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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님의 로그 입니다.

좋은글 하나라도 놓칠까봐 노심초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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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4-10-25 01:07
    檢의 노골적인 김건희 엄호, 법치주의는 어디로?
    불기소결정서에도 김건희를 '일반투자자'로 규정
    조하준 기자
    입력 2024.10.24


    지난 17일 영부인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검찰이 결정서에서도 김 여사를 '일반투자자'라는 논리로 권오수 전 회장 등의 시세조종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판단한 사실이 23일 한겨레 단독 보도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검찰이 조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김 여사를 감싼 것이어서 이에 대한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는 자체 입수한 검찰의 20쪽짜리 불기소 결정서를 통해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부장 최재훈)가 “김건희가 정범인 권오수 등이 도이치모터스 주식의 시세조종을 한다는 사실을 인식 또는 예견하면서도 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계좌 등을 위탁했거나 제공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뚜렷한 자료가 없다”고 결론 내렸음을 전했다.

    그 근거로 몇 가지를 들었는데
    김 여사가 상장사 대표 권오수 전 회장을 믿고 초창기부터 도이치모터스 주식에 지속적으로 투자한 것으로 보이는 점과 시세조종 관련 전력이 없는 점, 1차 주포 이모 씨와 증권사 직원들이 김 여사가 주식을 잘 모른다는 취지로 진술한 점, 상장사 대표가 시세조종을 한다는 상황을 회사 투자자로는 생각하기 힘든 점, 주식 관련 전문성이 부족한 김 여사가 시세조종을 미필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점 등을 들었다.

    이른바 '7초 매매'가 문제가 됐던 김건희 여사의 대신증권 계좌 거래에 대해서도 검찰은 “김건희가 권오수 등의 시세조종 목적을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보이지 않고, 김건희에게 시세조종의 고의 내지 목적이 있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한 2010년 10월 28일과 11월 1일 김 여사가 대신증권 계좌로 도이치모터스 주식을 각각 10만 주, 8만 주를 매도한 것에 대해서도 검찰은 “당시 권오수 등으로부터 도이치모터스 주식 매도와 관련해 사전연락이나 요청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정만으로 김건희가 권오수 등과 공모해 시세조종 등 범행에 가담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뚜렷한 자료가 없다”고 했다.

    검찰은 김 여사가 “‘일반투자자’일 뿐”이라며 권 회장 등이 시세조종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매도 주문을 제출했다고 인정할 자료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검찰의 주장과 달리 김건희 여사가 정말 '주식 거래나 주식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일반투자자'로 보기 어려운 정황들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김 여사가 도이치모터스 유상증자에 참여하고
    도이치모터스 주식을 장외매수하거나
    도이치파이낸셜(도이치모터스 자회사) 전환사채(CB)를 매수하는 등 ‘일반투자자’라면 경험하기 어려운 거래를 여러 건 수행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검찰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 시민단체가 김건희 여사 또한 연루됐다고 고발했음에도 불구하고 4년 이상 질질 끌며 뭉개고 있었고
    조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아 비판의 대상이 됐다.
    또한 법원에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으나 기각당했다고 거짓말까지 해 스스로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여사를 '일반투자자'라고 못 박으며 불기소 처분을 정당화하는 주장을 했으니 이런 검찰의 발표가 과연 얼마나 신빙성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편, 더불어민주당은 23일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을 비롯해 최재훈 부장검사와 조상원 차장검사를 모두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직무유기죄'로 공수처에 고발했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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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10-25 00:08
    [단독] 안부수 측근 "檢에 '리호남 안왔다'고 설명 불구 조서에 안담겨"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 출석해 증언 예고
    조하준 기자
    입력 2024.10.24

    [탐사보도그룹 워치독]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방북 비용 일부를 201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북한의 리호남에게 줬다’는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 주장의 진실성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안부수씨와 함께 일한 또다른 통일운동가가 “검찰에 ‘리호남은 마닐라 국제 평화대회에 오지 않았다’고 수차례 진술했지만 검찰이 조서에 담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통일운동가 하동혁 대표, 국정원 정보원이자 남북경협연구소 소장 김한신씨, 국정원 직원 등도 최근 국회와 재판 등에 나와 '리호남 안왔다'는 증언을 하고 있는 상태여서 검찰 수사의 공정성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다.

    ■ “검찰이 리호남에 대해 묻길래, 마닐라에 안왔다고 말했다”

    '권력감시 탐사보도그룹' 이 접촉한 통일운동가 김아무개씨는 인터뷰에서 “이화영 전 부지사에 대한 수사를 하는 수원지검에 출석해 리호남은 마닐라 국제 대회에 오지 않았다고 증언했지만 검찰이 조서에 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전 부지사의 각종 재판 기록을 보면, 김씨는 안부수씨의 요청으로 대회 준비 실무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김씨는 총 아홉차례 정도 검찰에 출석한 것으로 기억했다.
    그는 “검찰이 먼저 리호남에 대해 물었다. '리호남이 대회 현장에 왔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길래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해주었다”며 “일단 내가 대회의 모든 준비를 했지만 리호남을 못봤고, 초청된 북한 사람들이 머문 호텔은 한정돼 있었고 그곳의 경비 관련 업무와 보고도 내가 책임졌지만 리호남이 왔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지난 9월 10일 와 만난 안부수 씨는 “중국에서 북한 일행과 함께 있었는데 리호남이 마닐라로 올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며 “리호남을 마닐라에서 내가 못본 것은 맞지만 왔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내가 섭외한 촬영 감독이 중국에서부터 북한 일행과 안부수씨를 계속 촬영했다. 안부수씨 일행이 리호남을 중국에서 만나고 헤어졌다면 리호남이 찍혔어야 하는데 역시 없었다”고 반박했다.

    다른 통일운동가 하동혁씨는 에 “중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북한 일행과 함께 탔지만 리호남은 없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김씨는 다만 “(검찰 주장처럼) 위조 여권 등을 활용해 리호남이 필리핀에 왔을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순 없다”면서도 “리호남이나 송명철 등 북한 관계자들이 김성태 전 회장이나 안부수씨를 중국에서 먼저 만나 70만불을 거기서 받으면 된다. 마닐라에서 그 돈을 받으려면 위조여권도 써야 하고 '환치기'(돈 세탁) 수법을 거쳐 중국으로 다시 가지고 나가야 하는데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서 리호남이 돈을 받아갔을 가능성은 낮다”고 반박했다.

    김씨는 또 “리호남 관련 질문을 검찰이 먼저 꺼냈지만 막상 (내가) 부정적으로 답하자 그에 대해서는 추가 질문도 하지 않고 조서에도 남기지 않았다”며 “안부수씨가 단체 자금 횡령 등을 너무 많이 해서 검찰에 그러한 내용을 알렸고 안씨가 신뢰도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검찰에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고 주장했다.

