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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3-10-11 01:38[단내나는 삶] ‘이 편한 세상’에서 마주한 ‘8명의 노동자 죽음’이란 이 서럽고 더러운 세상
김정대 예수회 신부
발행 2023-10-10
2022년 1월 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었다.
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비웃듯, 불과 1년 반 남짓한 시간에 한 사업체에서 7건의 건설현장 사고로 8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산업재해가 발생했다.
산재 사망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 사업체는 다름 아닌 “콘크리드 유토피아”를 추구하며 ‘e편한세상’ 아파트 시공사로 더 많이 알려진 디엘이엔씨(구 대림산업)이다.
사망한 노동자들은 떨어지는 전선드럼(작업을 위해 긴 전선을 감아두는 도구)에 맞아 죽고, 기계와 구조물 사이에 끼어 죽고, 무너져 내린 작업대에 깔려 죽고, 작업대에서 미끄러져 떨어져죽고, 장비를 지지하던 지지대가 무너져 그 충격으로 넘어지며 건축물 철근에 머리가 찔려죽고, 지하 전기실 양수 작업 중 빠져 죽었다.
마지막 희생자는 지난 8월 11일에 신축 아파트 6층에서 창호 유리교체 작업 중 창호가 추락하면서 이를 잡고 있다 함께 떨어져죽었다.
그는 29세의 청년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고 가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청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던 강보경 님이다.
지난 9월 15일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에서 고 강보경 님의 어머니, 친누나, 외삼촌 등 유족과 노동시민사회단체 간담회가 있었다.
이 간담회에서 ‘고 강보경 일용직 하청노동자 사망 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했고, 시민대책위는 유족들과 함께 10월 4일 오전에 디엘이엔씨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투쟁을 선포하고 유족 입장문을 DL그룹과 디엘이엔씨에 전달했다.
사건 발생 후, 고 강보경 님의 유족들은 사고현장을 직접 보려고 하였으나 회사는 보여주지 않았고, 함께 작업했다는 동료의 연락처도 주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유족들과의 첫 만남에서 유족들의 상실감에 전혀 공감하지 않았고 오로지 사건을 신속히 무마하려는 듯 (산재인정 등에) 필요한 서류를 요구했다.
유족들은 회사의 이 산재 사망 사건에 대한 은폐 및 무마하려는 행위에 불쾌함을 넘어 분노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회사는 책임 있는 사람의 조문도 하지 않았고, 오로지 노무사를 통한 합의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고인의 누나는 기자회견장에서 회사가 보여준 태도에 대한 서운함과 억울함 그리고 분노의 마음을 회사 측에 이렇게 전했다.
“유족을 무시하셨습니다. 얼마나 멀기에 장례식장에 오지 못하셨습니까? 얼마나 바쁘시기에 뒤늦은 새벽에 근조화환을 보내셨습니까? 어머니께 직접 죄송하다고 말하십시오. 사회적 책임을 지시기 바랍니다.”
고인의 어머니는 회사 측에 유족 입장문을 전달하며 아들을 잃은 상실감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죽은 내 아들을 살려내세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라고 외치며 오열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슬픔은 인간의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더 큰 완전성과 더 작은 완전성 사이의 차이만큼의 상태를 잃어버려 생기는 슬픈 감정이 바로 상실감이다.
고인의 어머니는 그 차이를 다시 회복시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식이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겠는가?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그런 물리적 상실이 회복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책임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상실감을 이해받지 못하는 것, 즉 공감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사회기득권자들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목석같은 미성숙함과 잔인함을 본다.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행복한 삶으로부터 배제된 비정규직, 하청, 일용직, 이주노동자들이다.
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이념 아래 이 불안정 노동자들은 자본에 종속된 존재로 안전한 작업 환경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소모품처럼 대접받는다.
사회이념의 중심에 결코 다른 목표에 종속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인간다운 삶의 가치이다.
이 인간다운 삶의 가치는 누구에게나 존중되어야 한다.
배우지 못했기에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 가난하기에 값싼 저질 식품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차별이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절대적 존경이라는 본능적 통찰로부터 철저히 벗어난 사고이다.
이런 사고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과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산업재해가 집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생명의 가치가 보장되지 않은 이 사회의 미래는 무엇일까?
한 사회가 공동체에서 모든 개인의 인간다운 삶의 풍요로움과 가치를 망각한다면 그 사회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이런 사회는 각자도생이라는 철저히 이기적인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모든 개인의 가치와 인간적인 삶의 풍요로움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산업재해가 발생한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져야한다.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 피해에 대해서 보상하고, 그리고 재발 방지 약속을 대사회적으로 해야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이런 인간의 가치와 인간적인 삶의 풍요로움을 보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부와 사법 당국은 이런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과 가해자에게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한다.
이 중대재해처벌법이 기업 경영에 부담을 준다며 법을 개악하려는 움직임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편한 세상’은 디엘이엔씨가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https://vop.co.kr/A00001640474.html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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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3-10-10 02:52((꼭 반드시 읽어 봐야만 하는 글))
한미상호방위조약 70년, 5가지 불평등 개정해야
등록 2023-10-09
[왜냐면] 고승우 | 민언련 고문·언론사회학 박사
사진은 1954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배경과 필요성 및 추진방법에 관한 문서와 조약문 전문(좌측), 1954년 제네바정치회담을 전후한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미대통령간의 서신(우측), 제네바회의에 관한 유엔 16개국 공동성명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연합뉴스
지난 10월1일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미 정부 인사들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긍정평가하면서 이 조약보다 더 강한 동맹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약은 이승만이 1953년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하고 평화협정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으며 남한을 미국의 군사적 종속국이자 미군의 영구기지로 전락시킨, 지구촌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불평등 조약이라는 점은 침묵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필리핀·미국 상호방위조약, 미일 상호안보조약 등과 비교할 때 아래와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태평양 지역의 평화를 위해 집단 안보를 추구하게 돼 있다.
하지만 자국영토와 가까운 지역에 국한한 외국 경우와 달리, 태평양 지역의 범위가 매우 광범위해 자칫 주한 미군이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 실현을 위한 발진기지가 될 우려가 있어 개정해야 한다.
둘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반도에 무력충돌이 발생해 한미 등이 개입할 경우에도 유엔 안보리에 보고할 의무 등이 없다.
이는 일본·필리핀의 경우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군사적 개입은 유엔의 토의와 결정을 거치게 돼 있는 것과 차이가 있어 개정해야 한다.
미국이 자의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미국이 한국에 군사기지를 요구할 경우 한국은 허여할 수밖에 없고 이런 규정에 힘입어 평택 미군기지는 해외 미군기지 가운데 최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기지 오염문제도 심각하고 미군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지지 않고 있다.
반면 필리핀은 필리핀 군 기지 안에 미군기지가 들어설 수 있게 하는 등 주도권을 갖는 것으로 돼 있다.
일본도 미군 배치가 미국의 권리로 규정돼 있지 않다.
한국도 필리핀·일본처럼 미군기지 문제를 합리적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넷째,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무기한 유효하다고 돼 있지만 필리핀·일본의 경우 그 기한이 10년으로 돼 있다.
따라서 기한 만료 뒤 재협상 등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다섯째, 필리핀·일본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에 대해 수시로 협의할 수 있게 돼 있으나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그런 조항이 없는 것이 문제다.
미국이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에 이른바 안보를 담당하면서 기여했다고 하지만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군이 점령군으로 남한에 온 뒤부터 오늘날까지 미 국익을 최우선하는 과정이었다.
종전 이후 소련의 극동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남한에 진주했다.
미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자생적인 건국추진 기구를 일체 불허하고 해외 독립운동 세력도 개인 자격으로 입국토록 했다.
