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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6-05-25 23:31국민배당금 보도, ‘의도된 오독’ 아닌가 [저널리즘책무실]
이종규기자
수정 2026-05-25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의 ‘국민배당금’ 구상이 알려진 날, 주식 투자에 진심인 우리 집 이대남이 볼멘소리를 했다.
왜 이상한 소릴 해서 주식시장에 찬물을 끼얹냐는 거다.
기업이 이익을 많이 내면 그걸 뺏어서 국민에게 나눠 주겠다는 게 말이 되냐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내용이 다르니, 다른 기사들도 읽어 보라고 했다.
잠시 기사를 찾아보더니, 기자들이 왜 기사를 그따위로 쓰냐고 또 볼멘소리다.
김 실장이 11일 밤 ‘차원이 다른 나라: 에이아이(AI) 시대 한국의 장기 전략’이라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자, 다음날 아침부터 그 글을 인용한 보도가 쏟아졌다.
그런데 보도 방향은 사뭇 달랐다.
경제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보수 언론은 김 실장이 인공지능(AI) 호황으로 기업들이 얻는 ‘초과이윤’(초과이익)을 국민에게 환원하자고 제안했다고 썼다.
‘초과세수 활용’으로 방향을 잡은 언론은 소수였다.
‘초과이윤’과 ‘초과세수’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국민배당금이라는 말과 함께 쓰이면 더욱 그렇다.
초과이윤이라고 쓰면, 기업이 큰돈을 벌면 정부가 이익을 환수해 배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반면 초과세수는 경기 호황으로 예상보다 세수(법인세)가 늘면 그걸 국민을 위해 쓰자는 취지로 해석된다.
예컨대, ‘“삼성·에스케이(SK)가 번 에이아이 돈, 국민도 나눠 갖나”…청와대가 꺼낸 ‘배당국가’ 실험’이라고 제목을 단 기사와 ‘‘에이아이 국민배당금’ 띄운 청 정책실장…“역대급 초과세수, 어떻게 쓸지 고민할 문제”’라는 제목의 기사는 어감이 확 다르다.
같은 사안을 두고 언론이 상반된 보도를 한다면 기사의 바탕이 된 1차 자료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김 실장의 글은 200자 원고지 38매에 이르는 장문이다.
김 실장은 글의 4분의 3가량을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확연하게 달라진 한국 경제의 위상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단순한 소프트웨어 산업이 아니라 산업 인프라이며, 한국은 그 인프라 공급망을 통합적으로 보유한 드문 나라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국은 순환형 수출경제에서 기술독점적 성격이 강한 경제구조로 체질이 바뀌어 지속적 초과이윤을 생산하는 국가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글에서 ‘초과이윤’은 이처럼 한국 경제의 위상 변화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거듭 등장한다.
논란이 된 국민배당금 제안은 초과이윤 집중에 따른 격차 확대 우려를 언급한 이후 나온다.
“인공지능 인프라 공급망에서의 전략적 위치가 구조적 호황을 만들고, 역대급 초과세수로 이어진다면,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응당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는 국민배당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거듭 ‘초과세수’란 단어를 썼다.
국민배당금이란 말도 주식 배당금처럼 현금을 뿌리자는 의미가 아니다.
김 실장은 ‘인공지능 인프라 시대 과실의 구조적 환원’이라는 원칙을 소개하면서,
“이 글에서는 그 원칙에 가칭 ‘국민배당금’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고 썼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이 원칙 위에서 백가쟁명식 사회적 토론을 통해 정교화하자는 제안이다.
김 실장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라면
‘정부가 기업이 번 돈을 더 뜯어내려 한다’는 식의 비판이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글을 읽고 쓰는 걸 업으로 삼는 기자들이 헷갈릴 정도로 난해한 글도 물론 아니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온 보수 언론이 ‘의도된 오독’을 한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이유다.
언론은 1차 자료(원문)를 꼼꼼하게 확인해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게 저널리즘의 본령인 ‘진실 추구’의 출발점이다.
원문의 전체적인 취지와 맥락을 무시한 채, 이른바 ‘야마’(기사의 방향)에 맞는 일부 표현만 가져와 기사를 쓰는 것은 진실 보도와 거리가 멀다.
없는 얘기 지어낸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의 자의적인 취사선택과 교묘한 편집은 ‘왜곡 보도’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그릇된 관행임이 분명하다.
건강한 공론장 형성이라는 언론의 책무를 방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사실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언론사 논조에 맞춰 사실관계마저 비트는 일이 반복된다면,
언론에 들씌워진 ‘가짜뉴스’ 혐의만 더욱 강화할 뿐이다.
도매금으로 “왜곡 보도를 일삼는 언론”이라는 비아냥을 들어도 반박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게 다 언론의 업보가 아니면 뭐겠나.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60277.html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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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6-05-25 23:25반도체 ‘역대급 이익’의 민낯…사회에 떠넘긴 ‘환경 비용’ [왜냐면]
수정 2026-05-25
김은경 | (사)지구행동 이사장
반도체 기업의 역대급 수익을 둘러싼 노사 갈등이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총파업 없이 합의에 이른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협상 테이블에서 끝내 다뤄지지 않은 문제가 있다.