    이화영 전 부지사의 변호인은 에 “김씨의 검찰 진술조서가 두개 정도 확인되는데 리호남 관련 내용은 없다”고 설명했다.
    검찰의 주장처럼 리호남이 필리핀 마닐라로 돈을 받으러 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리호남이 오지 않았다'는 대회 준비 실무 책임자의 증언,
    △북한이 경기도에 통보한 참석자 명단과
    △안부수씨의 최초 검찰 진술 등에서 리호남 이름 언급이 없는 사실 등에 대해 검찰이 이 전 부지사 재판 과정에서 애써 숨겨왔다면 검찰 수사의 공정성 논란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 박균택 의원(광주 광산갑)은 앞서 '박상용 검사 탄핵 청문회' 때 “통일운동가 김OO 씨가 검찰에 아홉차례 출석해 리호남이 안왔다고 증언했는데 조서에 반영이 안된 거 같다”고 의문을 표한 바 있다.
    김씨는 2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장에 출석해 이러한 내용을 설명할 예정이다.


    2023년 피의자 신문 당시 김성태의 증언.

    ■ 김성태, 판사에게는 “리호남, 2시간 머물렀다” 더니...검사에게는 “돈만 받아서 확 없어져”

    한편, 지난 17일 이 전 부지사에 대한 '대북송금 사건' 수원고법(문주형 재판장) 재판에서 김성태 전 회장은 “리호남이 호텔로 찾아와 와인과 과일을 먹으며 두 세시간 말하고 돈을 받아갔다”고 말했지만,
    지난 해 3월 수원지검에 출석해 받은 조사 때 김 전 회장이 남긴 진술조서를 이 분석한 결과 “리호남이 2019년 7월24일에 호텔로 왔다. 돈만 받아서 휙 없어지는 스타일이다. 돈도 어떻게 가져갔는지도 모르겠다. 조니워커 블루 사면 면세점에서 주는 술 2병 담기는 작은 캐리어가 있는데, 그 캐리어에 담아주었다”고 말한 것으로 확인돼 큰 차이를 보였다.

    문 재판장은 김 전 회장에게
    “(2018년 11월 말 중국 심양에서) 리호남과 김성혜(아태위 실장 겸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책략실장), 박철(아태위 부위원장)을 비롯해 쌍방울 직원들이 같이 술을 같이 마셨다고 했다.
    반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낸 거 아닌가?
    북측 인사들만 있는 게 아니라 쌍방울 직원들도 있는데서 리호남이 얼굴을 보였다고 한 거다.
    (증인은) '리호남은 다른 사람이랑 술자리 안 한다, 둘이만 만난다' 했는데 그 말과 지금 술자리 모임하고는 모순되는 느낌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허재현,김성진,조하준 기자 (탐사보도그룹 워치독) watchdog@mindlenews.com

    ☞ 탐사보도그룹 은 리포액트 허재현 기자, 시민언론 민들레 김성진 기자,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가 만든 권력 감시 공동 취재팀이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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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10-24 23:47
    (나)
    [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사람과 말
    정진명 시인, 우리말 어원 고찰 연재 '36-사람과 말’
    김종혁 기자
    입력 2024.10.24


    이렇게 들락날락하는 혼백과는 달리 영은 개체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사물에 들어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없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러는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존재가 내 안에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주의 본체이고, 내 안에 깃든 우주의 얼입니다.

    이것을 제 안에서 읽고, 부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고,
    예수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만 잘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생과 사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죠.

    모든 종교에서는 이것을 보려고 기도하고 수련합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삶을 마치 헌신짝처럼 버릴 줄 알죠.
    성인은 삶을 ‘추구(芻狗:제사 때 쓰고 내다 버리는 지푸라기 인형)’처럼 여긴다고 한 노자의 말도 이런 것입니다.

    ‘너스레’는 ‘너’와 ‘스레’의 짜임인데, ‘스레’는 ‘삷’의 자취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ᄉᆞᆯ’에 접미사 ‘ᄋᆡ’가 붙은 것이죠.
    ‘슬+에’의 짜임인데, ‘에’는 ‘멍에’ 같은 말에서 볼 수 있는 접미사입니다.
    ‘너’는 ‘니르다(謂)’의 어간 ‘닐, 닏’에서 받침이 떨어진 형태죠. 이른바 리을 탈락!

    ‘말씀’의 ‘ᄉᆞᆷ’도 ‘삷’의 자취입니다.
    몽골어로 무당을 뜻하는 ‘saman’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무당을 전라도에서는 ‘심방’이라고 하는데 이 ‘심’도 ‘ᄉᆞᆷ’의 자취입니다.
    ‘삼, 삳, 살’이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형태죠.

    ‘넉살’도 너스레와 같은 말로 보면 좋겠는데, 좀 께름칙한 면이 있습니다.
    ‘넉넉하다’가 연상되기 때문이죠.
    말을 많이 한다는 뜻으로 보면 이렇게 보는 게 편합니다.

    ‘수선 떤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선’도 ‘숫+언’의 짜임인데, 이 ‘숫’의 옛 표기가 ‘수ᇫ’이어서, ‘ᄉᆞᆷ’과 같은 뿌리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무당이 신의 뜻을 전하는 말을 ‘공수’라고 하는데, ‘공수’는 ‘곰+수ᇫ’의 짜임입니다.
    쓸데없이 말수가 많은 것을 ‘수다’라고 하고, ‘수다스럽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제 눈에는 ‘수ᇫᄋᆞ>수다’로 보입니다.

    ‘이르다’의 옛말은 ‘니르다’입니다.
    ‘닐+으다’의 짜임인데, ‘닐’에서 니은이 떨어진 것이 ‘일’이죠.
    니은이 떨어진 형태는 ‘여쭙다’를 닮았습니다.
    ‘엿+잡(존칭)+다’인데, ‘엿, 엳’은 터키어 ‘yât(언급)’와 똑같습니다.
    ‘노래(歌)’도 여기서 온 말로 보입니다.
    노래는 ‘놀다’의 어간에 어미 ‘다’가 붙어서 된 말로도 볼 수 있는데, 말뜻을 살펴보면 어느 쪽으로 볼지는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양쪽으로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가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공자 가라사대’할 때의 그 말입니다.
    몽골어로 말은 ‘kele’여서 ‘ᄀᆞᆯ다>가라다>가로다’는 여기서 온 말임을 쉬이 알 수 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에 ‘주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소란스럽게 떠드는 것을 말합니다.
    ‘떠들어제끼다’ 같은 말에서도 자취를 볼 수 있죠.

