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dbred님의 로그 입니다.
좋은글 하나라도 놓칠까봐 노심초사했다-
29
-
tradbred
@tradbred
- 37 팔로워
- 39 팔로잉
- 소속 방송국 없음
-
29
tradbred (@tradbred)2026-06-01 21:09[조하준의 직설] 높은 사전투표율의 아전인수(我田引水) 해석
조하준 기자
입력 2026.06.01
이명박 씨가 31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시장에서 국민의힘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와 김성수 해운대구청장 후보 지원 유세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지난 5월 29일부터 30일까지 양일 간 9회 지방선거 사전투표가 이뤄졌다.
사전투표율은 23.51%로 역대 지방선거를 통틀어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이같은 사전투표 결과에 대해 아전인수(我田引水)에 가까운 해석을 내놓았다.
5월 31일 국민의힘 최보윤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이번에 나타난 역대급 사전투표율은 이재명 정권의 폭정과 거대 여당의 독주를 반드시 저지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국민의 엄중한 명령이자 목소리"라고 주장하며 "투표장을 향한 발걸음에는 국민들의 깊은 분노와 좌절이 담겨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즉, 국민들이 이재명 정부를 '심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전투표에 나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역대급 사전투표율이 이재명 정부를 심판하고자 나온 국민의 목소리라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선거를 맞아 각종 여론조사기관에서 우후죽순처럼 여론조사 결과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우선 전국 단위 여론조사들의 공통점은 단 한 번도 '정부심판론' 혹은 '정부견제론'이 '정부지원론'을 뛰어넘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구, 경북 등 보수 강세 지역에 한정한 조사에선 '정부심판론'이 앞서는 것도 있었지만 전국 단위 여론조사에선 줄곧 '정부지원론'이 앞서 있었다.
이렇듯 '정부심판론'이 앞선 적이 한 번도 없었음에도 무슨 근거로 "이번에 나타난 역대급 사전투표율은 이재명 정권의 폭정과 거대 여당의 독주를 반드시 저지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국민의 엄중한 명령이자 목소리"라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정부심판론'이 앞서기 위해선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후 1년 동안 실정(失政)을 거듭해 지지율이 바닥을 기는 수준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은 60%를 상회하고 있으며
정당 지지율에서도 민주당이 큰 격차로 앞서고 있어 '정부심판론'이 작동할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 지금 지방선거 여론조사에서 '경합지'라고 나오는 곳이 수도권이나 충청권 등이 아닌 국민의힘 자신들의 안방인 영남 그 중에서도 경남과 대구다.
자신들이 편안하게 이겨야 마땅한 텃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무슨 '정부심판론'이 작동한 결과인지 모르겠다.
또 '정부심판론'이 작동하기 위해선 야당이 야당다운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과연 국민의힘이 지난 1년 간 야당다운 모습을 보였는지도 의문이다.
우선 국민의힘은 윤석열 '내란의 강'부터 건너지 못했다.
12.3 내란 사태에 대해 제대로 된 반성도 한 적이 없고
'윤 어게인' 극우 인사들을 무더기로 단수공천한 것이 국민의힘이었다.
이제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몇몇 군데에서 보수 결집이 일어나고 있다는 결과가 나온 것에 심취해 헌정사 최초로 임기 중 파면을 당한 박근혜와 부정부패 혐의로 수감돼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된 이명박까지 '예토전생(穢土轉生)'시켜 선거운동에 나서고 있다.
물론 선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지지층을 독려하기 위해선 별의 별 말을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박근혜 파면 이후 지금까지 10여 년 동안 국민의힘이 전국단위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2022년 대선과 지선 뿐이다.
그나마 2022년 대선 역시 정의당 후보 심상정의 명분 없는 완주 덕에 표 분산이 일어나 간신히 이긴 것이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대선, 총선, 지선에서 골고루 패배를 맛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패배의 원인을 면밀하게 분석해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언제나 정신승리에 가까운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시사평론가 김준일 씨의 지적대로 국민의힘은 앞으로 여러 번의 선거에서 더 패배해야 정신을 겨우 차릴 모양인 것처럼 보인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46899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2026-06-01 20:51[동그라미 만평] 김부겸의 가치'인가, 추경호의 관성'인가.
홍순구 만평작가의 '동그라미 생각'
홍순구 시민기자
입력 2026.06.01
[굿모닝충청 홍순구 시민기자]
박근혜의 후광을 배경으로한 추경호 후보가 정말로 오늘날 대구의 품격과 미래를 온전히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해묵은 질문이 있다.
'인물인가, 배경인가.'
우리 정치사에서 유권자의 선택은 늘 거대한 '배경'의 흐름 속에 있었다.
정당의 색깔이 우선이었고, 정부의 실정과 역량 평가가 그 뒤를 따랐다.
출신 지역이나 학벌이 과거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해도, 여전히 유권자가 후보를 검증하는 기본적인 배경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대구 시민들에게 묻고 싶다.
혹시 '배경'이라는 익숙한 관성에 가려져, 정작 그 뒤에 숨은 '인물'의 실체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부겸 후보와 추경호 후보.
두 사람의 외형적 조건은 매우 닮아 있다.
둘 다 대구 출신에, 경제부총리와 국무총리라는 중책을 거친 무게감 또한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결국 남은 차이는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구분되는 확연한 정당 색깔이다.
하지만 선거일을 3일 앞둔 지금, 두 후보가 시민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추경호 후보는 과거 '선거의 여왕'이라 불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러닝메이트 삼아 전통적인 보수 결집의 승부수를 던졌다면,
김부겸 후보는 아파트 담벼락을 마주하고 시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벽치기 유세'라는 낮은 행보로 직접 다가가고 있다.
대구는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말이 회자될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의 성지'다.
그러나 작금의 대구 상황은 대구경북 행정통합 무산에 따른 혼란, 국민의힘 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내부 갈등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으며,
추경호 후보는 설상가상으로 내란 관련 혐의로 재판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선거가 아무리 지역적 배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해도,
그 배경이 곧 '무비판적 지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유권자의 도장 한표는 단순히 정당의 색깔을 선택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지역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의 철학에 동의한다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대구의 유권자들에게 다시 묻고싶다.
