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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하나라도 놓칠까봐 노심초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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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6-16 21:20
    국민대, 김건희 박사학위 취소 방침...숙명여대도 석사 취소 학칙 개정
    4년을 끌었던 'Member Yuji' 논문 논란...이젠 종지부 찍나?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6.16

    숙명여대가 논문 표절 사실이 드러난 윤석열 전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씨 석사 학위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학칙을 개정한 가운데 국민대학교 역시 김 씨의 박사 학위 취소 방침을 정한 사실이 16일 MBC 단독 보도로 알려졌다.

    김건희 씨의 국민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은 이른바 'Member Yuji'로 유명한 논문이다.

    16일 MBC 단독 보도에 따르면
    국민대 관계자가 MBC에 "숙명여대가 석사 학위를 취소하게 된다면 국민대 또한 박사 학위를 당연히 취소할 것"이라며 "이와 관련한 법률 자문을 마쳤다"고 밝혔다.

    또, "박사 과정 입학을 위해 필요한 석사 학위 취득이 취소가 된다면, 박사 학위의 '원인 무효'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별도의 학칙 개정 없이 숙대 측에 질의한 뒤 절차에 돌입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숙명여대는 이날 대학평의원회를 열고 '중대하고 명백한 부정행위 등으로 윤리를 훼손한 경우 본 조항 신설 이전에 수여된 학위도 취소할 수 있다'는 내용을 교육대학원 학칙에 새롭게 추가했다.

    이에 따라 김건희 씨의 논문을 '표절'로 결론 내린 숙명여대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김 씨의 징계 수위를 결정해 총장에게 보고할 방침입니다.

    숙명여대 교육대학원은 지난 2015년 '부정한 방법으로 받은 학위를 취소할 수 있다'는 내용의 학칙을 시행했지만, 이보다 앞서 취득한 김건희 씨의 석사 학위 취소 여부를 두고 결정을 미루면서 비판을 받아왔다.

    또 취소 방침이 내려진 국민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또한 2007년 발표한 두 편의 학술지 논문과 2008년 국민대에 제출한 박사논문 등 3편 모두 표절 논란이 있으며 이 중 논문에선 제목 영문 표기에 'Member Yuji'라고 쓴 사실이 드러났다.

    김건희 씨의 논문 논란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공식화한 2021년 7월 초에 불거진 것인데 4년을 질질 끌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이 몰락하자 비로소 김 씨의 학위 취소가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학위 취소가 이뤄질 경우 김 씨의 최종학력은 경기대학교 예체능대학 학사가 된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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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6-16 21:18
    김용현 보좌관도 "尹, '국회에 1000명 보냈어야지'" 증언
    여전히 재구속되지 않고 있는 내란 수괴 尹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6.16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재판장 지귀연)에서 열린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우두머리 혐의 관련 7차 공판기일에서 12.3 내란 사태 당시 당시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된 후, 윤석열 전 대통령이 군 핵심 참모들에게 "(국회에) 군인 1000명을 보냈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법정 증언이 나왔다.

    김철진 전 국방부 군사보좌관이 이날 법정에서 실시된 증인신문에서 이같이 증언했다.

    그는 12.3 내란 사태 당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인물이란 점을 감안하면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해당 발언을 했던 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김 전 보좌관은 작년 12월 4일 새벽 1시 20분쯤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이후, 윤 전 대통령이 국방부 전투통제실 내 결심지원실을 찾았다고 진술했다.

    또 그는 윤 전 대통령이 그곳에서 약 30분간 머물며 김 전 장관,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등 주요 참모들과 회의를 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윤 전 대통령이 김 전 장관에게 '국회에 몇 명이나 투입했느냐'고 묻고, 김 전 장관이 '500여명'이라고 답하자, '거봐, 부족하다니까. 1000명은 보냈어야지. 이제 어떡할 거야'라고 말했느냐"고 묻자, 김 전 보좌관은 "들은 사실이 있다"고 답했다.

    또 그는 김 전 장관이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과 통화하는 장면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차를 타고 이동할 때 김 전 장관이 '응, 상원아'라는 전화를 받는 걸 2~3번 정도 기억한다"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은 친근한 사람의 경우 직책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이어 "장군 진급 발표 이후 노 전 사령관이 인사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평판도 좋지 않았다"면서 "비상계엄 당일 결심지원실에서 '응, 상원아'라는 통화를 듣고 나중에 노 전 사령관이 사건에 개입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해 12월 3일 아침에도 장관 공관을 방문했다는 얘기를 듣고 '노상원이 맞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고 부연했다.

    그 밖에 노 전 사령관의 인사 개입 의혹과 관련해선 "장군 인사 이후 노 장군이 주도했다는 불쾌한 이야기가 들려왔다"며 "전역하실 때 좋지 않은 일로 전역했다고 들었고, 전역 후에도 자꾸 인맥을 이용해 군에 개입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했다.


    이렇듯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작년 12월 3일 불법적으로 선포한 비상계엄이 내란이라는 증거는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권한을 명시한 헌법 77조를 보면 1항에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작년 12월 3일 대한민국에선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
    또 같은 법 3항엔 "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영장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따라서 정부와 법원은 계엄군의 통제 하에 둘 수 있으나 국회는 비상계엄 해제 요구 권한이 있기에 통제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은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마저도 통제 대상으로 삼으려 했다.
    또 같은 법 4항엔 "계엄을 선포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고 했지만 국회에 통고하지도 않았다.