    또 사람의 입을 ‘주둥이’라고 하는데, 이 ‘줃’이 ‘죽’과 닮았습니다.
    때리는 동작을 나타내는 말 중에 ‘죽통을 날리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죽’도 같은 말로 보입니다.

    물론 ‘죽통’은 ‘아구통’과 같은 말이어서 입(주둥이=줃+웅이)을 뜻하는 말이지만, 말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갈래의 말로 ‘주접’이 있습니다.
    ‘줒+업’의 짜임인데, ‘줒’이 바로 말을 뜻하죠.
    ‘업’은 ‘대접’ 같은 말에도 보이는 접미사입니다.
    ‘주절주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상을 보면 우리가 쓰는 말을 뜻하는 말은 크게 5갈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말’ 계열 : 말, 묻다, 묻그리(占), 말씀.
    ‘살’ 계열 : 사뢰다, 넉살, 너스레, 넋두리, 공수, 말씀.
    ‘갈’ 계열 : 가로다, 가로되, 가라사대.
    ‘닐’ 계열 : 이르다. 니르다, 노래.
    ‘줒’ 계열 : 주끼다, 주접, 주절주절, 주둥이.

    ‘불다’ 계열도 있는데, 이것은 바람을 내보낸다는 뜻이 있어서 말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보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온 말이 ‘푸념’입니다.
    푸념은 무당이 신의 뜻을 단골에게 말해주며 꾸짖는 것을 말합니다.

    굿하는 것을 ‘푸닥거리’라고 하는데, ‘푸닥’도 같은 뜻으로 보입니다.
    무당이 공수를 주는 것이죠.
    푸념은 남이 듣거나 말거나 계속 떠드는 것을 말합니다.
    신이 사람에게 주는 말이 그렇죠.
    듣는 사람의 처지를 감안하지 않습니다.
    ‘푼’과 ‘푿’은 한눈에 보기에도 같은 말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씨부리다’도 이 계열의 말입니다.


    이상의 말을 살펴보면 우리 말은 수많은 겨레가 뒤섞여서 만들어진 말이기에 그 뿌리가 각기 다른 곳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계열의 말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웃어른에게 말하는 존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 여쭙다, 사뢰다, 가로다, 푸념’이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처음 우리말은 신에게 뜻을 묻는 일에서 비롯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떠받드는 마음씨가 우리말에 진한 자취를 남겼습니다.
    어쩌면 말은 사람이 아니라 신과 대화하기 위하여 만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긴 이런 현상은 꼭 말만의 일은 아닙니다.
    춤도, 노래도, 글씨도 모두 신을 떠받들고 신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행위일 것입니다.(『우리 시 이야기』)

    그것이 일상화로 격을 점차 낮춰온 것이 사람의 삶에 드리운 문명의 자취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신 없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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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10-24 23:42
    (가)
    [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사람과 말
    정진명 시인, 우리말 어원 고찰 연재 '36-사람과 말’
    김종혁 기자
    입력 2024.10.24

    앞서, 사람을 살피면서 말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철학을 말할 때는 반드시 ‘말’을 좀 더 깊숙이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대철학의 2대 조류가 현상학과 언어철학임을 보면 말을 먼저 자세히 보는 것이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서 ‘말’이 어떤 뿌리를 지녔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문제는 우리말에서 ‘말’을 가리키는 말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언뜻 뿌리가 연결되지 않는 말들을 살펴보아도 이렇습니다.

    “말, 묻다, 떠들다, 주끼다(경상도 사투리), 니르다, 말씀, 가로다, 사뢰다, 넋두리, 묻그리(占), 공수, 푸념, 여쭙다.”

    도대체 이 말들에서 어떤 공통점이 보이고, 어떻게 뿌리가 서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연재를 쭉 읽어오신 분이라면 이런 까닭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말이 용광로처럼 뒤섞여 우리말이 만들어질 무렵에 우리 조상들의 삶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변화와 변동이 있었고,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겨레가 한반도로 밀려들어 각자 자기네 말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용돌이가 잠잠해지고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 대충 뜻이 통하는 엇비슷한 말을 쓰게 된 시대는 신라 시대 중반을 넘어설 무렵이고, 한 말로 정리되어 두루 쓰이게 된 시대는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시작된 이후입니다.
    태조 왕건이 개경에 고려를 세움으로써 그 전의 많은 말들이 고려 수도인 개경 언어로 재빨리 재편되어 일정한 균형과 통일을 이룹니다.

    그렇다고 고려 시대에 지금과 같은 통일된 언어가 모든 백성에게 통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최근세까지도 마치 섬처럼 홀로 남아 자신들이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온 성균관에서 허드렛일을 맡은 사람들은 반민(泮民)이라 하고, 이들이 사는 마을을 반촌(泮村)이라고 했는데, 그곳은 마치 치외법권처럼 그들 스스로 자치조직으로 다스리던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관청에서도 범죄자가 생기면 직접 잡아들이지 않고 그곳 우두머리에게 징계하도록 처리할 정도였습니다.

    쇠백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우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섬처럼 고립되어 소를 잡는 천한 일로 제 겨레의 정체성을 삼아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 천대를 감내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이 완전히 종적을 감춘 것은 일제 강점기의 뒷일입니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이들은 형평사(衡平社)라는 특수조직을 만들어서 강력한 단결력을 보였고, 신분 해방과 독립투쟁까지 나섰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해방 후에 새로운 사회변화를 맞자, 사회의 천대를 피해 스스로 소 잡는 일을 그만두고 모두 다른 일로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지금 정육점을 하는 사람 중에는 형평사와 관계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 뒤로는 이들의 행적을 찾아볼 길 없이 묘연해졌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보통 백성으로 신분세탁을 한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아주 절실한 문제겠습니다만, 어원학을 공부하는 저로서는 너무나 아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밑바닥을 떠받치던 그들이 사라짐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과거 한 단면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언어의 한 갈래를 잃은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아직도 한 가지로 가지런히 정리되지 않은 이런 다양한 말들이 우리 생활 속에 남아서 불쑥불쑥 쓰이곤 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의 뿌리를 찾으려고 하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갈피를 잡아가야 할지 그것부터가 난감해지곤 하는 것입니다.

    이런 혼란을 하나씩 걷어내며 그럴듯한 정답을 찾아가는 것이 학문이고, 어원학입니다.
    가지런히 정리될지 모르지만, 이제부터 하나씩 혼란을 걷어보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맑은 물 밑에 가지런히 놓인 조약돌처럼 우리말의 뿌리가 드러날지도 모르지요.