이익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
즉 그 이익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누가 어떤 비용을 대신 치렀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번 협상 과정에서 제기된 의제들은 다양했다.
역대급 반도체 이익을 노동자와 어떻게 나눌 것인가,
부문별 성과 배분의 형평성은 어떻게 맞출 것인가,
국가와 국민의 기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청기업과의 사회적 연대는 어디까지인가.
모두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 논의들에는 공통된 맹점이 있다.
기업이 마땅히 부담해야 할 비용을 사회에 전가해온 문제,
즉 ‘비용의 외부화’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본래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을 기반으로 운영되지만, 시장은 환경이나 생태계 같은 ‘자연 자본’의 가치를 가격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닌다.
기업들이 가격표가 없다는 이유로 비용을 외부에 떠넘기며 오염을 누적시켜 온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기후위기와 생물다양성 감소, 바다의 플라스틱 오염과 사막화다.
결국, 기업이 외면한 이 거대한 생태적 완화 비용은 공공의 재정으로 메워지거나,
국민이 일상에서 기후 재난과 위기라는 실존적 위협으로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실제로 기업 경쟁력의 민낯이 ‘비용을 외부화하는 능력’이라는 냉소 섞인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안타깝게도 이 말이 빈말처럼 들리지 않는 사례가 눈앞에 있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경기 이천공장 증설 당시 환경영향평가 조건으로 ‘무방류 시스템’ 도입을 약속했다.
팔당 취수원에서 끌어온 한강 물을 생산과정에서 사용한 뒤 외부로 내보내지 않고 내부에서 완전히 처리해 재사용하겠다는 요건이었다.
기업이 마땅히 내부에서 감당해야 할 환경 비용을 명확히 규정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이를 이행하지 않고 오산천으로 방류를 계속하고 있다.
2018년 당시 무방류 시스템 도입 비용이 약 1조원으로 추산됐다.
그러나 지난해 연간 순이익이 42조9천억원, 올 1분기 수익만 40조3천억원을 넘어서는 지금도 방류수 오염과 지천 수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감당할 의지가 없는 것이다.
그 비용은 강 하류 주민들의 삶과 공공의 수질 관리 부담으로 조용히 전가됐다.
에너지 문제도 다르지 않다.
에스케이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모두 알이100(RE100)을 선언했지만,
재생에너지를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않는다.
지방에서 생산된 재생에너지를 수도권 공장까지 끌어오기 위한 대규모 송전망 건설은 국가 몫이 됐다.
이제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가 본격화되면 이 문제는 더욱 커진다.
용인 산단에 필요한 전력과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송전망과 취수 인프라 구축 비용 역시 국가와 지역 주민이 떠안을 처지다.
송전망이 지나는 지역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내줘야 하고, 건설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 비용도 사회가 고스란히 짊어진다.
분석에 따르면 두 기업이 필요한 재생에너지의 60% 정도만 자체적으로 부담해도 현재의 송전망 부담은 크게 줄어든다.
기업이 알이100 선언의 비용을 스스로 감당할 의향이 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환경·사회적 책임이 온전히 기업의 비용으로 반영되어야만, 향후 입지 선정 단계부터 올바른 사회적 비용이 셈해질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이 이번 노사 협상에서 단 한번도 의제로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쉽다.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임금과 복지를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조합원과 그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의 지속가능성, 그것을 떠받치는 환경 비용 문제가 노사 협상의 낯선 의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방류 시스템 이행이나 실질적인 재생에너지 자체 조달은 기후 리스크로부터 기업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단기 이익에 집중하는 경영 판단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함께 점검하는 것, 이것이 노사가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영역이다.
이익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이익을 나누기에 앞서, 기업이 마땅히 치렀어야 할 사회적 비용의 부담이 먼저다.
그 이익은 누구의 비용 위에, 어떤 자연 자본의 희생 위에 만들어졌는가.
기업이 감당할 수 있음에도 사회에 떠넘긴 청구서들을 정직하게 내재화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말하는 이익 분배와 성장의 정의는 결국 절반짜리 기만에 그칠 수밖에 없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260305.html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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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6-05-25 19:17[동그라미 만평] ’표현의 자유‘뒤에 숨은 일베의 ’혐오의 자유’를 처단한다.
홍순구 만평작가의 ‘동그라미 생각‘
홍순구 시민기자
입력 2026.05.25
[굿모닝충청 홍순구 시민기자]
민주주의의 가치는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지, 혐오를 즐기고 타인의 슬픔을 조롱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 사회의 공론장은 오랫동안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혐오의 자유'로 병들어왔다.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가 보여준 지난 행태들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국가적 참사의 희생자를 조롱하며, 고인을 모욕하는 행위는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나무를 밑동부터 갉아먹는 독버섯과 같았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일베와 같은 혐오 조장 플랫폼에 대해 폐쇄, 징벌적 손해배상, 과징금 부과 등 강력한 제재를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없지 않으나, 지극히 적절하고도 시의적절한 결단이다.