낡은 관성과 정당의 색깔이라는 배경 뒤에 가려진 후보들의 면면을 이제는 차분히 들여다봐야 하지 않겠는가.
박근혜의 후광을 배경으로한 추경호 후보가 정말로 오늘날 대구의 품격과 미래를 온전히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배경의 관성에 투표할 것인가, 인물의 가치에 투표할 것인가.
선거는 결국 유권자 스스로 자신의 수준을 증명하는 시간임을 명심해야 한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46885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2026-06-01 00:06전두환과 두 번이나 맞서 싸운 참군인... 진짜 '애국자'의 모습
[어떤 어른] "군은 국민의 군대"라며 전두환 쿠데타 반대했던 안종훈 장군
김종성
26.05.31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이 싸운 무대는 전두환의 제1차 쿠데타인 12·12 쿠데타다.
장태완 이후에 전두환의 제2차 쿠데타를 막고자 했던 군인은 군수기지사령관 안종훈이다.
안종훈은 1980년 5월 17일에 전두환을 가로막았다.
1979년 12·12쿠데타는 군부 내부의 갈등에서 출발했다.
이는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자신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키려 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이에 비해 5·17 쿠데타는 전두환이 행정부를 장악하고자 벌인 일이다.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제주도까지 확대하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강구했다.
이는 군부의 권한을 강화해 행정부를 제압하고, 사실상 새로운 계엄을 선포하는 효과를 만들어 국민들과 민주화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일이었다.
이 같은 성격적 차이 때문에 두 쿠데타의 전개 양상은 차별성을 보였다.
이 때문에 장태완이 전두환에게 맞서는 방식과 안종훈이 전두환에게 맞서는 방식은 각각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계엄 확대 반대' 발언이 일으킨 파장
12·12 쿠데타 당시 군 통수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은 군부에 대한 영향력이 없었고,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쿠데타 개시 1시간 27분 만에 연행됐다.
군부의 갈등을 조정할 두 권위자가 힘을 잃게 된 것이 그날 상황을 유혈 충돌로 몰아간 결정적 요인이다.
이와 달리 5·17 쿠데타는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이 일차적으로 행정부를 장악할 목적으로 벌인 일이다.
국민과 민주화세력을 억누르는 것은 그다음 단계였다.
전두환 측이 행정부를 제압하는 단계에서는 상호 간의 유혈 충돌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이때 전두환에게 중요한 것은 군부의 의견 통일이었다.
군부가 단합해 행정부를 장악하는 모양새가 그에게는 필요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전두환 측이 동료 군인들에게 총구를 겨누기 힘들었다.
안종훈의 대응은 이런 구도 속에서 전두환에게 위협이 될 만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는 군부의 의견 통일을 저지하는 데 힘썼다.
전두환이 군의 단합된 힘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뒀던 것이다.
그 무대는 전군주요지휘관회의다.
전두환이 5·17 쿠데타에 대한 군부의 지지를 얻고자 마련한 이 회의는 1980년 5월 17일 용산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열렸다.
1996년 1월 23일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본부가 전두환·노태우 등을 기소할 때 공개한 공소장에 따르면, 오전 11시경(다른 기록에는 10시 혹은 10시 30분경)에 열린 이 회의에는 3군 지휘관 43명이 참석했다.
위 공소장은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계엄 확대에 이견이 없다는 발언을" 했다고 알려준다. 그런 뒤, "안종훈 육군 군수사령관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는 국민의 합의에 의해 하여야 하는데 시기상조라며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고 기술한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할 때 국민적 합의를 받은 일은 없다.
국가안보니 질서유지니 하는 명분이 운운되지만, 계엄의 진짜 목적은 국민을 억누르는 것이다.
이런 일을 벌이기 전에 국민적 합의를 받을 독재자는 없다.
안종훈의 요구는 '너희들, 계엄 하지 말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의 구체적인 발언 내용은 1993년 3월 13일 자 '남산의 부장들 (131)'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이날 회의장 안에는 전두환의 부하들인 보안사 요원들은 물론이고 헌병들까지 깔려 있었다.
군부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가 평소와 달리 아주 위압적이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이 회의가 그만큼 중요했다.
회의 주재자인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뒤 정치권 및 중요 인물들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발언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중장 안종훈이 갑자기 장관의 말을 끊고 목청을 높이며 발언을 했다.
"군이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중요한 결과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이다. 3천 7백만 명 모두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다. 전체 여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할 때 국민 합의에 의해서 해야 한다. 국민적 합의·총화 속에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회의 방식도 문제다. 회의는 그 대책을 마련하는 방식에 있어서 미리 결정해놓고 하면 의미가 없다."
위 기사는 안종훈의 발언 때문에 "회의의 방향이 틀어"졌다고 알려준다.
그의 발언은 전두환의 계획에 차질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점은 발언 직후의 상황에서 확인된다.
분위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자, 전두환·노태우에 이어 신군부 3인자인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시간 연설을 했다.
그다음에는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이 일어나 "열변을 토했다"고 위 기사는 말한다.
이들의 발언은 다른 지휘관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것이었다.
전군 지휘관들의 지지를 받아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국무회의에 상정하고자 했던 전두환의 계획이 비상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나타난 장면이다.
참석자 43명 중에서 안종훈이 돋보였다는 점은
장장 4시간 이상 진행된 이 회의에 대한 박준병(1980년 당시 육군 20사단장)의 회고에서도 확인된다.
1988년 12월 22일 자 에 따르면, 전날 국회 광주청문회에 출석한 박준병은 그날의 회의 분위기를 묻는 오경의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안종훈 군수기지사령관이 '시나리오대로 하면 되겠느냐. 토의 좀 하자'고 발언한 것으로 기억하며, 계엄을 강화하자는 발언이 많았다"라고 답변했다.