    우선,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말’을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이 또렷합니다.
    활용할 때 ‘하다’가 붙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의 경우에는 ‘사뢰다, 주끼다, 니르다, 가르다’라고 해서 모두 움직씨의 꼴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말’만큼은 ‘하다’와 결합하여 ‘말하다’라고 움직씨를 이룹니다.
    이것은 마치 ‘신’에 서술형 어미 ‘다’다 붙어서 ‘신다’로 쓰이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 이런 현상은 ‘말’이 원래 단독형으로 쓰였음을 뜻하는 것이고, 생각보다 더 굉장히 오래 묵은 말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말’은 그 전의 어떤 모습(祖語)에서 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우리말에서는 받침이 잘 변합니다.
    ‘빛’을 뜻하는 말에서도 시대에 따라서 혹은 상황에 따라서 ‘빛, 빗, 빋, 빌, 별, 벌, 불, 발’과 같은 방식으로 많이 변합니다.
    물론 홀소리도 변합니다.
    ‘붓, 벗, 밧, 볏’하는 식으로 변하죠.

    하지만 첫소리는 잘 안 변합니다.
    물론 변하는 수가 있기는 합니다만, 말의 변화를 살펴보면 그래도 첫소리는 홀소리나 받침에 비하면 제 본래 모습을 잘 간직하려는 성질이 강합니다.

    그러면 ‘말’의 받침을 조금 변형시켜보겠습니다.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요?
    ‘맏, 맛, 맡, 맣’처럼 변할 수 있겠죠.
    그러면 대번에 비슷한 낱말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우선, ‘묻다’가 있죠.
    ‘묻그리(占)’도 있고, ‘무당’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묻’입니다.
    이제 ‘말’이 어떤 성질을 띤 것인지 또렷이 드러납니다.
    ‘묻’에서 ‘말’로 꼴을 바꾼 것은 아마도 말의 노릇이 달라지면서 그랬을 것입니다.
    캐묻는 형식을 ‘묻’으로, 흔히 하는 말의 형식을 ‘말’로 나눈 것으로 볼 수 있겠죠.
    혀로 보는 ‘맛’도, 코로 보는 ‘맡’도 여기서 갈라져 따로 나갔을 것으로 봅니다.
    모두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과 또 다른 갈래가 ‘사뢰다’입니다.
    옛 모습은 ‘ᄉᆞᆲ다’인데, 터키어로 ‘말하다’가 ‘salva’이고, 드라비다어로 ‘말하다’가 ‘colv’여서 아주 비슷합니다.
    이쪽에서 온 말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갈라져 나간 말들이 많습니다.
    ‘넋두리, 너스레, 넉살, 말씀’ 같은 말이 그런 것입니다.

    ‘넋두리’는 ‘넋’과 ‘두리’가 엮인 말입니다.
    ‘넋(魄)’은 ‘혼(魂)’과 짝을 이루어 사람의 정신을 이루다가,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넋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여깁니다.(『고려침경 영추』)

    그런데 이 ‘넋’이 원래는 말을 뜻하는 말이었고,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 말로도 함께 쓰인 게 아닌가 합니다.
    사람이 말하는 존재이니 말과 사람을 동일시한 듯합니다.
    하지만 넋이 ‘두리’한다고 하면 굳이 넋을 말의 뜻으로 풀이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리’는 말을 뜻하는 말입니다.
    ‘떠들다, 투덜투덜’ 같은 말을 보면 그 희미한 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이해할 때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영(靈)’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말 중에서 ‘얼’이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영이 혼백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혼과 백은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사람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따라붙는 것입니다.
    혼은 하늘에서 오고 백은 땅에서 오는 거죠.
    이 둘은 우리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해서 우리가 ‘필름이 끊긴다’고 표현할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면 혼이 나가고 넋만 남습니다.
    우리가 잠들면 혼이 나가죠.
    잠꼬대는 넋이 하는 두리(‘넋두리’)입니다.

    이 넋을 밀어내고 혼이 들어와서 정상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이 둘이 몸을 떠나 하늘로 돌아가고 땅으로 흩어지는 겁니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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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4-10-24 22:51
    [컬처 인사이드] 하니와 한강 작가 패러디 무엇이 문제일까?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입력 2024.10.24


    ‘SNL코리아 시즌6’에서 국감장에 등장했던 하니의 모습을 패러디했다. 아울러 한강 작가의 표정과 말투를 흉내 낸 장면도 문제가 되었다. 왼쪽이 한강 작가 패러디 장면, 오른쪽은 국감장에 나온 하니 패러디. (사진: 쿠팡플레이 SNL코리아 시즌6 캡처/굿모닝충청=노준희 기자)

    지난 2월 구독자 900만 명의 인기 먹방 유튜버 쯔양은 필리핀 여성과 방송했다가 인종 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쯔양은 구독자와 함께 방송을 진행한다며 필리핀에서 한국인과 결혼해 이주한 여성을 초대했다고 밝혔다.

    ‘필리핀X대한민국의 기막힌 콜라보’라는 자막이 흐르면서 초대된 필리핀 여성은 “안녕하세요. 미소가 아름다운 니퉁입니다”라는 말에 이어 “원래는 농부의 마누라였는데 지금은 개그우먼”이라고 소개했다.

    이 방송 장면은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근본적으로 이 여성은 가짜였다.
    필리핀 여성이 아니라 한국 개그우먼이었다.
    필리핀 출신이거나 결혼 이주민 여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눌한 한국말투는 더욱 비하 의미가 있어 보였다.
    한국 개그맨이 다나카라는 일본인 흉내를 내며 어눌한 말투를 쓰는 것과 같은 맥락의 차별적인 캐릭터 구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다가 일부러 태운 듯한 검은 피부 톤으로 분장까지 했다.
    1980년대 시커먼스 분장을 떠올릴 수 있는 인종차별적인 메이크업이었다.
    당연히 필리핀 누리꾼들은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 해외에서 한국인을 이렇게 묘사했다면 아마도 큰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10월에 들어서서 이런 차별적인 흉내가 또 등장했다.
    ‘SNL코리아 시즌6’에서 국감장에 등장했던 하니의 모습을 패러디했다.
    무엇보다 하니 캐릭터는 어눌한 말투를 사용했는데 이는 베트남계 호주인인 하니를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한강 작가의 표정과 말투를 흉내 낸 장면도 문제가 되었다.
    말투는 물론이고 실눈까지 뜰 필요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 하니 패러디 영상은 SNL코리아 시즌6만이 아니라 구청 홍보영상에서 나왔다. 하니가 국감장에 나온 맥락과는 전혀 관계없는 체육대회 홍보 콘텐츠였다.
    그렇다면 패러디의 원칙과 기준은 무엇일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린다 허천(Linda Hutcheon)은 ‘패러디 이론’에서 패러디는 새로운 맥락에 따라 원본을 인용하며 그것을 비판하거나 아이러니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원작의 텍스트에 비평 또는 아이러니한 거리감이 생길 때 패러디가 된다고 했다.

