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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하나라도 놓칠까봐 노심초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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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4-06-11 00:38
    석유공사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
    우드사이드 자료는 누락, '140억 배럴' 책임회피성 공지 올린 석유공사
    조하준 기자
    승인 2024.06.10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첫 국정 브리핑에서 경상북도 포항시 영일만 앞바다 석유 매장 발언이 나온 이후 그에 대한 여진(餘震)이 일주일 째 지속되고 있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마치 한국이 산유국이 될 것처럼 장밋빛 희망을 부풀리는 것에만 혈안이 됐고 정당한 의혹 제기에 대해선 “산유국의 꿈을 짓밟는다”는 식의 매도를 일삼고 있다.

    그러나 한국석유공사가 분석을 의뢰했다는 미국 기업 Act-Geo의 신빙성에 대한 의구심이 사그라들기는커녕 점점 더 짙어지고 있음에도 윤석열 정부는 국민들에게 어떠한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뉴스버스가 9일 또 다시 중요한 2개의 단독 보도 기사를 내놓았다.

    먼저 지난 9일 뉴스버스는 〈우드사이드 탐사자료 4월 확보하고도 동해유전 분석 포함 안시켜〉란 제목의 단독 보도 기사를 통해 Act-Geo가 기존 탐사자료와 최신 자료를 분석해 7개의 유망구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으나 가장 최신 자료인 우드사이드의 2차 탐사 데이터는 분석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뉴스버스는 정부의 정보공개포털을 확인해 한국석유공사가 올해 4월 호주 우드사이드 사로부터 탐사자료를 이관받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올해 4월 11일 석유공사는 자료이관(우드사이드사 지분양도 후 탐사자료 반납)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생산해 등록했다.

    정보공개포털에 나타난 석유공사 생산 문건 목록에 따르면 석유공사는 작년 1월 16일 우드사이드사에 탐사자료 반납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 것으로 나와 있다.
    석유공사 생산 문건 목록으로 보면 석유공사는 우드사이드에 탐사자료 반납 요청을 한지 1년 3개월만인 올해 4월에 자료를 반납받은 것이다.

    뉴스버스는 해당 자료가 지난 2019년 4월 우드사이드가 석유공사와 6-1북광구 및 8광구에 대한 2차 조광권 계약을 맺은 뒤 2021년 5월까지 2년간 2,575km² 넓이의 구역 심해 지질구조에 대해 새로운 기술인 3D(3차원) 지진파 탐사를 실시해 취득한 데이터들이라고 전했다.

    이번에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 가능성 진단을 내놓은 Act-Geo는 작년 2월부터 작년 말까지 기존 탐사자료 및 석유공사가 새롭게 제공한 자료를 분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지난 4월에 반납받은 우드사이드사의 2차 탐사자료는 Act-Geo의 분석에 포함되지 않았다.

    Act-Geo의 빅토르 아브레우 박사는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우드사이드사가 조기철수해 심층분석을 못했다"면서 "우드사이드사와 다른 방법으로 분석을 했다"고 말했다.
    아브레우 박사는 또 지난 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우드사이드보다 더 좋고 많은 데이터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당 광구에서 16년간 탐사와 시험시추 등을 해온 우드사이드사의 2차 탐사 데이터를 확보한 상태에서 이를 포함시키지 않은 채 서둘러 매장 가능성을 발표한 것이어서 논란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석유공사는 2차 탐사까지 마친 우드사이드사가 2023년 1월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철수한 이유에 대해 "다른 에너지기업인 BHP와의 합병과정에서 자금 문제로 인한 포트폴리오 조정이 원인"이라며 "탐사는 끝냈지만 유망성 분석을 하지 않고 서둘러 철수했다"고 주장했다.

    우드사이드는 지난 2006~2011년 1차 탐사에서도 지진파 검사를 했지만 2D(2차원) 기술로 당시 취득한 데이터는 우드사이드가 직접 유망성 평가까지 마쳤고 시험 시추를 통해 개발 실패로 종결됐다.
    Act-Geo의 빅토르 아브레우 박사는 7일 기자회견에서 '기존의 홍게, 주작, 방어 등 3개 시추공에서 발견된 자료를 분석했다"고 밝혔다.

    아브레우 박사가 언급한 이들 유정은 모두 우드사이드사가 1차 탐사를 마치고 2013년 시추를 마친 곳이다.
    이와 관련, 아브레우 박사는 이날 "현재 한국 동해 프로젝트의 2단계에 있으며 2단계가 마무리되면 몇개의 추가 유망구조를 더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해 기존 분석에서 누락된 우드사이드 2차 탐사자료를 추가로 분석하고 있다는 추정을 낳았다.

    뉴스버스 측에서 작년 1월의 탐사자료 반납 요청 서한과 지난 4월의 탐사자료 이관 서류를 확인하려 했지만 이들 서류는 모두 비공개로 지정돼 있었다.

    석유공사는 우드사이드사가 철수한 뒤 해당 광구에 대해 노르웨이 쉐워터사에게 용역을 줘 작년 4~5월 3D물리탐사가 진행됐다.
    뉴스버스 측에선 아브레우 박사의 분석과 평가는 10년전 1차 우드사이드 탐사자료와 쉐어워터사의 탐사 자료에 의존한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충격적인 소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같은 날 뉴스버스는 윤석열 대통령이 3일 석유‧가스 140억 배럴 매장 가능성을 발표하고 이틀 뒤 김동섭 한국석유공사 사장이 석유공사 내부도 대부분 몰랐던 ‘깜짝 발표’ 내용과 상황에 대한 책임 회피성 공지문을 올린 사실을 확인해 보도했다.

    김 사장은 내부게시판 공지사항이라는 글에서 ‘140억 배럴 매장 가능성’ 등에 대해선 직접적 언급을 피한 채 “(140억 배럴은) 탐사 자원량이므로 숫자보다 가능성을 보고 꾸준히 추진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140억 배럴’ 언급이 부풀려져 있음을 암시하는 듯 하면서도 ‘숫자보다 가능성’이라고 언급하며 ‘140억 배럴’ 책임론에서 비켜나려는 뉘앙스로 해석된다.

    지난 3일 윤 대통령은 국정 브리핑에서
    “140억 배럴에 달하는 석유와 가스가 매장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동해 가스전 300배 규모”,
    “우리나라 전체가 천연가스는 29년, 석유는 4년 쓸 수 있는 양”
    등으로 발표하면서 국민들의 기대감을 부풀렸다.

    김 사장은 또 “제일 먼저 구성원들과 소통해야 하나, 정보 유출의 염려가 있어 조금 늦게 보고드린 점 양해바란다”고 고개를 숙였다.
    뉴스버스 측에선 김 사장의 이 같은 말을 석유‧가스 자원 개발을 수행하면서도 대통령의 발표 이후에야 상황을 알게된 석유공사 직원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로 해석했다.

    또 김 사장은 공지문 첫머리를 “그동안 여러분의 수고와 노력으로 광개토 프로젝트 3가지 목표 중 1Tcf이상 가스전 발굴을 첫 번째 목표로 심해 전문가 해외 컨설턴트와 함께 종합기술 점검을 하여 7개 유망 구조를 발굴했다”고 격려성 발언으로 시작했다.

    광개토 프로젝트는 2021년 동해 가스전의 매장량 고갈 이후 석유공사의 제2 동해 가스전 발굴 등 3가지 목표를 향한 노력을 말한다.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목표는 1Tcf(조입방피트)이상 가스전 발굴인데, 1Tcf가스전은 2021년 생산 종료된 동해 가스전의 약 4배 규모다.
    석유공사의 광개토 프로젝트 목표가 동해가스전의 4배 규모 이상인데 비해 윤 대통령이 매장 가능성을 언급한 ‘140억 배럴’은 동해가스전의 300배 규모다.

