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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bred님의 로그 입니다.

좋은글 하나라도 놓칠까봐 노심초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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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8-03 19:47
    [이삼남 이야기] 입시가 낳은 청년 보수화
    전찬범 서울대 재료공학부
    발행 2025-08-03

    편집자주
    ‘이삼남’은 ‘이삼십대 남성’의 줄임말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이삼남 이야기’는 2030세대 젊은 남성 필진들이 번갈아 쓰는 칼럼입니다. 청년 이슈와 온라인 여론 등을 주제로 한 달에 두 번 게재 예정입니다. 혐오와 갈라치기, 무관심과 오해를 넘어 건전한 공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입시 공화국.
    한국의 불명예스러운 별명 중 하나이다.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대학·학과는 서열화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대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의 서열화로 이어진다.
    끊임없는 입시 경쟁에서 실패자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공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능의 고난도 문제가 공교육에서 배우는 수준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초·중·고등학생의 사교육 참여율은 78.5%에 달한다. 물론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남들이 다 하는 걸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빨리 시작하고, 더 많이 해야 한다.

    한국 보건사회연구원의 '2023년 아동종합실태조사'에 의하면
    0~5세의 시간제 학원 이용률은 2018년 4.7%에서 13.5%로 급증했다.
    아동기 전체를 입시 경쟁에 쏟아붓는 시대가 온 것이다.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삶의 대부분을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미명 아래 학원에서 보내면서, 사교육은 단순히 학업 성취를 위한 수단을 넘어 청소년들의 인격과 세계관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학습의 과정은 곧 인간 형성의 과정이기에, 입시를 위한 교육이 곧 인격의 뼈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입시는 구조적으로 경쟁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명문대, 인기 학과의 정원은 한정되어 있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단순히 내가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타인을 연대와 협력의 대상보다는, 경쟁과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경쟁은 신성한 것이기에,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은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환원된다.

    2021년 진행된 KBS 세대인식 집중조사에서, 청년 남성들은 기성세대와 반대로 주관적 계층 인식이 높아질수록 "기회가 되면 내 것을 나눠 타인을 도울 것이다"라는 질문에 더 인색하게 대답했다.

    소득이 높아질수록 사교육에 대한 투자가 급증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사교육에 더 많이 노출될수록 '사회적 지위는 노력의 차이에 의해 형성된다'라는 신념을 강하게 내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진보적 정책은 노력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빼앗아 노력하지 않은 이들에게 제공하는, 부조리로 인식된다.

    이러한 세계관은 입시에서 성적과 등수를 통해 자신과 타인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구조에서 기인한다.
    성적은 단순한 수치가 아닌,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이를 통해 타인을 서열화하는 태도를 체화한다.

    자연스레 자신보다 못한 이들은 멸시하며,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느끼는 이중적 심리가 자리 잡는다.

    이는 소위 SKY, 명문대로 분류되는 대학의 학생들조차 자신들을 '의떨'이라고 자조하는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입시에서 높은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의대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실패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입시 중심의 교육은 또 다른 문제점을 내포한다.
    암기와 문제풀이 중심의 학습은 비판적 사고의 형성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사회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경제학 논리들이 현실 경제에서 적용될 수 있는지, 철학자들의 주장에 모순점은 없는지 고민하는 것은 성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걸 고민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외우고 한 문제라도 더 푸는 것이 이득이다.

    이 과정 속에서 '의심하지 않는 태도', '질문하지 않는 습관'은 자연스럽게 내면화된다.

    게다가 한국의 교과서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긍정하는 보수적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비교우위의 논리는 불평등 무역과 신제국주의를 지워버리며,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은 진보세력을 국가 전체의 장기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존재로 만든다.
    1980~90년대에는 대학 내 운동권의 존재가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장을 제공했지만, 현재는 그러한 장치가 없다.

    결과적으로 청년 세대는 대안적 세계관에 접근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보수의 논리를 내면화하게 된다.


    이러한 입시 기반의 청년 보수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정서적 호소나 도덕적 당위에 기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해답은 청년 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KBS의 조사에서, 청년 여성은 청년 남성과 달리 주관적 계층 인식이 높아질수록 분배에 대한 인식이 완만하게 개선되었다.

    차이의 원인은 페 미 니즘이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페 미 니즘의 논리는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직면하는 어려움들의 원인을 개인이 아닌 유리천장과 같은 사회 구조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 .
    즉, 청년 남성들은 기성세대의 마르크스주의와 청년 여성의 페 미 니즘과 같이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계기를 접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보수화 현상을 극복하려면
    청년 세대가 실제로 문제의식을 느끼는 이슈(예를 들어 연금개혁, 주거비용, 취업난 등)를 중심으로 진보 진영이 기존 보수 담론을 압도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서사를 개발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보급해야 한다.

    논리적 정합성과 현실 분석의 정밀성을 갖춘 담론만이, 보수화된 청년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vop.co.kr/A000016764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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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8-03 02:29
    외롭지 않은 뉴스룸을 위하여
    [이슬기의 미다시]
    기자명 이슬기 프리랜서 기자
    입력 2025.08.02

    한 달 간 대학 학보사의 기자들과 기사 작성 수업을 했다.
    그들은 고민이 많았다.
    “기사가 게재되기 전에 인터뷰이가 보여 달래요.”,
    “기사 방향을 먼저 알려줘야 통계를 주겠다는데 어떻게 하죠?”
    같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기자 초년병 때 나도 궁금했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물어보 지 못한 것들이기도 하다.

    수직적 위계가 두드러지는 편집국 내에서, 그런 걸 선배들에 물어보면 왜인지 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 수업은 테마를 ‘저널리즘 윤리’로 잡았다.
    한국의 기자들이 번역한 책 을 같이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뉴욕타임스 가이드라인’의 절반 이상은 소속 기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취재원과 연인 관계를 맺을 경우 그 관계를 기준감독 에디터라 불리는, 윤리강령 준수 여부를 판단하는 에디터에게 알려야 한단다.
    기자의 사생활까지 규율한다는 것이 놀랍지만, 생각해보면 취재원과 사적인 관계라는 것은 편파 보도에의 위험이 있을 수 있기에 이해가 된다.

    취재원과 금전적으로 얽히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도 부문별로, 분야별로 다양했다.

    뉴욕타임스의 기자들은 입사할 때,
    자신이 맡게 될 업무와 관련한 금융자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증명해야 한다.
    또한 취재 대상이나 추후 취재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 회사, 기업, 산업에 대한 주식을 소유할 수 없다.

    전·현직 기자 20여 명이 취재 중 얻은 기업 정보로 주식을 사고, 기사를 쓴 후 팔아서 수익을 챙겼다는 혐의를 받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상기했을 때,
    뉴욕타임스의 이같은 규율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100페이지가 넘는 가이드라인을 보면서, 좀 부러웠다.
    생각해보면 나는 기자 일의 대부분을 ‘해도 되는지’ 여부를 고민하는 데 썼다.

