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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님의 로그 입니다.

좋은글 하나라도 놓칠까봐 노심초사했다
  • 29
  • tradbred(@tradbred)

  • 29
    tradbred (@tradbred)
    2025-03-12 05:34
    ((꼭 한번 읽어 봤으면 하는 좋은 글))
    [A]
    유사 파시즘 불러내는 내란 세력의 기괴한 믿음 [고명섭의 카이로스]
    수정 2025-03-11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가지 논제’를 내걺으로써 시작된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의 자기 정화 운동을 불렀다.

    그 운동의 구심이 된 사람이 스페인 바스크 출신 영성가 이냐시오 로욜라(1491~1563)다. 로욜라가 세운 예수회는 루터-칼뱅의 혁신을 이어받은 청교도와 함께 종교적 삶의 새 시대를 열었다.

    젊은 날 로욜라의 꿈은 전장에서 무훈을 세워 공주의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중세 기사들이 뒤쫓던 세속적 성공이 로욜라의 꿈이었다.
    서른살이 되던 해 이 꿈이 깨졌다.

    1521년 로욜라는 프랑스군 포탄에 맞아 다리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이때 병상의 지루함을 달래려 손에 잡은 것이 성인들의 전기였다.
    자신과 비슷한 젊은 시절을 보낸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이 가슴 깊은 곳을 찔렀다.

    이 독서가 싸움꾼의 삶을 바꾸었다.
    로욜라는 귀족의 표시가 나는 모든 것을 버렸다.
    걸인의 옷을 얻어 입고 구걸을 하며 지난 삶을 참회했다.
    다시 태어난 기사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마흔여섯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을 받은 직후 동지 여섯명과 함께 예수회를 결성했다.

    로욜라가 예수회를 창설하고서 먼저 한 일이 대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늦공부가 낳은 열정이었다.
    이어 로욜라를 사로잡은 것이 땅끝까지 그리스도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다.

    이때 선교사로 뽑힌 사람이 학업 시절 로욜라와 기숙사 방을 함께 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하비에르는 막 열린 대항해의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건너 1549년 일본 규슈 남단 가고시마에 도달했다.
    하비에르는 가고시마 영주의 허락을 받아 2년여 동안 수천명의 일본인에게 세례를 주었다.

    16세기 말엽에는 기리시탄(그리스도인)이 수십만명에 이르렀다.
    천민·빈민만이 아니라 유력 영주까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전국시대 패자 오다 노부나가가 가톨릭의 확산을 도왔다.
    수도 교토에 신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바람은 오래 가지 않았다.
    노부나가가 죽고 실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 지방 영주들이 서양 세력과 공모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탄압으로 돌아섰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온 사제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히데요시 사후 전국을 통일한 도쿠가와 막부는 탄압정책을 더 밀어붙였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 이르러 규슈 지역 가톨릭 농민들이 ‘시마바라 반란’(1637)을 일으키자 탄압은 극에 이르렀다.

    막부는 성모상이나 예수상을 밟고 지나가게 해 기리시탄을 색출하고, 배교를 거부하는 신자를 구덩이 속에 거꾸로 매달아 죽이는 극악한 고문을 했다.
    가톨릭교도는 지하로 숨어들었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이 시작하는 곳이 여기다.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가 금단의 땅에 도착한다.
    관의 눈을 피해 신자들을 만나던 신부는 끝내 붙잡혀 나가사키로 압송된다.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한다.
    순교라면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다.

    그러나 신부가 걸려든 시험은 순교의 차원을 넘어선다.
    관헌은 신부가 아니라 신자들을 구덩이 속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신부가 배교할 때까지 고문한다.
    신자들은 신부가 가톨릭을 버리지 않는 한 참혹한 고통 속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이 시험이 신부의 갈등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그리스도가 똑같은 시험에 들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신부의 내면에서 두 목소리가 싸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해 틀림없이 배교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괴로워하던 신부는 마지막 순간에 배교를 선택하고 십자가의 그리스도 얼굴을 밟는다. 배교야말로 “가장 괴로운 사랑의 행위”다.

    소설 속 신부가 배교하고 난 뒤에도 일본의 가톨릭교도는 규슈 지역 여러 섬에 숨어 신앙을 지켰다.
    이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가쿠레키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이다.
    사제도 없고 성경도 없이 가쿠레키리시탄은 불교도로 위장해 관음보살 가슴에 흐릿한 십자가를 새겨넣은 성모상(‘마리아 관음’)을 만들어 섬겼다.

    숨은 기독교인들은 250년 뒤 메이지유신으로 금교령이 풀린 뒤에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엔도의 소설 속 사건이 벌어지던 17세기 중엽,
    지중해 동쪽 이스탄불에서 한층 더 기이한 배교 사건이 일어났다.

    유대인 샤베타이 체비(1626~1676)가 주인공이었다.
    오스만제국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난 샤베타이는 어느 날 신비체험을 하고 유대인의 메시아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메시아가 도래해 세상이 바뀌었으니 옛 율법이 낡은 것이 됐다.
    샤베타이는 율법이 금한 음식을 먹고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

    보다 못한 유대 랍비들이 샤베타이를 추방했다.
    샤베타이는 이집트를 거쳐 1665년 팔레스타인 가자의 유대인 공동체로 갔다.
    그곳에서 샤베타이는 나탄이라는 젊은 랍비를 만났다.

    나탄은 샤베타이가 유대인을 구원할 메시아임을 ‘알아보고’ 근동과 유럽 전역의 유대인 공동체에 메시아가 왔음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나탄의 편지는 박해 속에 살아온 유대인들 사이에 희망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메시아 숭배가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샤베타이는 1666년 1월 오스만제국 수도 이스탄불에 도착해 유대인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제국은 샤베타이를 반역죄로 붙잡아 갈리폴리 감옥에 가두었다.

    샤베타이는 옥중에서 편지를 써 “나는 구세주, 너희의 신”이라고 선포했다.
    유대 세계의 모든 시선이 갈리폴리로 모였다.
    여섯달 뒤 샤베타이는 재판을 받으러 이스탄불로 불려 갔다.

    제국의 술탄은 샤베타이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하든가 아니면 사형을 받으라고 명령했다. 그 자리에서 샤베타이는 개종을 선택하고 머리에 터번을 둘렀다.
    석방된 샤베타이는 제국의 연금을 받으며 충직한 무슬림으로 살다 죽었다.