미국은 3년의 군정 기간을 통해 남한 내 군경을 주축으로 친미 세력의 확대를 시도했고 유엔을 통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 강행도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친미 정권의 수립이 목적이었다.
미국이 ‘애치슨 라인’을 선포한 것도, 6·25전쟁이 나자 유엔 깃발을 앞세워 남한에 군대를 파견한 것도 미 국익이 최우선이고 한민족을 돕는다는 것은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미국은 정전협정 뒤 평화협정 타결에 소극적이었다가 1950년대 중후반에 냉전이 심화하자 핵무기를 남한에 들여와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미국은 박정희·전두환 쿠데타 정권도 미 국익을 우선해 그 정통성을 인정해 주면서 평화협정 체결에 대비해 주한미군의 남한 영구주둔을 목표로 한 한미동맹을 강화했다.
오늘날 미국은 주한미군을 대중국 견제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사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경북 상주에 배치하고 북한에 대해 미국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한국 정부와 협의 없이 북한에 대한 선제 핵타격이 가능한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미국은 대북 핵공격 때 한반도가 쑥대밭이 될 정도로 파괴될 것이 뻔한데도 자국의 전략 추진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외교나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동지나 적은 없다.
미국의 군사적 세계 전략은 자국의 안보이익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고 다른 지역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하위 개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 중러의 대치국면에서 한반도가 자칫 희생양이 될 가능성도 우려된다.
20세기 초 미국은 가스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과 제국주의적 암거래를 통해 한반도를 흥정수단으로 삼았다.
세계 군사전략의 대상에 북한 핵과 미사일을 포함시키면서 한미일 동맹을 강조하는 미국이 중국, 러시아와의 큰 흥정이나 대결 상황에서 한반도를 엿 바꿔 먹기 식으로 이용할 가능성에 대해 눈감는 식의 대응은 안 될 일이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111425.html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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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3-10-10 00:14배려와 배제 사이
입력 : 2023.10.09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비 오는 날, 남대문이 있는 회현역에서 서울시청역까지 걸었다.
빗물에 쓸려 넘어질까 위태로운 내 처지를 닮은 목발의 고삐를 쥐는 것만으로 양손이 꽉 찼다.
어느 신호등 앞에 선 순간, 목발과 나의 처절한 관계를 비집고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까지 가세요? 우산 씌워드릴까요?”
민폐일까 죄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고, 상대는 용기 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신호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그 횡단보도 앞에 녹색불이 켜지는 순간까지 함께 머물렀고, 이내 그는 나와 방향이 맞지 않아 각자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흩어졌다.
헤어진 뒤로 잠깐 비를 더 맞기는 했지만, 우산 그늘 아래서 만끽한 휴식시간 덕분에 목발도 나도 다시는 위태롭지 않았다.
며칠 뒤 북토크를 진행하는 서점에서 한 시민이 물었다.
평소 장애인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혹여나 나의 친절이 동정으로 오해될까 두렵다 걱정했다.
그의 질문 앞에 나는 비 오는 날 우산을 함께 쓴 인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름 모를 장애 시민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게 배려의 마음으로 비추어질까 배제의 동정으로 비추어질까 걱정하는 것은 숱한 비장애 시민이 고민하는 물음이다.
나는 그 질문에 나를 떠올리며 답했다.
기꺼이 곁을 주시라고.
낯선 타인의 어려움에 동하는 마음은 언제나 좋은 것이기에 숨기거나 부정할 필요 없다고.
그중에서도 가장 나은 접근 방법은 행동을 실천하기 전, 마음을 담은 질문이 먼저 오가면 더없이 좋을 것이라 말했다.
배려와 배제는 묘하게도 닮은 구석이 있다.
타인의 취약함을 마주할 때 떠오르는 동기라는 점은 비슷하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다.
나란히 서 기꺼이 물어볼 용기는 배려의 온기가, 틈을 주지 않는 냉소는 배제의 냉기가 된다.
배려의 온기는 이웃이 머무를 구들방을 덥히는 연료로 쓰이지만, 배제의 냉기는 고독한 서리 요새를 구축하고야 만다.
질문 사이에 배려와 배제의 강이 흐른다.
머뭇거림 끝에 기어코 얼굴을 마주 보며 물어보고야 마는 단호한 질문은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이어지고,
질문 없이 이루어지는 구별 짓기 행동은 타인에 대한 배제가 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저마다 배려하는 방법은 따로 있지 않고 모든 것은 용기 있게 마주 섬으로써 시작되는 망설이는 질문으로부터 비롯된다.
물으며 살아가자. 물으며 사랑하자.
낯선 이를 마주할 때 피어나는 마음속 망설임이 따돌림의 결과를 낳고 말 의무의 강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질문하기에 마음을 두자. 마주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건, 배려한다는 건 직접 묻는다는 것을 잊지 말자.
비 맞는 이에게 우산을 씌워줄지 당연하게 물었던 감사한 그 인연처럼.
불확실한 타인에 대해 망설임을 안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낯선 존재를 배제하고 속단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길 꿈꾼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여성과 남성, 노인과 어린이,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무수히 흐르는 긴장 속에서 서로의 필요를 묻는 질문이 약한 우리를 단단하게 이어주길 바라며.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10092025035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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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3-10-09 23:56무엇을 기억하게 가르치지? 홍범도의 삶과 육사
입력 : 2023.10.09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홍범도는
왕조에서 제국으로
이어 식민지, 사회주의로
세상이 바뀌어도
좌절하지 않고
굳센 삶을 살았다
‘고려 독립’을 희망하고
삶의 목적으로 내세운
독립운동가다
육사가 육성해야 할
진정한 정예장교는
바른 가치관·도덕적 품성
우선 갖춘 군사전문가다
그렇지 않은 장교는
군사기술자로 공동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
지난 8월25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등은 기자회견을 열고 육군사관학교 측에서 독립영웅 5명의 흉상을 학교 밖으로 옮길 계획을 비판했다.
이들이 보기에 육사 측의 계획은 국군의 역사적 기원을 뒤집어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고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반헌법적 처사”였다.
이에 국방부는 소련공산당 활동에 동조한 홍범도의 흉상만이라도 학교 밖으로 옮기겠다는 뜻을 고수했다.
그러면서 홍범도가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때 볼셰비키와 가해자 측에 가담했고,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사실을 이유로 들었다. 한마디로 반공을 대전제로 해야 하는 육군사관학교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과 사실을 먼저 제대로 이해하면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단정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 않고 계속 고집을 피우면 이는 거슬러 올라가는 접근방식으로 결과에 꿰맞추어 역사를 이해하는 태도이다.
그러면 사실과 관계에 충실해야 한다는 역사 이해의 대전제가 무너진다.
특정 목적에 이용할 우려가 매우 깊고 북한의 역사 접근법과 하등 다르지 않다.
자유시 참변 후 진상 규명·가해자 처벌 요구
1920년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연이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무기 보급과 건강 회복 그리고 조직을 정비할 안정된 공간이 필요했다. 더 강력한 독립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이르쿠츠크부터 연해주 사이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 무장부대와도 연합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의 무장부대에서 통합에 주도적인 사람들은 부대 편성을 위한 절차의 하나로 무장해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서로 합의하지 않은 채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가해 측은 참변 5개월 후인 11월27일부터 나흘 동안 피해자들을 처벌하는 법정을 열었다.
홍범도는 참변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재판위원으로 활동했다.
