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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4-08-26 03:41‘2명 사망 구로역 사고’ 중상 노동자, 16시간 ‘응급실 뺑뺑이’
기자엄지원
수정 2024-08-25
지난 9일 노동자 두 명이 숨지고 한 명이 크게 다친 ‘서울 구로역 사고’ 당시, 부상자가 전문의 부족으로 16시간가량 응급실을 전전해야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25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인 김선민 조국혁신당 의원이 소방청·국립중앙의료원·한국철도공사에서 받은 자료를 종합하면,
차량 두 대가 충돌해 인명 피해를 빚은 구로역 사고 당일 새벽 2시16분쯤 부상자 박아무개씨는 사고 발생 10여분 뒤 도착한 119구급대를 통해 이송됐다.
응급수술이 필요하다고 본 구급대는 4분 거리의 구로고대병원 중증외상병원에 연락했으나 ‘수용이 어렵다’고 전달받았다고 한다.
이후 119구급대는 외상센터 핫라인을 통해 서울 중구의 국립중앙의료원 중증외상센터에 연락했고, ‘수용 가능하다’는 외상 전담 전문의의 응답을 들은 뒤 병원으로 이동했다.
박씨를 실은 구급차가 국립중앙의료원에 도착한 건 사고 발생 뒤 1시간5분이 지난 새벽 3시21분이다.
그러나 검사를 진행한 국립중앙의료원 쪽은 ‘대퇴부·골반골 골절로 응급수술이 필요하나 정형외과 전문의가 없어 응급전원해야 한다’는 답을 내놨다.
이에 따라 박씨는 다시 한번 마포구의 서울연세병원으로 전원됐다.
사설구급차를 통해 박씨가 서울연세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5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머리 상처 봉합수술만 했을 뿐, 대퇴부 골절 수술은 어렵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박씨는 다시 전원해 강서구의 원탑병원에 가서야 그날 저녁 6시7분쯤 골절수술에 들어갔다.
사고 발생 15시간51분 만이다.
소방당국의 자료를 보면,
올해 상반기 119구급대의 환자 재이송 2645건 중 40.86%(1081건)에 이르는 사유는 구로역 사고 당시와 같은 ‘전문의 부재’ 때문이다.
김 의원은 “전문의 부재에 대해 지속해서 경고했지만 정부는 ‘충분히 대응하고 있으며 문제가 없다’고만 했다.윤석열 대통령은 하루 빨리 응급·필수의료 확충 방안을 제시하라”고 촉구했다.
https://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1155238.html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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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4-08-26 03:37회의록 부실 생산, 이대로 좋은가
입력 : 2024.08.25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
정치인과 공무원의 차이는 무엇일까.
정치인은 말로 일을 하고, 공무원은 기록으로 업무를 입증하는 것이다.
공무원은 출퇴근, 출장, 회의, 보고 등 모든 업무에 대해 기록을 남겨야 한다.
공공기록물법 제4조는 “모든 공무원과 공공기관의 임직원은 이 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기록물을 보호·관리할 의무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공무원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두 가지 예측이 가능하다.
업무를 하지 않았거나 잘못한 경우다.
잘못한 경우는 여러 갈래가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비리에 접근했거나 무리하게 업무를 진행할 때이다.
이런 경우 정보공개청구를 해보면 ‘기록이 없다’고 답변한다.
기록은 작성했으나 무단 폐기하는 경우도 있다.
공공기록물법은 기록물 전문요원의 심사와 기록물 평가 심의를 거치지 않고 기록물을 폐기한 사람에 대해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법적 정신을 훼손하는 발언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 기록관리 정책이 흔들리고 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오석환 교육부 차관은 지난 16일 국회 청문회에서 “배정심사위 회의 (참고)자료는 파기했고 회의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회의 결과를 회차별로 정리해 회의 결과 보고서로 정리한 자료가 있다”고 했다.
오석환 차관의 발언은 짧지만 너무나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선 회의 자료를 파기했다고 하는데, 어떤 과정에서 그렇게 했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공공기록물법은 모든 자료는 1년 이상 보존하게 되어 있고, 폐기할 때도 심사와 심의를 거쳐야 한다.
참고자료라고 주장하는 기록물도 구체적인 보존기간과 어떤 과정에서 폐기했는지 밝혀야 한다.
회의록이 없다는 것도 믿기 힘들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국회에서 “배정위는 법정 기구가 아니고 장관의 자문을 위한 임의기구”라 회의록을 생산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공기록물법 시행령 18조에는 “주요 정책의 심의 또는 의견 조정을 목적으로 차관급 이상의 주요 직위자를 구성원으로 하여 운영하는 회의”는 반드시 회의록을 작성해야 한다.
교육부와 보건복지부가 의대 증원을 논의한 회의는 여기에 해당한다.
회의록에는 “회의의 명칭, 개최 기관, 일시 및 장소, 참석자 및 배석자 명단, 진행 순서, 상정 안건, 발언 요지, 결정 사항 및 표결 내용에 관한 사항이 포함”되어야 한다.
법 규정 이외에도 수많은 정부 회의에 참여해봤지만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는 곳은 본 적 없다.
회의 결과에 맞게 행정을 집행해야 하는 공무원이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생산하지 않았다면 미리 결론을 내고 개최했다는 의심을 받기 충분하다.
윤석열 정부에서 이런 사례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2022년 전국 공무원 민방위복 교체TF 회의도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당시 행정안전부는 정보공개청구 회신에 “민방위복 복제 개편회의는 내부 업무협조를 위한 회의로 공공기록물법 관리에 관한 시행령 제18조에 규정한 회의록 작성 의무 대상에 해당하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놀랍도록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
회의록은 정부 기록 중 핵심적인 요소이다.
공공기록물법 시행령에 회의록, 조사연구검토서, 시청각 기록은 생산원칙부터 생산방법까지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후대에 중요한 증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의록이 없다면 정부의 설명 책임성은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하다.
ISO 15489(현용 및 준현용 기록 관리를 위한 국제 표준)는 기록의 4대 속성으로 진본성, 신뢰성, 무결성, 이용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중 신뢰성은 기록의 내용이 업무처리, 활동 혹은 사실을 충분히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지를 의미한다.
과연 의대 증원과 관련한 회의록이 기록의 신뢰성을 담보하고 있는지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8252036005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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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4-08-26 03:33우리 안의 히키코모리
입력 : 2024.08.25
우석훈 경제학자
2007년 를 준비하면서 꼭 다루고 싶었는데, 못한 얘기가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 문제였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다 결국 포기했다.
지금도 한국에 은둔형 외톨이가 몇명 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일본은 이 문제를 풀려고 많이 고민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풀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제 일본에서는 청년 히키코모리도 나이를 먹어서 ‘8050’이라고 부르는 형태가 되었다.