    유대 사회는 메시아가 배교했다는 소식에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랍비들은 즉각 가짜 메시아를 지워버렸다.
    그러나 어떤 유대인들은 메시아 환상을 빼앗기느니 현실을 왜곡하는 편을 택했다.

    샤베타이를 메시아로 알아보았던 가자의 나탄이 그런 사람이었다.
    나탄은 샤베타이의 배교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남은 삶을 바쳤다.

    ‘악의 세력과 싸우려면 악의 세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유대 민족의 신성한 의무를 배반하지 않을 수 없다.’

    악의 심연으로 들어가 악을 무찌르는 트로이 목마가 샤베타이라는 얘기였다.
    나탄의 말에 설득된 유대인 수천명이 이슬람교로 개종해 터번을 두르고 메카를 향해 기도했다.

    샤베타이의 배교를 메시아의 표시로 받든 유대인들은 이후 150년 동안 유럽 곳곳에서 출몰했다.
    추종자들은 샤베타이를 따라 전통 율법을 부정했다.


    18세기 폴란드의 유대인 예언자 야쿠프 프랑크는 샤베타이 추종자 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사람이었다.
    프랑크는 자신이 샤베타이의 환생이라며 메시아가 왔으니 옛 율법이 모두 폐기됐다고 선언했다.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율법을 준수한다는 진정한 표현이다.”

    프랑크는 극단적인 허무주의 발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이 파괴될지니, 그것은 내가 세상을 파괴하고 멸망시키러 왔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프랑크는 추종자 수천명을 데리고 폴란드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샤베타이의 배교 행위를 반복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864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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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3-12 05:34
    미란다 원칙처럼 ‘윤석열 원칙’ 탄생? [유레카]
    황준범 기자
    수정 2025-03-11


    수사기관이 범죄 용의자나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심문하기에 앞서 그에게 방어권을 고지하도록 하는 ‘미란다 원칙’(Miranda Warning)은 형사 절차에서 인권 보호의 금과옥조로 꼽힌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재판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알려야 한다는 원칙이다.

    미란다 원칙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미란다 대 애리조나’ 판결에서 유래했다.

    1963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18살 여성을 납치·성폭행한 혐의로 체포된 에르네스토 미란다는 경찰에 범행을 인정하는 진술을 했고, 이를 토대로 1·2심에서 유죄가 확정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66년 연방대법원은 ‘경찰 심문 과정에서 진술 거부권이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 등을 고지받지 못했다’는 미란다의 주장을 받아들여, ‘피의자에게 헌법상 권리를 알리지 않고 얻은 자백은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며 사건을 애리조나주법원으로 환송했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기소됐던 윤석열이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을 받고 체포 52일 만에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부장 지귀연)가 그렇게 결정한 핵심적 이유는 ‘형사소송법상 구속기간이 만료된 상태에서 윤석열을 구속기소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구속 전 피의자심문’ 등에 걸린 기간(33시간7분)을 ‘날(日)’로 따졌는데, 법원은 피의자에게 유리하도록 ‘시간’으로 따지는 게 맞는다고 봤다.
    71년 동안 ‘날’로 계산해온 검찰 관행과 다른 결정이다.

    ‘미란다 원칙’처럼, ‘윤석열 원칙’이 탄생했다고 해야 할까.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라는 법언을 판단 배경으로 내세웠다.
    무죄 추정의 원칙, 불구속 수사 원칙 등은 피의자 인권 보호를 위해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피의자 이익을 강화하는 구속기간 계산법’의 첫 수혜자가 하필 내란 우두머리 피의자인 윤석열이라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허탈과 분노, 의문을 표한다.

    오랜 세월 다져온 피의자 인권 보호의 숭고한 정신과 장치가 헌법·법률을 정면으로 파괴한 ‘법기술자 대통령’한테 바쳐졌다.


    미란다는 연방대법원에서 주법원으로 되돌려진 뒤,
    동거녀의 증언을 근거로 다시 기소돼 결국 유죄를 선고받고 5년 복역했다.

    윤석열도 지금은 풀려났어도 내란 재판은 계속될 것이고,
    헌법재판소가 파면 결정할 경우엔 공천 개입 의혹 등 다른 사안까지 포함한 구속 수사와 중형 선고 가능성이 엄존한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8645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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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3-12 05:10
    [사설] 윤석열 구속취소 빌미로 공수처 수사 정당성 훼손해선 안 된다
    민중의소리
    발행 2025-03-11

    보수진영이 ‘내란범’ 윤석열에 대한 사법부의 구속취소 결정을 빌미로 수사 주체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흔들기에 더욱 열을 올리는 모습이다.

    국민의힘은 10일 오동운 공수처장을 ‘대통령 불법체포’ 및 ‘직권남용’ 등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한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비대위 회의에서 “공수처의 내란죄 수사 권한에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내란몰이에 의해 자행된 불법, 위법 수사 전반에 제동을 건 것”이라고 말했다.
    적폐 운운하며 공수처 폐지론까지 폈다.
    심지어 윤석열의 계엄 선포를 반헌법적이라고 규정하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던 유승민 전 의원조차 공수처의 무리한 수사를 언급하며 이러한 대열에 올라탔다.

    서울중앙지법 지귀연 부장판사는 내란 혐의 피의자인 윤석열의 구속취소 청구 사건에서 그동안 구속 전 피의자 심문 제도 도입 이후에 아무런 법적 제약이 없었던 구속 피의자 기소 시점 산정 기준과 관련해 형식논리를 넘어 아예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법조계는 물론 국민 대다수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검찰에 즉시항고를 촉구했다. 그러나 검찰이 항고를 포기함에 따라 상급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기회마저 날아갔다. 따라서 법원 판단의 적절성은 국민적 동의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사법적으로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단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런 상황에서 권영세 비대위원장의 ‘내란몰이’ 운운 등 보수진영이 공수처 수사를 겨냥해 공세 수위를 높이는 건 윤석열의 위법·위헌적인 내란 범죄를 정당화하는 비상식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를 점거해 입법부 기능을 마비시키려 한 장면이 전국민들에게 실시간으로 중계됐고, 여야 대표와 국회의장, 국회의원 체포를 시도한 사실과 선관위를 장악해 실체도 없는 부정선거 사건을 억지로 만들려고 한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명백히 눈으로 확인된 내란을 ‘내란몰이’라고 명명해 정치공세의 일환으로 치부하는 여당 대표자의 말은 경악스럽기 짝이 없다.


    백번 양보해 법원의 판단을 형식논리로 보더라도, 보수진영이 공수처 수사를 문제 삼을 수 있는 근거는 전무하다.

