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blivion
음악을 타고 시간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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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신원
팔보채八寶菜(@ybj4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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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보채八寶菜 (@ybj4788)2023-11-03 00:57안마 (按摩)
안마의 어원은 억안조마(抑按調摩)로 지압?마사지와 함께 일점압박(一點壓迫)의 압자극(壓刺戟)을 기본으로 하고 이것이 일정한 간격으로 복합압을 하여 생체에 작용을 하여 압반사(壓反射)로서 신체조직?내장기능의 변조를 조정시킨다. 안마의 명칭은 시대변천에 따라 안교(按?)?추장(推掌)?마사지 등으로 불렸고, 일제강점기에는 점혈법(點穴法)인 지압(指壓)이라 불렀다.
안마는 고대중국의 침(鍼)?뜸[灸]과 더불어 발달한 한방의료의 물리요법으로서 안교도인법(按?導引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전래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수(隋)나라의 ≪병원후론 病源候論≫에 당시 도사(道士)들 사이에 성행하였던 <양생법방(養生法方)>에 안마가 소개되어 있다. 당나라의 ≪천금방 千金方≫ 권27 양생편과 ≪천금익방 千金翼方≫에 안마법이 소개되어 있다.
안마는 보통 몸의 중심에서 손끝, 발끝을 향하여 경락(經絡)의 순로(順路)를 따라서 경혈(經穴)을 어루만지고, 짓누르고, 주무르고, 치는 방법이다. 특별한 질병도 없는데 머리가 무겁고, 피로하고, 목에서부터 어깨?등골에 걸쳐 뻐근하고, 아프다든가 손발이 기운이 없다든가,
습관적으로 변비가 있을 때 이들 증세를 제거하는 데 효과가 있다. 그러나 급성병, 열이 높을 때, 피부에 습진?화농창?악성종양이 생겼을 때, 심한 위궤양, 임신중일 때에는 복부의 안마는 피해야 한다.
안마는 식후 30분 정도 지난 다음 충분히 배뇨(排尿)하고 심신 다같이 가벼운 상태에서 해야 한다. 안마는 전문안마시술자를 불러 하여야 하는데, 지압의 경우는 경혈을 집중적으로 누른다.
이때는 주로 엄지손가락의 지문부(指紋部)의 지두(指頭)와 지복(指腹)을 많이 이용하고 넓은 부위를 동시에 누를 때는 수장부(手掌部)를 이용하며, 강하게 할 때는 주먹이나 팔꿈치를 이용하기도 한다. 마사지가 유럽으로부터 전해지고 서양의료기술로서 임상치료에 응용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그 방법이 안마와 매우 닮아서 그 한계가 모호하게 되었다.
안마사는 1973년 <보건사회부령>에서 “안마사는 안마?마사지 또는 지압에 의하거나 전기기구의 사용 기타의 자극방법에 의하여 인체에 대한 물리적 시술행위를 하는 것을 업무로 한다.
규정하고, 그 자격은 “교육법에 의한 특수학교에서 물리적 시술에 관한 고등학교과정을 이수한 맹인 또는 중학교과정 이상의 교육을 받은 실명자로서 보건사회부장관이 지정하는 안마수련기관에서 2년 이상의 안마수련과정을 이수한 자”로 자격을 규정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마 [按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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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보채八寶菜 (@ybj4788)2023-11-03 00:54고복 (鼓腹)
손바닥이나 주먹으로 자신의 배를 두드림으로 건강을 지키기
식사하기전에 또는 적당한 공복에 실행한다 두들길 때 아픈 부위가 있는 곳은
그 부위에 이상이 있는 것이므로 아프지만 조금 아플 정도로 두드려 주고
횟수는 100회로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늘려가고 두드림의 세기도 강하게 해 나가다 보면
아팟던 부위가 나아 질 것이다
아침과 자기전에 실행한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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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보채八寶菜 (@ybj4788)2023-09-25 07:05- 훈민정음 -
중세 한국어
나랏〮말〯ᄊᆞ미〮
中듀ᇰ國귁〮에〮달아〮
文문字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姓셔ᇰ〮이〮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몯〯ᄒᆞᇙ노〮미〮하니〮라〮
내〮이〮ᄅᆞᆯ〮𤔡윙〮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ᆷ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便뼌安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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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어
나라의 말이
중국과는 달라
문자(한자)와는 서로 맞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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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보채八寶菜 (@ybj4788)2023-09-25 07:02훈민정음
좌표: 북위 37° 35′ 37.1″ 동경 126° 59′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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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訓民正音)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의 국보
종목 국보 제70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수량 1책
시대 조선시대
소유 세종대왕
위치
간송미술관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간송미술관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 (대한민국)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성북동)
좌표 북위 37° 35′ 37.1″ 동경 126° 59′ 46.2″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훈민정음』(訓民正音, 중세 한국어: 훈민정음)은 한글의 옛 이름(첫 이름)으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의 명칭이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을 해설해 놓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세종 25년(1443년)에 창제 된 후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바른(正) 소리(音)'이며, 28개의 낱자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글자에 속하며,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에 편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훈민정음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글이며, 훈민정음은 1446년에 정식으로 반포됐고 한글이란 이름은 주시경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1][2][3][4][5]