    고민의 마침표는, 내가 아니라 마감이 찍었다.
    혼자 끙끙 앓다가 마감이 닥치면, 더 이상 고민할 여유도 없이 ‘지르는’ 형태로 기사는 씌어졌다.

    ‘나몰라라’ 하는 마음 반, ‘데스크가 적절히 걸러주겠지’ 하는 마음 반이었다.

    그러나 대개는 걸러지지 않은 채 송고가 됐고, 그 기사의 바이라인은 물론 ‘나’였다.
    한꺼번에 여러 개의 기사를 보는 데스크는, 나보다 더 고민할 시간이 없었을 거다.


    그래서 함께 보도 윤리를 고민하는 풍토는 늘 내게 아쉬운 지점이었다.
    물론, 내가 소극적인 탓도 컸다.

    그러나 비슷한 고민들을, 다른 기자들도 더러 하고 있었다.

    2020년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사건이 폭로된 직후, 피해자를 두고 ‘피해 호소인’이라는 악의적 지칭이 시작됐을 때 많은 언론이 이에 동조했다.
    나는 대부분 그것이 고의라기보다는, 긴박한 상황에서 비롯된 실수에 가깝다고 본다. 당시의 현장 기자들은 대부분 사회부 소속 저연차였고, 뉴스룸 내에서 적극적인 논의를 끌어내기 힘든 처지였다.

    한국의 뉴스룸에는 뉴욕타임스처럼 ‘기준감독 에디터’가 없다.
    젠더 데스크도 극히 일부 언론에만 있다.

    물론 한국 언론사에도 윤리 강령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자협회 홈페이지에는 윤리 강령뿐 아니라 자 살, 성폭력 범죄, 재난보도 준칙 같은 상황별 가이드라인이 있다.

    그러나 대개는 선언적이고 포괄적이다.
    지난해 여성가족부와 한국기자협회가 함께 발간한 ‘성희롱·성폭력·스토킹 등 사건 보도 참고수첩’은 내용도 많거니와 상황별 예시를 다루고 있어 실용적이다.
    언론노조 성평등위원회가 2020년에 만든 ‘미디어를 위한 젠더 균형 가이드’도 참고할 만하다.


    문제는 이런 양질의 자료들이 현장에서 활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홍보도 덜 됐겠지만, 보도 윤리를 강화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부재한 탓이다.
    ‘참고수첩’에서 사용 자제를 권고한 성폭력 사건 기사의 표현들은 요즘도 자주 기사의 제목과 본문에 등장한다.

    가해 행위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는 표현 ‘몹쓸 짓’은, 아직도 수많은 성폭력 사건 기사의 제목이다.

    아내를 대상으로 한 성적 촬영물을 불법 유포한 혐의를 받는 국민의힘 대전시당 당직자의 사건을 전하면서는, 범행 수법을 지나치게 자세히 헤드라인에 적은 기사도 많다.


    더 나은 언론과 언론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윤리강령이 필요하다.
    기자협회나 언론노조가 만든 가이드라인에 대한 숙지도 좋다.

    그러나 각 언론사마다 사정에 맞춰 구성원들이 직접 만든 윤리강령이 더욱 절실하다.

    기자의 사생활과 소셜미디어 활용까지 규율하는 뉴욕타임스처럼,
    분야별·부문별로 길고 자세할수록 좋다.
    그렇게 오랜 논의의 결과로 만든 가이드라인을, 구성원들에 교육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보도 윤리에 관한 고민이,
    현장 기자 한 사람의 몫으로만 돌아가는 것을 막는 일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데스크와 함께 숙의할 수 있는 토대를 고민해야 한다.
    함께 머리를 맞대는 수 밖에 답이 없다고, 그날의 수업은 결론을 맺었다.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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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8-03 02:04
    노란봉투법 통과 임박하자 ‘공포마케팅’ 반복하는 보수언론

    [비평] “노란봉투법 포비아” 역설적으로 잘 뽑은 제목?
    “엄청난 혼란 발생할 것처럼 보도, 그 자체로 의도 있는 것”
    기자명 김예리 기자
    입력 2025.08.01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조법 2·3조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가시화하자 재계와 보수언론 중심으로 극단적 표현을 앞세운 반대 여론이 전해지고 있다.

    거듭된 ‘팩트체크’ 보도가 나왔음에도 근거 없는 ‘공포마케팅’이 계속된다는 노동계와 학계 지적이 나왔다.

    지난달 30일 동아일보 1면 기사 제목에 “노란봉투법 포비아”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기사는 노조법 개정안으로 인해 “기업들이 패닉에 빠졌다”며 업계에서 “(하청 업체 수에 맞춰) 100번씩 교섭하라는 얘기냐”는 불만이 나온다는 내용이다.

    중앙일보도 같은 날 유사한 주장을 ‘팩트체크 Q&A’ 형식으로 소개했다.
    “원청이 연간 수백 번 교섭할 수도 있나”라는 질문에 “맞다”는 답변을 달았다.
    조선일보는 이날 1면 에서 노조법 개정안을 ‘반기업법’ 중 하나로 꼽았다.

    노사교섭 100번? “원청이 실질적 근로조건 정하는 범위에 한해 교섭”

    그러나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교섭만 하다 시간이 지날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지적이 일찍이 제기돼왔다.

    노조법 개정안은 2조 ‘사용자 정의’ 규정에서 원청이 하청 노동자 근로조건을 실질·구체적으로 지배할 경우에만 사용자로 인정하도록 했다.
    하청 노조가 마구잡이로 난립하기도 어렵고, 더구나 한국은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를 두고 있어 ‘수백 번 교섭’이 벌어질 가능성이 낮다는 해석이 중론이다.

    정기호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미디어오늘에
    “원청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근로조건을 정하는 경우에만, 해당 범위에 한해 교섭 의무를 진다”며 “사내하청의 경우 대부분 노동조합이 하나이기에 원청 기업과 1대1 교섭 가능성이 높고, 하청업체 내에서는 현행 제도에 따라 창구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정 원장은 교섭 우려를 언급한 보도가 반복되는 것을 두고
    “기업 입장에선 노동조건을 구체적으로 지배하면서도 상응하는 책임을 회피해오다가, 없던 혹을 하나 붙이는 셈이니 당연히 싫을 것이다. 그러니 정치권과 언론에 전방위 여론전을 벌이는 셈”이라 주장했다.


    “하청노조서 극한대립 반복되는 이유, 원청의 대화 거부”

    노란봉투법에 “노조가 불법적 행위를 하더라도 책임을 물을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는 사실상의 허위 주장도 거듭 확산하고 있다.
    그 사례로 동아일보의 지난달 30일 기사를 꼽아볼 수 있다.