참변 후 통합 부대로 결성된 ‘특립 고려여단’의 제1대대장인 데다, 여단의 단장이 국제공산당에서 보낸 러시아인이어서 합당한 정책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가해 측은 판결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홍범도의 명성이 필요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홍범도는 이때 이미 참변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재판이 열리기 한 달 전 허재욱과 이병채가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참변의 시시비비를 가려주도록 요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허재욱은 참변의 현장에서 죽은 사람 대부분이 소속된 의군부 책임자였고, 이병채는 홍범도 부대의 참모였다.
더구나 홍범도는 재판이 끝난 직후인 12월14일에 27명의 독립군 지도자와 함께 한국독립군 통합위원회의 이름으로 러시아공화국의 당과 군대의 최고 기관 그리고 국제공산당 집행부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자 전권자를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홍범도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도 참석했다.
같은 시기 미국이 주도한 워싱턴회의에는 초대받지 못한 찬밥신세였는데, 볼셰비키가 조선독립을 지지한 결과였다.
그는 대회 직후인 같은 해 2월에 최진동과 함께 러시아공화국 군사혁명위원회 참모총장과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조선 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참변을 일으킨 이르쿠츠크파와 러시아 정책담당자들의 범죄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국제공산당 파견원인 슈미야츠키, 이르쿠츠크파의 최고려, 김하석, 오하묵, 김철훈을 ‘4000년 조선의 역사 안에서 전례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살인자로 규정하고 이들의 조속한 퇴진을 요구했다.
보고서는 또한 그동안 가해자 측이 참변의 진상을 숨기고 책임을 피하고자 연이어 발표한 성명에 동의한 적도 없다며, 자신들이 서명을 거부하면 가해자 측이 임의로 이름을 기입하고 서명을 위조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동지들의 배신자가 되고 그들로부터 경멸받기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처절한 심정을 밝혔다.
소련서의 삶, 고려인 사회서 존경받는 어른
자유시 참변은 독립군에도 홍범도에게도 전환점이었다.
자세한 연구는 아직 없지만, 국제공산당 등은 참변을 다시 조사하고 재판도 열었다.
특립 고려여단은 1922년 6월쯤 우르칸 금광에서 일하다 이듬해 봄 해산되었다.
독립전쟁을 담당할 무장력에 매우 큰 손실이 발생한 것이다.
홍범도 역시 만주로 돌아가지 않고 스스로 연해주에 정착해 농사지으며 살았다.
왜 그랬을까.
아홉 살에 고아가 된 홍범도는 생존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다녔다.
의병운동 과정에서 일제에 아내와 맏아들을 잃었지만, 둘째 아들은 1922년 시점까지 연해주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식민지 조선은 혈연과 지연이 끊긴 곳이었다.
연고가 취약하기는 북간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홍범도가 북간도에 갔을 때는 청산리전투를 벌이기 1년여 전이었다.
처음에는 이동휘의 소개로 대한국민회와 인연을 맺었고 활동 이력이 쌓이면서 최진동과 함께 봉오동전투를 지휘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경신년대학살을 계기로 북간도 지역의 항일 단체 대부분이 파괴당했다.
이때부터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이곳에서 무장투쟁은 없었다.
나름 기반이 튼튼했던 김좌진조차 1930년 죽을 때까지 이곳의 활동 기반을 복원하지 못한 사실이 엄중했던 당시의 현실을 말해 준다.
그런데 홍범도는 야학이나 선전활동을 하던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총을 들고 싸우던 독립운동가다.
그가 무장투쟁을 벌인 공간은 함경도, 연해주, 북간도였다.
여전히 직업이 ‘28년’ 동안 활약한 ‘의병’이라고 자부하던 홍범도였지만, 1922년을 지나는 시점에 이르면 그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총을 들고 항일 투쟁을 벌일 만한 유의미한 공간은 없었다.
더구나 청산리전투 당시 홍범도의 나이가 52세였다.
1938년쯤 조선인 남성의 평균 수명이 32~34세였으니 그는 매우 장수하고 있던 사람이다.
같이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김좌진과 당시 상해에서 독립전쟁을 구상하고 있던 안창호가 그보다 각각 스물한 살과 열 살 어렸다.
이런 사람이 한국으로 치면 면(面) 단위의 넓이에 가까운 ‘청산리 일대’를 누비며 6일 동안 일본군과 싸웠다는 사실 자체도 놀랍지만, 그곳이 수백m 높이의 산들로 빼곡한 곳임을 생각하면 그의 체력과 독립 의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1922년 즈음에 다시 만주로 돌아가 높은 산들을 누비며 무장투쟁을 하기에는 그도 체력적으로 무리였다고 보는 쪽이 훨씬 자연스러운 시선일 것이다.
이런 홍범도에게 소련의 연해주는 때마침 시베리아 내전도 끝나고 해서 노후를 보낼 안정된 공간이었다.
항일운동 기간만으로 따지면 연해주는 그가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이었다.
게다가 낯선 땅이 아닌 그곳이 이제 새로운 세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라고 내세운 신생 국가 소련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하층민 출신인 그에게 천대받지 않는 세계일 거라는 기대를 품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안정만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홍범도는 고려인이나 옛 부하들과 같이 농업과 관련한 조합을 만들어 함께 생활 기반을 마련하고자 나섰다.
이 와중인 1927년 59세에 입당했지만, 독립운동을 적대하거나 일본에 이롭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고려인 사회가 나서서 살아 있는 전설의 의병 활동을 연극으로 제작해 공연할 만큼 존중받는 사람이었다.
20년도 더 지난 과거의 파르티잔 경력만으로는 존중받을 수 없는 장면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연해주 고려인 사회의 어른으로 자기 역할에 충실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겠다.
홍범도는 왕조에서 제국으로, 이어 식민지, 사회주의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바뀌어도 좌절하지 않고 굳센 삶을 살았다.
끝까지 ‘고려 독립’을 희망하고 삶의 목적으로 내세운 독립운동가다.
일신의 영달을 기대한 삶이 아니었기에 민족과 국가에 무엇인가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원망한 적도 없다.
그가 선택한 삶은 “일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일제에 충성”하다 “운 좋게 민족해방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기회를 틈타 슬쩍 행로를” 바꾼 ‘성실한 기회주의자’와 확연히 달랐다.
대한민국 땅에서 독립과 반공을 편의적으로 나눠 분절적으로 기념해도 좋다는 안이한 태도와도 달랐다.
교육기관인 육군사관학교가 육성해야 할 진정한 정예장교는 “올바른 가치관 및 도덕적 품성”을 우선 갖춘 군사전문가다. 그렇지 않은 장교는 군사기술자로 공동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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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3-10-09 18:10[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계열사 사장이 오너 졸개냐? 공사 구분 안 되는 LG 총수 일가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3-10-09
내가 과거 한 종합일간지에서 일했던 시절 이야기. 선후배들과 회사 안에서 서성이는데 복도에서 한 중년과 스쳤다.
그때 선배가 나한테 해 준 이야기는 “야, 알아둬라. 저 사람이 우리 회사 실세야”였다.
“왜요? 저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라는 내 질문에 선배의 답은 이랬다.
“저 사람이 우리 회사 금고지기거든. 아주 오래전부터 오너 일가의 자금을 관리했어. 그러니까 실세지.”
알아보니 당시 그 중년인은 그 신문사 재무 담당 부장이었다.
그런데 왜 신문사 재무 담당 부장이 오너 일가의 자금을 관리한단 말인가?
신문사는 주식회사고, 그 주식회사에 속한 사람은 법인을 위해 일을 한다.
오너 일가의 집사 노릇을 하는 게 당연히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식은 내가 그 직장에서 10년 가까이 일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그 회사에서 2001년 경제부로 발령받아 증권 담당 기자로 일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데스크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
“000 종목 주가 전망에 대해 상세한 보고서를 올려라”는 지시였다.