이 대통령의 이번 지시는 혐오를 '표현의 자유'로 착각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명확한 경고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근간으로 하지만, 그 자유가 타인의 존엄을 짓밟고 공동체의 근간을 파괴하는 흉기가 될 때 국가의 방어적 기제는 작동해야 한다.
이는 나치 범죄를 엄단하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독일의 '방어적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교훈과도 맞닿아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11월, 인종 차별과 혐오 표현을 '명백한 범죄 행위'로 규정한 바 있다.
이번 일베를 향한 경고는 그 일관된 철학의 연장선이다.
혐오를 통해 갈등을 부추기고 수익을 창출하는 왜곡된 구조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는 국가적 정화 의지의 표명인 셈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표현의 자유' 위축을 우려할 수도 있으나, 민주주의의 가치는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지, 혐오를 즐기고 타인의 슬픔을 조롱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데 있지 않다.
비판과 반박은 토론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근거 없는 왜곡과 패륜적 조롱은 공론장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다.
이제 공은 입법부와 사법부, 그리고 시민 사회로 넘어갔다.
'혐오 표현'의 기준을 정교하게 다듬고, 실효성 있는 처벌 장치를 마련하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시험하는 중대한 관문이 될 것이다.
이번 조치가 일회성 대책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극단주의 문화를 뿌리 뽑고 건강한 토론 문화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자유는 책임을 동반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https://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4658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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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6-05-25 00:02((꼭 한번은 읽어 봐야만 하는 좋은 글))
초과이익 성과급은 감춰진 임금이다
수정 2026.05.22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SK하이닉스 노사가 기존의 성과급 상한선을 폐지하고, 연간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기로 하자, 삼성전자 노동자들은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으로 명문화하고 상한선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다.
이에 반해 삼성 사측은 기존 초과이익 성과급 산정식의 경제적 부가가치 기준과 연봉 50% 상한선을 고집하면서 삼성전자 노사 갈등이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했다.
조선일보나 JTBC, MBC 같은 주류 언론은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노동조합 비난에 열을 올렸고,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단체나 인사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정말 조선일보나 MBC가 일부 전문가의 말을 선별해 전하는 것처럼 성과급은 임금이 아닐까?
회사는 뭐하러 성과급 체계를 만들었을까?
운 좋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로 했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임금은 노동자가 한 모든 노동에 대한 대가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성과급은 이 착시를 극대화한다.
노동자는 “내가 성과를 더 내서 회사가 이만큼 보너스를 주었다”고 믿지만,
실제 노동자가 성과급 100만원을 더 받기 위해 자본에 가져다 바친 잉여가치는 그 몇배에 달한다.
즉 성과급은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을 스스로 더 가혹하게 착취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동자 자신이 생산한 가치 일부를 돌려주는 ‘지연된 임금’의 정산 방식일 뿐이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성과급 인상 요구와 투쟁은 의도치 않게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요구로 전이되고 있다.
몫 없던 노동자들이 단결해 자신의 몫을 되찾아나가는 것만큼 탁월한 양극화 해소법은 없을 것이다.
단순한 시간 임금 시스템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감시하고 감독해야 쉬지 않고 일할 것이다.
반면 성과급 체제에서는 노동자들이 돈을 더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동 강도를 높이고, 스스로 휴식 시간을 줄이며, 연장 노동을 감내하기도 한다.
야근 금지에 반대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회사 실적이 나빠져 성과급이 0원이 될 때, 회사는 ‘성과가 없으니 분배도 없다’며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는 경기 침체나 경영 실패를 노동자에게 전가해 노동력 상품의 가격인 임금을 후려치는 것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같은 시간, 같은 강도로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나.
평소 중소 부품 하청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에 대해선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정의 구현자가 되어 하청 노동자들에게 무관심한 대기업 고임금 노동자들의 파업을 비난할 수 있을까?
너무 가혹한 잣대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은 초보 노조이고, 30년 넘은 민주노조도 하기 어려운 ‘연대’를 신생 노조가 하는 게 쉽진 않다.
더 많은 이해와 시간이 필요하다.
무노조 80년도 기다렸는데 그 정도 인내는 가능하지 않나?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성과급 인상 요구와 투쟁은 의도치 않게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요구로 전이되고 있다.
전무후무한 반도체 호황하에 수십만명의 하청 노동자는 노조를 만들고 단결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벌써 대리운전기사, 리노공업, 하나머티리얼즈 등 여러 일터에서 하청·플랫폼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고 있고, 이들에게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승리는 어두운 터널을 뚫고 지나갈 희망으로 보이기도 한다.
몫 없던 노동자들이 단결해 자신의 몫을 되찾아나가는 것만큼 탁월한 양극화 해소법은 없을 것이다.
https://weekly.khan.co.kr/article/202605221448001?nv=stand&utm_source=naver&utm_medium=portal_news&utm_campaign=newsstand_5C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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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6-05-24 23:55((꼭 반드시 읽어 봤으면 하는 좋은 글))
"가지 말라는데 왜 갔냐고?" 대통령의 '실용'을 배반한 관료들의 '사대'
[원동욱의 외교광장] 위성락 안보실장의 위험한 방관
원동욱 동아대학교 교수
기사입력 2026.05.21.