80대 부모가 50대 자식을 돌보는 현상을 얘기한다.
일본 정부 발표로는 히키코모리가 약 146만명이다.
40세 이전에는 남성이 더 많다가, 40대 이후로는 여성이 약간 더 많다.
성별 차이가 크지는 않다.
서울이나 인천에서 은둔형 외톨이 현황 조사를 하는데, 법적인 근거가 약해 정확한 통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4년마다 하는 인구 총조사에 통합해서 하면 좀 더 간편하게 할 수 있는데, 아직 그렇게까지 논의가 가지는 않았다.
광주시나 은평구 등 지자체에서 통합지원센터 등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조례를 만들기는 하는데, 역시 법적 근거가 약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예산 확보가 쉽지 않다.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데에는 사회 구조의 문제와 문화적 문제 그리고 개인사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취업에 연거푸 실패하다가 결국에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사례를 많이 보았다.
그렇다고 부모가 나서서 취업을 시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개인이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문제다.
은둔형 외톨이, 사회가 나서야
우리가 어려운 청년들의 문제에 잠시라도 눈을 돌리는 것은 그들이 고독사하는 경우 정도가 아닐까?
대략 청년 인구의 1~2% 정도를 은둔형 외톨이로 보는데, 생각보다 많다.
다른 많은 사회적 문제들은 빈곤과 연관이 있는데, 히키코모리 현상은 꼭 그렇지도 않다.
슈퍼 리치 집안에도 이런 사례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산층 가정에서는 종종 발생한다.
집이 여러 채인데, 그중 한 채에 자식이 살면서 부모도 못 들어오게 하는 사례도 보았다.
또 다른 사례는 나름 넉넉한 집안인데, 부자 동네에 있는 교회에 다니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면서 사회생활을 단절한 경우다.
박사 중에서 은둔형 외톨이를 보..지는 못했는데, 대학원 졸업한 석사 중에서는 몇명 보았다.
마음의 상처와 취업 실패가 겹치면 나름 고학력이라도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다.
한국과 일본의 공통점은 ‘경제 동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제적 요소가 중요하고, 사회안전망이 약하고, 약자에 대해 유독 잔인하다는 점일 것이다.
누구나 성공하고 누구나 번듯할 수는 없다.
어려운 취약 청년에 은둔형 외톨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령화와 함께 아픈 부모를 돌봐야 하는 청년, 대략 10만명으로 추산된다.
일본 정부는 청년 대책으로 노인을 돌보게 돼 퇴사하는 인원을 ‘제로’로 만들겠다며 사회 돌봄 정책을 강하게 추진 중이다.
우린 아직 별 대책이 없다.
고령화 속도가 높아지면서 아픈 부모를 돌봐야 하는 청년들 숫자도 급증할 것이다.
평균 지능과 지적장애인 중간 정도인 경계성 지능 청년도 역시 우리가 돌봐야 하는 취약 청년이다.
이 숫자도 9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역시 복지 제도의 맹점에 놓인 사람들이다.
많은 청년들이 연거푸 취업에 실패하며 경제인구에서 빠지면서 “그냥 논다”는 상황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몇발만 더 가면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
남의 문제가 아니다.
취업 활동을 중단하면 실업통계에서도 빠진다.
화려한 경제 통계 뒤에 이렇게 아프고 힘든 청년들이 숨겨져 있다.
매우 늦었지만 최근 국회에 취약청년지원법이 발의되었다.
각 지자체들이 조례에 의해 관련된 사업을 추진하다 보니까, 예산 확보가 쉽지 않았다.
일부 지자체가 먼저 시도하는 시범사업 수준이라고 보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 모든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사는 동네에 따른 편차가 크다. 또한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 지자체 등 관련된 부처가 나뉘어 있어 통합 관리가 중요하다.
법안은 국무조정실이 총괄 조정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총리가 많은 어려운 청년들을 돌보는 부모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법이 모든 문제를 풀어주지는 못한다.
그래도 법이라도 있어야 통계 체계가 정비되고, 현황을 알아야 새로운 정책들을 개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금 국회 상황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야당은 법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 이 ‘무한 도돌이’가 진행 중이다.
은둔형 외톨이를 비롯해 취약 청년의 문제는 진보·보수와는 크게 관련 없다.
최근 전세사기특별법과 일·가정 양립 지원법 등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취약청년지원법도 부디 무사히 국회를 통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안의 히키코모리, 그들이 문을 열고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돕는 데 여야가 다른 입장일 게 뭐가 있겠는가.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8252031015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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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4-08-26 03:18번지수 잘못 짚은 영국 폭동
입력 : 2024.08.25
최희진 국제부장
지난 12일 영국 런던 레스터광장에서 한 남성이 관광객에게 흉기를 휘둘러 34세 여성과 그의 11세 딸이 다쳤다.
더 큰 피해가 없었던 것은 인근 상점의 경비원 압둘라가 비명을 듣고 달려와 범인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태생인 압둘라는 석사 학위를 따기 위해 영국으로 이주한 29세 청년이다. 졸업 후 전공과 관련한 곳에 취직하고 싶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지난해 12월부터 상점 경비원으로 일했다.
그는 일간 가디언 인터뷰에서 “이 나라를 사랑한다. 이 나라에 살고 싶다”면서 “우리는 영국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호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최근 영국에서 반이슬람·반이민 폭동이 일어난 것을 고려하면 그의 말은 ‘당신들을 해치지 않으니 여기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간곡한 호소로 읽힌다.
폭동은 무슬림·이민자들에게 언제든 혐오·차별의 물리적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줬을 것이다.
폭동의 발단은 지난 7월29일 사우스포트에서 어린이 3명이 일면식 없는 17세 소년의 흉기에 숨진 것이었다.
그러나 사건 직후 이 소년이 소형 보트를 타고 영국에 온 망명 신청자이고 무슬림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불똥이 이슬람 사원(모스크)과 이민자들에게 튀었다.
사건 다음날 사우스포트의 모스크가 공격당한 것을 신호탄으로 반이슬람·반이민 폭력이 영국 전역으로 확산했다.
난민 수용 시설과 모스크가 파손됐고 상점이 약탈당했다.
2011년 8월 이후 13년 만에 영국에서 벌어진 최악의 소요 사태였다.
광기 어린 폭력의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언론은 우선 극우단체 ‘영국 수호 연맹’을 지목했다.
이 단체는 온라인에서 폭도를 모집하고 공격 대상을 지정하는 등 행동 지침을 제시했다.
극우 세력은 불법 이민자들이 영국인의 일자리를 차지하고 정부 지원을 가로챈다고 주장해왔다. 지난 8일 기준 폭동이 일어난 23개 지역 중 13곳은 난민 수용률이 영국 상위 20%에 들었다.