나는 기사를 쓰라는 것도 아니고 왜 특정 종목의 주가 분석 보고서를 데스크에게 올려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이유를 선배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선배들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오너가 그 종목에 투자했잖아. 넌 그것도 모르냐?”고 알려줬다.
진짜 웃기는 짜장들 아닌가?
기자는 기사를 쓰라고 뽑은 사람이지 오너가 투자한 종목의 주가 전망을 하는 사람이 당연히 아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오너 일가는 너무 태연히 시킨다.
내가 한국 기업들에 대해 느끼는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이것이다.
한국의 재벌 오너들은 주식회사와 개인사업자의 차이가 뭔지를 모른다.
오너가 개인사업자라면 회삿돈을 어떻게 쓰건 그건 오너 마음이다.
하지만 주식회사를 세웠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주식회사는 엄연한 법인이고, 법인이 설립되는 순간 법인 소속 재산은 오너 개인의 것이 아니다.
한국 재벌들은 이 차이를 모르는 거다.
버젓이 주식회사를 세워놓고 세금도 개인사업자보다 훨씬 덜 내면서 회삿돈을 마치 자기 금고 속 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회사 재무 담당 부장이 ‘오너 자금 관리인’ 소리나 듣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 공사 구분도 안 되나?
내가 이 이야기를 정색하면서 꺼내는 이유가 있다.
얼마 전부터 LG그룹이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다는 사실은 독자 여러분들도 들어보셨을 것이다.
장자 승계라는 중세 봉건시대에나 통할 법한 요상한 원칙을 갖고 있는 LG 그룹은 선대 회장이 작고하자 경영권과 주식을 장남 구광모 회장에게 몰아줬다.
그런데 구광모 회장은 선대 구본무 회장의 친자(親子)가 아니다.
아들이 없었던 구본무 회장이 양자로 들인 사람이다.
이 희대의 코미디 같은 경영권 승계에 뒤탈이 없을 리가 없다.
구본무 회장의 부인 김영식 여사와 두 딸(이 두 딸은 구본무 회장의 친딸이다)이 구광모 현 회장에게 몰아준 주식에 대해 법적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 경영권 분쟁이 누구의 승리로 돌아갈지에 관해 코딱지만큼도 관심이 없다.
장자승계라는 코미디가 웃길 뿐이고, 그걸 위해서 양자를 들인 봉건적 사고방식에 콧방귀가 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이 일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다.
관련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난주(5일) 하범종 ㈜LG 경영지원부문장(사장)이 서울서부지법 제11민사부에 출석했다는 것이다.
하 사장은 당연히 현 구광모 회장에게 유리한 증언을 잔뜩 하고 나왔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LG 트윈타워 (자료사진) 2022.06.17 ⓒ민중의소리
문제는 하 사장이 구본무 선대회장의 별세 전후 때 그룹 지주사인 ㈜LG의 재무관리팀장을 맡아 그룹 총수 일가의 재산 관리와 상속 분할 협의 등을 총괄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아니, LG그룹 지주회사 ㈜LG의 재무관리팀장이, 그것도 무려 사장급의 인사가, 오너 일가의 재산 관리와 상속 분할을 왜 협의하나? 이건 자기들끼리 변호사 수임해서 해결해야 하는 일 아니냔 말이다.
심지어 하 사장은 “원고들은 이후로도 상속세 납부나 재산 관리를 평소처럼 재무관리팀에서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인즉슨 회사에 적을 두지 않은 사람도 오너 일가이기만 하면 회사 재무관리팀에서 재산 관리를 해 줬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왜?
국내 4대 재벌 LG그룹 지주회사의 재무관리팀이 오너 일가 따까리냐?
주식회사가 구 씨 일가가 운영하는 동네 구멍가게냐고?
재무통이 금고지기?
이게 일본 말이어서 별로 쓰고 싶지는 않은데, 경제부 기자들이 흔히 쓰는 속어 중에 ‘야도이’라는 게 있다.
야도이란 ‘고용 사장’이라는 뜻의 일본어인데 한국에서는 힘이 없는 ‘바지 사장’이라는 비하의 의미가 강하다.
보통 재벌 오너가 아닌 전문 경영인들, 계열사 사장들을 ‘야도이’라고 부른다.
이 말이 기자들 사이에서 애용되는 이유는 실제 한국 재벌 계열사의 최고경영자들이 다들 야도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오너의 금고지기’라 불렸던 재무 전문가들은 야도이를 넘어 오너의 충복, 혹은 따라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재무 전문가들이 사장 타이틀을 달고 오너 비자금이나 관리하는 이 한심한 작태는 ‘이건희의 오른팔’로 불렸던 이학수 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의 등장 이후 더 강화됐다.
이학수가 삼성 이건희 일가의 비자금을 훌륭히 관리(?)해주자 오너들은 앞다퉈 재무전문가들을 집사처럼 부려먹었다.
이들은 (월급은 주식회사에서 받으면서) 오너 뒤처리를 전담하고 다녔다.
LG그룹은 2002년 대선 자금 차떼기 사건의 주인공이다.
선거가 한창 달아오르던 그해 10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측이 LG그룹에 대선자금을 요구하자 LG가 무려 150억 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이 후보 측에 전달한 그 사건이다.
5만 원 권이 없던 시절 그 엄청난 양의 대선 자금을 사과박스 62개에 담아 2.5톤짜리 탑차에 실어 날랐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로 회자된다.
그런데 당시 그 비자금 150억 원이 보관됐던 장소가 구 씨 일가 지하실도 아니고 LG본사 여의도 트윈타워 안 비밀금고였다. 도대체 주식회사 본사에 왜 이런 비밀금고가 있나?
그리고 그 비밀금고에 비자금을 넣고 관리한 이는 누구였겠나?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강유식 당시 LG그룹 구조조정 본부장이었다.
강유식은 당시 이 자금을 이회창 측에 전달하면서 “비자금은 주주들의 상속 및 증여에 대비해 마련해둔 현금”이라고 밝혔다.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나?
여기서 주주들이라 하면 구 씨 일가일 텐데 오너 일가의 상속, 증여세를 왜 상속받는 자가 아니라 주식회사 LG가 대비하냐고? 그것도 회삿돈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때 이 일을 주도했던 강유식, 이 자는 구본무 전 회장의 최측근으로 불렸던 자다.
그런데 이 사람도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갖춘 LG의 대표적 재무통이다.
기업 회계를 투명하게 감시하라고 만든 직업이 공인회계사인데 이 인간은 오너 졸개가 돼서 오너 일가의 비자금이나 관리해주고 앉았다는 이야기다.
이게 정상이냐?
아무튼 이번 사태를 보면서 나는 진심으로 또 한 번 한국의 재벌들이 공사 구분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본주의의 기본 중의 기본인 주식회사와 개인사업자의 차이도 모른다.
진짜 하는 짓들이 구리기 짝이 없다.
이런 자들이 글로벌 기업을 운영한다고?
글로벌이 비웃는다. 웃기는 소리 작작들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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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3-10-09 18:09[하승수의 직격] 대통령 회식비 감추려고 변호사 수임료 지출
하승수(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발행 2023-10-08
지난 4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 해운대구의 한 횟집에서 회식을 한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에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올해 4월 6일 대통령이 부산에 가서 했던 ‘해운대 횟집 회식’ 사건이다.