국격(國格)은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외교의 실용은 오직 당당한 주권의 토대 위에서만 꽃을 피운다.
이재명 대통령이 천명한 '실용적 주권외교'의 본질은 명료하다.
철저히 국익과 국민을 중심에 두고, 강대국의 맹목적 추종에서 벗어나 평화중견국으로서 대한민국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 안보의 사령탑을 맡고 있는 관료들의 행태는 대통령의 통치 철학과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것을 넘어, 국가 존재의 이유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최근 공해상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국민 강제 구금 사태를 대하는 국가안보실과 외교부 관료들의 태도는 그 서글픈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초법적 폭거 앞의 침묵, 그들은 누구의 대변인인가?
가자 지구로 향하던 민간 구호선단이 공해상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나포되고 우리 국민을 포함한 활동가들이 억류된 사건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자 초법적 폭거다.
심지어 이스라엘 극우 장관이 손목이 묶인 민간인들을 무릎 꿇려놓고 조롱하는 영상을 공개했을 때, 국제사회마저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대한민국 외교 당국의 첫 일성은 충격적이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관료들은 국무회의 등 공식 석상에서 "이스라엘이 관할권을 주장한다", "해상 봉쇄는 합법적이라는 반박이 있다"라며 침략국의 해명을 그대로 읊조렸다.
주권 국가의 안보수장이 자국민의 안위보다 이스라엘 정부의 변명을 먼저 대변하고 나선 것이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해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미국과 동맹국의 눈치 보기에 급급해 "검토하겠다", "복잡하다"라는 맹탕의 답변으로 일관했다.
논란이 거셀수록 당당한 국가적 입장을 세우는 것이 안보실의 임무이거늘,
이들은 중립이라는 미명 하에 무책임한 '방치'를 택했다.
역사의 거울 : 곽개(郭開)의 사익과 기철(奇轍)의 사대
강대국의 위세에 기생해 주체적 판단을 미루고 국가의 자존을 무너뜨리는 굴종 외교는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망국의 전조(前兆)와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다.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침략에 직면했던 조(趙)나라의 관료 곽개(郭開)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사리사욕과 권력 유지에 눈이 멀어 강대국인 진나라의 위세에 편승했다.
조나라를 지키던 유일한 희망인 명장 이목(李牧)을 모함해 죽임으로써 국가 안보의 핵심 보루를 스스로 허물었다.
침략국의 요구에 유약하게 굴복하며 자신들의 안위만을 보전하려 했던 결과는
조나라의 비참한 멸망이었다.
우리 역사 속 고려 말의 기철(奇轍) 일족 역시 마찬가지다.
원나라 황실의 권위에 빌붙어 권세를 부렸던 이들 친원파 가문에게 국익과 백성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상국(上國)의 눈치만 보며 고려의 자주 군사권과 주권을 저당 잡았던 그들의 사대주의는 국가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만약 공민왕의 과감한 결단과 대대적인 인적 숙청이 없었다면,
고려의 국체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과거 나라를 위태롭게 했던 사대주의자들이 보인 '기준 없음'과 지금 위성락 실장이 보여주는 '책임 회피'는 본질적으로 같은 궤를 그리며 대한민국을 외교적 미아로 만들고 있다.
"가지 말라는데 왜 갔나"라는 망언, 국가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자국민을 대하는 안보실의 얄팍한 인식이다.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정부가 가지 말라고 한 위험 지역에 갔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논리는 국가가 스스로 보호 의무를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국가의 국민 보호 의무는 '조건부 계약'이 아니다.
국민이 어떤 선택을 했든, 타국에 의해 부당하게 자유를 유린당했다면 조건 없이 항의하고 구출에 나서는 것이 주권 국가의 헌법적 의무다.
단지 위험 지역에 갔다는 이유로 보호 수준을 낮춘다면, 향후 전 세계 가혹한 비즈니스 현장과 분쟁 지역에서 국익을 위해 뛰는 우리 국민과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정부는 도대체 어떤 명분으로 그들을 지킬 것인가?
위성락 실장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외교적 신중함이 아니라
국가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위험천만한 구조적 무능이다.
대통령의 단호한 원칙, 이제 안보 라인의 대대적 인적 쇄신으로 답하라
"원칙대로 해요.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요."
어제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 등에서 보여준 이 단호한 한마디는 평화중견국으로서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이자, 국민 주권의 원칙을 세우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강대국의 눈치나 보며 주눅 들어 있던 과거의 약소국이 아니다.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문화적 위상을 갖춘 평화중견국이다.
관료라면 마땅히 대통령의 실용적 주권외교 노선에 발맞춰 당장 이스라엘에 강력히 항의하고 우리 국민의 무조건적인 석방을 이끌어내야 했다.
외교와 안보는 불확실성을 핑계로 판단을 미루고 책임을 회피하는 영역이 아니다.
"모르면 미루고, 불편하면 피하는" 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대한민국의 국격은 추락하고 다음에도 똑같은 외교 참사가 반복될 것이다.