    그 밖에 계엄법 2조 5항에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거나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고 돼 있지만 국무회의록은 지금까지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12.3 내란 사태는 비상계엄을 빙자한 내란 행위임이 분명하고 또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는 재구속되지 않은 채 천연히 바깥을 활보하고 있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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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6-16 21:10
    與, "리박스쿨·대한교조 및 이주호 포함 교육부 전원 수사해야"
    尹 정권과 극우 세력이 벌인 교육농단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6.16

    뉴스타파의 잠입 취재로 알려진 보수 성향 교육단체이자 윤석열 전 대통령을 위한 댓글 공작부대인 리박스쿨.(사진=연합뉴스)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뉴스타파의 잠입 취재로 알려진 보수 성향 교육단체이자 윤석열 전 대통령을 위한 댓글 공작부대인 리박스쿨과 관련된 강사 43명이 전국 57개 초등학교에서 최대 4년간 늘봄학교 수업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16일 논평을 통해 리박스쿨 뿐 아니라 이주호 장관을 포함한 교육부 전원을 수사해 윤석열 정부의 '교육농단' 실체를 밝혀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교육부는 이번 달 초부터 지난 13일까지 17개 시도교육청과 함께 전국 모든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늘봄학교 강사들의 리박스쿨 관련 여부를 서면 조사했다.

    조사 대상 기간은 2021년부터 5년간이다.
    조사 결과 17개 시도 가운데 서울·부산·인천·광주·대전·경기·강원 등 7개 지역 57개교, 총 43명의 강사가 리박스쿨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들 가운데 32명은 지금도 늘봄 수업을 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리박스쿨 관련성 판단 기준은 강사가
    ▲ 리박스쿨 관련 기관에서 파견됐는지
    ▲ 리박스쿨 관련 기관이 운영한 교육을 이수했는지
    ▲ 리박스쿨 관련 기관이 발급한 자격을 보유했는지다.

    리박스쿨 관련 단체는 한국늘봄교육연합회, 글로리 사회적협동조합, 우남네트워크, 프리덤칼리지장학회, 한국교육컨설팅연구원 등 5곳이다.

    지역별로 보면 대전에서 가장 많은 사례가 나왔다.
    총 17명의 강사가 20개 초등학교에서 늘봄수업을 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어 서울(14명·14곳), 경기(6명·10곳), 인천(2명·5곳), 부산(2명·4곳), 광주(1명·3곳), 강원(1명·1곳) 순이었다.

    특히 부산과 경기에선 2022년부터 4년간 리박스쿨 관련 강사가 꾸준히 방과후 수업을 해 온 것으로 조사됐다.

    교육 당국은 해당 학교에 대한 현장 조사를 진행하는 한편 이들의 출강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한국늘봄연합회 등에 법적 조치를 하기로 했다.

    교육부는 16일 이런 내용의 '리박스쿨 관련 늘봄학교 강사 전수조사 결과 및 향후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로 성난 민심을 잠재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더불어민주당은 16일 이지혜 상근부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교육부 자체에 대한 엄정 수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부대변인은
    "이주호 교육부는 이미 극우 선동의 본거지가 되어 있다.
    리박스쿨과 대한교조가 ‘정책자문위원’으로 교육부에 공식 편입되었지만 인선과정은 은폐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늘봄학교에는 43명의 극우 연계 강사들이 버젓이 출강했고,
    그들 다수는 지금도 아이들을 상대로 활동을 하고 있다.
    리박스쿨 하나만 이 정도다.
    리박스쿨과 연계되어 있는 유사한 단체들을 모두 조사한다면, 그 숫자가 얼마로 늘어날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런데도 교육부는 자문위원에서 해촉 하지 않고 있고, 사단법인을 사칭한 단체에 대한 수사의뢰도 ‘눈치 보기’로 일관하고 있다.
    이쯤 되면 방조가 아니라 공범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극우 역사관을 주입해 온 것도 모자라, 국방부 산하 기관과 협약을 맺고 군 장병의 정신교육까지 장악하려 시도했다.
    국가 시스템을 오염시키려는 교육 농단이다"고 강조했다.

    이 부대변인은
    "리박스쿨, 대한교조, 관련 단체가 관여한 모든 프로그램을 즉각 중단하고 이주호 장관을 비롯해 관련 공무원을 모두 수사해야 한다"며
    "윤석열 정권이 극우세력과 벌인 교육 농단의 전모를 밝혀내고 엄정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단 하나의 예외도 남기지 않고 유사 단체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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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6-16 18:37
    [조하준의 직설] 아직도 친일 DNA 못 버린 국민의힘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6.15

    13일 국민의힘 의원들의 주도로 국회에서 상영된 친일파 백선엽 미화 영화 '승리의 시작'.(포스터=네이버 영화)

    지난 13일 국회에서 국민의힘 성일종·나경원·박덕흠·임종득 의원 등의 공동 주최로 백선엽 장군을 찬양하는 영화 ‘승리의 시작’ 시사회를 열어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이것이 논란이 된 이유는
    해당 영화의 주인공 백선엽이란 인물이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국 육군으로 복무하며 간도토벌대에서 활동해 '독립군 때려잡기'에 나섰던 친일반민족행위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당연히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역사와정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김용만 의원(경기 하남을)이 논평을 통해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고 밝히며
    "이러한 인물을 영웅으로 찬양하는 시사회를 기획한 국민의힘은 대체 어느 나라 정당인가? 내란당에 더불어 곧 친일파 정당임을 셀프 인증하시는 것이냐?"고 질타했다.