    이는 노조법 개정안 3조2항 “사용자의 불법행위에 대해 노조 또는 근로자 이익을 방위하기 위해 부득이 사용자에게 손해를 가한 노조 또는 근로자는 배상 책임이 없다”는 대목을 왜곡·과장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노란봉투법이 통과돼도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은 가능하다.
    다만 개정안은 기업이 괴롭힘 목적으로 거액의 보복성 손배소를 거는 일을 방지하도록, 개별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 비율을 구체적 기준에 따라 정하게 했다.

    노동 현장에선 노조법 개정으로 교섭이 제도화하면 오히려 극단적 노동쟁의가 줄어들 거라 전망한다.
    2022년 도크 일부 점거파업을 벌인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의 이김춘택 사무장은 “극단적 형태의 투쟁과 대립은 일반 노조에선 잘 발생하지 않는다. 노사관계가 제도화돼 있지 않은 하청노조에서 발생한다”며
    “원청이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청노조를 없애야 할 존재로 적대시하기에 임단협에 매번 극단적 투쟁을 고민하게 된다. 노사 교섭 시스템이 자리잡으면 당연히 극한 대립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유럽상의·미국상의 모순 입장도 지적 나와

    노란봉투법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통과를 앞두고는 이 법이 시행되면 해외 기업이 한국에서 떠날 거란 주장이 부각됐다.
    주한유럽상공회의소가 지난달 28일 노조법 개정안 통과 시 “(일부 기업이) 한국 시장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유럽상의에 이어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암참)도 “한국 투자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는 내용이 주요 언론사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다만 유럽상의 측은 한겨레에 가정을 전제로 한 ‘철수’ 표현이 지나치게 부각됐다고 전한 바 있다.
    유럽상의가 입장을 밝힌 계기에 대해서도 “9월에 발간하는 백서에 ‘사용자 정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넣기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법안이 급물살을 타자 ‘백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 먼저 입장을 밝혀줄 수 있느냐’는 쪽으로 논의가 됐다”는 설명이다.

    과거 유럽상의가 한국 법제상 노동자 개념이 좁다며 개선을 요구했던 일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매일노동뉴스에 따르면 유럽상의는 6년 전인 2019년 한국이 한-EU FTA 규정을 어겼다며 “노조법 2조1호 근로자 개념이 좁아 화물운송 노동자 등이 노동자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어 한국 정부가 노동탄압을 한다는 주장을 폈다”고 했다.

    미국은 연방노동관계위원회가 ‘사업주가 고용한 근로자의 고용관계상 핵심적 사항 및 조건 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통제권을 보유하거나 통제력을 행사한 경우’ 단체교섭 의무를 지는 공동 사용자로 인정한다.


    익명 발언 근거로 기업계 반발을 전하는 기사도 문제로 지적된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30일 “개정안이 본회의에 오르게 되면서 기업들은 위기감을 넘어선 절망감을 토로”한다면서, 익명의 재계와 기업 관계자 발언 7건을 전했다.
    인용된 이들은 △대기업 A사 △대기업 B사△외국계기업 C사 △한 조선업계 관계자 △그룹 지주회사 소속인 한 기업 관계자 △한 철강업체 관계자 △투자나 사업 조정을 다각도로 검토 중인 한 기업의 노사 담당 관계자 △한 외국계 기업 관계자 △재계 관계자 등이다.

    안수찬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는
    “대립이 있는 중대한 이슈에서 당사자를 익명 인용해야 하는 경우는, 해당 대립으로 일방 피해를 입을 수 있어 보호가 필요할 때와 같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라며
    “이번 보도는 사측 입장을 그대로 전하는 내용으로 불이익이 예상된다고 보기 어렵다. 이를테면 고위 간부가 경영자 입장에 반하거나 노란봉투법에 찬성하는 경우도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럼에도 이처럼 익명 보도했다면 이를 통해 기자가 하고픈 말을 꾸미거나 조작, 윤색하려 했다는 독자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정영훈 부경대 법학과 교수는 노조법 개정안을 둘러싼 주된 보도 흐름을 “공포 마케팅 수준”이라고 총평했다.

    정 교수는 “이번 법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수많은 진전된 판례가 쌓인 결과”라며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자 개념을 확대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지배력’이라는 표현 자체가 일본의 확고한 판례 법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짚었다.

    정 교수는 “그럼에도 법이 개정되면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것처럼 보도하는 것엔 그 자체로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김춘택 사무장은 ‘노란봉투법 포비아’란 프레임이 역설적으로는 “참 잘 뽑은 제목”이라고 했다.

    “‘포비아’는 제노포비아, 호모포비아와 같이 혐오에 바탕한 공포를 의미한다.
    노사관계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어떻게 제도적 틀 안에서 교섭하느냐가 핵심인데,
    상대를 혐오의 대상으로 볼 경우 공포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7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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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8-03 01:43
    나)
    "하늘에 태극기만 가득" 1950년 보스턴 마라톤의 기적
    국립중앙박물관 광복80주년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 12월 28일까지
    김나영(nayple86)
    25.08.02


    손기정과 보스턴 마라톤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또 한 번의 쾌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무려 1, 2, 3위 자리를 전부 한국 선수들이 꿰찬 것이다.

    손기정 감독 아래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선수는 순서대로 1위부터 3위까지 차지했다.

    손 감독은 자서전에서
    "보스턴 하늘에는 태극기만이 가득했다.
    전세계 마라톤계는 또 한 번 한국 마라토너들의 우수성에 탄복했다"
    고 그날의 소감을 남겼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을 차지하고도 고개를 숙여야 했던 그가 감독이 되어 태극기를 단 선수들을 우승으로 이끈 것이다.
    두 번의 보스턴 마라톤 이야기는 손기정, 한국 선수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감동을 준다.


    ▲김구 선생의 ‘족패천하’(足覇天下) 글귀백범 김구 선생이 남긴 ‘족패천하’(足覇天下) 글귀가 전시회 한 켠에 적혀있다. ⓒ 김나영


    세상은 여전히 그를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1988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올림픽 준비로 굉장히 분주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단은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 역시 준비에 한창이었다.

    바로 주인공 손기정이다.

    손기정은 88서울올림픽 개막식 당시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섰다.
    그가 다시 한번 대한민국의 대표로 나선 순간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삼태극 문양 마스코트가 그려져 있었다.

    2002년 손기정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람들은 그와 그의 업적을 잊지 않았다.
    오늘날 세상이 그를 기억하고 있는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손기정기념재단은 2005년부터 현재까지 손기정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손기정기념관 운영과 손기정평화마라톤 개최이다.