    ‘광개토 프로젝트의 목표치'를 엄청나게 상회하는 ‘석유‧가스 매장 가능성’을 대통령이 직접 발표했지만, 김 사장은 되레 “내용은 제가 타운홀 미팅 등에서 수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우리 구성원들에게는 새삼스러울 것은 없어 보인다”고 가라앉히고 있다.

    뉴스버스는 이를 두고 대통령의 발표와 ‘실제 상황’간 괴리를 잘 아는 석유공사 내부 직원들의 동요를 달래려는 의도로 해석했다.

    김 사장은 “지금의 분위기와 관심은 성공하기 전까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서 “앞으로 많은 과제와 도전이 앞에 놓여 있다.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한국석유공사의 행태는 여러 모로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영일만 앞바다를 탐사, 시추했으나 유망성이 없다고 철수한 우드사이드의 분석 결과는 내팽개친 채 Act-Geo의 분석 결과만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행태는 정상적이라 보기 어렵다.

    또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덜컥 시추 승인을 발표한 것 역시 정상적이라 보긴 어렵다.

    15년 가까이 영일만 앞바다를 직접 시추했던 회사의 분석 결과가 더 정확할 것인지 미국 가정집에 본사를 둔 1인 기업이면서 시추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Act-Geo의 분석 결과가 더 정확할 것인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윤석열 정부가 무엇 때문에 Act-Geo의 분석 결과만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것인지 의문이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310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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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4-06-10 19:27
    ((꼭 반드시 읽어 봐야만 하는 글))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윤 대통령의 영일만 시추, 국민의힘의 미래를 망칠 것이다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4-06-10

    지난주 최대 화제는 윤석열 대통령이 포항 앞바다 석유 시추를 지시한 사건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픽 하고 헛웃음을 짓다가 떠오른 언론계의 오래 된 전설 같은 이야기 하나를 먼저 소개한다.

    1970년대만 해도 창경원의 동물 관련 뉴스는 꽤 잘 팔리는 기사였다.
    그런데 1978년 3월 신아일보라는 일간지 사회면에 ‘국내 최초! 창경원 코끼리 임신 - 어미 코끼리 돌보기 초비상’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당시로는 매우 화제가 된 기사였다.

    이 기사가 나가자 창경원을 출입처로 둔 타사 기자들에게 초비상이 걸렸다.
    언론계에서는 낙종한 것을 ‘물을 먹었다’고 표현하는데, 코끼리 임신은 물을 먹어도 너무 크게 먹은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열이 잔뜩 받은 출입기자들이 창경원으로 쳐들어가 담당자에게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신아일보에게만 흘리면 어떻게 하냐!”고 거칠게 항의했다.
    그랬더니 담당자 하는 말, “코끼리가 임신했다고요? 우린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임신한 사실이 없는 게 확실하냐?”고 기자들이 다그치자 담당자는 “그건 모르죠. 교접은 가끔 하니까···. 임신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기다려봐야 알죠”라고 답하더란다.

    다시 기자들이 “그러면 임신 사실을 언제,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담당자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코끼리 임신 기간이 600일이 넘어요. 덩치가 워낙 커서 임신 후반부가 돼도 알아차리기 쉽지 않고요. 지금부터 한 500일은 기다리셔야 확인이 가능할 거여요.”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물을 먹은 기자들은 낙종한 기사의 사실 여부조차 500일을 기다려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는 기자들의 아우성에 창경원은 결국 “코끼리가 임신했다는 일부 보도는 절대 사실이 아니며, 창경원은 임신했다는 코끼리가 정말 새..끼를 낳을 가능성은 없다고 확신한다”는 해명 보도자료까지 내야만 했다는 코미디 같은 이야기.

    지불분리의 오류

    내가 윤 대통령이 영일만 석유 시추를 지시했다는 뉴스를 보고 픽 하고 웃은 이유가 이거였다.
    기사를 보니 생산을 위한 투자는 2027년부터 시작된단다.
    성공 가능성도 무지하게 낮은데, 만의 하나 석유가 쏟아져 나오더라도 구체적인 상업생산이 시작되는 시기는 2035년이란다.

    와, 여기서 석유가 제대로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를 확인하려면 1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코끼리 임신을 확인하기 위한 600일도 긴데, 2035년이면 차기 대통령도 아니고 차차기 대통령 때 확인이 가능하다.

    어차피 지금은 확인도 안 될 거, 질러놓고 보는 건가?
    어디서 못된 짓만 배워가지고는!

    경제학적으로 볼 때 미래에 벌어질 이익을 지금으로 당겨쓰거나, 지금의 고통을 뒤로 미루는 짓은 거의 불합리할 때가 많다.
    이런 걸 행동경제학에서는 지불분리의 오류라고 부른다.

    할부나 카드 결제 같은 게 그런 것이다.
    당장 지갑에서 돈을 꺼내 물건을 사면 돈이 사라지므로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 지불의 고통을 뒤로 미루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

    그래서 카드 결제를 통해 지불의 고통을 다음 달로 미루거나, 더 심하면 할부를 통해 미래의 12개월로 쪼갠다.
    이러면 지금 지불해야 할 고통이 미래로 분리되기 때문에 마음이 훨씬 편해진다.

    그런데 이 현상을 지불분리의 ‘오류’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런 행태가 전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은행 통장 잔고를 유지하며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는 기쁨은 당장은 마약 같은 기쁨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결제일이 다가오면 본격적인 고통이 시작된다.
    카드 결제건 할부건 고통을 뒤로 미룬 것이지 없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잔고를 유지하며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는 기쁨에 취하면 당연히 과소비를 한다. 미래에 지불해야 할 고통은 더 커진다.

    이렇듯 미래의 기쁨을 지금으로 당겨쓰고, 그 대가를 미래로 미루는 것은 전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 짓을 하고 있다.
    사상 최악의 지지율을 조금이라도 높여볼 심산이겠지. 하지만 열심히 파도 나올까말까 한, 아니, 안 나올 확률이 훨씬 높다는 그 영일만 시추를 자기 입으로, 자기 공인 양 발표하는 행동은 국가 지도자로서 너무 비열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게 안 나오면?
    고통은 어차피 10년 뒤의 일이니 지 알 바 아니고?

    미래 이익을 깎아먹는다

    이 행동이 비열한 또 다른 이유는 만의 하나 석유가 쏟아져 나왔을 때 누려야 할 미래 정치인들의 영광을 윤 대통령이 미리 빼앗았기 때문이다.
    2035년 기적처럼 석유가 쏟아졌다고 치자.
    그때 그 기쁨을 국민들에게 발표해야 할 미래 정치인의 영광은 윤석열 대통령이 이미 가로챘다.

    나는 그래서 윤 대통령의 이런 짓이 국민의힘의 미래를 깎아먹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석유가 안 나온다면 엄청난 욕을 먹게 될 텐데 그 욕은 국민의힘 계열 보수정당이 다 쳐드실 것이다.

    아시다시피 1976년 박정희가 연두 기자회견에서 “영일만 부근에서 양질의 석유를 발견했다. 이 7광구에 석유가 묻혀 있을 수 있다”며 설레발을 친 적이 있었다.
    가수 정난이는 ‘7광구’라는 노래까지 히트시켰다.
    온 나라가 산유국의 꿈에 미친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는 어떻게 전해지나?
    “나의 꿈이 출렁이는 바다 깊은 곳, 흑진주 빛을 잃고 숨어 있는 곳, 제 7광구! 검은 진주~”라는 그 노래 가사,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코미디로 기억된다.

