리스 라반 박사는 유명 브랜드의 가방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가방 자체보다는 자신에게 부족한 무엇인가를 명품 브랜드의 위력으로 메우고자 하는 '승인 욕구'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대통령 부인이 되고도 명품을 갈망했다면 김건희는 단순한 승인 욕구를 넘어 권력형 부패에 깊이 빠져 있다고 보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56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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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8-15 16:32
    권성동이 쏘아올린 '윤석열 당선무효'
    [이충재의 인사이트] 통일교 자금 제공 의혹으로 촉발된 윤석열 대선자금 수사... 쇼핑백 두 개, 현금 10억 추정
    이충재(h871682)
    25.08.14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이 통일교측으로부터 거액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대선자금 수사로 번질지가 초미의 관심입니다.

    통일교 전 간부 진술로 촉발된 이 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가 아직 초기 단계지만 본격적으로 파헤칠 경우 파장은 엄청날 거라는 게 법조계 안팎의 관측입니다.

    통일교 자금이 윤석열 대선 캠프에 흘러들어간 사실이 드러나면 대선 비용 반납은 물론 국민의힘 정당 해산 기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거라는 분석입니다.
    액수와 상관없이 불법자금으로 선거를 치뤘다면 당선무효 사유에 해당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권성동의 통일교 자금 수수 의혹은 두 건입니다.
    통일교 간부가 윤석열이 당선된 20대 대선 직전인 2022년 1월 현금 1억원을 건넸다는 것과 한 달쯤 뒤 권성동이 통일교 한학자 총재를 찾아가 큰 절을 하고 금품이 든 쇼핑백 두 개를 받아갔다는 내용입니다.

    특검팀은 통일교가 돈을 건넨 시점이 3월에 치러진 대선 직전이라는 점에서 대선자금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입니다.
    돈을 건넨 통일교 간부가 "윤석열 후보를 위해 잘써달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입니다.


    주목되는 건 한학자 총재가 권성동에게 줬다는 쇼핑백에 담긴 금액입니다.
    돈의 액수에 따라 자금 성격을 보다 명확히 규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조계에선 쇼핑백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5억 내지 10억원은 될 거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과거 뇌물사건 재판에서 5만원권 현금을 가방이나 박스, 쇼핑백에 담는 시연을 했던 상황으로 미뤄 짐작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를 기준으로 일반적인 크기의 쇼핑백에는 3억원~5억원을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계산이라면 쇼핑백 두 개에 담긴 돈은 10억원 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통일교의 대선자금 제공 의혹은 단순한 뇌물이 아니라 이권을 노린 조직적인 계획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통일교는 교인을 국민의힘에 입당시켜 윤석열의 대선후보 선출을 도왔다는 의혹도 받고 있습니다.
    알려진대로 통일교는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캄보디아 메콩강 개발사업, YTN 인수, 유엔 제5사무국 한국 유치 등 통일교 현안과 관련한 각종 청탁을 시도했습니다. 통일교 1인자인 총재까지 직접 나섰다는 건 교단 전체의 명운을 걸 정도로 윤석열에게 올인했다는 방증입니다.

    물론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한학자 총재가 직접 돈을 건넸다는 진술만 있지 이를 뒷받침할 물증은 아직 확보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통일교가 돈을 건넨 사실이 확인되더라도 이 돈이 대선 과정에 사용됐다는 점을 입증하는 건 또다른 문제입니다.
    대선 이후 불거질 수 있는 사법적·정치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선거캠프가 자금 조달 및 사용 내역에 대한 안전장치를 철저히 해놓았을 개연성이 큽니다.

    만약 특검이 윤석열의 개입 사실을 밝혀낸다면 '당선무효'형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법조계에서는 특검의 수사 의지가 강해 당시 후보인 윤석열까지 수사가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대선자금의 실체는 규명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특히 이번 수사가 윤석열의 친구이자 윤핵관의 핵심인 권성동이 직접 돈을 수수한 의혹이라는 점에서 과거 대선자금 수사보다 용이할 것이란 관측이 나옵니다.

    특정종교가 이권을 노리고 대선에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불법 정치자금을 뿌렸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전모를 규명해 엄단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습니다.