그 당시에 많이 지적됐던 것처럼, 대통령이 경호상 우려까지 낳으면서 굳이 그 횟집에 가서 회식한 것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날 회식비용으로 얼마를 썼는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 회식이 끝나고 횟집에서 대통령 일행이 나오는 사진이 인터넷과 SNS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러자 대통령비서실은 해명하면서, ‘공식 일정이고, 회식비용은 대통령실에서 결제했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회식비용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회식비를 얼마 썼는지가 국가안보 사항?
그래서 필자는 현재 대통령비서실을 상대로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소송을 하고 있다.
필자는 회식 다음 날 언론보도를 보고 대통령비서실을 상대로 정보공개청구를 했는데, 대통령비서실이 5월 4일 비공개 결정 통지를 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5월 7일 서울행정법원에 소장을 접수했고, 첫 번째 변론기일이 10월 12일로 잡혀 있다.
소송의 취지는 간단하다.
필자가 공개청구해서 소송을 하고 있는 정보는 “회식비용의 액수 및 지출주체, 지출원천(대통령비서실의 예산으로 지출한 것인지)”이다.
이처럼 단 한 가지 정보만 공개하라는 것이므로, 쟁점이 매우 단순한 소송이다.
회식비 공개를 요구하는 재판을 위해 대통령비서실이 변호사를 선임했다는 내용을 담은 소송위임장 ⓒ하승수 제공
대통령비서실이 애초에 정보비 공개 결정을 하면서 제시한 비공개 사유는 정보공개법 제9조 제1항 제2호의 사유였다.
이 사유는 “국가안전보장·국방·통일·외교관계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회식비가 국가안전 보장에 관한 사항이라는 얘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수많은 언론보도를 통해서, 부산 해운대의 한 횟집에서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시·도지사 등이 참석한 회식이 있었던 점은 확인된 사실이고, 참석자들의 명단까지 밝혀진 상황이다.
이처럼 이미 회식을 한 사실과 참석자가 공개된 상황에서 회식비용과 관련된 정보가 공개된다고 해서 국가안전 보장에 지장이 초래될 리가 없다.
또한, 대통령의 회식비가 공개된다고 해서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할 우려가 있고, 국정 수행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얘기도 상식에 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송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회식비 숨기려고 변호사 수임료 지출?
그런데 10월 12일 첫 번째 변론기일을 앞둔 오늘까지도, 대통령비서실은 소장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정보공개 여부를 다투는 소송에서는 비공개 사유에 대한 주장·입증 책임이 피고인 행정관청에게 있다.
즉 대통령비서실이 비공개 사유를 주장·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비서실은 ‘해운대 횟집 회식비’가 왜 비공개돼야 하는 정보인지에 대해 제대로 된 주장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변호사 선임만 했다.
회식비를 얼마 썼는지를 감추려고 국민 세금으로 변호사 수임료까지 지급한 것이다.
대통령비서실이 변호사 수임료를 얼마나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민 세금을 이렇게 써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식대와 영화관람료 공개하라는 판결도 나와
필자가 소송을 제기한 이후에, 한국납세자연맹이 진행 중인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소송 1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이 이미 내려졌다.
이 단체가 공개청구한 정보 중에는 2022년 5월 13일 청담동 식당에서 대통령이 사용한 식대와 대통령 부부가 6월 12일 사용한 영화관람료가 포함되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시절이던 지난 2021년 7 27일 부산 서구의 한 식당을 방문, 지역 국회의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다. 2021.07.27. (부산사진공동취재단). ⓒ뉴시스
그리고 지난 9월 1일에 나온 서울행정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대통령 내외의 저녁식사 비용으로 지출된 금액과 영수증 등은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리적으로도 타당하고, 상식에도 부합하는 판결이다.
그런데 대통령비서실은 이 1심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했고, 필자가 제기한 소송에서도 변호사를 선임하면서까지 끝내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가뜩이나 세수 감소로 국가재정이 어려운데, 누구보다 모범을 보여야 할 대통령이 자신이 사용한 식사비용, 회식비용을 감추려고 변호사 수임료를 낭비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염치없다’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표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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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3-10-08 19:29범상치 않은 친일파, 한글을 모독한 대표적 문인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용제
김종성(qqqkim2000)
23.10.08
세종대왕은 서문에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말했다.
이 나랏말쌈은 중국뿐 아니라 일본과도 당연히 달랐지만,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어를 강요했다.
그들의 용어로 하면 '국어 상용화' 정책을 강제한 것이다.
일제가 한국의 말과 글을 억압한 1차적 의도는 징병제에 있었다.
한국인을 일본 군인으로 만들려면 한국어부터 없애야 한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2019년에 제83집에 수록된 송숙정 중원대 연구교수의 논문 '일본이 식민지에서 자행한 국어 상용화 정책에 관한 일고찰'에 조선총독부의 1942년 자료인 가 인용됐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징병제 실시 계획이 발표된 1942년에 한국인 징병 적령자 21만 4229명 중에서 일본어를 해득할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24%인 5만 1959명이었다.
외국 지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징세 대상자는 언어가 달라도 무방하지만 징병 대상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지휘관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병사들 간에도 전우애가 형성되기 어렵다.
이런 상태로는 한국 청년들을 일본 군인으로 개조하기 힘들다는 게 일본의 판단이었다.
1942년에 국어 상용화 정책이 조선에서 실시된 데는 그런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친일파들은 그 정책을 위해서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일본어 상용화 정책은 총독부 단독으로는 관철되기 힘들었다.
한국어 사용자들을 일어 사용자로 만드는 일이었으므로, 두 언어에 모두 능한 친일파들이 앞장서야 정책이 수월하게 성사될 수 있었다.
이 일에 앞장선 대표적 친일파가 김용제다.
지금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친일을 했는가는 페이지 숫자로도 증명된다.
제4-3권 김용제 편과 제1권 김용제 편의 분량은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위 보고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게 1인당 평균 20쪽 미만의 분량을 할애한다.
그런데 김용제 편에는 62페이지가 할당됐다.
전 3권으로 구성된 은 친일파 4389명에게 1인당 0.63쪽을 할애한다.
그런데 김용제에게는 6쪽이 배당됐다.
이 정도면 김용제가 범상치 않은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가 얼마나 '애국자'이며 얼마나 '국어'를 사랑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의 나랏말쌈은 '듕귁'뿐 아니라 '조센'과도 달랐던 것이다.
일본어 상용화의 대표적 인물
▲ 1943년 3월 21일 자 기사 '반도 문단의 영예인 총독의 국어문학상 - 김촌용제씨의 으로 결정 추천' ⓒ 국립중앙도서관
김용제(金龍濟)가 일본어 상용화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점은 이 분야 최초의 총독상 수상자라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43년 3월 21일자 에 실린 '반도 문단의 영예인 총독의 국어문학상 - 김촌용제(金村龍濟) 씨의 으로 결정 추천'이라는 기사는 그가 제1회 국어문예총독상 수상자임을 알려준다.
한국 친일파 연구의 토대를 닦은 역사학자 임종국은 한일협정 이듬해인 1966년에 펴낸 에서 "국어문예총독상은 반도 문예의 건전한 발전과 반도 문단의 국어화 촉진을 목적"으로 했다고 소개하는 한편, 김용제가 제1회 상을 받은 것은 "작품의 내용이 타는 듯한 일본 정신에 의하여 일관되었을 뿐 아니라 원숙한 문학적 형식"을 갖췄다고 평가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일제 강점 1년 전인 1909년 2월 3일 충북 음성에서 태어난 김용제는 10대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
은 청주중에 입학한 그가 "1927년 부친의 파산으로 온 가족이 서울로 이주할 때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면서 "단신으로 도쿄에 도착했다"고 기술한다.
그는 의지만 강했던 게 아니라 의식도 건전했다.