    영일만 유전설을 직접 제 입으로 발표했는데도 왜 지지율이 기대만큼 안 오르는지 윤 대통령에게 알려줄까?
    그 짓을 30년 전에 이미 한 번 박정희가 했거든.
    윤석열 대통령 너님이 한 짓도 박정희가 한 짓과 똑같다.

    매우 낮은 확률로 10년 뒤 석유가 터지면 그 공은 윤석열이 가로채고, 매우 높은 확률로 석유가 안 터지면 보수정당은 10년 뒤에도 온갖 욕을 쳐드실 것이다.

    아주 대단한 대통령 납시었다.

    지금쯤이면 보수정당의 청년 정치인들은 댁들이 왜 2년 전에 윤석열을 열렬히 지지했는지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
    이 말이 이해가 안 되면 목 위에 달린 건 박치기 할 때나 써야 하는 거고.


    https://vop.co.kr/A000016552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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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06-10 18:17
    "나라가 위급"... 동학군, 일본과의 전쟁 준비 들어가다
    김학진과 전봉준의 풍모... 한국에 참된 보수 있는지 묻게 하는 1894년 풍경
    24.06.09
    이영천(shrenrhw)

    지사(志士)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큰 뜻을 품은 사람'을 이른다. 나라는 늘 이들에게 기대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소통이 관건이었다. 왕과 신하, 백성 사이 소통이 끊겼다. 이로써 모든 길이 막혀 버렸다. 지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뜻이 같으면 소통은 이뤄진 거나 진배없다. 서로의 처지나 이해관계를 떠나 나라와 백성을 위한 뜻에 손쉽게 합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차이나 방법은 부차적 요소일 뿐이다. 조선은 그러지 못했고, 불행히도 망국의 길로 빠졌다.

    1894년, 나라는 엉망진창에 풍전등화였어도 분명 지사는 있었다. 그 수 또한 수만 명이었다. 그 수만의 대표가 전봉준을 비롯한 몇이었다. 양심적 관리로서 김학진도 탁월한 지사의 풍모를 보여 주었다.

    앞선 행적으로 보아, 보수적 가치에 천착했음이 분명한 나주 민종렬이나 운봉 토호 박봉양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침략적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 국가를 세우자는 전봉준의 뜻에 소극적이나마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라는 최소의 의무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았다. 이게 보수의 가치요, 참된 보수주의자다. 오늘날 대한민국엔 지사는커녕 참된 보수주의자는 있는지? 혹 보수를 참칭하는 수구들 세상은 아닌지?

    전봉준의 뜻에 동의한 이들... 선화당에 마주 앉아

    첫 편지 후 김학진은 두세 차례 더 전봉준과 연락을 취한다. 조정은 일본 꼭두각시로 전락하였고, 강산은 청일전쟁에 무참히 짓밟히는 와중이다.

    김홍집 내각에서 병조판서를 제수받은 김학진은 이를 거부하고 전라감사로 눌러앉을 심산이다. 그는 동학혁명군과 힘을 합해 일본군 침탈에 능동적으로 대비하려 마음먹은 듯 보였다. 명분은 관민상화(官民相和: 백성과 조정, 관민이 서로 협의한다는 뜻)이다. (관련 기사: 6월 21일 새벽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 https://omn.kr/28vq0 ).


    7월 6일. 백마 탄 전봉준이 약간의 호위병과 전주 풍남문에 나타난다. 비무장으로 최경선 등과 차분하게 선화당에 든다.

    지사끼리는 눈빛만 보아도 알아보는 법이던가. 둘은 즉시 서로를 신뢰하며, 처지를 떠나 진정 나라를 걱정하는 지사의 풍모를 보인다. 믿음이 바탕인 차원 높은 소통을 이어간다.

    나라 안팎 정세와 청일전쟁,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 특히 일본의 흉계에 대해 긴 시간 대화를 이어간다. 인품은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서로 같은 점은 높이고 다른 점은 차이를 좁혀나가는 무척 세련된 대화를 나눈다. 겸손과 진지함으로 진정성이 돋보였고, 배석한 최경선과 김성규도 훌륭한 조역을 수행한다.

    봉준이 전주로 들어올 때 …(중략)… 가까운 동지 사오십 명과 함께 들어왔다. 선화당에서 학진을 만났는데, 학진이 길 양편에 무장군인을 배치해 놓았으므로 봉준 등은 긴장하여 얼굴색이 변하였다 …(중략)… 마침내 진심으로 함께 이야기 나누며 속마음까지 드러내 보여 의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군대의 지휘권을 봉준에게 넘겨주었다.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4. p197~198 의역 인용)

    7월 7일, 김학진은 감사 권한으로 각 고을에 관문(官文)을 낸다. '각 수령은 집강소를 인정하고, 동학혁명군과 협의해 폐정을 개혁하라'며 집강소에 합법성을 부여한다. 유일한 통치기구로 인정한 것이다.

    전봉준도 동학혁명군 총대장 자격으로 각 고을 집강에게 '감사와 관민상화 정신으로 모든 일을 협의할 것이니 각 고을 집강도 수령과 협의하라'는 통문을 돌린다.

    이로써 집강소를 통괄하는 동학혁명군 총대장이 전라도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런 합법적 시공간은 일본과 전쟁을 준비할 토대가 되었다. 김학진은 선화당을 비워주며, 각 고을로 나가는 감결(甘結), 지금으로 치면 행정적 지시 공문인 것에 자기 이름도 넣어 달라 당부한다.


    이에 전라도를 통괄하는 도(道) 집강소가 설립되어 명칭을 '전주 도소 혹은 대 도소'라 칭했다.

    이에 유생들 원성이 들끓는다. 이를 빗대어 동학군 전라감사인 '도인감사'라는 말이 퍼지기도 한다. 비아냥거림이 요즘의 수구 언론 뺨친다. 조정의 비난도 빗발친다. 김학진을 탄핵하는 상소가 줄을 잇는다. 군국기무처 김가진이 김학진을 적극적으로 변론하고 나선다.

    집강소는 정통성을 확보했다. 권위와 동시에 우월한 도덕성으로 백성자치의 힘을 배가해 나갔다. 농민들은 진정 꿈꾸던 세상을 이뤘다고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벌어질 큰 싸움에 대한 준비도 착실하게 진행한다. 무기를 정비하고 군량미를 확보했으며, 군자금도 착실하게 비축해 나갔다.

    주야 8일간 격론을 벌인 이유

    그간 오권선의 나주성 공격이 실패했고, 운봉은 다시 박봉양에게 넘어갔다. 김개남은 노골적으로 전봉준과 김학진의 관민상화에 비협조적이다. 더하여, 추석 뒤 김개남의 독자적 봉기설이 무성해진다.

    수백 명 지리산 포수들로 부대를 꾸렸다는 풍문이 떠돈다. 또한 김인배 하여금 동부 전라도와 서부 경상도 세력을 규합, 봉기에 합류시킨다는 말들이 횡행한다.

    전봉준은 청일전쟁과 국내·외 정세, 그리고 동학혁명군에 겨눠질 총부리에 대한 대비책으로 밤샐 정도다. 청일전쟁 전황은 점차 일본으로 기울어 간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군에 저항하는 나주가 큰 걸림돌이다. 이에 전봉준이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직접 민종렬을 만나 담판 짓기로 한다.