55세 된 사람이 8년 전의 역사적 순간을 떠올리면서 안종훈의 발언만 구체적으로 기억해냈다. 그만큼 그 발언이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전두환에 맞서다가 군복 벗어
황해도 송림시 출신인 안종훈은 20대 초반인 1949년에 월남하고 이듬해에 공병 3기(육사 9기와 동급)로 임관했다.
그는 국군이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국민의 군대여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군 생활을 했다.
이 점은 12·12 쿠데타 당시의 정부군 회의에서도 나타난다.
1993년 6월 17일 자 '군(軍) 어제와 오늘 (20)'에 따르면, 12·12 때 육군 군수참모부장인 그의 발언은 이랬다.
"이번 쿠데타가 아무리 세밀하게 오래 전부터 계획돼 진압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군대요 군인의 사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 고급 장성들이 우리만 살겠다고 쿠데타군의 손을 들 수는 없는 일 아니오. 우리 군인은 군인으로서 생사를 초월해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를 진압합시다."
술자리 같은 데서 '군인은 국민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국민 편에 서면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위와 같은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12·12와 5·17 같은 결정적 순간에 '군은 국민의 군대다', '국민의 합의를 받으라'고 외친 것은 그런 신념이 그의 내면에 깊이 뿌리 박았음을 보여준다.
12·12 때 정부군 편에 서고 반(反)전두환 발언을 한 일로 인해 안종훈은 경남 진해의 육군대학 총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그랬다가 군수기지사령관이 된 뒤인 5월 17일에 또다시 반전두환 발언을 했다.
이때도 신상 변화가 있었다.
위 광주청문회 때 민주당 김광일 의원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직후에 안종훈이 보안사 준장에게 연행된 일을 거론하면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모두 합의하에 일을 추진해야지 반대자가 있으면 되느냐며 안 소장 석방 지시를 내려 석방되었다는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영복은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전두환은 전군 지휘관들의 지지를 받는 모양새를 연출해야 했다.
이 때문에 전두환은 안종훈을 구속할 수 없었다.
대신, 안종훈의 군복은 벗겼다.
소수의 위정자들을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군인들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애국자'라는 칭송을 듣는 일이 많았다.
안종훈은 이런 칭송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의 적들과 맞섰다.
그에게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었다.
2002년에 별세한 이 애국적 군인은 지금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611&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2026-05-31 23:44(B)
아편전쟁부터 베트남전까지… 동아시아가 서구에 거둔 '3승 1무 2패'
기자명 김욱 칼럼니스트
입력 2026.05.31 0
한반도는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곧바로 하나의 독립 국가로 서지 못했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나뉘었고,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맞서는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 북한군은 빠르게 남하했고, 남한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났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는 뒤집혔다.
유엔군은 북상했고, 한때 압록강 가까이까지 진격했다.
미국과 유엔군은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고 전쟁의 승리를 눈앞에 둔 듯했다.
바로 그 순간, 기지개를 켠 거대한 대륙 중국이 참전했다.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미군의 압록강 도하는 단순한 전선의 북상이 아니었다.
서방 제국주의의 칼끝이 혁명 국가의 턱밑까지 다가온, 체제 생존이 걸린 절체절명의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막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직 가난했고, 산업 기반도 취약했으며, 장비 면에서는 미국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군은 국공내전과 항일전쟁을 거치며 풍부한 전투 경험을 쌓은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농민 게릴라가 아니었다.
장비는 열악했지만, 혹독한 조건에서 이동하고 은폐하고 포위하는 데 능숙한 전투 집단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이 충돌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혹한 속에서 미군을 포위하며 밀어붙인 중국군의 공세는 유엔군의 북진을 좌절시켰다.
결국 전선은 다시 38도선 부근에서 교착되었고, 1953년 누구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포성이 멎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패배한 전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국이 승리를 거두지 못한 전쟁인 것은 분명하다.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한 세기 동안 서구와 일본에게 침략과 굴욕을 겪었다.
그러나 1950년대 초, 중국은 미국 중심의 군사력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국가로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청나라의 중국과는 전혀 다른 중국이었다.
유교 제국은 무너졌지만, 중국의 대륙적 동원력은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이념과 결합해 되살아났다.
아편전쟁 이후 수세에 몰렸던 중국이 혁명 국가의 형태로 다시 태어났음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한반도에 이어 다음 충돌의 무대는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 속하면서도 중국 문명의 영향을 깊게 받았고, 동시에 거대한 중국에 맞서 독립을 지켜온 역사를 지녔다.
그들의 정치문화 깊숙한 곳에는 외세에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저항 의식이 흐르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지배를 회복하려 하자,
베트남 독립 세력은 거세게 항전했다.
베트남에게 프랑스의 귀환은 단순한 행정권의 회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끝나야 할 식민지배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었다.
두 세력의 대결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판가름났다.
프랑스군은 산악 지대의 거점에 병력을 집중시켰고, 베트민은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포병을 산지에 끌어올려 포위망을 구축했다.
전투는 프랑스의 참패로 끝났다.
프랑스군 1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베트남의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디엔비엔푸 이후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프랑스가 물러난 자리에 미국이 들어왔다.
미국은 베트남 문제를 단순한 식민지 독립의 문제가 아니라,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냉전의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미국은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력과 압도적인 산업 생산력을 가진 국가였다.
그 경제력을 배경으로 미국은 10년 넘게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은 미국이 상상한 것과 다른 전쟁이었다.
전쟁의 승패는 물리력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전쟁을 군사전이자 정치전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농촌 사회 속에 침투했고, 게릴라전과 정규전을 결합했으며, 장기전을 통해 미국 사회의 피로와 분열을 유도했다.
결국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며 미국마저 짐을 싸야 했다.
유교적 구가관과 결합된 베트남의 끈질긴 민족주의는 프랑스도, 미국도 끝내 꺾지 못했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에 접근하자 미국 대사관 담장을 넘어 베트남을 탈출하려는 사람들South Vietnamese civilians climbing the wall of the U.S. Embassy compound during the evacuation of Saigon, April 1975. National Museum of American Diplomacy.
유교 문명권과 서구 문명권 사이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은 베트남 전쟁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후 두 문명은 여섯 차례의 굵직한 피의 역사를 썼다.