주민들이 극우의 주장에 공명할 만한 환경이었다.
영국인들의 삶이 팍팍한 것도 사실이다.
임금보다 물가가 더 빨리 올라 영국의 실질임금은 2006년부터 사실상 제자리다.
최근 2~3년 사이 고물가 여파로 빈곤층도 늘었다.
영국 정부의 지난 3월 통계를 보면 생계유지가 어려운 절대 빈곤층은 2022~2023 회계연도에 약 1200만명으로, 전 회계연도보다 60여만명 증가했다.
하지만 이민이 이런 문제의 원인은 아니다.
불법 이민의 경우 영국 경제를 무너뜨릴 만큼 규모가 크지 않다.
불법 이민자 수가 최대치였던 2022년(4만5755명)에도 그 규모는 합법적 경로로 이주한 130만명 대비 3.5%에 그쳤다.
불법·합법을 떠나 이민자가 건강보험인 국민보건서비스(NHS) 재정에 부담을 준다는 통념도 사실과 달랐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이민자는 NHS 재정에 연간 180만원을 더 기여했고 영국 의사의 20%, 간호사의 33%가 이민자였다.
맨체스터대 역사학자 데이비드 올루소가는 이번 폭동이 빈곤이나 부의 양극화에서 비롯된 정당한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면서 “포퓰리즘이 촉발한 폭력적인 인종차별주의”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폭도들이 자신과 같은 지역에 살고 생활 형편이 비슷한 무슬림·이민자를 공격한 것은 번지수가 틀렸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주민들 삶의 질이 하락하고 이민자가 극우의 표적이 되는데도 이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되레 혐오를 조장한 정부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달 실각한 보수당 정부는 14년 집권 기간 혐오·차별 정서에 기름을 부었다.
리시 수낵 전 총리는 불법 이민자를 르완다로 강제 이송하는 ‘르완다 계획’을 밀어붙였다.
총리를 지냈던 보리스 존슨은 2018년 신문 기고에서 부르카 입은 여성을 ‘우체통’, ‘은행 강도’라고 모욕했다.
실제로 이번 폭동에서 수낵 정부의 반이민 슬로건 ‘보트를 멈춰라’가 등장했고,
존슨의 기고 직후엔 부르카를 착용한 여성에게 대놓고 우체통이라고 부르는 혐오범죄가 빈발했다.
출범 2개월 차인 노동당 정부는 이번 폭동을 계기로 불법 이민에 현명하게 대응하고 경제적으로 소외된 지역을 재건해야 한다는 과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민과 빈곤이 혐오·차별의 텃밭이 되도록 방치했다가는 노동당과 보수당 공히 극우 세력에 정권을 내주게 될지도 모른다.
반이민 선동을 일삼던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가 8수 끝에 지난달 하원의원에 당선됐다는 사실이 영국 정치에 보내는 신호를 가벼이 여겨선 안 될 것이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8252038005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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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4-08-26 03:07보리농사 짓다가 분노한 농민, 그 섬에서 일어난 일
[독립운동가외전] 도초도 농민들을 지키기 위한 김용택의 항일투쟁
김종성
24.08.25
일본이 한국을 빼앗은 최대 목적은 한국 황제를 퇴위시키거나 한국 군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항일세력을 탄압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 민중을 빼앗고 한국 땅을 빼앗아 일본 왕실과 대자본가들의 곳간을 늘리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영토보다 노동력 확보가 더 우선시됐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굴복시킨 청나라가 조선 사람들을 끌고 돌아가는 장면도 있었듯이, 인구밀도가 낮았던 시절에는 상대국의 노동력을 빼앗는 것이 전쟁의 최대 동기였다.
대지주인 군주와 대귀족들의 경제지표가 전쟁 발발 여부를 가늠케 하는 바로미터였다.
일제가 민중과 땅을 빼앗고자 침략했으므로, 일제로부터 민중과 땅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요체였다.
그런 점에서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는 반일투쟁의 꽃이었다.
그런데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뒷전으로 처져 있다.
지식인이나 전직 관료, 군인들의 항일투쟁이 주로 기억되고 칭송될 뿐이다.
전남 신안군 도초면 도초도의 농민들과 이들의 지도자인 김용택(金容澤)이 전개한 반일투쟁은 별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독립유공자 중에 김용택이란 이름을 가진 분은 둘이다.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에게 피살된 김용택(金龍澤)이 있고,
만주지역의 또 다른 단체인 정의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1929년에 일제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한 김용택(金用澤)이 있다.
참의부 김용택에게는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고, 정의부 김용택에게는 1995년에 같은 훈장이 추서됐다.
이 글의 주인공인 김용택은 이런 영예와는 무관하다.
일본인 지주에 맞섰던 김용택
도초도는 목포 서남쪽 54.5km에 있다.
지금은 전남 신안군에 속해 있지만, 대한제국 멸망 4년 뒤인 1914년 이후로는 무안군 소속이었다.
1924년에 김대중 대통령을 낳은 하의도의 바로 위쪽인 이 섬에서, 바로 그해부터 역사적인 소작쟁의가 발생한 것은 1919년 3·1운동의 영향이다.
1987년 6월항쟁 직후에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듯이, 3·1운동 뒤에는 그 열기를 바탕으로 농민과 노동자의 단결투쟁이 활발해졌다.
이런 움직임이 가장 왕성했던 곳은 전남 지역이다.
농지도 많고 소작농도 많았기 때문이다.
도초도 소작쟁의는 이 섬의 동북쪽인 암태도에서 대규모 소작쟁의가 발생한 뒤에 일어났다.
김용택 외 14인에 대한 1926년 5월 10일 자 광주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은 "전라남도 무안군 도초면에서 소작인들은 대정 13년 10월 중에 소작 조건의 유지·개선을 도모하기 위해 피고인 김용택 등의 주창에 의해 도초면소작인회를 조직하였다"라는 말로 기술한다.
노동쟁의에선 '올려달라'가 핵심 요구사항이지만,
소작쟁의에선 '내려달라'가 핵심 요구였다.
위 판결문은 논농사 소작료를 5할에서 4할로 내려달라는 것이 김용택 등의 요구였다고 알려준다.
말로는 수확량의 5할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일 때가 비일비재했다.
지주의 대리인인 마름이 소작인과 협의해 수확량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수확량이 실제보다 부풀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협상과 달리 소작농과 지주의 협상에서는 "금년에 많이 수확했잖아"라며 갑이 을의 성과를 실제보다 부풀리고 을을 띄워주는 양상이 있었다.
2010년에 제54집에 실린 박찬승 한양대 교수의 논문 '1924년 암태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에 따르면,
암태도 대지주 문재철은 '을 띄워주기'에 능숙했다.