훈민정음은 반포된 초기에 '정음(正音)'으로도 불리었고 그밖에도 언문(諺文), 언서(諺書), 반절(反切), 암클, 아햇글 등으로 불리우면서[6] 양반들에 의해 홀대 받았다. 그러나 한자에 비해서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가 쉬웠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에는 한국어를 표기하는 공식문자가 되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후에 궁중에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발간하도록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훈민정음 해례본'은 기록에만 존재할뿐 한 권도 전해지지 않았었는데, 1940년 경상도 안동에서 약 500년만에 처음 발견되었으며 현재에는 서울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7] 해례본은 1962년에 국보 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역사
1443년(세종 25년) 12월에 훈민정음 28자가 창제되었다. 세종은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 발간과 을 편찬하도록 했으며 최항과 박팽년에게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을 명했다.[8] 1445년(세종 27) 4월에는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 를 편찬사업을 진행하였다.
1444년 2월 최만리,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내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6가지 이유를 들며 반대상소를 올렸다. 이때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격이었던 부제학 최만리가 한글반포에 대해 크게 반대하다가 세종의 노여움을 사 책망받고 투옥 되었다.[9] 그는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했다.[9]
1446년 음력 9월에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10][11]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이 함께 간행되었는데, 이 책에는 훈민정음의 창제목적과 원리, 사용법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세종은 하급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에 추가하도록 하였고,[12][13] ‘삼강행실’과 같은 국가 윤리를 훈민정음으로 풀어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 두가지 사항을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였다.[14]
사서(四書)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했고[15] 백성들이 관가에 제출하는 서류를 훈민정음으로 작성토록 했으며 형률 적용 과정에서 그 내용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알려 주도록 했다. 궁중의 여인들에게 모두 훈민정음을 익히도록 하고 세종 자신은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훈민정음으로 글을 내리기도 했다.[16] 이후로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훈민정음을 사용했다. 이러한 훈민정음 보급 정책에 따라 훈민정음은 점차 퍼져 나갔다.[17]
책의 구성
책의 구분
훈민정음의 판본에는 한문으로 쓰여진 예의본, 해례본 그리고 한글로 쓰여진 언해본(諺解本)이 있다. 세종실록에 실려져 있는 것을 실록본(實錄本)이라고 구분짓기도 하는데, 이는 예의본(例義本)에 속한다. 이런 구분은 편의상 그리하는 것으로 이 가운데 단행본으로 완전한 책의 형태를 지닌 것은 해례본(解例本)뿐이며 통상적으로 이를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부른다. 박승빈이 소장했던 언해본이 단행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정밀한 조사에 의하면 『월인석보』 책머리 부분을 따로 제책한 것이다.[18] 《훈민정음 해례본》은 약 500부 정도가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훈민정음 해례본》의 편찬사실은 기록에만 존재할뿐, 20세기 초반경만 해도 단 한 권도 그 존재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1940년에 안동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19] 이후 2008년에 상주에서 한부가 더 발견되어 현재까지는 두 부가 존재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원본》 또는《오성제자고》(五聲製字考)라고도 하는데,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기존에 알려졌던 예의(例義)편에 해례(解例)편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이다.[20] 예의(例義)편은 《세종실록》과 《월인석보(月印釋譜)》에 실려 있어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해례(解例)편에 대해서는 1940년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처음으로 발견되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21]
1962년에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22][23]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으로 책의 규격은 가로 20㎝, 세로 32.3㎝이다. 해례본은 “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예의(例義), 해례(解例), 정인지 서문(序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이 직접 쓴 예의 부분은[24] 4장 7면으로 면마다 7행에 매행 11자, 집현전 학사들이 쓴 해례 부분은 26장 51면 3행으로 면마다 8행에 매행 13자, 정인지가 쓴 서문은 3장 6면에 한 자씩 낮추어서 매행 12자로 구성되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예의, 해례,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의편(例義)은 훈민정음 창제목적을 밝힌 어제서문과 새 글자의 음가, 운용법을 설명한 예의로 구성되어 있다. 해례(解例)부분에는 제자원리, 제자기준, 자음체계, 모음체계, 음상 등에 대해 설명한 제자해(制字解), 초성에 대해 설명한 초성해(初聲解), 중성에 대한 설명과 중성글자의 합용법을 제시한 중성해(中聲解), 종성의 본질과 사성 등을 설명한 종성해(終聲解), 초성·중성·종성 글자가 합해져서 음절 단위로 표기되는 보기를 보이고 중세국어의 성조에 대해 설명한 합자해(合字解), 단어의 표기례를 제시한 용자례(用字解)로 구성되어 있다. 정인지 서문부분에는 한글의 창제이유, 창제자, 한글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찬자 그리고 끝에는 ‘정통 11년(1446) 9월 상한’이라는 반포일이 기록되어 있다.[25]
今正音之作
이제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은
初非智營而力索
처음부터 슬기로 마련하고, 애써서 찾은 것이 아니라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다만 그 (원래에 있는)성음(의 원리)을 바탕으로 이치를 다한 것 뿐이다.