    특검 수사에서 불법 대선자금이 드러날 경우 국민의힘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불법 대선에 따른 선거비용을 반환해야 합니다.
    2002년 한나라당은 불법 대선자금이 드러나자 이를 변제하기 위해 여의도당사를 팔아 '천막당사'로 옮긴 전례가 있습니다.

    가뜩이나 국민의힘은 윤석열의 '도이치 발언' 선거법 위반 혐의로 수백억원의 선거비용을 토해낼 위기에 놓였습니다.

    금전적 피해 외에도 내란 가담 의혹과 관련한 정당해산 여론이 더욱 가열되는 계기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국민의힘이 간판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56384&SRS_CD=0000016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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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8-15 16:25
    시계 전달 사업가 “김건희가 대선 후원금 부탁…6명 모아서 냈다”
    사업가 서성빈씨 특검에 진술
    “김건희가 이들 명단 달라고 했고
    이후 대통령 명절 선물 보낸 걸로 안다”
    조해영 기자
    수정 2025-08-15

    김건희 여사에게 고가의 시계를 전달한 사업가 서성빈씨가
    “김 여사가 대통령 선거 당시 정치후원금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라고 민중기 특별검사팀에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씨는 김 여사 쪽이 당시 후원을 한 인사들의 주소 등을 물었고 이후 이들에게 대통령 명의 명절 선물이 보내졌다고도 밝혔다.

    서씨는 15일 한겨레에
    “대통령 선거 당시 김 여사로부터 후원금을 모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김 여사가 ‘상대 후보(이재명 대통령)보다 빨리해야 하니까 여기저기 아시는 분이 있으면 부탁드린다’라고 이야기했다”라고 밝혔다.

    서씨는 이같은 내용을 특검팀에서도 진술했다고 한다.

    서씨는 2022년 3월 치러진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게 후원금 최고 한도액인 1천만원을 후원 한 바 있다.

    서씨는 “6명 정도 모아서 후원금 낸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김 여사가 이들의 명단과 연락처를 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전달했다”며
    “이후 김 여사가 대통령 명절선물을 후원자들에게 보낸 것으로 안다”라고 설명했다.

    서씨는 전날 시비에스(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서도
    “주변 사람이 꽤 많아서 6천만∼7천만원 정도”
    를 모아서 (윤 전 대통령에게) 후원금을 냈다고 밝힌 바 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134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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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8-15 02:33
    ((꼭 한번 읽어 봤으면 하는 글))
    [b]
    한국과 닮은꼴, 역사는 종종 같은 장면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8월15일 한국과 우크라이나
    임상훈(anarsh)
    25.08.14


    2024년 하반기부터, 러시아는 점령지 방어를 강화하며 전선 안정화를 꾀했고,
    서방 내부에서는 '현실적 종전안' 논의가 시작됐다.

    이 흐름 속에서 젤렌스키 정부는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쟁 초기의 강경 메시지는 시간이 지나며 외교적 입지를 좁히는 족쇄가 되었고,
    결국 미·러가 단독으로 종전 구조를 설계하는 구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공식적인 초대 거부가 내려진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결정 과정에서 소외되는 '비공식 배제'가 굳어지고 있다.


    젤렌스키의 경우, 이승만처럼 동맹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돌출 행동으로 배제를 자초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급변하는 국제 환경에 맞춘 전략 수정과 메시지 전환을 미룬 결과,
    구조적 불리함이 고착화됐다.

    이는 '자초한 배제'라기보다 '적응 실패로 굳어진 배제'에 가깝다.

    결국 두 사례는 같은 형식 속에서 다른 본질을 보여준다.
    한쪽은 스스로 문을 닫았고, 다른 한쪽은 문이 닫히는 동안 변화를 시도하지 못했다는 차이다.


    1945년 얄타와 포츠담, 1953년 판문점, 그리고 2025년 알래스카.

    시공간은 달라도, 강대국이 설계하고 약소국이 밖에서 지켜보는 장면은 변함이 없다. 결정문 속 문장은 길고 세밀하지만, 그 문장을 쓰는 손은 언제나 힘 있는 쪽에 있다.