    이어 김 의원은 이러한 국민의힘의 행태를 두고 "뉴라이트 역사관에 물든 극우 정치 세력의 또 다른 역사 왜곡"이라고 일갈하며
    "일제강점기를 미화하고, 친일파를 ‘국가 건설의 공신’으로 포장하려는 저열한 시도"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아울러 "순국선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국회에서 선열들을 ‘토벌 대상’으로 삼은 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국회에 올리면 안 된다. 순국선열에 대한 모독이자, 대한민국에 대한 명백한 반역행위다"고 지적하며 국민의힘을 향해
    "지금 당장 친일파 백선엽 영화 시사회를 중단하고, 독립운동가와 대한민국 국민 앞에 사죄하시라"고 재차 촉구했다.

    진보당 역시도 정혜경 원내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비판에 나섰다.
    정 원내대변인은 백선엽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검증하고 결론내릴 만큼 국가 공인을 거친 결론이자 사회적 합의"라고 강조하며
    "이를 깨고 다시 역사왜곡과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다.

    아울러 국민의힘을 향해
    "'동포에게 총을 겨눴다'고 본인 스스로 자백한 백선엽이 영웅이라면, 불법계엄으로 국민에게 총을 겨눈 윤석열도 영웅이란 말인가? 그래서 국민의 심판을 받았음에도 탄핵반대 당론을 폐기하지 못하는 것인가? 윤석열 정부시절 백선엽에 대한 친일파 문구 삭제 등 친일 찬양 매국 행위가 그립나?"라고 재차 따져 물었다.

    진보당은 국민의힘의 이러한 행태를 두고 "민주주의와 국민에 도발했다"고 규정하며 "내란옹호에 친일찬양에 독재미화 등 국민의힘은 도저히 민주공화국에 공존할 수 없는 세력이다. 내란을 겪은 우리는 이를 그냥 넘어갈 생각 없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힘은 완전히 해체해야 마땅하다"고 성토했다.

    필자의 의견 역시 민주당과 진보당의 논평과 일치한다.
    국민의힘은 이번 일로 또 다시 자신들 몸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친일 DNA'를 다시 한 번 보여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난 윤석열 정부 시절 꽉꽉 들어찼던 뉴라이트 인사들이 얼마나 우리 민족의 얼과 정기를 훼손했던가?

    안으로는 일제 강점기를 미화하며 독립운동가들을 폄훼하는 작태를 벌였고 밖으로는 대일 저자세 굴욕 외교를 일삼았던 것이 윤석열 정부였다.
    한국 뉴라이트 세력들은 엄밀히 말해 '극우 세력'이 아닌 '친일반민족 매국노'들에 불과한 작자들이다.

    세상에 어느 나라 극우파가 자국 역사를 폄훼하고 친일, 숭미적 작태를 벌인단 말인가?

    보통 민족주의란 우파들이 주로 주장하는 개념이고 이 민족주의가 가장 극단적으로 발현된 형태인 국수주의(國粹主義)가 주로 극우 세력들이 주장하는 개념이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등이 주장했던 이념들은 기본적으로 국수주의 사상이었으며 이것이 진짜배기 극우의 표본이다.

    그러나 소위 한국의 극우파들은 본래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 살아남기 위해 잽싸게 일본에서 미국으로 줄을 갈아타며 '반공 투사'로 포장했던 자들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 극우파들과 해외 극우파들을 비교해보면 공통점이라고는 오직 '반공' 하나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백선엽이란 인물이 6.25 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 등에서 승전을 이끌며 공을 세운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육군으로 복무하며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던 악질 친일파였고 거의 100세까지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죽는 그 날까지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참장군'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던 이종찬 장군이나 6.25 전쟁 당시 활약했던 김석원 장군 등도 역시 친일파였지만 최소한 자신의 과오에 대해 반성의 뜻이라도 보였다.

    그러나 백선엽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는 단지 '6.25 전쟁 영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백선엽의 친일 이력을 삭제하는 역사 왜곡을 시도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정권이 붕괴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역사 왜곡을 저지르려 하고 있는 셈이다.

    백선엽은 명백히 공보다 과가 큰 인물이며 절대 그에게 어떤 면죄부도 줘선 안 된다.

    우리가 감격스러운 광복을 맞은지도 어언 80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도 저런 친일파 무리들이 득시글거리는 이유는 광복 직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죄하기는커녕 저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면서 기득권 세력이 됐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
    이는 하나도 둘도 모두 이승만이 계속해서 짊어져야 할 원죄(原罪)다.

    이제 이재명 정부는 숙명적으로 지난 구 제도를 개혁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개혁정부'가 됐다.
    그 때문에 필연적으로 해나가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잊지 않고 해나가야 할 과제 중 하나로 필자는 '역사개혁'이라고 본다.

    뉴라이트 세력들은 더 이상 '학문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보호해줄 이유가 전혀 없는 반민족, 반국가 세력임이 윤석열 정부의 사태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위험한 사상이듯이 이들 뉴라이트 세력 또한 친일, 숭미, 친독재 성향을 지닌 자들로 우리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뒤흔들 위험한 세력들이다.
    주체사상이 '학문의 자유'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다면 뉴라이트 사상 또한 마땅히 '학문의 자유' 보호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친일반민족행위 이력이 있는 자들 중 현충원에 묻힌 자들은 모조리 그 무덤을 파묘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백선엽 외에도 6.25 전쟁 당시 숱한 양민학살을 저지르며 온갖 악행을 일삼았던 김창룡 등도 묻혀 있으며 서울의소리의 보도로 가짜 독립운동가 김정수의 묘도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

    자신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어떠한 반성과 사죄도 하지 않았으면서 국민들이 호국보훈인사들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따라서 어떤 공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친일 매국노였던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자들은 반드시 그 무덤을 파묘해야 한다.