理旣不二 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
처음부터 이치는 둘이 아니니 어찌 천지 자연, (변화를 주관하는) 귀신과 그 사용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
훈민정음 스물 여덟자는 각각 그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 《훈민정음 해례》(訓民正音解例), 〈제자해〉(制字解)
간송본
간송본(안동본)은 1940년 무렵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의 이한걸 가문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 정벌시 공을 세운후 세종으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것이라고 한다.[22] 크기는 가로 20 ㎝, 세로 32.3 ㎝ (광곽(匡郭)은 가로 16.8㎝, 세로 23.3㎝)[26]이며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발견당시 표지와 첫 두 엽은 떨어져 나가 없었는데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22] 용준은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22][27][28] 훗날 간송 전형필이 김태준을 통하여 이 안동본을 입수하여 보관하였다. 광복이 되자 전형필은 해례본의 존재사실을 학계에 알렸고 영인본을 제작 배포하여 책의 내용을 공개하였다.[29] 전형필은 한국 전쟁 때 이 한 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개 삼아 잤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22] 현재에는 간송미술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22] 간송미술문화재단측에서 제공하는 자료에 의하면, 간송 전형필은 당시 큰 기와집 10채 값에 해당하는 1만원을 지불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하였다고 한다.[30]
상주본
상주본은 2008년 8월 상주에 사는 배익기가 집 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공개하였다.[31] 그러나 골동품상을 하는 조용훈이 도난당한 것이라며 주장하여 소송이 오갔다.[32] 민사 소송에서 대법원은 조용훈의 소유권을 인정하였으며[33], 그는 2012년 5월에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서류상으로 기증하였다.[34] 이때 이것이 안동 광흥사의 복장유물이 도난된 것이라는 논란이 제기되면서[35], 광흥사가 소속된 조계종이 반발하였다.[36] 한편 민사 소송에서 패소한 배익기는 절도 혐의에 대한 형사 소송에서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37], 상주본을 기증하는 대가로 1천억 원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38] 상주본은 조선의 음운학자가 남긴 주석이 있으나, 66쪽 중 18쪽이 멸실되고 불에 타는 등 보존 상태는 나쁜 것으로 알려져 있다.[39]
훈민정음 예의본
해례(解例)와 예의(例義)가 모두 포함된 해례본과 달리 예의 부분만 들어 있는 것을 예의본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예의본은 단행본이 아니라, 《세종실록》과 《월인석보》에 실린 한글번역본인 언해본이 있다. 《예의본》은 1940년에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처음 발견되기 이전에 훈민정음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일차적 문헌이었다.
훈민정음 언해본
이 부분의 본문은 훈민정음 언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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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언해
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언해
훈민정음 어제 서문[40]
훈민정음 어제 서문[40]
훈민정음 언해본은 한문으로 쓰여진 ' 훈민정음 예의본' 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한 것을 말한다.[41] 1459년(세조 5년) 간행된 《월인석보》 1권의 첫머리에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이라는 제목하에 훈민정음의 어제서문과 예의(例義) 부분이 한글로 번역되어 실려있다.[42] 예의본의 한 종류라 할 수 있지만 편의상 따로 언해본으로 부른다. 이는 한문으로 적혀있는 예의본을 한글로 번역하였기에 이를 구분짓기 위함인데, 언해(諺解)란 말이 한문을 한글로 번역했다는[43] 의미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언해는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의 본문을 먼저 쓰고, 그 아래 한글로 협주(夾註)를 단 뒤 한글로 새로이 한문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훈민정음에 쓰인 한문을 읽은 뒤 그 한문의 각 글자 풀이를 읽고, 한글로 번역된 부분을 읽게 된다. 한문을 모르더라도 훈민정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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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한국어
나랏〮말〯ᄊᆞ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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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姓셔ᇰ〮이〮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몯〯ᄒᆞᇙ노〮미〮하니〮라〮
내〮이〮ᄅᆞᆯ〮𤔡윙〮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ᆷ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便뼌安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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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어
나라의 말이
중국과는 달라
문자(한자)와는 서로 맞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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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보채八寶菜 (@ybj4788)2023-09-15 09:41
도피안 (到彼岸)
피안에 이른다는 말로 완성을 뜻하는 불교용어
산스크리트 파라미타(Paramita)를 음역하여 바라밀(波羅密) 또는 바라밀다(波羅密多)라고도 한다. 이 말은 최고를 뜻하는 파라마에서 파생한 말이며, 이에 근거해서 바라밀을 완성 또는 완전으로 번역하고 바라밀을 한역한 것이 바로 도피안이다. 여기서 피안은 깨달음의 세계이고, 미혹의 세계인 차안(此岸)과 상대되는 말이다. 곧 도피안은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피안은 이 세상에서 동떨어진 곳이 아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이데아와는 다르다. 즉 피안은 자신 속에 내재하며 자신이 변화된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한 용어로 열반·해탈·무위·적정·감로·안온 등이 있다. 모두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뜻하며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바로 피안이라 할 수 있다.