    당사국이 없는 회담장은 종종 전쟁터보다 냉혹하다.

    이 장면은 단순히 국제정치의 구조 탓만은 아니다.
    구조는 강대국에 유리하게 짜여 있지만, 그 틈새에서 발언권을 확보할 전략과 외교력은 결국 지도자의 몫이다.

    이승만이 자리를 스스로 걷어찬 것이나, 젤렌스키가 문이 닫히는 동안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 것 모두, 각자의 시대에서 배제를 굳히는 선택이었다.

    강대국이 마련한 테이블에 초대받기를 기다리는 전략은 언제나 위험하다.
    초대장은 필요할 때만 발부되고, 필요가 사라지면 가장 먼저 폐기된다.

    발언권을 잃은 자리에서의 침묵은 단순한 조용함이 아니라,
    결정이 내려지는 동안 바꿀 수 없는 운명을 지켜보는 무력감이다.


    역사는 종종 같은 장면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
    달라지는 것은 대사의 언어와,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뿐이다.

    그때마다 누군가는 안에서 줄을 긋고, 누군가는 밖에서 그 줄을 바라본다.

    펜을 쥔 적 없는 나라는, 결국 남이 그어놓은 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외교력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우연이 아니라 습관이 된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56948&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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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8-15 02:32
    ((꼭 한번 읽어 봤으면 하는 글))
    [a]
    한국과 닮은꼴, 역사는 종종 같은 장면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8월15일 한국과 우크라이나
    임상훈(anarsh)
    25.08.14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 참석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서기장.위키미디어 공용


    1945년과 2025년 8월 15일.
    시대와 무대는 달라졌지만, 말과 침묵이 맞서는 장면은 변함이 없다.

    강대국들의 이권 분배를 가리는 화려한 수사와 포장된 문장들은, 역설적으로 공허하게 울린다. 그 뒤에서 초대받지 못한 약소국의 강요된 침묵은 절박한 운명과 무력감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강한 울림을 남긴다.
    수사학에서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말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선택이며, 그 선택이 담는 의미는 종종 발언보다 오래 남는다.

    그러나 여기서의 침묵은 선택이 아니다.
    스스로 입을 다문 전략이 아니라, 발언권조차 박탈당한 채 강요된 침묵이다.
    그 부당하고 슬픈 침묵이, 역설적으로 더 깊은 울림을 만든다.


    80년 전, 한반도의 운명도 그렇게 결정됐다.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은 찾아왔지만, 그 방향은 이미 2월 얄타에서 강대국들 사이에 그려졌다.

    신탁통치 구상이 오갔고, 한반도 처리의 원칙이 물밑에서 합의됐다.
    그리고 다섯 달 후 포츠담에서는 "한국의 독립이 적당한 시기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문구가 선언문에 박혔다.

    해방을 맞는 순간에도 한국인은 회담장에 없었고,
    강대국들이 서로의 이익을 맞바꾸는 사이, 한반도의 미래는 지도 위 선 몇 줄로 나뉘었다.


    올해 8월 15일, 우크라이나가 그 자리에 서 있다.

    알래스카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종전, 휴전, 혹은 장기 대치를 결정할 협상에 들어간다.

    그러나 푸른색과 노란색의 국기는 그 테이블 위에 없다.
    가장 큰 대가를 치른 나라가, 그 미래를 결정하는 말에는 참여하지 못한 채, 테이블 밖에서 그 장면을 지켜봐야 한다.

    1945년 2월, 얄타의 혹한 속에서 미국·영국·소련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유럽전 종전을 앞두고 전후 질서를 설계하는 회담이었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러시아가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의 땅, 크림반도의 휴양지였다.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오늘 전쟁과 점령의 상징이 된 그곳에서, 한때 점령지였던 한반도의 해방이 논의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제 속 한반도는 중심이 아니었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밀려든 부차적 사안에 지나지 않았다.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 사이에서 오간 대화는 '해방'이라는 희망보다 '신탁통치'라는 관리 방안에 무게가 실렸다.
    한국인의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전후 한반도의 틀은 그 자리에서 이미 기울고 있었다.