아편전쟁의 무기력한 붕괴로 시작해 러일전쟁의 아슬아슬한 반격과 태평양전쟁의 참혹한 패배를 거쳤고, 한국전쟁에서 팽팽한 교착을 이루었으며,
베트남에서는 프랑스와 미국을 차례로 몰아냈다.
굳이 승패를 따지자면 3승 1무 2패. 일방적으로 유린당하던 동아시아가 피투성이가 된 채 쟁취해 낸 뼈아픈 역전극이었다.
베트남전쟁 이후 오늘날까지, 동아시아에서는 서구 열강과의 전면적인 군사 충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아편전쟁의 거대한 충격파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던 유교 문명권이, 이후 100년이 넘는 끔찍한 진통 속에서 체제를 재정비하고 굳건한 주권적 근대국가들을 세워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지역이 여전히 권력의 공백과 체제 불안에 허덕이고 있었다면, 동아시아는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처럼 강대국들의 대리전이 끊이지 않는 영구적인 분쟁의 늪으로 전락했을 수 있다.
서구 세력은 현지의 갈등 구조를 파고들며 쉼 없이 무력을 투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외부 세력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점차 줄여나갔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식민지배, 전쟁, 분단, 혁명, 독재라는 혹독한 시간이 이 지역을 관통했다.
그 고통 속에서 동아시아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자신을 재구성하며 문명의 충돌을 극복했다. 그 결과 동아시아는 더 이상 서구가 쉽게 흔들 수 없는 견고한 문명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https://www.impeter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2511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2026-05-31 23:43(A)
아편전쟁부터 베트남전까지… 동아시아가 서구에 거둔 '3승 1무 2패'
기자명 김욱 칼럼니스트
입력 2026.05.31 0
[김욱의 한국 문명탐구] 서구의 충격과 유교 문명의 반격
▲ 저자: Painted by Captain John Platt, Bengal Volunteers. Engraved by John Burnet. - Anne S. K. Brown Military Collection,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2229605
유라시아 대륙의 양극단에 자리한 동아시아와 서구는 오랜 세월 서로의 맨얼굴을 대면하지 못했다.
간헐적으로 진기한 물품과 희미한 소문이 오갔을 뿐, 두 문명이 서로의 질서 깊숙이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
바다는 거대한 장벽이었고, 광활한 대륙은 훌륭한 완충지대였다.
근대 이전까지 두 세계는 철저히 닫힌 각자의 질서 안에서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러나 근대가 시작되면서 거리는 줄어들었다.
서구의 배는 더 멀리, 더 자주, 더 강하게 동쪽으로 왔다.
선교사와 상인, 외교 사절과 군함이 차례로 동아시아의 문 앞에 도착했다.
서로를 모를 때에는 충돌도 멀리 있었지만 서로의 실체를 알아갈수록 충돌의 에너지는 점점 쌓여갔다.
마침내 폭발한 충돌의 도화선은 ‘아편’이었다.
영국에게 아편은 막대한 대중국 무역 적자를 메우는 구원투수이자, 인도 식민지와 중국 시장을 잇는 삼각무역의 절대적인 고리였다.
그러나 중국에게 그것은 백성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국가의 부(은)를 유출시키며 체제의 근간을 허무는 치명적인 독약이었다.
흠차대신 임칙서가 광저우에서 아편을 몰수해 불태운 것은 청나라 입장에서는 제국을 수호하기 위한 지극히 정당한 주권 행사였다.
하지만 영국은 이를 '자유무역에 대한 침해'라 규정했고, 제국의 해군을 출동시켰다. 그렇게 19세기 중반, 두 문명은 마침내 전쟁으로 마주 섰다.
▲프랑스 풍자화가 그랑빌의 1840년 작품 '영국식 상업'(Commerce Anglais). J. J. Grandville, Commerce Anglais, lithograph, published in La Caricature Provisoire, no. 19, 10 May 1840. British Museum, Public Domain.
아편전쟁의 결과는 청 제국에 참담한 충격을 안겼다.
청이 자랑하던 광활한 영토와 막대한 인구, 수백 년간 축적된 제국 운영의 노하우는 영국의 근대적 해군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낡은 무기와 우물 안의 정보력에 기댄 방어망은 허망하게 찢겨 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철저한 ‘체제의 패배’였다.
산업혁명이라는 용광로에서 기술, 해군력, 금융, 국제 무역망을 결합해 낸 서구의 ‘근대적 힘’과 동아시아의 ‘전통적 농업 관료제국’ 사이에 놓인 아득한 격차가 마침내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결국 청은 1842년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홍콩섬이 영국에 할양되었고, 광저우에 국한되었던 개항장은 5개 항구로 강제 확대되었으며, 막대한 배상금의 멍에를 졌다.
뒤이어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라는 불평등 조항들이 덧씌워지며 중국의 주권은 걷잡을 수 없이 침식되어 갔다.
아편전쟁의 충격은 영토 상실보다 더 깊은 곳을 찔렀다.
그것은 일개 왕조가 외세에 패배한 사건을 넘어, 수천 년간 동아시아를 굳건히 떠받쳐 온 ‘유교 문명의 세계관’이 서구 상업제국의 무력 앞에서 붕괴하기 시작한 문명사적 대지진이었다.
이제 동아시아는 더 이상 고립된 우주에 머물 수 없었다.
훌륭한 장벽이었던 바다는 이제 외세가 밀어닥치는 침략의 통로가 되었다.
아편전쟁의 치욕은 동아시아 전체에 생존을 위한 핏빛 각성을 요구했다.
그로부터 반세기 남짓 흐른 후, 서구의 충격을 가장 기민하게 내면화한 일본이 거대한 백인 제국 러시아와 맞붙으며 두 번째 충돌의 막을 올렸다.