바라밀에는 육바라밀이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 등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육바라밀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고, 자신의 공덕에 대한 집착이나 의식에서 벗어나야 하며, 목적의식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또한 무엇인가를 완성했다거나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조차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피안 [到彼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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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보채八寶菜 (@ybj4788)2023-09-15 09:37
무위자연 (無爲自然)
요약 전혀 손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
말뜻은 인위적인 손길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을 가리키는데,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태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한 속세의 삶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삶을 가리킬 때도 사용합니다.
따라서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분지족(安分知足), 단사표음(簞食瓢飮) 과 같은 표현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무위자연 [無爲自然] (없을 무, 할 위, 스스로 자, 그럴 연)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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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보채八寶菜 (@ybj4788)2023-09-06 20:40가야금과 거문고의 차이
거문고 산조는 그 기본적인 틀에 있어서 가야금 산조와 내용을 같이
하고 있다. 악기의 음색이나 연주기법에서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가야금 산조와 거문고 산조를 들어보면 이 두 종류의 산조가 같은 근
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진양에서 시작해 점점 빨라지는 악장의 구조도 그렇고, 선율을
구성하는 원리 뿐만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가락의 흐름까지도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문고 산조가
가야금 산조와 구별되는 자신의 특성을 전혀 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음악양식이든 악기가 달라질 때에는 그 악기에 맞는 재창조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거문고는 가야금과는 달리 소위 괘라는
것이있어서 왼손으로 이 괘 위의 줄을 눌러 소리내는 악기이다.
그리고 일정한 괘 위에서 소리를 떨 때에는 줄을 위에서 아래로 미는
독특한 주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오른손으로는 술대라는 대막대기로
줄을 치거나 뜯어서 소리를 낸다.
물론 차이는 연주기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음색, 음량, 연주자세에
있어서도 거문고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지키고 있다.
거문고 산조를 들어 보면 진양 부분이 가야금 산조 보다 조금 빠르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가야금 산조의 진양에서는 한 음을 길게 끌면서
왼손으로 다양하고 미세한 음들을 만들어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거문고 산조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거문고는 잔가락을 많이 써서 장단을 메꾸어 나간다. 그런데
이처럼 거문고 산조의 진양이 시가(時價)가 긴 음을 쓰지 않는 것은
이 악기의 여음이 그것을 허용할 만큼 길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만약 느린 템포의 곡에서 음의 여운이 금새 사라져 버린다면 그 음악은
텅빈 공간으로만 가득찬 재미없는 음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문고 산조에는 가야금 산조에는 없는 엇모리 장단이 끼어 있는 대신
휘모리가 없다. 그래서 자진모리로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이 자진모리의
가락도 가야금 산조의 것과는 다르다.
가야금 산조의 자진모리는 빠른 템포로 같은 음을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여유있게 가락의 흐름을 이어나가는 부분이 많은데
거문고 산조에는 그런 부분이 별로 없다. 이는 술대로 동일음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치는 주법에 한계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거문고의 술대는 거문고 산조의 또 다른 가능성이다.강하게 술대를
내려칠 때에는 술대가 줄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데, 이 타악기적인
부딪침이 소리의 다이나믹을 더 해 준다. 저음역의 개방현 역시 이런
효과에 한몫을 한다.