위성락 안보실장의 즉각적인 퇴출은 과도한 요구가 아니라,
너무 늦은 최소한의 조치다.
대통령은 '실용'을 배반하고 '사대'와 안일에 빠진 외교·안보 라인을 대대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고 강대국의 눈치만 보는 외교는 외교가 아니라 구걸이다.
주권자의 명령에 당당히 부응하는 주체적 외교·안보 체제를 새로 구축하는 것만이 대한민국의 자존과 국익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6052113361373674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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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6-05-24 21:54김대기·윤재순 구속, 대통령실이 범죄 소굴이었나
입력 2026.05.24
김대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윤재순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윤석열 정부 대통령 관저 이전 과정에서 수십억원대 행정안전부 예산을 전용한 혐의로 지난 22일 구속됐다.
윤창영 2차 종합특검팀이 피의자를 구속한 첫 사례다.
이 혈세는 김건희씨 영향력에 힘입어 관저 공사를 따낸 21그램으로 흘러 들어갔다. 대통령실이 윤석열 부부의 사익 추구를 조직적으로 도운 범죄소굴은 아니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윤석열은 대통령실·관저 이전 계획을 발표하면서 전체 비용이 496억원이라고 했다. 관저 이전 비용은 약 25억원, 그중 관저 내부 인테리어 예산은 14억4000만원이었다.
그러나 이후 인테리어 공사를 맡은 21그램이 약 41억2000만원짜리 견적서를 냈고, 대통령실은 아무런 검증도 하지 않고 당초 예산의 세 배가 넘는 견적서대로 공사를 진행하게 했다.
이렇게 늘어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김 전 실장과 윤 전 비서관이 행안부를 압박해 예비비 28억원을 전용했다고 특검팀은 보고 있다.
특검팀은 행안부를 압수수색해
‘예비비를 더 만들기 어렵다’
‘대통령비서실에서 지시한다’
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도 확보했다고 한다.
대통령실·관저 이전 의혹은 윤석열 부부가 벌인 국정농단 의혹의 대표적 사례나 앞서 김건희 특검팀은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윤창영 특검팀이 김 전 실장 등을 구속한 건 의미가 있다.
김 전 실장은 당시 대통령실 2인자였고, 윤 전 비서관은 윤석열의 최측근으로 꼽혔다.
21그램 전 직원 유모씨는 지난달 13일 법정에서 “김 여사로부터 수주받게 된 공사이니 잘 끝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고 했다.
관저에 다다미방·편백 욕조를 추가한 것도 김씨 요구였다고 했다.
그런 식이었으니 공사 비용이 고무줄처럼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윤석열 부부가 예산 전용을 지시했다고 의심할 만한 정황이다.
이외에도 현대건설의 관저 내 골프 연습시설 신축비용 대납 등 의혹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 때 대통령실·관저 이전 의혹을 감사한 감사원은 종합건설업 면허가 없는 무자격 업체 21그램이 인테리어 공사를 맡게 된 경위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일부러 눈을 감은 것이고, 의혹을 규명하는 감사가 아니라 의혹을 덮는 감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검팀은 윤석열 부부의 예산 전용 지시 여부부터 감사원의 ‘봐주기 감사’까지 모든 의혹을 낱낱이 규명해 관련자들을 처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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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6-05-24 21:39스타벅스코리아의 빚
수정 2026.05.24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스타벅스코리아 불매운동이 거세게 확산되고 있다.
지난 5월18일 오전 10시, ‘탱크데이’라는 슬로건이 쓰인 텀블러를 출시한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다.
대통령과 행정안전부 장관까지 나서 유감을 표명했고 정부 행사에서는 앞으로 스타벅스 상품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나왔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신세계그룹은 대표이사를 해임했고 최고 결정권자인 정용진 회장도 직접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른바 ‘탈스타벅스(탈벅)’ 운동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스타벅스 앱을 지우고 회원 자격을 반납하거나, 선불카드를 환불받고 매장에 발길을 끊었다는 인증이 SNS에서 퍼져가고 있다.
친지 중 애용자가 적지 않아 생일이나 감사할 일이 있을 때면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주고받는다.
스타벅스에서 판매하는 여러 가지 상품들, 텀블러나 컵은 말할 것도 없고 한정판 다이어리 같은 굿즈도 눈여겨보곤 한다.
아름답고 견고한 스타벅스의 상품들은 소비자의 마음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장 세련되고 감각적 폭력으로
광주·박종철 열사의 고통을 조롱
그럼에도 스벅이 필요한 사람들
민주주의 운동에 진 빚 갚았으면
그렇기에 ‘스타벅스 사태’를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세련된 디자인으로 설계된 공간에서 ‘프렌들리’한 서비스를 받으며 대화를 나누거나 작업을 하기에 이만큼 만족스러운 장소는 흔치 않다.