일본은 거대한 청나라가 열강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과정을 뼈아픈 반면교사로 삼았다. 살아남기 위해 전통 질서를 해체하고 서구식 제도와 군사 체제를 흡수했다. 그 결과 일본은 동아시아의 변방을 넘어, 스스로 제국으로 팽창하려는 근대 국가로 변모해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아시아의 주도권을 쥐려던 일본과,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는 러시아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여기에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영국의 이해관계가 영일동맹으로 엮이면서, 한반도와 만주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거대한 체스판으로 전락했다.
전쟁은 1904년 2월, 일본이 뤼순항에 주둔하던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세계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전통의 강호 러시아가 아시아의 섬나라를 쉽게 제압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전황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일본군은 시체로 산을 쌓는 참혹한 희생 끝에 뤼순 요새를 함락했고,
이듬해 3월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 육군을 궤멸시키며 만주 전선을 장악했다.
마침내 1905년 5월, 대한해협에서 지구 반 바퀴를 항해해 온 러시아 발틱 함대를 전멸시키며 전쟁의 승패에 쐐기를 박았다.
▲ 러일전쟁을 “극동 챔피언전”으로 풍자한 미국 만평Bob Satterfield, cartoon of the Russo-Japanese War as a boxing match, c. 1904–1905.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 승리는 우연이 빚어낸 기적이 아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국가 시스템 전체를 전쟁 수행에 최적화된 거대한 기계로 개조했다.
징병제와 근대 교육으로 국민을 총력전의 자원으로 동원했고, 영일동맹으로 외교적 고립을 피했으며, 국제 금융망을 끌어들여 천문학적인 전쟁 자금을 조달한 치밀한 결과였다.
비서구 국가가 백인 제국주의 열강을 꺾었다는 사실은 전 세계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다.
서구가 동아시아를 일방적으로 유린하던 시대는 끝이 났고, 일본이 처음으로 그 무력의 방향을 되돌려 놓은 듯 보였다.
그러나 서구 제국주의를 완벽하게 복제하려 했던 일본의 야망은, 결국 파멸적인 결말로 치닫고 말았다.
동아시아와 서구의 세 번째 충돌의 무대는 광활한 태평양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은 서구와 같은 방식으로 팽창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위험한 논리에 빠져들었다.
스스로를 아시아의 해방자로 포장했지만, 실상은 폭력적인 지배에 불과했다.
군함과 공장을 넘어 제국주의적 팽창과 인종적 우월감까지 서구를 그대로 빼닮아갔다.
그 광기 어린 파국은 1941년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폭발했다.
상대는 서구 문명권 최강의 산업 제국, 미국이었다.
개전 초기 일본은 동남아시아 전역을 휩쓸며 기세를 올렸지만, 그것은 모래성처럼 위태로운 연승에 불과했다.
미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산업 생산력과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을 품은 괴물 같은 국가였다.
진주만 공격은 전술적 성공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일본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와 전면전을 시작하게 만든 전략적 실패였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국력의 격차는 잔인할 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맹목적인 정신력과 기습의 요행으로는 미국의 차가운 컨베이어 벨트를 이길 수 없었다.
항공모함, 전투기, 잠수함, 레이더 기술, 암호 해독력, 압도적인 보급선과 연료 생산력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일본을 압사시켰다.
방어선은 하나둘 무너져 내렸고, 요행을 바랐던 단기전은 국가의 뼈를 깎는 총력전으로 돌변했다.
종막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다.
1945년 8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두 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며 일본 제국은 글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한때 아시아의 자존심을 자처했던 일본식 군국주의 모델의 완전하고도 처절한 파산 선고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광기가 휩쓸고 간 빈자리는 또 다른 충돌을 예비하고 있었다.
무대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갓 벗어난 한반도였다.
https://www.impeter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2511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2026-05-31 17:54[동그라미 만평] 똥 묻은 국힘이 겨 묻은 대통령을 나무란다.
홍순구 만평작가의 '동그라미 생각'
홍순구 시민기자
입력 2026.05.31
[굿모닝충청 홍순구 시민기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처럼,
정당의 내로남불식 태도는 유권자의 피로감과 냉소만을 키우고 있다.
선거철마다 정치권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보여준 행보는 정책 경쟁이나 비전 제시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도 멀어 보인다.
특히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이재명 대통령의 ‘사전투표지 노출 해프닝’을 두고 ‘명백한 탄핵 사유’라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 사건은, 이들이 과연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것인지 아니면 희극적 정쟁을 연출하는 것인지 의구심을 자아낸다.
이번 지방선거는 유권자가 4장에서 8장에 이르는 투표용지에 직접 기표해야 하는 복잡한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기표 도중 도장이 반만 찍힌 것을 확인하고, 유권자들이 겪을 수 있는 실수를 염려해 선거사무원에게 확인을 구한 것은 투표 현장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일상적인 해프닝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를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라 규정하며 탄핵까지 운운하는 국민의힘의 태도는, 대다수 국민의 눈에 과도한 정치 공세로 비칠 뿐이다.
국민의힘의 이번 행보는 일부 강성 지지층 결집을 노린 고도의 전략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 같은 촌극에 가까운 선동이 중도층 유권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처럼, 정당의 내로남불식 태도는 유권자의 피로감과 냉소만을 키우고 있다.
특히 국민의힘의 비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들의 과거 행적 때문이다.
과거 ‘12.3 내란 사태’ 당시 사법기관의 구속영장 집행에 반항했던 일이나,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전국을 순회하며 논란이 된 ‘1000조 원 규모 민생토론회’ 당시, 그들이 과연 지금과 같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던가.
그때의 침묵과 지금의 과도한 탄핵 요구 사이의 간극은,
국민의힘이 주장하는 ‘공정’과 ‘법치’가 얼마나 선택적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를 여실히 방증한다.
이제 유권자들은 더 이상 정치권의 이런 농간에 흔들리지 않는다.
누가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누가 불필요한 정쟁으로 국력을 낭비하는지, 국민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국민의힘의 이번 촌극이 자극적인 선동으로 잠시 지지층을 결집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본질을 잃어버린 정당은 결국 유권자의 심판이라는 냉엄한 현실 앞에 자멸의 길을 걷게 될 뿐이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46857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2026-05-31 01:15선배 조언을 '간첩 지령'으로... 에이스 검사의 수사 방식
[재심: 바로잡은 역사] 김기춘이 보여준 공안 수사의 민낯
김종성
26.05.30
반공정권의 흔적이 강했던 1990년대 전반까지는 셜록 홈스 같은 수사 전문가가 성장하기 힘들었다.