    유족들이 고의적으로 이장을 회피할 경우 국가가 나서서 행정처분을 통해 무덤 파묘 및 화장 처리를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본래 유골을 빻아 바람에 날려버리는 형벌을 조선시대엔 쇄골표풍(碎骨飄風)이라 했는데 친일파들의 화장 처리는 곧 그 쇄골표풍의 현대판이며 그것으로 자신들의 친일 매국 행태에 대한 처벌을 받는 것으로 대신하도록 해야 한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런 친일반민족세력들이 다시는 발호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식에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며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합당한 보상으로 돌아오는 나라, 모두를 위한 헌신이 그 어떤 것보다 영예로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던 만큼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것이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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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6-16 00:37
    이혼 앞둔 부부의 '와인 쟁탈전'
    홍윤지 기자
    2025-06-14

    3040세대 고가품 수집 늘며
    재산 분할 대상으로 떠올라
    합의 못 할 땐 감정인 선임도

    고가 와인도 이혼과정에서 재산분할 대상이 되고있다. 한 백화점에 명절상품으로 등장한 수천만 원대 초고가 와인 선물세트.


    #1. 부부는 둘 다 와인 애호가였다.
    남편 A 씨와 아내 B 씨는 각자 결혼 전부터 와인을 부지런히 사 모았다.
    결혼과 함께 살림을 합친 뒤에도 전 세계 각지의 유명 와인을 샀다.
    집의 방 한 칸을 와인을 보관하는 용도로 쓸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파경을 맞았고, 이혼 소송 과정에서 수많은 와인이 재산분할의 쟁점 항목이 됐다.
    협의 끝에 이들은 모든 와인에 가격을 매기고, ‘와인 몫’으로 각각 2000만 원씩 나누기로 하고 금액에 맞춰 와인들을 배분했다.
    또 각자 ‘꼭 가져가고 싶은 와인 10개’를 뽑고 서로 겹치지 않도록 와인을 챙겼다.
    와인 가격을 매길 땐 해외 와인 검색 앱의 ‘평균 가격 정보’를 활용했다.


    #2. 와인 수집이 취미인 C 씨는 배우자 D 씨와의 별거와 이혼을 앞두고 집에서 보관하던 고가의 와인을 D 씨 몰래 집에서 갖고 나와 다른 장소에 보관하기 시작했다.
    혹시 이혼소송에서 와인이 재산분할 대상이 될 가능성을 우려한 나머지 와인이 D 씨 눈에 안 띄도록 미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고가의 와인이 최근 이혼 소송에서 재산분할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수천만 원에 이르는 귀한 와인을 두고 “내가 갖겠다”고 다툼을 벌이는 이혼 부부들의 사례도 심심치 않게 포착된다.
    이 과정에서 C 씨의 사례처럼 한 배우자가 와인을 은닉해 문제가 되거나, 와인의 가치 책정을 두고 부부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감정인을 선임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와인이 이혼 재산분할 대상으로 떠오른 배경에는 와인을 수집하는 3040 젊은 부부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집에서 술을 즐기는 ‘홈술’ 문화가 자리 잡으며 국내 와인 시장은 크게 성장했다.
    국내 와인 수입액은 2019년 2억6000만 달러, 2020년 3억3000만 달러로 증가한 데 이어 2021년 5억 달러를 돌파, 2022년에는 5억8127만 달러를 기록하며 최고치를 찍은 뒤 2023년에도 5억601만 달러를 기록했다.


    김상훈(51·사법연수원 33기) 법무법인 트리니티 대표변호사는
    “고령층 자산가들일수록 고가의 그림 등 미술 작품을 수집하는 경우가 많아 상속 사건에서 그림이 재산 다툼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 젊은층의 이혼 사건에선 와인이 재산분할 대상이 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와인은 다른 술과 다르게 가족의 기념일 등과 관련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물건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재산 분쟁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김 대표변호사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본인 또는 자녀의 탄생 연도에 만들어진 생년 빈티지 와인을 수집하는 사례가 많다”며 “이렇게 의미가 부여된 와인을 누가 가져갈 것인지에 대한 갈등도 발생한다”고 했다.


    이혼을 염두에 둔 상황에서 한쪽 배우자가 집에 있던 와인을 빼돌리는 ‘절취’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이혼 시 재산분할의 대상이 되는 재산은, 별거를 시작한 시점 또는 이혼 소송 제기 시점처럼 ‘혼인 파탄 시점’에 존재하는 재산이다.

    한쪽 배우자가 ‘이혼 파탄 시점’이 되기 전, 부부가 같이 사는 집에 있던 와인을 몰래 가져가 제3의 장소에 보관했고 뒤늦게 이혼 소송에서 이 사실이 드러나며 재산 은닉으로 문제가 된다.


    혼인 파탄 시점 무렵 한쪽 배우자가 고가의 와인을 까서 마시거나 보관을 소홀히 하는 등 와인 가치를 낮추는 행동을 해 문제가 되는 사례도 있다.