    1987년 손기정이 다녔던 양정 중·고등학교(전 양정고보)의 옛 자리에 손기정체육공원이 만들어졌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곳에는 러닝트랙, 운동장, 도서관 등 다양한 문화·체육 시설이 있다.
    베를린 올림픽 우승 당시 손기정이 받아 온 참나무 묘목이 이곳에서 훌륭한 월계관 기념수로 자랐으니 한 번 쯤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손기정기념관 역시 이 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다.
    기념관은 손기정 탄생 100주년인 2012년 10월 14일에 개관한 이후 줄곧 그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상설 전시는 무료로 진행되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이번 손기정 특별전을 본 후 이곳을 찾으면 그의 인생에 대해 더 상세히 알아볼 수 있다.

    2005년 시작된 손기정평화마라톤대회는 매년 개최되고 있다.
    마라톤 거리에 따라 하프 코스, 10.5km 코스, 5km 코스로 나뉘어 진행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개인, 단체 모두 참가 가능하다.
    서울 상암, 잠실 등 매년 장소는 달라지니 참고하길 바란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는 오늘날 우리가 손기정을 기억하는 방식 중 하나다.
    이번 특별전은 당신이 몰랐던 새로운 손기정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손기정 선수가 기증한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대한민국 보물 제904호, 베를린 올림픽 우승 기념), 금메달과 월계관 등 총 18점의 다양한 전시품을 무료로 볼 수 있다.

    특히 청동투구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있으니 꼭 직접 가서 해설자의 설명을 듣기 바란다.
    오전 11시, 오후 1시에 상설전시관 2층 기증 1실로 가면 별도 예약 없이 자원봉사 해설자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손기정은 1936년 독일에 가기 전까지 태극기를 본 적이 없었다.
    올림픽 우승 직후, 베를린에서 안봉근(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사촌)의 집에 갔을 때 태극기를 처음 봤다고 한다.

    그가 먼 타국에서 태극기를 처음 마주하고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깨우친 것처럼,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손기정의 삶을 통해 나라가 있다는 감사함을 깨닫고 앞으로도 그의 정신을 이어 나가기를 바란다.


    ▲국립중앙박물관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 소개 스크린이번 특별전의 메인 소개 화면이다. ⓒ 김나영




    덧붙이는 글 | 손기정기념관 홈페이지, 손기정평화마라톤 홈페이지, 서울특별시 정원도시 서울(손기정체육공원 내용)에 나와 있는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51961&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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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8-03 01:40
    가)
    "하늘에 태극기만 가득" 1950년 보스턴 마라톤의 기적
    국립중앙박물관 광복80주년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 12월 28일까지
    김나영(nayple86)
    25.08.02


    ▲88올림픽 성화봉과 유니폼손기정이 들었던 성화봉과 그가 입었던 유니폼이 전시돼있다. ⓒ 김나영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우승을 차지해 시상식 단상에 오른 한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참나무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다.
    세월이 흘렀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손기정이다.

    지난 25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은 손기정을 주제로 한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를 열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조국을 가슴에 품고 세계를 달린 손기정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전시는 오는 12월 28일까지 올해 하반기 동안 진행될 예정이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8월이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온 것을 환영하며,
    이번 특별전을 토대로 그의 이야기를 재조명하고자 한다(25일 특별전에 직접 방문해 해설자의 설명 듣고 이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비극의 시대, 마라토너로 자질을 드러내다


    ▲이번 특별전에 전시된 베를린 올림픽 기념집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의 모습이 잘 담겨있다. ⓒ 김나영

    손기정은 1912년 8월 29일(음력)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박탈한 것이 1910년이므로 그는 일제강점기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스케이트처럼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년은 달리기를 선택한다.

    달리기에 대한 열정은 손기정을 1931년 조선 신궁대회로 이끌었다.
    훈련 지역 대표(평안북도 대표)로 5000m 대회에 참가한 그는 2위를 차지한다.

    손기정과 마라톤의 만남은 이 대회에서 시작된다.

    그는 이 대회에서 처음 마라톤을 접했기 때문이다.
    5000m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리는 종목이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낀 소년은 이때부터 마라톤 인생을 시작한다.

    다음 해인 1932년 동아일보 주최 경영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손기정은 마라토너로 처음 이 경기에 참여했고 2위로 입상한다.
    당시 20세였던 그는 육상 명문 양정고보(양정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여러 대회에서 마라톤 선수로 두각을 드러낸다.

    1935년 그는 마라톤 대회에서 연달아 우승을 하며 실력을 입증했다.
    일본 도쿄 순회 마라톤코스 개설기념대회, 조선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것이다.
    1936년 마침내 그는 베를린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다.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지만


    ▲ 특별전 입구 영상 중 일부저 앞을 지나가면 결승선을 통과하는 손기정 선수의 감정을 느껴볼 수 있다. ⓒ 김나영


    1936년 8월 9일, 베를린에서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 경기가 진행됐다.
    결승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선수는 다름 아닌 손기정이었다.
    두 번째로 영국 선수인 어니 하퍼가 결승선을 통과했고,
    남승룡이 세 번째로 들어왔다.
    남승룡은 손기정과 함께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또 다른 한국인 선수였다.

    2시간 29분 19.2초

    이날 손기정 선수가 세운 기록이다.
    당시 공식 세계 기록이었다.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그가 달리기에 대한 열정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노력이 세계 무대에서 결실을 이룬 순간이었다.

    세계 언론사들은 올림픽 현장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는 경기 당시 손기정 선수의 모습을 묘사해 신문 기사로 내보내기도 했다.

    1936년 8월 10일 자 기사에선 결승선 앞에 다다른 손기정의 모습을
    "그의 얼굴에는 긴장이나 고통의 기색조차 없었고 표정은 마치 대리석 가면처럼 굳어 있었다"고 보도했다.
    "오직 그는 앞만 보고 달렸고 관중들의 엄청난 환호조차 그를 흔들 수 없었다"라는 대목에서 굳건하게 달리는 손기정 선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손기정과 남승룡, 두 한국인 선수가 나란히 시상대에 오르자 등 우리나라 언론사들 역시 이 사실을 일제히 보도했다.
    그러나 언론사에 실린 시상대 위 한국인 선수들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1936년은 여전히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당당히 한국인으로서 세계 무대에 설 수 없었다.

    가슴에는 일장기가 달려 있었고, 마라톤 시상식이 진행된 스타디움에는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졌다.
    당시 언론사에 실린 사진을 보면 손기정과 남승룡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역시 손기정과 남승룡의 이야기를 대서특필로 신문에 실었다.
    그런데 해당 기사 속 손기정 선수는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있지 않았다.
    당시 집필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이 일장기를 말소한 것이다.