    전 대장이 수하 몇과 나주 읍에 이르니 서문을 지키는 태세가 엄중하다. 이런 위험지임에도 불구하고 전 대장이 동문에 들어 바로 관사에 들어섰다. 주위는 이 광경에 무척 당황하였다. 이때 목사는 그가 누구인지 몰라 황망히 일어나 묻기를 "손님은 누구십니까?" 하였다.

    전 대장은 스스럼없이 "나는 동학군 대장 전봉준이외다" 목사는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하여 어찌할 줄 모르자 전 대장이 "목사는 괴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그대도 조선인 나도 조선인인데, 같은 조선인으로서 조선인 대하기를 어찌 이처럼 섭섭하게 한단 말이오. 지금 우리나라는 외국이 독한 손을 내밀어 침략을 꾀하고 국정은 나날이 틀려가고 있느니 나라 존망이 얼마나 위급한지 그대는 알고나 있으시오? 미혹한 그 꿈에서 어서 빨리 깨어나셔야 합니다" 하니 목사 전 대장의 기풍을 보고 언사를 들음에 간담이 서늘하고 말문이 막혀 감히 한마디도 항변할 수 없었다.

    오직 머리 숙이며 전후 까닭 듣기를 청할 뿐이라. 전 대장이 다시 천하대세며, 홍계훈과 강화하던 일이며, 각 군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서로 국사를 논의하는 등 전후 경과를 낱낱이 설명하니, 사유 그럴듯하고 위풍 또한 늠름하여 목사는 다만 한마디 말로 순순히 따름으로써 이날부터 집강소를 설립하여 정사를 보게 하니라.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23~225 의역 인용)


    와중이던 8월 20일, 김개남 봉기설이 현실이 된다. '8월 27일 봉기할 것이니 25일까지 남원에 집결하라'는 통문이 돈다. 그러자 모든 게 급박해진다.

    이즈음 흥선대원군이 동학혁명군에 밀지를 보냈다는 설이 있다. 전봉준과 김개남 중 누가 받았는지 명확지 않으나, 재봉기를 서두른 점으로 미루어 김개남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하지만 당장 봉기하기엔 모든 게 너무 부족하다. 전봉준과 손화중이 김개남을 찾는다. 이 만남이 '남원상회'다. 주변을 다 물리친 전봉준과 김개남 단둘이서 비밀리 상의하며 혹은 언쟁으로 혹은 합의해 가며 주야 8일간 격론을 벌였다고 '남원 동학사'는 기록하고 있다.


    결론은 재봉기다.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준비와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가을걷이가 끝나야만 군사를 모을 수 있다. 아울러 무기와 훈련, 군자금과 군량미 등의 준비가 부족했다. 김개남의 봉기령에 남원에 모인 농민군이 7만이다.

    전봉준은 나주와 마찬가지로 운봉으로 걸음을 뗀다. 박봉양과 담판으로 '상호불가침'을 약속한다. 재봉기는 일본군과의 싸움으로, 결코 운봉을 침략할 까닭이 없다는 요지로 그를 설득한다.


    봉준이 말을 타고 혼자서 운봉으로 들어가 박봉양에게 "지금부터 개남과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서 도인들의 왕래를 막지 않으면 개남 또한 장차 귀화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운봉 백성들은 전쟁의 해독을 입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황현의 앞의 책. p228 의역 인용)

    이제 일본과의 전쟁 준비에만 몰두해야 한다. 봉기는 추수가 끝나는 때가 될 것이다.

    월등한 화력으로 무장했으며, 군사적으로 잘 훈련된 일본군을 이기려면, 병력 10만은 모아야 한다. 그리하더라도 승리가 담보되는 건 아니다. 그러함에도 싸워야만 한다. 설혹 패한다 해도 침략과 잘못된 야욕에 맞서 초개와 같이 맞서야 한다. 그게 나라이고, 참된 백성이며 지사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36542&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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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4-06-10 18:05
    윤석열이 해냈다고? 고3 교실에선 볼멘소리 나와
    [아이들은 나의 스승] 의대 정원 확대가 일선 고등학교에 미친 후폭풍
    24.06.09
    서부원(ernesto)

    "미우나 고우나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한 일을 윤석열 대통령이 해낸 건 맞잖아요?"

    의대 정원을 늘렸다는 점에 대한 한 지인의 후한 평가다.
    대선 이후 2년 넘는 동안 처음 듣는 윤 대통령 칭찬이라 낯설고 어색했다.
    정책의 입안과 추진 과정이 정교하진 못해도 검찰 출신 특유의 뚝심으로 일궈낸 성과라며 엄지손가락을 켜세웠다.
    바닥을 기고 있는 지지율도 조만간 반등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함께 내놓았다.

    그의 말에 부러 대꾸하진 않았다.
    단지 사람에 따라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이 천양지차일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전공의 대부분은 병원에 복귀할 생각이 없고, 일부 대학 병원은 무기한 휴진을 결행할 만큼 의료 현장이 무너진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의사들의 집단 이기주의 탓이지 정부를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거다.

    이참에 의사들의 높은 콧대를 꺾어놔야 한다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의사협회를 압수수색도 하고, 면허 박탈까지도 염두에 두고 밀어붙여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법이라며, 여론의 지지를 받는 지금이 의료 개혁의 적기라고 명토 박았다. 실기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정부에 대한 전공의들의 집단행동과 의사협회의 반발은 직역 이기주의에 매몰된 몽니라는 데 큰 이견이 없다.
    그들은 환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방패 삼아 역대 정부가 추진했던 의료 개혁을 매번 무릎 꿇려 왔다.
    그 와중에 의사들이 '갑'이고, 정부가 '을'이라는 현실을 온 국민이 절감했다.

    의대 정원이 3058명에서 하루아침에 4695명으로 늘었다.
    50%가 넘는 수치다.
    누구는 의사 수의 문제가 아니라 외과와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 의료과의 의사 부족이 문제라고 하고, 다른 누구는 의사들의 수도권 쏠림 현상에 대한 해결이 황급하다고 말한다.
    이든 저든 의대 정원의 확대는 전제 조건일 수밖에 없다.

    다만, 정부의 '막무가내'식 추진으로 정책의 취지마저 곡해되고 훼손되는 형국이다. 애초 결론을 내려놓고, 추진 과정에서 발생할 숱한 부작용은 각급 기관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이어서다.
    만시지탄이지만, 온 국민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정책이라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는 심정으로 신중하고 치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의대 정원 확대, 불안한 고3... 정부는 몰랐을까

    당장 의대 정원 확대가 일선 학교에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의대 진학을 염두에 둔 최상위권 아이들에게 희소식이고, 현재 명문대 재학생들의 반수가 늘어날 거라는 예측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다.
    의대 정원 문제가 온존한 학벌 구조와 맞물리면서 대입 전형을 통째로 뒤흔드는 모양새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걸 정부만 몰랐을 리 없다.

    "정부가 우리더러 재수하라고 등 떠미는 꼴이죠."

    올해 고3인 한 아이의 푸념이다.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그에게 이번 의대 정원 확대는 달갑지 않다.
    자칫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의대 진학을 꿈꾸는 재수생들과 반수생들이 쏟아지면서, 그들에 밀려 수능 최저 등급을 맞추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알다시피, 수능 위주의 정시 전형은 'N수생'들의 독무대다.
    수능에서 지금 고3이 그들의 성적을 넘어서기란 여간해선 어렵다.
    고3이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선 학생부종합전형을 비롯한 수시 전형 말고는 사실상 답이 없다.
    문제는 수시 전형을 너끈히 통과했다고 해도 수능 최저 등급이라는 관문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1500여 명이 그리 큰 숫자는 아니지만, 고등학교 시절 내신 성적이 1등급이었을 명문대 공대 등에 재학 중인 대학생들에게는 어마어마하게 느껴진다.
    수능 당일 컨디션만 좋으면 자신도 그 안에 들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 만한 숫자다.
    의대 정원 확대로 "자신과 같은 '어중간한' 최상위권이 직격탄을 맞게 됐다"는 토로가 나오는 이유다.