노트북 사용자들이 늘자 콘센트를 늘리고 공부하고 글 쓰는 이들을 위해 작업 데스크를 만들었다. 스타벅스는 노동자의 마지막 땀방울까지 쥐어짜는 쿠팡과는 분명 다른 기업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첫째, 이번 5·18 탱크데이 텀블러 판매 사건은 탱크의 의미가 무기가 아니라 물탱크였다는 해명을 감안하더라도 결코 납득할 수 없다.
5월18일 아침 시민들이 ‘책상에 탁, 탱크데이, 5/18’이라는 문구를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에게 먼저 떠오른 광경은 군복 입은 전두환, 탱크가 밀고 들어가는 광주, 물고문으로 숨진 대학생 박종철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우연이라고만 보기 어려운이 잔혹한 상징 폭력 앞에서 시민들은 “제정신인가?”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번 마케팅의 실무자와 책임자들 중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사건의 원인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
둘째, 스타벅스 사태의 이면에는 정용진 회장의 정치적 행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번 사태의 폭발성은 정 회장이 일으켜 온 소동(騷動)의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정 회장은 그동안 인스타그램 등 온라인에서지만 소비산업을 이끄는 기업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해왔다.
‘멸공’을 비롯해 일일이 언급하기도 민망한 행동은 물론, 극우 정치 집단의 행사에 적극 참여해 주목과 비판을 받았다.
윤석열 같은 극우 인사들은 그에게 맞장구쳤지만, 스타벅스와 이마트 불매를 주장한 시민들도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스타벅스 사태를 ‘스타벅스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스타벅스코리아의 최고 결정권자인 정용진 회장의 일탈적 행동 앞에서 그동안 쌓여왔던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것이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정 회장의 사과문 중 ‘저를 포함한 임직원의 역사교육과 반성’ 등등의 표현에서
가장 반성해야 할 사람은 정 회장이다.
셋째, 그럼에도 스타벅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친구를 만나고 노트북 작업을 하기에 그만한 장소를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지금 스타벅스를 찾는 사람들이 불매운동을 조롱하거나 훼방놓으려는 이들만은 아닐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고객들을 위해 진심을 다하는 직원들의 일자리도 지켜져야 한다.
그러므로 스타벅스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행위들은 중지되어야 한다.
탱크데이 마케팅에 전두환을 넣어 공격하는 영상을 제작·배포하는 행위는 2차 가해다. 스타벅스코리아 회사 차원에서 2차 가해 행위에 대한 법적 처벌을 요청하고 정치인들에게 경고를 보냄으로써 사태 해결의 의지와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스타벅스 사태의 심각성은 가장 세련된 감각적 아름다움과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저열한 조롱이 결합될 때, 폭력적 쾌감이 얼마나 극대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만큼 침투력은 강하고 유해하며 위험하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기업 활동의 자유를 가능하게 한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스타벅스코리아가 민주주의 운동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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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6-05-24 21:35무투표 당선, 이대로 좋은가
수정 2026.05.24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
헌법 24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선언한다. ‘선거권’이란 국민의 기본권인 참정권의 대표적인 것으로 각종 공무원을 선출하는 권리를 말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혈액과 같은 필수 역할을 한다.
지난 1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6·3 지방선거에서 단독 출마나 정수 미달 등의 이유로 전국 후보자 513명이 무투표 당선됐다고 밝혔다.
특히 수도권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시흥시장이 투표 없이 결정됐다.
51만 수도권 시장 선거에서 유권자가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무투표 당선자는 ‘공직선거법’에 따라 선거운동을 중지해야 하며, 선전물 및 시설물을 철거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헌법상 주어진 선거권은 박탈당했으며, 주민들은 당선자와 만날 수도 없어 알권리를 침해받는다.
향후 자질 문제와 책임성도 문제 될 수 있다.
무투표 당선자의 법률 규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헌법 67조는 “대통령 후보자가 1인일 때에는 그 득표수가 선거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이 아니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대통령은 무투표 당선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찬반 투표를 해서라도 33.3% 이상 지지를 얻도록 하고 있다.
국회의원 및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는 무투표 당선을 인정한다.
2016년 10월27일, 헌법재판소 위헌 확인 결정이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인지에 대해 “지방자치단체의 장 선거권을 지방의회의원 선거권, 나아가 국회의원 선거권 및 대통령 선거권과 구별하여 하나는 법률상의 권리로, 나머지는 헌법상의 권리로 이원화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결정해 기본권으로 인정했다.
무투표 당선이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여부는 “선거에 소요되는 여러 절차를 간소화하여 행정적 편의를 도모하고 선거비용을 절감하는 등 선거제도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것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권을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하면서 무투표 당선이 기본권 침해는 아니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결정이다.
조용호 당시 헌법재판관은 소수 의견으로 “무투표 당선을 통하여 주민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채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가지는 대표성은 대단히 취약하게 되어 지방자치 제도의 본질과 정당성까지 훼손할 위험이 있다”며 선거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냈다.
향후 헌법재판소 결정이 바뀔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소선구제를 운영하는 국가들은 무투표 당선자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미국 선거 전문 데이터베이스 발로피디아(Ballotpedia) 분석에 따르면 2022년 11월8일 미국 46개주에서 총 6278석의 주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중 2559석(40.8%)이 무투표 당선이었다.