    법원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와인을 개봉해 마심으로써 가치가 떨어지게 된 경우에는 와인의 가치를 혼인 파탄 시점의 가액으로 환산한 뒤, 마셔서 없어진 만큼의 가액은 마신 사람이 이미 가져간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와인의 가치에 대해 부부 간 합의가 없을 때도 문제다.
    서로 주장하는 와인의 금액이 현저히 달라 적정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경우다.

    이럴 때는 제3자인 와인 전문가를 감정인을 선임해 와인 가치를 책정해 달라고 한다.

    가사소년전문법관 출신인 전안나(51·34기) 법무법인 평산 대표변호사는
    “고가의 미술 작품이나 기업의 비상장 주식이 재산 분할 대상이 되는 경우에 감정 결과에 따라 재산 분할 결과가 좌우되기도 한다”며
    “고가의 와인이 재산분할 대상이 되는 경우에도 그 가치를 제대로 감정할 수 있는 전문 감정인의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https://www.lawtimes.co.kr/news/208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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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6-16 00:25
    "윤석열 인터뷰, 탈레반 수준으로 검열"…외신 기자가 밝힌 적나라한 尹정부 언론관

    박세열 기자
    기사입력 2025.06.15.

    유력 외신의 한국 특파원이 윤석열 전 대통령 인터뷰를 포기하게 된 배경을 밝히면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독립언론 는 14일 유튜브 채널을 통해 크리스티안 데이비스 영국 서울지국장 인터뷰를 내보냈다.

    데이비스 지국장은
    "윤석열 정부 언론 담당자들은 대통령 인터뷰를 하려면 매우 까다로운 조건들을 요구했다. 민주 국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라며
    "발언 내용 사전 검토, 수정 요청, 확인 절차 같은 것들을 (대통령실에서) 계속 요구했다"고 밝혔다.

    데이비스 지국장은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인 윤석열 (전 대통령의) 인터뷰 조건이 탈레반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동료 외신 기자가 데스크에 이런 내용을 보고했더니 데스크가 '이건 우리가 탈레반 인터뷰를 할 때 겪는 수준과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데이비스 지국장은
    "우리도 몇 차례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결국 거절했다"며
    "너무 많은 검열이 들어가 독자들에게 공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데이비스 지국장은 가 윤 전 대통령과 인터뷰를 하지 않은 몇 안되는 주요 외신 매체라고 말했다.

    윤 전 대통령과 인터뷰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주요 외신 매체라고 데이비스 지국장은 부연했다.


    데이비스 지국장 윤 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김건희 전 코바나 대표 등을 둘러싼 의혹과 관련해 대국민담화를 열었을 때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휴가 중이었지만
    "휴가가 아니었어도 안 갔을 것이다. 그 기자회견이 시간 낭비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 말했다.


    데이비스 지국장은
    "외신은 한국 언론이 권력층과 너무 아깝고 유착돼 있어 충분히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기자들은 너무 적은 급여를 받고 있고, 상사들은 광고주나 대기업과 거래를 한다. 간부들이 기자들 머리 위에서 거래한다"며
    "이런 환경에서도 기자 일을 계속하는 한국 기자들은 정말 고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061523265918462&utm_source=naver&utm_medium=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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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6-16 00:25
    "디올백 사건 후, 되레 김건희에 명품 선물 폭주…'윤핵관' 부인도 있었다"

    박세열 기자
    기사입력 2025.06.15.


    윤석열 전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전 코바나 대표가 대통령 영부인으로 있던 시절 명품 가방 등을 수차례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언론 보도를 통해 제기됐다.

    은 14일 보도를 통해 '한남동 대통령실 관저에 출입했던 김건희 여사의 지인'의 증언을 공개하며 "디올백 사건으로 여사의 취향이 확인되자 오히려 디올 명품 선물이 폭주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해당 지인은 이 매체에
    "온갖 군데서 디올 명품과 선물권이 들어온 것이다.
    여사 생일(9월) 전후로는 도배할 정도로 들어왔다.
    디올 명품 선물을 준 사람 중에서는 실세 윤핵관 의원 부인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만 실세 윤핵관 부인'으로 지목당한 인사는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해명을 거부했다.


    김 전 대표에게 디올백을 직접 건넸던 최재영 목사는 이 매체외 인터뷰에서 '자신이 건넨 300만원 상당의 디올백은 김 여사가 비서에게 쓰라고 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관련해 전직 대통령실 관계자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김건희가) 평소에 입는 옷도 디올이다. 관저에서 입는 평상복도 디올이었다"고 증언했다.


    최 목사는 인터뷰를 통해
    "그 사람들(윤석열·김건희)은 남의 눈을 신경 쓰는 사람들이 아니다.
    타임라인을 살펴보면 내 사건(디올백 수수 사건)으로 나라가 온통 들썩이는 와중에 (건진법사를 통해 전 통일교 고위간부로부터) 샤넬백을 받은 것이다.
    내 사건 때문에 온통 시끄러웠다면 돌려주거나 안 받아야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받은 것이다. 애초부터 그런 사람들이다"라고 주장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061523243678707&utm_source=naver&utm_medium=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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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6-16 00:15
    [나]
    대통령의 장관 입각 제의를 끝까지 거부한 기업가
    [어떤 어른] 일반적인 기업인 문법에서 벗어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김종성(qqqkim2000)
    25.06.15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제13권에 따르면,
    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 자격으로 임시정부에 '정치자금'을 보내고 일명 맹호군인 한인국방경위대 편성을 후원했다.

    1945년에는 미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무전법·촬영법·파괴법·낙하산 훈련 등을 받았다.