"당시의 신문 기사나 재판 기록에 의하면, 문재철은 논에서 6할 혹은 그 이상(7~8할)의 소작료를 거두어가고 있었다고 한다"라고 논문은 설명한다.
김용택 등은 농경의 주역인 자신들이 불합리한 이유로 고율의 소작료를 뜯기는 현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소작농에 대한 전통적 착취가 일제의 지배로 더욱 가중되는 현상을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인 지주인 나카미치 세이타로 등을 만나러 배에 올라탔다.
위 판결문은 "피고인 김용택·김상희 등이 소작인회를 대표하여 목포로 달려가 중도청태랑(中道淸太郞) 외 여러 명의 지주를 방문"했다고 기술한다.
일본인 지주들은 방문객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김용택 등은 강력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소작료를 한 푼도 내지 않겠다며 소작료 불납운동을 벌였다.
판결문은 이들이 그해 10월에 내야 할 보리농사 소작료를 전혀 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투쟁이 상당히 속도감 있게 전개됐던 것이다.
양측이 팽팽히 맞서는 상황에서 일본제국주의 공권력이 끼어들었다.
법원과 경찰과 행정관청이 지주 쪽을 편들며 소작인들을 탄압하는 형국이 조성됐다.
이 때문에 소작농 대 '지주-일제 연합'의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다.
원호처(국가보훈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1984년에 펴낸 제14권은 주요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 1925.10.7. 전남 무안군 도초도에서는 불납한 소작료에 대한 가차압을 시행하려고 온 집달리와 경관에 대항하여 소작인 1000여 명이 시위 행렬하다.
○ 1925.10.11. 전남 무안군 도초도에 목포경찰서의 무장경관 120명이 출동하여 새벽에 동도 소작회 간부 20여 명을 검거하다.
○ 1925.10.19. 무안군 도초도의 소작쟁의사건으로 소작회 간부 등이 구금된 것에 분개하여 동(同) 소작회원들은 목포서에 쇄도하여 경찰과 대충돌하여 중경상자가 다수 발생하고 10여 명이 검속되다.
반일 대 일제... 민족문제가 된 소작쟁의
이 사건은 단순한 소작쟁의로 그치지 않았다.
일제 공권력이 일본인 지주를 편드는 양상은 이 사건을 민족문제로 발전시켰다.
이런 속에서 경성노농회·조선청년동맹·전조선노농총동맹 등의 항일단체들이 소작농 편에 가세했다.
반일 진영 대 일제 진영의 대결로 판세가 확대됐던 것이다.
이 와중에 '탄핵소추'의 불똥을 맞은 이도 있다.
2020년에 제86호에 실린 최성환 목포대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도초도 소작쟁의의 전개 과정과 특징'에 따르면,
김용택 등은 소작인회가 결성된 1924년 10월에 면민대회를 개최하고 면장 고석규 불신임안 제출을 결의했다.
그런 뒤 12월 27일, 고석규를 탄핵하는 진정서를 무안군청에 제출했다.
이 일은 유력 일간지에도 보도됐다.
그해 12월 28일자 는 '도초면장 배척'이라는 기사에서 고석규가 지역 사회에서 얼마나 미움을 많이 받는지를 소개했다.
신문 2면 중간에 있는 이 기사 옆에는 고석규의 비행을 한층 상세히 소개하는 별도의 기사가 실렸다.
이에 따르면, 고석규는 행정업무는 게을리하면서도 일본인 지주들을 비호하고 소작료 징수를 돕는 일에는 열심을 보였다.
자기 동생 고순규에게 일본인들의 소작료를 받아주라는 지시까지 내렸을 정도다.
안 그래도 법원 집행관들이 하고 있는 일을 고순규가 거들도록 한 것이다.
고순규는 소작료를 거둬가는 수준이 아니라 소작농 집에 침입해 곡식을 그냥 집어 가는 행태까지 보였다.
이렇게 한국 민중 대 지주-일제 연합의 구도로 전개된 도초도 소작쟁의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위 논문은 "40여 명의 지주로부터 4할제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다"고 말한다.
동시에, 소작인회 지도자들은 탄압과 수감 생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위 논문에 따르면,
김용택은 징역 10월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약 16개월간 수감됐다.
김상희는 징역 8월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약 12개월을 살았다.
그 외의 약 20명은 5개월에서 11개월 정도를 살았다.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왕성한 사람들이 소작인회를 이끌었을 것이므로, 이들이 농토를 떠나 감옥에 수감된 기간 동안에 지역 농민들의 생계유지와 농업경영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김용택이 주도한 도초도 소작쟁의는 전통적인 지주들을 뺨치는 일본제국주의의 농민 착취로부터 한국 농민과 한국 농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의 투쟁에 열광하고 찬사를 보냈다. 위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햇수로 2년에 걸쳐 수감생활을 했고, 형무소도 광주와 대구를 오갔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김용택은 해방 이후 무안군의 초대 군수(재직 기간 1948.12.11~1950.4.1)를 지내기도 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056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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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4-08-25 17:55[하승수의 직격] 산업폐기물, 변칙증여까지 이뤄지는 복마전
하승수(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
발행 2024-08-25
대한민국 폐기물 가운데 90% 가까이는 산업폐기물(사업장폐기물)이다.
가정에서 배출하는 종량제 봉투에 든 폐기물,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폐기물 등 생활폐기물을 모두 합쳐도 대한민국 전체에서 배출되는 폐기물의 10%가 안 된다.
그러니 대한민국 폐기물 문제의 핵심은 산업폐기물이다.
무분별하게 추진되는 산업폐기물 처리시설
산업폐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산업폐기물의 양이 줄어들지 않으면 대한민국 전체 폐기물의 양이 줄어들 수 없다.
그런데 정부는 생활폐기물을 감량하라는 캠페인만 하고 있다.
산업폐기물은 영리업체들에게 맡겨놓고, 사실상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영리업체들이 전국 곳곳에서 산업폐기물매립장, 소각장, 유해 재활용시설(소각과 유사하거나 소각보다 더 환경오염 우려가 큰 시설들이다)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의 추세를 보면, 대기업, 사모펀드를 포함해서 온갖 업체들이 이윤만 보고 산업폐기물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인·허가만 잘 받으면 수백~수천 억을 챙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시설들로 인한 피해는 지역주민들이 입고 있고, 환경이 오염되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환경정의, 경제정의의 측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산업폐기물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활폐기물처리시설의 경우에는 입지선정 절차라도 밟게 되어 있지만, 산업폐기물처리시설의 경우에는 영리업체가 ‘이곳에서 매립장, 소각장을 하겠다’고 하면 입지가 되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채석장(토석채취)을 하면서 수십 년간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혀 온 자리에 산업폐기물 매립장이나 소각장을 하겠다고 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전남 보성군 벌교읍, 경북 고령군 쌍림면 등).