    1936년 8월 24일 자 일본의 신문 기사와 8월 25일 자 기사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이 일로는 무기한 정간됐고, 일장기 말소에 참여한 이길용 기자, 이상범 화백 등은 연행 및 구속됐다.


    올림픽이 끝난 뒤 손기정 선수의 삶은 어땠을까?

    참나무 묘목으로 일장기를 가렸던 손기정 역시 일제의 제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올림픽 이후 1945년 해방을 맞이하기 전까지 국제 대회에 설 수 없었다.
    일본이 그의 국제 대회 출전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불이익에도 손기정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축하객들을 만나며 '손긔졍'이라는 한글 사인과 함께 한반도 모양을 그려주거나 'KOREA'라고 자신의 국적을 표기했다.

    1936년 8월 15일 그가 서명한 엽서는 특별전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에서 처음 공개됐다.

    두 번의 보스턴 마라톤, 그의 꿈이 이루어지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
    그러나 그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감독으로 후배 양성에 나섰다.

    광복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미국 보스턴 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서윤복이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 우승은 감독 손기정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다.
    서윤복의 우승은 태극기를 달고 이룬 최초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손기정은 자서전 (1983)에서
    "11년 전 잃었던 내 조국을 다시 찾은 듯한 심정이었다"며
    "서윤복 군이 부러웠다. 태극기를 달고 뛸 수 있는 그는 얼마나 자랑스러운 존재인가"라고 남겼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 무대에 서야 했던 손기정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두 번의 보스턴 마라톤의 쾌거가 담긴 뉴욕타임스 기사전시회에서 실제로 보면 가슴 벅찬 경험을 할 수 있다. ⓒ 김나영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일화가 담겨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보스턴 우승을 축하하며 '족패천하'(足覇天下)' 글귀를 적어 서윤복에게 선물한다.

    손기정 자서전에 따르면, 서윤복은 이 글귀를 가보처럼 액자에 넣어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족패천하는 '발로 천하를 제패하다'라는 의미이다.

    김구 선생이 남긴 이 글귀는 이번 전시 제목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의 모티브가 됐다. 한편, 서윤복의 이야기는 2023년 9월 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51961&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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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dbred (@tradbred)
    2025-08-02 23:40
    일본에게 처참하게 당한 지도자... 그가 꺼낸 '비장의 카드' 실체
    [정권교체의 명장면들] 전쟁 책임을 떠안고 실각한 유성룡
    김종성
    25.08.02

    선조 임금은 임진왜란 초반에 북쪽으로 피난 가기에 바빴다.
    이 때문에 그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군주의 이미지를 갖게 됐다.
    그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그가 도성을 버린 1592년 6월 9일(음력 4.30)에 극적으로 표출됐다.

    수정판인 은 "어가가 나가자, 난민이 대거 일어났다"라며 "경복·창덕·창경의 3개 궁이 일시에 다 불탔다"라고 기술한다.

    선조는 그처럼 분노의 대상이었지만, 임금 자리는 무사히 지켰다.
    권력욕이나 뻔뻔함으로도 설명될 만한 일이지만, 그것으로는 다 되지 않는다.

    희생양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인당 지도자인 서애 유성룡이 책임을 떠안은 것이 선조를 지키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었다.


    출세 가도 달린 유성룡

    유성룡은 임진왜란 50년 전인 1542년에 경상북도 의성에서 출생했다.
    그가 과거시험에 최종 합격한 시점은 보수세력인 훈구파가 역사 무대에서 퇴장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22세 때인 1564년에 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를 통과하고, 2년 뒤 대과에 급제했다. 이듬해인 1567년에 선조 임금이 즉위하면서 개혁세력인 사림파(유림파)의 세상이 열렸다.

    유성룡은 의성 북쪽인 안동을 기반으로 했던 퇴계 이황(1501~1570)의 제자다.

    이황을 따르는 사림파 선비들은 동인당을 구성했다.
    이들은 동인당 내에서 남인 계열을 형성했다.

    유성룡은 이황의 제자였기 때문에 훈구파 정권하에서라면 탄압이나 차별을 받기가 쉬웠다. 그러나 운 좋게도 과거급제 이듬해부터 훈구파의 퇴장을 목격하게 됐다.


    장관급이 되기 전에 그는 상주목사 같은 목민관도 역임했지만, 승문원·예문관·춘추관·홍문관·사간원·사헌부 같은 학자 스타일의 관청에 주로 근무했다.
    임금이 주는 유급 휴가를 받고 학문에 전념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누리기도 했다.

    15세기 후반부터 훈구파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단일 대오를 유지했던 사림파는 훈구파를 퇴장시킨 뒤에는 자신들끼리 당쟁을 했다.
    유성룡은 그 당쟁의 결과로 자신이 속한 동인당이 1582년 이후에 서인당을 제치고 집권당이 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1589년에는 같은 당 소속의 정여립이 역모사건에 휘말리면서 동인당이 정권을 잃고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화를 피했다.

    선조는 서인당의 정철을 앞세워 동인당을 무력화시키면서도 유성룡과 이산해 같은 동인당 인사들을 보호했다.
    서인당이 너무 과한 힘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2년 뒤인 1591년, 정권은 다시 동인당에게 돌아갔다.
    서인당 지도자 정철이 눈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다가 임금의 진노를 사면서 서인들이 타격을 입었다.

    이는 서인들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동인당이 남북으로 분당되는 계기가 됐다.

    정당해산심판제도가 있었다면 서인당 해산심판이라도 추진했을 만큼 강경 대응을 주문한 동인들은 북인당이 되고, 크게 보면 정치 동업자인 서인들에 대한 온건 대응을 촉구한 동인들은 남인당이 됐다.

    정철이 선조의 미움을 산 직후에는 북인 계열인 이산해가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남인당인 유성룡이 집권하게 된다.
    북인 계열은 정여립과 가까웠다.
    그래서 북인들은 1589년에 큰 타격을 입었다.
    유성룡 같은 남인들은 화를 적게 입었고, 인적 손실이 적었다.
    이 점은 처음에는 이산해가, 나중에는 유성룡이 정국을 주도한 한 가지 원인이다.


    전쟁 피해 책임을 유성룡에게 떠넘긴 선조

    또 다른 원인은 선조의 정국운영 방식과 관련됐다.
    선조는 강경파들을 경계했다.
    강경파는 타 정파와의 공존에 대해 열려 있지 않았다.

    선조는 특정 당파가 집권당이 되더라도 다른 당파들에게 기회가 보장되는 시스템을 선호했다.
    특정 세력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런 구도를 실현시키자면 북인당보다는 남인당이 집권하는 게 선조에게 유리했다.

    그런데 '범'동인당 세력인 유성룡 정권을 위협하는 요인이 동쪽에 있었다.
    1590년에 일본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시선을 열도에서 대륙으로 옮기면서 1591년에 출범한 유성룡 정권은 위기를 맞게 됐다.