    그런가 하면, 미래 과학자를 꿈꾸며 묵묵히 공부해 온 아이들의 마음에도 적잖은 동요를 일으키고 있다.
    명문대 공대는 물론, 과학기술원과 에너지 공대 등 특수목적대학에 재학 중인 이들조차 의대로 갈아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이 부쩍 늘었다는 거다.
    자신의 미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단다.

    의대 정원 확대가 연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은연중에 명문대 공대가 의대에 가지 못한 이들의 '2등 진로'인 양 여겨지게 됐다며 분노하는 목소리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들 사이에서 과학자는 의사 아래의 직업이라는 인식이 보편화하고 있다.
    'SKY서성한중경외시' 읊듯, 이젠 아이들의 뇌리엔 직업조차 서열화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최근 들어 의사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면서 다른 진로를 고민하던 최상위권 아이들이 대부분 돌아섰다.
    과거엔 의대에 갈 성적이 되는데도 공대나 사범대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었고, 의사를 꿈꿨지만 성적이 부족해 차선책으로 간호학과로 진학하는 아이도 드물지 않았다.
    이제 더는 그런 사례를 보기 힘들게 됐다.
    의대는 무조건 성적순이다.

    성적 좋으면 무조건 의대를 권하는 시대

    "네 성적이 아깝지 않니? 나중에 편히 살려면 의대 진학이 '국룰'이야. 적성이야 살아가다 맞춰가면 되는 거고. 노벨상 못 받을 거면 과학자는 배고픈 직업이야. 운 좋게 공기업이나 대기업에 취직한다고 해도 50살에 이르기도 전에 퇴직하는 건 우리 사회의 불문율이고."

    진로 상담이랍시고, 학부모도, 교사도, 심지어 또래 아이들조차 이렇게 조언하는 세태다.
    의대 정원의 확대가 이공계열 학과의 인기 추락과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 정원의 연쇄 이동을 몰고 올 게 불 보듯 환하다.
    물론, 그 도미노 현상의 끝은 의대를 제외한 지방대의 붕괴다.
    지방의 사립대의 경우, 이미 백약이 무효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의대 정원의 확대는 일선 학교의 진학 지도와 진로 탐색 교육과정, 개인별 적성 검사 등을 순식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정부의 정밀하지 못하고 즉흥적인 대입 정책 추진이 교육 현장에 끼친 폐해다.

    지난해 '킬러 문항 출제 배제' 소동에서 최근 '무전공 선발 대폭 확대 방침'에 이르기까지, 불쑥불쑥 꺼내는 정부의 설익은 정책들은 오늘도 '좋아 빠르게 가는' 중이다.

    늘 그래왔듯, 정책의 부작용에 따른 고통은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들의 몫이다.
    일부 아이들조차 "윤석열 대통령은 말만 앞세웠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며 볼멘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한 일을 윤석열 대통령이 해냈다'며 상찬했던 지인에게 건네려던 답변을 아이들이 대신해 준 셈이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3692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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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4-06-10 17:58
    '불교계 이완용'의 정체... 이것까지 일본에 넘기려 했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회광
    김종성(qqqkim2000)
    24.06.09

    숭유억불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을 설명하는 용어다.
    일제는 한국 침략 과정에서 승려들의 친일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 용어를 활용했다.

    세종의 아들인 문종이 임금일 때인 1451년부터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됐다.
    숭유억불의 상징이 된 이 조치가 해제된 것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였다.
    1894년에 동학혁명 진압을 빌미로 조선에 무단 진입한 일본군이 그해 7월 23일(음6.21) 대궐을 점령하고 조선 조정을 손아귀에 넣은 이후의 일이다.


    음력으로 고종 32년 3월 29일자(양1895.4.23) 는 숭유억불의 상징적 조치가 해제되는 역사적 장면을 보여준다.
    이날 총리대신 김홍집이 "지금부터 승도의 입성 금지를 풀어주기를 청합니다. 어떠십니까?"라고 묻자 고종이 재가했다고 일기는 알려준다.

    일기에 따르면, 그날은 낮에 비가 오다가 밤에 맑아졌다.
    조선왕조의 억압을 받다가 왕조 막판에 입성금지 해제를 받은 불교계의 처지와 맞아떨어지는 날씨 변화다.

    그런데 이 조치의 배후에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역사학자 이능화는 1918년에 펴낸 에서 사노 젠레이가 김홍집에게 건의한 내용이 그렇게 실현됐다고 말했다.

    한국 불교계의 역량이 상당했기에 고종이 건의를 받아들인 측면도 컸지만,
    일본의 간섭을 받는 상황에서 일본 승려의 역할에 힘입어 입성 금지가 해제됐다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기는 힘들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제3-3권은 이렇게 말한다.

    "한말에 조선불교가 천대당하고 숭려들이 천민 취급 당하고 있던 조선의 현실을 간파한 일본이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에 압력을 넣어 조선불교계의 염원인 도성 출입금지를 해금시키면서 조선불교계는 급속도로 일본불교와 연합하거나 일본불교화되기 시작하였다."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병합시키려고 한 사람


    일제가 조선왕조와 불교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구한말에 일제에 넘어간 대표적 승려가 이회광이다.
    법호가 회광(晦光)인 그는 철종 임금 때인 1862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고 19세 때인 1881년에 양양 신흥사에서 출가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대한제국 후반기다.
    '동국대 총장'이 된 것도 이때다.
    동국대 홈페이지의 '대학 안내' 코너에서 확인되듯이, 그가 이 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것은 45세 때인 1907년이다.

    그는 이듬해에는 불교 종단도 만들었다.
    제3권 이회광 편은 "1908년 원종(圓宗)의 종정을 맡았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해인사 주지, 불교진흥회 회주, 중앙교무원 이사 등의 이력을 쌓았다.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던 시기에 교단에서 자리를 잡은 이회광은 일본의 힘을 빌려 영향력을 강화하는 노선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불교계 이완용'의 모습을 보여줬다.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병합시키기 위한 작업을 거듭거듭 시도했다.
    제4-14권은 "1910년·1920년·1926년 세 차례에 걸쳐 조선불교와 일본불교의 합병을 시도하여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려" 했다고 설명한다.

    이완용이 나라를 넘기는 한일병합조약에 서명(1910.8.22)한 직후, 이회광도 '모방범죄'에 나섰다. 그는 불교를 넘기는 조약을 추진했다.
    은 이렇게 설명한다.

    "같은 해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 관장인 이시카와 소도우와 회담하고 조선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조약을 맺었다.
    귀국 후 각 도의 주요 대사찰을 방문해 조약에 찬성한다는 날인을 받고자 했으나, 원종 종무원에 의해 조약 전문(7개조)이 통도사 승려들과 전국 승단에 알려지면서 매종역조(賣宗易祖)의 망동이라고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이회광은 이완용의 '매국'에 상응하는 '매종'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종단을 팔아먹고 근원을 바꿔치기'하는 망동을 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10년 뒤인 1920년에는 도쿄의 일본 정부를 움직여 한일 불교를 통합하려 했다. 이때는 한국 불교계의 반발에 직면한 조선총독부가 이회광을 외면하는 바람에 일이 무산됐다.