전 세계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배달 일 등을 하며 고학을 하다가 1929년에 주오대학 법과에 입학한 뒤 곧바로 중퇴한 그는 문학적 재능을 제국주의 비판에 활용했다.
21세 때인 1930년에 일본 좌파 문예지인 을 통해 등단한 그는 동년 9월 창립된 일본 프롤레타리아시인회 간사가 되고 1931년에는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과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KOPF)에 가입했다.
이런 좌파 활동은 그에게 고초를 안겼다.
1932년 6월에 체포돼 1936년 3월에 출소했고, 동년 10월 다시 체포됐다가 11월에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됐다.
28세 때인 1937년, 결국 그는 조선으로 강제 송환됐다.
5년간의 고초는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귀국 이듬해인 1938년 7월, 그는 일본 군국주의 단체인 동아연맹의 간사가 됐다.
군국주의 단체의 회원도 아니고 간사가 된 것은 이 시기의 그가 일본이 볼 때 믿음직한 인물이 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친일파로 변신한 김용제는 주특기인 문학뿐 아니라 강연과 시낭송회 등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한 1937년 이후에 친일파가 됐으니, 이런 활동은 대륙침략을 응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는
"학병·징병을 선동·찬양",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선동", "대동아문화 수립에 진력"
등의 표현을 써가며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다.
한국어와 한글을 모독한 대표적 친일 문인
▲ 1994년 6월 23일 자 기사 '시인 김용제씨 별세'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가 일본에 충성하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짜냈는지는 그의 작품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1943년 8월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란 시에서는 일본군에 끌려가는 청년들을 묘사하면서 "기쁜 눈물에 말이 많지 않았다/ '간다! 갑니다' 하고만/ '갔다 온다'곤 하지 않았다"라고 읊었다.
끌려가는 한국 청년들이 "갔다 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지 않고 그냥 "가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는 작품이다.
그런 식으로 강제징병 대상자들에게 메시지를 암시했던 것이다.
1942년 2월에 발표한 '소부(少婦)에게'란 시에는 "남편이 총 잡으면 슬픔 없이 환송을 노래한다"는 구절이 들어 있다.
끌려가는 남편들뿐 아니라 배웅하는 젊은 아내들의 의식에까지 군국주의 충성심을 퍼트리려는 의도를 갖고 시를 썼던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문인들과 달리 친일 조직의 실무자로도 왕성하게 활약했다.
국민문화연구소 이사 겸 출판부장, 동양지광사 사업부장·편집부장, 조선문인협회 상무, 총독부 학무국 파견원 등등의 경력을 남겼다.
일본을 위해 글도 많이 쓰고 각종 단체의 실무도 왕성하게 처리했으니, 친일 재산도 그만큼 축적했으리라 볼 수 있다.
고학 시절의 생활력이 친일에도 반영된 것이다.
김용제가 일본어 상용화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어학 및 문학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학하면서 일본 유학을 한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자신도 1943년 3월 21일 자 에 실린 국어문예총독상 수상 소감에서 "처음부터 국어로 문학을 시작한 동경 시절 이래 15년 동안"을 언급하면서 감격스러워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그의 청년기 고생은 일본의 세계침략을 위해 활용된 셈이다.
그의 해방 이후 행적은 충성의 대상만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바뀌지 않았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은 그가 1949년에 친일청산 기관인 국회 반민특위에 구속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일을 설명한 직후에 "1951년 6·25전쟁 중 김해에서 미군 정보기관에 초빙되어 서울로 와서 심리작전·흑색선전의 책임자로 참전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고 서술한다.
일제의 심리전·선전전 기술자였던 그가 미군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설명이다.
그 역시 자신의 친일이 어느 정도 부담이 됐던 모양이다.
"1978년 8월 에 발표한 산문 '고백적 친일문학론'과 1993년 8월 일본의 시문학 동인지인 에 발표한 소설 형식의 수기 을 통해 자신의 친일은 항일 지하운동을 위한 위장 친일이었다고 강변했으나, 본인의 주장일 뿐 객관적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고 은 알려준다.
김용제가 세상을 떠난 것은 85세 때인 1994년 6월 22일이다.
일본어 상용화에 협력하면서 동족을 징용·징병 등으로 내몬 반민족행위자였지만,
다음날 발행된 기사 '시인 김용제 씨 별세'는 "김씨는 민족시·서정시에 주력"했다고 호평했고,
같은 제목으로 같은 날 발행된 기사는 "김씨는 일제하에 민족시 서정시에 주력"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어와 한글을 모독한 대표적인 친일 문인이 그런 평가를 받으며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1990년대 중반에 그렇게 죽었다.
동료 문인들이 그의 친일을 적극 비판했다면, 해방 50년이 다 되는 시점에 그런 보도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 문학계의 친일청산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김용제의 죽음이 잘 보여준다.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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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3-10-08 19:28아이들과 영어 없는 물건 찾기 내기 했습니다... 그 결과는
[아이들은 나의 스승] 영어 영역 지문보다 국어 영역 지문 어렵다는 호소, 방법 있을까?
23.10.08
서부원(ernesto)
오래전 아이들에게 과제 삼아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다.
하루 동안 한 대기업이 만든 제품을 사지도, 보 지 도, 먹지도, 타지도, 쓰지도 않으면 도서상품권을 선물하기로 했다.
당시 대한민국이 이 기업의 '공화국'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여서, 아이들에게 그 의미를 직접 체험하도록 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식은 죽 먹기라며 너도나도 5000원짜리 말고 1만 원짜리 도서상품권으로 하자고 했다.
또 자기가 실패하면 한 달 동안 아침 교실 청소를 담당하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내가 이겼다.
아이들은 휴대전화에서부터 가전제품, 아파트, 신문, 방송, 식품, 편의점에 이르기까지 이 대기업 제품이 아닌 게 없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영어 써 있지 않는 물건, 있을까?
최근 아이들과 비슷한 내기를 했다.
이번엔 영어다.
등교할 때 입는 옷과 가방, 문방구 등에 영어가 단 한 군데 적혀있지 않다면 '1인 1피자'를 쏘겠다고 통 큰 제안을 했다.
과거 삼성 제품을 피하는 것보다 백 배는 더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여겨서다.
이번엔 아이들도 쉽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휙 훑어보더니 대부분 지레 포기했다.
대신 개수를 늘려달라며 흥정을 걸어왔다.
아예 없을 순 없으니 5개 정도까지는 허용해달라는 것이다.
내심 그마저 불가능하다고 여겨 흔쾌히 수락했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
아이들의 포기 선언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걸치고 있는 재킷과 가방 속 필통 하나만 열어봐도 승부는 그대로 끝났다.
한 아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 영어 철자가 적혀있지 않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애초부터 잘못된 내기였다며 역제안하는 아이도 있었다.
차라리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 중에 한글만 적혀있는 걸 5개 정도 가져오면 되는 걸로 하자는 거다.
그마저 어렵다고 여겼는지, 약삭빠른 한 아이는 아무런 글자가 박혀있지 않은 것도 허용해달라고 떼쓰듯 했다.
그 또한 수용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은 연신 자기 옷과 가방, 책상, 사물함 등을 수색하듯 샅샅이 뒤졌다.
모두 허사일 걸 알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실 제품의 라벨 끝에 예외 없이 적혀있는 'Made in Korea' 하나로 끝날, 뻔한 승부였다.
아이들과 내기를 건 이유가 있다.
우리글과 말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태부족하다는 안타까움에서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낱말의 맞춤법이 틀리는 건 예사이고, 사자성어는커녕 속담이나 낱말의 뜻조차 몰라 되묻는 아이가 적지 않다. 분명 고등학생인데 초등학생을 보는 느낌이다.