    첫째로, 법원이 밝힌 구속취소 청구 인용 사유는 ‘기소’ 시점에 관한 것이지, 공수처의 ‘수사’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법원이 문제 삼은 기소의 주체인 ‘검찰’이 아닌 ‘공수처’를 공격하는 건 사리에 전혀 맞지 않다.

    둘째, 일각에서 법원이 공수처의 내란죄 수사권을 부정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법원이 인용 사유에서 언급한 건 윤석열 측 주장과 해당 주장과 관련한 법령상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법적 공백 상태를 설명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윤석열 측이 주장한 공수처의 영장쇼핑이나 허위 공문 발송 등에 대해서는 법원이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상 윤석열 측 청구를 각하한 셈이다.

    국민의힘을 필두로 한 보수진영이 이러한 실상을 호도하고 공수처 수사의 정당성을 깎아내림으로써 얻게 될 효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윤석열 내란을 옹호하며 폭동을 일삼고 있는 극우세력의 폭력적 만행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이는 그동안 일궈온 민주헌정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일 뿐 아니라 종국엔 단죄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https://vop.co.kr/A000016683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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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3-12 05:06
    [사설] 유감표명 한 마디 없었던 윤, 이제 '관저정치'까지
    민중의소리
    발행 2025-03-11

    법원의 구속취소로 풀려난 윤석열 대통령이 관저에서 여당 지도부를 만난 사실이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9일 오후 관저에서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권성동 원내대표와 만나 30분가량 차를 마시며 담소했다고 한다.
    신동욱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당을 잘 운영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또 구치소에서의 여러 가지 소회도 이야기했다고 전해졌다.

    윤 대통령이 탄핵 소추를 당하고 구속에 이르기까지 권영세 비대위원장이나 권선동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다.
    당의 '투톱'이 윤 대통령을 만나면 계엄을 옹호하는 것이 당의 공식입장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석방되자 당의 '투톱'이 관저를 찾은 것이다.
    이번에는 인간적 도리니 개인 자격이니 하는 망토도 두르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석방 당일인 8일에는 관저에서 정진석 비서실장 등 용산 참모진과 저녁 식사를 했고 9일에도 오찬을 했다고 한다.
    나경원·윤상현 의원 등 자신을 강하게 옹호했던 정치인들과 전화통화도 했다.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을 만나 참모진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런데도 국가 공무원의 신분인 용산 참모들이 관저를 드나들고 심지어 헌재와 재판부에 대해 토를 다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윤 대통령은 8일 서울구치소를 나오면서 지지자들을 향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수사 절차에 논란이 빚어져 석방된 자가 마치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된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교도소는 대통령이 가도 배울 게 많은 곳"이라며 '양심수' 흉내를 낸 건 어이가 없는 짓이었다.
    그런 자가 관저로 돌아와 여당의 지도부를 만나고 대통령실 인사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은 국민의 화를 돋울 뿐이다.

    헌정 질서를 짓밟은 계엄과 내란에 대해 비굴한 거짓말로 일관했던 대통령은 거리의 극우파 시위대의 등에 업혀 기력을 회복했고, 이제는 여당과 관료 조직을 다시 장악하려 한다.

    윤 대통령의 관저정치는 정확히 탄핵 심판에 대한 불복을 예고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금껏 자신의 행위에 대해 사과하거나 사법부의 심판에 승복하겠다는 분명한 의사를 표시한 적이 없다.

    이런 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여당과 일부 고위공무원들의 행태는 명백한 내란 동조 행위다.



    https://vop.co.kr/A0000166838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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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3-12 02:47
    윤석열 석방 후폭퐁...옥바라지 카페 "구속 취소 소송하자"
    기자명 아이엠피터(임병도)
    입력 2025.03.11


    ▲ 법원의 구속취소 청구 인용으로 석방된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 도착해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며 인사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지난 1월 26일 구속기소 된 지 41일 만, 1월 15일 체포된 후 52일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석방은 법원이 구속기간을 '일수'가 아닌 '시간'으로 계산한 게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원래 검사가 피의자를 구속했다면 10일 이내에 공소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수사 서류가 법원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구속 기간에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검찰과 법원은 이 기간을 1일 단위로 계산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윤 대통령에게는 수십 년 동안 관행처럼 산정했던 날짜가 아닌 시간으로 하는 새로운 계산법을 적용했습니다.

    법원이 그동안 '날'로 계산했던 구속 기간을 시간으로 바꿔 윤 대통령을 석방하자,
    그 파문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옥바라지 카페도, 명태균도... 너도나도 구속 취소 신청


    ▲ 구치소와 교도소에 수감 중인 재소자 가족들이 정보를 나누는 '옥바라지 카페'에 올라온 게시글 © 인터넷커뮤니티 갈무리


    지난 9일 교도소에 수감 중인 재소자의 가족들이 주로 활동하는 이른바 '옥바라지 카페'에 "윤통 석방으로 구속영장에 대한 의견"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올라왔습니다.


    요약하면 윤 대통령의 구속 취소로 날짜가 아닌 시간으로 계산한 판례가 생겼으니
    '정보 공개 신청을 통해 체포와 영장 발부 시간을 잘 알아보고 구속 취소 소송을 해보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

    윤 대통령의 판례가 일반 범죄자의 구속 취소 소송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옥바라지 카페뿐만이 아닙니다.
    는 구속 수감 중인 명태균씨를 변호하는 남상권 변호사가 "구속 취소를 위한 서류를 만들어 곧 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라며 명씨 구속 취소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구속된 피의자들은 석방만 될 수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겁니다.
    법조계에선 윤 대통령 판례도 있으니 구속 취소 신청이 봇물처럼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김도균 부산지법 부장판사는 10일 법원 내부망(코트넷)에 ‘구속취소 유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전국의 모든 형사재판부는 적부심이 청구된 모든 사건에 관해 구속일수를 다시 계산해야 하는지에 관해 큰 혼란이 예상된다"고 밝혔습니다.

    '즉시항고'를 포기한 검찰

    피의자가 구속 취소 신청을 했다고 해도 모두가 석방이 되지는 않습니다.
    검찰이 '즉시항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검찰은 윤 대통령의 구속 취소 결정에 대해 즉시항고하지 않았습니다.
    심우정 검찰총장은 '위헌 소지 때문'이라고 해명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즉시항고가 위헌이라고 결정한 것은 지난 2012년 6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012년 이후에는 '즉시항고'가 사라졌느냐라고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SBS 취재에 따르면 2023년에 울산지방법원이 구속된 피고인 2명에 대해 구속취소 결정을 하자 울산지검이 즉시항고했다고 합니다.