일본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다.
주목할 곳도 있다.
스코틀랜드는 2007년 지방선거부터 단기이양식 투표(STV·Single Transferable Vote)라는 선거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 선거제도는 유권자가 후보자 이름 옆에 1순위, 2순위, 3순위 등으로 선호도를 표시한다. 1순위 표가 일정 할당량을 넘으면 당선되고 당선자의 남은 표는 해당 유권자가 2순위로 선택한 후보에게 이양된다.
이 방식을 채택한 후 1인 선거구제에서 자주 발생하던 ‘무투표 당선’이 사라지고, 선거구당 평균 후보자 수가 늘어나 경쟁이 활발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소수정당 후보자들도 당선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번 지방선거가 끝난 뒤, 무투표 당선자를 없애기 위해 정치권은 제도개혁에 나서야 한다.
이를 방치하면 유권자들의 무관심이 늘어나고 지방자치의 정당성도 무너질 위험성이 있다. 달콤한 무투표 당선은 정치의 기반을 썩게 만드는 당뇨병적 기능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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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6-05-24 21:31오이의 덕을 찬양함
수정 2026.05.24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입하가 휙 지났다.
오이의 덕은 나날이 찬란하다.
한국인의 여름날 오이 사랑은 유서 깊은 바다.
성균관에 학적을 두고도 임금의 사상 검열과 글쓰기 간섭에 아랑곳하지 않다가 정조에게 찍혀 퇴학당하는 데 이른 이옥(李鈺·1760~1813) 또한 일찍이 오이를 추앙했다.
이옥은 제 집 앞 남새밭에 해마다 오이 모종 60~70주를 심어 가꾸었다.
덕분에 여름날의 먹을거리가 해마다 넉넉했다.
식탐으로 다가 아니었다.
살림살이의 감각이 있었다.
첫물, 두물, 세물, 끝물 오이를 따며 이런 감각을 드러냈다.
“시거나 짜거나 날로 무치는 나물이나 익혀 먹는 음식이나 모두 오이로 된다(酸醎生熟, 皆瓜也)”.
늘 오이국·오이김치·오이나물·오이장김치를 먹었으니 칼질에도 예민했다.
채칠 때에는 네모진 편을 내 채치거나 돌려 깎아 채쳤다(菜或方或圓).
국거리는 대개 말굽 모양으로 썰었다(羹多馬蹄削).
‘말굽썰기’라니? 현대 조리 용어로는 ‘반달썰기’일 테다.
속 파고 반달썰기 해보시라.
정말 말굽꼴이 난다.
요리사가 오이에 구사하는 열두 가지 이상의 칼질까지는 아니어도, 막채썰기·어슷썰기·깍둑썰기 이상의 칼질에 유념한 이가 이옥이다.
그의 눈에 오이 과(瓜)는 여덟 팔(八) 둘이 겹친 형상이었다.
본 김에 너스레도 떨었다.
“내가 지금 팔팔육십사, 64종의 오이 반찬을 해 먹으니 또한 부자 아니냐(余今食八八六十四種, 不亦富哉)!”
잘 씻어 소금물에 살짝 절인 오이는 껍질째 먹는, 소주에 어울리는 안주였다.
큰 놈은 오이소박이·오이김치·오이지 따위에 마침 맞았다.
노각은 노각대로 별미였다.
껍질 벗기고, 시어진 속을 바른 노각은 “더위를 물리치는 생채가 되었다(爲避暑菜).”
그러고 보니 한국인의 일상에서 노각은 전보다는 덜 흥성한 듯하다.
덩달아 노각채·노각무침·노각김치·노각국도 살짝 뒤로 물러선 듯하다.
잠깐 품종을 돌아본다.
모든 풋오이가 다 노각으로 성숙하지는 않는다.
노각으로 익는 오이는 한반도 재래종이다.
오이의 한자어 가운데 하나가 ‘황과(黃瓜)’다.
익어 누렇게 되다, 한반도 재래종은 그랬다.
그러다 현대 한국인은 취청과 다다기를 먹게 되었다.
취청은 짙은 청색이다.
그 가운데 솜털 같은 가시가 덮인 놈이 가시오이고 가시가 없는 놈이 청오이다.
다다기는 풀빛이 옅다.
그 가운데 흰빛이 우세한 놈이 백오이다.
즙 팡 터지고 향 훅 끼치기로는 역시 취청이고, 더구나 가시오이다.
날로 먹거나 냉국, 물회 등에는 취청이다.
소박이와 오이지에는 덜 무르는 다다기가 좋다.
국을 끓이거나 구울 때에도 그렇다.
끓여? 구워? 또한 이어지고 있는 식생활의 한 자락이다.
누군가는 오이전을 부치고 오이를 굽고 있다.
오이로 채수를 내고 국을 끓이고 있다.
오이무름도 오이선도 그저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에 갇힌 유물만은 아니다.
옛글을 읽다가 오늘로 돌아온다.
한국인, 지금 오이를 잘, 제대로 쓰고 먹고 있나.
현대 한국어는 오이에 어떤 이야기를 남기려나. 오이의 덕을 다시 떠올린다.