5,000억 원으로 평가되는 산업폐기물 매립장 업체
지금 산업폐기물 사업 가운데서도 가장 이윤이 많이 나오는 사업은 산업폐기물 매립장이다. 그래서 업체들은 어떻게든 산업폐기물 매립장 인·허가를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충북 괴산메가폴리스산업단지반대대책위원회는 18일 사리면사무소 부근에 산업폐기물 설치를 반대하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2021.05.18. ⓒ사진 = 뉴시스
산업폐기물 매립장이 얼마나 돈이 되는지는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어펄마캐피탈라는 사모펀드가 ㈜제이엔텍이라는 산업폐기물 매립장 업체의 지분 51%를 2,700억 원에 인수하기로 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고 있다.
지분 100%로 환산하면 5,0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제이엔텍은 충남 당진에 있는 매립장 업체로 2021년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매립용량 규모가 국내 최대 수준이기는 하지만, 인수ㆍ합병 시장에서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거래된 것이다.
그런데 ㈜제이엔텍의 주주들이 출자한 자본금은 100억원이다.
투자금 대비 50배로 지분가치가 올라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제이엔텍의 회계감사보고서를 보면, 주주들은 이와 별개로 300억 원을 이미 배당금으로 챙겼다.
투자금 대비 현금배당을 이미 3배 받았고, 그 이후에도 지분가치는 투자금 대비 50배에 달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횡재’ 수준의 사업이다.
변칙증여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어
이처럼 산업폐기물 매립장이 엄청난 이윤을 남기는 사업이 되다 보니, 그 과정에서 변칙증여가 일어날 가능성도 매우 크다. 변칙증여의 과정은 간단하다.
산업폐기물 매립장 인·허가가 확정되기 이전에 대주주가 자녀에게 일부 지분을 갖게 하는 것이다.
가령 자본금이 10억원인 회사를 만들고 20대 자녀에게 1억으로 10%의 지분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 1억을 증여로 처리하더라도 증여세는 수백만 원만 내면 된다.
그리고 산업폐기물 매립장 인·허가가 확정되면 자본금 10억 원의 회사는 지분가치가 수천억 원에 달하는 회사가 된다.
10% 지분만 갖고 있어도 졸지에 수백억 원대의 자산가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 이유는 산업폐기물 매립장 인·허가만 받으면 ‘횡재’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 변칙증여의 여지도 생기는 것이다.
환경운동연합과 공익법률센터 농본, 지역환경운동연합 및 산업폐기물 주민대책위원회 은 지난 3월 14일 SK 본사가 있는 종로구 서린빌딩 앞에서 ‘산업폐기물 처리의 공공성 확보를 요구하기 위한 집중행동’에 나섰다. ⓒ하승수 제공
더욱 기막힌 것은, 최대 30년까지 사후관리를 해야 하는 산업폐기물 매립장에서 문제가 발생해서 수습이 안 되면, 결국 국민세금으로 사후관리를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매립장은 매립을 할 때 돈을 버는 것이고, 매립이 끝나면 돈은 안 되고 사후관리만 해야 한다.
여기에 대비해서 업체가 사후관리 이행 보증금을 미리 내도록 제도가 되어 있지만,
보증금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경우에는 결국 국민세금으로 사후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다.
이미 전국 곳곳에 세금으로 사후관리를 해야 하는 매립장들이 속출하는 상황이다.
‘이익은 사유화, 부담은 사회화’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돼
따라서 지금과 같은 산업폐기물 사업을 그대로 놔둔다는 것은 환경정의의 측면에서나 경제정의의 측면에서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부담은 사회화’하는 것을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
8월 29일 국회에서는 산업폐기물처리의 공공성ㆍ책임성 확보를 위한 법개정 방안 토론회가 열린다. 안호영/김주영/이학영/박홍배/이용우/박해철/송재봉/이광희/강득구/김남근/박지혜 국회의원과 환경운동연합, 공익법률센터 농본, 민변 환경보건위원회 등이 공동주최하는 토론회이다.
폐기물관리법, 「폐기물처리시설 설치 촉진 및 주변지역 지원 등에 관한 법률(폐촉법)」을 바꿔서 산업폐기물 처리의 공공성ㆍ책임성을 개선해보자는 취지의 토론회이다.
부디 22대 국회에서는 복마전이 된 산업폐기물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입법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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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4-08-25 17:44“권역응급센터에 혼자 당직” 의사가 전한 의료붕괴 실상
권종술 기자
발행 2024-08-25
“붕괴는 확정되었다. 일말의 방법이 없다.”
서울 서남권 권역응급의료센터인 이화여대목동병원의 응급의학과 남궁인 교수가 페이스북을 통해 전한 의료붕괴의 실상이다.
남궁인 교수는 여러 권의 저서를 낸 작가이기도 하다.
남궁 교수는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권역응급센터에 혼자 당직의사로 근무하는 상황을 전했다.
남궁 교수는 “현재 내 업무는 응급 진료 체계 붕괴의 상징이다. 나는 권역응급센터에서 혼자 근무한다”며 “여기는 하루 육십 명 정도를 진료하는 서울 한복판의 권역센터다. 그리고 매 듀티(당직)마다 의사는 나 혼자다”라고 밝혔다.
또한 “응급실 환자 수는 이전에 비해 줄었다. 하지만 단순 열상이나 안과, 정형외과, 정신과, 이비인후과 등의 마이너 환자나 명백한 경증을 제외한 수”라며
“응급의학과 의사가 해야 하는 일은 사실상 줄지 않았다. 진료 업무 총합은 비슷하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인근 병원과 119의 문의, 내원 환자와 보호자 등을 응대하는 동시에 “환자를 진료하고 오더를 내고 차팅을 하고 설명을 하고 중간 경과를 확인하고 영상을 판독하고 퇴원약을 처방하거나 전화해서 입원을 부탁하거나 타원에 진료 의뢰서를 쓰는 일을 해야 한다”면서 모든 업무를 혼자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정부의 의대증원이 맞서 전공의 등이 대거 이탈한지 6개월 동안 이어진 인력부족에 따른 것이다.
남궁 교수는 “권역센터에서 의사의 뇌는 다섯 개가 기본이다. 인턴 둘을 제외해도 세 명 정도는 필요하다”면서 “이전부터도 여유 있게 크로스체킹을 할 시간 따위는 없었지만, 이론상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혼자다”라고 적었다.
아울러 동시에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는 환자들의 상태가 악화해도 미처 다 살펴볼 수도 없는 열악한 상황임을 전하며 “지금은 현대 서울이고, 여기는 중증 환자를 책임지는 권역센터지만, 나는 이걸 혼자 한다. 현재 의료 체계는 시한폭탄이다. 아득바득 막아내는 내 존재가 시한폭탄을 그대로 증명한다”고 적었다.