    단순히 모방하는 것은 모사에 불과하므로 뭔가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남다른 창조성이 중요하다.
    아울러 모순과 허구성을 폭로하는 비판적인 메시지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바흐친(Mikhail Bakhtin)은, 패러디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넘거나 전복시키는 장치라고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패러디에 권력자를 비판하고 약자를 위무하는 내용이 많아지는 배경이 된다.

    약자인 국민이 권력자들을 쉽게 비판할 수 없다면 우회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는데 이는 풍자의 원칙이 된다. 이런 해학적 풍자 수단으로 패러디는 유용하고도 효과적이다.

    마찬가지로 유명인 패러디를 통해 희화화할 때도 그 대상은 비판할 점이 있거나 모순을 감춘 대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하니와 한강은 그러한 희화화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니는 국감장에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서 증언을 하기 위해 나왔다.
    시종일관 진지했다. 호소하면서 나중에는 울음까지 터트렸다.

    이 국감장에는 사측의 대표도 나왔는데 직장 괴롭힘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니는 답답한 심정을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누구를 패러디해야 했을까.

    이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강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를 어눌하게 구사하는 말투를 특징 잡을 일은 아니었다.
    결국, 하니의 후광 효과를 노렸던 국감장의 인사들과 다른 바가 없는 SNL코리아 시즌6였을 뿐이다.

    하니를 등장시키면 주목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소재로 삼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한강 작가를 SNL코리아 시즌6에 등장시킬 이유는 별로 없어 보였다.

    오히려 등장시키지 않았더라면 한강 작가의 이미지 훼손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실눈 캐릭터가 되어 웃음의 소재로 박제되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창조성이나 차별성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작가들의 처지를 외면하는 저작권 단체의 태도를 패러디하는 것이 맞았다.

    요컨대, 하니와 한강, 그들은 문화권력자도 아니고 모순과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한 언행을 하지도 않았다.
    결국, 약자인 여성의 유명세를 프로그램의 인지도를 위해 도구화해 버린 셈이 되었다.

    하니의 경우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도 안 되었다.
    SNL이 미국에서 강력한 패러디 등을 바탕으로 풍자코미디로 인기를 끌어왔고 한국에서도 이러한 점을 시도도 눈길을 끌었지만 갈수록 원래의 그 맥락과 원칙을 잃어버리고 있는 모양새이다.

    SNL코리아 시즌6만이 아니라 구청 홍보영상 사례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패러디의 철학과 정신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0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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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10-24 22:34
    가계부채 관리보다 부동산 부양책? 이 정부, 믿을 수 있나
    가계대출 급증, 전세대출-디딤돌 대출 축소하겠다는 정부... 모순된 정책 기조
    전용복
    24.10.23

    대출이 막혔다고 전국에서 아우성이다. 가계부채 증가를 억제하려는 정부 정책의 결과다. 가계부채 우려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 심각한 혼란이 따른다.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부른 결과를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왜 정부가 신뢰를 잃어가고 있을까?

    10월 현재

    대출 정책 관련 가장 최근의 이벤트는 전세대출과 디딤돌 대출을 축소하겠다는 정부 발표였다. 정부는 전세대출을 억제하는 대책을 내놨다. 세입자가 전세금 대출을 신청하면, 집주인의 신용도를 평가해서 대출 여부와 액수를 정하도록 하겠다고 한다. 집주인이 신용도가 낮거나 이미 많은 대출을 받고 있다면, 세입자는 전세금을 대출받지 못하거나 원하는 만큼 대출받을 수 없게 된다.

    또한 디딤돌 대출도 축소하겠다고 한다. 디딤돌 대출 프로그램은 무주택 서민이나 (저소득) 신혼부부가 생애 첫 주택(5억 원 이하)을 매입할 때 시중의 금리보다 낮은 금리로 빌려주는 제도다. 시중 금리와 낮은 정책 금리의 차이는 정부가 대신 내준다.

    정부는 10월 14일 이 정책대출의 축소를 발표했고, 일주일 후인 10월 21일부터 시행하겠다고 했다. 이에 국민의 불평이 쏟아지자 시행 사흘 앞두고 갑자기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어지러울 지경이다.

    7~9월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달(9월) 초에는 더 큰 혼란이 있었다. 7~8월 가계대출이 급등하면서부터 사달이 시작됐다. 8월 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시중 은행들에 대출 억제를 요구했다. 너무 뜬금없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7월부터 적용 예정이던 스트레스 DSR의 시행도 시작 일주일 전에 갑자기 2개월 연기했던, 즉 대출 증가에 무심했던 금융당국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은행들은 감독과 규제 권한을 갖는 금융당국의 말을 매우 잘 듣는다. 은행들이 대출을 줄이는 방법은 가격(금리)을 올리거나, 대출 총액을 제한하거나, 혹은 둘 모두를 시행하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장이 구체적인 대출 억제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은행들은 보통의 경우처럼 금리를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자 소위 '실수요자들'의 비판이 빗발쳤다. 언론 또한 실수요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볼멘소리를 적극 보도했다. 대출할 수 있는 액수와 금리를 미리 확인하고 주택 매매계약을 체결했는데, 정부 정책으로 갑자기 이자 부담이 커졌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이에 이복현 원장은 며칠 뒤 다시 은행장들을 불러 "금리 인상으로 대출을 억제하는 방식은 너무 쉬운 방식"이라며 은행을 탓했다. 이 말은 금리 인상 대신 대출 총량을 제한하라는 말로 들리는 게 상식이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선별적으로 대출하는 정책으로 급선회했다.

    이를 '대출 할당'이라 부른다. 대출 목표액을 정해 놓고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아예 대출하지 않는 방법이니, 가장 효과적인 대출 억제책이다. 하지만 이 방식의 문제는 대출 수요 중 무슨 기준으로 누구에게 대출할 것이냐는 점이다. 은행들은 이런저런 복잡한 규정들이 제시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유주택자에 대한 대출은 제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실수요자'가 아니라는 암묵적 전제를 반영한 결정이다.

    하지만 이미 주택을 1채라도 보유하면서 또 집을 사려는 사람은 무조건 투기수요자일까? 가령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새 집으로 이사하는 경우에도 대개는 당분간 2주택자가 된다. 또는 더 크고 비싼 집으로 이사하려는 사람들은 실수요자인가, 투기수요자인가?