    검찰이 불과 2년 전에는 즉시항고를 했지만 윤 대통령 사건은 포기하고 석방을 지휘한 셈입니다.


    법원의 이례적인 구속 기간 계산법과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가 모든 국민에게 적용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아무도 예상히지 못한 '계산법'을 윤 대통령에게 처음 적용했고,
    검찰은 위헌을 내세워 즉시항고를 포기했습니다.

    일각에선 "대한민국 법원과 검찰총장이 대통령을 구했다"면서
    "검찰총장 출신 윤 대통령이라 풀려날 수 있었다"라며 그를 가리켜 '법꾸라지'라고 비판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 말이 윤 대통령에게도 적용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https://www.impeter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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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3-12 02:42
    ((꼭 반드시 읽어 봐야만 하는 글))
    무슨 독립운동하다가 귀국한 듯한 윤석열의 후안무치
    유영안 논설위원
    기사입력 2025/03/10

    8일 석방되어 서울구치소를 나와 환하게 웃으며 지지자들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는 윤석열을 보자니 구토가 밀려왔다.

    내란수괴가 제 발로 걸어나온 것도 그렇고, 마치 해외에서 무슨 독립운동이라도 하고 귀국한 것처럼 행세해 피가 거꾸로 솟았다.

    거기에다 윤석열은 “구치소에 있는 동안 잠을 많이 자서 건강이 더 좋아졌다”고 했다. 그 시각 국민들은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도 내란수괴는 편하게 잠을 잤다니 기가 막힌다.
    그러면 구치소에 계속 있지 왜 나왔을까?

    윤석열이 석방될 때 서울 구치소 앞과 관저 앞에는 수많은 극우들이 모여들어 마치 무슨 광복이라도 맞이한 듯 만세를 부르며 윤석열을 연호했는데, 마치 일제 강점기 때 총독을 환영하는 친일파를 보는 듯했다.

    그때도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있었고, 그를 옹호하는 친일파들이 다수 존재했다. 지금도 국민 5%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말에 공감한다고 한다.
    일본 유전자를 가진 자들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회영 선생의 형제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천억에 달하는 돈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썼다.
    한때 민주당 국회의원을 했던 이종걸과 윤석열 정권에서 광복회장을 하고 있는 이종찬의 선조들이다.
    그런데도 이종찬은 지난 대선 때 윤석열을 지지했다.
    알고 보니 이종찬의 아들이 윤석열과 죽마고우였다.

    하지만 윤석열이 집권한 후 굴종적 대일외교를 계속하고, 급기야 3대 역사 기관장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임명하고, 그것도 모자라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서 철거하려 하고, 독립기념관장에 친일 의식이 강한 사람을 임명하자 이종찬 광복회장도 돌아섰다.


    여운형도, 김구도 친일파에게 피살

    상해 임시정부를 세우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백범 김구는 해방이 되었어도 바로 귀국하지 못했다.
    미군정이 친일파들과 손을 잡고 임시정부를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세운 반민특위를 방해하고 급기야 해체했다.

    그 바람에 군인, 경찰, 정부 요직 80%가 친일파로 채워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원봉 장군은 악질 친일 형사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분해하다가 북한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광복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설립한 몽양 여운형은 친일파에 의해 살해당했고, 이어서 백범 김구도 이승만 세력의 지령을 받은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피살당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애국자들은 처참하게 죽어가거나 대를 이은 가난에 시달린 반면에 일제에 아첨한 친일파들은 떵떵거리며 살았고, 그 후세들이 지금 태극기 부대로 뭉쳐 있다.


    태극기 부대 전신은 서북청년단

    태극기 부대, 아스팔트 쇠파이프 부대로 통하는 극우들의 뿌리는 친일파에 있다.
    광복 후 북한에서 종교를 탄압하자 남쪽으로 내려온 개신교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제주 4.3 때 무자비하게 양민을 학살한 서북청년단이다.

    서북 청년단은 지금도 맥을 잊고 있는데, 세월호 참사 때 광화문에서 폭식투쟁을 했던 사람들이다.

    얼마 전에 발생한 서부지법 폭동 사건 배후에 일부 개신교 극우 집단과 서북청년단 후예들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은 무슨 이념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대부분 이권에 따라 움직인다.

    극우 종교 집단은 이들을 움직이기 위해 각종 이권 사업을 한다.
    이번에도 광화문에 그 장사꾼들이 나타났다.


    계엄은 친일매국세력이 일으킨 것

    지난 12월 3일에 발생한 비상계엄은 친일 매국 세력이 일으킨 것으로, 그 중심에 일부 개신교 극우 세력들과 서북청년단 후예들이 있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을 굴리며 선거 때마다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선거 때마다 유세장에 나타나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흔드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윤석열의 선친 윤기중 전 연세대 교수는 일본 문부성이 초청한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었다.
    말하자면 일본 정부 돈으로 일본에서 공부했던 것이다.
    그랬으니 윤석열은 아버지로부터 “조선은 미개국, 일본은 문명국”이라 귀가 닳도록 들었을 테고,

    그것이 윤석열의 천박한 역사 인식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윤석열이 후쿠시마 핵폐수가 안전하다며 우리 돈을 들여 홍보해주고, 한미일이 동해에서 군사훈련을 할 때 미군이 동해를 일본해라 표기된 지도를 사용해도 항의 한 마디 못한 것은 뿌리 깊은 친일 의식 때문이다.

    열린공감TV의 보도에 따르면 강원도 강릉에 있는 윤석열의 외가는 일본 종교인 ‘남메호랑교’를 믿는 것 같다.
    외가 방 벽에 남묘호랑교를 뜻하는 글자가 적힌 대형 액자가 걸려 있는 것이 영상에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칠불사에도 등장한 홍매화

    일본 종교인 남메호랑교는 홍매화색을 좋아하는데, 열린공감TV의 보도에 따르면
    김건희 일가가 소유한 건물들의 벽이 온통 홍매화색으로 칠해져 있다고 한다.

    웃기는 것은 그 홍매화가 ‘칠불사’에서도 등장했다는 점이다.
    서울의소리 보도에 따르면 용산 대통령실 앞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속 시설이 다섯 군데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오방색 운운하는 무슨 무속과 관련이 있는 모양인데, 자신들에게 해로운 세력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김건희가 계엄 전후 전국 5대 명산을 돌아다니며 큰 굿을 했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고, 몇몇 언론이 현장을 탐사 취재해 사실임이 드러났다.
    보나마나 무당은 이재명과 한동훈이 어서 죽기를 빌었을 것이다.
    이번 계엄도 알고 보면 그 두 사람을 죽이기 위해 내린 것으로 보인다.