최근 한밤중 교통사고로 인한 응급 환자 사례를 들어
“우리 병원은 올해 2월부터 정형외과에서 응급수술을 한 적이 없었다. 불가능하다고 답했다”며 “한 시간 뒤에 다시 전화가 왔다. 서울과 경기도의 모든 병원에서 거절당했다고 했다. 현재 수도권에서 팔과 다리가 부서져 뼈가 튀어나온 사람은 갈 곳이 없다”고 개탄했다.
결국 남궁 교수는 환자를 받아 밤새 수술을 했다.
코로나 재유행에도 대응지침이 유명무실한 상황도 꼬집었다.
그는 “격리 지침도 사라졌고 수가도 없어졌다”면서 “코로나 환자를 그냥 다른 환자 옆에 입원시켜도 되는가? 현지침대로 중환자 옆에 코로나 환자를 두어도 되는가? 이전처럼 격리실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것 역시 예견된 시한폭탄이라고 경고했다.
남궁 교수는 “상위 기관일수록 인력이 이탈해서 응급실이 문을 닫고 있다. 그러면 환자는 다른 병원에 쏟아지고 다시 그 병원도 문을 닫는다”며
”며칠 전부터 우리 병원도 밤 근무 결원이 생겼다. 그나마 막아내고 있던 인력이 이탈해서 밤중에 열두 시간 동안 권역 센터가 문을 닫는다. 그러면 환자가 갈 곳이 없고 간호나 기타 인력도 출근하지 못한다. 의사 한 명이 없어서 환자는 병원을 잃고 의료진은 직장을 잃는 셈“이라고 절망했다.
자신이 과중한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지 의문스럽다는 남궁 교수는
“기본적으로 업무 중에 쉬는 시간이 1분도 없다. 직원식당에서 잠깐 밥을 먹는 게 사치”라며 “올해 초에 디스크가 터졌고 저번 달부터는 오른쪽 눈이 잘 안 보인다. 초점이 잘 안 맞아 어지럽고 틈틈이 목뒤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오른쪽 팔이 저리다”고 자신의 상황을 적었다.
남궁 교수는
“이 붕괴는 확정되었다. 일말의 방법이 없다”며
“아무도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고 모든 환자를 막아내고 모든 판단을 내리면서 소리 지르는 보호자를 달래고 경찰 조사를 받고 뼛조각을 치우는 일을 밤새 해야 한다”고 자조했다.
이어 “처음부터 이탈하기는 쉽고 유입되기는 불가능한 구조다.
그런데 재난과 사고와 중환자는 어김없이 발생한다.
구급차는 지역을 넘어 뺑뺑이를 돌고 의료진의 번아웃은 일상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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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4-08-25 16:16몇 번이고 탄핵받고도 남을 만한 친일 방송인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혜구
김종성(qqqkim2000)
24.08.24
만당 이혜구는 한국음악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01세로 사망한 지 사망 5년 뒤인 2015년에 제58집에 수록된 신대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논문 '만당 이혜구(1909~2010)의 음악사학'은 "선생님은 고대로부터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유물이나 악보 및 기록이 있는 모든 갈래의 음악과 그 주변 상황을 바른 우리 음악사학 정립을 위한 연구 대상으로 하였다"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이러한 모든 연구 성과 중에서 3회에 걸친 의 역주와 정간보를 비롯한 여러 옛 악보집에 담긴 음악 실체와 그 해독 방법에 관한 연구 결과들은 특별히 이 방면의 우리 음악사학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한국국악학회가 발행하는 위 학술지의 2020년 제68집에 실린 이용식 전남대 교수의 논문 '이혜구 만당학 성립의 시대적 배경과 개인적 경험에 관한 논구'는 "만당 이혜구는 한국음악학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라고 한 뒤 "만당의 음악학 즉 만당학은 근대 한국음악학의 커다란 줄기를 형성했다"라며 "만당학은 많은 제자들에 의해 현재까지도 한국음악학의 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연구방법론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평한다.
이혜구가 받는 이같은 학문적 존경과 배치되는 것은 그가 에 등재돼 있다는 점이다.
제3권 이혜구 편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이 절정에 달했을 때 30대 방송인인 이혜구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려준다.
"1939년 9월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부장 대리를 지냈고, 1941년 11월 제2방송부 편성과장을 지냈다. 1943년 6월 경성방송국은 제1, 제2방송부 제도를 폐지하고 편성과와 제1, 제2보도과를 신설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때 한국어 방송을 사실상 총괄하는 제2보도과장을 맡았다."
언뜻 보면 친일 이력이 대단치 않아 보일 수도 있다.
일제하에서 방송국 과장을 역임한 것까지 친일행위에 포함시키는 것은 과도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 의미의 방송국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어 방송을 사실상 총괄하는 제2보도과장"이었다.
그가 이 직책을 수행한 시기는 일제가 방송을 동원해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할 때였다.
이런 시기에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한국어 방송의 실무를 책임졌으니, 일제의 세계 침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가 한국음악사를 정리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유사 이래 최악의 제국주의 침략에 가담한 것도 일제가 볼 때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는 일에서 선전전을 담당했으니, 세계사적 의미에서 보면 후자의 역사적 의의가 더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역사를 정리하는 데 일조했다고 해서 결코 덮이지 않을 범죄를 그가 일제 막판에 저질렀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제 말기에 방송이 전쟁 도구로 전락
대한제국 멸망 1년 전인 1909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혜구는 경성고등보통학교부속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훗날의 경기고)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본과 문학과를 졸업했다.
그런 다음, 23세 때인 1932년에 한국방송공사(KBS) 전신인 경성방송국에 입사했다.
처음에 담당한 프로그램은 학예와 어린이 코너였다.
1년 뒤인 1933년에는 국악 프로그램 편성 쪽으로 담당 업무가 바뀌었다.
그로부터 6년 뒤부터는 편성과장·보도과장 등을 역임하게 됐다.
그가 편성과장과 보도과장을 지내던 시기의 경성방송국은 일반적 의미의 방송국이 아니었다.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송국이 아니었다.
식민지 방송을 관장한 조선방송협회를 다룬 강혜경 숙명여대 교수의 논문 '일제 말기 조선방송협회를 통해 살펴본 방송 통제'(2011년 제69권)에 이런 설명이 있다.
"1938년 총독부는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서도 적용하여 국민정신총동원령을 공포하고 7월 1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창설하여 모든 보도기관에 여론의 지도와 통제, 시국 인식 보급을 강요함에 따라 방송의 전쟁수행 도구로서의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일제 말기에 방송이 전쟁 도구로 전락했다고 지적하는 이 논문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는 전시체제가 되면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중문화를 접하는 것도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이 시기의 방송은 오로지 전쟁 방송이었다.