안정감 있는 베이스에 개방현이라 여음까지 풍부하니 금상첨화가
아닐수 없다. 높은 음역에서는 술대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여리고 섬세하게 타다가는 돌연 술대로 힘을 다해 내려침으로서 가락에
액센트를 주고, 개방현의 풍부한 여음으로 넉넉하게 바닥을 받쳐주는
멋, 이것이 바로 거문고 산조의 멋이 아닐까.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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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보채八寶菜 (@ybj4788)2023-09-06 20:38거문고 산조에 대하여
흔히 거문고는 '백악지장'이라고 한다. 즉, 모든 악기의 으뜸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거문고는 예로부터 다른 악기와 구별되는 각별한 취급
을 받아왔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이 악기를 소중히 여겼는가
는 현재 남아 있는 고악보의 대부분이 거문고 악보라는 사실로 충분히
입증이 된다.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물론이려니와 선비들이 사적으로 풍류를
즐기는 자리에서도 거문고는 항상 가장 높은 품격을 지닌 악기로 초대되는
행운을 누렸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거문고는 선비들의 악기라고 했다.
거문고 소리를 들으면 그 속에서 어떤 저력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음량이 그다지 크지 않고, 음색이 소박해서 처음 듣는 이에게 금새
어필하지는 못하지만 십고 십을 수록 제 맛이 나는 그런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거문고 소리를 들으면 어째서 옛 선비들이 이 악기를 좋아했는지 금새
알게 된다. 가히 속(俗)스럽지 않은 품위와 안정감이 무언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여백과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여유를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배문화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오던 거문고가 소위
'속악(俗樂)'의 대열에 뛰어 든 역사는 그다지 오래지 않다.
아마 거문고는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지켜온 그 고귀한 자리를 버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악기가 속악에서 자기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 왕조 내내 양반의 명분과 유교적 이념에 얽매어 자신의 음악적
가능성을 충분히 시험해 보 지 못했던 거문고는 19세기 말 경부터 서서히
반동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해 20세기 초에 이르러 드디어 본격적인 속악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소위 속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거문고 산조가 탄생한 것이다.
거문고 산조는 20세기 초에 거문고의 명인 백낙준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의 자극제가 된 것이 가야금 산조였다.
가야금 산조의 눈부신 음색과 풍부한 음악성에 매료당한 백낙준은
거문고라는 악기로 산조를 탐으로써 악기의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거문고 산조를 만들었다.
세인의 비난을 두려워 하지 않는 한 예술가의 용기가 거문고 음악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거문고 산조는 그 기본적인 틀에 있어서 가야금 산조와 내용을 같이
하고 있다. 악기의 음색이나 연주기법에서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가야금 산조와 거문고 산조를 들어보면 이 두 종류의 산조가 같은 근
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진양에서 시작해 점점 빨라지는 악장의 구조도 그렇고, 선율을
구성하는 원리 뿐만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가락의 흐름까지도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문고 산조가
가야금 산조와 구별되는 자신의 특성을 전혀 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음악양식이든 악기가 달라질 때에는 그 악기에 맞는 재창조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거문고는 가야금과는 달리 소위 괘라는
것이있어서 왼손으로 이 괘 위의 줄을 눌러 소리내는 악기이다.
그리고 일정한 괘 위에서 소리를 떨 때에는 줄을 위에서 아래로 미는
독특한 주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오른손으로는 술대라는 대막대기로
줄을 치거나 뜯어서 소리를 낸다.
물론 차이는 연주기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음색, 음량, 연주자세에
있어서도 거문고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지키고 있다.
거문고 산조를 들어 보면 진양 부분이 가야금 산조 보다 조금 빠르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가야금 산조의 진양에서는 한 음을 길게 끌면서
왼손으로 다양하고 미세한 음들을 만들어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거문고 산조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거문고는 잔가락을 많이 써서 장단을 메꾸어 나간다. 그런데
이처럼 거문고 산조의 진양이 시가(時價)가 긴 음을 쓰지 않는 것은
이 악기의 여음이 그것을 허용할 만큼 길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만약 느린 템포의 곡에서 음의 여운이 금새 사라져 버린다면 그 음악은
텅빈 공간으로만 가득찬 재미없는 음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문고 산조에는 가야금 산조에는 없는 엇모리 장단이 끼어 있는 대신
휘모리가 없다. 그래서 자진모리로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이 자진모리의
가락도 가야금 산조의 것과는 다르다.
가야금 산조의 자진모리는 빠른 템포로 같은 음을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여유있게 가락의 흐름을 이어나가는 부분이 많은데
거문고 산조에는 그런 부분이 별로 없다. 이는 술대로 동일음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치는 주법에 한계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거문고의 술대는 거문고 산조의 또 다른 가능성이다.강하게 술대를
내려칠 때에는 술대가 줄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데, 이 타악기적인
부딪침이 소리의 다이나믹을 더 해 준다. 저음역의 개방현 역시 이런
효과에 한몫을 한다.