    무속인 노상원의 수첩에도 있었고, 윤석열이 홍장원 전 국정원 제1차장과 여인형 방첩사령관에게 말한 명단에도 그 두 사람은 있었다.

    그러니까 윤석열이 선포한 계엄령은 명태균 게 이트를 덮으려는 수작인 동시에 정적들을 제거해 영구 집권하려는 음모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몰랐다.
    ‘무당 제 죽을 날 모른다’.

    윤석열이 석방되자 친일매국 세력들은 마치 무슨 승리라도 거둔 양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14일 경 윤석열이 헌재에서 파면되면 모든 게 허사로 끝난다.

    대통령 지위가 박탈되면 내란 죄 외 일반죄도 수사가 본격화 될 것이고, 정권이 바뀌면 특검으로 친일매국 세력은 일망타진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고, 청산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



    https://www.amn.kr/52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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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3-12 02:28
    심우정 '법기술'에 다시 주목받는 '검찰개혁 4법'
    조국혁신당, 대검찰청 앞 사퇴 촉구 기자회견
    심우정 행태, 검찰 개혁 필요성 여실 증명
    검찰 해체, 공소청 신설 골자, 수사권 박탈해 중수청 이관
    수사절차법, 형사소송법 개정안도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3.11


    내란 수괴 혐의 윤석열 대통령의 석방으로 국민 공분이 높아지는 상황, 심우정 검찰총장이 가당치 않은 '법기술'로 헌법을 농락했다는 질타가 이어지고 있다.

    윤 대통령의 구속기간이 만료를 앞둔 시점에서 심 총장이 뜬금없이 전국검사장회의를 열어 시간을 끈 것, 그리고 이것이 '법원의 구속취소 결정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극심한 갈등과 혼란, 망국의 위기 속에서도 검찰의 이토록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한 무소불위 권력 독점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국혁신당 의원들은 11일 오후 대검찰청 앞에서 12.3 내란 사태 수괴 윤석열 대통령의 석방지휘 결정을 내린 심우정 검찰총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혁신당은 "알량한 법 기술로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법비, 법꾸라지가 돼버렸다.
    고쳐쓰기는커녕, 재활용할 수도 없는 범죄집단이 되어버렸다"고 분노를 토했다.

    이날 기자회견의 핵심은 단순히 심 총장의 사퇴 뿐 아니다.
    심 총장의 즉시항고 포기와 석방 지휘 행사는 결국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혁신당은 지난해 8월 '검찰개혁 4법'을 발의한 바 있다.
    4법 중 최우선은 먼저 '검찰 폐지'를 골자로 한 '공소처법' 제정안이다.
    기소와 공소유지만 전담하는 공소청으로 탈바꿈 하자는 것이다.
    다만 강제수사 및 영장청구는 공소청을 통하도록 한다.

    '중대범죄수사청법'은 검찰의 직접 수사권을 중대범죄수사청으로 이관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수청은 검사를 빼고 기존 검찰 수사관 인력으로 조직을 꾸린다.
    검사가 멋대로 누리던 기소 또한 기소심의위원회를 거치도록 했다.

    검찰의 대표적인 병폐인 표적수사와 피의사실 공표 행태도 입법화를 통해 사전 차단한다. 수사절차법(제정안)과 형사소송법(개정안)이 그것이다.

    혁신당은 "'검찰개혁 4법' 처리로 검찰을 해체하고 국민을 위한 공소기관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 전에 먼저 심 총장의 즉각적인 사퇴가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사퇴 거부시 야5당 탄핵소추안 발의는 당연한 수순이다.

    혁신당은 "검찰조직의 오랜 습관대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다. 덮고 싶을 때는 마음껏 덮고, 또 풀어주고 싶은 사람은 마음껏 풀어준다"고 일갈했다.

    혁신당은 심 총장의 추악한 과거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들춰냈다.
    혁신당은 그가 법무부 기조실장이었던 지난 2020년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 징계를 추진하려 하자 결재를 거부한 사례를 다시 꺼냈다.

    혁신당은 "이미 2020년부터 윤석열의 충실한 수하였고, 지금은 검찰총장이 되어 내란의 행동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편 심 총장의 행태에 대해선 검찰과 법원 내부에서도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강남수 수원지검 부장검사는 심 총장의 석방지휘가 대검예규를 어긴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 부장검사가 인용한 '특별수사감찰본부 설치운영지침' 제3조 2항에는 '특수본부장은 독립하여 그 직무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검찰총장에게 보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심 총장이 특수본의 독립성을 무시해 석방지휘를 내렸고 심지어 특수본부장의 직무배제까지 시도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에 채수양 창원지검 부장검사도
    "구속 취소에 대한 즉시항고는 영장주의 위배가 아니라 보완이고, 법률의 합헌성 추정, 법원 간 형평성 문제를 볼 때 즉시항고는 포기할 수 없는 제도라고 생각한다"고 비판 의견을 냈다.

    부산지법 김도균 부장판사도
    "검찰은 대체 무슨 연고인지 이 쟁점이 형사 절차상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법리적으로도 상당한 논란이 존재함에도, 즉시항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6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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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3-12 01:28
    김용현, 계엄 8개월 전 군 내 사조직 부활시켜
    尹 계엄 6개월 전 직접 이들 불러 모아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3.11

    12.3 내란 사태의 주요 부역자였던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이 작년 4월 총선 무렵 '경기특수'라는 이름의 사조직을 부활시켰다는 사실이 10일 밤 JTBC 단독 보도를 통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JTBC는 여기에 여인형, 곽종근, 이진우 등 내란 사태의 핵심들을 불러 모았고 이때부터 구체적인 내란 모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사실상 '제2의 하나회'를 조직한 셈이다.

    경기특수 모임이란 '경'호처, 지금 방첩사가 된 '기'무사, '특'전사, '수방사' 앞 글자를 딴 것인데 전두환 군사 정권 때인 1980년대 만들어졌고 주재자는 지금의 경호처장인 경호실장이었다.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은 검찰 수사에서 경기특수 모임이 총선 무렵인 4월 즈음 부활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당시에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경호처장으로 있었는데, 경호처장 공관에서 당시 방첩사령관과 곽종근 특수전사령관, 이진우 수방사령관이 경기특수 모임을 가졌다고 했다.
    즉, 80년대 경호처장이 주도하던 방식대로 모인 것이다.