    그해 7월, 포츠담에서는 일본의 항복 조건이 공식 문서로 다듬어졌다.
    포츠담 선언 제8항에는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문구가 포함됐다.

    그러나 '적절한 시기'는 언제인지, '자유롭고 독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했다.

    선언은 승전국이 패전국에 건네는 최종 통첩이었고, 그 안에서 한국은 한 문장으로만 존재했다.
    해방을 앞둔 한반도의 미래가 그렇게 모호한 문구에 의탁된 채, 주인 없는 결정문 속에 박혔다.


    신뢰를 무너뜨린 지도자가 '자초한 배제'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한국 전쟁 휴전 협정에 서명하는 유엔군 대표 윌리엄 K. 해리슨 중장과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 남일 대장.위키미디어 공용


    8년 뒤에도 똑같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는 전쟁의 총성을 멈추게 할 서명이 이루어졌지만,
    그 서명자 명단 어디에도 '대한민국'은 없었다.


    문서에 이름을 올린 것은 유엔군사령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었다. 전쟁을 치른 땅의 주인조차 부재한 채, 3년의 전쟁은 그렇게 멈췄다.


    1945년과 1953년, 두 장면은 서로 다른 전쟁과 상황 속에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당사국 없는 결정'이다.

    강대국은 설계하고 서명하며, 약소국은 결과를 통보받았다.
    회담장 밖에 선 자의 침묵은, 종종 전쟁터의 포성보다 더 깊고 오래가는 패배감을 남긴다.

    1953년 여름, 한반도는 전쟁의 파괴와 피로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휴전 협상은 이미 2년 넘게 이어졌고, 판문점에서는 매일같이 종전의 조건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그러나 협상 테이블의 구도는 처음부터 대한민국에 불리했다.

    유엔군사령부가 전선을 대표했고,
    북한은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함께 참여했다.

    강대국들이 전쟁의 향방을 좌우하는 구조 속에서, 한국 정부의 목소리는 애초부터 '대표된 당사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 불리한 구조를 바꿀 기회를 스스로 좁혔다.

    그는 휴전 자체를 반대했다.
    전쟁이 멈추면 분단이 고착화된다고 보았고, '북진통일'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이를 압박 수단으로 1953년 6월, 반공포로 약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미국과 유엔군사령부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조치였고, 동맹국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결국 미국은 휴전 협상에서 이승만을 완전히 배제하기로 했다.

    판문점에서 서명한 사람들은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조선인민군총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였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문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전쟁의 당사자가,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나라가, 종전의 문서에 서명하지 못하는 장면은 냉엄한 국제정치의 단면을 드러냈다.

    휴전 협상장에서 쫓겨난 이승만에게 미국은 다른 형태의 보상을 제안했다.
    그것이 1953년 10월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이 조약은 한국 안보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제도화했지만,
    동시에 휴전 체제와 분단 구조를 영구화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분단 고착화'라는 패배를 받아들였고, 군사적·외교적 안전보장을 얻는 것으로 체면을 유지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는 강대국과의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린 지도자가 맞이한 '자초한 배제'의 전형이었다.


    급변하는 국제 환경 '적응 실패로 굳어진 배제'


    ▲2017년 7월 7일(현지시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회담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5년 8월 15일,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마주 앉는다.
    의제는 단순하지만 무겁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전으로 끝낼 것인지, 휴전 상태로 둘 것인지, 아니면 장기 대치로 끌고 갈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다.

    이 회담 구도에서 우크라이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2년 반 넘는 전쟁 동안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나라가, 전쟁의 결말을 논하는 자리에 부재한 것이다.
    이 장면은 이미 70여 년 전 판문점에서 대한민국이 겪었던 일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그러나 이 부재는 단순한 구조의 산물만은 아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전쟁 초기부터 '영토 완전 수복'과 '군사적 승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국내 결속과 사기를 높이는 효과가 있었지만,
    휴전이나 중재의 여지를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와의 직접 대화를 추진하려는 시점에도,
    그는 강경한 전쟁 지속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서방 각국에서는 전쟁 피로감과 지원 축소론이 고개를 들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56948&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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