    이런 문제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대출 할당에 격한 분노를 표했다. 여론이 나빠지자 이복현 원장이 사과하기는 했지만, 변한 건 하나도 없다. 대규모 신축단지 입주금의 경우, 대출하는 은행도 있고, 거부하는 은행도 있다. 어떤 대출은 은행에서는 안 되는데, 제2금융권에는 되고 등등.

    지난 봄

    혼란의 더 깊은 원천은 그 이전부터, 어쩌면 이 정부 출범부터 내재돼 있었던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안 그러다 갑자기' 돌변한 정책 운영 방식 때문이다. 지난 여름까지만 해도 정부는 대출을 억제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정부가 나서서 대량으로 직접 대출하기까지 하지 않았나.

    대출 억제 결정의 직접적 원인은 지난 여름 동안 가계대출이 급증한 데에 있다. 그럼 왜 지난 여름 가계대출이 급등했을까? 결로부터 말하면, 아파트 가격과 거래량이 급증해서였다. 가계대출 통계를 보면, 최근 가계대출 증가는 주택담보대출이 주도했다. 같은 시기 주택 거래량과 가격도 급등했다. 그래서 정부가 진정으로 가계대출 증가를 바라지 않았더라면, 부동산 가격 안정화 대책에 집중했어야 한다. 그랬었나?

    전국의 아파트 가격은 2021년 말을 기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도 이 추세는 반전하지 않았다. 다만 서울의 일부 지역, 특히 가장 비싼 지역의 아파트 가격과 거래량이 반등했다. 그래서 이 지역의 평균 매매 가격과 건당 주택담보대출액도 크게 상승했다. 이것이 최근 가계대출 급등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다.

    여기에 정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정부는 줄곧 부동산 가격을 떠받치는 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사람들에게 아파트 가격이 반등할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몇 가지 큼직한 정부 정책만 떠올려보자. 올해 초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은 전국을 순회하며 20여 차례의 '민생토론회'라는 것을 개최했다. 대통령이 가는 지역마다 지역 맞춤 정책을 약속했다. 지역 인프라 건설과 부동산 개발 정책이 대부분이었다(이 약속을 모두 지키려면 거의 1000조 원에 달한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또한, 올해 정부 재정도 상반기에만 65%를 집행하기로 했고, 실제로 1분기에만 41.9%, 상반기에 63.6%나 집행했다.

    1월 초(1.10 대책)에는 서울의 그린벨트를 풀어 2만 가구의 아파트를 짓는다고도 했다가, 8월에는 이를 8만 가구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민간 건설사가 아파트를 지었는데, 팔리지 않게 되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최대 3만6000채까지 매입해 주겠다고도 했다.

    부동산 개발 정책은 여기에 끝나지 않았다. 1기 신도시의 아파트 중 2만6000호를 재건축 선도지구로 지정하기로 했다. 이들에게는 용적률 인상과 같은 특혜가 주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아파트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도 안정될 것이란 게 이 정책들의 명분이지만, 현실은 정 반대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안다. 거의 모든 부동산 개발과 재건축 소식은 가격 상승으로 결과한다.

    정부의 아파트 가격 부양책의 백미는 정부가 직접 저리의 정책대출을 확대한 사실이었다. 지난해의 특례보금자리론에 이어 올해 초부터는 신생아특례대출을 신설해 '빚 내서 집을 사도록' 독려했다. 최근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기재위)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올해 8월까지 가계 주택담보대출의 73%가 정책대출이었다. 나아가 정부는 내년에도 이 정책대출을 55조 원 제공할 것이란 언론 보도가 나왔다.

    아파트 공화국


    정부는 진정 가계부채를 관리할 의도가 있을까? 다른 말로, 정부는 아파트 가격을 안정화할 의지가 있는 것일까?

    앞서 소개한 사례를 보면, 아파트 가격의 하락은 막고, 가계부채의 증가는 억제하는 것이 정부의 마음인 것 같다. 이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면, 빚 없이 집을 살 수 있어야 한다. 불가능하다. 정부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첫 번째 목표는 부동산 가격 하락 방지였다고 평가함이 합당하다. 여기 소개한 모든 정책은 누가 봐도 부동산 부양책이다. 그것도 짧은 기간 동안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


    왜 그랬을까?

    총선 때문이라는 의심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또는 집주인들을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삼고 싶은지도 모른다.

    문제는 국민 모두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정치와 정책 과정에 부동산 부양책을 끌어들인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는 '정치적 인질'이라는 사실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

    더 중요한 점은 이런 모순적 정책 기조를 추진하고 관리할 능력을 현 정부가 갖고 있냐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목표가 일관되지 않다는 사실이 정책적 혼란의 근본적 원인이다.

    또한 조직적 차원에서 보면, 일관되게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기구와 지도자,
    즉 사령탑 자체가 존재하는지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무정부성이 금융위기로 번질까 나는 두렵다.
    임인왜란님의 프로필 이미지
    임인왜란 오전 02:45 좋아요 좋아요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073087&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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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10-24 22:02
    배달앱 탈퇴 원하지만 대안 없다는 자영업자들
    입력 : 2024.10.23


    자영업자들이 ‘배달앱 지옥’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향신문이 전국 외식점주 11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점주의 80%는 비싼 수수료 문제 등으로 배달앱 탈퇴를 고민하고 있지만 정작 앱 탈퇴를 실행한 점주는 4명 중 1명에 불과했다.

    배달앱을 탈퇴하는 즉시 매출이 급감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가입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배달앱으로 2만원 이하 메뉴를 파는 것은 무조건 밑지는 장사라는 얘기도 들린다.

    과거엔 자영업자가 배달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기도 했고, 지역마다 배달을 대행하는 업체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비자도 점주도 모두 배달앱을 벗어날 수 없다.
    배달앱을 거치지 않으면 음식이나 고객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렵다.
    대형 플랫폼 기업이 막대한 자본력으로 자체 배달망을 강화하면서 중소 배달대행 업체 역시 사라졌다.

    식당·외식업만이 아니다.
    의류를 구매하는 패션앱, 여행 숙소를 예약하는 숙박앱 등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초창기 자영업자들은 앱 덕을 봤지만 어느 순간 종속돼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됐다.

    매출을 좌우하는 게 검색 순위인데 앱이 사실상 이 순위를 정한다.
    시장을 교란하고 공정 거래를 짓밟는 행위지만, 윤석열 정부는 자율 규제를 외치며 수수방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달앱 플랫폼 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출범시킨 ‘배달 플랫폼-입점 업체 상생협의체’의 8차 회의가 23일 열렸다.
    이날 쿠팡이츠는 배달수수료를 현행 9.8%에서 5.0%로 낮추는 안을, 배달의민족은 기존 9.8~2.0% 수수료 가운데 고액 수수료 적용 범위를 줄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들 기업은 메뉴 가격과 할인 설정 등을 자사 앱에 가장 유리하게 하는 ‘최혜 대우’ 요구도 중단하기로 했다.
    무위로 끝난 이전 회의와 비교하면 다소 진일보했지만, 업주에게 배달비나 광고비를 떠넘기는 문제 등은 답보 상태다.