    여 전 사령관은 경기특수는 문재인 정부 초기 1, 2번 모임을 가졌지만 코로나바이러스-19 확산 때 확 없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이 수방사령관을 할 때 찍은 경기특수 사진이 방첩사령부에 남아 있다는 진술도 덧붙였다.
    경기특수 모임의 3명 사령관은 12·3 내란사태의 중요임무종사자 혐의를 받는 인물로 현재 모두 구속 상태다.

    아울러 이들은 국회 출동과 국회의원 체포 등의 역할을 수행한 핵심 지휘부다.
    그런데 이 시점은 윤석열 대통령이 김 전 장관에게 비상대권을 언급한 시점 '3월 말~4월 초'와 겹친다.
    따라서 내란 우두머리와 2인자의 모의가 중요임무종사자, 즉 사령관들로 확대된 시점이 이때라는 의심이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JTBC는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의 업무수첩에도 '수방·특전·방첩사는 한 몸!' 이란 메모가 나왔는데 곽 전 사령관은 자신이 부임하고 2주 정도 뒤에 당시 경호처장이던 김 전 장관이 한 말이라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이어 JTBC는 내란 수괴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 6월 이 사조직 '경기특수'를 직접 불러 모았던 걸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경기특수 모임과 윤석열 대통령은 작년 6월 17일에 첫 만남을 가졌고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은 이날 모임에 대해 "(김 전 장관이) 심리적으로 지배당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또 김 전 장관이 이들을 "대통령께 충성을 다하는 장군들"이라며 추켜세웠는데, "대통령이 필요로 할 때 충실히 조력할 사람들"이란 의미로 받아들였다고도 했다.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도 이날 김 전 장관이 대통령에게 한 명씩 소개하면서 "'굉장히 중요한 사람들'이라 말했다"고 했다.
    이 모임이 있고 석 달 후인 9월 김 전 장관은 국방부 장관이 됐다.

    10월 1일 국군의 날엔 윤 대통령과 이들이 만찬을 가졌는데 대통령이 요리까지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이날 윤 대통령은 '좌익 세력'과 '비상 대권'을 언급한 것으로 파악됐다.
    계엄이 선포되기 한 달 전인 지난해 11월 9일에도 윤 대통령은 이들을 만났다.

    JTBC는 김 전 장관이 이날 사령관들에게 "대통령이 오시면 한 마디씩 시킬 테니 준비하라"며 일러두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또 이후 실제로 식사 도중 '한 마디씩 하라'고 시켰고, 여 전 사령관은 국회, 선관위, 여론조사 꽃 등을 처음 언급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곽 전 사령관과 이 전 사령관도 각자 "준비 태세 하겠다", "출동 태세 하겠다"고 발언했다.
    그 밖에 여 전 사령관은 '셋이 계엄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게 순전히 우연이냐'는 검찰 질문에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용 당한 것 같다"고 답했다.
    아울러 "군이 정치적으로 이용 당했다. 배신감을 느낀다"며 "죽도록 후회한다"고도 했다고 덧붙였다.

    이로 볼 때 이미 작년 총선 이전부터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 등은 계엄을 통한 친위 쿠데타를 기도하고 있었고 그 사전 작업으로 '경기특수'라는 군 내 사조직을 부활시킨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하나회 숙청'이란 숙군을 벌였는데 이 내란 세력들은 시계바늘을 도로 30년 전으로 후퇴시킨 셈이다.

    또 이 12.3 내란 사태가 위헌, 위법한 내란인지 아니면 적법하게 선포된 계엄령인지는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 여부를 가릴 중요한 시금석(試金石)이다.
    계엄법에는 반드시 계엄 선포를 위해선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고 명시됐으므로 국무회의 실재 여부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여러 국무위원들은 계엄 선포 직전 국무회의 절차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특히 10일 JTBC 단독 보도에 따르면 일부 장관들은 당시 상황을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이게 왜 정식 국무회의가 될 수 없는지 검찰에 설명한 걸로 파악됐다.

    JTBC는 조태열 외교부장관이 검찰 조사에서 비상계엄 선포 직전 윤 대통령의 호출로 용산 대통령실을 찾았을 때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했다고 전했다.
    그가 그린 그림에 따르면 밤 9시쯤 대통령실 5층 집무실에선 V, 윤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덕수 국무총리와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 등 8명이 원탁에 둘러 앉았다.

    이 자리에서 조 장관은 윤 대통령이 '재외공관'이라고 적힌 A4 용지를 건네면서 "비상계엄을 선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조 장관은 반대했지만 윤 대통령은 "법치주의를 신봉하는 내가 오죽하면 이런 생각을 했겠냐"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고, 밤 9시 20분쯤 "이제 나가달라"고 해서 김용현 전 장관만 남고 모두 집무실 옆 회의실로 갔다고 진술했다.

    JTBC는 조 장관이 이 때 상황을 그린 그림을 보면 윤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이 빠졌고 한 총리와 조 장관, 조태용 국정원장 등 6명이 전부였다고 했다.
    이 때 한 총리가 "다른 국무위원들도 불러서 얘기를 더 들어봐야 하지 않겠냐고 윤 대통령을 설득했다"면서 다른 국무위원들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또 당시 밤 10시 10분쯤 도착했던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묘사한 회의실 상황에 따르면 추가로 도착한 자신과 조규홍 복지부 장관 등 국무위원들,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홍철호 정무수석 등이 어떻게 앉아 있었는지 자세히 그렸다.

    즉, 비상계엄 선포 직전 대통령실 5층 집무실에서 8명의 1차 모임,
    바로 옆 회의실에서 10여 명의 2차 모임이 있었던 것이다.

    김용현 전 장관은 이 2차 모임이 국무회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몇몇 국무위원이 있을 때 한 총리에게 계엄을 보고했고 국무회의 때 자신이 안건을 나눠주고 심의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그러나 한 총리는 경찰 조사에서 "나를 거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송 장관도 "심의가 아니라 대통령 혼자 얘기하는 통보받는 자리였다"면서 "안건도, 시작도, 끝도 없었다"고 했다.
    조 장관도 "국무회의를 개최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따라서 비상계엄 국무회의라고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절차도 없었다는 것이다.

    계엄법 2조 5항엔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거나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고 되어 있고
    헌법 82조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 이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다. 군사에 관한 것도 또한 같다"고 명시돼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장관의 주장대로 작년 12월 3일 당시 비상계엄이 국무회의를 거쳐 적법하게 선포된 것이라면 한덕수 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 국무회의록을 제시하면 된다.