객관적 증거와 합리적 추리로 진실을 파헤치는 수사관이나 수사 검사들이 그 시절에도 당연히 존재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훈장과 포상을 받으며 주요 위치로 승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영예를 누리는 수사 담당자의 상당수는 설록 홈스와 정반대인 사람들이었다.
엄연한 증거와 상식적인 추리를 무시한 채 증거를 조작하고 엉터리 추론을 하는 사람들이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절의 수사를 주름잡았다.
셜록 홈스 같은 명탐정이 성장하기 힘들었다는 점은 그 시기에 출세 가도를 달린 수사관이나 수사 검사들의 업무 스타일에서 확인된다.
박정희 시절에 유능한 검사라는 평을 받았던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담당했던 공안사건을 살펴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1939년에 경남 거제에서 출생한 김기춘은 스물한 살 때인 1960년에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고 박정희 정권하에서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서울지검 검사,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등을 지냈다.
그는 전두환 정권하에서는 서울지검 공안부장, 대구지검·대구고검 검사장 등을 거치고 노태우 정권하에서는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42세였을 때인 1981년 4월 25일, 김기춘은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에 임명됐다.
이날의 인사 조치로 인해 검찰은 제8회 고등고시 출신들을 중심으로 세대교체를 이뤘다.
이때, 고시 8회를 이을 차세대 리더로 부각된 검사 중에 정해창(고시 10회)과 김기춘이 있었다.
두 검사가 주목받은 것은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그해 4월 27일 자 은 1937년생인 정해창 법무부 검찰국장에 관해서는 "'검찰청 개청 이래의 천재'란 별칭이 말해주듯이 두뇌회전이 빠른 데다"라고 평하고, 김기춘에 관해서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평했다.
김기춘이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평가받은 것은 그가 셜록 홈스처럼 수사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가 어떻게 수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다.
상식적으로 납득될 수 없는 김기춘의 수사 방식
이 사건이 발생한 1975년 당시에는 재일교포 유학생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장학금 지원이 없었다.
그래서 그 대다수는 자비 유학생이었다.
1976년 9월 6일 자 사설은 이런 현실을 지적하면서 "겨우 한 해 3백 명 내외의 자비 유학생이 있을 따름"이라고 전했다.
김기춘이 수사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대서특필한 1975년 11월 23일 자 기사는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 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 암약해온 재일 유학생을 주축으로 한 간첩단 일당 21명을 검거"했다고 보도했다.
당시의 재일교포 유학생 규모를 감안하면, 꽤 많은 학생들이 하나의 간첩 사건으로 엮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 관련자인 백옥광(1975년에 27세)은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뒤 1990년에 가석방되기는 했지만 사건 당시에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최연숙(24세)과 강종건(24세)은 징역 및 자격정지 각 5년, 김동휘(21세)는 징역 및 자격정지 각 4년, 장영식(26세)은 징역 및 자격정지 각 3년을 받았다.
전체 재일교포 유학생 중의 상당수가 연루됐고 피고인들의 형량이 위와 같았던 데서 나타나듯이 이 사건은 비중이 높은 공안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김기춘의 핵심 공로로 평가됐다.
그가 1990년에 5·16민족상 안보부문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도 이 사건이 거론됐다. 그해 5월 3일 자 은 "공안사범 등의 수사에 헌신, 자유민주체제 수호와 국가안보에 이바지"한 인물이라면서 그의 핵심 공로를 이렇게 열거했다.
아래 기사 속의 "19명"은 "21명"의 오기다.
"특히 70년대 중반 이후 급증한 북한의 우회침투 간첩 색출에 수사력을 집중, 75년 국내 대학 유학생으로 위장 침투, 학원 시위를 배후 조종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19명을 검거하고, 77년에는 재일교포 간첩 강모 등 지금까지 간첩 58명과 반국가·안보위해사범 2백 40명을 검거, 북한의 대남공작 역량을 분쇄하는 데 공헌해왔다."
김기춘의 이 사건 수사는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수사 방식은 상식적으로 납득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제9권 '재일동포 유학생 김동휘 간첩 사건' 편에 인용된 당시의 판결문 요지에 따르면,
수사 과정에서 밝혀졌다는 김동휘의 주요 행적은 이렇다.
"1973. 2월 말 백옥광과 회합하여 한국유학 계획을 통고하고, 이른 시일 안에 국어를 해독하고 교우와 학교 당국으로부터 신망을 얻도록 노력하라는 내용으로 이른바 동조세력 규합 활동을 하라는 지령을 받는 동시에, 의학개론 1권을 수수한 후 1973. 3. 30. 대한항공기 편으로 입국"
일본에서 백옥광은 김동휘에게 "한국어를 빨리 해독하고 교우와 학교의 신망을 얻도록 노력하라"고 격려했다.
선배가 후배에게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이처럼 평범한 조언이 "동조세력 규합 활동"에 관한 지령으로 해석됐다는 것은 위의 판결문 요지에서 확인된다.
3주간 고문한 결과로 얻어낸 자백
백옥광이 김동휘에게 건넨 것은 암호명이나 난수표 같은 간첩의 표식이 아니라 이라는 한 권의 서적이다.
김기춘 수사팀이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갔다고 파악한 것은 그것뿐이다.
물증으로 내밀 만한 것이 마땅치 않으니 선물 받은 책을 제시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판결문 요지에 적시된 김동휘의 또 다른 행적은 이렇다.
"1973. 6월 중순 대학생 30여 명으로 구성된 영탑회에 가입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백옥광에게 활동 사항을 보고."
영탑회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성균관대·이화여대 학생 30명 정도가 참여한 친목 서클이었다. 이곳에 가입한 김동휘가 백옥광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이것도 간첩활동에 대한 보고 행위로 해석됐다.