    자영업자 4명 중 3명은 월 100만원도 못 번다.
    자영업자가 전체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사상 최초로 20% 아래로 떨어졌다.

    자영업자들이 망하면 배달앱 존립 기반도 흔들린다.

    배달앱의 갑질은 물가상승으로 이어져 소비자에게 부담이 전가된다.
    자영업자들이 살아야 경제도 살아난다.

    플랫폼 기업은 진정으로 자영업자들과의 상생을 고민하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적극 개입해 배달앱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



    https://www.khan.co.kr/opinion/editorial/article/202410231846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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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10-24 21:52
    ‘사회학과 장례식’
    입력 : 2024.10.23
    이명희 논설위원

    경북 경산 대구대 입구에서 지난 6월 사회학과 재학생이 대학의 2025학년도 신입생 모집 중지 결정에 반대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독자 제공


    “사회학자들은 이 세계들의 기능장애를 분석하고 그 갈등을 보여줘야 한다. 사회학자들은 개인이나 집단에 소크라테스적 산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는 1993년 12월7일 프랑스의 권위 있는 학술상인 국립과학연구원(CNRS) 금메달을 받는 자리에서 희망적인 수상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2013년 에 실어 국내에 알려졌다.
    30여년 전 연설이지만 지금 들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희망과 달리, 언제부터인지 사회학을 비롯해 인문사회계열 학과들은 고사 직전에 몰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취업을 생각하면, 부모들부터 이쪽 전공을 말리는 일도 적지 않다.

    올 것이 온 것인가.
    대구대에서 사회학과 폐지를 결정했다고 한다.
    대구대 사회학과는 다음달 7~8일 ‘사회학과 장례식’을 연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해준 사회학과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 형식의 학술제다.

    강의 개설 45년 만에 이 대학의 사회학과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니 안타깝다. 벚꽃 폈다 지는 속도로, 지방대와 지역이 소멸되고 있다는 그 위기의 신호탄일 수 있다.

    고충을 이해한다 쳐도, 대학이 당장의 효용성만을 내세워 학과를 폐지하는 것만이 답은 아닐 수 있다.
    사회학은 응용할 수 있는 영역도 많은 학문이다.
    예컨대 새벽·로켓 배송으로 문 앞에 도착한 택배는 누가 어떻게 전달했는지,
    요즘 시끄러운 명태균씨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여론조사 결과를 조작했다는 의혹도 비판적·공동체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유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사회학이다.

    그냥 하늘만 봐서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떠 있는지 알 수 없다.
    천체망원경으로 봐야 비로소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학의 기능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사회학은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고, 세상을 깊고 넓게 보는 눈이 되어줄 수 있다.

    사회학과가 대학에서 자취를 감춘 다음, 입담 좋은 강사들의 입으로만 사회학을 듣는 일은 상상하기 싫다.
    이젠 사회학자들이 세상 탓만 할 게 아니라 사회학이 시민을 위한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https://www.khan.co.kr/opinion/yeojeok/article/202410231827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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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10-24 21:36
    읽는 사회, 읽지 않는 사회
    입력 : 2024.10.23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한 권의 소설이 주는 교육적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은 한국 사회를 단번에 ‘문학 학습’의 열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좋은 교사는 한 반 아이들을 공부하게 만들지만, 좋은 작가는 그 책을 읽는 한 사회를 공부하게 만든다.

    인간의 학습은 삶과 역사 전체에서 일어난다.
    인간은 마치 호흡하듯 숨쉬는 순간마다 뭔가를 감각하고, 생각하며, 학습한다.

    새로운 학습은 오래된 관습의 틀을 쪼개며, 역사적 기억의 상처에서 새살이 돋게 만든다. 특히 문학 학습은 교육의 역사에서 그 중심핵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문학은 인간의 실존적 문제상황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표’를 던지게 해 주며, 존재와 인식 속 깊이 잠재된 질문들을 꺼내어 정면으로 응시하게 해 준다.
    이런 문제들은 때로는 너무나 무겁고 아파서 결코 제대로 응시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작가들은 이런 치열함을 누구보다도 먼저 경험하며, 결코 피하지 않는다.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 한강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경험, 감정, 나의 인간에 대한 질문, 모든 회의와 의심들, 그런 것들로부터 도망하면 좋죠. (하지만) 다시 오면 그대로 있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대결을 해야 되는 거예요. 너무 힘들죠. 대결하기 싫죠. 그래도 해야 되잖아요.”

    한강의 작품뿐만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쓴 좋은 글들은 자신만의 정면승부를 통해서 표현해낸 아픔과 두려움을 독자들도 치열하게 경험하도록 밀어붙인다.
    그 속에서 날것으로서의 그 아픔이 그대로 독자들에게 공명되도록 하는 탁월한 능력을 표현한다.
    단어와 문장들은 직접 보고 듣는 것보다 훨씬 더 세밀하게 살과 뼈를 쪼갠다.

    이렇게 쓰인 작품이 결코 재미있게 술술 읽힐 리가 없다.
    이를 통한 ‘배움’은 그 치열함을 작가의 손을 잡고 함께 경험해 나가는 데에서 나오며, 결코 객체화된 스토리 요약본을 통해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읽는 일은 교과서를 펼쳐놓고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난해하며, 두려우며, 또한 인내가 필요하다.

    좋은 글은 개인의 감수성을 넘어 사회적 담론을 생성하는 공론의 장을 창출한다.
    그가 받은 노벨 문학상은 결코 작가 한강 한 사람의 천재적 감수성을 칭송하는 상이 아니다.

    스웨덴 한림원이 가장 먼저 치켜세운 라는 소설의 실제 저자는 어쩌면 그 시대와 역사 자신일지 모른다.
    작가 한강은 그 시대와 역사가 직접 말할 수 있도록 입을 빌려준 훌륭한 매체일 수 있다.

    이 매체를 통해서 ‘말할 수 없도록 침묵이 강요된’ 사람들, 즉 그람시나 스피박이 말하는 서벌턴(subaltern)들이 역사에서 걸어나와서 대중들에게 말을 건다.

    돌아보면,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 사건은 기존의 역사논쟁, 블랙리스트 사건 등과 얽히면서 좁아져가던 공론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하나의 작품이 그간 서랍 속에 잠자던 쟁점들을 부활시키고 이를 통해 무수히 많은 새로운 담론과 지식을 생성하며,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새로운 학습의 루프 안으로 초대된다.