안정감 있는 베이스에 개방현이라 여음까지 풍부하니 금상첨화가
아닐수 없다. 높은 음역에서는 술대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여리고 섬세하게 타다가는 돌연 술대로 힘을 다해 내려침으로서 가락에
액센트를 주고, 개방현의 풍부한 여음으로 넉넉하게 바닥을 받쳐주는
멋, 이것이 바로 거문고 산조의 멋이 아닐까.
거문고가 속악의 영역으로 들어 왔다고는 하나 거문고는 역시 거문고이다.
즉, 악기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기품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간의 감성에 보다 가까와지고 싶었던 거문?산조라는 음악양식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무한한 가능성의 세게로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속에서 고전적 이상과 낭만적 이상의 절묘한 조합을
보게 되는 것이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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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보채八寶菜 (@ybj4788)2023-09-06 20:09가야금 산조에 대하여
산조는 서양식으로 얘기 하자면 일종의 조곡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독립된 몇개의 곡이 연결되어 하나의 곡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서양의 조곡이 음악적으로 별다른 연관이 없는 개별곡들의 나열식
집합인 것에 반해 산조는 전체적으로 정서적 감흥의 점진적 고양이라는
의도에서 묶여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이다. 그리고 각각의 곡들은 다른
전통음악이 그래왔던 것 처럼 역시 '장단'을 단위로 나뉘어진다.
우리 전통음악에 있어서 장단이란 서양음악의 박자와 같이 단지 박을
나누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장단은 이미 그것에 실리는 가락의
모습을 결정하고 있다. 장단에 있어서의 긴장과 이완은 가락에 있
어서의 긴장과 이완을 유도하고 있다. 장단이 옥죄는데, 가락이 풀어
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산조는 진양조 - 중모리 - 중중모리 - 자진모리 - 휘모리를 그 기본틀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장단 배치는 일종의 점층법이라고 할 수 있다.
느린 진양에서부터 빠른 휘모리에 이르기까지 산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이
단 한 순간도 다른 곳으로 흐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토록 치밀하게 짜여진 것이다. 그러나 산조의 진정한 멋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소리가 넉넉하게 채워질 공간이 많은 진양에서 찾을 수 있다.
진양은 연주자의 기량이 가장 적나라하게 판가름나는 악장이며,
그래서 연주자에게는 더욱 곤혹스러운 악장이기도 하다.
산조의 역사를 얘기하자면 19세기 말에 활동했던 가야금의 명인 김창조
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모든 산조 중에서 가야금 산조가 가장
먼저 생긴 것이다.
가야금 산조가 오늘날 음악적으로 가장 완성된 틀을 갖추고 있고, 또
그토록 다양한 유파를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산조가 다른
악기가 아닌 바로 가야금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 악기가 전통악기
중에서 가장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가야금 산조의 유파는 여러 개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금연 류와 김죽파 류, 그리고 함동정월 류라고 할 수 있다.
성금연 류는 우선 곡의 붙임새와 구성이 좋으면서도 듣기에 편해서
가야금 산조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진양의 경우에도
장단의 붙임이 난해하지 않아서 장단의 흐름을 쉽게 탈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저음역의 가락이 많이 들어가 품위가 느껴지는 그런 가락을
가지고 있다.
김죽파 류 가야금 산조는 한마디로 말해서 깔끔하다고나 할까. 음악의
붙임새가 단순해서 다소 싱겁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는 물론
듣는 이의 미적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여하튼 진양에서
소리의 공백이 많고, 끝까지 소리를 붙들고 늘어지려는 승부근성이 부족
한 것이 사실이다.
고음역의 가락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도 김죽파 류 산조의 또 다른 특징
인데, 따라서 풍부한 여음에서 오는 진국의 맛을 별로 느낄 수 없다.
이는 죽파 류 산조가 민속악이면서도 그 미적가치의 기준을 정악적인
절제미에 두고 있기 땡문인지도 모른다.
함동정월 류 산조는 가야금 산조 중에서 가장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한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운 곡이다. 그 만큼 높은 경지에
있기 때문에 웬만큼 훈련된 귀가 아니고서는 그 예술적 진가를 알아보기
힘들다.
함동정월의 예술성은 특히 진양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가락이 너무나
유식하게 짜여져서 참으로 난해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장단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분명 장단의 틀 속에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 장단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집스러움은 소리를 운용하는 방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산조는 그냥 한번 튕기고 나서 그냥 허공 중에 떠있는 소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왼손주법을 변화시켜 가면서 마지막 장단까지 끈질기게
그 소리를 다양한 여음으로 붙들어 놓는다. 그래서 그가 타는 진양조는
느린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꽉찬 느낌을 준다. 소리의 포만감이라고나 할까.