'오로지'란 표현이 과장되지 않는다는 점은 위 논문에 실린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도 확인된다.
"1941년 4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인사들까지 참석하는 총력방송연구회를 신설하여 매달 1회씩 개최했으며, 방송심의회도 이해 12월에 총력방송심의회로 개편됨으로써 방송은 오직 전쟁방송으로서의 기능만을 강요받게 되었다."
이혜구는 1941년에 편성과장이 되고 1943년에 보도과장이 됐다.
그런 시점에 "오직 전쟁방송으로서의 기능만을" 강요받는 보도 책임자가 됐다.
탄핵 제도가 있었다면 탄핵소추와 탄핵심판을 여러 번 받고도 남았을 일이다.
일본의 국운이 걸린 그런 긴박한 시기에는 소소한 실수만 해도 교체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기에 승승장구했다.
변덕스럽고 예측불허의 전쟁 국면에서도 일제의 요구를 무리 없이 소화해냈던 것이다.
일제의 침략전쟁 선전전에서 핵심 역할 수행
1932년부터 1945년까지의 방송국 근무 기간 중에서 1938~1945년은 방송이 전쟁 도구로 확실히 전락한 기간이다.
이 기간에 침략전쟁을 선전해 주고 봉급을 받았으니, 그가 벌어들인 수입은 친일 재산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친일 재산에 의존하며 살았던 그가 36세 나이로 맞이한 해방 뒤에는 색다른 모습을 보였다.
보통의 친일파에게서는 보기 드문 행적이 나타났다.
은 "해방 후, 1945년 9월 초대 서울중앙방송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47년 9월 미군정과 갈등을 빚으며 사직했다"고 설명한다.
훗날 KBS가 될 방송국의 사장이 됐다가 미군정과 사이가 틀어졌던 것이다.
1947년 7월 15일 자 은 이혜구가 전날 사표를 제출한 일을 전하면서 "사무 운영에 있어 미국인 고문들과 사이에 원활치 못한 점"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그해 8월 7일 자 는 한국 내 반탁투쟁에 대한 소련의 시각을 방송에 내보냈다가 서울고검의 조사를 받은 일도 있다고 보도했다.
신탁통치를 주도한 쪽은 미국인데도 남한 언론과 보수세력은 이를 소련의 작품으로 호도하고, 신탁통치 방안의 핵심은 통일적인 한국임시정부 수립인데도 언론과 보수세력은 이를 자주독립의 연기로 호도했다.
이혜석은 이에 대한 소련의 불만을 방송에 내보냈다.
일반적인 친일파들과 달리 모스크바 3상 회의의 본질을 직시하고 있었으며 '직'을 걸고 진실을 보도할 생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군정과의 갈등으로 방송국을 떠난 이혜구는 정부수립 이듬해에 복귀했다.
은 1949년 8월 다시 서울중앙방송국장을 맡았다가 50여 일 만에 그만두었다"고 설명한다.
그 뒤 그는 음악학자의 길을 걸었다.
미군정과 갈등을 빚은 1947년에 서울대 국악과 교수로 임용된 그는 1954년에 한국국악학회 회장이 되고 1970년에 서울대 음대 학장이 됐다.
1975년에는 예술원 회원이 되고, 95세 때인 2004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혜구의 인생 행적에는 알쏭달쏭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일제의 침략전쟁 선전전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인류를 상대로 하는 이런 범죄행위를 빼놓은 채, 한국음악사의 선구자로만 떠받드는 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음악사 정리에 끼친 공헌을 인정하더라도, 몇 번이고 탄핵받고도 남을 만한 친일 방송인이었다는 점을 그에 대한 평가에서 빼놓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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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4-08-25 15:52"교토국제고 한국어 교가, 일본에선 아무말 없었다"는 의 왜곡 보도
일각에 비난 여론 분명히 존재... 왜곡까지 하며 KBS 기미가요 논란과 비교한 의도 무엇인가
24.08.24
박성우(ahtclsth)
23일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에서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등학교가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2021년 고시엔 무대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에 얻은 쾌거이자 106년의 고시엔 역사에서 최초로 외국계 학교가 우승하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특히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로 시작하는 한국어 교가가 고시엔에서 울러 펴지면서 재일동포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윤석열 대통령 또한 "열악한 여건에서 이뤄낸 기적 같은 쾌거는 재일동포들에게 자긍심과 용기를 안겨주었다"며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우승을 축하했다.
, "일본 사회, 교토국제고 한국어 교가에 비난 없었다" 주장
▲ 지난 21일, 는 지면 2면에 "공영방송에 "동해바다~" 노래 나와도 日(일)선 아무말 없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해당 기사는 "교가에 나오는 '동해'는 한국 기준 동해를 뜻한다. 이 바다의 공식 일본 명칭은 '일본해'라며 "일본 공영방송이 자국 영해를 다른 나라 기준에 따라 부르는 장면을 방영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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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교토국제고의 이러한 선전과 관련해 왜곡 보도를 한 언론도 있었다.
바로 다.
지난 21일, 는 지면 2면에 "공영방송에 "동해바다~" 노래 나와도 日(일)선 아무말 없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해당 기사는 "교가에 나오는 '동해'는 한국 기준 동해를 뜻한다.
이 바다의 공식 일본 명칭은 '일본해'라며 "일본 공영방송이 자국 영해를 다른 나라 기준에 따라 부르는 장면을 방영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사는 "하지만 이에 대해 일본 사회에서 비난이 일었다거나 NHK에 항의가 쇄도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 했다. 한국어를 못 알아들어서라고 보기도 어렵다"면서 "NHK는 일본어 자막에 '동해'를 '동쪽의 바다'라고, 사실상 그대로 번역해 내보냈다"고 보도했다.
또한 기사는 최근 KBS가 광복절에 기미가요가 나오는 오페라인 을 편성해 논란이 된 점을 언급하며 "우리가 유럽 거장의 대표적 오페라에 기미가요가 잠시 나온다고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지는 한번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 싶다"고 지적했다.
'동쪽의 바다' 자막은 학교 측이 제공한 것... 비난 여론 의식한 조치로 봐야
▲ 하지만 해당 기사는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먼저 NHK의 일본어 자막은 NHK가 번역한 것이 아니다. NHK는 교토국제고의 교가가 방송에 나갈 당시 '일본어 번역은 학교에서 제출했다'라는 자막 또한 가사 자막과 함께 화면에 띄웠다. '한국의 학원'이라는 가사 또한 '한일의 학원'으로 바뀌어 자막으로 나갔다.