    미국에 체류 중인 회사 오너가 이런 활동까지 했으니, 얼마나 적극적인 '정경유착주의자'인지 알 수 있다.

    유일한은 '하지 말아야 할 정경유착'과 '해야 할 정경유착'을 구분했다.

    일반적으로, 앞의 정경유착을 하면 돈이 들어오고, 후자의 정경유착을 하면 돈이 빠져나간다.

    그런데 그는 후자의 정경유착을 하면서도 기업을 지켜내고 크게 키워냈다.
    일반적인 기업인 문법에서 벗어난 인물이었다.

    전자의 정경유착을 일관되게 거부해 세상의 주목을 받던 유일한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세상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소유한 유한양행 주식 전부를 유한중고교 재단에 기증하고 재산 일체를 사회교육사업에 쓰도록 했다.

    유한동산을 꾸미라고 딸에게 준 묘지 일대 5000평과 학자금으로 쓰라고 손녀에게 건넨 1만 달러 이외의 재산은 사회에 다 환원했다.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라"가 자녀들에 대한 그의 유언이었다.

    돈 많은 사람은 힘센 사람은 되기 쉽지만, 존경받는 어른은 되기 힘들다.
    큰돈을 버는 과정에서 그런 어른이 될 기회를 잃기가 쉽다.
    정당하게 벌었더라도 돈을 기반으로 존경을 얻는 것도 만만치 않다.
    돈이 많은 재력가나 사업가보다는 돈이 없는 성직자들이 더 많은 존경을 받는다.

    위의 기사 첫머리에 인용됐듯이 '돈이 말을 많이 하면 진리가 침묵한다'는 격언도 있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재력가나 사업가 중에 존경받는 어른이 거의 없는 것은
    이들이 돈을 벌거나 쓰는 방식이 세상의 칭송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일한은 큰 사업을 일으키고 큰돈을 벌었으면서도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어른이 되어 있다.

    이는 그가 재산 전부를 사회에 되돌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의한 정경유착을 일관되게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옳게 벌고 옳게 쓰는 기업인이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39724&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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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6-16 00:14
    [가]
    대통령의 장관 입각 제의를 끝까지 거부한 기업가
    [어떤 어른] 일반적인 기업인 문법에서 벗어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김종성(qqqkim2000)
    25.06.15


    ▲부천시 중앙공원에 위치한 유일한 박사상위키미디어 공용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은 '재산의 사회적 환원'을 실천해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재산의 환원 못지않은 가치를 실천했다.

    큰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정경유착을 일관되게 거부했다.

    그 시절에는 정치지도자들이 '재산의 정치적 환원'을 기업가들에게 요구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 그런 시절에 정권과의 유착 없이 큰 기업을 키우고 지켜낸 것은 경이적인 일이다.

    일본군의 동학혁명군 진압이 막바지에 달한 1895년 1월 15일에 평양에서 출생한 유일한은 아홉 살 때인 1904년에 미국 유학을 떠났고, 미시간대학 상과를 졸업한 지 3년 뒤인 1922년에 숙주나물 통조림 판매처인 라초이식품회사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에도 참여한 그는 서른 살 때인 1925년에 31세 많은 독립운동가 서재필과 함께 류한양행을 창립하고 영어로는 뉴일한(New il-han & Company)으로 표기했다.


    1926년에 귀국해 그해 12월 10일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은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등을 판매해 회사를 키웠고, 1936년에는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는 선구자적 모습을 보였다.

    해방 뒤에는 교육 분야로도 영역을 넓혀 1952년에 고려공과기술학교(유한공고)를 설립했다. 71세 때인 1969년에 경영 일선을 떠났다가 2년 뒤 타계했다.

    1922년부터 1969년까지의 기간 동안, 노동자 권익을 보장하고 신제품을 개발하고 기업을 확장시키는 동안에 그가 특히 역점을 둔 것은 기업을 정치로부터 차단하는 일이었다.

    그의 정경유착 거부는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면서 친분을 쌓았던 이승만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미주 지역 시장 개척을 위해 1938년에 미국으로 떠난 유일한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7월 18일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그해 연말에 재계는 8년 만에 귀국한 51세의 유일한을 경성상공회의소 회장(11.25)에 이어 조선상공회의소 회장(12.3)으로 추대했다.

    이즈음에 그가 만난 인물이 71세의 이승만이다.
    그는 미군정의 지원하에 해방정국의 실력자가 되어 있는 이승만을 예방하고자 서울 성북구 돈암장으로 찾아갔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쓴 은 "그 당시 장면을 말해준 사람에 의하면, 이승만 박사는 유일한 회장의 내방을 받고 직접 대문까지 나와서 맞았다고 한다"는 말을 들려준다.


    이승만의 정경유착 요구 끝까지 거부


    ▲1969년 유한양행 대방동 사옥유한양행

    그날 이승만은 "함께 앞날의 조국을 위해 일하자"는 말을 했다.
    유일한은 이 말을 정치자금을 달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위 전기는 "이승만 박사의 심중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유일한 회장은 틀림없이 이승만 박사가 정치자금을 요청해올 것을 직감했다"라며 "미국에 있을 때도 그런 관계가 있었고"라고 기술한다.

    정치자금을 달라는 의미가 얼른 드러나지 않는 "함께 앞날의 조국을 위해 일하자"라는 요청에 대해 의례적인 대답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유일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교적 명시적인 방법으로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저는 그렇게 큰 인물도 못 되지만, 기업과 민생 문제에 전념키로 했다'는 뜻을 표했다고 위 전기는 알려준다.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1948년 정부수립에 즈음한 시점에도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했다.