    에 따르면, 총독부 종교과장 나카라이 기요시가 "조선 사찰은 사찰령에 의해 조선총독이 결정할 것이므로 아무리 본국 대신에게 진정서를 제출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결과다.

    이회광은 1926년에는 일본과 조선의 일치를 꾀한다는 일선융화를 내세워 불교 통합을 추진했다.
    이때는 통합 건의서를 일본 내각에 제출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5월 12일자 2면 우상단은 "그 건백서의 내용은 현재 조선 불교의 모든 긔관을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히 경성 안에 조선불교총본산을 건설하고 그 본산 법당 안에는 석가여래와 명치텬황과 고종태황뎨를 한 자리에 안치하야 정교일치로 일선융화를 텰뎌히 실행하겟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회광은 기존의 불교 기관을 모두 없애고, 석가와 고종황제와 무쓰히토(메이지)일왕을 함께 받드는 조선불교총본산을 만들고자 했다.
    이 시도 역시 실패했다.

    일제의 억압하에서 숨죽여 지내는 승려들도 이회광의 뜻에 동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회광은 위와 같은 친일 과정에서 한국 침략의 장본인들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한국강점 당시의 일왕인 무쓰히토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했다.
    나루히토 현 일왕의 4대조인 무쓰히토가 1912년 7월에 사망하자, 무쓰히토 49재 행사를 열어줬을 뿐 아니라 9월 국장 때는 승려 29명을 대동하고 서울 용산의 조선군사령군 연병장에 가서 애도를 표했다.
    1916년에는 한국 침략의 또 다른 주역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덤을 조선불교계 일본시찰단 일원으로 참배하기도 했다.

    석가모니보다 일왕을 무서워하는 승려들

    극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이회광의 친일은 이권도 두둑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위한 1911년의 사찰령이 그에게는 행운이 됐다.

    은 "사찰령에 의해 30본산의 하나인 해인사 주지 취임 인가를 받았다"고 말한다.
    1926년에 해인사 재산 횡령과 유용으로 인해 피소된 일은 그가 친일을 방패막이로 삼아 해인사 재산에 함부로 손을 댔음을 보여준다.

    그의 종단 활동은 한일 불교 통합을 목표로 전개됐다.
    이것이 단순히 양국 불교의 우호 증진이 아니라 한국 불교의 식민지적 예속을 위해 진행됐으니 그가 종단 활동을 통해 축적한 금전도 엄밀히 말하면 친일재산이다.

    이회광보다 17년 뒤인 1879년에 출생한 만해 한용운 같은 승려는 일제의 침략과 한국불교 예속화에 맞서 싸웠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아무래도 한용운 같은 승려보다는 이회광 같은 승려가 좀더 많았다.

    석가모니보다 일왕을 무서워하는 이런 승려들이 '훨씬 많았다'고 해야 정확하다.

    '불교계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적 승려들로 인해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에서는 제3-3권이 설명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일제 시기 단행된 모든 불교 관련 법식과 법회 방식은 조선 불교의 전통을 없애고 일본식화되었다. 또한 조선불교는 30본산연합회를 시작으로 중앙교무원·조선불교조계종으로 통합기구를 건설하였다.
    이 과정은 조선 불교가 독자적으로 건설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불교정책에 의해 일제의 협력으로 건설되었다."

    "무엇보다 조선불교계가 가지고 있던 금속류와 범종의 헌납은 조선불교계가 일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이는 불교 본연의 생명평화사상을 도외시한 채 일제에 협력하여 불교의 교단을 발전시키려는 일제시대 불교 지도자의 몰역사성과 개인적인 탐욕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03531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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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4-06-10 17:58
    '불교계 이완용'의 정체... 이것까지 일본에 넘기려 했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회광
    김종성(qqqkim2000)
    24.06.09

    숭유억불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을 설명하는 용어다.
    일제는 한국 침략 과정에서 승려들의 친일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 용어를 활용했다.

    세종의 아들인 문종이 임금일 때인 1451년부터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됐다.
    숭유억불의 상징이 된 이 조치가 해제된 것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였다.
    1894년에 동학혁명 진압을 빌미로 조선에 무단 진입한 일본군이 그해 7월 23일(음6.21) 대궐을 점령하고 조선 조정을 손아귀에 넣은 이후의 일이다.


    음력으로 고종 32년 3월 29일자(양1895.4.23) 는 숭유억불의 상징적 조치가 해제되는 역사적 장면을 보여준다.
    이날 총리대신 김홍집이 "지금부터 승도의 입성 금지를 풀어주기를 청합니다. 어떠십니까?"라고 묻자 고종이 재가했다고 일기는 알려준다.

    일기에 따르면, 그날은 낮에 비가 오다가 밤에 맑아졌다.
    조선왕조의 억압을 받다가 왕조 막판에 입성금지 해제를 받은 불교계의 처지와 맞아떨어지는 날씨 변화다.

    그런데 이 조치의 배후에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역사학자 이능화는 1918년에 펴낸 에서 사노 젠레이가 김홍집에게 건의한 내용이 그렇게 실현됐다고 말했다.

    한국 불교계의 역량이 상당했기에 고종이 건의를 받아들인 측면도 컸지만,
    일본의 간섭을 받는 상황에서 일본 승려의 역할에 힘입어 입성 금지가 해제됐다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기는 힘들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제3-3권은 이렇게 말한다.

    "한말에 조선불교가 천대당하고 숭려들이 천민 취급 당하고 있던 조선의 현실을 간파한 일본이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에 압력을 넣어 조선불교계의 염원인 도성 출입금지를 해금시키면서 조선불교계는 급속도로 일본불교와 연합하거나 일본불교화되기 시작하였다."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병합시키려고 한 사람


    일제가 조선왕조와 불교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구한말에 일제에 넘어간 대표적 승려가 이회광이다.
    법호가 회광(晦光)인 그는 철종 임금 때인 1862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고 19세 때인 1881년에 양양 신흥사에서 출가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대한제국 후반기다.
    '동국대 총장'이 된 것도 이때다.
    동국대 홈페이지의 '대학 안내' 코너에서 확인되듯이, 그가 이 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것은 45세 때인 1907년이다.

    그는 이듬해에는 불교 종단도 만들었다.
    제3권 이회광 편은 "1908년 원종(圓宗)의 종정을 맡았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해인사 주지, 불교진흥회 회주, 중앙교무원 이사 등의 이력을 쌓았다.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던 시기에 교단에서 자리를 잡은 이회광은 일본의 힘을 빌려 영향력을 강화하는 노선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불교계 이완용'의 모습을 보여줬다.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병합시키기 위한 작업을 거듭거듭 시도했다.
    제4-14권은 "1910년·1920년·1926년 세 차례에 걸쳐 조선불교와 일본불교의 합병을 시도하여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려" 했다고 설명한다.

    이완용이 나라를 넘기는 한일병합조약에 서명(1910.8.22)한 직후, 이회광도 '모방범죄'에 나섰다. 그는 불교를 넘기는 조약을 추진했다.
    은 이렇게 설명한다.

    "같은 해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 관장인 이시카와 소도우와 회담하고 조선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조약을 맺었다.
    귀국 후 각 도의 주요 대사찰을 방문해 조약에 찬성한다는 날인을 받고자 했으나, 원종 종무원에 의해 조약 전문(7개조)이 통도사 승려들과 전국 승단에 알려지면서 매종역조(賣宗易祖)의 망동이라고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이회광은 이완용의 '매국'에 상응하는 '매종'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종단을 팔아먹고 근원을 바꿔치기'하는 망동을 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10년 뒤인 1920년에는 도쿄의 일본 정부를 움직여 한일 불교를 통합하려 했다. 이때는 한국 불교계의 반발에 직면한 조선총독부가 이회광을 외면하는 바람에 일이 무산됐다.