한자어로 된 낱말은 의미를 모르다 보니 무작정 영어 단어 외우듯 암기한다.
내신 성적이 1~2등급인 최상위권 아이들조차 한자는 아예 젬병이다.
한자로 된 제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자가 익숙지 않으니 한자어가 영어 단어처럼 느껴지는 거다.
영어 영역 지문보다 국어 영역 지문이 어려워?
국어 영역 지문이 영어 영역의 그것보다 더 해석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게 된다.
특히 고전 문학에 등장하는 고어나 국한문혼용체 문장을 두고선 차라리 외국어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나아가 지금 쓰지도 않는 글과 말을 왜 굳이 배워야 하는지를 따져 묻기도 한다.
그 시간에 영어를 공부하는 편이 더 낫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아이도 있다.
우리글과 말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거다.
옛 고전과 역사 등을 읽어야 한다면 전문 번역가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는 설명이다.
말하자면, 필요한 사람만 공부하자는 뜻이다.
의사소통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는 요즘 아이들의 국어 실력을 잠깐 소개한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수능이나 모의평가의 성적을 말하려는 게 아니거니와 교사로서 내가 만난 아이들의 사례로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기성세대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다.
우선, 자음 'ㅌ'을 제대로 읽는 아이가 많지 않다.
'티긑'이라고 읽는 경우가 절반이 넘는다.
종이 위에 발음 나는 대로 적어보라고 하면 '티긑'에서 '티긋', '티귿'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틀렸다고 말하면, 대번 굳이 이걸 알아서 어디에 쓰냐며 되레 반문한다.
'넓다(널따)'와 '밟다(밥따)'를 정확히 읽는 아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묻는 의도를 유추해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맞히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대부분 '넙따'와 '밥따'로 읽는다.
이 또한 교정하려 들면, 발음법도 표기법도 세월이 흐르면 변하기 마련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요즘 아이들은 '맞히다'와 '맞추다', '다르다'와 '틀리다', '가르치다'와 '가리키다' 등도 헷갈려 하며 마구 혼용한다.
그들 말마따나, 잘못 사용돼도 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대화 도중 쓰는 표현이 적확한지 따져보며 말하는 아이도 없고, 상대방에게 지적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초등학교 시절 받아쓰기 숙제를 숱하게 했을 텐데도 맞춤법 또한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소리 나는 대로 적거나 받침이 틀리고, 한자어의 경우엔 의미를 잘 몰라 '배열'이 뒤죽박죽인 경우가 허다하다.
무늬를 '무니'로 적고, 반대로 잔디를 '잔듸'로 쓴다. 빼앗다를 '빼았다'로 적는가 하면, 맞서자를 '마써자'로 쓰는 황당한 경우마저 있다.
교과서 속 '낭중지추'나 '천의무봉'과 같은 사자성어를 '낭지중추'나 '천봉의무' 등으로 적어 헛웃음을 짓게 한다.
한자에 서툴다 보니 맹목적으로 외운 결과다.
'동분서주'나 '오월동주'처럼 잘 알려진 표현조차 '동서분주'나 '동주오월'처럼 뒤집기 일쑤여서 딱히 놀랍진 않다.
이는 교사가 서술형 시험 출제를 주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맞춤법이 틀렸다고 오답 처리하면, 몇몇 아이들은 찾아와 국어 시험도 아닌데 너무 엄격한 채점 기준이라며 하소연한다.
심지어 교과목의 성취 기준과 직접적 관련성이 없다며 문제 삼는 학부모도 드물게 있다.
하긴 맞춤법까지 갈 것도 없다.
당최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든 '악필'이 태반이다.
시험 답안이야 어쩔 수 없지만, 글자의 판독이 어려워 과제물을 인쇄된 출력물로만 받는다는 동료 교사가 많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재는 '펜글씨 교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교사마다 원인에 대한 진단은 한결같다.
요즘 아이들이 책 읽기를 멀리하고, 짧고 자극적인 스마트폰 영상에 길들어져 있다는 점을 첫손에 꼽는다.
여전히 막강한 사회적 위상을 지닌 영어 능력에 대한 선망에 애꿎은 우리글과 말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분석을 내놓는 이도 있다.
내수용 물건에 영어 이름을 붙이고 죄다 영어 철자로 된 디자인이라는 점을 지적했더니, 아이들은 대뜸 "세련돼 보인다"는 반응을 보였다.
옷과 가방 등에 우리 이름이 붙어있다면 '촌스럽게' 느껴진다는 거다.
"영어로 꿈을 꿔보는 게 소원"이라는 마당이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요즘 아이들끼리 사용하는 단어의 가짓수가 나날이 줄어드는 느낌이다.
어휘력은 사고력과 정비례한다는데, 그만큼 아이들의 사고력이 퇴화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만의 억측일까.
부족해진 '한글식 사고력'을 '영어식 사고력'이 벌충하게 될까.
공교롭게도 오늘은 한글날이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67601&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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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3-10-08 19:28아이들과 영어 없는 물건 찾기 내기 했습니다... 그 결과는
[아이들은 나의 스승] 영어 영역 지문보다 국어 영역 지문 어렵다는 호소, 방법 있을까?
23.10.08
서부원(ernesto)
오래전 아이들에게 과제 삼아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다.
하루 동안 한 대기업이 만든 제품을 사지도, 보 지 도, 먹지도, 타지도, 쓰지도 않으면 도서상품권을 선물하기로 했다.
당시 대한민국이 이 기업의 '공화국'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여서, 아이들에게 그 의미를 직접 체험하도록 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식은 죽 먹기라며 너도나도 5000원짜리 말고 1만 원짜리 도서상품권으로 하자고 했다.
또 자기가 실패하면 한 달 동안 아침 교실 청소를 담당하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내가 이겼다.
아이들은 휴대전화에서부터 가전제품, 아파트, 신문, 방송, 식품, 편의점에 이르기까지 이 대기업 제품이 아닌 게 없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영어 써 있지 않는 물건, 있을까?
최근 아이들과 비슷한 내기를 했다.
이번엔 영어다.
등교할 때 입는 옷과 가방, 문방구 등에 영어가 단 한 군데 적혀있지 않다면 '1인 1피자'를 쏘겠다고 통 큰 제안을 했다.
과거 삼성 제품을 피하는 것보다 백 배는 더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여겨서다.
이번엔 아이들도 쉽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휙 훑어보더니 대부분 지레 포기했다.
대신 개수를 늘려달라며 흥정을 걸어왔다.
아예 없을 순 없으니 5개 정도까지는 허용해달라는 것이다.
내심 그마저 불가능하다고 여겨 흔쾌히 수락했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
아이들의 포기 선언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걸치고 있는 재킷과 가방 속 필통 하나만 열어봐도 승부는 그대로 끝났다.
한 아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 영어 철자가 적혀있지 않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애초부터 잘못된 내기였다며 역제안하는 아이도 있었다.
차라리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 중에 한글만 적혀있는 걸 5개 정도 가져오면 되는 걸로 하자는 거다.
그마저 어렵다고 여겼는지, 약삭빠른 한 아이는 아무런 글자가 박혀있지 않은 것도 허용해달라고 떼쓰듯 했다.
그 또한 수용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은 연신 자기 옷과 가방, 책상, 사물함 등을 수색하듯 샅샅이 뒤졌다.
모두 허사일 걸 알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실 제품의 라벨 끝에 예외 없이 적혀있는 'Made in Korea' 하나로 끝날, 뻔한 승부였다.
아이들과 내기를 건 이유가 있다.