    조선은 유성룡 정권 출범 얼마 전부터 일본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파견된 것은 그 때문이다.

    1589년 12월 25일(음력 11.18)에 사신으로 임명된 서인당 황윤길과 동인당 김성일은 1590년 4월 9일(음력 3.6)에 도성을 떠났다가 1591년 3월 25일(음력 3.1) 조정에 돌아와 업무를 보고했다.
    서인 정권이 왕성할 때 떠난 사신단이 서인 정권이 기울어지는 시기에 복귀했던 것이다.

    황윤길과 김성일 둘 다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우려했다.
    하지만 이들은 소속 당파를 의식해 차별적인 보고를 내놓았다.
    황윤길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고, 김성일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동인당 김성일이 그렇게 보고했다고 해서,
    범동인당 정권이 대일 방어를 태만히 했던 것은 아니다.

    육군본부 군사연구소가 펴낸 개설 편은 "일본의 침공 가능성을 느낀 조선은 보다 강화된 군사 대비책을 강구하였다"라며 호남과 영남의 성벽을 정비하고 영남에 참호를 설치했으며, 도(道) 단위의 방위 시스템인 제승방략체제를 탈피해 진관체제(군현 단위)로 복귀하려 했다는 점 등을 열거한다.

    이런 조치들은 유성룡 정권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대비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공을 막는 데 한계가 있었다.

    건국 이래로 조선군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여진족을 겨냥한 대북 방어에 최적화돼 있었다. 위 조치들은 그런 시스템을 전제로 한 것들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열된 일본열도를 통합해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조선이 그런 에너지에 맞설 적응력을 갖추는 데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시간을 주지 않고 신속히 침공을 단행했다.

    1592년 5월 23일(음력 4.13), 일본열도를 대표하는 16만 대군이 부산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기병 중심인 여진족과 싸우는 데 익숙했던 조선군은 보병 중심인 일본군과의 전투에 얼른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6월 9일 선조가 도성을 탈출하고 경복궁 등이 불타게 됐다.

    임금의 도성 탈출로 인해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 시점에서 선조가 꺼내 든 비장의 카드가 있다.

    어가가 도성을 떠나 개성에 머물 때인 6월 11일(음력 5.2),
    그는 만류하는 신하들을 가까스로 설득해가며 유성룡 파면을 관철시켰다.

    음력으로 이 날짜 에 따르면,
    선조는 '국방을 느슨히 했다', '미리 막지 못하고 적들이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하게 만들었다', '나는 일본을 경계했는데, 유성룡은 그렇지 않았다', '유성룡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칠까봐 국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등등의 말을 하며 파면을 밀어붙였다.

    그런 뒤 선조는 서인당 윤두수에게 국정 주도권을 넘겼다.
    도성을 잃은 혼란한 상황에서 남인당 정권에 책임을 떠넘기며 집권당을 교체했던 것이다.

    정철 실각으로 정권을 빼앗긴 서인당은 이로써 1년 만에 재집권하게 됐다.
    당쟁사를 정리한 이건창(1852~1898)의 은 윤두수와 정철이 중용되면서 "서인들이 점차 진출하게 되었다"라고 알려준다.

    국정을 이끌던 유성룡이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으니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지는 것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언제라도 집권당 교체를 단행할 힘은 선조에게 있었다.
    왕권이 비교적 강한 상태에서 유성룡이 조정을 이끌었을 뿐이다.

    유성룡에게 과도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했다.

    선조가 한양 궁성에 있을 때 그를 실각시키고 집권당을 교체했다면,
    모양새가 그나마 나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조는 피난 도중에 유성룡을 파면했다.
    그것도 선조에 대한 비난 여론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그렇게 했다.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같은 정권교체에 힘입어 선조는 책임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게 됐다.

    선조는 희생양을 만드는 방식으로 자리를 보전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52087&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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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8-02 02:47
    ((이런 새..끼는 그냥 재판없이 처형 하는게 더 나을거 같다. 세금도 아끼고...))
    [사설] 윤석열 추한 모습, 언제까지 봐야 하나
    수정 2025-08-01

    김건희 특검팀이 1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강제구인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특검팀이 서울구치소를 찾아 체포영장을 집행하려고 했지만, 윤 전 대통령이 ‘속옷 차림으로 누워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고 한다.

    명색이 전직 대통령이 체면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잡범처럼 굴고 있다.

    이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뒀던 국민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민중기 특별검사팀은 이날 문홍주 특검보와 검사, 수사관이 서울구치소를 방문해 윤 전 대통령에게 특검 출석을 권유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수의도 입지 않고 방바닥에 누운 상태에서 ‘못 나가겠다’며 버텼다고 한다.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을 전직 대통령이 몸소 보여준 것이다.

    검찰총장 시절에는 온갖 번지르르한 말로 법 집행의 엄정함을 강조하더니,
    막상 자신이 피의자가 되고 보니 법 집행에 따를 생각이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전직 대통령으로서 특혜를 누리고 싶은 건가.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유권자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윤 전 대통령은 이날 특검팀이 돌아간 뒤 곧바로 변호인을 접견했다.
    특검 조사는 물론 내란 재판에도 나가지 않으면서 변호인을 만날 이유가 뭔가.

    더욱 가관인 건 구치소 쪽의 태도다.
    윤 전 대통령은 구속 기간 동안 무려 348명을 접견했고, 접견 시간은 395시간이 넘었다.

    특히 접견이 구치소 근무시간을 초과해 야간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주말에도 있었다고 한다.

    특별접견 횟수가 규정을 초과했는데도 교정당국이 회의를 거쳐 이를 허가하기도 했다.

    접견 장소도 검찰과 경찰이 조사 때 사용하는 조사실이 제공됐다.
    이런 모든 것들은 일반 수용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는 명백한 특혜다.

    이런 특혜가 왜 제공됐는지 김현우 서울구치소장은 해명하고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특검은 윤 전 대통령에게 ‘다음에는 물리력 행사를 포함해 체포영장 집행을 완료하겠다’고 고지했다고 한다.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 시한은 오는 7일까지다.

    김건희 특검은 윤 전 대통령 강제구인을 계속 시도하되, 조사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도 대비해야 한다.

    12·3 내란과 윤 전 대통령 부부의 비리를 제보하거나,
    공범이라도 수사에 기여하면 선처하는 내용으로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내란 특별법’을 통과시키는 것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내란 세력에 대한 신속한 단죄를 위해 고삐를 바짝 당길 때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12112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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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8-02 02:32
    ((한미 FTA 규칙을 깬 날강도 트럼프를 사살해야!!!))
    [사설] 자유무역의 종언을 고한 한미 관세 협상
    민중의소리
    발행 2025-08-01

    7월 31일 새벽,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타결되었다고 발표했다.
    당초 8월 1일부터 미국이 예고한 25%의 상호 관세는 15%로 낮춰졌고, 한국 자동차에 대한 관세 역시 15%로 조정되었다.