    1992년 2월 27일 자 '결단의 한국인 (7):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은 "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그에게 상공장관으로 입각하기를 원했을 때
    '내가 상공인인데 상공장관을 맡으면 정경분리의 순수성이 훼손된다'
    고 고사"했음을 알려준다.

    정경유착을 거부하는 자세는 정권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2017년 제20권 제4호에 실린 이기은 대구대 교수의 논문 '윤리적 관점에서 유일한의 리더십 분석'은 "유일한에게 탈세와 정치자금은 없었다"라며 "유일한은 기업과 정치는 결탁하거나 그 힘을 빌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강조하였다"고 한 뒤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의 정치자금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에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기술한다.

    유일한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그곳에 기반을 쌓았다.
    그가 이승만의 정경유착 요구를 끝까지 거부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요인도 작용했으리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철권을 휘두르는 정권의 압력에 맞서는 일은 신념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독재정권의 자금 요청을 거부하고 그 대신 야당을 지원하는 일은 좋은 평을 들을 수도 있다. 유일한은 이것도 하지 않았다.

    위 논문은 "친분이 있는 야당의 정치자금 부탁에 대해서도 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원칙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해서도 적용됐다.
    1961년에 군사정권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그들에게도 협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때보다도 정경유착을 거부하기가 더 힘들었던 시절은 일제강점기다. 이 시기에도 당연히 압력이 있었다.

    1991년 8월 23일 자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78 유일한'은 "유한양행이 일본의 제약회사를 제치고 정상의 제약회사로 떠오르자 조선총독부의 직·간접적인 견제와 협박·권유가 훨씬 강화"됐다고 기술한다.

    1994년 제9권에 실린 김신웅 청주대 교수의 논문 '유한양행과 한국 제약사업'은 "유한 말살을 목적으로 꾸민 세금 탄압 등 갖가지 압박"이 총독부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유일한은 제국주의 압력하의 식민지 한국에서 기업을 지켜냈다.
    총독부에 굴하지도 않고 뇌물을 주지도 않았다.
    이런 내공이 이승만·박정희의 압력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됐으리라 볼 수 있다.
    히트 상품인 안티푸라민으로 정경유착이라는 염증을 제거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옳게 벌고 옳게 쓰는 기업인


    ▲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유한양행

    그런데 그가 모든 유형의 정경유착을 다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세우는 일에는 아낌없이 투자했다.
    제국주의 지배를 몰아내고 자주 국가를 건설하는 독립운동 앞에서만큼은 정경분리 논리를 내세우지 않았다.

    지금은 독립운동과 정치 활동이 명확히 구분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이 정치로 인식될 때도 있었다.

    일례로, 이정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의 에는 일제 간수가 어린 독립운동가 수형자들에게 "네까짓 것들이 건방지게 정치에 무슨 상관을 하느냐?"라며 면박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유일한도 그런 의미의 정치에는 헌신적이었다.
    그가 그런 '정경유착'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는 미주 지역 사업을 위해 미국에 체류한 기간 동안의 행적이 증명한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39724&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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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6-16 00:00
    스무 살에 결혼자금 당겨 쓰더니, 3개 축구팀 구단주 된 '관습파괴자'
    [멋있으면 다 언니 - 미셸 강②] "그냥 그래야 하는 사회에서 나는 문제아였다... 이제 기회 제공할 차례"
    이주연(ld84)
    25.06.15


    성과만으로 이를 수 없는 '리더'에 오른 여성들에게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에 사회적 울림까지 담겨 있다면, 멋지다. 멋있으면 다 언니다.

    - [미셸 강①] "대륙마다 축구팀 갖겠다"는 여자 축구계의 '미친자'


    ▲미셸 강은 2024년 7월 키니스카 스포츠 재단을 설립하며, 하나의 재단이 여러 축구팀을 관리하는 멀티클럽 모델 구축에도 나섰다. 기원전 396년 올림픽에 출전해 마차 경주 종목에서 최초로 우승한 여성 '키니스카'의 이름을 딴 재단이다. 사진은 재단 홈페이지 갈무리. ⓒ kynisca.com


    "'그냥 하면 된다'는 어떤 관습도 따르는 게 싫었어요. 규칙을 따라야 하는 사회에서 저는 문제아였습니다." (더 애슬레틱, 2024년 11월 22일)

    세 개 나라의 세 개 여자 축구팀(프랑스의 OL리옹, 미국의 워싱턴 스피릿, 영국의 런던시티 라이오네스)을 소유한 구단주, 미셸 강(66)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옆집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네가 못할 게 없다"
    던 아버지와 11대·13대 국회의원을 지낸 변호사이자 정치인(이윤자 의원)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그의 반골 기질이 잘 나타난 것은 스무 살 때 였다.

    전두환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1980년 정치적 격동기 때 서강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일찌감치 "여기서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해도 CEO의 비서밖에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녀는 미국 유학을 택했다.

    "(나중에) 제 결혼 자금으로 쓰실 돈을 지금 저에게 주세요. 1년 학비만 대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부모님은 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는 그렇게 '한국'이라는 천장을 깨고 나갈 수 있었다.
    훗날 미셸 강은 "그게 나의 첫 번째 비즈니스 거래였다"(더 애슬레틱, 2024년 11월 22일)고 말했다.

    두 번째 천장 '여성이 세운 회사는...'