    작품이 논쟁적일수록 그 작품들이 매개되어 전개되는 수많은 토론과 논쟁들은 한 사회의 구습을 진보적으로 다시 바라보게 만들며, 새로운 공론장을 확대해 나가는 데 기여한다.

    민주적 참여에 필수적인 것으로서의 하버마스의 ‘공론장’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시민들의 학습 장면을 촉발하는 일종의 배치적 장치로서의 ‘학습-공론장’이라는 표현으로 재규정될 수 있다.

    공론장 개념은 늘 학습과 결합된 형태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공론장이 시민들의 사회적 합의와 대타협을 도출하는 담론적 공간이라면,
    이러한 공론장은 반드시 깊고 넓은 학습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공론장은 평생학습의 장이다.
    그동안 우리가 읽어온 무수히 많은 문학작품들은 우리 사회에 논쟁의 불씨를 던졌고, 학습-공론장의 문을 열었다.
    문학 작품들은 그래서 반도체나 인공지능만큼이나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며 미래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작가 한강의 작품을 학생들이 직접 읽도록 하는 것이 교육적인가라는 질문이 뜨겁다.
    예컨대 경기도 몇개 학교에서 한강의 작품을 유해도서로 지정했던 사건은 매우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문학 작품에 담긴 치열하고 리얼한 표현들을 어린 학생들이 직접 읽도록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나서서 ‘블랙리스트’ 혹은 ‘유해도서’ 등을 지정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교사와 학부모가 함께 만나서, 비교적 여러번에 걸쳐서, 이 책들을 직접 읽고 토론하면서 무엇이 유해하고 유익한지를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서 각자의 답을 도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102321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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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10-24 21:09
    왜 애꿎은 이에게 울분을 터뜨릴까
    입력 : 2024.10.23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다음을 상상해 보자.
    업무 중이던 당신은 잠시 휴게실에서 쉬고 있다.
    마침, 당신의 친구인 순자가 휴게실에 들어왔다.
    당신과 순자, 그리고 정숙은 회사에 함께 입사해서 돈독한 우정을 쌓아왔다.
    순자는 한숨을 푹 쉬면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나 지금 너무 답답하고 짜증이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당신은 순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순자가 답한다.
    “어젯밤에 정숙이랑 식당에서 함께 저녁 먹으면서 다음 프로젝트를 구상하기로 했거든. 그런데 얘가 약속시간 10분 전에 덜렁 문자로 날 바람맞힌 거야. 나 식당에서 혼자서 밥 먹었다니까. 사실 정숙이가 좀 자기만 생각하잖아. 그래도 자기가 귀찮다고 약속을 맘대로 취소할 줄은 몰랐어. 하아, 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순자의 절절한 하소연을 들은 당신은 어떤 심정이 드는가?

    화자가 어떤 대상에 대한 울분을 제삼자(대개 화자와 대상을 다 아는 사람)에게 터뜨리는 일은 아주 흔하다.

    왜 사람들은 자신을 화나게 한 장본인에게 가서 따지는 게 아니라 엉뚱한 사람을 붙잡고 화풀이할까?

    이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1세기가 넘도록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프로이트를 따르면, 마음은 증기 엔진과 같다.
    마음속의 분노가 제때 배출되지 못하고 꾹꾹 쌓이면 언젠가 폭발한다.
    따라서 제삼자에게 부정적 감정을 털어놓는 행위는 화자의 분노를 줄이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실증 연구는 제삼자를 향한 화풀이가 화를 가라앉히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발견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화를 더 부채질하기만 했다.

    당장 여러분께서 어떤 친구로부터 험한 꼴을 당한 다음에 다른 친구를 찾아가 하소연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시라.
    원인을 제공한 친구에 대한 분노가 싹 사라지던가?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자 제이미 크렘스와 그 동료들은 ‘진화와 인간 행동’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서 우리가 제삼자에게 감정을 터뜨리는 진화적 이유는 친구 간의 경쟁 때문이라고 제안했다.

    인류의 진화 역사에서 동성 친구들 사이에 자신의 든든한 우군을 되도록 많이 확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생각해 보시라.
    먼 과거의 수렵·채집 사회에서 사고, 질병, 상해 등을 당했을 때 즉시 위로금을 지급해주는 보험사는 없었다.
    절친한 친구는 어려울 때나 좋을 때나 정서적 혹은 물질적으로 큰 버팀목이 된다는 사실이 인간뿐만 아니라 몇몇 영장류 종에서도 밝혀졌다.
    ‘친구 좋다는 게 뭐야?’라는 말은 ‘친구는 도우라고 있는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친구들 사이에서 크게 호감을 끄는 ‘인싸’가 되는 것이 관건이라면, 어떤 전술을 구사해야 할까?
    대상이 없는 자리에서 그를 노골적으로 헐뜯고 비방하는 전술이 먼저 떠오른다.
    화자가 대상을 뒤에서 중상모략하면, 듣는 이는 대상에 대한 호감이 떨어지고 화자에 대한 호감은 높아지게 된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 전술은 위험하다.
    듣는 이가 이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어머, 얘 다른 데 가서는 이렇게 내 욕을 하고 다닐 거 아냐.’
    즉 대놓고 뒤에서 비방하는 전술은 듣는 이의 화자에 대한 호감이 오히려 떨어지게 할 수 있다.

    크렘스는 화자가 듣는 이에게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분출하는 전술은 이러한 역효과를 방지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묘책이라고 주장한다.
    대상에 대한 나쁜 정보는 고스란히 다 전달하면서, 화자가 입은 피해에 집중해 화자가 너무 공격적이고 막 나간다는 느낌은 주지 않기 때문이다.


    들에게 순자의 절절한 하소연이 담긴 시나리오를 읽게 하고, 순자와 정숙 중에 누구에게 더 호감이 가는지 물었다.
    예측대로 참여자들은 정숙보다 순자가 더 좋다고 답했다.
    비교를 위해, 대조 집단에 배정된 여성 참여자들에게는 순자가 정숙을 뒤에서 대놓고 비방하는 시나리오를 읽게 했다.
    이 경우에는 순자에 대한 호감도와 정숙에 대한 호감도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요약하자. 최근의 연구를 따르면,
    친구 집단 내에서 화자가 어떤 대상에 대한 울분을 누군가에게 터뜨리는 행동은 그가 대상보다 화자를 더 가까운 친구로 여기게끔 만들려는 전술이다.

    이 가설은 동성 친구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부부 등 다른 관계에서 벌어지는 감정 배출에 대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속상한 마음을 내게 토로하는 친구는 실은 내가 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좋아하게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라는 가설은 왠지 미소를 머금게 한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1023203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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