산조를 시작하기 전에는 악기의 음을 조율하기 위해서 '다스름'이라는
것을 탄다. 소위 음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서양음악에서 악기를 조
율하는 소리가 음악외적인 것인데 반해 우리 나라의 다스름은 음악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과거 우리의 예술가들은 음을 조율하는 소리조차도 멋들어진
가락으로 담아 낼 정도로 강력한 예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산조의 높은 예술성은 바로 이러한 예술의지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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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보채八寶菜 (@ybj4788)2023-09-06 20:04재즈 연주에서의 악기 편성
재즈 연주에서의 악기 편성
재즈에서의 연주편성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사실 재즈에서 꼭 이렇게 해야한다라고 정해진 편성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대로죠. 하지만 몇가지의 기준이 있어서 그런 것들은 지켜지고 있지 않나 싶군요. 대표적인 형태와 들을 수 있는 앨범을 간단히 소개드립니다.
먼저 연주형식을 일컫는 이름들을 알아야하겠습니다. 형식은 참여하는 연주자의 수에 따라 구분을 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보통 구성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악기는 리듬섹션에 해당하는 악기들입니다. 리듬섹션이라면 베이스와 드럼을 말하죠. 색소폰이나 트럼펫같은 멜로디 악기가 끼게되면 피아노까지를 리듬섹션으로 일컫기도 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구성은 피아노 트리오와 쿼텟,
퀸텟입니다. 보통 다음과 같은 악기들로 구성됩니다.
-- 피아노 트리오 : 피아노, 드럼, 베이스
쿼텟이라고 하면 보통 위의 피아노트리오에 멜로디악기를 하나 넣은 형태를 말합니다. 많이 쓰이는 멜로디악기는 색소폰, 트럼펫, 비브라폰, 플룻등이 있을 수 있겠죠.
-- 색소폰 쿼텟 : 색소폰, 피아노, 드럼, 베이스
사실 이 형태가 가장 흔하고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형태의 연주입니다. 웬만한 앨범은 다 이런 포맷으로 녹음이 되는 것이 보통이죠. 수많은 쿼텟들이 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색소폰 쿼텟으로 평가받는 팀은 콜트레인의 팀이었다고 해도 별로 이견이 없을 것같습니다. John Coltrane(sax), McCoy Tyner(p), Jimmy Garrison(bass), Elvin Jones(dr)의 네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정말이지 전설적인 레코딩을 많이 남겼습니다. 예를 들자면 Love Supreme같은 앨범이 있을 수 있겠죠.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색소폰 쿼텟이라는 단어는 꼭 위의 포맷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색소폰 쿼텟이라고 하면 말그대로 색소폰 네대로 이루어진 팀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흔한 포맷은 아니지만 말이죠.
-- 색소폰 쿼텟 :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색소폰 .. 또는 : 알토 1, 알토 2, 테너 , 바리톤 색소폰
이해가 가시겠죠. 유명한 팀이라면 The World Saxophone Quartet을 들 수 있겠죠. 사실 처음부터 듣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연주를 하는 팀이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꼭 한번 들어볼만한 팀입니다. Hamiet Bluiett(bs), Arthur Blythe(as), Oliver Lake(as), David Murray(ts)의 네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팀이죠. 이팀도 꽤 많은 레코딩을 남겼지만 Plays Duke Ellington같은 앨범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비브라폰이 들어가있는 쿼텟도 있습니다.
-- 비브라폰 쿼텟 : 비브라폰, 피아노, 드럼, 베이스
재즈역사에서 빼놓고 넘어갈 수 없는 팀, 40년이나 지속되어 온 Modern Jazz Quartet(MJQ)가 바로 이런 포맷으로 되어 있는 팀입니다. Django라는 앨범은 꼭 한번 들어볼 것을 권합니다. 아주 깨끗하고 정돈된 사운드를 들려주는 팀입니다. Milt Jackson(vibes), John Lewis(p), Percy Heath(bass), Kenny Clarke(dr) 입니다. 나중에 드럼이 Connie Kay로 교체되긴 하지만 위의 멤버로 40년간 같이 연주를 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겠죠.
멜로디 악기를 하모니커가 맡을 수도 있습니다. Toots Thielemans 할아버지의 앨범을 한번 구해서 들어보시길. 그외에도 대부분의 모든 악기가 멜로디가 될 수 있겠죠. 이정도로만 하고요. 약간의 변종도 말씀드리죠.