    반도체와 의약품 등 주요 품목의 경우, 추후 관세 부과가 예고되어 있으나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받기로 했다.

    협상의 핵심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 조성으로, 이 중 1,500억 달러는 한국 조선업 특화 펀드로, 나머지 2,000억 달러는 반도체, 바이오 등 전략 산업 분야에 투입된다.

    정부는 농축산물 추가 개방을 막아냈다고 강조했지만,
    이번 협상은 소기의 성과에 앞서 변화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협상은 미국의 노골적인 강도짓에 가까웠다.

    기존 FTA의 주요 약속은 깨졌고, 관세와 투자규모는 미국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오락가락했다.

    미국은 스스로 작성한 규칙을 짓밟고, “내가 고른 사업에만 투자하라”는 식의 ‘트럼프 오너십 체제’를 강요했다.

    수익의 90%를 가져가겠다는 상무부의 주장까지 나왔고, 한국은 그 수익 구조조차 명확히 알지 못한 채 “비망록”에 기대며 비공식적인 이해만 확보한 상태다.

    더는 이것이 동등한 주권 국가 간의 협상이라 보기 어렵다.

    이번 타결은 단지 한미 간의 양자 협상이 아니라, 전후 70년간 유지돼 온 자유무역 통상질서의 공식적 종언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WTO는 이미 상소기구 무력화로 기능 정지를 선언했고,
    FTA는 미국의 일방적 관세 부과로 유명무실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드러난 것은 ‘규칙 기반 질서’가 아니라 ‘힘 기반 질서’, ‘법치’가 아니라 ‘지정학적 강압’이었다.

    미국은 이익이 발생하면 90%를 가져가고, 리스크는 한국이 떠안으며, “내가 선정한 사업”만 수용하라는 황당한 거래를 내민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례는 앞으로 미국과의 경제 관계가 일방적, 종속적 관계로 전환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른바 ‘경제동맹’이라는 미명 아래, 미국의 공급망 안으로 한국을 끌어들이고,
    자국 산업 보호와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동맹국들에게 무차별적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역시 5,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했지만, 구체적 내용은 베일에 싸여 있고, 수익 배분도 논란만 커지고 있다.


    이제는 착시에서 벗어날 때다.

    한국이 과거처럼 ‘규범’과 ‘국제법’이라는 명분에 기대 통상 외교를 설계하는 시대는 끝났다.

    FTA, WTO 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통상 패러다임, 정치-산업-안보가 결합된 복합적 글로벌 경제전쟁의 한복판에 들어선 것이다.


    정부는 역대 정부와 달리 미국에 끌려다니는 수동적 전략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럽연합, 중국, 동남아 등과의 다극적 통상전략을 강화하고,
    국내 산업정책의 자율성과 전략적 선택권을 회복해야 한다.

    조선펀드와 같은 분야별 특화 산업전략은 강화하되, 펀드 구조와 수익 귀속,
    위험 분산 방식에 대해 국민에게 보다 투명하게 설명하고 통제권을 확보해야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있다.

    법과 규범이 아닌 힘과 정치가 중심이 되는 이 거친 지형 속에서,
    한국은 자주성에 기초한 생존 전략을 다시 써야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 시작이다.



    https://vop.co.kr/A000016763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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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8-02 02:21
    [이태경의 토지와 자유] 윤석열의 ‘부자감세’를 돌리려면 종부세도 정상화시켜야
    이태경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발행 2025-08-01

    이재명 정부가 3년 만에 윤석열 정부의 ‘부자감세’를 되돌리기 위한 세제 개편에 시동을 걸었다. 전임 정부의 감세정책 원상복구는 사실상의 증세를 의미한다.

    정부의 이번 세제개편은 법인세를 윤석열 정부 이전으로 되돌리고,
    양도세를 내는 대주주의 기준도 원상복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거기에 자본시장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해 배당 분리과세도 시행한다.
    정부는 이번 세제개편을 통해 8조 원가량의 추가세수를 기대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부동산 관련 과세 개선은 중장기 과제로 돌릴 것으로 알려졌는데,
    부동산 시장 하향안정화를 위해서는 윤석열 정부가 초토화시킨 종부세라도 속히 정상화시킬 필요가 있다.


    법인세 최고세율 복원과 대주주 기준 정상화에 나선 이재명 정부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은행회관에서 세제발전심의위원회를 열고 법인세를 원상복구하는 내용 등을 담은 2025년 세제개편안을 확정했다.
    이재명 정부가 세제 기틀을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정책 청사진을 담는다는 의미에서 ‘세법개정안’ 대신 ‘세제개편안’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정부는 이번 세제개편에서 ‘세수기반 확충’에 방점을 찍었다.
    3대 세목(법인세·소득세·부가가치세) 중에 법인세부터 수술대에 올렸다.
    소득세와 부가세는 이해관계자들이 너무 많아 폭넓은 조세저항 등으로 쉽게 손대기 어려운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현행 법인세는 4개 과표구간에 따라 2억 원 이하 9%, 2억 원 초과~200억 원 이하 19%, 200억 원 초과~3000억 원 이하 21%, 3000억 원 초과 24%의 누진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첫해인 2022년 세제개편으로 일괄적으로 1%포인트씩 인하된 결과다. 이재명 정부는 이들 4개 구간의 세율을 모두 1%포인트씩 올리기로 했다.

    상장주식 양도소득세 부과 기준도 강화된다.
    현재는 종목당 50억 원 이상 보유한 대주주만 주식 양도세를 내는데, 앞으로는 10억 원 이상 보유자도 세금을 납부하게 된다.
    이 역시 윤석열 정부 당시의 완화분을 그대로 원상복구하는 조치다.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도입 조건부로 인하된 증권거래세율도 현재의 0.15%에서 2023년 수준인 0.20%로 환원된다.
    현재 코스피 시장에는 0% 세율(농어촌특별세 0.15% 별도)이 적용되고 코스닥 시장 등은 0.15% 수준이다.
    정작 금투세 도입이 무산된 상황에서 거래세만 인하된 기형적인 세제를 바로 잡겠다는 의미도 깔렸다.

    조세형평성을 고려해 ‘과세 사각지대’였던 감액배당에는 과세가 이뤄지고, 금융·보험업체의 이익 1조 원 초과분에는 교육세 세율을 0.5%에서 1.0%로 0.5포인트 인상한다.

    교육세가 도입된 1981년 이후 45년 만에 처음으로, 과세표준 구간을 신설하면서 기존보다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것이다.