    그러나 그들은 탄핵심판 최종변론 때까지도 국무회의록을 제출하지 못했다.

    국무회의는 국법상 행위이므로 제대로 열린 국무회의라면 마땅히 그에 대한 문서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 문서가 없이 구두로만 진행됐다면 그건 제대로 열린 국무회의라고 볼 수가 없다.


    비상계엄 선포 자체가 위헌, 위법이므로 계엄포고령 역시 위헌, 위법이며 계엄군의 통제 대상이 아닌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계엄군을 투입했으므로 12.3 내란 사태는 명백히 국헌문란 목적의 내란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6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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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3-12 01:20
    대통령기록관의 석연찮은 '연구 용역'...뭐가 구리기에?
    대통령 기록물의 비공개 보완 연구 용역 준비 이유는?
    조하준 기자
    입력 2025.03.11


    10일 JTBC 단독 보도로 대통령기록관이 비공개 정보 세부 기준을 개편할 연구 용역을 추진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출처 : JTBC 뉴스 영상 갈무리)


    내란 사태의 수괴로 지목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이제 선고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대통령기록관이 대통령 기록물의 비공개 기준을 보완하기 위한 연구 용역을 진행 중이란 사실이 10일 밤 JTBC 단독 보도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윤 대통령이 파면 직전에 몰린 상황에서 벌어진 석연찮은 연구 용역이기에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먼저 윤석열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22년 6월과 9월 대통령기록관이 발주한 연구 용역을 보면 '대통령기록물 적극적 공개'를 위해 비공개 정보 세부 기준을 개편하겠다고 적었다.

    JTBC는 이를 윤 대통령이 후보 시절 "집권하면 서해피살 공무원 사건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한 데 따른 후속 조치로 해석했다.

    그런데 지난 2월 24일 공개한 연구 용역은 성격이 정반대였다는 것이 문제다.
    이날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최후변론 하루 전이다.
    사업명은 '대통령기록물 공개재분류 연구용역'이고 "비공개대상 세부기준을 분석하고 재정비하겠다"고 적혀있다.

    적극적 공개란 말은 사라졌고, 대통령기록물 비공개 세부기준의 대상, 기준, 범위, 사례 등을 상세히 수정하고 보완하라는 지시가 적혀있다.
    또 비공개 대상 정보 가운데 공개로 재분류된 사례를 검토하고 분석하란 지시도 써 있다.

    최종적으론 비공개 세부 기준을 재정비하겠다고도 했다.

    오직 '대통령기록물 비공개 세부기준'에만 초점을 맞춘 연구용역은 현 정부 들어 이번이 처음이다.
    심상보 전 대통령기록관장은 JTBC와의 인터뷰에서 "비공개 기준을 세부화할 때 적극적 공개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공개가 오히려 축소될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적극적 공개라고 하는 걸 빼버린 것은 그것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통령기록관 측은 JTBC 측에 "매년 실시하는 실무적 차원의 용역"이며 "결과를 정해둔 연구는 아니"라고 했다.
    또 "대통령실의 지시에 따른 것은 아니"며 "탄핵심판과도 무관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석연찮은 점은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이 연구 용역 공고에는 지금껏 공개된 적 없던 자료 하나가 첨부돼 있었는데
    여태껏 어떤 대통령기록물을 비공개로 결정해 왔는지 46가지 사례를 담은 것이다.
    이 자료엔 대통령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은 물론 경호처에 온 택배물품 목록까지 모두 비공개 사례에 포함돼 있었다.

    JTBC는 대통령기록관이 연구용역 공고를 올리면서 연구 참고자료를 하나를 첨부했는데 여태껏 어떤 대통령기록물을 비공개했는지 적용례 46가지를 올린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그동안 공개된 적 없는 대통령기록관 내부자료였다고 한다.
    공개된 적용례를 보면 각종 개인정보와 사생활 정보들이 비공개 예시로 나열돼 있다.

    심지어 '개인의 정치적 활동과 사회적 활동'도 비공개 대상으로 적혀있었는데 어떤 대통령 기록물이든 비공개 할 수 있는 광범위하고 자의적인 기준이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비서실과 경호실의 택배물품 목록과 상세 품목도 비공개 대상으로 분류했다.
    아울러 개인의 소신 발언, 인물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기록관은 이같은 내부 기준을 근거로 정보 공개 청구나 행정 소송에서 비공개 결정을 해온 것이다.
    이에 시민단체 세금도둑잡아라 대표를 맡고 있는 하승수 변호사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 직무수행과 관련한 여러 가지 진상조사나 수사 같은 게 이루어질 때도 그게 장애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통령기록관은 JTBC 측에 "관련법과 행안부 지침을 참고해 설립 당시인 2008년에 수립한 내부 기준"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왜 하필 이 시점에 그런 연구 용역을 발주한 것인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 8년 전 박근혜 씨가 탄핵됐을 무렵 다시금 국민적 의혹거리로 떠오른 것은 '세월호 7시간' 알리바이였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황교안 전 총리가 그날의 기록을 모두 대통령기록물로 지정해 봉인해버린 탓에 지금도 그 의혹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그 '세월호 7시간' 중 일부는 확인이 됐는데 그 당시에도 최순실이 국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고 박 씨는 한시라도 빨리 중대본에 가야하는 상황에서 전속 미용사를 불러 머리손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 그간 알려진 최초 보고 시각 등은 모두 조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들은 그날 박 씨의 7시간 행적 중 절반도 채 안 되는 부분이다.
    나머지는 기록물 봉인이 해제되는 2047년이 되어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때문에 황 전 총리가 박근혜 정권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부분을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봉인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 역시도 박근혜 정부보다 치부가 더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아직 해소가 안 된 대표적인 건이 지난 2023년 7월 해병대 故 채수근 상병 사망사건 당시 수사 외압 의혹이다.

    만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걸 대통령기록물로 지정해 봉인해 버리면 역시 최장 2055년까지 그 날의 진실을 파헤칠 수 없게 된다.

    그 밖에 명태균 게 이트 관련 내용과 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전 관련 내용들에 대한 진실도 파묻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기록관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운 이유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6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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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3-12 00:20
    2)
    검찰은 윤석열이다, 둘은 ‘민주공화국의 적’이다
    박용현 기자
    수정 2025-03-11


    항고는 법원 결정에 불복해 상급법원의 재판단을 구하는 것인데, ‘보통항고’와 달리 ‘즉시항고’는 상급법원의 결정이 나올 때까지 원래 법원의 결정을 정지시키는 효력까지 갖습니다.
    피고인을 풀어주라는 법원 결정을 검찰이 단기간이나마 무력화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헌재는 법원의 보석허가에 대한 즉시항고와 구속집행정지에 대한 즉시항고 제도에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각각 1993년과 2012년 일입니다.