ⓒ NHK
하지만 해당 기사는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먼저 NHK의 일본어 자막은 NHK가 번역한 것이 아니다.
NHK는 교토국제고의 교가가 방송에 나갈 당시 '일본어 번역은 학교에서 제출했다'라는 자막을 가사 자막과 함께 화면에 띄웠다.
'한국의 학원'이라는 가사 또한 '한일의 학원'으로 바뀌어 자막으로 나갔다.
그렇다면 왜 교토국제고는 가사의 자막을 그렇게 바꾼 것일까.
바로 한국어 가사를 향한 혐한 세력의 비난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백승환 교토국제고 교장은 23일 CBS 와의 인터뷰에서 "2021년에 교토국제고가 4강에 진출했을 때 한국어 교가에 대한 비난이 아주 심했다"고 밝혔다.
박경수 전 교토국제고 교장 또한 23일 와의 인터뷰에서 "사실 내 임기 중에 교가를 (일본어로) 바꿀 생각이었다"라며 그 이유로 "한국어 교가에 거부감을 가진 일부 우익 일본인들의 항의로 학생 안전이 우려됐던 탓"이라고 꼽았다.
이어 박 전 교장은 교사와 학생들이 반대해 한국어 교가가 남게 되었다고 밝혔다.
즉, NHK의 일본어 자막은 한국어 교가는 유지하되, 학생들의 안전을 우려해 교가를 비난하는 세력을 자극할 가사는 수정한 교토국제고 측의 고육지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해당 기사는 이를 마치 NHK가 교가의 수정 없이 그대로 번역했다고 왜곡한 것이다.
교토국제고 교가에 비난 여론 없다? 일부 비난 여론 분명 존재해
▲ '야후 재팬'에 올라온 보도에는 17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이 중 상당수는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9000개의 추천을 받은 한 댓글은 "NHK는 사실을 정확하게 발신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일본해를 '동쪽 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면서 "타국이 잘못된 인식을 갖지 않도록 공영방송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방송하길 바란다"며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를 전파에 내보낸 NHK를 비판했다.
ⓒ 야후재팬 댓글 갈무리
또한 박 전 교장의 인터뷰에서도 나오듯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는 학생 안전이 우려될 정도로 일본 내에서 일부 비난 여론이 분명히 존재했다.
백승환 교장 또한 이번에도 학교에 교가에 대한 항의 전화가 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비난 여론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해당 기사를 인용한 일본 기사의 포털사이트 댓글이다.
21일 일본의 우익 언론인 은 의 해당 기사를 인용하며 해당 기사가 "한국사회의 급진적인 반일 움직임을 의문시했다"라고 평했다.
일본의 대표적 포털사이트인 '야후 재팬'에 올라온 의 해당 보도에는 17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이 중 상당수는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9000개의 추천을 받은 한 댓글은 "NHK는 사실을 정확하게 발신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일본해를 '동쪽 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면서 "타국이 잘못된 인식을 갖지 않도록 공영방송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방송하길 바란다"며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를 전파에 내보낸 NHK를 비판했다.
교토국제고의 교가에 비판적인 여론은 우승 후에도 존재했다.
교토국제고 주장인 후지모토 하루키 선수는 23일 일본 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다. 솔직히 나도 (한국어 교가가)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며 "(한국어 교가가) 비판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교가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해당 인터뷰 기사에 대한 야후 재팬 댓글은 어땠을까.
가장 많은 1만 6000여 개의 추천을 받은 댓글은 "교가에 정치적 메시지를 실어 전국 방송시키는 수법이 발견되었다"며 "학교 스포츠가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는 상태를 방치해 두어도 좋은 것인가"라면서 교토국제고의 교가를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비난했다.
물론 한국의 포털사이트 기사에 달리는 댓글이 그러하듯 포털사이트의 댓글이란 기본적으로 극단적 주장이 부각되며 당연하게도 일본 전체의 여론을 나타낸다고 보기 힘들다. 교토국제고의 교가를 비난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여론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에 대해 "일본 사회에서 비난이 일었다거나 NHK에 항의가 쇄도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 했다"는 의 보도는 분명히 사실과 다르다.
이처럼 사실관계까지 왜곡하면서 '기미가요에 비판적인 한국 사회와 달리 일본 사회는 한국어 교가에 관대했다'고 주장한 의 의도는 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5716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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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4-08-25 15:45폭염 속의 닭장
입력 : 2024.08.22
정유진 논설위원
기온 35도, 습도 60~70%의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에어컨은커녕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보자.
심지어 그 방에는 당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인간들이 빽빽이 에워싸고 있어서 팔을 접어 펼 수조차 없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그 일이 지금 닭과 돼지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폭염으로 국내에서 폐사한 가축이 100만마리를 넘어섰다.
양식 중인 어류도 1000만마리 이상 떼죽음 당했다.
폐사한 가축들은 닭·오리 같은 가금류가 93만7000마리, 돼지가 6만마리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축사마다 대형 선풍기를 돌리며 더위와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농가들은 사육장에서 닭의 사체를 치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폭염으로 힘든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사실 기후변화의 최대 피해자는 인간에게 사육·양식되는 동물들이다.
사람은 더우면 땀이라도 발산하지만, 돼지는 땀샘이 발달돼 있지 않아 기온이 28도를 넘어서면 체온 조절이 불가능해진다.
이럴 때 돼지는 진흙 구덩이에서 뒹굴며 체온을 낮추곤 하는데, 바람도 통하지 않는 공장식 축사에 갇혀 있는 돼지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양식장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도 수온의 변화로 물속 산소량이 부족해졌지만, 산소를 찾아 다른 곳으로 헤엄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풍경은 폭염 속의 닭장이다.
공장식 케이지에 갇혀 사육되는 닭들은 마리당 차지할 수 있는 면적이 A4 용지 한 장 크기인 0.06237㎡보다도 좁다.
닭은 원래 체온이 높은 데다 온몸이 깃털로 덮여 있어, 호흡으로 몸을 식힌다.
주변 온도가 올라가면 분당 20회 쉬던 숨을 240회까지 헐떡거리지만, 공기 중 습도가 50% 이상일 땐 그조차 불가능해진다.
가뜩이나 열에 취약한 닭들이 좁디좁은 축사 안에서 서로의 깃털에 파묻혀 말 그대로 ‘쪄 죽고’ 있는 것이다.
오는 9월7일 열리는 기후정의행진에서는 기후변화의 ‘피해 당사자’인 비인간동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행사가 처음 포함된다고 한다.
지금 기후정의가 가장 절실한 존재는 에어컨 바람 아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놓은 기후와 공장식 축사 때문에 고통받는 비인간동물들이 아닐까.
https://www.khan.co.kr/opinion/yeojeok/article/20240822181501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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