김동휘의 서울 시내 산책도 그런 식으로 포장됐다.
판결문에는 "1974. 9월 초 청량리역 주변, 청계천 7가와 미아리 등지를 배회하면서 서울의 서민 생활상, 학생 동향, 경제정치 정세 등에 관한 국가기밀을 탐지·수집·간첩하고"라는 대목이 있다.
지금의 도로 사정을 기준으로 하면, 청량리역에서 미아리고개까지는 도보로 1시간 10분에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김동휘가 그 시간 동안 거리를 배회하면서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수집했다는 것이 당시의 수사 결과다.
김동휘가 국가기밀을 보유한 기관이나 당국자에게 접근했다는 내용은 판결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출입국 기록 자체와 일상적인 언행 등이 간첩행위의 증거로 해석됐을 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가혹행위의 결과물이다.
김동휘의 신청을 받고 진실규명에 나선 진실화해위원회는 "중앙정보부는 신청인을 영장 없이 연행하여 20일 동안 불법으로 구금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차단한 채 허위로 자백할 것을 강요하며 구타 등 가혹행위를 하고 잠 안 재우기 등 강압적 조사를 하였음이 확인"된다고 위 보고서에서 밝혔다.
약 3주간이나 고문한 결과로 얻어낸 자백이 위와 같은 내용들이다.
이를 과감하게 간첩활동으로 포장할 수 있는 수사관이나 수사 검사들이 반공정권하에서 출세했다.
셜록 홈스처럼 용의자를 신사적으로 대하고 증거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며 추리를 합리적으로 하는 수사 전문가들은 이런 환경에서 성장하기 힘들었다.
김동휘 등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것은 재심 재판을 통해 확인됐다.
2013년에 서울중앙지방법원이 '국가는 김동휘의 피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할 수 있었던 것은 재심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됐기 때문이다.
셜록 홈스를 기죽이는 수사 환경을 조장한 대한민국의 잘못으로 인해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진실이 파묻혔고, 그 사이에 피해자들의 한과 응어리는 국가배상금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지고 말았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7321&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2026-05-30 21:52[동그라미 만평] "동맹은 도구가 아니다" 미국의 그릇된 한반도관
홍순구 만평작가의 '동그라미 생각'
홍순구 시민기자
입력 2026.05.30
[굿모닝충청 홍순구 시민기자]
전작권의 조속한 회수는 단순한 군사 지휘권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권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단검' 발언으로 또다시 선을 넘고 있다.
이는 한미동맹의 본질을 '상호 방위'가 아닌 '전략적 자산 운용'으로 변질시키려는 위험한 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대한민국을 ‘중국을 겨냥한 단검’이나 ‘고정된 항공모함’에 비유한 것은 우리 국민의 안보 주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처사이며, 우리를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소모품으로 치부하는 오만한 인식의 발로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엄연한 주권 국가다.
그러나 미 군부의 시각에서 우리나라는 대중국 견제라는 전략적 목표를 위한 물리적 거점에 불과한 듯하다.
대한민국을 ‘고정된 항공모함’이라 칭하는 것은 우리 영토를 언제든 파괴될 수 있는 전장으로 상정하는 것이며, 국민의 안전과 평화적 생존권을 미국 군사 전략의 하위 변수로 격하시키는 무례한 행태다.
주한미군이 사전 교감 없이 강행한 서해 공중 훈련은 그 무례함의 극치다.
이는 한미동맹의 근간인 ‘신뢰’와 ‘협력’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처사다.
대한민국의 의사를 배제한 채 한반도를 대치 상황의 최전선으로 내모는 행위는
주권 국가의 안보 결정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결국 한반도를 미국의 전쟁 도구로 전락시켜 우리 국민을 예측 불가능한 안보 위기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현 이재명 정부가 강조하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은 대한민국 자주 국방의 미래가 걸린 필수 과제다.
그러나 미 군부 인사들이 한국군의 지휘권을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은,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로드맵을 부정하고 한반도의 군사적 주도권을 영구히 장악하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전작권의 조속한 회수는 단순한 군사 지휘권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권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패권 전략에 종속된 소모품이 아니다.
한반도의 운명을 위태롭게 하는 오만한 군사 행동은 한미동맹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미 군부의 독단에 엄중히 대응하고 전작권을 조속히 회수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한반도 안보의 주도권을 확립하고 당당한 평화를 일구는 길이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46844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2026-05-30 01:13((모스탄을 체포해 대한민국의 법치 아래에 두어야!!))
[사설] 재입국 ‘부정선거 음모론자’ 모스 탄, 이대로 둘 건가
수정 2026-05-29
허위사실로 이재명 대통령을 명예훼손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모스 탄 미국 리버티대 교수(오른쪽 두번째)가 29일 경기 평택시 안중읍 황교안 자유와혁신 후보 선거사무소를 찾았다. 황교안 후보 페이스북 갈무리
이재명 대통령을 허위사실로 명예훼손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모스 탄(한국명 단현명) 미국 리버티대 교수가 28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 29일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황교안 자유와혁신 대표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를 만났다.
지난 대선에서 이 대통령이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고 주장해온 탄 교수가 황 대표 등과 힘을 합쳐 부정선거 음모론을 재점화하려는 것이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탄 교수 쪽에 이날 오후 출석해 조사를 받으라고 요구했지만, 탄 교수는 이에 불응했다.
탄 교수 변호인단은 입장문을 통해 “경찰이 변호인 선임 사실을 알고도 변호인이 출입할 수 없는 항공기 트랩 구역에서 탄 교수에게 직접 접근했다”며 “담당 수사관 전원에 대해 기피를 신청했다. 기피 여부가 결정될 때까지 수사가 즉시 중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찰에 출석하는 대신 탄 교수는 황 대표가 국회의원 재선거 후보로 출마한 경기 평택을 지역구의 사전투표소를 방문한 뒤, 황 후보의 선거사무소를 찾아 황 후보와 면담했다.
또한 서울서부지법 폭동 사태 배후 혐의를 받고 있는 전광훈 목사도 만났다.