    최근 이 대통령이 주택담보대출 등을 통해 조단위 수익을 올리며 ‘손쉬운 이자 장사’를 해왔다고 비판한 대형 금융회사들을 겨냥한 조치로 해석된다.

    이재명 정부는 이번 세제개편으로 5년간 8조 1672억 원(전년비 기준·순액법)의 세수 증대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법인세가 4조 5815억 원, 증권거래세가 2조 3345억 원, 교육세를 비롯한 기타 세목이 1조 2880억 원씩이다.

    소득세는 신용카드 소득공제 확대 등으로 2296억 원가량 세수가 줄어든다.
    기준연도 기준으로 계산(누적법)한 세수 효과는 5년간 35조 6000억 원이다.

    윤석열 정부의 ‘종부세 죽이기’가 이른바 ‘한강벨트’를 불타오르게 만든 원인 중 하나


    이재명 정부가 대한민국을 파탄으로 몰고 간 전임 윤석열 정부의 부자감세 기조를 백지화하고 원상회복시키는 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아쉬운 대목은 부동산 과세 정상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보유세 정상화에 대한 메시지가 일절 없다는 사실은 매우 아쉽다.
    보유세만큼 부동산 가격 안정화와 부동산 자산 양극화 완화에 효과가 큰 세금이 없는데도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보유세의 중핵은 아무래도 종합부동산세(이하 종부세)일 수 밖에 없다. 주지하다시피 윤석열 정부는 종부세 형해화에 올인한 정부였다.

    윤 정부는 종부세 과세기준을 2022년 1세대 1주택자의 경우 공시가격 12억 원 초과(공시가격 현실화율 70% 적용 시 시세 17억원 이하 주택 소유자는 종부세 대상에서 제외), 다주택자의 경우 9억 원 초과 시로 상향 변경해 부자들의 세 부담을 낮춰준 바 있다.

    또한 윤 정부는 종부세 세율 인하, 조정대상지역 2주택 및 과표 12억원 이하 3주택자 중과 폐지, 공정시장가액비율 60% 하향 유지, 등록임대주택 합산 배제 등의 방법을 통해 종부세를 누더기로 만들었다.

    윤석열 정부의 종부세 죽이기에 힘입어 종부세 과세인원과 과세금액은 격감했다.
    종부세(주택, 토지) 과세 인원은 2022년 131만 명에서 2024년 55만명으로 감소했고, 종부세액은 2022년 7조 5000억 원에서 2024년 5조 원으로 격감했다.


    종부세가 형해화됨에 따라 특히 고가주택이 몰려 있는 이른바 한강벨트(강남 3구, 강동구, 마포구, 용산구, 성동구, 광진구, 양천구 등)의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폭등했다.
    전세라는 레버리지에다 은행에서 거액 대출을 받아 한강벨트에 위치한 ‘똘똘한 한 채’를 구입하려는 수요는 많은데 기대수익률을 낮출 종부세마저 무력화 되었으니 투기의 불길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종합주가지수 5000포인트 달성을 위해서라도 보유세 정상화가 긴절해

    다행히 초고강도 대출규제를 핵심으로 하는 6·27대책으로 서울 전역으로 번지던 투기의 불길은 일단 잡은 상태다.
    6·27대책은 대책이 투사된 타이밍과 시장의 예상을 아득히 상회한 강도라는 두 가지 요소를 구비했기에 강력한 정책효과를 발휘 중이다.
    이재명 정부를 평가해 줄 대목이다.


    중요한 건 여기서 멈춰선 절대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재명 정부는 우선 종부세를 윤석열 정부 이전으로 돌리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종부세 기본공제 금액을 정상화하고, 세율을 정상화하고, 공정시장가액비율을 정상화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종부세 정상화 천명은 윤석열 정부의 부자감세를 백지화시키는 중대한 업적일 뿐 아니라 부동산 시장 햐향 안정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이재명 정부가 그토록 희망하는 자본시장 활성화나 임기 내 종합주가지수 5000포인트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동산에 쏠린 자금과 금융이 주식 등 자본시장으로 대거 들어와야 한다.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부동산 금융에 대한 강력한 대출관리와 더불어 종부세 정상화를 통한 부동산 기대수익률 하락 견인이 필수적이다.

    때마침 이재명 정부가 이번 세제개편안에 고(高)배당을 유도하기 위한 ‘배당소득 분리과세’를 넣은 만큼 종부세 정상화에 필요한 명분은 축적됐다고 보인다.

    이재명 정부가 조만간 종부세 정상화 로드맵을 밝힐 것을 기대한다.



    https://vop.co.kr/A000016763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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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9
    tradbred (@tradbred)
    2025-08-02 02:01
    b)
    세계를 굴복시키려는 트럼프의 횡포... 미국의 수상한 조짐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제정'과 유사한 트럼프 체제... 미국 시민들은 '공화정' 지킬 의지 갖고 있나
    임상훈
    25.08.01


    현지 시간 7월 30일 타결된 한미 무역협상 역시 큰 틀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의 주요 수출 품목에 대해 15% 관세가 부과되었으며, 이는 초기 25% 부과 경고에서 낮춰진 수치지만 미국의 예정된 전략적 인하이며,
    한국에는 여전히 상당한 압박이다.

    이번 협상은 한국이 정권 교체 직후 정치적 공백과 준비 부족이라는 이중의 약점을 안은 채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일방적이다.
    특히 전 정권이 협상에 필요한 사전 검토와 전략 수립을 소홀히 한 탓에,
    새 정부는 시간적 여유 없이 압박 협상에 임해야 했다.

    정권 교체기의 연속성 부재는 분명 한국 정치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미국은 이를 기회로 삼아 협상의 외양 아래 본질적으로는 강제적 복종을 관철시켰다.

    이는 동맹을 가장한 제국의 폭력이며,
    무력한 상대국을 상대로 한 계산된 압박 외교였다.

    제국주의적 횡포가 과연 미국의 국익에 부합할지는 미지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현상이 하나의 체제가 말기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이미 종언을 고하고 있으며,
    그 말기적 증상 속에 세계는 신음하고 있다.


    자유의 언어로 소비에트를 해체했던 미국은 이제,
    'United Soviet of America'라고 불려도 과장이 아닐 만큼 위태로운 선을 넘나들고 있다.

    그것은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내부의 피로와 그 피로 위에 자발적으로 쌓인 퇴행적 선택의 결과다.


    제정은 언제나 피로한 자유를 틈타 돌아온다.
    문제는 시대가 제정을 부르느냐가 아니라, 시민이 여전히 공화정을 지킬 의지를 갖고 있느냐다.

    스스로를 통치하려는 자의 고단한 결심만이, 제정의 유혹을 막아낼 마지막 벽이기 때문이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530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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