피아노 대신 기타가 들어가는 포맷도 있습니다. 사실 리듬섹션으로서의 피아노와 기타의 역할이 비슷한 부분이 많이 때문에 두 악기가 서로 교체되는 경우는 아주 흔한데요. 가장 대표적인 팀으로는 LA.4 정도를 들 수 있겠죠. 구성원은 Laurindo Almeida(guitar), Ray Brown(bass), Jeff Hamilton(dr), Bud Shank(as, fl)이고 아주 깨끗한 연주를 들려주는 팀입니다. Watch What Happens 같은 앨범정도면 편안히 들을 수 있을것 같군요.
또, 위의 쿼텟 구성에서 피아노를 아예 빼버리고 색소폰 트리오로 구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색소폰 트리오 : 색소폰, 드럼, 베이스
이것은 피아노의 컴핑이 색소폰주자가 솔로를 할 때의 가능성을 제약시킨다고 빼어버린 경우인데요, Sonny Rollins가 이런 포맷을 사용했었죠. 좀 이례적인 일이지만 베이스를 뺀 경우도 있습니다. Scott Hamilton 의 Major League라는 앨범을 보면 색소폰, 드럼, 피아노의 세 악기로만 연주를 하고 있는데, 이 때에는 곡에 따라 피아노가 베이스라인을 같이 담당해주기도 합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트럼펫 쿼텟의 경우는 그다지 흔하지 않습니다. 보통 트럼펫이 연주를 하면 항상 색소폰이 같이 연주하는 경우가 많죠. 가장 흔한 경우는 다음의 퀸텟입니다.
-- 퀸텟 : 색소폰, 트럼펫, 피아노, 드럼, 베이스
트럼펫이 들어가있는 대부분의 연주는 모두 위의 포맷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볼까요. Charlie Parker(as), Dizzy Gillespie(tp), Bud Powell(p), Charlie Mingus(bass)등이 포진한 명연, The Massey Hall Conert 앨범을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비밥 최고의 명연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연주라고 하겠습니다.
보통 섹스텟이라고 하면 퀸텟 + 트롬본인 경우가 많습니다.
-- 섹스텟 : 색소폰, 트럼펫, 트롬본, 피아노, 드럼, 베이스
예를 들면 The Jazztet 같은 팀이 있을 수 있겠죠. 아니면 섹스텟이라고 할때, 색소폰을 두 대 사용하기도 합니다.
-- 섹스텟 : 알토, 테너 색소폰, 트럼펫, 피아노, 드럼, 베이스
상당히 흔한 포맷입니다. Art Blakey의 The Jazz Messangers같은 팀도 이런 포맷으로 많이 연주했었죠.
보통 이정도까지가 흔한 연주패턴들이고, 그 이외의 경우에는 연주자들에 따라서 이상한 편성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 이상의 사람들이 있는 앨범중 권할 만한 것이라면 Miles Davis 의 The Birth of the Cool 정도면 어떨까 싶군요. 그리고 David Murray가 이끄는 David Murray Octet의 연주도 들어볼만 합니다.
빅밴드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즈에서의 빅밴드는 위에서 말한 편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보통 다음과 같습니다.
-- 빅밴드 : 색소폰 4명 이상, 트럼펫 2명이상, 트롬본 2명이상, 피아노, 드럼, 베이스 + 퍼커션(옵션으로)
보통 10명정도 이상의 구성이 되겠죠. 요즘은 빅밴드가 많이 생기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Joe Henderson같은 사람도 빅밴드를 만들어서 크게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 말이죠. 하지만 빅밴드라고 하면 뭐니뭐니해도 Duke Ellington이라고 하겠습니다. 흔히 재즈계의 모짜르트라고 일컫습니다. 재즈의 역사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임은 물론이죠. 그의 앨범들도 꼭 한번 구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솔로도 많이 하는데, 솔로를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악기는 보통 피아노입니다. 피아노라는 악기가 워낙 표현영역이 넓은 악기이기 때문이죠. 기타도 솔로에 적합한 악기입니다. 이때 솔로를 하게 되면 피아노는 왼손으로, 기타는 연주하는 도중에 잠깐씩 베이스라인을 연주해주는 것이 상례입니다. Joe Pass의 기타솔로 연주는 꼭 한번 감상해보시기바랍니다.
이정도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포맷이지만 사실 이 포맷이라는 것은 정하기 나름입니다.
재즈가 워낙 즉석에서 연주되는 일이 많아서 연주자들끼리 기분이 맞아 잼을 하면 정말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피아노 주자 셋이서 피아노 두대를 치는 모습이나, 베이스 세대로 잼을 한다거나, 드럼 세대로 한다거나, 악기 없이 자기 몸을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거나, 정말 무궁무진하죠. 하지만 이러한 연주형태 하나하나가 모두 나름대로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답니다. 이 즐거움을 하나씩 알게되면서 재즈에 대한 애정 역시 깊어가게 되는 것이겠지요. 많은 연주들을 접하시길 바랍니다.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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