국내 수사기관의 형사 절차를 ‘법 기술’로 피하고, 부적절한 정치 행위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탄 교수는 지난해 6월 미국 워싱턴디시(DC)에서 열린 ‘국제선거감시단’ 주최 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이 청소년 시절 집단 성폭행·살해 사건에 연루돼 소년원에 수감됐고, 이 때문에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는 취지로 허위 발언을 한 혐의를 받는다.
탄 교수는 지난해 7월 국내에 들어와서도 “이재명이 입고 있던 옷이 소년원 옷과 일치한다” “한국 시민들이 증거와 정황을 모아 두었다”는 등 관련 발언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소년원 복역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련 주장을 했던 유튜버 등은 이미 허위사실공표죄로 여러 차례 유죄를 선고받았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2020년 대선이 부정선거였다는 음모론을 믿는 마가(MAGA) 세력의 일원으로, 지난해 대선을 비롯해 한국의 역대 선거에도 중국이 개입해 조직적인 부정이 이루어졌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퍼뜨려왔다.
이에 더해 6·3 지방선거 사전투표일에 맞춰 국내에 들어와 부정선거론을 부추기려는 것이다.
그는 한국과 미국의 극우 교회 네트워크를 통해 국내 부정선거론자들과 연계하며,
‘이재명 정부는 친중·반미 정권’이라는 식의 발언 등을 통해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를 이간질하려는 시도 역시 지속하고 있다.
경찰은 탄 교수의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단호하고 신속하게 수사를 진행해 엄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우리 헌정 질서를 흔들려는 음모론자들의 준동에 대해서는 온 사회가 경각심을 갖고 대처해야 한다.
탄 교수의 터무니없는 주장이 행여나 미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외교적 노력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1261111.html댓글 0
-
29
tradbred (@tradbred)2026-05-30 01:13[사설] 오세훈 캠프 ‘댓글팀 의혹’, 수사로 사실 여부 밝혀져야
수정 2026-05-29
오세훈 캠프의 조직 부문을 총괄하는 김선동 전 국민의힘 사무총장이 지난 20일 잠입취재에 나선 기자 앞에서 자신을 ‘정원오 주사파 홍보물’의 제안자라고 자랑하는 장면. 뉴스타파 영상 갈무리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 캠프가 경쟁 상대인 정원오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비방하는 홍보물을 제작한 뒤 단톡방 등을 활용해 온라인상에 유포해온 정황을 탐사보도 전문매체 뉴스타파가 28일 보도했다.
매체는 오 후보 쪽 관계자들이 단톡방 참여자들을 캠프 사무실이 입주한 건물 내 카페로 불러 ‘댓글 여론전’을 독려하는 내용이 담긴 녹취 파일도 함께 공개했다.
오 후보 쪽은 “캠프가 비방용 콘텐츠를 직접 기획·제작해 확산시킨다는 의혹은 사실무근”이며 “(보도된 모임은) 캠프와 무관한 자발적 모임”이라고 해명했으나,
민주당은 오 후보와 캠프 관계자를 업무방해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하는 등 선거전의 주요 쟁점으로 삼을 태세다.
‘댓글팀’의 활동은 물론, 이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 자체도 유권자의 표심에 영향을 미칠 공산이 큰 만큼 선거관리위원회 조사나 경찰 수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뉴스타파 보도는 매우 구체적이다.
오세훈 캠프의 조직 부문을 총괄하는 김선동 전 국민의힘 사무총장이 지난 20일 잠입취재에 나선 기자 앞에서 자신을 ‘정원오 주사파 홍보물’의 제안자라고 자랑하면서 “그것부터 막 때리면 사람들 머리가 확 깨버린다. 야 뭐 이런 놈이었어? 이거 완전히 주사파잖아. 아직도 (사람들이) 잘 모르니 (이런 내용을) 다시 한번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1990년대 초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간부로 활동한 정 후보의 이력을 내세워 그를 ‘주체사상파’라 낙인찍어 공격하는 네거티브 색깔 공세다.
보도된 녹취 파일에는 오 후보 캠프의 ‘댓글 여론전’ 정황을 보여주는 대화도 등장한다.
단톡방 ‘번개 모임’에 참석한 김기현 국민의힘 책임당원협의회 상임의장이 “오세훈 시장이 여론 댓글이나 언론사 댓글에 굉장히 민감하다”며 앞선 2021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오 후보 당선을 위한 댓글팀을 자신이 직접 조직해 운영했고 이에 대해 오 시장으로부터 감사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까지 언급한다.
김 의장은 그러면서 “지금 우리가 해야 될 일도 (그때와) 똑같은 일”이라며 “기사 링크(URL)를 올리면 ‘아, 이게 좌표다’ 생각하고 알아서 들어가서 각자 생각을 올리면 된다”고 안내한다.
선거법 위반을 피할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한 것이다.
이후 캠프 관계자들은 번개 모임 참가자들을 같은 건물에 있는 캠프 사무실로 데려가 조직 총괄인 김 전 사무총장을 만나게 한다.
김 전 총장은 “좌고우면할 때가 아니다. (선거일까지) 14일 남았다. 14일 동안 ‘손가락 전투’ 좀 하면서 분위기를 으쌰으쌰 해서 띄워달라”고 주문한다.
댓글팀을 캠프 차원에서 기획해 운영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도된 내용만으로 오 후보 캠프가 불법을 저질렀다고 예단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단톡방을 활용해 ‘좌표 찍기’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댓글 작성을 독려했다면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다.
유권자의 착시를 유도해 정상적인 여론 형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제기된 의혹이 사실과 다르다면 수사에서 성실히 소명하면 된다.
3선을 한 공직자에게 20대 시절의 민주화 운동 이력을 트집 잡아 ‘주사파’라 낙인찍는 행태 역시 접어야 한다.
시대착오적인 색깔론 공세가 먹힐 것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유권자에 대한 모독임을 오 후보 쪽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1261114.html댓글 0
- 쪽지보내기
- 로그방문

개
젤리 담아 보내기 개
로즈 담아 보내기 개







0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