    에 따르면, 총독부 종교과장 나카라이 기요시가 "조선 사찰은 사찰령에 의해 조선총독이 결정할 것이므로 아무리 본국 대신에게 진정서를 제출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결과다.

    이회광은 1926년에는 일본과 조선의 일치를 꾀한다는 일선융화를 내세워 불교 통합을 추진했다.
    이때는 통합 건의서를 일본 내각에 제출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5월 12일자 2면 우상단은 "그 건백서의 내용은 현재 조선 불교의 모든 긔관을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히 경성 안에 조선불교총본산을 건설하고 그 본산 법당 안에는 석가여래와 명치텬황과 고종태황뎨를 한 자리에 안치하야 정교일치로 일선융화를 텰뎌히 실행하겟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회광은 기존의 불교 기관을 모두 없애고, 석가와 고종황제와 무쓰히토(메이지)일왕을 함께 받드는 조선불교총본산을 만들고자 했다.
    이 시도 역시 실패했다.

    일제의 억압하에서 숨죽여 지내는 승려들도 이회광의 뜻에 동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회광은 위와 같은 친일 과정에서 한국 침략의 장본인들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한국강점 당시의 일왕인 무쓰히토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했다.
    나루히토 현 일왕의 4대조인 무쓰히토가 1912년 7월에 사망하자, 무쓰히토 49재 행사를 열어줬을 뿐 아니라 9월 국장 때는 승려 29명을 대동하고 서울 용산의 조선군사령군 연병장에 가서 애도를 표했다.
    1916년에는 한국 침략의 또 다른 주역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덤을 조선불교계 일본시찰단 일원으로 참배하기도 했다.

    석가모니보다 일왕을 무서워하는 승려들

    극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이회광의 친일은 이권도 두둑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위한 1911년의 사찰령이 그에게는 행운이 됐다.

    은 "사찰령에 의해 30본산의 하나인 해인사 주지 취임 인가를 받았다"고 말한다.
    1926년에 해인사 재산 횡령과 유용으로 인해 피소된 일은 그가 친일을 방패막이로 삼아 해인사 재산에 함부로 손을 댔음을 보여준다.

    그의 종단 활동은 한일 불교 통합을 목표로 전개됐다.
    이것이 단순히 양국 불교의 우호 증진이 아니라 한국 불교의 식민지적 예속을 위해 진행됐으니 그가 종단 활동을 통해 축적한 금전도 엄밀히 말하면 친일재산이다.

    이회광보다 17년 뒤인 1879년에 출생한 만해 한용운 같은 승려는 일제의 침략과 한국불교 예속화에 맞서 싸웠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아무래도 한용운 같은 승려보다는 이회광 같은 승려가 좀더 많았다.

    석가모니보다 일왕을 무서워하는 이런 승려들이 '훨씬 많았다'고 해야 정확하다.

    '불교계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적 승려들로 인해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에서는 제3-3권이 설명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일제 시기 단행된 모든 불교 관련 법식과 법회 방식은 조선 불교의 전통을 없애고 일본식화되었다. 또한 조선불교는 30본산연합회를 시작으로 중앙교무원·조선불교조계종으로 통합기구를 건설하였다.
    이 과정은 조선 불교가 독자적으로 건설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불교정책에 의해 일제의 협력으로 건설되었다."

    "무엇보다 조선불교계가 가지고 있던 금속류와 범종의 헌납은 조선불교계가 일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이는 불교 본연의 생명평화사상을 도외시한 채 일제에 협력하여 불교의 교단을 발전시키려는 일제시대 불교 지도자의 몰역사성과 개인적인 탐욕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03531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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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06-10 17:42
    정부 주장 반복하는 게 올바른 언론일까 [미디어 리터러시]

    언론에 대한 반감이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좋은 언론'을 향한 갈구는 더 커지고 있다는 의미이겠지요. 매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 곧 '미디어 리터러시'가 중요해지는 시대, 우리 언론의 방향을 모색합니다.
    기자명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입력 2024.06.09
    872호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나랏빚 늘어나는 속도가 비기축통화국 중 2위’라고 한다. 기사를 보니 “IMF는 지난 10년간 한국의 정부부채 증가 폭이 비기축통화국 11개국 중 둘째를 기록하는 등 한국의 나랏빚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고 했다”라고 한다.

    그러나 IMF(국제통화기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IMF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IMF의 보고서를 특정 언론이 그렇게 해석했을 뿐이다.

    기자 본인의 주장을 IMF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기축통화국 중 2위라는 기사의 주장도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기사는 달러·유로·엔화 등 8대 준비 통화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를 비기축통화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로를 쓰는 모든 국가를 기축통화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기축통화국이란 다소 모호한 개념이다.

    국제적 통용성이 있고 통화주권이 있어야 기축통화다.
    그런데 유럽의 어느 나라도 환율이나 통화량을 조정할 수 있는 통화주권이 없다.
    그리스가 경제위기에 처했을 때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통해서 재정위기 또는 경제위기를 대응할 수 없다.
    그래서 달러를 쓰는 미국이 기축통화국이란 것은 확실하지만 8대 준비통화국 전체를 기축통화국이라고 칭하는 것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기축통화국은 나랏빚이 많아도 자국 돈을 찍어 갚을 수 있다”라는 표현은 사실이 아니다.
    아무리 기축통화국이라 하더라도 그냥 돈을 찍어서 갚을 수는 없다.

    미국이 그냥 돈을 찍어서 중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상환할 수는 없다.

    달러를 쓰는 미국, 유로화를 쓰는 유럽 국가 그리고 엔화를 쓰는 일본 등을 기축통화국이라고 보아 비교 대상에서 제외하면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선진국이 빠진다.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 등 유로화를 쓰지 않는 북유럽 국가와 싱가포르·홍콩·안도라 등 소규모 도시 국가 정도만 남는다.

    북유럽처럼 세금을 많이 걷어서 국가부채 규모가 적은 나라와 싱가포르 같은 소규모 도시 국가, 그리고 한국의 재정을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정부 주장 그대로 반복, 올바른 언론 아니다

    기사 중에서 “현 정부는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며 매년 20조원대 고강도 지출 구조조정을 단행해왔다”라는 표현은 해설이 좀 필요하다.
    정부가 매년 20조원대 고강도 지출 구조조정을 했다고 홍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지출 구조조정 리스트는 공개하지 않는다.
    어떤 예산사업을 얼마나 지출 구조조정했는지는 공개하지 않고 그냥 ‘20조원대 지출 구조조정을 했다’라고 주장만 한다.
    그러나 검증 가능성 없이 믿음만 강요하는 정부의 주장을 신뢰해야 할까.

    사실 지출 구조조정이라는 말의 정의도 모호하다.
    종료 사업과 감액 사업 중 어떤 것을 선택적으로 지출 구조조정이라고 하는지 기준조차 명확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전 정부의 확장재정 영향으로 정부부채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다”는 틀린 표현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이 “빚 물려받은 소년가장 같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현재 국가부채 증가는 전 정부의 확장재정 책임이 아니다.
    세수 감소의 영향이 더 크다.

    현 윤석열 정부는 2022년 손실보상금 25조원을 포함한 62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 추경을 편성했다.
    2022년 사상 최대 관리재정수지 117조원 적자는 전 정부 책임만은 아닌 것이다.
    2023년 87조원 적자에 이어 올해 관리재정수지 목표도 ‘-92조원’이다.