수박은 계절의 왕자를 자처할 만하다.
복숭아는 향으로 한철을 뒤흔들 만하다.
오이는 다르다.
그저 입 다물고 늦여름까지 열매 맺으며, 상하도 귀천도 없이 모두의 밥상에 함께할 뿐이다.
달리 무슨 말을 더할까.
먼저 이 말 한마디를 해야겠다.
고맙다, 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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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 (@tradbred)2026-05-24 21:25위험한 정치적 효능감
수정 2026.05.24
엄기호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노무현재단 이사인 조수진 변호사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식이 열리는 봉화마을에 일단의 일베 무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들은 봉화마을 곳곳을 일베를 상징하는 티셔츠를 입고 손가락 표시를 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 손가락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추모객이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지만,
이 모든 게 자기들을 조롱하러 온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고 호의를 보이는 걸 비웃기 위한 ‘작전’이다.
이를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티셔츠를 입고, 어떤 손가락 모양을 하고 돌아다니더라도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데 제재할 방법이 없다.
나가라고 말하고 채증 사진을 찍는 것 정도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게 노리는 점이다.
그저 ‘어그로’를 끌어 관심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시스템과 상대가 철저하게 무력화되는 것, 이 부분이 효능감이 극대화되는 지점이다.
이를 위해 먼저 이들이 간파한 것이 있다.
사회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법과 달리 사회는 ‘믿음’이다.
있다고 믿는다면 마법과 같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없다고 무시하면 아무런 힘도 없다. 오직 법만 실질적 힘이 있을 뿐이다.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적 압력 따위는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이들은 법의 한계에 점점 다가서는 방법으로 과감해진다.
혐오 발언이 대표적이다.
금지된 구역의 어디까지 다가서서 몇 데시벨까지 스피커 볼륨을 올리면 법적으로 제재할 수 없는지를 ‘실험’하고 거기에 최적화해 행동한다.
이들에게 사회는 사회적 압력을 무력화하고 법의 한계를 실험하는 실험장에 불과하다.
일베, 법 한계 활용해 사회 무력화
왜 저런 행동을 즐기는가?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수준에서의 ‘쾌락’이 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쾌락이다.
‘진지’하게 최적화를 추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쾌락이다.
한계에 근접하는 것, 가장 가까이 다가서려는 최적화는 효율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미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미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 가장 황홀해진다.
어그로의 강도뿐만 아니라 정밀함이 중요하다.
강도만 높고 무딘 행동은 그저 추한 것에 불과하다.
‘어그로’에도 나름의 미학이 있다.
두 번째 쾌락은 세상에 대한 정치적 효능감이다.
정치적 효능감은 세상을 향한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중에서도 세계를 ‘정지’시키는 것만큼 효능감을 주는 것이 없다.
현대사회는 법최소주의를 따른다.
법의 개입과 형벌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적용한다.
사회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이를 역으로 이용해 사회의 자율성을 무시해버리면 법의 공백 지점에서 세계를 정지시켜버릴 수도 있다.
세계가 정지돼버리는 것보다 더 큰 정치적 효능감은 없다.
내 앞의 상대가 무력해져서 좌절하는 것은 더 직접적인 정치적 효능감이며 쾌감이다. 상대가 더러워서 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피할 수도 없다.
위에 나온 봉하마을 직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면서도 사진 채증을 하며 끝내 따라다녀야만 한다.
상대가 무력화될수록 정치적 효능감은 극대화되며 그의 무력과 좌절, 슬픔은 결국 나의 쾌감이 된다.
세 번째는 ‘사회적’ 존재감이 주는 쾌감이다.
조수진 변호사는 저들이 특정 사이트에 올릴 사진 인증 챌린지를 수행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 인증 챌린지에 가장 엽기적이고 과감하게 도전한 사람에게는 무리 안에서 ‘명성’이 주어진다.
무리(=부족)에서의 명성이라는 사회적 효능감 역시 극대화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족을 통해 ‘사회적’ 존재감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를 파괴하며 부재하게 만든다.
힘의 법과 존재감의 부족, 그리고 미학적인 나. 여기에 우리가 ‘알던’ 사회가 작동하고 들어설 여지는 이제 거의 없다.
내가 이렇게 처신하면 상대는 저렇게 응답해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상호작용망으로서의 사회는 없다.
오히려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사람들은 사회적 반경을 더욱 최소화할 것이다.
법을 최소화한 이유가 사회를 활성화하기 위함이었지만, 반대로 법이 내어준 자리에서 악당들이 활개를 치며 사회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법은 혐오에 맞서는 행동 권장해야
이 모든 것이 저들에게 황홀한 효능감·쾌감을 준다.
그렇다고 법에 모든 것을 맡기며 법최소주의를 철회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회를 법으로 대체해 경찰국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저들이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시민들이 사회를 파괴하는 차별과 혐오의 행동에 맞서 저지하는 사회적 행동을 보호하고 권장하는 입법과 행정이다.
국제 인권 규범은 언제나 보호(protection)와 권장(promotion)이 초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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