    ▲는 미셸 강을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자수성가 여성 중 한 명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포브스 홈페이지 갈무리. ⓒ forbes.com


    CEO의 비서가 아닌 CEO를 꿈꿨던 미셸 강은 시카고 대학 경제학 학사를 마치고 예일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고, 방위산업체 임원이 됐다.

    그의 나이 48세이던 2008년, '모두가 미쳤다'고 말한 두 번째 비즈니스 거래가 이뤄졌다. 미국발 금융위기 한복판에 IT 기업을 창업한 것이다.

    "미국에서 여성이 세운 회사는 100만 달러 매출을 넘기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그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게 팀워크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조직의 힘을 키우기 위해 회사 매출이 2000만 달러일 때도 10억 달러 회사에 뒤지지 않는 조건을 내세워 직원들을 뽑았어요.
    과감한 투자를 했기에 매년 매출이 두 자릿수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경제, 2022년 9월 21일)

    결혼 자금을 당겨 쓰며 자신의 미래에 투자했던 미셸 강은, 이제 자신의 회사를 세워 공격적 투자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여성, 이민자, 창업가가 마주하게 되는 허들을 뛰어넘었다.
    성공을 거뒀고, 2024년에는 기업을 매각하며 부호가 됐다.
    포브스에 따르면, 미셸 강의 재산은 12억 달러(약 1조 6376억 원)규모다.

    세 번째, 다른 여성들을 위해 천장 깨기


    ▲파산 직전이었던 런던시티는 미셸 강이 구단주가 된 후 1년 반 만인 2025년 5월 잉글랜드 여자 챔피언십 우승을 확정했다. 우승을 함께 축하하고 있는 미셸 강과 선수들의 모습 ⓒ www.londoncitylioness.com


    그녀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세 번째 비즈니스 거래는, 시중 거래금의 10배를 주고 여자 축구단을 인수하면서 이뤄졌다.

    미국의 여자 프로 축구 리그에서 지분을 소유한 '최초의 유색 인종 여성' 구단주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잇따른 협상 결렬 끝에 미셸 강은 2021년 12월 워싱턴 스피릿을 3500만 달러(약 470억 원)에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워싱턴 스피릿과 같은 리그 내 팀인 시애틀 레인FC가 대부분의 지분을 351만 달러에 매각한 데 비하면 10배에 달하는 규모다.

    워싱턴 스피릿을 인수할 당시, 선수들은 전임 감독의 폭력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셸 강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축구단 운영을 맡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단순히 축구단을 떠맡은 게 아니었다.

    2022년 한국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급한 불은 껐으니 선수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미국에서 남자 축구 선수는 40만 달러가 넘는 연봉을 받지만 여자 선수의 평균 연봉은 4만 달러에 그쳐 대부분 여자 선수들이 대학 졸업 후 축구를 포기한다"는 현실을 명확히 짚고 있었다.

    미셸 강은 "3년 내 선수 연봉과 팀 운영 등 모든 면에서 워싱턴 스피릿을 세계 최고의 여자 축구팀으로 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셸 강은 본인 소유 팀의 처우 개선에만 나서지 않았다.
    2024년 11월 미국 축구협회에 향후 5년 간 3천만 달러(약 410억 원)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축구협회는 이 소식을 알리며 "미국 여자 축구에 대한 역대 최대 기부액"이라고 전했다.

    "미국 축구는 현재 운영 중인 국가대표팀 캠프의 수를 두 배로 늘릴 수 있으며, 이는 유소년 국가대표팀을 위한 연령대별 6개 캠프에 해당합니다.
    특히 여성과 소녀들을 위한 캠프에 자금을 지원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미국 축구 협회의 디지털 인재 발굴 플랫폼 구축에 도움이 돼, 청소년 국가대표팀 선수 선발 과정에서 10만 명의 여성 선수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미국 축구협회, 2024년 11월 19일)

    여자 축구계의 지평을 바꿔내고 있는 미셸 강은 2024년 8월 여성 엘리트 운동선수들의 건강과 성과 향상 등을 위해 5천만 달러(약 680억 원) 규모의 글로벌 투자 펀드를 설립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올해 4월 2500만 달러(약 340억 원)를 추가 기부하겠다고 나섰다.

    "운 좋게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내가, 이제 기회를 제공할 차례입니다"


    ▲워싱턴 스피릿의 구단주 미셸 강. ⓒ 워싱턴 스피릿 SNS 갈무리


    이처럼 막대한 돈을 기부하는 이유는 걸까.

    "결국 우리의 목표는 모든 여성 팀이 (우리 팀처럼) 여성 선수를 훈련시키는 방식을 채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하는 것보다는 미국 축구 같은 조직에서 훨씬 더 (이 목표를) 잘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인구의 절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ESPN, 2025년 5월 6일)

    더 궁극적으로는, '기회의 제공'이다.
    인구 절반의 머리 위에 있는 '유리 천장'을 깨는 데 일조하려는 것이다.

    "저는 지금의 여성 세대가 제가 겪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겪은 일이라는 건, 항상 더 많은 것을 증명하고 직장에서 한 시간을 더 보내야 한다는 걸 뜻합니다." (파이낸셜타임스, 2024년 5월 25일)

    "나는 이민자고 운이 좋게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어요.
    이제 내가 기회를 제공할 차례입니다.
    제가 동등한 기회는 줄 수 있으니까요." (가디언, 2024년 8월 19일)

    자기 앞에 놓인 관습을 파괴해 온 그는 이제, 세상의 관습을 깨고자 한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38863&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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