    세수결손 등으로 목표가 달성되지 못하면 이보다 더 악화될 수도 있다.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올바른 언론이 아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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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06-09 16:03
    행복은 사소한 곳에 숨어 있다


    흔히 사람들은
    무엇으로도 잘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요즘 사람들의 공통된 병입니다.

    그래서
    늘 목이 마른 상태와 비슷하게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초라하고 가난합니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 있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 삶의
    고마움을 느낄 때도 아주 많습니다.

    산길을 지나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할수 있습니다.

    또 다정한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전화 한 통화를 통해서도
    나는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데 있지 않습니다

    ㅡ좋은글 중에서ㅡ


    이 글의 출처는
    뮤직에세이 방송국 꼬마 국장님 사연 중에서
    https://mingi1031.inlive.co.kr/studio/view/user/1001/1337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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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06-09 16:01
    멋있는 人生

    오른 손 부끄럽게 하지 말고
    가는 발길 욕되게 라지말라.

    좋다고 해서 금방 달려들지 말고
    싫다고 해서 금방 달아나지 말라.

    멀리 있다해서 잊어버리지 말고
    가가이 있다고 해서 소홀하지 말라.

    악(惡)을 보거든 뱀을 본 듯 피하고
    선(善)을 보거든 꽃을 본 듯 반겨라.

    은혜를 베풀거든 보답을 바라지 말고
    은혜를 받았거든 작게라도 보답을 하라.

    타인의 허물은 덥어서 다독거리고
    내 허물은 들춰서 다듬고 고쳐라.

    모르는 사람 이용하지 말고
    아는 사람에게 아부하지 말라.

    공짜는 주지도 받지도 말고
    노력 없는 대가는 바라지 말라.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타인을 용서하고
    나를 다독거리는 마음으로
    타인을 다독거려라.

    보내는 사람
    야박하게 하지 말고
    떠나는 사람
    뒤끝을 흐리지 말라.


    이 글의 출처는
    뮤직에세이 방송국 파랑새님 사연 중에서
    https://mingi1031.inlive.co.kr/studio/view/user/1001/1337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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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4-06-09 00:16
    귓속말·환한 웃음... 화보처럼 담긴 김건희 여사, 국민들이 원할까?
    기자명 아이엠피터(임병도)
    입력 2024.06.08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서 당당히 조사 받는 모습을 기대한다


    마치 화보 같은 김건희 여사 사진이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게시됐습니다.
    지난 6일 대통령실 홈페이지는 '현충일 추념식'과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참배'라는 제목으로 윤석열 대통령 부부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김 여사가 참배하는 사진 중에는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하고 김 여사에 포커스를 맞춘 연예인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사진도 게재됐습니다.

    추념식에 참석한 윤 대통령 부부 사진 중에는 김 여사가 환하게 마치 카메라를 보는 듯한 사진과 윤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하는 김 여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있었습니다. 추념식이 아니라 다정한 부부를 촬영한 사진처럼 보일 수도 있는 사진입니다.

    의도된 연출과 의상?... 유독 튀는 김 여사 사진

    김 여사를 돋보이게 하는 연출과 의상으로 의심되는 사진도 있습니다.
    지난 5일 김건희 여사는 용산어린이 정원 내 '어린이 환경,생태교육관' 개관식에 참석했습니다.

    이날 김 여사는 검은색 치마에 하얀색 셔츠를 입었습니다.
    아이들의 다채로운 의상 색상과는 굉장히 대조적입니다.
    김 여사가 입은 하얀색 셔츠와 검은색 치마는 교복을 연상케 합니다.
    이런 색상의 의상은 순수한 모습처럼 비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진을 보면 아이들 얼굴에 포커스를 맞췄지만 아이들을 바라보는 김 여사의 모습을 배경처럼 담았습니다.
    자애롭고 너그러운 인물처럼 돋보이게 할 때 자주 사용하는 기법입니다.

    아이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김 여사는 항상 뒤에서 아이들을 향해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아이들 틈에서 찍은 사진 속 김여사의 품에는 새..끼 고양이가 안겨 있었습니다.
    사진만 보면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입니다.

    지난 4일 상춘재에서 열린 '2024 한-아프리카 정상회의 배우자 오찬' 사진에서도 김 여사를 돋보이는 사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배우자들이 이동하는 중에 김 여사는 계단을 내려가는 참석자 한 명의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경복궁 경회루에 대해 설명도 해줍니다.
    수묵 크로키 퍼포먼스 공연을 한 석창우 화백과 대화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대통령실은 김 여사가 수개월 동안 한-아프리카 정상회의 배우차 일정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전시회와 공연을 기획했던 전직 '코바나컨텐츠' 대표다운 모습이 그대로 사진에 담겨 대통령실 홈페이지와 언론에 배포된 셈입니다.

    보도용이 아닌 화보를 촬영해 제공했던 대통령실

    김건희 여사는 취임 전 눈물을 흘리며 '조용한 내조'를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러나 윤 대통령 당선 1주년을 기점으로 숨가쁠 정도로 다양한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언론에 배포된 사진을 보면 보도 목적이 아닌 '화보 촬영'이었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연예인들과 비슷한 구도로 촬영된 사진들이었습니다.

    특히 2023년 3월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에서 촬영된 김 여사의 사진은 보도용으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구도와 형식이었습니다.
    얼굴을 반쯤 돌리고 활짝 웃는 표정, 필터를 사용한 듯한 필름용 감성의 얼굴은 제대로 나오지 않은 사진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실에서 기록용, 보도용 사진을 촬영한 게 아니라 김 여사 SNS용 사진을 찍어 언론과 국민에게 배포했다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 김건희 여사 사진을 볼 수 있을까?

    김건희 여사는 명품백을 받은 동영상이 공개된 이후 5개월 동안 공식적인 자리에 나오지 않았고 얼굴도 모습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4월에도 한국을 방문한 루마니아 대통령 부부와 만났지만 대통령실 홈페이지에는 사진이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지난달부터 김 여사는 공개 행보에 나섰습니다.
    회암사 사리 반환식에 참석한 김 여사의 사진이 공개됐고, 대통령실과 언론은 김 여사가 큰 공헌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오는 10일부터 6개월 동안 중단했던 국외 순방을 재개한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는 김건희 여사도 동행한다고 합니다.

    국민들과 야당이 충격을 받았던 명품백 영상이 공개됐지만, 수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김 여사의 국외 순방 소식이 알려지자, 이대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지난 3일 "법 앞에 예외도, 특혜도, 성역도 없다"면서 김건희 여사 소환 조사 필요성을 시사했습니다.

    정청래 민주당 최고위원은 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죄 지은 게 없다면, 억울함을 깨끗하게 털고 싶다면 김건희 여사는 검찰총장의 방침대로 '내가 나가겠다', 떳떳하게 공개적으로 조사받기 바란다"라며
    "모든 아내는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장경태 최고위원은 "김건희 여사의 대통령실 화보 촬영 행보가 검찰청 앞 포토라인으로 뒤바뀔지 지켜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김성태 전 국민의힘 의원은 CBS라디오 와 한 인터뷰에서 "헌정사상 (대통령) 가족들이나 특히 영부인 문제가 발생했어도 포토라인에 세운 적은 없었다"라며 김 여사가 포토라인에 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이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원한 건 김건희 여사의 연예인과 같은 화보 사진이 아니라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서 당당히 조사를 받겠다는 사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https://www.impeter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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