    이에 따라 2015년 국회에서 구속취소에 대한 즉시항고도 함께 폐지하자는 법안이 추진됐습니다.
    하지만 당시 김주현 법무부 차관(현 대통령실 민정수석)은 “헌재의 (앞선 두차례 위헌) 결정이 구속취소에도 그대로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며 반대했습니다.
    물론 검찰의 뜻이 반영된 입장이었고 이것이 관철됐습니다.

    그래서 구속취소에 대한 즉시항고 제도는 여전히 남아있는 겁니다.

    최근에도 이 제도가 사용됐습니다.
    2023년 9월 울산지법이 공동공갈 혐의로 함께 구속된 피고인 2명의 구속취소를 결정하자 울산지검은 즉시항고를 했습니다.
    상급법원에서 한명에 대해선 인용, 다른 한명에 대해선 기각 결정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검찰은 구속취소에 대한 즉시항고라는 자신의 권한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권한을 자진해 포기하는 이례적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윤석열 석방을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국회가 다시 즉시항고 폐지 법안을 추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검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 뚝 떼고 다시 반대하지 않을까요?
    과거 자신의 언행을 언제 그랬냐는 듯 뒤집는 대통령 윤석열처럼 말입니다.

    더 들여다 보기

    2012년 헌재 위헌 결정을 좀더 들여다보겠습니다.
    구속된 ㄱ씨가 모친상을 당하자 법원이 이틀간 장례에 참여하도록 잠시 풀어주는 결정(구속집행정지)을 내렸는데 검찰이 즉시항고를 제기했습니다.
    ㄱ씨는 풀려나지 못해 어머니 장례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검사의 권한으로 법원의 구속집행정지 결정이 사실상 무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상급법원이 이 제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을 헌재에 제청했습니다.

    이에 법무부는 “검사의 즉시항고는 피고인의 도주, 증거인멸, 재범 등을 방지하기 위하여 공익의 대변자이자 수사, 소추와 형벌집행의 담당자인 검사가 합리적 의심이 있는 경우 상급법원의 판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서 합리성이 있으므로 헌법상 적법절차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헌재는 “구속집행정지가 중병, 출산, 가족의 장례참석 등 긴급하게 피고인을 석방할 필요가 있는 경우 등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며
    “구속집행정지 사유들은 한시적인 경우가 많아 그 시기를 놓치게 되면 피고인에게 집행정지의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즉시항고는 사실상 법원의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무의미하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검사에게 부여한 것이라는 점에서 영장주의의 본질에 반한다”고 밝혔습니다.

    즉시항고 제도는 판사가 자의적으로 피고인을 풀어주는 경우에 대한 대응책으로 의미를 갖습니다.
    반면 ㄱ씨 경우처럼 검사가 피고인을 괴롭힐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일시적인 구속집행정지에서 즉시항고를 인정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취지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헌 결정의 취지가 구속취소에도 그대로 적용될까요?

    헌재는 당시 “구속집행정지는 구속의 집행을 정지할 뿐, 구속의 효력에는 영향이 없다는 점에서 구속취소와 다르다”고 짚었습니다.

    김주현 법무부 차관도 2015년 국회에서 “집행정지 결정은 사유가 한시적인 것들이 대부분인데 구속취소는 종국적으로 결정하는 것이고 (보석처럼 재판) 출석을 보장하는 조건을 부과하거나 할 수가 없다”며 구속취소는 보석·구속집행정지와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과거 검찰의 주장과 지금 검찰의 주장 중 어느 것이 맞을까요?

    구속취소에 대한 즉시항고가 위헌인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언젠가 헌재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현행법상으로는 엄연히 유지되고 있는 검찰의 권한입니다.
    그런데 검찰은 윤석열 구속취소에 대해 이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검찰이 위헌 가능성을 지레 짐작해 권한 행사를 포기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검찰은 위헌 가능성이 없는 ‘보통항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헌재는 앞선 결정에서 보통항고는 위헌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통령 윤석열은 온갖 법기술을 동원해 법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평생 모르고 살아도 됐을 형사소송법 귀퉁이에 적힌 내용까지 뉴스로 공부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대통령 윤석열의 법기술 공세 앞에서 손에 쥔 무기도 놓아버리고 스스로 무장해제하는 형국입니다.
    이야말로 검찰이 대통령 윤석열을 위해 구사하는 또다른 차원의 법기술이 아닐까 합니다.

    심우정 검찰총장은 즉시항고는 막아나서면서 특별수사본부에 “이 사건이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인 만큼 흔들림없이 공소유지에 만전을 기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구속취소 결정을 내린 재판부가 본 재판도 담당하는데 어떻게 공소유지를 잘 할 수 있다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앞뒤 맞지 않는 윤석열식 궤변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공화국의 검사, 윤석열의 검사

    김건희씨를 ‘황제조사’하고 무혐의 처분했다가 탄핵소추된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조상원 4차장검사, 최재훈 반부패수사2부장검사는 헌재 탄핵심판에서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기소된 윤석열 대통령을 풀어준 심우정 검찰총장도 국민 앞에 한마디 사과의 말도 없습니다.
    헌법을 위반한 비상계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나라를 나락으로 몰아넣고도 아무런 사죄도 하지 않는 대통령 윤석열과 판박이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우리나라의 지방검찰청장에 해당하는 직책을 ‘공화국의 검사’(Le procureur de la République)라고 부릅니다.

    구체제에서 ‘왕의 대리인’으로 불렸던 직책에서 검찰이 유래했는데,
    대혁명을 거치며 주권자 국민을 대리하는 역할로 바뀐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검찰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역행해 한 개인의 검찰이 돼버렸습니다. ‘윤석열의 검찰’입니다.
    아예 윤석열이 검찰 그 자체가 됐습니다.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국민을 위해 쓰지 않고 개인을 위해 쓰는 권력자는 더 이상 민주공화국의 공직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민주공화국의 적입니다.

    윤석열이 그 길을 걷다 파면을 앞두고 있습니다.
    검찰도 그 길을 함께 걸어 파멸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말로까지도 한몸인 ‘윤석열-검찰 동일체’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863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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