우리글과 말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태부족하다는 안타까움에서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낱말의 맞춤법이 틀리는 건 예사이고, 사자성어는커녕 속담이나 낱말의 뜻조차 몰라 되묻는 아이가 적지 않다. 분명 고등학생인데 초등학생을 보는 느낌이다.
한자어로 된 낱말은 의미를 모르다 보니 무작정 영어 단어 외우듯 암기한다.
내신 성적이 1~2등급인 최상위권 아이들조차 한자는 아예 젬병이다.
한자로 된 제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자가 익숙지 않으니 한자어가 영어 단어처럼 느껴지는 거다.
영어 영역 지문보다 국어 영역 지문이 어려워?
국어 영역 지문이 영어 영역의 그것보다 더 해석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게 된다.
특히 고전 문학에 등장하는 고어나 국한문혼용체 문장을 두고선 차라리 외국어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나아가 지금 쓰지도 않는 글과 말을 왜 굳이 배워야 하는지를 따져 묻기도 한다.
그 시간에 영어를 공부하는 편이 더 낫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아이도 있다.
우리글과 말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거다.
옛 고전과 역사 등을 읽어야 한다면 전문 번역가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는 설명이다.
말하자면, 필요한 사람만 공부하자는 뜻이다.
의사소통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는 요즘 아이들의 국어 실력을 잠깐 소개한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수능이나 모의평가의 성적을 말하려는 게 아니거니와 교사로서 내가 만난 아이들의 사례로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기성세대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다.
우선, 자음 'ㅌ'을 제대로 읽는 아이가 많지 않다.
'티긑'이라고 읽는 경우가 절반이 넘는다.
종이 위에 발음 나는 대로 적어보라고 하면 '티긑'에서 '티긋', '티귿'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틀렸다고 말하면, 대번 굳이 이걸 알아서 어디에 쓰냐며 되레 반문한다.
'넓다(널따)'와 '밟다(밥따)'를 정확히 읽는 아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묻는 의도를 유추해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맞히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대부분 '넙따'와 '밥따'로 읽는다.
이 또한 교정하려 들면, 발음법도 표기법도 세월이 흐르면 변하기 마련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요즘 아이들은 '맞히다'와 '맞추다', '다르다'와 '틀리다', '가르치다'와 '가리키다' 등도 헷갈려 하며 마구 혼용한다.
그들 말마따나, 잘못 사용돼도 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대화 도중 쓰는 표현이 적확한지 따져보며 말하는 아이도 없고, 상대방에게 지적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초등학교 시절 받아쓰기 숙제를 숱하게 했을 텐데도 맞춤법 또한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소리 나는 대로 적거나 받침이 틀리고, 한자어의 경우엔 의미를 잘 몰라 '배열'이 뒤죽박죽인 경우가 허다하다.
무늬를 '무니'로 적고, 반대로 잔디를 '잔듸'로 쓴다. 빼앗다를 '빼았다'로 적는가 하면, 맞서자를 '마써자'로 쓰는 황당한 경우마저 있다.
교과서 속 '낭중지추'나 '천의무봉'과 같은 사자성어를 '낭지중추'나 '천봉의무' 등으로 적어 헛웃음을 짓게 한다.
한자에 서툴다 보니 맹목적으로 외운 결과다.
'동분서주'나 '오월동주'처럼 잘 알려진 표현조차 '동서분주'나 '동주오월'처럼 뒤집기 일쑤여서 딱히 놀랍진 않다.
이는 교사가 서술형 시험 출제를 주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맞춤법이 틀렸다고 오답 처리하면, 몇몇 아이들은 찾아와 국어 시험도 아닌데 너무 엄격한 채점 기준이라며 하소연한다.
심지어 교과목의 성취 기준과 직접적 관련성이 없다며 문제 삼는 학부모도 드물게 있다.
하긴 맞춤법까지 갈 것도 없다.
당최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든 '악필'이 태반이다.
시험 답안이야 어쩔 수 없지만, 글자의 판독이 어려워 과제물을 인쇄된 출력물로만 받는다는 동료 교사가 많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재는 '펜글씨 교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교사마다 원인에 대한 진단은 한결같다.
요즘 아이들이 책 읽기를 멀리하고, 짧고 자극적인 스마트폰 영상에 길들어져 있다는 점을 첫손에 꼽는다.
여전히 막강한 사회적 위상을 지닌 영어 능력에 대한 선망에 애꿎은 우리글과 말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분석을 내놓는 이도 있다.
내수용 물건에 영어 이름을 붙이고 죄다 영어 철자로 된 디자인이라는 점을 지적했더니, 아이들은 대뜸 "세련돼 보인다"는 반응을 보였다.
옷과 가방 등에 우리 이름이 붙어있다면 '촌스럽게' 느껴진다는 거다.
"영어로 꿈을 꿔보는 게 소원"이라는 마당이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요즘 아이들끼리 사용하는 단어의 가짓수가 나날이 줄어드는 느낌이다.
어휘력은 사고력과 정비례한다는데, 그만큼 아이들의 사고력이 퇴화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만의 억측일까.
부족해진 '한글식 사고력'을 '영어식 사고력'이 벌충하게 될까.
공교롭게도 오늘은 한글날이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67601&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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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3-10-07 00:16[사설] 수사 외압 반성은커녕 여론전만 하는 국방부
민중의소리
발행 2023-10-06
군검찰이 해병대 채상병 순직 사건을 경찰에 이첩했다가 항명 혐의로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을 이르면 이번 주 중 재판에 넘기고 수사를 종결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단장의 구속을 시도했다가 법원의 영장 기각 결정으로 실패하고 결국 불구속으로 기소할 것으로 보인다.
군검찰이 박 전 단장을 다른 혐의도 아닌 항명 혐의로 수사하는 것도 모자라 기소까지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지금 수사로 밝혀야 할 것은 오히려 박 전 단장이 경찰에 이첩했던 채상병 순직 사건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방부는 박 전 단장을 수사하고 외압 의혹을 덮으려는 여론전만 펼치는 형국이다.
최근 ‘해병대 순직 사고 조사 관련 논란에 대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문건 내용이 언론을 통해 폭로됐다.
이 문건에는 ‘장관의 이첩 보류 지시는 적법한 권한 행사’, ‘수사 개입 주장의 허구성’, ‘대통령실 개입 주장의 허구성’ 등 주요 쟁점 총 11개에 대한 국방부 입장이 A4 용지 12쪽에 걸쳐 담겨 있었다.
국방부가 박 전 단장 측 입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을 문건으로 작성했다.
국방부는 단순 내부 회람용 문건이 유출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고의로 유출해 여론전을 시도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정황도 적지 않게 보인다.
언론을 통해 문건의 내용이 공개되기 전에 예비역 군인들 사이에 상당한 정도로 유포가 됐고, 문건의 기술 방식도 통상적인 내부 보고용 문건과는 달리 상세한 설명과 함께 경어체가 사용됐다는 점이 그렇다.
국방부에 불리한 내용은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외부용 문건이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부분이다.
문건에선 박 전 단장이 일방적으로 허위 주장을 하며 말을 바꾸고 있다고 몰아세우거나, 그동안 나온 정황과 비교할 때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결국은 군검찰의 박 전 단장에 대한 수사와 기소가 정당하다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만든 문건으로 보인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국방부가 나서서 수사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상 ‘하명수사’를 하라고 지시하는 셈이다.
현재 채상병 순직 사건에 대한 외압 의혹의 핵심은 장관을 비롯한 ‘윗선’의 개입인데, 국방부는 진실을 규명하기는커녕 사태를 덮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있다.
이런 국방부의 태도에 오히려 여론이 더 등을 돌릴 판이다.
https://vop.co.kr/A00001640357.html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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